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옛사람들의 활쏘기

구름위 2013. 6. 19.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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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터 명궁의 나라… 이유있는 양궁 강국

 

◇고구려 고분 무용총에 그려진 벽화 ‘수렵도’.


활과 우리 민족의 인연은 고대국가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이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용어였던 동이(東夷)라는 말의 ‘이(夷)’자는 활 궁(弓)이 포함된 글자로 ‘동쪽의 활 잘 쏘는 민족’의 뜻을 내포한다. 그만큼 우리 민족은 오래전에 주변국으로부터 활쏘기에 능한 민족으로 인식되었다.

 

#1. 태조 이성계의 활솜씨

 

고구려를 세운 동명왕이 활쏘기에 뛰어났던 사실이나 고구려 벽화에 기마 자세를 하면서도 뒤돌아 활을 쏘는 무사들의 모습에서 우리 민족의 뛰어난 활쏘기 솜씨는 쉽게 접할 수 있다. 고구려의 뛰어난 활쏘기 전통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였다. ‘태조실록’에서는 태조의 신기에 가까운 활쏘기 솜씨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을 하고 있다.
 
◇신하들이 쏘는 과녁에 그려진 푸른색 바탕의 사슴머리. 왕이 쏘는 과녁에는 붉은 바탕에 곰의 머리가 표적으로 그려져 있다.

 

“태조가 젊을 때, 정안 옹주 김씨가 담 모퉁이에 다섯 마리의 까마귀가 있음을 보고 태조에게 쏘기를 청하므로, 태조가 단 한 번 쏘니 다섯 마리 까마귀의 머리가 모두 떨어졌다.”

 

“태조가 일찍이 한더위에 냇물에 목욕을 하고 난 후에 냇가 근방의 큰 숲에 앉아 있는데, 한 마리의 담비가 달려나오므로, 태조는 급히 박두(樸頭·조선시대 무과시험 때나 교습용으로 사용하던 화살)를 뽑아 쏘니, 맞아서 쓰러졌다. 또 한 마리의 담비가 달려나오므로 쇠살(金矢)를 뽑아 쏘니, 이에 잇달아 나왔다. 무릇 20번 쏘아 모두 이를 죽였으므로 도망하는 놈이 없었으니, 그 활 쏘는 것의 신묘(神妙)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태조는 뛰어난 활솜씨로 고려말 왜구의 격퇴에 앞장서 구국의 영웅이 되었으며, 결국은 새 왕조를 건설한 주역이 되었다.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에는 중국의 창, 일본의 칼과 견줄 우수한 무기로 활을 들고 있는가 하면, 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못 미치는 것으로 부녀의 수절, 천인의 장례와 제사, 맹인의 점치는 재주, 무사의 활 쏘는 솜씨 4가지를 들고 있다. 이 기록 역시 우리 민족과 활의 불가분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 활쏘기는 수양과 예의 회복

 

그런데 전통사회에서 활쏘기는 단순히 무예만을 시험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주례’에는 활쏘기(射)가 예(禮), 악(樂), 어(御), 서(書), 수(數) 등과 함께 육례(六禮)의 하나로 중시되었으며, ‘논어’ ‘맹자’ ‘예기’ 등의 유교경전에는 ‘사(射)’가 무엇보다 심신의 수양을 가져오는 행위로서 중시하였다. 예로부터 활쏘기가 수양과 예의 회복에 비중을 두고 있었음은 다음의 자료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射)는 진퇴와 주선이 예에 맞고, 안으로 뜻이 곧고 밖으로 몸이 바른 연후에 궁시를 심고하게 잡아야 한다. 궁시가 심고한 연후에야 적중시키는 것을 말할 수 있고 이로써 덕행을 볼 수 있다.”(‘예기’ 제46편 사의(射儀))

 

“어질다는 것은 활 쏘는 것과 같다. 활 쏘는 것은 자신을 바로잡은 후에 발하는 것이다.”(‘맹자’ 공손추 상)

