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인조반정, 그 비극의 뿌리(2)

구름위 2013. 6. 19.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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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를 받아들이는 소현세자


  소현세자는 인조 22년(1644) 4월 청의 구왕이 이끄는 청나라군과 함께 북경으로 향했다. 하루 평균 120-130리에 달하는 빠른 속도였다. 세자는 구왕이 이끄는 청군이 파죽지세로 북경을 손에 넣는 장면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북경을 청이 차지한 것은 대세가 결정되었음을 의미했다. 세자는 북경에서 문연각이라 불리던 명 목적의 부마 후씨 집에 거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식량이 극도로 부족해 20여 일 만에 심양으로 되돌아 왔다가 그 해 9월 청나라 황제를 따라 다시 북경에 들어가 약 70일 동안 머물렀다. 청나라 황제는 북경을 청의 수도로 결정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소현세자를 대동한 것이었다. 이때 소현세자는 아주 중요한 한 인물을 만나 새로운 사상과 문물의 세례를 받게 된다.
  바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이다. 아담 샬은 1628년(인조6) 32번째의 예수회 신부로 북경에 부임해 해박한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명나라 신종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북경 동안문 내에 거주하면서 역서와 대포를 제작하는 일을 맡았다. 청의 세조는 북경 점령 후 자신의 과학지식을 이용하기 위해 지금의 천문대장격인 흠천감정을 삼고 대청시헌력을 짓게 하였다. 아담 샬은 북경 남문인 선무문 내에 선교사 마테오 릿치가 세운 남천주당에 자주 머물렀는데, 소현세자는 동안문 내 아담 샬의 거주처와 남천주당을 자주 찾아 이 벽안의 선교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현세자의 북경숙소인 문연각은 아담 샬의 숙소와 가까운 동화문 안에 있었으므로 두 사람은 더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오가며 우정을 쌓았다. 아담 샬에게 소현세자와 만남은 조선에 천주교를 전교할 수 있는 호기였고, 소현세자에게 아담 샬은 서양의 문명과 천주교 사상을 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머나먼 이국에서 온 푸른 눈의 손교사와 볼모로 잡혀온 남다른 처지의 불행한 세자는 서로에게 이색적인 감회를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이 만남을 지켜봤던 당시 남천주당의 신부 황비묵은 '정교봉포'에서 이 만남을 기록했다.
  "순치 원년에 조선국왕 인조의 세자는 북경에 볼몰 와서 아담 샬 신부의 명성을 듣고, 때때로 남천주당을 찾아와 천문학 등에 대해서 살펴 물었다. 샬 신부도 자주 세자 관사를 찾아가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깊이 사귀었다. 샬 신부는 거듭 천주교가 정도임을 말하였는데 세자도 자못 듣기를 좋아하며 자세히 물었다. 세자가 귀국하자 샬 신부느 자신이 지은 천문.산학.성교정도의 여러 서적 여지구(지구의)와 천주상을 선물로 보냈다."
  소현세자는 곧 아담 샬에게 편지를 보내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귀하가 주신 여지구와 과학에 관한 서적은 정말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그중 몇 권의 책을 보았는데 그 속에서 덕행을 실천하는 데 적합한 최상의 교리를 발견했습니다. 천문학에 관한 책은 귀국하면 곧 간행하여 널리 읽히고자 합니다. 이것들은 조선인이 서구과학을 습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들이 이국 땅에서 상봉하여 형제와 같이 서로 사랑하여 왔으니 하늘이 우리를 이끌어준 것 같습니다."
  인조가 세자에 대한 증오를 키우고 있을 때 세자는 왕조가 교체되는 도시 북경에서 '하늘이 이끌어준 만남'에 대해 감사하고 있었다. 이 '증오'와 '감사'의 차이가 이후 두 사람의 운명뿐만 아니라 조선의 운명을 극단으로 끌고가게 된다. 세자가 아담 샬과 교류할 때는 서기 1644년, 조선이 일본의 무력에 의해 개국하기 232년 전이었다. 일본이 미국의 페리제독에 의해 개국한 것은 이보다 211년 후였다. 소현세자의 개방적인 이 사고는 그야말로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운명을 뒤바꿔 놓을 수도 있는 만남이었던 것이다. 9년 간의 볼모 생활은 소현세자의 사고를 개방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아담 샬이 조선에 천주교가 전파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하자 신부를 대동하고 귀국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해 아담 샬을 놀라게 했을 정도로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다시는 중국도 신부가 부족한 형편이어서 아담 샬은 신부 대신에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과 궁녀들을 데려가라고 제의했다. 이방송, 장삼외, 유중림, 곡풍등 같은 중국인 환관들과 궁녀들이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들은 아마 임란 때 천주교 신자 소서행장이 조선땅을 밟은 이래 조선을 방문한 최초의 천주교 신자들일 것이다.
  1644년 11월 1일 청의 세조는 북경의 천단에 제사하고 등극을 반포했다. 천하의 주인이 자신임을 선포한 것이다. 세자와 대군도 이 행사에 따라가 참예했다. 그 달 11일 구왕은 용골대를 시켜 말을 전했다. 세자가 꿈에도 그리던 말이었다.
  "북경을 얻기 이전에는 우리 두 나라가 서로 의심하여 꺼리는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지금은 대사가 이미 정해졌으니 피차가 서로를 신의로써 믿어야 할 것이다. 또 세자는 동국의 왕세자로서 여기에 오래 머물 수 었으니 지금 의당 본국으로 영원히 보낼 것이다."
  드디어 멀고 길었던 볼모 생활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청에서 세자를 귀국시키는 이유는 구왕의 말대로 '북경을 얻어 대사가 이미 정해졌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세자를 붙잡아 둘 필요성이 없어진 것이다.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귀국이었다.

