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조선왕조실록 이야기] 잔혹한 살인범인가 정치적 희생양인가

구름위 2013. 2. 26.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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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이야기는 100%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이야기로 각색없이 구성하였습니다.>


-1부-


때는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 시절로 알려진 성종 시대.

13살 어린 나이에 왕에 올라 이제 왕으로서의 모습을 제대로 갖춘 성종 9년 1월 11일

급박한 보고 하나가 올라옵니다.


황산수의 문이 와서 말하기를,

그의 집이 모화관(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곳. 서대문구 현저동에 위치) 동쪽에 있는데,

집 북쪽에 두개골이 상하고 깨어진 여자 시체가 버려져 있었다는 겁니다.


이에 성종은 속히 검시하고 조사하라 명합니다.

그리고 1월 13일 삼사(형조, 사헌부, 한성부)에서 함께 조사하라 명하지요.


여자 노비로 보이는 시체 하나로 이렇게 엄청난 부서가 한 번에 투입된 것은,

그 가해자가 상당한 권세가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시체가 발견되고 열흘이 조금 지난 1월 13일. 

성종은 그 일대의 모든 집을 다 뒤지게 하는데, 

문제는 그 사이에 왕족이었던 세조의 서자 창원군의 집이 끼어있었다는 거지요.


형조 좌랑 박처륜이 창원군 이성의 집을 수색하려하니,

창원군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어찌 내 집을 수색하려 하느냐?' 하므로, '전지(왕의 명)를 받았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창원군이 자신의 신분을 앞세워 전지를 받았더라도

수색함의 부당함을 언급하며 집으로 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수색하러 간 사람들을

잡으려고까지 해 수색에 실패했으니 다시 전지를 받아 수색하기를 성종에 청하였습니다.


이에 분노한 성종은

'이 여자를 죽인 자는 반드시 잡아야 하기 때문에 집주인의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수색하라고 명하였는데,

창원군이 거절하니 매우 옳지 않다. 국문하여 아뢰라' 라고 전교합니다.

사실 창원군은 평소 그 행실이 좋지 못해 많은 대신들로부터 죄를 주어야한다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왕족이라는 이유로 보호받고 있는 그런 인물이었죠.



다음 날 1월 21일. 성종은 이 사건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곤 일종의 상격을 세워

현상체포해야한다 판단합니다.


이에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은 임금의 큰 권한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마다 꺼림없이 임의로 (살인을)한다면

그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돈의문 밖에 버린 시체를 검사하니, 

얼굴과 목 사이에 칼자국이 낭자하여 거의 완전한 살을 차마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도성에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 내가 심히 통탄하다. 


삼사(형조, 사헌부, 한성부)를 동원해도 죄인을 잡지 못하니, 마땅히 상격을 세워 현상 체포해야한다. 

그 여자의 시체를 고하는 자는,

양인은 세 품계 올려주고 관직을 내리며, 천인은 양인으로 올려주고, 

만약 사노비이면, 자신은 노비 신분을 면할 것이고 사촌 이상 친족은 공노비로 속하게 할 것이다.

또한, 진실을 고한 모두에게 면포 2백 필을 주라.


그러나 반대로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하지 않다 발각되면,

양인은 천인에 속하게 하고 천인 및 사노비는 변두리 외각 지역의 공노비로 평생 머물게 하라.'고 

의금부와 형조에 명하며 범인을 잡기 위한 자신의 의지를 확고히 합니다.



자.. 그런데 이 말은 범인을 잡기 위해서 노비가 자신의 주인을 고발하라는 말입니다.

당시 시대상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요. 다음 날 신하들은 난리가 납니다.



영돈령 노사신은 

노비와 주인의 사이는 신하와 임금의 그것과 같은데, 

설사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서로 숨겨야지 서로 고소할 수 없다 말하며,

여자 시체 사건으로 노비가 상전을 고발하도록 하는 것은 절대 불가하다며 이야기 합니다.


그러자 성종은

사람을 죽인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니므로 죄인을 반드시 잡아햐하는데,

사람들이 모두 숨기기에 급급한 게 지금 실정이다.

그렇다고 의심가는 자 모두를 매질해 때리어 심문하면 한 사람의 범한 죄 때문에,

그 피해가 죄없는 사람들에게 미치게 되니 안 될 일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임시적인 법을 세운 것이다.

라고 말하며 주위에 의견을 물었습니다.


이에 파천부원군 유사흔, 예조판서 이승소, 집의 이칙, 정언 성담년이 모두 말하기를,


이미 임금의 명이 시행되었고, 이로 인해 노비 아무개가 와서 우리 주인이 죽였다고 고발하면,

국가에서 공을 상주어 천인을 면하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를 듣는 자들이 '아무개는 주인을 고발하여 양인이 되었다.' 할 것이고

노비들은 모두 두 마음을 품을 것이니, 이런 버릇을 자라게 할 수 없다며 반대합니다.


그러자 빡친 성종이 대답하기를


'내가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살리고 죽이는 것은 임금의 권한인데,

사람마다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임의로 살육을 행한다면 이것은 임금을 업신여기는 것이니,

이것을 징계하지 않으면 나라에 기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경 등은 이 사건에 마땅히 각각 분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품어야하는데,

오히려 나더러 잘못됐다 하는 것은 대체 무슨 소리인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고 합니다.