 

한편 조선시대 활쏘기는 왕권의 강화나 국방강화를 위한 기본적인 덕목이었다. 이러한 취지에 맞추어 국왕이 문무관리들과 정기적으로 활쏘기를 하는 행사인 대사례(大射禮)가 시행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에서 대사례가 시행되었던 것은 1477년(성종 8), 1502년(연산군 8), 1534년(중종 29), 1743년(영조 19) 등 4차례로 확인된다. 그러나 대사례 외에 어사(御射)·시사(試射)가 빈번하게 실시되었고, 지방에서 실시되는 향사례(鄕射禮)도 매우 활성화되어 있었다.

 

조선사회에서 사례(射禮)가 중요한 의미를 지녔음은 기록화에서도 확인된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에 행차한 모습을 8폭의 병풍으로 담은 ‘수원능행도’ 중에는 정조가 득중정(得中亭)에서 활쏘기 시범을 보인 모습을 담은 득중정 어사도(御射圖)가 남아 있어서 국가의 중요한 잔치에 활쏘기가 빠지지 않았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3. 영조 시대 대사례의 실시

 

1743년 영조는 성균관에서 대사례의 예를 행하였다. 영조는 대사례가 시행되는 날 200년 만에 조종의 구례를 회복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한편 자신의 나이가 50세가 되었을 때 이 행사가 열리게 되는 것을 매우 감격해하였다.

 

또한 200년 만에 맞는 대사례를 기념하기 위하여 각도의 관찰사 및 수령들에게 전국의 인재를 두루 뽑아 시상할 것을 명하고, 특별히 이 행사를 기록으로 남길 것을 지시하였다. 결국 이날 행사의 기록은 ‘대사례의궤’로 남아 조선시대 왕과 신하가 참여한 활쏘기 행사의 면모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단원 김홍도의 ‘필사궁’.

 

대사례가 성균관에서 열린 것은 국왕이 친히 성균관에서 행차하여 유생들을 격려하고 이들에게 심신의 수양을 쌓을 것을 권장하려는 취지에서였다. 조선시대에 성균관 유생들은 국가의 원기(元氣)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그만큼 국가에서 거는 기대도 컸다.

 

영조는 1743년 윤4월 7일 원유관과 강사포 차림으로 창덕궁 영화당에서 작은 가마를 타고 집춘문을 통해 궁궐을 나왔다. 궁궐을 나온 영조는 창덕궁과 연결된 성균관의 하련대(下輦臺)에 이르러 가마를 내렸으며 임시 숙소인 악차(幄次)에 들어가서 제복(祭服)인 면복으로 갈아입은 후 성균관 문묘에서 선현들을 참배하는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악차로 돌아온 영조는 익선관과 곤룡포 차림으로 성균관 명륜당으로 들어가서 이곳에 대기하고 있던 신하들과 유생들을 격려한 후 본 행사인 대사례 의식을 행하였다. 대사례를 마친 후성균관 유생들을 격려하고 ‘희우관덕(喜雨觀德)’을 시제로 주고 시험을 치게 했다.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자 ‘희우’로 그 기쁨을 표시하고 ‘예기’에서 활쏘기를 표현한 ‘관덕’이란 말을 시제로 삼은 것이다. ‘예기’에는 “예로부터 활쏘기(射)는 덕을 보는 것(觀德)이며 덕은 그 마음에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가 활쏘기하는 것은 그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활쏘기의 목적은 마음의 수양에 있음을 강조하고 이를 ‘관덕’으로 표현한 구절이 있다.

영조는 가뭄 끝에 내린 단비와 활쏘기가 함축하고 있는 ‘관덕’을 시제로 하여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인 것이다.

 

#4. ‘대사례의궤’로 보는 활쏘기

 

영조 시대 대사례 행사는 ‘대사례의궤(大射禮儀軌)’라는 기록으로 남았다. 이 의궤에는 먼저 왕이 활 쏘는 장면을 담은 ‘어사례도’와 신하, 종친들의 활쏘기 장면을 담은 ‘시사례도’가 있어서 당시 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전달해 준다.