 

비운의 소현세자 일가


  그러나 귀국길에 오른 세자의 앞에는 볼모 생활보다 더한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부왕 인조의 의심과 저주였다. 소현세자가 청나라를 인정하는 현실적인 세계관을 가진 만큼 인조와 서인정권은 소현세자를 의심했다. 인조는 청나라가 자신을 폐하고 소현세자를 세우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에 소현세자를 의심했다. 청나라의 실제 의도를 떠나 이런 인조의 의심에는 근거가 전혀 없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었다. 인조 18년 인조의 병환이 심각하자 소현세자는 장남 석철을 대신 볼모로 와 있게 하는 조건으로 귀국한 적이 있었다.
  일시 귀국하는 소현세자를 위해 청의 구왕뿐만 아니라 청 황제 태종이 직접 송별연을 열어 주었는데, 봉림대군도 함께 한 이 자리에서 용골대는 세자에게 안장을 한 말과 대홍망룡의를 주었다. 이를 본 세자는 깜짝 놀라 사양했다.
  "이것은 국왕이 입는 장복입니다."
  세자의 사양을 받아들여 청 태종은 대홍망룡의를 입지 않도록 허용했으나 이 사건의 파문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조선까지 미쳤다. 세자 빈객 신득연이 이 상황을 자세히 적어 인조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이후 인조와 서인정권은 소현세자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인조 21년 10월 역관 정명수가 청에서 세자를 귀국시키려 한다고 전했을 때도 인조와 서인정권은 그 의도에 의혹을 품었다. 인조가 이 문제를 비국 당상에게 논의하자 정태화는, "청에서 먼저 말을 꺼냈는데 우리가 (세자의 귀국을) 청하지 않으면 저들이 우리를 의심할 것입니다"라면서 받아들일 것을 주청하는데 이는 이미 세자를 보는 인조와 조신들의 마음이 달라져 있음을 뜻한다. 이때 인조는 이렇게 말한다.
  "청인이 내게 입조를 요구한 것은 전한 때부터였으나 내가 병이 있다고 이해시켰기 때문에 저들이 강요하지 못하였다. 이제 듣건대 구왕은 나이가 젊고 강퍅하다고 하니 그 뜻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전일에는 세자를 지나치게 박하게 대하다가 이제는 오히려 지나치게 후하게 대하니 나는 의심이 없을 수 없다."
  인조는 구왕 다이곤과 세자가 결탁해 자신을 볼모로 불러들이고 세자를 조선의 국왕으로 봉하지 않을까 근심하는 것이었다. 인조는 세자의 귀국에는 '반드시 예측하지 못할 내막이 있을 것'이라며 전전긍긍했다. 인조의 이런 의심에 김자점이 "세자께서 나온 뒤에 만약 뜻밖의 변이 있다면 군신 상하가 어찌 손을 묶어두고 그들이 하는 대로 놓아둘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한 데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뜻밖의 변'이란 청에서 인조를 폐위하고 세자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인조 21년(1643) 6월 세자빈 강씨의 부친인 영중추부사 강석기가 사망하여 세자 부부는 왕곡하기 위해 귀국해야 했다. 인조 22년 1월 세자 부부는 왕곡하기 위해 귀국해야 했다. 인조 22년 1월 세자 부부는 원손 석철을 비롯한 다른 아들들을 볼모로 불러들이고 대신 귀국했다.
  볼모 생활 중에 부친이 사망했으므로 곡도 하지 못한 세자빈의 한은 컸으나 원손과 다른 아들들을 볼모로 잡히고 귀국한 세자빈은 부친의 빈소에 곡을 할 수 없었다. 곡하기 위해 수천 리 길을 달려온 며느리의 왕곡을 인조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심 많은 부왕의 이 가혹한 조치에 삼공이 모두 왕곡의 허락을 청했다.
  "세자께서 귀국을 청할 때 세자빈의 부친은 주고 모친은 병중에 있다는 것을 아울러 이유로 삼았는데 이제 찾아가 곡하고 모친을 살펴보는 절차가 없으면 저쪽 나라가 그 말을 들을 때 반드시 의아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장남과 며느리에 대한 증오를 이미 돌이킬 수 없었던 인조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세자빈 강씨는 빈소에 곡도 하지 못하고, 병중인 모친을 만나지도 못한 채 심양으로 돌악야 했다. 인조 22년 2월 초순이었다. 인조는 이때 세자 부부를 감시하기 위한 간자로 환관 긴엄겸을 동행하도록 명령했다.
  인조의 이런 소견 좁은 냉혹한 처사는 사대부들의 많은 불만을 낳았다. 광해군이 법적인 모후 인목대비에게 불효했다는 것을 반정 명분으로 삼은 인조가 며느리 강씨의 친부 상에 왕곡을 막은 것은 심각한 자기 부정이었다.
  며느리 강빈의 왕곡을 끝내 허락 않은 인조의 처사는 급기야 인조를 끌어내리고 소현세자를 추대하려는 사건을 야기한다. 그 주모자가 인조반정 일등공신인 청원부원군 심기원이란 데서 인조에 대한 당시 사대부들의 감정을 볼 수 있다. 심기원은 소현세자를 추대하려다가 효자인 소현세자가 추대를 받아들일 리 없다는 생각에 대신 회은군 이덕인을 추대하려 하였다. 세조가 영구 귀국하기 1년 전인 인조 22년 3월 발생한 심기원 모반 사건이 그것이다.

