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인조반정, 그 비극의 뿌리(1)

구름위 2013. 6. 19.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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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에 대한 허위 이데올로기


  광해군 15년(1623) 3월 전부사 김류, 이귀, 이괄, 심기원, 최명길, 김자점등 서인들이 이끄는 6,7백여 명의 병력들이 서울 북쪽 홍제원에 모였다. 이들은 광해군과 북인정권을 무너뜨리려 모인 서인들이었다. 이들에 의해 추대받은 선조의 5남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도 친병을 거느리고 장단부사 이서의 병력 700가 합류해 먼저 창의문을 돌파하고 창덕궁으로 향했다.
  이때 광해군은 쿠테타에 가담한 김자점이 미리 총애하는 상궁 김개시에게 보낸 술과 안주로 궁인들과 연회를 베풀고 있다가 쿠테타군의 급습을 받고 무력학 무너졌다. 조선이 개국한 지 두 번째로 신하들이 임금을 내쫓는 반정이 성공한 것인데, 이를 인조반정이라고 부른다. 반정은 그른 것을 바른 것으로 되돌렸다는 의미지만 이는 쿠데타를 일으킨 서인쪽의 견강부회이고 인조반정은 조선의 운명을 비극으로 이끌어간 시대착오적인 사건이었다.
  광해군은 재위 15us 동안 수많은 업적을 남긴 현군이었다. 우선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체되느 대륙 정세의 격변기에 탄력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조선을 전란에서 비켜가게 한 것이 가장 큰 업적이다. 광해군은 한 족의 명나라와 만주족의 후금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등거리 외교정책을 펼침으로써 조선을 전란의 위기에서 구해냈던 것이다. 또한 안으로는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를 양성함으로써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으며, 임란 때 파괴된 농지를 복구하기 위한 양전사업을 전개했다.
  그러나 서인들은 오로지 권력을 장악할 야심으로 광해군과 북인정권을 끌어내리려 했다. 이들은 명과 청 사이에서 조선의 국익을 위한 광해군의 양면외교 정책이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내준 명나라에 대한 배신이며 선왕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 김씨의 존호를 폐하고 서궁이라 칭한 것은 불효라는 명목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명나라가 조선에 구원군을 파견한 것은 명나라 정벌의 기치를 내걸었던 왜군과의 전쟁터를 한반도로 국한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대비 김씨의 존호를 폐한 것은 그간 왕위를 둘러싸고 왕가에서 숱하게 있어 왔던 불상사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대비 김씨는 선조 말엽 친정 아버지 김재남과 함께 자신의 소생인 영창대군에게 후사를 잇게 하기 위해 광해군의 즉위를 반대하는 작업을 수행했으므로 일방적으로 광해군의 잘못만도 아니었다.
  게다가 광해군은 재위 2년에 선대의 숙원이었던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등 사림파 오현의 문묘종사를 단행했으니 사림의 처지에서 보아도 쫓겨날 이유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인조반정은 일어나서는 안 될 서인들의 명분없는 쿠데타에 지나지 않았다. 쿠데타 성공 후 이들은 명나라를 향한 의리란 뜻의 향명대의, 또는 명나라를 숭상하는 의리란 뜻의 숭명의리를 드높였다. 인목대비가 인조의 즉위를 허락하는 교서의 일부를 보자.
  "우리 나라가 명나라를 섬겨온 것이 200년으로 의리로는 곧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임진년에 재조해 준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어 선왕께서는 평생 서쪽을 등지고 앉지도 않으셨다.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청)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황제가 자주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파견할 생각을 하지 않아..."
  그러나 명나라를 드높이느라 서쪽을 등지고 안지도 않는 것은 선조 같은 용렬한 군주나 사대주의자들인 서인들뿐이었다. 심지어 일반 백성들은 인조반정에 반발하면서 봉기를 일으키려고까지 했다.인조반정 일등공신인 이서가 반정 직후 남긴 회고를 보자.
  "갑자기 광해군을 폐출하고 새 임금을 세웠다는 소식을 들은 나라 사람들은 새 임금이성덕이 있는 줄 알지 못했으므로 상하가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성패가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터에 위세로써 진압할 수도 없어서 말하기 지극히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
  이 회고는 반정에 반대하는 백성들의 조직적 움직임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회고를 계속 들어보자.
