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조선시대 양반들의 성문화

구름위 2013. 5. 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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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욕은 식욕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다. 고대 이래로 수많은 성의학서가 베스트셀러가 되어 방중술에 대한 사람들의 지적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소녀경』이나 『옥방비결』 등의 책들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오늘날 이러한 책자는 온전하게 남아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조선시대 양반들의 성문화와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중국에서는 한나라의 동중서 이후 유학이 뿌리를 내리면서 노골적인 성행위와 관련이 있는 책들은 퇴폐서라 하여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러한 영향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에도 미쳤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조선시대 방중술의 핵심은 정액은 타고날 때부터 한정된다고 보아 정액을 아끼는 것에 있다. 전기의 방중술을 대표하는 책으로 세종 때 편찬한 『의방유취』란 의학서가 있다. 이 책의 요점 또한 건강을 유지하고 오래살기 위해서는 정액을 아끼라는 것이다.

"방중의 방법은 방탕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요구만 만족시키고 정액을 보존하는데 힘써 섭생의 범위를 넓히려 하는 것이며, 체력을 강하게 하고 여색을 가까이 해서 방종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보해서 병을 없애려는 것이다"

방중술에서는 한정되어 있는 정액을 배설하는 것은 곧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이라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을 낳기 위해서 정액을 지나치게 낭비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하였다. 상황이 이럴진대 쓸데없는 곳에 정액을 허비할 수 있겠는가.

유교가 자리를 잡은 중기 이후에는 절욕을 중심으로 한 방중술이 한층 강력하게 요구되었다. 광해군 때 이정창이 지은 『수양총서류집』을 보자. 그는 '기욕을 반성함'이란 편을 두어 성욕을 끊는 방중술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남녀의 화합이란 천지 만물 화생의 자연스런 과정이지만, 지나친 성욕은 원기를 갉아먹어 생명을 해친다" 더나아가 성교의 횟수와 합방을 해서는 안 되는 금기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성교의 횟수에 있어 20세 이전은 이틀에 한 번, 20∼30세는 사흘에 한 번, 30∼40세는 열흘에 한 번, 40∼50세는 한 달에 한 번, 50∼60세는 7개월에 한 번, 60세를 넘기면 한 번도 하지 말라."

" 남녀가 합방해서는 안 될 때에 대해서는 술에 취했거나 화가 났을 때, 과식하였거나 몹시 덥거나 추울 때, 심지어는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올 때와 천둥번개가 치거나 무지개가 뜰 때도 금지하라"고 했다.

조선 후기에도 성욕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춘 성문화의 관점은 변함이 없다. 홍만선은 『산림경제』에서 "사람의 욕심 중에 색욕보다 강한 것은 없다. 오직 도를 아는 선비는 아무리 아름다운 여색이 앞에 있어도 눈으로 즐길 뿐 성욕이 내키는 대로 움직여 생명을 해치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예와 체면을 중시하는 유학을 신봉한 선비들은 성이 인간의 본성임을 인정하면서도 즐거움에 앞서 절제하는 성문화를 유지해 왔다.

그렇지만 축첩제도를 인정하여 대개의 선비들은 부인 외에도 첩을 한두 명씩 거느리는 이중적인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