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조선 화원들은 어떤 그림 그렸나

구름위 2013. 6. 19.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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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의 산천과 풍속을 화폭에 담다

 

◇단원 김홍도의 ‘무동’

 

조선의 문화예술 분야에서 큰 변화는 18세기 이후 일어났다. 영조, 정조 시대에 들어서면 중국에서 유행한 남종 문인화를 우리의 고유한 자연과 풍속에 맞추어 토착화하려는 화풍이 일어났다. 이른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가 그것이다. 진경문화 유행의 배경에는 조선 중화사상이 큰 몫을 했다. 이제껏 오랑캐라 멸시하던 청나라에 패배하여 왕이 항복까지 한 정치적 치욕을 문화적으로 회복하고, 문화의 중심은 명에서 조선으로 이어졌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그림에서 진경 문화의 주역은 겸재 정선이었다. 몰락한 양반 출신이었던 정선은 인근에 살던 안동(장동) 김씨의 후원을 받으면서, 자신이 살았던 인왕산 등 서울 주변의 수려한 경관과 금강산의 모습 등을 독특한 필치로 그려 넣었다. 정선이 그린 서울 도성과 한강 일대의 모습은 마치 오늘날 사진작가가 당시의 모습을 찍어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정선의 뒤를 이어 산수화와 풍속화의 새 경지를 열어 놓은 화가는 화원 출신의 화가 김홍도와 신윤복이다. 김홍도는 정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아 궁중 화가의 중심인물이 되어 화성행차와 관련된 병풍과 행렬도를 비롯해 국가의 행사도와 각종 궁중 풍속화 제작에도 참여하였다. 프랑스에서 나폴레옹 집권기에 그의 치적을 화폭에 담았던 궁정화가 다비드처럼, 김홍도 역시 정조의 총애 속에 당대의 생활상과 국가의 주요 행사를 기록화로 담았던 것이다.

 

김홍도는 일반 사대부들의 감상을 위한 신선의 모습이나 산수화도 많이 그렸지만, 그의 그림의 백미는 무엇보다 서민 생활상을 담은 풍속화이다. 대장간, 씨름, 서당 풍경, 집짓기, 추수 등 그의 풍속화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 그 자체를 표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홍도와 비슷한 화풍을 지닌 풍속화가 김득신, 김석신 형제도 정조대 화원으로 활약하면서 사대부들의 사랑을 받았다. 
 

김홍도와 같은 정조 시대에 활약한 신윤복은 주로 도시인과 부녀자의 풍속을 감각적이고 해학적인 필치로 묘사하여 풍속화의 또 다른 지평을 열었다. ‘바람의 화원’이라는 소설과 드라마, 영화에서는 김홍도와 신윤복의 관계를 스승과 제자로 설정하고 있지만 기록상으로는 별다른 관련이 없다. 신윤복은 아버지 신한평과 함께 부자가 화원으로 활약했으나, 그에 관한 기록은 19세기 오세창이 지은 ‘근역서화징’이라는 책에 짧게 전한다. 이러한 기록의 부재는 신윤복에 대한 갖은 상상력을 더해 아예 남장 여인으로까지 이르게 됐다.

 

◇혜원 신윤복의 ‘청금상련’.

 

김홍도와 신윤복 이 외에 18세기 조선 화단을 풍요롭게 장식한 화가들은 심사정, 변상벽, 최북 등이었다. 사대부로서 그림을 잘 그린 화가로는 이인상, 강세황 등이 손꼽힌다. 한편 민간에서는 민화가 유행하였다. 그림 수요가 늘면서 장시를 떠돌아다니던 화가들은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하였다. 문자도, 까치호랑이, 책거리 그림 등 민간 풍속을 담은 내용이 민화의 주류를 이루었다.

 

글씨 분야에서도 우리 것에 대한 애정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전까지 중국 글씨를 모방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동국진체’라 하여 우리 글씨를 독창적으로 쓰는 사조도 유행하였다. 윤순, 이광사 등이 이 분야에 일가를 이루었으며, 김정희의 추사체는 동국진체의 흐름을 계승한 바탕 위에서 청의 학문을 수용하여 완성한 서체로 이해된다.

 

#2. 기록을 만드는 역사가 또는 사진작가

 

우리는 조선시대 그림하면 김홍도와 신윤복 등의 풍속화를 떠올리지만 실상 주요 기록화와 초상화 등은 화원들의 붓끝에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화원은 국가의 공식기구인 도화서(圖畵署)라는 관청에 소속되어 그림 그리는 일을 전문으로 하였던 사람들을 말한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그림을 그려서 생계를 꾸려 나가는 미술가, 화가인 셈이다.

 

화원들의 활동은 도화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대개는 국가에 필요한 실용적인 그림이나 기록화를 그리게 되었다. 화원 이외에 화가를 부르던 명칭으로는 화공(畵工), 화사(畵師) 등이 있었다. 도화서는 조선 초기에는 도화원이라 불려졌으나, 격을 낮추는 과정에서 도화서가 되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종6품 관청으로, 제조 1인, 별제 2인 외에 잡직으로 화원 20인이 있었다. 정조 시대에 편찬된 ‘대전통편’에는 화원 수가 증원되어 30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담졸 강희언의 ‘인왕산도’.