 

귀국한 세자의 급서


  인조 23년 2월 소현세자는 장장 9년 간의 가슴 벅찬 기대를 안고 그리운 고국길에 올랐다. 이전의 두 번에 걸친 귀국처럼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구 귀국길이었다. 인조 23년(1645) 2월 이십대 초반의 나이로 심양에 잡혀갔던 세자는 삼십대 중반의 연부역강한 나이로 귀국했다. 인생의 황금기를 타국의 볼모로 보낸 34세의 비운의 왕세자였다. 그는 이제 자신의 비운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에게 귀국은 비운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 비운은 9년 간의 볼모 생활을 지혜롭게 보낸 데서 온 것이었다. 그는 치욕의 볼모 기간을 세상에 대한 저주의 나날로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이 기간을 새로운 국제정세와 사상, 그리고 새로운 문물울 받아들여 체화시키는 기간으로 삼았다. 명나라를 죽도록 사모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행위인지를 깨달았고, 성리학 이념 체계라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사상인지도 깨달았다. 세상에는 성리학뿐 아니라 천주교라는 새로운 사상이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성리학은 절대 진리가 아니라 이 세상의 수많은 사상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느꼈던 것이다.
  수많은 서양 물품을 휴대한 채 귀국하는 소현세자의 뇌리에는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려는 이상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상을 펼치기 위한 공간으롯의 조선이 아니라 상상못할 비극의 현장으로서의 조선이었다.
  비극의 조짐은 인조가 귀국한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진하를 막은 것이었다. 의심 많고 용렬한 부왕 인조에게는 세자의 귀국자체가 의혹의 대상이었다. 명나라가 멸망했기에 더 이상 소현세자를 볼모로 잡아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합리적 사고는 멀리했다. 소현세자가 휴대한 수많은 서양 서적과 물품들도 새로운 세사에 대한 적극적이고 긍정적 몸짓이 아니라 오랑캐에게 정신을 팔아먹은 증거물로 보았다.
  인조는 시종 세자에게 냉담했고, 부왕의 이러한 냉대에 상심했다. 이런 상심 때문인지 세자는 귀국 두 달 만에 병에 걸려 누웠다. 세자가 병에 걸린 것은 귀국한 해 4월 23일로 어의 박군은 세자의 증세를 학질이라고 진단했다. 그다지 중병이라고 볼 수 없는 세자의 학질을 치료하는 데 중요한 한 인물이 등장한다. 의관 이형익이었다. 약방은 다음날 새벽에 인조에게 이형익을 시켜 침을 놓아서 학질의 열을 내리게 주청했고 인조는 여기 따랐다. 그날 '인조실록'은 '화성이 적시성을 범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형익은 인조의 명에 따라 세자의 발병 다음날인 24일부터 침을 놓았다. 다음날인 25일에도 세자는 침을 맞았는데 그 다음날인 26일에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한 나라의 세자가 그야말로 약 한 첩 못 써보고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소현세자의 급서와 문제 많은 장례 절차


