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북벌의 시대, 대동법의 시대(1)

구름위 2013. 6. 19. 15:00
728x90

송시열, 드디어 출사하다


  인조가 세상을 떠난 다음달인 효종 즉위년 6월, 송시열은 드디어 출사길에 올랐다. 김집, 송준길, 권시 등과 함께였다. 효종은 "송시열은 지난날 나의 사부였으므로 그리운 생각이 마음속에 간절하니 이런 내용을 갖추어 서술하여 부르라"면서 대군 시절 사부였던 최온을 함께 불렀던 것이다.
  효종은 출사한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세자시강원 진선을 임명하였으나 사양하자 3일 만인 효종 즉위년 6월 19일에 정4품인 사헌부 장령을 제수할 정도로 그들을 우대했다. 송준길과 송시열, 양송에게는 율곡의 학통을 이은 산림의 적자라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송시열의 나이 만 42세 때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무려 12년 만에 출사한 송시열은 불과 20일도 안 된 6월 26일 벼슬을 내던지고 떠나고 말았다.
  '효종실록'은 송시열이 입대를 청했는데 "이때 마침 상께 병이 있어 접견하지 않으니 시열은 대청에서 조복을 벗고 곧장 국문으로 나아가 상소하고저 떠났다"고 적고 있다. 송시열 문집인 '송자대전'의 '연보'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효종은 송시열이 유계 등이 이미 논란을 벌였던 인조의 묘호문제를 다시 거론할 것을 우려해 병을 핑계로 인견을 거부한 것이었다. 인조의 묘호에 어질 인자를 쓰려 하자 부수찬 유계가 이미 제12대 임금 인종이 있다는 이유로 반대해 논란이 일었던 것이다.
  효종은 이 문제를 인종의 종 대신에 조를 씀으로써 해결하려 하였는데, '공은 조', '덕은 종'이란 말처럼 '조'자는 왕실의 시조나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큰 공로가 있는 임금에게 내리는 시호였으므로, 유계 등이 '혐의를 분별하는 뜻'이 있어야 한다며 논란을 벌였던 것이다. 송시열이 사직하고 떠나자 효종은 평소 우암과 친한 동부승지 김익희를 보내 다시 불렀으나 송시열은 상소 한 장을 봉입한 채 떠나고 말았다. 이 상소에서 송시열은 "군사를 닦고 준비하여 외적으로부터 수모를 막을 것" 등 13개 조목을 역설했다. 나중에 다시 출사하여 이 13개 조목을 부연 설명한 것이 바로 유명한 '기축봉사'이다.
  효종이 인견하지 않는다 해서 조복을 팽개치고 내려간 사건으로 송시열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효종실록'에도 그 비난이 기록되어 있다.
  "임금이 시열을 알아주어 특별히 융숭한 대우를 받았음에도 인견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관직을 박차고 귀향하니 듣는 사람이 다 지나치다고 여겼다."
  사실 과거 급제자도 아닌 그에게 정4품인 사헌부 장령을 제수한 것을 파격적인 배려였다. 그럼에도 임금이 인견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벼슬을 팽개치고 돌아간 것은 지나치게 거만한 처사가 아니냐는 비난이 일었던 것이다.
  이런 비난에 대해 그의 당인 산당에서는 그를 옹호하고 나섰다. 그의 친구 이유탵가 그를 변호한 데 이어 산당의 영수인 김집도 송시열을 거들고 나섰다.
  "시열이 잠저(임금이 되기 전에 거처하던 사저)에서 오래 모셨으니 이 사람의 성품이 강하고 행동이 과감한 것을 전하께서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나 좌우에 두고 다듬어 쓰시면 반드시 보탬이 될 것입니다."
