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우리의 일부가 된 귀화인들

구름위 2013. 6. 19.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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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출신 쌍기, 고려 광종때 과거제 도입 등 '개혁 전도'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이 분석한 한국의 대표적 귀화 성씨들.

 
역사 속에서도 주목할 만한 귀화인이 있었다. 고려 광종 때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도입한 중국 출신 귀화인 쌍기,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이 된 이지란,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의 선봉이 되었다가 조선에 귀화, 모국인 일본 공격에 앞장선 김충선 등이 그들이다.

 

#1. 과거제도를 정착시킨 쌍기

 

◇과거제도를 고려 광종에게 제안한 쌍기의 활동을 기록한 ‘고려사 열전’.

 

현재까지 성공의 지름길로 인식돼 치열한 경쟁이 이뤄지는 시험. 관리 선발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고려시대의 과거제도는 중국 출신 귀화인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고려 광종 시절인 956년 후주인(後周人) 쌍기(雙冀)는 봉책사(封冊使)인 설문우를 따라왔다가 병이 나 고려에 머물게 되었다. 당시 개혁정치를 추진하던 광종은 쌍기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 능력을 높이 샀다. ‘고려사’ 쌍기 열전에도 “대답을 잘해 광종이 그 재주를 아끼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광종은 후주로부터 신하로 삼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한림학사에 임명하면서 쌍기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958년 쌍기는 과거제도의 실시를 건의하였고, 그해 5월 처음 실시된 과거에서 지공거(시험을 주관하는 사람)를 맡았다. 과거제도의 도입으로 실력이 없는 개국공신이나 호족의 자제들은 점차 권력에서 멀어져 갔다. 그만큼 쌍기는 중국 출신으로서 별다른 정치적 이해가 없기에 고려의 내부인이 쉽게 시행할 수 없는 제도를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이었고, 이는 광종의 개혁정치와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최근 학계에서는 쌍기를 귀화인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요즈음과 같이 국적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던 시절, 귀화의 요건을 어떻게 봐야 할까? 전근대사회에서는 왕이 중심이 되고 그 아래 주민은 나라의 구성원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쌍기는 광종의 교화를 입어 관직까지 받았으니 형식상으로 귀화인임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쌍기 스스로가 고려인으로 생각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의 행적에서는 여전히 중국인의 생각을 가지고 중국인으로 살아간 면모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쌍기 이후 ‘쌍’씨라는 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그 근거로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쌍기는 우리 역사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외국 출신 인물에 속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
  

◇조선시대 과거시험 풍경을 기록한 한시각의 ‘북새선은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2.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은 여진인, 이지란

 

고려후기인 1380년, 왜구의 잦은 출몰로 고려 사회는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15세의 소년 장수 아지바두(阿只拔都)는 특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몽골어로 어린아이를 뜻하는 ‘아지’와 대적할 수 없는 자를 뜻하는 ‘바두’가 그 이름이 될 만큼 왜적의 어린 장수는 고려 곳곳을 누볐다. 그러나 고려에도 맞수가 있었다. 함경도 출신의 무장 이성계와 그와 피를 나눈 형제처럼 친밀했던 여진인 출신 이지란(李之蘭)이다. 이성계는 아지바두를 제압하기 위해 이지란을 불러 자신이 활로써 그의 투구를 맞히면 이지란이 직접 달려가 그의 목을 치게 했다. 작전은 성공했고, 장수를 잃은 왜적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이 전투가 바로 황산대첩이다.

 

이성계와 함께 황산대첩의 주역이 되었던 이지란은 원래 여진족 출신이었다. 그러나 이성계와 함께 전투에 참여하면서 그 뜻이 맞았고, 결국에는 조선의 건국에도 참여하였다. 이성계는 그를 개국공신 일등에 봉하는 것으로 화답하였다. 이지란은 이성계와 형제의 의를 맺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무엇 때문에 이성계는 이지란을 그토록 신임했던 것일까? 

 

◇전북 남원에 있는 황산대첩 기념비.

 

해답은 이성계의 출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성계의 고향은 영흥(지금의 함흥). 바로 여진족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이다. 당시 원-명 교체기의 혼란기에 동북방 지역은 원나라 선비 출신인 나하추 세력과 고려의 이씨 세력이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원나라 때 쌍성총관부 설치 이후 100년 만에 공민왕이 이자춘 등과 합세하여 회복한 지역이기도 하다.

