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옛사람들의 새해 풍속도

구름위 2013. 6. 19.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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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 은덕 기리며 무병장수 기원 ‘민족의 잔치’

 

조선시대에도 한 해를 시작하는 새해의 의미는 컸다. 왕실에서는 새해를 맞이하여 왕이 주관하는 큰 잔치가 벌어졌고, 신하들은 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축문과 함께 특산물들을 바쳤다. 왕은 신하들에게 세화(歲畵)라는 그림을 하사했고, 새해를 축하하는 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민간에서는 세배를 하고 설빔을 입고 떡국을 먹는 풍습이 유행하였다. 16세기 학자 유희춘이 쓴 ‘미암일기(眉巖日記)’를 비롯하여 정조 때 학자 홍경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1819년 김매순이 한양의 연중 행사를 기록한 ‘열양세시기(冽陽歲時記)’, 조선후기 실학자 유득공이 쓴 ‘경도잡지(京都雜誌)’ 등의 책에는 새해 풍속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 책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왕실과 민간에서 맞이한 새해의 모습 속으로 들어가 본다.


1. 왕실의 새해맞이

 

새해가 되면 조선 왕실도 분주했다. 각종 의식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새해 첫날 왕실에서 행해지는 가장 큰 공식 행사는 정조(正朝) 의식이다. 요즈음으로 치면 신년 하례식이었다. 정조(음력 1월1일)를 맞아 왕과 문무백관의 신하들이 한데 모여 신년을 축하하는 조하(朝賀) 의식을 행하였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중심이 되어 관리들을 거느리고 왕께 새해 문안을 드리고 새해를 축하하는 전문(箋文)과 표리(表裏·옷감의 겉과 속)를 올렸다.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왕 정조는 새해가 되면 농사를 권장하는 교서를 친히 지어 8도관찰사에게 내렸다고 한다.

 

지방 관리들은 축하 전문과 함께 지방의 특산물을 올렸다. 왕은 신하들에게 회례연(會禮宴)을 베풀어 음식과 어주(御酒), 꽃 등을 하사하면서 지난해의 노고를 치하했다. 동시에 왕비전인 중궁전에서도 왕실 여성을 위한 잔치가 따로 베풀어졌다. 승정원에서는 미리 선정한 시종신(侍從臣·왕을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 승정원,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예문관 소속의 관리)과 당하의 문관들로 하여금 연상시(延祥詩)라는 신년 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이때 홍문관이나 규장각 제학에게 운(韻)자를 내게 하여 오언절구나 칠언율시 등을 짓게 했다. 당선되는 시는 궁궐 안 전각 기둥이나 문설주에 붙여 많은 사람이 보게 하였고, 새해를 함께 축하했다.

 

조정 관리나 왕실 및 관리의 부인 중에서 70세가 넘는 사람에게는 새해에 쌀, 생선, 소금 등을 하사했다. 관리로서 80세가 됐거나 백성으로서 90세가 되면 한 등급을 올려주고, 100세가 되면 한 품계를 올려 주었다. 새해를 맞이하여 장수 노인에게 특별한 배려를 해준 것이다.

 

화원들이 소속된 도화서에서는 수성(壽星·인간의 장수를 맡고 있다는 신) 및 선녀와 직일신장(直日神將·하루의 날을 담당한 신) 그림을 그려 왕에게 올리고 서로 선물하기도 하였다. 이를 세화(歲畵)라 한다. 또 황금색 갑옷을 입은 두 장군의 화상을 그려서 왕에게 바치기도 하였는데, 이 그림의 길이는 한 길이 넘었다. 이외에 붉은 도포와 까만 사모를 쓴 화상을 그려서 궁궐의 대문에 붙이기도 하였고, 역귀와 악귀를 쫓는 그림이나 귀신 머리를 그려 문설주에 붙이기도 하였다. 각 관청 아전과 하인들, 군영의 장교와 나졸들은 종이를 접어서 이름을 쓴 명함을 관원이나 선생의 집을 찾아 드렸다. 그러면 그 집에서는 대문 안에 옻칠을 한 쟁반을 놓아두고 그 명함을 받아들였다. 이것을 세함(歲銜)이라 한다. 신년에 주고받는 명함이라는 뜻이다.

