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국왕의 식성과 식단

구름위 2013. 6. 19.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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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화려한 수라상을 부러워하지 마라


조선시대 최고의 자리에 있었던 왕, 어의를 곁에 두고 최고의 수라를 받았던 왕. 그러나 그들도 인간인 이상 건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세종과 영조의 사례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왕의 식단과 운동, 그리고 건강과의 관계를 짚어본다.

 

# 1. 채식주의자, 영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국왕의 건강과 관련된 기사를 쉽사리 찾을 수 있다. 특히 기록 중에는 현대인의 건강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큰 내용들도 숨어 있다. 대표적으로 조선의 최장수 왕이었던 영조는 채식 위주의 식단을 따랐으며, 최고의 업적을 쌓았음에도 각종 질환에 시달렸던 세종은 육식을 좋아했음을 알 수 있다.

 

‘영조실록’의 영조 26년(1750년) 2월 10일의 기록을 보자.

 

“내가 일생토록 얇은 옷과 거친 음식을 먹기 때문에 자전께서는 늘 염려를 하셨고, 영빈(暎嬪·영조 후궁이자 사도세자 생모)도 매양 경계하기를, ‘스스로 먹는 것이 너무 박하니 늙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이라’고 하였지만, 나는 지금도 병이 없으니 옷과 먹는 것이 후하지 않았던 보람이다. 모든 사람의 근력은 순전히 잘 입고 잘 먹는 데서 소모되는 것이다. 듣자니, 사대부 집에서는 초피(貂皮·담비 모피)의 이불과 이름도 모를 반찬이 많다고 한다. 사치가 어찌 이토록 심하게 되었는가?”

 

영조는 당시 사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가운데, 자신이 병이 없는 것은 일생 동안 거친 음식을 먹고 얇은 옷으로 생활했기 때문이라 하였다. 실제 영조는 숙종과 무수리 출신으로 알려진 어머니(숙빈 최씨) 사이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정통 왕세자 교육을 받지 못했다. 18세부터 28세까지는 궁궐이 아닌 사가에서 생활하였는데, 백성들 사이에서 섞여 산 서민적인 삶의 경험은 왕이 된 이후 영조의 식단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보통 하루 5회로 준비했던 수라를 3회로 줄일 정도로 소식을 즐긴 왕이기도 했다.

 

영조는 조선시대에 제작된 실물 모습 그대로의 초상화가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국왕 중 한 명이다. 그런데 그의 초상화를 보면 상당히 마른 모습을 하고 있다. 영조의 채식 위주의 식단과도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83세로 조선의 왕 중에는 최고 장수를 하였다. 조선시대 왕의 평균 수명이 48세 전후인 점을 고려하면 영조의 장수는 대단히 이례적이다. 채식 위주의 식단과 젊은 시절 궁궐이 아닌 사가에서의 생활 경험, 왕에 오른 후에도 잦은 행차를 나서고 청계천 공사나 균역법 시행을 위해 백성들을 직접 만나는 부지런함,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조선 최고의 장수를 누린 왕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2. 세종에 관한 질병 보고서

 

영조와는 달리 태종 때 세자로 책봉되어 정통적인 왕세자 교육을 받은 세종은 평소에 기름진 궁중요리와 육식을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성산 부원군 이직 등이 세종의 건강을 염려하여 올린 글을 살펴보자.

 

“졸곡(卒哭·상을 당한지 석달만에 지내는 제사) 뒤에도 오히려 소선(素膳·고기나 생선이 들어있지 않은 반찬)을 하시어 성체(聖體)가 파리하고 검게 되어, 여러 신하들이 바라보고 놀랍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또 전하께서 평일에 육식이 아니면 수라를 드시지 못하시는 터인데, 이제 소선한 지도 이미 오래되어 병환이 나실까 염려됩니다.”(‘세종실록’ 세종 4년 9월21일)

 

이 중 ‘전하는 육식이 아니면 수라를 드시지 못하신다’는 표현은 세종이 육식을 무척이나 즐겼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이 외에도 실록에는 세종이 비만했음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여러 건 나타나고 있다.

 

육식을 즐기는 식단이 세종의 건강을 위협한 것은 아닐까? 실제 ‘세종실록’에 나타난 세종의 질환 관련 기사는 모두 50건에 이른다. 세종 6년과 7년인 20대 후반에는 두통과 이질에 관한 기록이 있으며, 30대 중반에는 풍병과 종기에 대한 기록이 자주 나타난다. 40대 중반에는 안질과 소갈증에 관한 기록이 있으며, 수전증과 한쪽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는 기록도 있다.

