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조선왕조실록 이야기] 왜선 한 척에 유린당하다 <2>|

구름위 2013. 2. 26. 12:01
728x90

잡아들인 왜인, 중림이 중국에 조공차 가는 길에 표류한 사람이라고 여겨

조정에서는 최대한 교린정책으로 상황을 풀려고 시도합니다.


하지만 이런 결정에 불만을 품은 부서가 하나 있지요.

지금으로 치면 국방부 격인 병조에서 팔팔 뛰며 그렇게는 안 된다고 고합니다.



'지금보니 황해도 관찰사의 장계에 '저 왜인들은 모두 갑옷을 입었고 칼을 들었으며 사람도 살해했다' 하였습니다.

왜인들이 아무리 미개하다고 해도 사람을 죽인 자는 죽는다는 이치를 모를리가 있겠습니까.

저들을 타이르려는 성상의 뜻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조공차 가다가 표류한 자들이라도 사람을 죽였으면 살려 보낼 수 없습니다.


이미 상(왕)의 뜻이 결정 되었으나, 

병무를 맡고 있는 저희들은 타일러 용서하려 하지 말고 기회를 잡아 죽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일은 최대한 빨리 조치하여 포획해야하니 빨리 외부 장수들에게 알려 그들을 잡아들이도록 하옵소서.'



역시 국방을 맡고 있는 병조 측에서 나온 의견이라 그 내용이 상당히 과격합니다.

중국으로 조공차 간 왜인들이 정말 조선인을 죽였다면, 용서할 수 없다는 거지요.


그래서 중종은 결국 도망간 왜인들을 회유하라는 남곤의 의견과 강제로 추포하여 죽이자는

병조의 의견을 각각 받아들여, 최대한 회유는 하되 만약 그들이 따르지 않으면

추격하다 죽여도 상관 없으니 무조건 잡아들이는 걸 우선으로 하라고 전교합니다.



며칠 뒤 인천 조방장인 박양준으로부터 왜선 1척이 인천 해상에서 조선 상선 하나를 겁탈했는데 

배안의 쌀만 훔쳐가고 사람은 해치지 않았다는 보고가 올라옵니다.

중림이 타고 있었던 그 왜선이 분명한데, 사람은 해치지 않았다하고 훔쳐간 것이 쌀이라면

분명 배 안에 먹을 게 떨어져서 약탈을 하는 게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다음 날엔 이미 왜선이 경기도도 지나 충청도나 전라도 쪽으로 간듯 하다 말하니

이대로 가다간 조선 해역을 지나 그대로 본국으로 가능성이 점점 더 높아만 집니다.

설사 그들을 용서해준다 하더라도 잡아들이고 용서를 해야지,

왜선 한척이 조선 땅에 와서 조선인도 죽이고 상선도 약탈한 뒤 아무일도 없이 그냥 돌아가버리면 국가 위신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중종은 경기, 충청, 전라도의 모든 조방장, 병사, 수사 등에게 하유하여

왜선이 나타나길 기다리지 말고 모든 섬을 수색, 토벌해 절대 본토로 그냥 돌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망망 대해에서 어떻게 왜선 1척을 수색해 찾을까 싶은데......


찾았습니다-_-;;

문제는 충청도 수사 윤임이 왜선을 봤다는 보고를 듣고도

직접 군사를 통솔해 잡으려하지 않고 군관 두 명과 병사만 보내 잡으려 했다가

오히려 전투에서 지고 놓쳐버린데다 놈들이 도망가다가 비어있던 조선 측 배 한 척을 패몰시키기까지 합니다.


당연히 조정에선 난리가 나고 관련된 수사와 군관을 모두 추국하려합니다. 

망신이 이보다 망신이 없습니다. 왜선 한 척에 서해 수군 전체가 농락당하고 있으니까요.

나중에 알고보니 패몰한 조선측 배는 군선은 아니고 

예전에 외부에서 들어오던 개인배라는 게 밝혀지긴 했으나 위안이 될리가 없었지요.


하지만 수군 입장에서도 참으로 갑갑한 게,

적들을 빠르게 추격하려면 소형선에 소수의 군사만 태워 따라잡아야합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추격하면 군대가 소수고 전투에서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반대로 적을 섬멸하기 위해 대형선으로 많은 군사를 한 번에 데리고 가면

도망가는 적을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올라온 보고에도 100명을 인솔해서 출발했는데 출동한 배가 병선과 포작선을 포함해 12척이나 됩니다.

배 한 척당 굉장히 소수의 인원이 타고 있다는 말이죠.