 

먼저 악차(幄次)에는 세 개의 단을 설치하였다. 제1단은 국왕의 자리, 2단은 순 자줏빛의 용문석(龍文席)을 깔아놓은 어사위(御射位), 3단은 종친 및 문무백관의 자리였다. 
 

단의 동쪽에는 3개의 탁자가 놓였다. 제1탁에는 국왕의 깍지와 팔찌를 담고, 2탁에는 어궁(御弓)을, 3탁에는 어시(御矢)를 담았는데, 탁과 함은 모두 붉은색이었다. 동서 계단 아래에는 탁자 2개를 두었다. 동쪽 탁자에는 상으로 줄 표리(表裏)와 궁시를 놓았으며, 서쪽 탁자에는 벌로 줄 단술과 잔을 놓았다.

 

바닥을 높여 사단(射壇)을 만들고 90보 떨어진 곳에 과녁을 세운 다음 후단을 쌓았다. 임시로 설치한 어좌 앞으로는 문무의 관리들이 호위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며, 악차는 차일과 휘장으로 사방을 막아 국왕을 엄호하였다.

 

뜰의 동서에는 홍살문을 설치하여 대사례 의식의 신성함과 위엄을 더하게 하였으며, 홍살문 앞에는 헌가(軒架·악대)를 두어 행사의 분위기를 고취시켰다. 홍살문 너머에는 과녁을 설치하였다. 왕의 과녁으로는, 붉은 바탕에 곰의 머리를 표적으로 한 웅후(熊候)를 설치하였다. 과녁은 어좌에서 남쪽으로 90보(步) 거리에 설치하였으며, 웅후로부터 동·서 각 10보 되는 지점에는 핍(乏:화살가림)을 설치하고 핍 안에는 좌측에 7명, 우측에 6명의 획자(獲者)를 배치하였다. 웅후와 핍은 훈련원에서 규격에 맞게 설치하였다. 훈련원 정(正)은 북 앞에 섰으며, 훈련원 정 뒤에는 국왕이 쏜 화살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배치되었다.

 

‘시사례도’는 시사자(활을 쏘는 사람)가 두 명씩 짝을 지어 활 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어사례도’와의 차이점은 과녁이 푸른색의 미후(사슴머리)로 바뀐 점이다. 핍 뒤에 서 있던 획자들은 화살이 꽂히면 해당하는 방위의 깃발을 들었는데, 중앙에 적중하면 적색, 상변에 맞히면 황색, 하변에 맞히면 흑색, 좌측에 맞히면 청색, 우측에 맞히면 백색의 깃발을 올렸다. 맞히지 못한 경우에는 채색의 깃발을 올렸다.

 

‘대사례의궤’에는 활을 잡은 손과 과녁에 맞힌 여부도 기록하고 있다. 전체 30명 중 왼손잡이가 12명(40%)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이채롭다. 조선시대에도 생각보다 많은 왼손잡이가 있었던 것이다. 실명(實名)과 함께 적중 여부를 기록으로 남긴 것은 평소에 활쏘기를 연마하라는 뜻도 담겨져 있었다.

 

그럼 대사례는 영조에게 어떠한 의미로 담아왔을까? 탕평정치의 완성으로 강력한 왕권을 확립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백성의 교화에 진력하던 군주 영조에게 대사례는 단순한 활쏘기 행사가 아니었다.

 

대사례를 통해 관리들의 정신자세와 기강을 확립하는 한편 국왕의 교화가 만백성들에게까지 전파되도록 하려는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함축되어 있는 바로 그러한 행사였다. 조선시대 국왕부터 신하, 백성에 이르기까지 생활화되었던 활쏘기. 이러한 생활화의 전통이 은연중에 이어져 활쏘기에 관한 한 대한민국은 최고라는 등식이 현재까지 계속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