‘세종실록’의 세종 21년 6월21일의 기록에는 세종 스스로가 건강상의 이유로 강무(講武·왕이 신하들과 무예를 닦는 행사)를 할 수 없으며 큰일은 세자에게 맡기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데, 이 기록에는 세종이 당시까지 앓고 있던 질병에 대한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내가 젊어서부터 한쪽 다리가 치우치게 아파서 10여년에 이르러 조금 나았는데, 또 등에 부종(浮腫)으로 아픈 적이 오래다. 아플 때를 당하면 마음대로 돌아눕지도 못하여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다. (…) 또 소갈증(消渴症·당뇨)이 있어 열서너 해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역시 조금 나았다. 지난해 여름에 또 임질(淋疾)을 앓아 오래 정사를 보지 못하다가 가을 겨울에 이르러 조금 나았다. 지난봄 강무(講武)한 뒤에는 왼쪽 눈이 아파 안막(眼膜)을 가리는 데 이르고, 오른쪽 눈도 인해 어두워서 한 걸음 사이에서도 사람이 있는 것만 알겠으나 누구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겠으니, 지난봄에 강무한 것을 후회한다. 한 가지 병이 겨우 나으면 한 가지 병이 또 생기매 나의 쇠로(衰老)함이 심하다. (…) 이제는 몸이 쇠하고 병이 심하여 금년 가을과 내년 봄에는 친히 사냥하지 못할 듯하니, 세자로 하여금 숙위(宿衛) 군사를 나누어서 강무하게 하라.”

 

이 부분에는 한쪽 다리가 아팠다는 것과 부종이 생겼다는 것, 13년 동안 소갈증을 앓았다는 것, 임질, 눈이 아파 안막을 가린다는 것 등 세종이 각종 질환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면 세종이 앓았다는 등창, 소갈증, 임질 등의 병은 구체적으로 어떤 병들일까? ‘세종실록’의 기록을 현대의 전문의에게 문의한 결과 안질은 요즈음으로 치면 백내장, 소갈병은 당뇨 질환, 임질은 성병이라기보다는 전립선염이나 방광염을 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당뇨는 여러 가지 합병증을 일으키는 병으로서 무엇보다 절대 안정을 취하는 것이 최선의 회복책이었다. 물론 말년에 세자인 문종을 시켜 섭정하게 했지만 훈민정음 창제와 같은 대사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각종 질환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역사적 책무를 다한 국왕, 세종. 각종 질환의 고통 속에서도 주옥같은 업적들을 남겼기에 인간 세종의 모습은 더욱 아름답게 다가서고 있는 것은 아닐까?


#3. 연산군과 광해군, 그 닮은꼴과 차이점

 

연산군과 광해군은 닮은 점이 많다. 반정에 의해서 폐위된 조선의 두 명뿐인 국왕이라는 점에서 닮았고,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폐위된 이후 유배지도 같았다. 강화도의 교동도라는 섬이 그곳이다. 그런데 유배 직후 보여준 삶은 완전히 달랐다. 연산군이 유배 직후 3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반면, 광해군은 유배 후에도 꿋꿋이 긴 삶을 살았다. 광해군이 교동도를 거쳐 최후의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목숨을 거둔 것은 그의 나이 67세 때였다. 조선 국왕 전체로 보아도 영조(83세), 고종(68세)에 이어 세 번째로 긴 수명을 누렸다.

 

두 왕의 수명에 차이가 있었던 원인은 개인적인 건강이 일차적인 원인이겠지만, 두 왕의 성장 배경 또한 이와 무관치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연산군은 알다시피 적장자로 왕위에 올라 궁궐에서 그야말로 호사롭게 생활한 왕이었다. 특히 사치와 향락 생활에 젖어 전국의 기녀들을 뽑아 수시로 잔치를 베풀어 ‘흥청망청’(흥청은 연산군 때의 기생으로 훗날 흥청망청 고사의 연원이 된다)한 주인공이 아니었던가? 화려한 궁궐에서 호사로운 음식만을 먹었던 연산군에게 유배라는 폐쇄된 공간과 거친 음식은 삶을 재촉하는 한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와는 다르게 광해군은 후궁의 몸에서 태어나 정식 왕세자가 되지 못하다가 임진왜란이라는 비상사태 속에서 왕세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왕세자 시절부터 전장을 누볐고, 국왕 재임 시에는 임진왜란의 후유증 극복과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이처럼 거친(?) 생활 경험은 유배라는 극한상황을 헤쳐 나가는데 큰 힘이 되었고 결국에는 그의 장수와도 깊은 연관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위에서 조선시대 왕의 사례를 살펴보았지만 태조, 광해군, 영조처럼 젊은 시절 전쟁에 참여하거나 부지런한 활동을 하면서도, 소박한 밥상을 즐긴 왕이 장수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특히 최장수 왕 영조가 화려한 궁중 요리보다는 소박한 밥상을 즐겼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조선시대 왕들의 식단을 부러워하지 말고, 자신의 체질에 맞는 소박한 밥상을 즐기면서 경제적 이익과 건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