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조선시대 사람들의 여름나기

구름위 2013. 6. 19.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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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한강서 뜬 얼음 氷庫서 꺼내 “ 어 시원타!”

 

푹푹 찌는 한낮의 무더위 속에서도 온갖 복장으로 위엄을 갖춘 왕실 사람이나 갓을 쓰고 도포를 차려입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모습을 떠올리다 보면 답답함이 먼저 와 닿는다. 체면상 옷을 벗고 돌아다닐 수도 없고, 농민이나 노비처럼 시냇물에 ‘풍덩’뛰어들기도 쉽지 않다. 부채를 부치면서 책을 읽으며 더위를 피해 보려 하지만 이 역시 만만치가 않다. 한여름의 무더위는 조선의 왕실 사람이나 선비들도 피해갈 수 없었다. 과연 이들은 어떻게 더운 여름을 이겨 나갈 수 있었을까?

 

#1. 국가에서 관리한 한여름 얼음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었다뿐이지 선비들의 여름나기는 기본적으로 우리네 여름나기와 비슷했다. 간편한 복장, 부채질하기, 등목하기, 서늘한 나무 그늘에서 쉬기 등등. 일부 잘나가는 양반들은 귀하다는 한강의 얼음까지 맛볼 수 있었다. 신라 시대 경주에 석빙고 유적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 조상이 오래전부터 얼음을 이용해왔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겨울철 한강의 얼음을 떠서 동빙고와 서빙고에 보관하였다. 동빙고는 한강변 두뭇개,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에 있었고, 서빙고는 지금의 서빙고동 둔지산(屯智山) 기슭에 있었다. 19세기 서울의 관청, 궁궐 풍속 등을 정리한 ‘한경지략(漢京識略)’의 궐외각사(闕外各司) 조항에는 ‘빙고(氷庫)’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동빙고가 두뭇개에 있다. 제사에 쓰는 얼음을 바친다. 서빙고는 둔지산에 있다. 궁 안에서 쓰이고 백관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할 얼음을 공급한다. 이들 빙고는 개국 초부터 설치되어 얼음을 보관하고 공급하는 일을 맡았다. 동빙고에 옥호루(玉壺樓)가 있는데 경치가 뛰어나다.”

 

◇혜원 신윤복의 ‘주유청강’.

 

동빙고의 얼음은 주로 제사용으로 쓰고, 서빙고의 얼음은 한여름인 음력 5월 보름부터 7월 보름까지 종친과 고위 관료, 퇴직 관리, 활인서의 병자, 의금부의 죄수들에게까지 나누어 주었다. 네 치 두께로 얼은 후에야 얼음을 뜨기 시작하였다. 이에 앞서 난지도 등지에서 갈대를 가져다가 빙고의 사방을 덮고 둘러쳤는데 냉장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얼음을 뜰 때에는 칡으로 꼰 새끼줄을 얼음 위에 깔아 놓고 사람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였다고 한다. 얼음을 뜨고 저장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세종실록’에는 장빙군(藏氷裙)에게 술 830병, 어물 1650마리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나타나 얼음을 저장하는 사람들에게 세심한 배려를 했음을 알 수가 있다. 얼음을 빙고에서 처음 꺼내는 음력 2월 춘분에는 개빙제(開氷祭)를 열었다. 얼음은 3월 초부터 출하하기 시작하여 10월 상강(霜降) 때 그 해의 공급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겨울에 날씨가 따뜻하여 얼음이 얼지 않으면 사한단(司寒壇)에서 추위를 기원하는 기한제(祈寒祭)를 올렸다. 영조 때에는 기한제 이후에 얼음이 꽁꽁 얼자 제관(祭官)들에게 상을 내렸다.
 

나라에서 설치한 빙고가 있었지만, 일반인들도 얼음을 이용하면서 점차 얼음의 수요가 늘어나자 공급이 부족하게 되었다. 18세기에 이르면 사적으로 얼음을 공급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어 한강 근처에만 30여 개소의 빙고가 설치되었다. 한강에서 얼음을 채취하는 모습은 이제 낯선 풍경이 되어 버렸지만 1970년대까지도 얼음 채취의 명맥은 이어졌다.

 

#2. 산행하며 심신을 북돋운 옛 선비들

 

◇겸재 정선의 ‘독서유가’.

 

얼음 공급이 국가적 차원에서 더위를 이겨내는 중요한 시스템이었다면, 선비들에게 일상화되었던 더위 극복 이벤트는 바로 산행이었다. 여름철 선비들은 더위를 피해 산수가 아름다운 인근의 산으로 장기간의 산행을 떠났다. 더위도 피하고 스승과 제자들이 회합하면서 학문과 현실을 토론하는 시간도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산행에서 느낀 감흥과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담아 기행문으로 남겼다. 선비들이 즐겨 찾았던 산은 백두산, 한라산, 금강산, 지리산, 오대산, 묘향산, 속리산, 가야산 등 예나 지금이나 명성이 높은 산들이었다.

 

1558년 첫 여름 조식(曺植·1501∼1572)은 제자들 일행과 함께 지리산 여행을 떠났다. 여름의 더위를 피해보고자 그의 제자들이 선생이 공부하던 지리산 근처에 모여 단체 산행을 한 것이다. 조식은 퇴계 이황과 같은 해에 태어나 당대에는 이황과 더불어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던 학자였다. 지리산 산행에 앞서 조식 일행은 칼국수, 단술, 생선회, 찹쌀떡, 기름떡과 같은 음식과 소합원, 청양유 같은 비상 구급약도 준비하였다. 