  공조 좌랑 송시열의 동문인 이유태가 상소하고, 교리 유계, 소복양 등이 옥당에서 거듭 상차를 올려 송시열을 다시 부를 것을 주청하자 효종은 다시 그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송시열은 효종의 거듭된 권고를 받고 조정에 다시 나와 효종을 만났다. 효종 즉위년 10월 6일이었다. 출사를 둘러싼 효종과의 한판 승부에서 송시열이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대군사부로 봉림대군을 교도한 이후 실로 13년 만의 만남이었다. 만 17세의 소년 봉림대군은 만 30세의 효종이 되어 있었다. 만 29세의 청년 송시열은 만 42세의 장년이 되어 있었다.
  다시 조정에 나온 송시열은 그러나 어머니의 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청하면서 '봉사'를 올려 자신의 소회를 피력했다. 효종 즉위년인 1649년이 기축년이므로 '기축봉사'라고 부르는 글이다. 봉사란 비밀이 누설되지 않도록 밀봉하여 임금에게 바치는 글을 뜻한다. 송시열이 굳이 봉사의 형식을 띤 것은 '정자와 주자의 소장이 황색으로 밀봉해 올렸기' 때문에 이를 본뜬 것이었다. 송시열은 '봉사'를 올리는 이유를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될 것이 매우 많기 때문"이라며 정자와 주자는 모두 황첩을 썼지만 효종이 상중이기 때문에 백첩으로 올린다고 말했다. 과연 기축봉사에는 무슨 내용이 담겨 있을까?"

 

명나라의 은혜를 갚는 것이 북벌


  흔히 송시열을 극단적인 북벌론자로 많이 이해한다. 사실상 그는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로 증오했다. 그는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신한 것을 '갓 대신 신을 머리에 쓴 것'으로 여겼다. 그가 청나라에 저항한 많은 인사들의 전기를 쓴 것도 그의 숭명의리의 표현이다. 그는 끝까지 척화론을 주장해 청나라에 끌려간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전기인 '삼학사전'을 비롯해 '임경업 장군전'을 썼으며,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부호군 김종윤전', 의병장인 '증 병조참판 장윤전' 등 대의를 지킨 많은 인물들을 기렸다. 이순신 장군 전승비인 '남해노량 충무공 묘비'를 쓴 인물도 바로 송시열이다.
  이는 그의 춘추대일통 사상을 구체적인 인물 속에서 기린 글들이다. 그가 이처럼 의리를 강조하고 또 북벌을 주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실제 행적을 고찰해 보면 송시열이 실제로 북벌을 추진할 의사가 있었는지 의문이 가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한자 2만여 자에 달하는 '기축봉사'에는 북벌에 대한 송시열의 의중이 잘 드러나 있다. '기축봉사'에서 송시열은 시종일관 주의, 즉 주자를 칭송한다. 그 중 몇 구절을 보자.
  "예전에 주자가 행궁에 나가는 길에 한 사람을 만났더니 그가 경계하기를,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정성스럽게 한다는 말은 임금께서 듣기 싫어하는 바이니 말하지 마시오'라고 하자 주자는, '내 평생에 배운 것이라고는 정심성의 네 글자뿐인데 어찌 감히 간사하게 말을 돌려 우리 임금을 속이겠소'라고 거절했습니다. 이제 신도 감히 다른 말로 고명하고 순수한 성학을 저버리지 못하겠으므로, 감히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드립니다."
  송시열에게 주희의 한 마디 한 움직임은 그대로 전범이었다. 송시열은 이런 기조 위에서 북벌을 피력했다.
  "'정치를 바르게 닦아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는 사실은 공자가 '춘추'에서 대일통의 의리로 천하 후세에 밝힌 바이므로 무릇 혈기 있는 사람치고 중국을 높이고 오랑캐를 추하게 여겨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주자는 '인은 부자보다 큰 것이 없고 의는 군신보다 큰 것이 없으니 이것이 삼강의 요점이요' '군부의 원수와는 한 하늘 밑에 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효종실록'은 송시열이 봉사란 비밀 상소문 형식을 띤 상소문을 올린 것은 '기축봉사'를 일관하는 대일통 사상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공자의 대일통은 중국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나라란 사상이었다. 고대 중국 주나라 이외의 모든 민족은 오랑캐요 금수이므로 중국과 주나라를 따라야 한다는 사상이다.