그나마 병선은 느려서 제대로 추격하지 못했을테고,

제대로 추격가능한 건 포작선일텐데 포작선...이게 사실 군선이 아닙니다.

어선이죠. 그런데 가장 빠르다보니 급할 때 군사용으로 종종 이용하는데 이게 추격하는 덴 좋겠지만 전투하는 데는 최악이었겠죠.


그렇게 어설프게 추격에만 신경쓰다가 전투에 패하고 사상자도 2명이나 발생한 것입니다.




이쯤되니 교린정책이고 뭐고 전부 다 없어져 버렸죠.

삼정승은 잡아들인 중림을 당장 고문해 사실대로 불게 만들자고 건의합니다.

사실 조선 수군이 그들에게 유린당하고 있다는 것만 빼면,

바뀐 게 하나도 없는데 괜히 그들이 정말 조공선이냐 왜적이냐를 알기 위한 화살이 중림에게로 쏠려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날 기적적인 소식이 하나 올라옵니다.

전라도 우후 조세간이 왜적과 싸워 머리 13급을 베고 1명을 생포하여 섬멸한 것이지요.

조정에선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한 보고라 기쁨을 감추지 못합니다.

거기에 한 명을 생포까지 했으니 그들이 정말 조공선인지 왜적인지 밝힐 수 있는 확률도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고문중인 중림의 형신도 멈추고 생포한 다른 자가 올라오면 비교 심문하도록 합니다.



다음 날 전라도에서 자세한 보고를 위해 군관 나사항이 올라옵니다.

전투에서 어떻게 통쾌하게 이겼는지 전투에 직접 임한 사람에게 들을 수 있는 기분 좋은 순간입니다.



전라도에서 올라온 나사항이 말하기를,


'6월 16일에 병사(兵使: 중2품 무관직)는 안마도로, 우후 조세간은 위도로 향하여 적을 수색했는데,

27일 첩보병이 서쪽에서 배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신이 조세간과 함께 추격하니

현감 신종이 이미 왜선 1척과 싸우다가 후퇴하다 하면서 오는 중이었습니다.


그 날은 접전하지 못하고 밤새도록 포위하고 있다가,

다음날 신종이 화전을 쏘아 그 배의 돛대를 부숴버리고 창을 잡은 자를 쏘아 맞혔는데,

즉시 꼬구라져 죽었습니다. 이로인해 왜놈들은 모두 배 안으로 숨은 채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안에서 배를 조종하여 남쪽 바다를 향해 도망가므로 신 등도 그 배를 추격하여 갔으나,

왜선이 크고 높은데다가 방패를 설치하였기에 화살은 물론, 총통으로도 깨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조세간이 영을 내리기를 '아군이 일시에 홰에 불을 붙여 왜선에 던지면,

왜인이 불을 끄기 위하여 나올 것이니, 그 때 돌을 던지고 활를 쏘자.' 하였고

모두들 약속에 따라 일시에 함께 불을 던져 그 배에 불을 질러 그와 같이 포획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남곤이 묻기를,

'왜인의 수는 대개 몇 사람이나 되었는가?' 


하니, 나사항이 말하기를

'배 밑바닥에 타서 드러난 뼈가 매우 많았는데, 대략 30여 명쯤 되었습니다.'


하여 남곤이 다시 물으니

'왜인 1명은 무슨 방법으로 생포하였는가?' 하니 


'배를 모두 불태운 뒤 혹 숨어 있는 자가 있을까 의심스러워 또 불을 놓아 태웠더니,

왜인 하나가 나와서 무릎을 꿇고 손을 비비면서 살려달라는 식으로 말하므로,

신이 옷을 벗으라는 시늉을 보여주니, 왜인이 즉시 옷을 벗고 와서 항복하였습니다.' 



타죽은 자만 30여명이고 참수한 자와 생포한 자가 14명이 되는데다 

물에 빠져 죽은 자도 있다고 한다면, 그 수가 정말 적지 않게 많았다는 겁니다.



게다가 배도 총통이 전혀 통하지 않을 정도로 크다는 보고를 들으니

충청도에서의 패배가 어느정도 납득이 되는 상황입니다.




질문이 이어집니다.