 

◇경주 석빙고 전경.

 

조식은 산을 오르는 데만 만족하지 않았다. 지리산 곳곳의 유적들을 보고 역사 속 인물들을 떠올렸고, 신응사라는 절에 들렀을 때는 세금이 무거워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 현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갑자사화로 희생된 사림파 선배 학자 정여창의 거처를 지나면서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였다. 지리산 산행은 단순한 산행이 아니라 선비로서의 위치 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재충전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기행문의 말미에서 조식은 지리산 산행을 떠난 것이 11번이나 된다고 하였다. 그만큼 지리산은 한여름의 피서처이자, 제자들과의 끈끈한 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공간이었다. 조식은 지리산 기행의 감상을 ‘유두류록(遊頭流錄)’이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조식의 ‘유두류록’을 비롯해 남효온의 ‘금강산유람기’, 김창흡의 ‘오대산기행’, 채제공의 ‘관악산유람기’ 등 산행의 감흥을 기록한 선비들의 기행문은 문집 속의 기록으로 남았고, 상당수의 책은 번역까지 되어 있다. 올여름 국토와 산천의 아름다움, 그리고 역사를 노래한 선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더위를 쫓는 것은 어떨까? 우리보다 앞서 갔던 명산의 기억들을 정리한 기행문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3. 더위를 쫓는 부채의 미학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

 

조선시대 풍속화에도 일부 나오지만, 최근까지도 더위를 쫓는 일등공신은 부채였다. 휴대하기에 편리함과 더불어 선비들에게는 체면치레용으로, 부녀자에게는 장식품으로 부채는 활용되었다. 19세기의 학자 이유원이 쓴 ‘임하필기’라는 책에는 황해도 재령 등지에서 생산되는 풀잎으로 엮어 만든 부채인 팔덕선(八德扇)의 이야기가 나온다. 팔덕이란 바람 맑은 덕, 습기를 제거하는 덕, 깔고 자는 덕, 값이 싼 덕, 짜기 쉬운 덕, 비를 피하는 덕, 햇볕을 가리는 덕, 독을 덮는 덕 등 8가지로 부채의 실용성을 압축적이고 해학적으로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문헌 가운데 부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 견훤조에 보인다. 고려 태조가 즉위하자 견훤은 사신 편에 대화살[竹箭]과 함께 공작의 깃으로 만든 부채인 공작선(孔雀扇)을 보냈다. 부채가 귀한 사람에게 주는 상징물로도 기능 하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 조선시대 주요 왕실 행사에는 부채가 꼭 등장하였다. 우리나라의 부채는 외국에도 인기가 있었다. 고려, 조선시대에 걸쳐 부채는 중국을 비롯하여 일본, 몽고 등지에 국교품(國交品)으로 전달되었다. 명나라 사신들은 특히 조선의 부채에 관심을 보였다. 광해군 때인 1622년(광해군 14) 명나라 사신에게 백선(白扇) 224자루, 유선(油扇·기름 먹인 부채) 1830자루를 준 기록이 보인다. 일본의 도쿠가와 시대에는 조선의 부채를 모방하여 조선골선(朝鮮骨扇)을 만들기까지 하였다. 

 

◇한겨울 강가에서 여름에 쓸 얼음을 뜨는 장빙 재연 행사.


우리 속담에 ‘단오 선물은 부채요 동지 선물은 책력(冊曆)’이라는 말이 있다. 음력 단오는 곧 여름이 시작됨을 의미하고 더위에 대비하여 부채를 준비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조선말기까지는 공조에서 해마다 단오 부채를 만들어 왕에게 올렸고, 왕은 다시 신하들에게 하사하였다. 각 지방에서도 그곳 특산품으로서 부채를 궁중에 진상하였고, 도 관리나 친지들에게 선물하였다.

 

지방의 부채 중에서는 전주와 남평의 것이 좋은 부채로 인정을 받았다. 부채에서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은 부채의 그림이다. 조선후기 서울의 풍속을 기록한 ‘경도잡지(京都雜識)’에는 ‘단오에 부채를 서울 관원에게 나누어주는데, 부채 면에 새나 짐승의 그림을 그렸다’고 하여 부채에 그림 그리는 풍습은 오래도록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부채에 이름 있는 화가들의 그림이나 명필가의 글씨를 받는 풍습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부채 중에는 김홍도의 ‘서원아집’ 정선의 ‘정양사’ 최북의 ‘설경산수도’ 등 명화(名畵)들이 많다. 

 

◇각종 부채들


부채는 여름에 주로 사용되었으나, 숯불을 피울 때나 다리미질을 할 때 등 일상생활에 자주 활용되었다. 양반이나 부녀자가 체면용이나 얼굴을 가릴 때 쓰는 일도 흔하였다. 부채는 더위를 쫓는 가장 간단한 휴대품이자 각 방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실용품이었다. 최첨단 전자기기가 유행하는 현재에도 부채가 그 생명력을 잃지 않는 것은 이러한 효용성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올여름 옛 선비들의 풍류가 묻어나는 부채를 들고서, 명산대천을 유람해 볼 것을 권한다. 옛 선비들의 기상까지 이어받는다면 쉽게 더위를 이겨나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