  "오리 이원익이 전 왕조 때의 원로로서 영상에 재수되어 여주로부터 입조하자 백성들의 마음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영상에 제수된 이원익은 남인이었다. 국가적 이익이 아닌 당파적 이해를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킨 서인 정권에 대한 반발이 예상 외로 거세자 이원익에게 영상 자리를 제시하며 반대당파인 남인들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이원익에게 제의한 자리가 다름 아닌 인신의 최고위직인 영상이라는 점은 이들 서인들의 쿠데타가 얼마나 명분 업슨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들은 명분 없는 반정 정권에 남인들을 관제 야당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이때만 해도 서인들은 훗날 남인들이 관제 야당의 테두리를 벗어나 정권을 장악하겠다고 나서고, 이들과 당운을 건 승부를 걸게 될지는 몰랐을 것이다.
  어쨌든 광해군의 현실적인 외교 정책에 반기를 들고 정변을 일으킨 서인들은 반정 후 급격한 친명배청 정책으로 선회했는데, 이것은 수많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떠오르는 해인 만주족의 후금을 배격하고 지는 해인 명나라를 추종하려는 친명배청 정책을 무리없이 수행하기 위해서는 후금보다 군사력이 강해야 했다. 그렇지 않은 이상 비극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뜨는 해' 만주족이 중원에 찬란히 떠오르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중원으로 쳐들어간 사이 명나라와 결탁한 조선군이 만주를 공략하면 이른바 두 개의 전선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금은 중원에 쳐들어가기 전에 조선을 우호국으로 만들든지 전쟁을 통해 속국으로 만들어야 했다. 우호관계를 수립하지 않는 한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인조5년의 정묘호란은 이런 연유로 발생한 것이다.
  정묘호란은 양국이 형제관계를 맺는 정묘조약으로 종결되었으나 이는 미봉책이었다. 당시 후금은 명과 조선 모두를 상대로 전면전을 벌일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시적인 수습책으로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정묘조약 9년 후인 인조 14년(1636: 병자년)에 후금이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꾸자고 나선 것은 조선과의 전면전도 불사하겠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인조와 서인정권이 군신관계를 거부하려면 정묘조약 이후 병자년까지 9년이란 기간 동안 군사력을 길러야 했다. 하지만 서인정권은 군사력 대신에 친명반청의 명분만 쌓았다.
  드디어 인조는 8도에 후금과 싸우자는 선전교서를 내렸다. 조선백성보다도 '명나라를 향한 의리'를 더 큰 목소리로 주창한 이 선전교서는 명나라와 의리를 지키기 위해 후금과 화를 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허세뿐인 명부론에 대한 후금의 대답은 구사공격이었고 그 결과는 삼전도의 치욕이었다.
  인조가 삼궤구복의 예를 취해야 했던 삼전도의 치욕은 시대착오적인 인조반정이 낳은 귀결이기도 했다.

병자호란과 송시열


  병자호란은 송시열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송시열은 병자호란이 발생하기 3년 전인 인조11년(1633)에 생원시에 급제해 대과를 볼 기회를 얻었다. 그는 이 생원시에 장원을 하여 그 해 10월 경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면했다. 그는 2년 후에 대군사부로 임명됨으로써 관직에 모습을 드러낸다. 임금의 적자인 대군을 가르치는 대군사부는 학문이 높은 인물에게 주어지는 영예로운 관직이기는 했으나 그 품계는 종9품의 미관말직에 불과했다. 세자를 가르치는 세자시강원의 사부가 정1품이고 세손을 가르치는 세손시강원의 사부가 종1품인것과 비교해 보면 그 비중을 알 만하다. 그만큼 왕위를 이을 세자나 세손을 중요시한 것이다. 그나마 대군사부는 임시직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이 자리도 최명길의 추천으로 얻은 자리였다. 최명길은 인조 14년 6월 차자를 올려 송시열과 송준길등을 추천한다. 그런데 이 추천사는 송시열이 자신의 고향을 확실히 장악하고 이음을 보여준다.
  "송준길,송시열은 모두 김장생의 문인인데, 신은 비록 서로 만나보지는 못했으나 그들이 살고 있는 지방의 사람들은 감히 멋대로 그른 짓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송시열은 이처럼 율곡의 학통을 이은 김장생의 문인이라는 점과 지방을 장악하고 있는 유학자라는 점을 인정받아 대군사부가 되어 조정에 진출하는데, 이때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바로 그가 가르쳤던 대군인 봉림대군이었다. 인조의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은 훗날 인조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는데 그가 곧 효종이다. 송시열은 봉림대군을 가르치는 대구사부로 관직에 첫발을 내디뎠던 것이다. 송시열의 나이는 만 28세였고 봉림대군의 나이 만 16세였다.