'너의 배가 10척이고 신종의 배가 10여 척이었으니 추격하여 포위하면

왜선으로 하여금 달아나지 못하게 할 수 있었을 터인데,

어찌하여 큰 바다에까지 추적하여 갔었는가?' 하고 물으니



'왜선의 빠르기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마침 그날 순풍이 있었음으로 접전하였지

그렇지 않았다면 결단코 따라 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남곤이 다시 묻기를,

'왜인도 활을 잘 쏘던가?' 하니,


나사항이 '비록 쏘는 자가 있었으나 활이 강하지 못하여, 맞은 자가 다치지 않았습니다.'하고 


이번엔 중종이 묻기를,

'각궁을 사용하여 쏘던가?' 하니


'왜인들이 방패 안에서 활을 쏘았으므로 무슨 활을 썼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합니다.


남곤이 의아해하며,

'방패 안에 있었다면 너희들이 어떻게 쏘아 맞혔는가?' 하니, 


나사항이 대답하기를

'그 방패 위에 두 귀가 있었는데, 왜인들이 반드시 이를 통하여 엿보았으므로 

그 틈을 이용하여 쏘아 맞힐 수 있었습니다.' 


-_-;;; 믿어야하나요 이걸....



뭐, 과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적을 섬멸하고 수급 13개를 가지고 온 건 정말 엄청난 성과였습니다.

조선 수군의 문제점을 보여주긴 했지만 최소한의 자존심은 살려준 셈이었죠.

기분 좋은 승전보에 조정에선 조세간과 승전한 수군들에 대한 상을 아끼지 않습니다.


이제 생포한 왜인을 추문하여 대체 이놈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히고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고민할 차례입니다.

 

이번에 사로잡은 왜인의 이름은 망고다라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건 놈들의 정체보다 더 심각한 이야기가 흘러나왔죠.


그들이 조공차 간 왜인인지 아니면 약탈을 위한 왜적인지는 역시나 알 수 없었으나

중국 영파부 지역에서 중국인과 충돌이 있었고 그 일로 중국인 8명과 같이 빠져나왔고,

그러다 배안의 식량이 떨어졌는지 어땠는지는 몰라도 바다 어딘가의 섬에

그 8명의 중국인을 버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단순 조공선이어도 중국과 간접적으로 관련되는데 이놈들이 중국에서 난리를 치고 중국인 8명을 데리고 왔다니

이 왜인들을 대체 어떻게 처리해야하는 지는 정말로 외교적 문제가 되어버렸으니까요.

여하튼 버렸다는 중국인의 행방을 찾는 게 상당히 중요해졌습니다.

이에 중종은 잡은 왜인에게 중국인을 버린 그 섬이라는 게 대체 어디쯤인지 추궁하게 합니다.



7월 9일, 보고가 들어온 것을 보고는


'망고다라의 초사에 '중국 사람을 둔 곳이 육지에서 내려 걸식하던 곳과 10여일 거리로,

네 개의 작은 섬을 지나 다섯 번째의 섬이다.' 하였는데 이미 그들을 버린 지 한 달이나 경과했으니,

생존하여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비록 찾게하여 그들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중국으로 송환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우리나라에 유치시킬 수도 없으니 처치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그러나 이미 그들이 난을 당하였다는 것을 알고서도 사람을 시켜 찾지 않는 것은

또한 미안한 일이니, 이에 대해 영의정 남곤에게 의논하게 하라.'

라고 전교합니다.



참고로 중국으로 송환하는 일이 어렵다는 이유는,

만약 중국 영파부에서 왜변을 숨기고 황제에게 알리지 않았는데

그 왜변으로 잡힌 중국인을 송환해버리면 진상이 들어나니 

영파부 관청이 분명 처벌을 받을 것이기에 제후국인 조선 입장에서 곤란하다는 의미입니다.



이에 남곤은 왜인들이 한 말을 다 믿을 수도 없고 

사실이라 해도 버려둔 지 한 달이나 지났으니 살아있을 리가 없는데다, 

찾아도 송환하는 게 곤란하니 찾아나서는 게 무익할 것같다는 회의적인 의견을 비추지만,

중국인이 우리나라에 버려졌다는 말을 들은 이상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찾아 나설 수 없다는 말을 합니다.


회의적이긴 해도 영의정도 중종의 의견에 동의를 했으니 그들을 찾는 것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죠.

이에 선전관 여맹온과 중국어, 일본어 통역관을 한 명씩 보내 찾게 합니다.




'걸식한 곳에서 열흘 정도 떨어진 곳.'

이라는 단서 하나로 조선에 섬이 대체 몇 개인데 어떻게 그 중국인을 찾을까 싶지만....

한반도가 좁긴 좁나봅니다.




또 찾았습니다-_-;;;



영을 내린 지 11일 후인 7월 20일, 충청도 수사 황침의 장계가 올라왔고,

실록 기록에 누락됐지만 후의 이야기 맥락으로 봤을 땐 전라도에서도 일부 찾은 듯합니다.