그러자 이칙이


'이 여자 시체 사건은 죄가 크기에 밀봉(익명으로 봉한 고발)을 이미 허가한 것입니다.

이것 역시 노비로 하여금 주인을 고하게 하는 것이고 충분히 불편한 상황인데,

아예 드러내놓고 신분을 면해주겠다하며 주인을 고발하게 하는 건 마땅치 못합니다.

밀봉과 면포를 상으로 내리는 것만 허가하시고 기다리면 죄인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하니 더 빡친 성종이 말하기를


'이 사건은 분명히 거실(높은 문벌의 집안)이 한 짓이다. 사건에 대해 동네 사람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밀봉이나 상따위로 잡을 수 있겠는가. 그댄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지금 권세 있는 신하가 위엄을 믿고 사람을 죽였으니 법에 있어 마땅히 다스려야할 터인데,

그대들의 비호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이칙이 다시 말하기를, 


'신이 반복하여 생각해 보아도 의혹이 오히려 풀리지 않습니다. 군신과 노주(노비와 주인) 사이는

크고 작은 것은 비록 다르나 분수는 한 가지입니다. 설령 중국 조정에서 우리 신료를 꾀기를,

'그대가 그대 임금의 일을 말하면 반드시 중한 상을 주겠다.' 하면 우리 신료가 된 자가 차마 말하겠습니까?


하였다.


성종이 다시 말하기를,


'황제가 물음이 있으면 내가 마땅히 사실대로 대답하겠다. 어찌 그대들에게 묻기를 기다리겠는가.'


하니 이칙이 다시 반문하기를


'성상께서야 당연히 그러겠지만, 가령 임금이 스스로 고하지 않으면, 신하가 차마 고소할 수 있겠습니까?"

합니다.



이 논의에서 우부승지 김승경과 동부승지 이경동만 빼고는 모두가 성종에 뜻에 반대합니다.


국가의 법과 기강을 잡기 위한 성종의 노력과 신분의 질서를 중요시하는 신하들의 대립이 팽팽한 상황입니다.

사실 두 의견 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긴 합니다.

현대적인 시각으론 신하들의 이야기가 말도 안 되는 소리이긴 하지만, 

당시는 왕조 시대였고 신하가 임금을 고발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노비가 주인을 고발한다는 것 역시 비슷한 개념으로 적용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성종은 도성 안에서 이렇게 끔찍한 살인을 일삼는 범인이 누구더라도 반드시 잡겠다라는 의지를 보입니다.



-2부-



다음 날 경연에서 수업이 끝나자마자 어제 있었던 노비의 고소 금지에 대한 이야기가 역시 언급됩니다.

당연히 사간(임금의 잘못을 언급하고 반박하는 직책) 경준도 

노비가 주인을 고발하면 강상이 무너진다 반대하고,


장령 김제신도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함은 어렵지만 

무너지는 건 아주 쉬워서 한 번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다고 반대하고,


그 유명한 한명회 역시 사건의 잔혹함을 봤을 때 죄인을 잡아 징계함은 마땅하지만,

대간이 저렇게 간절히 여기는 건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반대합니다.


신하들의 완고한 반대에 성종은 숨이 막힐 것만 같습니다.

지금 궁안의 큰 어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한갓 노주(노비와 주인)의 의리만 알고

왕의 위엄은 무시하며 임의로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해 왜 생각치 않는가!

하며 화를 내지만...


신하의 계속되는 설득에 결국 말을 멈추고 경연을 마칩니다.



다음 날 경연... 수업을 마치자 아니나 다를까 

노비가 상전을 고소하는 것에 대한 반대 의견이 또 빗발칩니다.


신하들은 사건의 잔혹함은 인정하나 큰 근본이 무너질 것이라 반대하지만,

성종은 이 일은 분명 권세가가 일으킨 짓이어서 이웃 사람도 알지 못하고 

유일한 단서는 그 집의 노비뿐이라며 법령의 필요성을 주장합니다.


오직 성종의 편을 드는 건 영사 정상손 뿐이었는데,


'법령에 모반 대역(국가를 전복시키려는 내란 죄와 임금이나 아버지를 죽이고 종묘와 임금의 능을 파헤치는 일)을

제외하고는 노비가 상전을 고발하지 못하게 되어있으나,

세종조에서도 이같은 큰 일은 또한 노비가 그 상전을 고소하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특히 세종께서는 일찍이 부민이 고소하는 것을 금하였으나

(부민고소금지법: 하급관리나 일반민이 수령을 고발할 수 없는 세종 때 만들어진 법)

세종께서 말씀하시기를,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말하게 하였는데 고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셨습니다.

지금 일은 노비가 고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데 하는 게 마땅합니다' 하며 성종의 입장을 변호합니다.


그러나 다시 주위 신료들은,

지금 상전을 고발하여 범인을 잡으면 순간의 통쾌함은 있겠으나, 

한 번의 통쾌함으로 강상을 무너뜨릴 수 없다며 입장을 고수하지요. (참 답답합니다 ㅠㅠ)


대신들의 입장은 이리 답답하지만, 다행이도 사건의 실마리가 풀릴만한 단서가 하나 잡힙니다.



우부승지 김승경이 와서 보고하기를,


시체를 성벽 위에서 던져 버려졌을 거라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 시체를 놓아 둔 곳에서 가까운 성안의 집을 수색해보니 

마지막에 창원군의 집이 있었고 그 집 뜰을 죄다 살폈으나 피자국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합니다.