  이 당시는 소현세자가 이미 세자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송시열이나 봉림대군 그 누구도 봉림대군이 훗날 인조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리라고는 예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우암이 봉림대군을 가르친 기간도 불과 6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훗날 당쟁이 격화하면서 우암의 당파인 서인과 노론은 두 사람의 인연을 과대포장해 송시열이 효종의 충성스런 신하임을 강조했다. 뒤에 서술하겠지만 우암을 효종의 충성스런 신하로 포장해야 했다는 사실은 둘의 관계에 그만큼 문제가 많았음을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짧은 기간에 송시열은 바로 병자호란을 맞이하게 된다. 송시열은 인조의 몽진 행렬을 따라 강화도로 피하려 하였으나 청나라 군사가 길을 끊는 바람에 실패하고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봉림대군은 인조의 비빈들과 함께 미리 강화도로 피신한 터였다. 조선왕실이 남한산성과 강화도로 갈라지는 이산가족이 된 것이다.
  이때 강화도로 피신한 인물 중에 송시열의 동문인 미촌 윤선거란 인물이 있다. 윤선거는 그의 아들 윤증과 강화도로 피신해 살아남는데, 남한산성에서 살아남은 송시열이 훗날 이를 격렬히 비난함으로써 윤증과 치열하게 다투게 된다. 후술하겠지만 이것이 바로 회니논쟁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것은 1636년 12월이었다. 청나라 군사는 남한산성을 포위해 일체의 보급을 끊었다. 강화도는 몽고침입 때 고려왕실이 장기간 천도해던 데서 알 수 있듯이 농성의 적지지만 남한산성은 농성할 장소가 아니었다. 더구나 한겨울에 산성 꼭대기에서 농성한다는 것은 한반도의 일기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한산성에서 농성하던 시절의 참상을 한 궁녀가 남긴 '산성일기'에서 살펴보자.
  '12월24일에 큰비 내려, 성벽을 지키는 군사들이 다 젖고 얼어 죽은 이 많으니 상(인조)이 세자(소현)와 함께 뜰 가운데 서서 하늘에 빌어 가라사대,
  "금일 이에 이르기는 우리 부자 득죄함 때문이니, 성안의 군민들이야 무슨 죄가 있으리까. 천도는 우리 부자에게 화를 내리시고 원컨대 만민을 살리소서."
  군신들이 안으로 드시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시더니, 오래지 않아 비 그치고 날씨 차지 아니하니, 성중인이 감읍지 않은 이 없더라.'
  하늘은 이때 겨울비는 멈추어 주었는지 모르지만 청나라 군사의 포위까지 풀어준 것은 아니어서 고통은 계속되었다. 이런 상황의 고립된 산중에서 45일을 버틴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고군분투였다. 산성의 인조가 믿는 유일한 희망은 구원군이었다. 하지만 다음해 1월 산성에 당도한 것은 구원군이 아니라 강화도가 함락되어 비빈들이 청군의 포로가 되었다는비보였다. 인조는 할 수 없이 삼전도로 나와 청태종에게 삼궤구복이란 신하의 예를 취하며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은 향명대의의 목청 큰 서인정권의 것이 아니라 오랑캐 청나라의 것이었다. 송시열은 이 고난과 치욕의 현장을 똑똑히 목격했다.
  송시열은 병자호란 당시 다른 유생들처럼 척화론을 소리 높여 외치지는 않았다. 물론 종9품 미관말직으로서 척화론을 주창할 처지가 아니기는 했지만 관직이 없는 유생들도 외치던 척화론을 그는 주창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병자호란이 끝난 후 속리산 복천사에서 백호 윤휴를 만나 서로 통곡하며 약속했다.
  "혹시 우리가 정치를 하게 된다면, 결코 오늘의 치욕을 잊지 말자."