일단 황침의 장계를 보면,

고기잡이 최임송이 조업을 위해 가외덕도에 들어갔다가 8명의 표류인이 있는 걸 발견하고는 배에 싣고 왔는데,

황침이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필담으로 물으니 중국 영파부 사람이라는 겁니다.

망고다라가 말한 그 중국인이 틀림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표류하게 됐냐라고 물으니,

자신들은 소금을 굽는 사람들인데 황제가 삼근야륵(무엇인진 모르겠습니다ㅠㅠ) 4개를 구하므로 이를 굽다가

나무가 모자라 해산(海山:바닥 밑바닥에서 솟아올라 바다 한가운데에 이룬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었는데,

캄캄한 밤에 풍랑을 만나 배가 바람에 불러 밀려 나가 10인 가운데 8명만 목숨을 보전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라? 

뭔가 표류한 이유가 너무 이상합니다. 

그들은 분명 납치되어 이리로 끌려와서 버려져야 하는데 

중국 바다섬에서 나무를 하다가 조선까지 밀려와 표류를 하다니요.


일단 포획한 중국인 8명을 서울로 올려보내게 합니다.

남곤 등의 상소로 일단 이 중국인들을 추국하게 하는데 그래도 중국사람인지라 상당히 대우해줍니다.

추국하는 방식도 고문은 하지 않고, 음식도 장만해 먹이는 등의 호의를 배풀죠.



하지만 이런 호의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신이 나무하다가 표류한 사람이라 말하니,

남곤이 이야기 하기를,


'중국 사람들을 여러 가지로 추문하였으나 다들 바른대로 이야기하지 않고

'소금을 고는 일 때문에 섬 안에서 땔나무를 베다가 바람에 표류되었다.'고만 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 사람이 전라도로 표류해 간 중국 사람과 미리 입을 맞추었기에 그런 듯한데,

전라도에서 사로잡힌 중국사람은 글을 안다고 하니 태평관 관반청에 옮겨두고 직접 묻겠습니다.'


하니 중종은 끝까지 묻되, 승복하지 않으면 왜인과 면질시켜서 알아내도록 하게 합니다.



다음날 8월 3일 결국 중국인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합니다.

중국인 한 명이 공초하기를 


'5월에 왜적이 변방에 침범하여 영파부 태수가 곤사를 거느려 맞싸우고

태수가 왜적을 져부수니 그들이 달아났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며칠 뒤 자신들이 소금 땔나무를 베는 일 때문에 바다 가운데 있는 도화산 밑에 있다가

바람을 만나 닻줄이 끊어졌고 표류하여 바다 가운데 들어갔다가 왜선을 만났다.


10명 중 2명은 물에 뛰어들려다가 창에 맞아 죽고 8명은 사로 잡혀 굶주리다가

왜적에게 놓아달라 애걸하니 섬에 방치하였는데, 그러다가 귀국 사람을 만나서 나오게 되었다.'

라고 합니다.


그들이 처음에 대체 왜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남곤은 우리나라에 와서 약탈을 했을 때 그들도 가담을 일정부분해서

조선 정부에 추궁당하고 벌을 받을까 두려워 숨기려한 것이 아닌가..하고 추측합니다.



뭔가 미심적은 구석이 없는 건 아니나 여하튼 사건의 전황이 들어난 듯 보입니다.

사실 조선 조정에선 중국인이 끼어있는 이상 정확한 사건 진상을 크게 알고 싶지도 않았을 겁니다.

이미 왜적은 모두 섬멸 했고 중국인이 발견됨으로써 뭔가 일이 너무 커져버린 느낌이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영파부에서 조공선이든 왜적이든 그들이 분탕칠을 친 것은 사실이었고

중국인들이 조선 영토에서 사로 잡힌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이젠 이 일을 어떻게 깔끔하게 마무리하느냐가 더 중요해진 시점이었죠.



중종은 일단 중국인은 중국으로 송환하는 걸로 결정 짓습니다.

문제는 포로로 잡은 왜인들인데

사실 마음같아선 조선 정부에서 처리하고 싶지만, 이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중종은 경복궁 사성전에 나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호조판서, 병조판서, 공조판서, 판윤, 좌참찬, 우참찬, 형조판서,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죄다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 중국사람과 왜인을 어떻게 처리해야하는 가에 대해 의논하게 합니다.