 

2. 민간의 새해맞이

 

◇조선 정조 때 학자 홍경모가 지은 ‘동국세시기’실학자 유득공이 쓴 ‘경도잡지’ 표지 모습


백성들은 새해 아침 일찍 제물을 사당에 진설하고, ‘정조다례(正朝茶禮)’라는 제사를 지냈다. 남녀 아이들은 ‘설빔(歲庇陰)’이라는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차례를 지낸 후에는 집안 어른들과 나이 많은 친척을 찾아가 새해 첫 인사를 드렸다. 세배 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세찬(歲饌)이라 하였고, 이때 내주는 술을 세주(歲酒)라 하였다. 떡국(湯餠)은 조선시대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었다. ‘멥쌀로 떡을 만들고, 굳어지면 돈처럼 얇게 가로로 썬 다음 물을 붓고 끓이다가 꿩고기, 후춧가루 등을 섞었다’고 ‘경도잡지’에 적혀 있다.

 

새해에 친구나 젊은 사람을 만나면 올해는 “과거에 합격하시오” “부디 승진하시오” “아들을 낳으시오” “재물을 많이 얻으시오”와 같은 덕담(德談)을 주고받았다. 또 초하룻날 첫 새벽에 거리에 나가 맨 처음 들려오는 말소리로 그해 1년간의 길흉을 점쳤는데, 이것을 청참(廳讖)이라 하였다.

 
새해에는 점을 치는 풍습도 유행하였다. 조선시대 민간에서는 윷점과 오행점이 유행했다. 오행점은 나무로 장기쪽같이 만들어 금·목·수·화·토를 새겨 넣은 다음 나무가 엎어지는 상황을 보고 점괘를 얻었다. 윷점은 지금도 유행하는 윷을 던져 새해의 길흉을 점친 것이다. 예를 들어 도가 세 번 나오면 ‘어린 아이가 엄마를 만나는 운세’, ‘도·도·개’면 ‘쥐가 창고에 들어가는 운세’ 등이었다. 그런데 요즈음도 새해 운세를 점치는 데 이용하는 ‘토정비결’에 관한 언급이 ‘동국세시기’나 ‘열양세시기’, ‘경도잡지’ 등에 언급되지 않은 것을 보면 이 책은 빨라야 19세기 후반부터 유행한 것으로 짐작된다.

 
‘토정비결’은 ‘주역’의 이치를 응용하여 누구나 알기 쉽게 만든 책이지만 ‘주역’과는 다르다. 우선 ‘주역’의 기본 괘는 48개인데 ‘토정비결’은 32개다. 괘를 짓는 방법도 달라 이른바 사주 가운데 시(時)를 뺀 년(年), 월(月), 일(日)을 사용할 뿐이다. 조선시대 민간에는 시계가 없어 시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편의를 도모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토정비결’은 주역을 이용하면서도 조선의 특성을 십분 고려했다. 그러다 보니 점괘의 총수도 주역과는 다르게 됐다. 주역에는 총 424개의 괘가 있으나 ‘토정비결’은 총 144개뿐이다. 훨씬 간편한 셈이다.

 

‘토정비결’은 열두 달의 운수를 시구(詩句)로 적어 놓았다. “동쪽에서 목성을 가진 귀인이 와서 도와주리라”, “관재수가 있으니 혀끝을 조심하라”는 식이다. 간단명료한 글귀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은 점괘다. 항목마다 길흉이 적절한 비율로 배합돼 있지만 대체로 낙관적인 내용이 더 많다. 비관적인 괘라도 잘 극복하면 피해갈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

 

결과적으로 ‘토정비결’은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희망을 불어넣으며, 일마다 조심스럽게 정성을 다해 처리하도록 이끄는 힘이 있다. 그런 점에서 ‘토정비결’은 운수를 판별하는 데 중점이 있다기보다 일반 민중에 삶의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존재하는 듯 보인다. 비결의 이름을 가탁한 주인공 이지함의 민중친화적인 경향이 잘 반영되어 있는 것도 주목할 점이다.

 

◇민간에서 새해 길흉을 점치는 데 이용한 ‘토정비결’과 이지함 동상.