  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당연히 수많은 의혹을 불러 일으켰고, 세자에게 침을 놓은 의관 이형익에게 의혹이 집중되었다. 이형익은 원래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의 사가에 출입하던 의원으로 불과 3개월 전에 의관에 특채된 인물이란 점에서 의혹은 더했다. 그의 특채 시점이 세자의 귀국 시점이란 것과 그의 특채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소용 조씨라는 점이 의심을 증폭시켰다. 소용 조씨와 세자 부부가 불편한 사이였음을 모르는 궁중 사람은 없었다.
  세자가 죽은 후 인조가 시종일관 이형익을 옹호하고 나서자 의혹은 당연히 인조에게 쏠렸다. 왕이나 세자가 승하하면 잘못의 유무를 떠나 시의들을 국문하는 것이 관례였다. 소현세자 같은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양사에서 이형익을 탄핵하고 나선 것은 당연했다.
  "의원 이형익은 사람됨이 망령되어 허탄한 의술을 스스로 믿어서 세자의 증세도 판단하지 못하고 날마다 침만 놓았으니 그를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도록 하소서."
  학질 걸린 세자에게 침만 놓다가 사흘 만에 사망케 한 것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인조는 국문을 반대하며 이형익을 옹호하고 나섰다. 양사에서 재차 국문을 청했으나 인조는 결코 따르지 않았다. 소현세자의 죽음에 인조가 관련되었다는 유력한 증거의 하나가 바로 이 점이다.
  소현세자가 독살되었다는 증거는 정사인 '인조시록' 23년 6년 27일자에도 나온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천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알아볼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시신이 까맣게 변하거나 얼굴의 눈, 코, 귀 등 구멍에서 피가 나오는 것은 독약을 먹고 죽은 사람의 시신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목격담은 소현세자의 생모 인열왕후의 서제인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내척의 자격으로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시신의 상태를 보고 사람들에게 말한 내용이다.
  인조가 세자를 죽인 주범이라는 사실은 장례 절차에서도 나타난다. 인조는 시신을 담은 관의 명칭에 '재궁(임금.세자의 관)'이란 호칭을 못 쓰게 하고 대신 대부나 일반 사서들이 쓰던 널 '구'자를 쓰도록 했다. 세자시강원의 보덕 서상리의 주장처럼 세자는 살아서는 동궁이요 죽어서는 빈궁이 되므로 재궁이라 쓰는 것이 예법에 맞는 것이었다.
  무덤의 이름도 원자 대신에 묘자를 쓰도록 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원자는 태자묘를 일컫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의 태자만 쓸 수 있다는 논리였으나 황제의 무덤을 일컫는 능자를 역대 임금의 무덤에 써왔다는 점에서 이 또한 용렬하고 저주에 가득 찬 인조의 명분 없는 억지였다.
  상복 착용 기간도 마찬가지였다. 고례에 따르면 장자의 상에는 부모가 참최복, 즉 3년복을 입는 것이 예법이었다. 그러나 영상 김류, 좌상 홍서봉 등 서인 중신들은 인조와 왕비의 복제를 기년복, 즉 1년복으로 의정해 올렸다. 이 자체로도 문제가 있었는데 인조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한 달을 하루로 계산하는 역월법을 적용해 12일 만에 복제를 마치려 했다. 역월법은 연산군이 할머니인 인수대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사용했던, 성리학 사회에서는 패륜적인 예법이었다. 그나마 인조는 12일을 한 등급 더 감해 7일 만에 상례를 마쳤다. 3년상이 7일상이 된 것이다.
  최소한 재최 1년복을 입어야 할 백관의 복제도 3개월 단상으로 결정했다. 옥당에서 3개월 단상은 부당하다는 차자를 올렸으나 인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지평 송준길이 병을 이유로 벼슬을 사양하는 상소에서 이를 조목조목 비판하고 나섰다. 유신 송준길의 이 비판은 인조에게 뼈아픈 것이어서 인조는 상소에 대한 비답도 없이 그를 체직하라고 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