  그러나 훗날 송시열은 정치를 하게 되면서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이는데 앞장선다. 이때만 해도 훗날 두 사람이 서로 죽이고 죽는 정적 관계가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낙향한 송시열은 벼슬에 뜻을 잃어 더 이상 과거를 보지 않았다. 병자호란의 충격이 그마큼 컸던 것이다. 그는 향리에서 학문에만 몰두했다. 인조 17년(1639)에는 용담현령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21년 12월 세자시강원의 익위사좌우익위로 삼았으나 출사를 거부했다. 이런 송시열에게 인조는 계속 관직을 재수했다. 병자호란으로 권위가 땅에 떨어진 인조로서는 산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율곡의 학통을 이은 기호유림의 계승자인 송시열과 송준길을 거듭 불렀던 것이다.
  재위 22년(1644)과 23년 인조는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정5품인 사헌부 지평을 제수하며 계속 불렀으나 모두 송씨라 하여 양송으로 불리던 이들은 역시 출사를 거부했다.
  송시열이 거듭 출사를 거부하자 그에게 제수되는 벼슬은 계속 올라갔다. 그러면서 그의 정치적 비중은 더욱 높아갔다. 종9품 한직인 대군사부를 제수받았을 때도 사양하지 않고 나왔던 그가 정5품 사헌부 지평을 제수해도 거부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인조실록' 23년 10월조는 "처음에 대군의 사부가 되었으나 병자호란 이후로 벼슬길에 뜻을 끊어서, 누차 벼슬을 주었으나 거절하고 부임하지 않았다"고 하여 병자호란이 직접적인 원인임을 밝히고 이다. 그러나 출사를 거듭 거부하는 은둔정치는 그의 정치적,학문적 위상을 높여 주었다. 과장에 사람이 구름같이 몰리던 시절에 대간 직인 사헌부 지평을 제수해도 거절한 사실은 내외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제수된 벼슬들을 거듭 거부하며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기는 동안 청의 수도 삼양에서는 소현세자 부처가 볼모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그리고 소연세자의 볼모 생활 도중의 처신은 훗날 발생할 거대한 비극적 사건을 잉태하고 있었다. 바로 예송논쟁의 뿌리였다.

 

볼모를 자청하는 소현세자


  인조의 남한산성 농성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백성들은 정유재란이 끝난 지 불과 40여 년도 안 된 상황에서 다시 발생한 환에 분개해 의병도 거의 일으키지 않았다. 조선은 청군의 포위로 일체의 보급이 끊어진 겨울 산성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해야 했다.
  조선은 청나라의 강화 사절로 가짜 왕자와 가짜 대신을 보냈다가 말썽이 되기도 했다. 최명길이 적지에 들어가 강화 조건을 묻자 청군은 왕의 동생과 대신을 인질로 삼겠다고 말했다. 이에 조선은 주사대장 구인후 누이의 아들인 능봉군을 인조의 동생이라 속이고 판서 심집을 대신의 직함으로 가칭해 보았다. 이때 청군이 심집에게 "그대 나라는 지난 정묘년에도 가짜 왕자로 우리를 속였는데, 이 사람은 진짜 왕제인가?"라고 묻자 대답하지 못했다.
  "그대는 진짜 대신인가?"
  심집이 또 대답하지 못하자 박난영에게 물었다. 박난영은 광해군 시절 강홍립과 함께 명나라의 요청으로 나가 싸웠던 무장이었다. 박난영은 태연히 대답했다.
  "이는 진짜 왕제이고 심집은 진짜 대신이오."
  이에 화가 난 청군은 박난영을 죽이고 나서 말했다.
  "세자를 보내온 뒤에야 강화를 의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왕 다음가는 이군이었던 세자를 보낼 수는 없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서, 진퇴양난의 난국에 물꼬를 튼 사람은 소현세자 자신이었다. 소현세자는 비변사에 봉서를 내려 이렇게 말했다.
  "태산이 이미 새알 위에 드리워졌는데, 국가의 운명을 누가 주춧돌처럼 굳건하게 하겠는가. 일이 너무도 급박해졌다. 나에게는 일단 동생이 있고 또 아들도 하나 있으니, 역시 종사를 받들 수 있다. 내가 적에게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내가 성에서 나가겠다는 뜻을 말하라."
  소현세자는 살신성인의 자세로 난국을 타개하고 조선 역사상 최초로 볼모가 되어 청나라로 끌려가게 되었다. 동생인 봉림대군, 안평대군과 함께였다. 이들이 끌려간 곳은 당시 만주에 있던 청나라 수도 심양이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이곳에 심양관소를 지어서 머물렀는데, 다시 조선에서는 이곳을 심관, 또는 심양관이라고 불렀다. 소현세자는 봉림과 안평 두 동생을 비롯한 판서 남이웅, 놔부빈객 박황, 우부빈객 박노, 보덕 이명웅, 필서 민응협 등 300여 명의 수행원들과 함께 심양관에 머물렀으므로 서울의 동궁이 심양으로 이주한 셈이었다.