  송시열의 기축봉사는 그 내용이나 형식에서 모두 주희가 남송의 효종에게 올린 '임오응조봉사'를 본뜬 것이었다. 주희는 '임오응조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천하국가를 다스리는 데에는 한번 정하면 결코 바꾸지 못할 계책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정치를 바르게 닦아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것입니다. ...오랑캐 금나라는 우리와는 한 하늘 밑에 살 수 없는 원수입니다."
  '봉사'라는 상소형식과 "정치를 바르게 닦아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주장은 주희의 말에서 그대로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주희와 송시열은 수백 년의 세월과 수천 리의 거리가 떨어져 있었으나 기본 사상은 완전히 같았던 인물들이었다.
  문제는 주희에게 대일통은 그대로 남송 자신이 천하의 주인이라는 자기 중심적 사상이지만 송시열에게 대일통은 조선 자신이 아니라 명나라를 높이는 타인 중심적 사상이라는 점이다. 사상면에서 볼 때 송시열의 북벌론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명나라를 따르자는 대일통 사상이다. 송시열이 말한 군신의 의리는 인조의 삼전도 치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명나라는 천자의 나라요 조선은 제후의 나라이므로 제후의 나라인 조선이 임금인 명나라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 송시열의 대일통 사상이다.
  "우리 태조 고황제께서는 우리 태조 강헌대왕과 같은 시기에 창업하시고 즉시 군신의 의를 맺으시는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가 충정의 절개를 지킨 지 3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불행히 지난번에 추한 오랑캐가 방자하게 온 나라를 삼켜서 당당한 예의의 나라가 다 비린내 나는 더러운 것에 더럽혀졌으니 그때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하겠습니까?"
  조선 태조 이성계가 신하로서 명 태조 주원장을 임금으로 섬긴 것이 변할 수 없는 군신의 의리라는 주장이 송시열의 의리론이다. 즉 그에게 의하면 조선은 명나라를 임금의 나라로 섬기는 것이 삼강의 의리이다.
  "우리 나라는 실로 신종황제의 은혜를 입어 거의 빈 터가 된 종묘사직이 다시 있게 되고 생민이 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우리 나라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와 생민의 털 한 터럭에 황은이 미치지 않은 바 없습니다. 그런즉 오늘날 온 천하에서 명나라가 망한 것이 우리만큼 억울하고 분한 자가 또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광해군이 이런 분함을 잊고 강홍립을 시켜 전군을 포로로 만들어서, 천하 사람들이 우리 나라도 오랑캐가 되어버렸다고 조롱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우리 대행대왕(인조)께서 의를 주창하시고 반정하셔서 대의를 밝히시니 세상이 해와 달같이 밝게 되어, 온 나라 사람들의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거듭 대행대왕께서 지성으로 위(명나라)를 섬기셔서 매양 은총과 칭찬을 받음이 종시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묘호란 이후 갑자기 북쪽 오랑캐의 협박을 당해 충성된 절개를 밝히지 못했으니 그 이후의 일은 신자로써 차마 말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송시열은 이처럼 우리 나라가 치욕을 받은 사실보다 명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는 것을 구구절절 더 슬프게 생각하고 있었다. 송시열에게 있어 북벌은 청나라를 물리쳐 명에 대한 은혜를 갚는 것이었다. 그에게 대일통, 즉 북벌은 청나라를 물리쳐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갚는 구체적인 수단이었다.
  송시열의 북벌론과 효종의 북벌론
  그가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자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명이 망한 후에도 명의 그림자만을 잡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명이 망한 후 중화가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잡저'에 실린 그의 글을 보자.