 

화원들은 왕이나 명망가들의 초상을 그렸으며, 지도를 제작하는 일도 국초부터 화원들 몫이었다. 또한 기계류와 건축물의 설계도, 책의 삽화, 외교사절을 수행하면서 외국의 풍물을 그리는 일도 화원들이 담당했다. 즉 화원들은 오늘날 기록을 찍는 사진사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결혼식, 장례식, 궁중 잔치 등 국가의 주요행사가 거행되면 ‘의궤’를 제작했으며, 의궤에는 행사 장면이나 기물 등을 첨부하였다. 물론 그림 제작은 화원들이 담당하였고, 의궤에는 그들의 실명을 기록하였다. 이들에게 책임감과 함께 자부심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왕의 혼례 의식을 그린 ‘가례도감의궤’의 끝부분에 그려진 반차도에는 결혼식에 동원된 사람과 말의 모습, 복장과 깃발 등 당시의 모습이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채색으로 표현된 그림은 선명도가 뛰어나 오늘날에도 생생한 모습을 띠고 있는데, 이는 물감의 재료가 식물이나 광물에서 채취한 천연 재료여서 그 생명력이 오래갔기 때문이었다. 1866년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 외규장각에 소장된 각종 도서 중에서도 유독 의궤류만을 집중적으로 약탈한 것은 의궤에 그려진 채색그림이 지닌 가치와 예술성이 눈에 번쩍 띄었기 때문일 것이다.

 

화원들은 조선시대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된 지도 제작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조선시대 지도 중에는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 많다. 조선 후기 우리 산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진경산수화가 널리 유행하면서, 이러한 화풍은 지도 제작에도 반영되었다. 18세기 서울의 모습을 그린 ‘도성도’는 세련된 진경산수 화풍으로 도성 주변의 산세를 아름답게 그려내 뛰어난 예술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3. 화폭에 담긴 조선의 사회상

 

대원군이 집권하고 있던 시절인 1872년 전국 460여 군현의 모습을 그린 지도는 지역별로 제작되어 지역마다 독특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 중 가장 회화적으로 그려진 전라도의 지도들은 음양오행 사상에 입각하여 색채를 적절하게 조화시켰으며, 예술적 가치도 가장 뛰어나다. 이들 지도에는 당시의 사회 모습이 영상자료처럼 담겨 있다. 대원군 시대의 국가정책인 쇄국정책이 지도에 반영되어 작은 군현에 이르기까지 척화비를 그린 모습이나, 남원 지도에 과장되게 표현된 광한루와 오작교, 해남과 진도의 지도에 표시된 거북선 모습, 천안 지도의 관아건물에 표시된 태극무늬 등은 130여년 전 현장의 모습을 직접 보는 듯한 착각을 안긴다. 조선시대의 화원들은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개인적인 작품 활동보다는 의궤나 지도 제작과 같은 국가 공식 행사에 참여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연행사나 통신사와 같이 중국이나 일본으로 가는 사신단 명단에는 화원이 꼭 포함됐다. 화원들이 남긴 일반 감상화는 국가와 궁중의 각종 행사에 동원되고 남은 시간에 자신의 기량을 키우는 방편으로 그린 것이 많았다. 
 

◇영조의 혼례의식을 담은 ‘가례도감의궤’ 일부. 조선 도화서 화원들은 왕실에 소속돼 결혼, 장례, 궁중잔치 등 주요 행사에 관한 기록화를 담당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공식 국가행사에서 차지하는 화원들의 역할이 커짐에 따라 이들에 대한 대우도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화원들은 국왕이나 유력한 벼슬아치들의 영정(초상화)도 직접 그리면서 그들의 능력을 한껏 발휘하였다. 조선 후기 이후 화원들은 중인의 신분이 되었고, 그 직업은 세습되어 나갔다. 양천 허씨와 인동 장씨, 경주 김씨, 배천 조씨 등은 17세기 이후 영향력 있는 화원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화원들이 그린 ‘의궤’ 등의 기록화나 초상화에는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많은 사실들이 담겨 있다. 조선 후기에 고위직을 지낸 인물의 초상화에는 대부분 곰보 자국이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것은 이들이 어린 시절 홍역을 앓았다는 증거로서, 당시 벼슬아치들도 홍역을 앓은 것으로 봐서 일반 백성은 대부분 홍역으로 큰 곤욕을 치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조가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으로 가던 상황을 기록한 병풍에는 임금의 행차를 백성들이 자유롭게 구경하고 행렬 주변에 임시로 좌판이 벌어지는 모습, 정렬된 상태지만 자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 정조가 한강을 건너기 위하여 설치한 주교(舟橋·배다리)의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다. 이처럼 화원들의 그림 속에는 살아 숨쉬는 역사 현장이 생생히 드러나 있다.

 

조선시대에는 당시의 역사적 흔적들을 더욱 생생하게 후대에 전달하려는 목적에서 뛰어난 화원들의 능력을 필요로 하였으며, 화원들은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조선시대 화원들은 당대의 역사적 산물을 입체적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사진작가, 나아가 역사가로서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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