그래서 곧장 창원군 집 옆 동산에 다다라서 성 위를 돌다가 끊어진 머리털 약간과

끊어진 노끈을 찾았는데, 그 곳에 핏자국이 있었으며 찾은 머리털을 시체의 머리털과 비교해보니

길이와 가늘기가 차이가 없었다는 겁니다. 


이어 노비 동량을 잡아보니 옷 속에 빗자국이 두어 점 보였고,

그 이유를 물으니 '주인에게 월형(빨꿈치를 베는 형벌) 당할 때 묻은 것이다.' 하여

그럼 월형을 언제 당한 때를 물으니, 이미 4~5년이 지났다고 합니다.


그렇게 오래라면 빨지 않았을리가 없으니, 최근에 더럽혀진 것이 분명하고

상당히 의심스러우니 형추(매질하여 신문하는 것)하는 것이 어떤가 성종에게 묻습니다.



대신들의 깝깝한 소리에 속이 꽉 막힐 거 같았던 성종의 숨을 틔워주는 보고였습니다.


성종은 기뻐하며, 버려진 시체 가까운 곳 성안을 수색하라는 것을 이미 수 일전에 명했는데,

이와 같은 증거를 왜 이제서야 찾았냐면서, 동량을 장문(곤장을 치며 신문하는 것)하면 

실정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으나 다른 사람이 버린 것일 수도 있으니

창원군만 치우쳐 지목하지 말라고 혹시 모를 수사 대상의 오류를 경계합니다.



그러나 사건의 실마리는 아주 쌩뚱맞고 아주 결정적으로 풀립니다.

그렇게 사건의 단서를 발견한 후 3일 뒤 1월 27일 아침,

성종이 신하들에게 업무보고를 받으려고 하는데, 도승지 신준이 헐레벌떡 들어옵니다.


손에는 익명의 고발장이 있었는데 원래 이런 익명서는 받지 않는 게 일반적이지만, 

지금은 밀봉(익명으로 고발하는 것)하는 법이 있어 가져왔다 합니다.


그 내용은 '여자의 시체는 거평군(居平君) 부인이 질투하여 한 짓이니 가외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었고 

성종은 사건의 진위를 알고 있다는 가외라는 노비를 급히 잡아다가 신문합니다.

가외는 금방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털어 놨는데, 그 내용이 대충


고읍지라는 여자가 창원군의 구사(벼슬아치가 행차할 때 길을 안내하는 노비)로 그 집에서 일했는데, 

자신이 알기로는 창원군이 고읍지와 간통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에 그 고읍지가 머리가 깨져 죽은 여자일 거 같다고 말합니다.


가외에게 고읍지의 신상에 대해 물으니 그 모습이 죽은 시체와 비슷했고

아예 가외에게 죽은 시체를 가져와 보이니, 고읍지가 맞다고 합니다. 

죽은 시체가 고읍지가 맞다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처음부터 조금 의심스러웠던 창원군입니다.


이에 성종은 죽은 여인의 얼굴과 목에 사이에 칼자국이 낭자하였으니, 

창원군 이성의 집으로 환관 조진을 보내 흉기로 사용되었을 칼을 찾게합니다.



그러나 창원군이 자신이 죽인 게 아닌데 어찌 범행도구가 여기 있겠는가 하며 발뺌하자,

성종은 의금부 사람을 보내 범행 도구가 아니라도 집에 있는 칼을 다 가지고 오라 명합니다.

그러자 창원군은 자신에겐 칼이 없다며, 칼을 내어주는 걸 완강히 저항하지요.

점점 더 의심스러운 모습니다.


3부-



창원군에 관한 수사가 이루어지자 사건의 전말이 하나둘 드러납니다.

동부승지 이경동이 와 보고하기를,


창원군의 노비 원만, 석산, 산이를 신문해 자백을 받아냈는데 그 진술에 이르면, 

홍옥형이란 자가 고읍지와 몰래 간통을 했었습니다.

고읍지는 창원군과 홍옥형, 두 사람 모두와 간통을 했었던 거였지요.

요즘으로 치면 양다리. 


그런데 어느날 고읍지가 다른 여종 옥형에게 '내가 꿈에서 홍옥형을 보았다.' 라고 하니

창원군이 그걸 어떻게 듣고는 질투심과 배신감에 화가 치밀어 

자신의 노비들을 시켜 고읍지를 처마에 매달아 놓고 칼로 죽이게 시켰다는 것입니다.


-_-;;; 평소 행실이 안 좋기로 유명한 창원군이었지만,

자신이 간통하던 여종의 꿈에 다른 남자가 나왔다고 사람을 죽이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다.



다음 날 아침 어김없이 왕의 경연이 있었고 당연히 이 사건이 언급됩니다.

성종이 우부승지 김승경에게, 

'창원군의 집에 가 조사해보니 노비의 말처럼 정말 의심스러운 곳이 있는가.'

하고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벽 사이에 핏자국이 있었고 집에선 그곳이 개를 잡는 곳이라고 하지만,

집이 오래되어 확실치 않아도 충분히 의심스러움을 어필합니다. 