  소현세자는 이 심양관을 중심으로 청과 조선 사이의 모든 일을 처리했으므로 사실상 주청 조선대사였으며 심양관은 조선대사관이었던 셈이다. 청은 심양관을 통해 조선에 관한 일들을 처리하려 하였고, 인조 또한 청과 직접 상대하는 것이 껄끄러웠으므로 심양관의 소현세자에게 청에 관한 일들을 미루었다.
  심양 생활은 소현세자에게 미래가 불투명한 위기였으나 역으로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비단 소현세자 개인뿐만 아니라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조선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다. 당시 중국에서조차 끝나가는 성리학과 명분론을 금지옥엽으로 붙들고 있는 조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던가를 깨닫고, 국제 정세는 명분이 아니라 힘에 의해 좌우된다는 현실을 깨우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처리해야 할 일 중에 가장 중요하면서도 곤혹스러운 일은 청의 파병 요구였다. 청은 당시 명과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있던 때였으므로 명과의 전투에 사용할 조정군 파견을 요구했다. 숭명대의를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와 서인 정권에게 이는 심각한 자기부정이었으나 전쟁에서 패배한 이상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인조는 청의 요구에 쫓겨 재위 18년 4월에 주사상장 임경업, 부장 이완이 이끄는 조선 수군 6,000명을 파병했다. 임경업은 병자호란 때 청군이 서울을 점령한 틈을 타서 역으로 청의 수도 심양을 점령하겠다는 작전을 제안할 정도로 반청인사였으므로 그가 이끄는 조선 수군이 제대로 싸울 리가 없었다. 임경업의 수군은 전진하라고 해도 전진하지 않고 명의 전선을 만나도 발포하지 않았다. 발포하더라도 엉뚱한 곳을 향해 쏘고 배를 일부러 부수고 일부 군사를 투항시키는 등 노골적인 사보타주를 일으켜 청나라의 분노를 샀다.
  청나라는 이를 조선의 배신행위로 규정짓고 청나라 장수 용골대 등을 조사단으로 삼아 의주에 파견했다. 조선은 병자호란 때 용골대에게 호되게 당했기 때문에 용골대란 이름만 들어도 떠는 형편이었다. 이때 세자는 용골대의 동향을 미리 조선 조정에 알려주고 용골대에게는 조선의 처지를 설득하는 등 양자의 충돌을 막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조선 대신들이 벌벌 떠는 존재인 용골대가 한 번은 '청과 다른 의논을 하는 자가 누구냐' 라며 세자를 협박하자 세자는 벌컥 화를 냈다.
  "내가 비록 이역에 와 있지만 한 나라의 세자이다. 네가 어찌 감히 이토록 협박하는가?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는 것이니 그 따위로 나를 협박하지 말라."
  이에 용골대가 웃으면서 사과한 적이 있었을 정도로 소현세자는 배짱도 있는 인물이었다.
  인조 20년에는 조선에 출몰한 명나라 배에 부사 이계가 감사 정태화의 명을 받아 몰래 쌀과 음식을 제공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때 용골대는 이계 등을 만주의 봉황성으로 불러 세자와 함께 관계자들을 심문했다. 이 자리에서 세자는 시종일관 조선 관리들을 옹호했다. 이에 용골대가 세자를 힐난했다.
  "세자가 감사를 이처럼 비호해 주니 그와 한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자가 웃으면서 답했다.
  "이렇게까지 의심하니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세자는 청과 조선 사이에 분쟁이 생길 때마다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애썼다. 세자는 이런 과정을 통해 중요한 것은 성리학이 제공하는 명분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현실 인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현세자는 심양과 북경에서 이런 현실 인식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런 현실 인식은 청이 아니라 조선을 위한 것이었다.
