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을 가볍게 하여 민심 얻으라" 왕건, 유훈 '훈요십조' 남기고 운명
#1.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
◇만월대에서 전시하고 있는 고려 태조 왕건의 영정.
우리 역사 속 지도자들 중에도 마지막을 선명하게 떠올리게 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다. 왕건은 죽음에 임해 후대 왕들이 지켜야 할 정책 방향을 10가지로 정리한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겼다.
1조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세웠으므로 사찰을 서로 빼앗지 말 것, 2조 사찰을 지을 때는 도선의 풍수사상에 의거하여 지을 것, 3조 왕위는 맏아들 세습을 원칙으로 하되 맏아들이 현명하지 못할 때는 다른 아들이 여러 신하의 추대를 받아 왕위를 계승할 것, 4조 우리나라는 방토(方土)와 인성(人性)이 중국과 다르므로 중국 문화를 모두 따를 필요가 없으며 거란은 언어와 풍속이 다른 짐승과 같은 나라이므로 거란의 제도를 따르지 말 것, 5조 풍수지리사상을 존중하고 서경(西京:지금의 평양)을 중시할 것, 6조 연등의 불교행사와 하늘·오악(五嶽)·대천·용신을 제사지내는 팔관(八關) 행사를 성실히 지킬 것, 7조 간쟁을 따르고 참언을 멀리하여 신민의 지지를 얻을 것, 8조 농민의 요역과 세금을 가볍게 하여 민심을 얻고 국부민안(國富民安)을 이룰 것, 9조 차령산맥 이남과 금강 이남은 산천과 인심이 배역(背逆)을 끼고 있으므로 그 지방 사람들을 등용하지 말 것, 10조 경사(經史)를 넓게 읽어서 옛날을 거울삼아 현재를 경계할 것 등이다.
고려가 불교와 풍수지리사상에 기반한 나라인 점, 서경을 중심으로 북진정책을 쓰고 거란과는 대결구도로 간다는 점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왕건이 거란에 대하여 소위 ‘햇볕정책’ 대신 강경정책을 고수한 것은 거란에 대해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민족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경령전 인근에서 발견된 청동상. 전문가들은 이 청동상의 모델을 왕건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부터 천년도 넘은 유훈(遺訓)이지만 전통문화의 존중이나 후계자 계승 문제, 언로의 수집과 세금을 가볍게 할 것 등 현재에 바로 적용해도 손색이 없는 내용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태조의 유훈은 쉽게 지켜지지 않았다. 태조 사후 바로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왕자들 간의 전쟁이 잇따랐고, 4대 광종에 이르러서야 고려는 제국(帝國)의 기틀을 다질 수가 있었다.
#2. 조선시대 왕들의 마지막 모습
조선을 개국한 태조의 무덤은 특이하게 봉분에 잔디가 아닌 억새가 심어져 있다. 고향 함흥을 그리워하는 아버지를 위해 태종이 함흥의 억새를 가져와 봉분을 덮어준 것이라고 한다. 실록에서도 이러한 정황을 보여주는 내용이 전한다.
◇지난해 북한 개성 만월대 조사 도중 태조 왕건을 비롯한 역대 고려왕 5명의 어진과 신위를 봉안하던 경령전 터가 드러났다.
“홍서봉이 아뢰기를, ‘건원릉 사초(莎草)를 다시 고친 때가 없었는데, 지금 본릉에서 아뢰어 온 것을 보면 능 앞에 잡목들이 뿌리를 박아 점점 능 가까이 뻗어난다고 합니다. 원래 태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북도(北道)의 청완(靑?:억새)을 사초로 썼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다른 능과는 달리 사초가 매우 무성하였습니다. (…) 예로부터 그 능의 사초를 손대지 않았던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였던 것이니 손을 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인조실록’ 인조 7년 3월19일)
위의 기록에서 태조의 유언에 따라 아들 태종이 함흥 고향의 억새를 가져와 동구릉의 사초로 썼음이 나타나며, 이후에도 여러 왕이 태조의 사초는 특별히 관리한 정황이 나타난다. 생전에도 많은 갈등을 겪었던 아버지 태조와 태종. 태종은 무덤마저 아버지가 원치 않는 곳에 조성하였다. 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했던 왕비 신덕왕후의 곁에 묻히는 것을 반대하여 현재의 동구릉 자락에 건원릉을 조성하고 홀로 아버지를 모시는 불효(?)를 범했다. 그러나 고향 함흥의 억새를 덮어 달라는 마지막 유언만은 거절하지 못했던 것 같다. 건원릉의 억새는 아버지가 진정 원치 않는 곳에 묻은 불효를 만회하고자 했던 태종의 아픈 심정을 담고 있다.
◇정조의 국장 모습을 그림으로 기록한 의궤 일부.