 

이성계는 나하추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북방에서 남쪽으로 이주해 온 여진족 세력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여진족 이주민 이지란은 북청에 정착했고 이성계와 인연을 맺었다. 이지란의 원래 이름은 ‘쿠란투란티무르’였다. 쿠란(古蘭)은 성씨, 투란(豆蘭)은 이름이며, 티무르(帖木兒)는 남자 이름에 붙은 존칭이다. 성을 받아 청해 이씨의 시조가 되었고, 두란을 조선식 이름인 지란으로 바꾸었다.

 

고려후기 위기의 시기에 이지란은 타고 난 무공으로 이성계를 도왔다. 이성계는 자신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인 혜안택주와 혼인을 맺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왕자의 난으로 태종이 권력을 잡은 후 이지란은 고향인 동북면으로 돌아갔다가 사망하였다. 그의 졸기(卒記)는 그에 대한 이성계의 신임이 어떠했던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청해군(靑海君) 이지란이 죽었다. 이지란은 동북면의 청주부(靑州府) 사람이다. 옛 이름은 두란첩목아(豆蘭帖木兒)이다. 타고난 천성이 순후한 데다 무재(武才)가 있었다. 일찍부터 태상왕을 따라 정벌하는 싸움터에 나가 승첩(勝捷)하여 마침내 개국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태상왕이 이를 대접함에 특별히 두텁게 하고, 또 정사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을 주었다.

 

병이 더욱 위독해지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신은 본토의 사람으로 타국에서 죽은 즉, 시체를 불태워 도로 본토에 장사지내어 전하께서 신으로 하여금 본토의 풍속을 따르게 하소서. 또 전하께서 조심조심 덕을 닦아 영원히 조선을 보전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시호를 양렬(襄烈)이라 내렸으며, 장사지내기를 그의 청과 같이 하여 주었다. 세 아들이 있으니, 이화영(李和英)·이화미(李和美)·이화수(李和秀)이다.”(‘태종실록’ 태종 2년 4월9일)

 

위의 기록에서 본토에 장사지내고 본토의 풍속을 따르게 하라’고 유언한 부분은 영원히 조선인으로 살고 싶어 하는 이지란의 뜻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지란 초상(왼쪽)김충선 영정.

 

#3. 일본군 선봉장에서 조선 장군으로 변신한 김충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일본군 대장 가토 휘하에는 날랜 무술 솜씨를 지닌 선봉장 사야가(沙也加)가 있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며칠 후 사야가는 조국 일본을 향해 돌진하는 조선군 장수 김충선으로 변해 있었다. 사야가는 경상병사 박진에게 귀순한 후 경주, 울산 등지에서 일본군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공을 세웠다. 원래 적진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던 만큼 적의 동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을 ‘항왜(降倭)’라 칭하였고, 이들 중 상당수는 조선 군대에 배치되었다. 김충선은 왜국의 무기는 화포와 조총인데 조선의 활과 화살로는 대적할 수 없으니 자신의 조총 제조 기술을 군중에 널리 가르쳐 전투에 활용하자는 제안을 하고 이를 실천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의령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전공을 인정받아 가선대부를 제수 받았다. 사야가의 뛰어난 전공을 인정한 도원수 권율 등은 그에게 성명을 내려줄 것을 청했고, 결국 사야가는 김충선으로 거듭 태어났다. 모래 사(沙) 자에서 금을 유추해 김씨 성을 받았고 바다를 건너왔다 하여 본관을 김해로 하였다. 선조, 광해군, 인조에 이르는 시기 김충선은 북방의 방어사로 임명되어 이괄의 난, 병자호란과 같은 국난의 시기에 전공을 쌓았다. 만년에는 달성군 녹촌(鹿村)에서 거주하였다. 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하여 살면서 향약을 마련하는 등 조선사회에 동화된 생활을 했으며, 저서로는 ‘모하당집’이 있다. 김충선은 조선에 정착한 성공한 일본 귀화인으로 꼽을 수 있다.

 

7년에 걸친 임진왜란 기간 동안 한· 일 양국 간에 다수의 포로가 생겨났고, 이 중에는 김충선처럼 조국을 떠나 귀화한 인물도 많았다. 조선에서는 일본 출신 귀화인들에게 벼슬을 내리기도 하고, 성씨와 이름을 부여하여 조선에 정착하는 것을 적극 권하였다. 이름은 충선(忠善:충성스럽고 착함)이나 향의(向義:의를 향함), 귀순(歸順:순하게 돌아옴) 등으로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