  "중국인들은 우리를 동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름이 비록 아름답지는 못하지만 또한 이유가 있다. 맹자는 '순은 동이 사람이며, 문왕은 서이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순 또한 성인이므로 공자와 맹자가 우리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았음을 근심할 것은 없다. 엣날 칠민은 남이의 지역이었는데 주자가 이 땅에서 일어난 후에 뒤바뀌게 되었다. 땅으로 말하면 예전에는 이가 살던 지역이지만 지금은 (조선이) 중국으로 변한 것이다."
  그는 중국이란 고정된 특정 지역이 아니라 도가 행해지는 지역을 뜻한다는 사상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서 조선 후기 사대부들이 가졌던 이른바 '소중화 사상'이 나오는 것이다. 송시열이 사대주의자인 점은 분명하지만 '소중화 사상'은 그를 단순히 맹목적인 사대주의자로 보는 시각에 무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송시열의 '소중화 사상'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이 그가 효종같은 군사적 북벌론자들과 사상적으로 갈라지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군사적인 북벌에는 반대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소중화 사상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세치 혀로만 북벌을 높인 것이었다. 그는 군사를 동원하는 실질적 북벌에는 반대하고 있었다. 북벌에 대한 그의 실제 생각을 '기축봉사'에서 보자.
  "오늘날 시세를 따지지 않고 강한 오랑캐를 가벼이 끊으면 원수를 갚기도 전에 화가 미칠 것이니 이는 역시 선왕께서 수치를 참고 몸을 낮추시어 굴복하심으로써 종묘사직을 연장시키신 본의가 아닙니다... 이런 독한 마음을 잊지 마시고 그 원한을 차곡차곡 쌓으셔서 평소의 온화한 말 가운데에도 그 깊은 곳에는 분노가 더욱 쌓이게 하십시오. 또한 부귀한 가운데 있을지라도 언제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뜻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그리고 이러한 굳은 뜻을 5년, 7년, 10년, 20년이 지나도록 결코 풀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우리 힘의 강약을 살피고 저 오랑캐 세력의 성하고 쇠함을 엿본다면, 비록 창을 들고 저들의 죄를 따지면서 중원을 깨끗이 쓸어 신종황제의 망극하신 은혜를 갚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혹시 오랑캐와 국교를 끊고 이름을 바르게 하고 이치를 밝혀서 우리의 의리를 지킬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기축봉사'에서 송시열의 말하는 북벌은 조선이 힘을 길러 청나라를 정벌하는 것이 아니었다. 송시열은 이미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 가능한 북벌 의리는 청을 정벌하는 것이 아니라 청과 국교를 단절하고 명을 임금의 나라로 섬기는 의리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것을 하기 위해, 즉 청과 국교를 끊고 명을 섬길 수 있는 정도의 군사력이 송시열이 바랐던 조선의 군사력이었다.
  결국 송시열의 북벌론은 실제 무력으로 청나라를 정벌하는 무력 북벌론이 아니라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 말고 우리의 힘을 길러 청나라와 국교를 단절하자는 명분적 북벌론, 제한적 북벌론이다. 말하자면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는 현실을 뒤바꾸지는 못할지라도 나의 정체성만은 끝내 지키자는 자기 정체성론이었던 셈이다.
  이것은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정권의 이론가로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광해군의 현실 외교를 무도라고 비판하여 반정한 결과 삼전도의 치욕을 자초한 서인정권으로서 청나라의 실체를 인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청을 무력으로 정벌할 수도 없었다. 말하자면 진퇴양난이었다. 그 진퇴양난이 만든 묘수가 말하자면 '소중화 사상'이요 '대일통 사상'이었다.
  하지만 효종은 달랐다. 효종은 명분론자가 아니라 현실론자였다. 효종에게는 송시열처럼 국력을 길러 청과 국교를 끊고 이미 망해버린 명을 섬기는 따위의 명분적 북벌론, 허구적 북벌론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효종에게 북벌은 군사력으로 청나라를 정벌하는 글자 그대로 '북벌'이었다. 효종은 명분만의 허구적 북벌이 아니라 실제적 북벌을 추구했다. 북벌의 수행만이 소현세자와 그 아들 대신 자신이 왕위에 오른 명분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군사력을 키웠다.