1452년 5월 죽음을 눈앞에 둔 문종은 마지막까지 믿었던 대신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불렀다. 이제 12살이 갓 지난 어린 세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이들에게 단종을 잘 보필하여 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단종 즉위 후 이들은 문종의 유언을 충실히 따랐다. 그러나 너무 지나쳤다. 관리들의 인사를 할 때 자신들이 결정한 인물의 이름 밑에 노랗게 표시를 하는 황표정사(黃標政事)를 했고, 왕실은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문종의 동생이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은 이러한 상황에 분개했다. 1453년 마침내 계유정난이라는 쿠데타를 단행하였고, 김종서·황보인 등 신권의 대표 주자들은 제거되었다. 1455년 왕위에서 물러나 단종은 결국 유배지 영월 청령포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문종의 마지막 우려는 현실이 되어 왕실의 비극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1607년 12월 선조는 병세가 악화하자 유영경·신흠·한응인 등 7명의 전·현직 대신들을 불렀다. 노년에 낳은 적장자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싶었지만 영창대군은 이제 겨우 두 살. 결국 선조는 대신들이 입시한 자리에서 이미 왕세자로 책봉되어 있던 광해군을 후계자로 삼으라는 유교(遺敎)를 내렸다. 그리고 어린 영창대군이 마음에 걸린다며 자신이 죽은 후에도 여러 대신이 잘 지켜줄 것을 당부했다. 이때 선조의 마지막 유언을 들은 사람을 유교칠신(遺敎七臣)이라 한다. 광해군에게도 역시 동기(同氣)인 동생 영창대군을 끝까지 보호해 줄 것을 간곡히 당부했다.
◇조선 태조 이성계를 모신 건원릉 모습.
1608년 2월 선조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허준을 비롯한 어의(御醫)들이 소합원, 개관산 등의 강한 약재를 처방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허준이 마지막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진단했다. 선조의 뒤를 이어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지만, 광해군은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지 못했다. 오히려 1613년 어린 동생 영창대군을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 당파 간의 치열한 정쟁이 격화되면서, 왕권을 위협하는 적장자 동생의 존재는 광해군에게 커다란 정치적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을 후계자로 정한 선조의 마지막 유언은 지켜졌지만 후대의 정치적 격랑 속에서 사랑했던 막내아들은 처참한 죽음을 맞게 되었다.
#3. 대학자의 마지막 모습들
1501년 같은 해에 출생하여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을 형성한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 이들은 ‘좌퇴계(左退溪) 우남명(右南冥)’으로 불리면서, 평생을 정치적 라이벌이자 학문적 동지로 살아갔다. 둘은 성리학의 이해를 둘러싸고도 실천 중시(조식), 이론 탐구(이황)라는 다른 입장을 보였으며, 현실을 보는 눈, 왜적에 대한 입장 등 모든 것이 달랐다. 이들의 학문을 계승한 제자들에 이르러서는 북인(조식 학파)과 남인(이황 학파)으로 갈리면서 더욱 치열한 학문적, 사상적 대립관계를 유지하였다.
두 사람은 달랐던 성향만큼이나 마지막도 달랐다. 이황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이 위치한 청량산을 그리워했다. 이제 더 이상 청량산을 오를 수 없었지만, 1570년 병석에서 청량산에 다녀 온 제자 권호문에게 청량산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죽음 직전 이황은 평소 사랑했던 매화에게 자신의 불결한 모습를 보이기 싫다면서 분재를 옮기라고 지시하였다. 12월 8일 이황은 ‘저 매화나무에 물을 주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학문에 침잠하며 자연을 사랑한 대학자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남명 조식 초상과 조선 태조 이성계 어진.
조식은 성리학의 실천을 무엇보다 강조하면서 평생 수양과 실천을 상징하는 ‘경의(敬義)’를 신념화했다. 조식은 차고 있던 칼에 ‘내명자경(內明者敬:안으로 밝히는 것은 경) 외단자의(外斷者義:밖으로 결단하는 것의 의)’라는 글씨를 새겨 놓았으며, 창과 벽 사이에도 경의 두 글자를 크게 써 놓았다고 한다. 조식은 임종시에 문인들이 마지막으로 가르침을 청하자 ‘경의 두 글자는 지극히 긴요하고 절실하니 배우는 사람들이 공부가 익고 익으면, 가슴속에 일물(一物)의 가리움이 없게 되는 것인데 내가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다’는 유언을 남겼다.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학자인 율곡 이이 역시 마지막 순간까지 조선의 국방을 걱정했다. 1584년 이조판서였던 이이는 병조판서로 있을 때부터 생긴 병 때문에 자리에 누웠다. 선조는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하는 한편, 이때 서익(徐益)이 순무어사로 관북에 가게 되자 이이를 찾아가 변방에 관한 일을 묻게 하였다. 자제들은 병이 현재 조금 차도가 있으나 몸을 수고롭게 해서는 되지 않으니 응하지 말 것을 청했지만, 이이는 ‘나의 몸은 다만 나라를 위할 뿐이다. 만약 이 일로 인하여 병이 더 심해져도 역시 운명이다’ 하고, 억지로 일어나 맞이하여 육조(六條)의 방책을 불러주었다. 서익이 이를 다 받아쓰자 호흡이 끊어졌다가 다시 소생하더니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정치가로서, 학자로서 최후까지 조선의 국방을 걱정했던 이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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