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왕위에 올랐다고 가통까지 이은 것은 아니다 - 예송논쟁(2)

구름위 2013. 6. 19.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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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자라는 호칭은 임금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 송시열의 정적들-예론의 대가 허목


  자의대비의 복제가 서인들의 주장대로 1년으로 결정되어 시행되고 있던 현종 1년 3월 한 남인 논객이 논쟁에 뛰어들어 예송논쟁을 재연시켰다. 정4품인 사헌부 장령 미수 허목이었다.
  허목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나이 50이 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로, 초야에 묻혀 제자백가에 대해 연구하다가 다시 예학에 몰두하여 이 방면의 일가를 이루
었다. 그가 학문의 고명함을 인정받아 조정에 나온 것은 효종 8년(1657), 그의 나이 만62세 때였다. 자신의 호대로 눈썹이 긴 늙은이 일때 조정에 나온 것이었다. 그는 처음 정5품 사헌
부 지평을 제수받았다가 이듬해 장령으로 승진했다. 그가 현종 3년 3월 고향에서 올린 상소문이 논쟁을 재연시켰다.
  "신이 국상 성복의 예에 있어, '예관이 맡은 일이고, 당연히 예로부터 내려온 국가 전례가 있겠지'라고 여겨, 다만 동료들과 함께 국상의 잘못만을 논했었는데, 시골로 돌아온 후 본현을 통하여 대신들이 의논하여 정한 이어시(새 임금이 즉위하는 시기)의 절목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대왕대비께서 기년 복제를 입으시게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초상 때라서 너무 황급한 나머지 예를 의논한 제신들이 혹 자세히 살피지 못하여 그러한 실수가 있었던 것인지요?"
  자의대비의 1년복이 당황한 대신들의 실수가 아니냐는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허목의 논의는 크게 보아 두 가지였다. 하나는 왕가의 예법은 일반 사대부와 다르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자가 죽으면 본처 소생의 차자가 장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의례' 주소에서 정현은 '장자는 위아래로 통하는 호칭이다. 적자라는 호칭은 오직 대부. 사에게만 해당되지 천자와 제후에게는 통하지 않고 또 태자라고 말하여도 위아래로 통하지 않는다. 장자로 적통을 세운다고 한 것은 적처가 낳은 자식은 모두가 적자로서, 만약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가 낳은 둘째 아들을 세우고 즉시 장자로 명명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만약 적자라고 말하면 이는 오직 첫째 아들에게만 해당되지만, 장자라고 말하면 적통을 장자로 세운다는 것을 통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장자는 위아래로 통하는 호칭이다' 라는 말은 장자가 맏아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후사를 이은 사람을 뜻한다는 말이다. 더구나 적자라는 칭호는 사대부에게나 통하는 말이지 임금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니 장자와 서자, 또는 적자의 구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말이었다. 자의대비의 1년복이 원천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지적이다.
  "적자에서 적자로 이어졌을 때 그를 일러 '정체'라 하여 3년복을 입을 수 있고, 중자로서 계통을 이은 자도 같습니다. 서자를 세워 후사를 삼았을 때는 그를 일러 '체이부정'이라 하고 따라서 3년을 입을수 없는데, 그는 첩이 낳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장자'이기는 일반인데 장자로 적통을 세웠을 때는 3년, 서자를 세워 후사를 삼았을 때는 1년을 입는 것은 적자에서 적자로 이어지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뜻입니다."
  허목은 송시열 등 1년복으로 정한 서인들의 아픈 곳을 찔렀다.
  "소현이 세상을 일찍 뜨고 효종이 인조의 둘째 장자로서 이미 종묘를 이었으니, 대왕대비께서 효종을 위하여 재최 3년을 입어야 할 것은 예제로 보아 의심할 것이 없는 일인데, 지금 강등을 하여 기년 복제로 한 것입니다. 대체로 3년의 복은 아버지를 위하여 입는데 아버지는 지극히 높기 때문이고,  임금을 위하여 입는데 임금도 지극히 높기 때문이며, 장자를 위하여 입는데 그가 할아버지 아버지의 정통을 이을 사람이고 또 앞으로 자기를 대신하여 종묘를 맡을 사람이므로, 그것을 중히 여겨 그런 것입니다. 지금 효종으로 말하면 대왕대비에게는 이미 적자이고 또 조계를 밟아 왕위에 올라 존엄한 '정체'인데, 그의 복제에 있어서는 '체이부정'으로 3년을 입을 수 없는 자와 동등하게 되었으니, 어디에 근거를 두고 한 일인지 신으로서는 모를 일입니다."