이에 성종은 다시 창원군의 집을 다시 자세히 재조사 시키니,

집 안 땅에선 다량의 피가 흐른 흔적과 벽에선 피가 뿌려진 흔적을 발견하지요.

시체의 모습을 보았을 때 머리와 목사이에 살점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칼로 인한 상처가 심했고,

그렇다면 죽였을 당시 엄청난 피가 뿌려졌었을테니 노비들의 증언과 정황상 창원군이 범인임이 상당히 유력해졌습니다.



창원군의 범인이 거의 확실해졌지만, 문제는... 창원군이 서자라지만 세조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성종은 세조의 손자. 창원군은 성종과 나이는 비슷하지만 성종에겐 삼촌뻘의 어른이라는 거지요.


이에 압박을 느꼈는지, 성종은 밀성군(세종의 다섯 째 아들)과 월산 대군(성종의 친형) 등을 이 사건에 참가시킵니다.




2월 5일, 창원군 이성은 의금부 문밖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합니다.

자신이 젊었을 때부터 행실이 바르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나, 이번 일은 자신의 종들이 고문이 두려워

거짓 증언을 했다는 겁니다. 만약 자신의 죽였다면 피해자의 가족 중에서 어찌 원통함을 고하는 자가 없는 것이며,

죽여서 성밖에 던졌으면 시체가 어찌 그것밖에 상하지 않겠냐는 거지요.



발견된 시체가 형상과 나이를 보았을 때 고읍지인 건 맞는듯 보였으나, 

창원군 말대로 정작 신원 확인을 확정지을 고읍지의 가족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성종은 아직 시체가 많이 상하지 않아 얼굴을 알아볼 수 있으니 친척을 찾아 확인하게 했려했지만,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친지란 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체도 있고 증거도 있고 증언도 있는데 친척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사건을 그대로 흐지부지 끝낼 수도 없는 일입니다.



2월 7일, 우부승지 김승경이 사건에 참가한 월산대군, 밀성군, 영의정 및 삼사의 뜻을 전하지요.

창원군의 노비가 증언을 했고 살인을 한 사실과 그에 대한 증거가 뚜렷한 편이니

창원군을 신문 해 죄를 결정하기로 하자는 거지요.


이에 성종은 만약 창원군을 신문하여도 죄를 자백하지 않는다면,

증거에 의해 죄를 정해야할 것이라 말하고, 종부시(왕실 종친의 잘못을 규탄하던 관청)로 하여금

창원군을 신문하도록 명합니다.



2월 10일, 월산 대군과 밀성군은 성종에게 창원군을 처벌을 원하며,


'세종 때에 익녕군 이치(태종의 8남)가 그 노비의 불알을 깐 죄로(-_-;;;;) 제천현으로 부처(유배)되었습니다.

지금 창원군 이성이 한 짓은 참옥하기가 익녕군보다 심하고, 

왕의 전교도 무시한 채 집의 수색도 거부하였으니 불경죄까지 더해진 상황입니다.

창원군의 직첩(벼슬 임명서)를 거두고 먼 지방으로 유배 보내소서' 라 아룁니다.


이에 영의정 정창손, 부원군 한명회, 좌의정 심회 등등이 

익녕군은 종을 죽이진 않고 불알을 깐 것만으로도 외지로 유배당했는데, 

지금 창원군의 죄는 그보다 심하니 먼 지방으로 유배보내는 게 맞다고 월산 대군의 의견에 동조하지요.


다만, 영돈령부사 노사신은 의견을 좀 달리하여,


창원군의 죄가 중하긴 하나 노비를 죽인 것이고 종묘 사직에 관계되는 것은 아니니

법령을 그대로 적용해 처벌하긴 힘들다 반박합니다. 

게다가 지방으로 유배를 보내면 젊은 혈기에 창원군이 행실을 함부로하다 무슨 일을 당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으니 

직첩만 거두고 집에 있으면서 스스로 반성하게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의견을 전하지요.



논쟁은 익녕군의 사례를 들어 이 사건은 그것보다 더 한 일인데, 

오직 세조의 친아들이라는 것만 믿고 증거가 명백한데도 죄를 피하려하는 창녕군을 엄벌해야한다는 쪽과

그래도 왕실의 인물이니 용서하는듯 보이게 하면서 근처에 두며 감시하자는 쪽으로 나뉩니다.


이에 성종은 죄가 엄중하긴 하나 종묘사직에 관계되는 일도 아니고

만약 외방으로 귀양보냈다가 혹여 창원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후에 후회할 수도 있으니,

그냥 직첩만 거두고 지금 집에만 머물게 하여 출입만을 그치는 쪽으로 하자며

월산 대군의 의견보단 노사신의 의견을 따르려 합니다.


이에 대간(임금이나 관료들의 과실을 언급하며 바로잡게 하기 위한 기관)들은

당연히 완강히 반대합니다.

지금 창원군의 죄는 그 정도가 중한데 이렇게 가볍게 처벌해버리다 후에 다른 큰 죄를 또 저지르면,

사람들이 전하께서 가볍게 처벌해 예방하지 못했음을 논할까 두렵다고요.


성종은 내일 저승들이 오면 다시 의논하여 분부하겠다 말하며 일단 판단을 보류합니다.

처음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안의 중대함을 강조하며 범인을 강력히 처벌하고자 하는 성종의 의지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친족임이 밝혀지자 점점 약해져만 갑니다.


.......