3. '미암일기'에 나타난 새해 풍속도


‘미암일기’는 16세기의 학자 유희춘(1513∼1577)이 쓴 일기로, 현재 남아 있는 일기는 1567년 10월1일에서 시작하여 1577년 5월13일까지 11년에 걸친 기록이다. ‘미암일기’는 임진왜란으로 사초(史草·실록의 저본이 되는 자료) 등 많은 사료가 없어졌을 때 이를 보충할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될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은 자료이다. ‘미암일기’ 1월1일자 기록을 보면 16세기 당시 새해 풍속도를 생생히 접할 수가 있다. 1568년과 1571년 1월1일의 기록을 보자.

 
“흐리고 눈이 오다. 새벽에 여러 사람이 와서 세배를 했다. 날이 밝기 전에 관대(冠帶)를 갖추고 부사 곽군과 더불어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는데, 나는 동편에 서고 곽은 서편에 서서 12배를 하고 산호(山呼·천세를 부름)를 하고 나왔다.”(1568년)

 

“유협이 곶감 두 접과 건수어(乾水魚) 4미(尾), 참빗 10개를 내게 주었다. 심변도 왔다. 이른 아침에 윤충남을 시켜 광양으로 가서 최사인(崔舍人·‘표해록’ 저자인 최부) 선생의 제사를 내 대신 지내게 하고 제문을 주었다. 나는 최인길에게 쌀 5두를 보내고 구비(舊婢)인 파치에게도 쌀 1두를 보냈다.”(1568년)

 

“닭이 울자마자 대소의 사람들이 와서 세배를 했는데 모두 기록할 수가 없다. 박해(朴海)가 소 1마리와 떡을 보냈다.”(1571년)

 

위의 기록에서 세배를 하고 선물을 주고받던 풍습은 44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유사했음을 알 수 있다. “윤홍중이 신력(新曆) 1건을 보내왔다”(1571년 1월 3일)는 기록에서는 이때에도 새해를 맞아 달력을 받았음이 나타난다.

 

1573년 유희춘은 홍문관에서 관리 생활을 하고 있었다. 조정의 관리로서 새해를 맞는 모습을 보자.

 

“이른 아침에 옥당(홍문관)으로 가서 입번을 한 다음 정언신·우성전을 데리고 대전(大殿·왕(선조)이 계신 곳)에 문안을 갔더니 술을 하사하셨고, 또 의성(懿聖·인종비 인성왕후)께 가서 문안을 드리니 또 술을 주셨다. 끝난 뒤에 본관(本館)에 별선온(왕이 궁중에서 빚은 술을 하사함)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잠시 옥당으로 가서 눈을 붙였다.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가 되어서 궁중의 사자가 선온을 가지고 왔다. (유)희춘 등 3인이 뜰에서 절을 하고 곧 당으로 올라가 사자와 더불어 편을 갈라서서 선온에 절을 하고 받은 뒤에 큰 잔으로 순차에 따라 잔을 돌렸다.”(1573년 1월1일)

 

◇조선 정월에 민간에서 유행한 윷놀이와 연날리기를 묘사한 19세기 그림.

 

조정 관리였던 만큼 많은 선물도 받았다. 천언군수 김수걸은 산꿩 3마리와 말린 숭어 2미를 보냈고, 진안군수 박사우는 꿀 5승(升)과 말린 꿩 3마리, 포육(脯肉) 1첩(貼), 참깨 3두를 보내왔다.

 

허봉은 내사(內賜)받은 황감(黃柑)을 주고 갔다. 이어 유희춘은 신년에 명함을 준 사람 30여명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다. 위의 기록에서는 요즈음 관공서에서 행해지던 신년 하례식의 모습이 연상된다. 이외에 1571년과 1576년의 1월1일에는 저자가 직접 지은 시를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시에는 지난해에 대한 감회와 새해의 다짐, 포부 등이 담겨 있다.

 

‘미암일기’의 새해 기록에 나타난 풍속도는 지금과 매우 흡사하다. 새해를 맞아 세배하러 다니고 선물을 주고받으며 새해를 설계하는 모습이 계속 이어져 온 전통임을 알 수가 있다. 이처럼 일기의 기록은 당대 사람들이 살아간 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새해를 맞아 독자에게 가능한 한 일기를 쓸 것을 권하고 싶다. 그중에는 유희춘의 ‘미암일기’처럼 훗날 역사의 소중한 자료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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