전체적인 의견은 중국사람을 찾았으니 송환하는 게 맞고,

왜인도 같이 보낸다면 평소 명나라에서 조선이 왜국과 가까워 몰래 교통한다고 여길 것인데,

이 왜인들을 중국으로 보낸다면 이런 의심을 없앴을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도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에서 분탕질을 친 왜적이니 조선이 처리해야하는 것이 옳으나 

명나라에서도 문제를 일으킨 이상 명분보다는 실리를 선택하겠다는 것이었죠.



결국 중국인과 왜인, 그리고 섬멸한 왜인의 수급(잘린 머리)까지 보내는 것으로 결정하고,

중국인과 왜인을 추문한 기록 문서를 정리해 보내는 것으로 결정짓습니다.



이렇게 중국 송환을 위한 일이 한창 진행되던 8월 15일,

몇 개월 전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조원기가 돌아왔는데 여기에서 이 왜적들에 대한 약간의 정보가 옵니다.


왜인 종설과 송소경이라는 인물이 각기 중국으로 갔는데,

종설은 조공을 사칭하고 무언가 다른 일을 꾸밀 계획으로 중국 영파부에 갔으나

뒤에 온 소송경이 진짜 조공을 위해 와서는 종설의 거짓을 갖추어 말하니,

종설이 크게 노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조공선이 맞으면서도 아닌 것이었고 

중림 등이 자신들이 조공선이라 주구장창 이야기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죠.





8월 29일, 형조참판 성세창을 명나라 수도로 보내어 중국인을 소환하게 하고,

황제에게 보내는 글을 같이 보내는데 그 내용이 대략,


'사방이 대대로 큰 은총을 받아왔으나 작은 공로도 보이지 못하였었는데,

이번에 왜노가 상국 지방을 교란하여 흉악을 부리고 관병을 죽이기까지 하고도 

천벌을 받지 않고 살아남아 우리 지역에 이르렀음을 알고, 신(臣)이 황위에 의지하여 그들을 거의 다 죽였습니다.


사로잡은 중림 등 2명도 죽여야 하겠으나, 죄가 상국을 범한 데에 관계되므로

마음대로 처치할 수 없기에 이제 적왜 2명과 수급 32개, 

영파부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는 화살 2개와 왜선이 타고온 배의 선창을 성세상을 시켜 보내며,

아울러 탈환한 중국인 8명도 데려가게 합니다.'



이렇게 조선 서해안을 들석이게 만들었던 왜적 사건은 종결되었습니다.



자.. 이렇게 일은 잘 마무리 된듯 보이나 

조선엔 사실 여전히 숙제가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일단, 명나라와의 관계엔 최상의 선택을 했으나 반대로 말하면 일본과의 관계는 당연히 좋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왜인들이 명나라와 조선에서 분탕칠을 친 건 맞으나 왜적 그 자체는 아니었으니까요.


15년이 지난 중종 32년(1537년) 일본 국왕(정확히는 쇼군)이 사신을 보내는데,

그 때 서신의 내용이,


'저희나라 백성 50여명이 역풍에 표류하여 귀국의 변방 포구에 닿았는데,

무슨 까닭으로 우리나라로 보내지 않고 도리어 중국에 아뢰고 바쳤습니까?

듣건데 유구국(오키나와)의 표류한 백성이 귀국의 바닷가에 닿으면 잘 돌보고 후에게 상주어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한다하니,

한 나라에는 박하고 한 나라에 후하게 하는 것은 한가지로 인애하지 않는 것입니다.'

라고 따지듯 물었죠.


이에 답하기를 '중림 등은 처음부터 우리나라에 표류한 것이 아니라,

영파부에서 난을 일으켜 장수를 죽이기까지 하고, 또 우리나라 변방에 이르러

세 지역에서 죄 없는 사람을 죽였으니 이는 표류한 백성이 아니라 도둑의 무리이므로

형구를 채워 중국에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라고 단호하게 말하긴 합니다.



오히려 일본 국왕보다 문제는.. 이 중림 일당이 대내전, 즉 오오우치 일족이 다스리는 지방 사람이었는데,

조선에선 대내전이 백제의 후손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 쪽에서도 그것을 강조하였기에 상당한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대내전은 그 세력 면에서 대마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컷고

특히나 왜구들이 조선인을 포로로 잡아 본국에서 팔면 대내전이 찾아 조선으로 되돌려 주는 등의 일도 하였기에

이번 일은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던 것이죠.

이 때문에 후에도 계속 이 일을 잘 무마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또한, 조선이 가진 다른 숙제는 조선에서 난리치 왜인을 섬멸하긴 했으나,

조선 수군의 헛점이 그대로 들어난 그런 사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