-4부-



다음날 아침 경연에서 당연히 창원군의 처벌을 어떻게 해야하나에 대해

주된 논의가 또 이루어집니다.



집의(사헌부 종3품) 이칙이 아뢰기를,


'친족을 친애함은 은혜로 이루어지고, 은혜를 행함은 의리로 이루어지는데,

은혜에만 치우치면 의리를 해치고, 의리에만 치우치면 은혜를 상함으로,

반드시 은혜와 의리를 겸해야 돈목(정이 두텁고 화목함)의 도(道)가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창원군은 지금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임금에 대한 불경죄를 저질렀으니,

신하의 죄로서 무엇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전하께서 친족을 친애한다는 이유만으로 직첩만 거두시면,

다른 날에 더 큰 죄를 범할 경우 그건 우연이라 보기 힘든 것입니다.

모름지기 창원군을 멀리 부처(유배)하소서.' 하고,


사간(임금의 잘못을 논박하는 것이 임무인 종3품 벼슬) 경준이 말하기를,


'자꾸 회남왕의 일을 인용하여 비유하는데, 그건 이와 똑같지 않은 사건입니다.

창원군의 죄가 중하니 법에 의거하여 죄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며 창원군을 유배보내야한다 합니다.


성종이 이에 다른 이들에게 의견을 물으니, 영사 심회, 동지사 서거정 등 역시

창원군의 죄가 가볍지 않으니 외방에 부처하는 게 적당하다 고하지요.



친족이라 보호해주고 싶은 성종의 마음과 별개로 주위 대부분 신하들은

창원군에게 법의 지엄함을 보여야한다는 쪽으로 몰리게 됩니다.

성종은 '내가 다시 헤아려보겠다.' 하곤 경연을 파합니다.



성종이 자꾸 창원군을 보호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자,

월산 대군(성종의 친형) 이정 등이 모든 종친을 데리고 고하기를


'(익녕군이 종의 불알을 까 외방에 부처된 것을 언급하며), 창원군의 죄는 그보다 훨씬 더 중합니다.

모름지기 외방에 부처하시옵소서' 합니다.


이에 성종이 대답하길, 

'왕자(王子)의 죄로서 직첩(관직 임명장)만 빼앗아도 족한데, 귀양까지 보내야하겠는가.

익녕군은 세종의 친아우이나 창원군은 나에게 삼촌뻘에 해당하니 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하니 월산 대군 등이 다시 아뢰기를,

'임금과 신하 사이에 존속을 따질 수 있습니까. 부처하시옵소서.'


이날 또한 의정부에서도 사헌부 이계손, 사간원 김자정 등도 유배보내는 것이 맞다며

상소를 올리고 의견을 고합니다.




신하들 뿐 아니라 성종의 친형, 주위 모든 신하들이 

창원군에 대해 중벌을 내리도록 압박합니다.

비록 왕이지만, 종친부터 신하까지 모두 저렇게 한 목소리이니 참 버틸 수가 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일단 성종은 창원군에 대한 일은 유보하고, 창원군의 노비들에 대한 처벌만 완화합니다.

노비들은 자신이 여인을 죽이려해서 죽인 게 아니라 창원군이 시킨 것을 따른 것일 뿐이니,

처벌을 완화하는 게 맞다고하며, 일단 노비들은 처벌을 감형해줍니다.



이렇게 신하들은 창원군을 유배보내야한다 주장하고

성종은 창원군을 감싸주려고 하는 성종의 입장이 팽팽히 맞섭니다.

하지만 창원군을 깜싸주기엔 그 죄가 너무 중하니 성종으로서도 한계에 직면하지요.


그러자 성종은 사건에 대한 처리 흐름을 조금 비틀고자 합니다.

증거도 증언도 확실해보이긴 하지만, 처음부터 찝찝했던 살해당한 고읍지라는 여인의 신상이 밝혀지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실제 창원군도 고읍지의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다며 계속해서 무죄를 주장하고 있었고요.


이에 성종은 사안이 중대하니 사건의 처리함을 확실히 해야할 필요가 있는데,

아직 고읍지의 신원이 확인되지 않아 처벌하기에 부족한 면이 있고

그러니 창원군에 대한 신문을 자신이 직접하는 게 어떠하냐라고 주위에 묻습니다.


한 마디로 자신이 재판을 직접 담당해 이 사건을 밑바닥부터 처리해보겠다는 거지요.

이에 당연히 신하들은 난리가 납니다. 

이를 구실로 창원군의 죄를 감해주려는 성종의 속셈을 모를리가 없을테니까요.




이에 월산대군은

'고읍지의 출처를 아는 유일한 인물이 박귀남인데, 박귀남이 이미 사망한 상태라 

더이상 물을 곳이 없습니다.' 라며 성종에 의도에 반대합니다.


밀성군 이침 역시 '이는 종묘사직과 관련된 일이 아니기에 임금이 직접 추문하는 건 옳지 않으며,

박귀남 역시 죽었으니 더이상 물을 곳도 없다. 불가합니다.' 합니다.


이외 정찬손, 윤필상, 홍응, 정효상 등 모든 인물이 임금의 직접 추문은 안 된다고 하니

성종은 참으로 답답한 상황... 이에 내일 경연에서 다시 이야기하겠다고 하지요.