 

산림이란 정치세력


  효종이 즉위할 무렵 조선에는 특이한 성격의 정치세력 하나가 존재했다. '산림'이라 불리는 정치세력이었다. 시골의 서원 등에서 강학하는 도학자를' 산림학자', 도는 '산림양덕지사'라고 일컬은 데서 비롯된 말이 산림이었다. 이들은 과거를 통한 출사는 포기한 채 학물만을 닦았다. 인조반정 이후 정국에 미치는 이들의 영향이 증대하면서 하나의 정치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어떤 측면에서 이들은 벼슬에 뜻이 없어서 과거를 보지 않았다기보다는 과거를 통하지 않고도 벼슬길에 나갈 수 있기 때문에 과거를 보지 않은 측면이 강했다. 조선 후기 들어 그만큼 이들 산림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들이었다.
  산림의 의견이 중요하게 된 이유는 이들이 율곡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정통 서인 세력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인조반정은 이이의 제자들이 주도한 정변이었다. 학파가 정파가 되는 조선 정치의 특성상 반정주도 세력으로서는 이이의 학통을 이은 산림 세력의 지지 여부가 중요할 수 밖에 없었다.
  반정 직후 집권 세력들이 비밀리에 두 가지의 국정운영 원칙을 정해 놓았다는 소문이 조야에 나돌았다.그 하나는 국혼물실'이고 다른 하나는 '숭용산림'이라는 것이었다. '국혼물실'은 글자 그대로 '국혼'은 빼앗기지 않겠다, 즉 왕비는 서인 집안에서만 내겠다는 뜻이었고, '숭용산림'은 산림을 높여 등용하겠다는 뜻이었다. 바로 '숭용산림'이란 쿠데타 정권의 국정운영 원칙 덕택에 이들 산림들은 과거를 통하지 않고도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산림의 종주인 사계 김장생은 과거를 보지 않았으나 인조반정 후 사헌부 장령, 집의 등 대간직을 제수 받았으며 그의 아들 신독재 김집도 과거를 보지 않은 몸으로 대사헌을 역임한 데서 알 수 있듯 이들 산림은 이미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효종 때 산림의 영수였던 김집 휘하에는 양송으로 불리던 송시열, 송준길과 초려 이유태, 유계, 윤선거 같은 쟁쟁한 제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송시열과 송준길은 쌍청공 소유의 자손으로 친척간이었다. 송시열은 여덟 살 때 한 살 위인 송준길의 아버지 송이창에게 사사하기도 했었다. 훗날 송시열과 함께 사사되는 김수항의 아들이자 양송의 제자였던 김창흡이 말하는 이들의 학문 태도를 보자.
  "우암(송시열)과 동춘(송준길)과 초려(이유태)가 함께 강론할 때 우암은 5일 밤낮을 자지 않고도 정신이 여전하여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동춘은 3일 밤낮 후에는 반드시 하룻밤씩 실컷 자고 일어나는데 그러고 나면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초려는 억지로 잠을 자지 않고 공부에 열중하지만 낮이면 때로 손으로 턱을 괴고 꾸벅꾸벅 졸았으니, 여기에서 선배들의 정력과 학문의 깊고 얕음을 볼 수 있다."
  인조반정 이후 인조와 효종은 이들 산림 세력에게 거듭해서 관직을 제수했다. 김집이나 송준길도 그랬지만 그 대표적인 인물인 송시열을 예로 들면 첫 관직에 나서는 인조 11년(1633) 27세 때부터 사망하는 숙정 15년(1689) 83세 때까지 56년 간에 걸쳐 네 임금이 그를 부른 횟수는 무려 167회였다. 그러나 송시열이 이에 응한 것은 37회에 불과했다. 그는 제수되는 벼슬을 거듭 거부함으로써 그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한껏 높일 수 있었다. 벼슬에 뜻이 없어서 출사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송시열을 조선 역사상 최대의 당쟁가라고 말하지만 그가 조정에서 벼슬한 기간은 불과 몇 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우상과 좌상에서 세 번 제수되었으나 그가 조정에 출사해 정승의 임무를 수행한 날은 49일에 불과하였다. 나머지 기간은 고향에서 학문을 닦고 문인들을 길렀다. 그리고 배후에서 집권당인 서인과 노론을 조종했던 것이다.