  세자는 심양에 오기 전부터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이미 병자호란 5년 전인 인조 9년(1631)에 견명사 정두원이 가져원 서양의 화포와 천리경, 자명종 등을 보고 서양문물에 대해 깊은 인상을 가졌다. 심양에 와서 세자는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더 이상 성리학이 아니라 변화하는 문물과 그것을 만들어 내는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심양에서 소현세자는 중원의 대세가 이미 청으로 기울었음을 깨달았다. 만주에서 흥기한 청이 아니더라도 명나라는 이미 종말로 치닫고 있었다. 국가 생명의 사이클로 따지면 이미 쇠퇴기를 지나 소멸기에 접어든 국가가 명나라였던 것이다.
  명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 즉위 후 가뭄과 흉년에 계속되자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각지의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 중 비교적 큰 세력은 유적이 되어 명을 위협했다. 명을 망하게 한 존재는 사실상 청이라기보다는 이들 농민반란군이었다. 농민반란군 중 가장 세력이 컸던 역졸 출신의 이자성이 명을 멸망시켰던 것이다.
  출신을 따지지 않고 세력이 있으면 황제를 자칭하는 것이 중국 역사의 한 특징인데, 이자성 또한 세력이 커지자 스스로를 대순황제라 칭하고 명의 수도 북경을 공략해 함락시켰다. 북경이 함락되는 날, 황제의 외척이나 귀족, 재상들은 땅바닥에 꿇어앉아 유적의 흙발에 차이면서도 농민출신 이자성을 성천자로 받들고 자결한 의종 숭정제를 저주함으로써 목숨을 구걸했다.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이 받들어 모시는 명나라는 이미 명나라 황손들도 버린 나라였다. 아마 청이 없었다면 이자성의 순나라가 명을 대신해 중원을 지배했을지도 모른다. 명을 세운 주원장이 농민 출신이었으므로 이는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행위였다.
  북경이 함락되었을 때 명의 유일한 정예군은 오삼계가 이끄는 부대였다. 청군을 치기 위해 요동으로 진격하여 산해관을 돌파하던 그는 북경이 이자성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군사를 돌리기로 결심하고 청나라 진영에 편지를 보냈다.
  "우리의 황제는 유적 이자성에게 돌아가셨다. 지금부터 나는 황제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급히 북경으로 향하는 바, 차제에 귀국의 병력을 빌렸으면 좋겠다."
  청과 연합전선을 결성해 북경으로 가자는 제안이었으나 자신이 치러가던 군사를 빌려달라는 이 말은 사실상 항복선언이었다. 소현세자를 볼모로 데려왔던 청의 구왕 다이곤은 즉각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다이곤은 당시 태종의 뒤를 이은 어린 청 세조를 대신해 사실상 섭정하는 중이었다.
  "인의의 군대를 동원하여 유적 이자성을 멸하고, 중국 백성을 구원한다."
  명목은 명.청연합군이었으나 사실상 청군이 명군을 흡수한 것이었다. 소현세자가 심야에 잡혀온 지 7년 째인 1644년(인조22)4월의 일이었다. 이때 구왕 다이곤은 자국의 왕과 장수뿐만 아니라 소현세자를 대동하고 남정 길에 올랐다. 소현세자의 대동은 구왕의 의도적인 행위였다. 남정군을 따라간 소현세자는 명나라의 마지막 정예군인 오삼계군단이 청나라에 항복하는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다. 다이곤도 이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소현세자를 산해관에 데리고 갔던 것이다. 하지만 이 자면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도 소현세자는 중원의 정세가 이미 청으로 기울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명은 도처에서 무너지고 있었던 반면 청은 욱일승천하는 기세였다. 거기에다 목격한 오삼계군단의 항복장면은 조선이 취할 외교정책이 숭명대의가 아니라 청나라 중심의 현실외교라는 확신을 갖게 해주었다.
  소현세자는 청군이 산해관을 넘어 파죽지세로 중원을 점령하는 것을 목격했다. 청군이 남진을 시작한 것은 4월인데 한 달로 안 되어 북경에 입성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군마가 달리는 속도가 청의 점령 속도였다. 청의 대군이 밀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자성은 항전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도망갔다. 이로써 청은 명의 수도였던 북경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자성은 북경을 청에 갖다 바치기 위해 애써 함락한 셈이었다.
  청의 파죽지세를 지켜본 소현세자의 심정은 담담했다. 그는 이미 7년 간의 볼모 생활을 통해 이런 사태를 예견할 수 있었다. 세자는 볼모 생활을 통해 현실적인 국제정세 인식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세자의 이런 현실인식은 조선의 인조와 서인정권에게는 위험한 이데올로기로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