다음 날 아침 정사를 보면서 성종이 묻기를 


'창원군이 아직 자신의 죄에 대해 승복하지 않고 있고,

그런 상태이니 억지로 죄를 주는 건 맞지 않다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내가 친히 물은 후 죄를 정하고자 하니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한명회 등이 한 마디로

'불가합니다.' 라고 딱 잘라 선을 긋습니다.



결국 창원군에 대한 직접 추문은 포기하고 사건에 관련된 사람을 추국하려하니 

주위 신하들은 이마저도 반대합니다.


신준, 박숙진은 

'신들로 하여금 묻게하면, 이 또한 성상께서 직접 물으시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고 자신들을 시켜 물으라 말하고,


손수효, 손비장도 말하기를

'재판 판결이 잘못되거나 미진한 곳이 있으면 다시 의금부로 회부를 해야하지,

이런식으로 마무리 단계의 사건을 무마하려고 들어선 안 된다'고 반대합니다.



하는 일마다 안 된다 안 된다 기를 쓰고 반대하는 신하들의 의견에

결국 폭발해 버린 성종. 


'내가 재판 결과를 의심하는 게 아니다. 

다만 창원군이 억울하다고 말하므로 조금이라도 미진함이 있는데, 

증거에만 의거해서 죄를 정한다면 불가하거니와

내가 유감이 없게 하면 창원군도 죄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경들은 어찌하여 고집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가? 


임금이 조그마한 일에 너무 살펴서는 안 되겠으나,

이 일은 가볍지 않음으로 내가 친히 묻고자 하는 것이다.

만일 경들의 말과 같다면 한 나라의 일은 다 관아에 회부하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맞다는 건가?'




사건의 미진함을 근거로 창원군에 대한 죄를 줄여주고자 하는 성종과

그 의도를 알고 어떤 식으로든 반대하려는 주위 신하들.


이미 이 사건의 흐름은 더이상 살인 사건이 중심이 아니게 되어버렸습니다.

성종과 신하들의 줄다리기 싸움이 되어가고 있었죠.


-5부-



두개골이 깨진 여인이 처음 발견 된지 벌써 한 달이 넘게 지났습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이 사건은 범죄와 진상규명이 중심이 아닌,

왕과 신하의 정치적 힘싸움이 중심이 되는 느낌입니다.

한 달동안의 상당수 실록 기사가 이 창원군 이야기인 걸 보면,

당시 조정에서 이 사건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대충 짐작이 갑니다.


참 아이러니한 게 원칙대로라면 신하들이 말하는 것처럼 창원군을 벌주는 게 맞는데,

신하들에게 엄청나게 시달리는 성종을 보면 왠지 성종의 편을 들어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 생기네요.



성종 9년 2월 19일,

그 전의 논쟁의 연장선상으로 창원군을 빨리 처벌하자는 이야기와

성종의 고읍지 출처가 확실치 않아 자신이 마음이 결정되지 않으니 창원군에게 억울한 면이 없는지에 대한

경연에서의 논의를 마지막으로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한동안 잠잠해집니다.


그런데 2월 28일, 성종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이 발생합니다.

바로 창원군의 첩 옥금이 창원군의 죄를 승복하지 않는 것이지요. 

한성 판윤 어세공은  옥금이 간사하여 쉽게 입을 열리 만무하고,

이미 형문(몽둥이로 때리며 심문하는 것)으로 지쳤으니 2~3일 지난 뒤 다시 심문하자 합니다.


그러자 헌납 김괴는, 죄 없는 사람을 자꾸 가두고 형문하는 게 옳지 못하다 반대하고요.


다 끝난 것 같아 보였던 창원군에 대한 재판이 자꾸 질질 끌리니 

성종은 드디어 자신이 직접 심문하겠다고 하지요. 

당연히 주위에선 반대하지만, 질질 끌기만 하는 재판에 성종은 자신의 의견을 관철할 명분을 얻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창원군 사건 관련 노비들을 성종은 친히 심문합니다.




그러나 임금이 눈앞에서 노비를 직접 심문하자 진실이고 뭐고가 있겠습니까.

창원군의 노비인 가외, 원만, 석산, 성금, 도질금, 무심 등이 한 목소리로

'우리 주인이 고읍지를 죽인 것이 틀림 없습니다.'

하고, 돌양 산이, 부합 등은 처음엔 좀 망설였으나 결국엔 고읍지를 죽였다 합니다.


하지만 이는 왕이가서 심문하니 원하는 답이 나온 것이란 걸 성종의 의심하지 않을리 없었습니다.

이에 성종은 창원군이 죽였다는 실질적인 증거가 필요하니,

고읍지를 죽이는 데 이용되었다는 노비들이 증언한 환도를 찾으라고 합니다.



내관 조진 등을 창원군의 집으로 보내 환도를 찾으려 하자, 창원군은 억울하다며


'당초 심문할 때 노비 원만이 환도의 모양을 거짓으로 말하였음으로 다른 노비도 또한

거짓으로 승복했을 뿐입니다. 어찌 환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자신은 고읍지란 자를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원만이 죽였다고 말하였으니, 

오히려 원만에게 물으소서.' 라고 자신의 완전 무죄를 주장하지요.