  병자호란으로 결정적 타격을 입은 인조, 그리고 둘째 아들로서 소현세자의 장남 석철의 자리를 차지한 효종으로서는 산림의 지지 여부가 왕권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지주가 되므로 이들에게 자주 벼슬을 제수한 것이다.
  이런 정치적 필요 이외에 실제로 이들 산림을 현자로 여겨 적극적으로 천거한 조정 대신들도 있었다. 인조 때의 우의정 이경석이 그런 인물이었다. 이경석은 이조판서와 정승을 역임하면서 숨은 인재를 찾아 등용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던 명재상이었다. 송시열이 거듭 관직을 사양하고 나오지 않자 우의정으로 있던 이경석은 인조 23년 10월 이렇게 주창한다.
  "김집은 일생 동안 성리학에 몰두하였고 송준길과 송시열 역시 학문과 품행으로 이름난 지 오래입니다. 이 두세 신하는 늙거나 병들었지만, 정성을 들여서 찾고 예의를 갖추어서 부른다면 분수나 의리로 보아 어찌 감히 나오지 않겠습니까."
  송시열도 초야에 있을 때는 이런 이경석을 고맙게 생각했으나 훗날 집권당의 배후 영수가 되면서 현종의 온양 온궁 행차를 계기로 이경석과 치열하게 다투게 된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명분의 하자를 안고 즉위한 효종에게 산림의 지지는 중요한 것이었다. 효종이 즉위하자 당시의 시권자들인 김자점과 원두표, 이후원 등이 앞다투어 산림 인사들의 중용을 권유한 것도 자파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효종 즉위 초의 정국은 낙흥부원군 김자점의 낙당과 원성부원군 원두표의 원당으로 나뉘어 있었다. 원당과 낙당은 산림의 지지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경쟁적으로 산림을 추천한 것이다.
  이런 이유들의 중첩되어 효종은 김집과 송시열, 송준길 등 산림을 대거 불렀고 이들은 드디어 사양하는 자세를 버리고 영수 김집을 필두고 대거 출사해 조정에 나왔다. 그러나 산당은 낙당이나 원당은 물론 국왕 효종의 들러리나 서기에는 이미 너무 커져버렸을 뿐만 아니라 당 자체의 정치적 야심도 이들보다 작지 않은 정치세력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성리학적 명분론으로 무장된 학자적 정객이기도 했다.
  김자점의 낙당과 원두표의 원당은 모두 산림을 자파로 끌어들이려 헀지만 막상 산림은 낙당과 원당 모두를 부패 정치세력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김집과 송준길은 사헌부, 사간원 등 자파의 대간을 동원하여 당대의 실세인 김자점과 그 당인들을 탄핵했다. "나라를 미혹케 하고 조정을 잘못 이끌었다는 이유" 였다. 이들은 김자점과 그 당인들인 전라감사 이시만 등을 몰아냈다.
  산림은 김자점의 낙당뿐만 아니라 원두표의 원당에 속한 예의 이행진과 승지 이시해 등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원두표의 집을 출입하면서 압객(서로 예의를 차리지 않는 친밀한 사이)으로 불려도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처럼 출사한 산당은 마치 중종 때의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가 그랬던 것처럼 거침없는 공세를 취했다. 초야에 있었다는 선명성과 이이의 학통을 이었다는 정당성을 무기로 산림이란 정치세력이 조정에 등장한 것이었다. 산림의 등장은 역사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