노비들이 증언한 살해 도구에 대해 이야기를 잠깐 해보면,

노비들이 그 환도의 모양과 장식을 일치되게 진술했다고 하는데

사실 그게 노비들을 각기 다른 장소에서 개별적으로 질문해서 일치한 것인지

그냥 같이 모두다 심문했는데, 원만 한 명이 먼저 말하니 다른 사람들이 따로 말한 건지..현재로썬 알 수가 없습니다.

후자라면 노비들이 말한 진술이 사실 큰 의미가 없지요.


또한 창원군이 정말 범인이라고 하더라도 살해도구를 그 때까지 집에 정말로 두었을 가능성이 만무합니다.

실제 사건 초창기 창원군의 집을 수색하려했을 때 창원군은 이를 거부했었고,

그 후 자신이 의심을 살만한 짓을 했다는 걸 모를리 없을테니 환도를 버릴 기회는 충분했습니다.


여하튼 지금까지 정황상 창원군이 의심을 살만한 행동은 엄청나게 했고 

의심할만한 증거는 잔뜩 나온데다 주위 증언도 넘쳐나지만,

피해자의 신원과 살해도구라는 가장 중요한 두 단서가 없는 그런 상황인 것이죠.



3월 11일. 첫 시체가 발견된지 딱 두 달째 되는 날입니다.

날도 이제 꽤 풀린 상태인지라 고읍지의 시체는 썩어버려 신원 확인이 불가능한 시기일테고, 환도는 결국에 못 찾았습니다.

하지만 피해자는 잔혹하게 살해되었고 유력 용의자는 왕족인 창원군.

재판에 관한 처벌은 어떤 식으로든 결정 지어야하는 상황이지요.

즉, 결전의 날인 것입니다.



종부시(왕실의 잘못을 조사 규탄하는 관청)에서 아뢰기를,


'창원군 이성이 고읍지를 죽인 것은 사건의 흔적(집안의 핏자국들)이 명확하고,

여러 사람의 증거가 명백하니 그의 죄가 확실한데, 창원군 스스로 말하기를,

'신은 본래 고읍지라고 일컫는 여인을 알지 못하며, 지금까지 여인을 살해한 일이 없습니다.

집안에 다만 삼인검과 삼진검이 각각 한 자루씩 있을 뿐이고, 환도 또한 없습니다.'

라고 합니다. 비록 되풀이하여 추궁해 따져도 조금도 승복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청컨데 성상께서 재단하소서.'


하니 성종은,

'증거에 의거하여 너희들이 조율하라.' 했다가 금방 말을 바꿔서,


'왕자를 담당 관아로 하여금 조율하게 하는 일은 그 사례가 없다.

내가 직접 판결하려고 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이것을 정승에게 문의하라.'

합니다. 자신이 직접 이 사건을 판결하겠다는 거죠.



이에 정인지와 윤사흔은,

성종이 죄를 결정하더라도 정부와 육조에서 함께 의논하여 죄를 결정하자 건의합니다.


이어, 정창손, 한명회, 심회, 윤자운, 김국광이 성종에게 고하기를,


'창원군 이성의 큰 죄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처음에 여인의 시체 사건의 발생하였을 때에 삼사의 수사관이 왕명을 받들고 그 집에 이르니,

창원군이 왕명을 거역하고 그들을 집에 들이지 않았으니, 그 죄의 첫째이고,


살인한 형적이 이미 드러나 성상께서 친히 심문하셨음에도 

죄를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음이, 그 죄의 둘째이며,


칼로써 함부로 사람을 죽여 포학한 행위를 멋대로 하여 거리낌이 없었으니,

그 죄의 셋째이고,


그 흉학한 행위를 감행한 칼(환도)을 종들이 형체와 모양을 분명히 말하였는데도,

내관이 전교를 받들고 물을 때에 숨기고 승복하지 않았으니, 그 죄의 넷째입니다.


창원군은 비록 왕자이나, 이같은 큰 죄를 범하였으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종묘사직에 관련된 것이 아니니 성상께서 직접 판결하심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성종이 직접 판결하라 의견을 정합니다.


사건 처음부터 끝까지 성종의 의견에 반대만 했던 대신들이,

처음으로.. 그것도 가장 결정적인 권한을 성종에게 양보(?)합니다.

이렇게 사건의 결정권을 손에 넣은 성종은 의정부, 대간, 육조 등의 관원을 불러 의논을 하고 결국 판결을 합니다.






'창원군을 부처(유배)하라'




-마지막-


창원군을 끝까지 지키고자 노력했던 성종은 결국 창원군 유배를 허가합니다.


이에 의금부에선

창원군의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하거나 진상을 알았는데 고발하지 않은 노비의 경우 장형을 내리고 

양인은 천민으로 사노비는 아주 멀리 떨어진 고장의 관노비로 영속하자 합니다.

그에 성종은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한 사람들은 말한대로 처벌하지만,

사건을 알았지만 고발하지 않은, 직접적으로 사건에 관련되지 않은 사람들의 죄를 묻지 않는 방향으로 가지요.


언제나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하는 신하 덕분에 성종의 뜻이 관철되지 않은 건 아쉽지만, 

사건은 어떤 의미에서 잘 해결되었고 관련자 처벌 역시 납득 가능할 정도로 타당했습니다.




하지만 사건 이틀 뒤, 3월 13일 성종은 금방 마음을 바꿔버립니다.


그 이유는 대왕대비의 하교 때문이었지요.


'세조 대왕의 친자에 오직 창원군 형제만이 있을 뿐인데, 하루아침에 외방에 방치한다는 것은 마음에 차마 할 수 없다. 

하물며 창원군은 생계가 매우 어려우니, 만약 집을 떠나 생업을 잃는다면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니 우선 너그럽게 용납하여 개과 천선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떠한가?'

하고 성종에게 물은 것입니다.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 이런 말을 하니 성종도 어쩔 수 없는, 한 편으론 창원군을 보호할 좋은 핑계 구실이 생겼죠.

이에 창원군의 부처(유배)를 멈추고, 그 뜻을 대간과 정승, 삼사를 불러 알립니다.



당연히 이 일을 가장 크게 반대하고 나선 건 대간들이었습니다.


사간부 김괴가 나서서 반대하나 성종이 뜻을 굽히지 않으니,

사헌부 이세광이 같이 나서서 원래 창원군의 죄는 부처가 아닌 더 큰 벌을 받아야함에도

왕의 친족이라 오히려 감형을 받은 건데 아무리 대비의 하교라도 그 벌마저 주지 않으면 말이 되냐고 따집니다.


하지만 성종이 그 뜻을 굽히지 않자 사헌부 대사헌과 사간원 대사간인 유지와 김자정까지 나서

창원군 이성의 부처 철회의 부당성에 대해 고하지만 결국 성종은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경연에 이 사건에 관련된 노비들에 대한 처벌까지 완화합니다.

고읍지를 죽이고 성 밖으로 내던진 직접적인 가담자들의 처벌은 필요하겠지만,

주인의 죄를 목격하거나 간접적으로 가담한 노비들은 그 죄를 줄여 관노비로 예속시킵니다.


이로서 두개골 깨진 여인 시체로 도성을 떠들석하게 했던 사건은 완전히 종결됩니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이자 가해자로 밝혀진 창원군은 결국 유배형조차 받지 않게 되고,

사건 관련자 몇 명만 외지의 관노비로 영속되는 것으로 사건은 끝납니다.

이 사건 전까지만해도 행실문제로 실록에 빼곡하게 거론 됐던 창원군은 그 후로 아주 조용히 살았는지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성종은 그 후에도 창원군을 잊지 않고 말을 한 필 보내준다거나 쌀이나 콩을 하사하지요.

또 성종이 사냥을 구경 나갈 때 따라가기도 하고 궁에 입시하기도 하지만,

창원군의 행실에 대해 상소하는 글은 전무합니다.


이는 창원군이 정말 사건의 범인이라면 더이상 죄를 지으면 안 된다 생각했기에 얌전히 지낸 것이었거나,

창원군이 범인이 아니라면 자신의 행실을 문제삼아 없는 죄도 만들어 내 자신을 벌주려하는 상황이 

또 올 수 있다 생각했기에 죽은 듯 조용히 살 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창원군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6년후 27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그의 시호는 여도(戾悼). 전의 허물을 뉘우치지 아니한다는 뜻이지요.

창원군 어머니인 근빈 박씨가 그 시호를 고쳐주길 원했지만 결국 대신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고종 때 가서야 장소공으로 추증됩니다.



처음 이 사건을 접했을 땐 창원군이 왕실에 위협이 된다 생각하여

성종이 일부러 사건을 만들어 내 죽이려든 게 아닌가 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성종의 친형도 있는데, 서자인 창원군이 뭘 할 수 있겠으며 무슨 위협이 될까요.


게다가 창원군이 가장 유력한 범인이라고 지목된 상황부터 성종은 창원군을 끝까지 지키려 했습니다.


제 개인적인 추측은,

창원군은 원래 행실이 아주 안 좋고 그 때문에 조정 안에서도 엄청난 말이 돌았던 인물이라

신하들이 어떻게든 벌주기 위해 노력했을 겁니다.


하지만 성종의 보호 아래 아무런 벌을 받지 않았고 때문에 그의 행실은 더욱더 나빠진 것이죠.

그런데 마침 두개골 깨진 여인 살해사건이 발생하고,

창원군이 원래 평소 행실대로 함부로 행동하며 성종의 명까지 어겨가며 수사를 방해하자

신하들 입장에서 그를 처리한 아주 좋은 구실을 스스로가 만든 게 아닌가 합니다.


이런 중대한 사건의 결론은 어떤 식으로든 나야했고,

정치적으로 힘없는 인물 하나를 제거하기위해 증거를 꾸미는 건 일도 아닌데다

증언은 관련자들은 고문하여 심사하면서 대답을 끌어내면 되는 것이니까요.


게다가 물증이 미약하여 처벌한 근거가 애매모호하다면,

왕조시대의 최악의 폐륜인 왕명을 어긴 일을 빌미로 삼아도 됐고요.

흔히 이 사건을 평가하길 살인은 가볍게 취급하고 왕명을 어긴 건 무겁게 취급했다하여 비난하는데,

개인적으로 당시 왕명을 어긴 것이 더 중죄라 말한 건 정말 살인보다 그게 중죄라기 보다는

어떻게든 창원군을 벌주기 위한 구실이었다 생각합니다.



뭐, 이런저런 제 분석이 다 헛발질이며 창원군이 진짜 범인일 수도 있겠지만요. 흐흐

실록이 아무리 자세하다 한들 모든 정황을 다 알 수는 없기에 완벽히 추리기에는 한계가 있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