  그의 논리는 본처 자식과 첩의 자식을 구분하는 말이 적자, 서자이고, 맏아들이 죽어 둘째 아들이 승중하면 그가 장자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효종은 당연히 장자이고 또 임금이니 당연히 자의대비는 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국가의 큰 상사는 사체가 중하고 예제도 엄하니, 비록 말절에 불과한 의식일지라도 그를 문란하게 행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3년을 규정하는 예제이겠습니까...바라건대 예관자 유신들로 하여금 예에 어긋난 복제에 대하여 그를 뒤좇아 바로잡게 하소서. 지금 대상사의 연제 (1년 후에 지내는 소상)가 다가오고 있는데, 연제를 마치고 나면 기년복은 끝나는데 그때 가서는 비륵 후회한들 어쩔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다음달이면 효종이 승하한 지 1년이 되는 소상을 지낸 후 자의대비가 탈상을 하게 되어 있었다. 막판에 다시 이의가 제기되자 서인들은 당황했다. 더구나 자의대비의 기년복은 효종을 '체이부정'으로 본 것이라는 허목의 지적은 서인으로서는 뼈아픈 것이었다. 송시열이 정태화와 나눈 대화는 왕통은 비록 효종에게 있을지라도 종통은 소현세자에게 돌리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었다. 송시열은 분명 효종을 인조의 서자, 즉 체이부정으로 본 것이었다.
  현종은 대신과 유신들에게 이 문제를 의논하게 했는데, 기년복을 주장한 송시열이 반박에 나서야 했으나 그때 향리에 있었으므로 좌참찬 송준길이 나서서 허목의 이론을 반박했다.
  "...이번에 장령 허목이 상소문에 경전을 인용하고 의리에 입각하여 매우 장황한 논설을 하였습니다. 신이 그외 논설에 대하여 비록 감히 할 말을 다해 가면서 서로 힐난할 수는 없으나, 의심되는 곳이 없지 않습니다. [의례]에서,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라고 한 것은 위아래를 통틀어 한 말입니다. 만약 허목의 말대로라면 가령 사대부의 직처 소생이 10여 명인데. 첫째 아들이 죽어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3년복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둘째가 죽으면 그 아비가 또 3년을 입고 불행히 셋째가 죽고 넷째, 다섯째, 여섯째가 차례로 죽을 경우 그 아비가 다 3년을 입어야 하는데, 아마 예의 뜻이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허목은 다시 상소를 올렸다. 허목은 한술 더 떠 '의례주소'의 '장자를 위한 상복도'를 첨부하여 올렸다. 그는 여기에서 3년복을 입지 못하는 4가지 경우 '사종지설'를 비롯한 여러 복제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의례주소'의 상복도까지 첨부한 허목의 상소를 본 현종은 현재의 1년복이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느꼈다. 현종은 송준길이 면대를 청해 시사를 말하자 이렇게 물었다.
  "좌참찬이 헌의한 후에 허목이 또 상소를 하였는데 그 소문을 보았는가?"
  "신은 미처 보지 못했습니다."
  우승지 이은상이 "허목 상소문부터 먼저 아뢸까요"라고 하자 현종은 그러라고 하여 송준길은 허목이 올린 상소문과 상복도를 보았다. 송준길이 입을 열었다.
  "신 등의 주장은 비록 적처 소생이라도 둘째부터 '서자' 라는 것이 허목의 주장은 서자는 '첩자'라고 하기 때문에 말이 그렇게 서로 상반되고 있는데, 신과 시열은 둘째아들이 비록 왕통을 계승하였더라도 3년의 복을 입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같은 '의례' 주소가 보는 견해에 따라 그렇게 틀리다는 말인가?"
  "지금 허목이 그의 상소문에서 항목을 조목조목 다 나열해 놓았지만...체이면서 정이 아닌'체이부정' 것은 적처 소생의 둘째아들을 이름이며, 정이면서 체가 아닌 '정이부체'것은 비록 적손이기는 해도 체는 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의례'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사대부 사이의 일뿐만이 아니고 제왕의 집까지 통틀어서 말한 것입니다."
  자의대비 복제가 뒤늦게 문제되자 예조판서 윤강은 당황했다. 그는 '체이부정', '정이불체'같은 엄청난 말들이 횡행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논쟁에 잘못 끼어들다간 자칫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고 느꼈던 것이다. 윤강은 복제를 재론하는데 송시열이 빠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그를 다시 끌어들였다.
  "당초에 예법을 의논할 때 우찬성 송시열이 대신들과 함께 의논했습니다. 지금 그가 밖에 나가 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현종은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다. 이처럼 자의대비의 복제 문제는 다시 살아났다.
  허목이 상복도까지 첨부해 거듭 상소를 올리자 기년복을 주장했던 서인들도 당초 주장에서 한발 물러섰다.
  영돈녕 이경석은 "다시 널리 묻고 알아보셔서 행하심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물러섰다. 판중추 원두표는 아예 당초의 기년복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했다.
  "신이 원래 예법에 어두우므로 여러 대신과 함께 전례에 따라 헌의했던 것인데 지금 허목의 상소를 보면 모두 경전에 분명한 근거가 있는 글이니 어찌 다른 의논을 하겠습니까. 신은 당초 잘못된 주장을 고집해서 두 번 다시 막중한 예법을 그르칠 수 없습니다."
  영의정 정태화도 한발 물러섰다.
  "당초에 신은 다만 '국제'를 들어 말씀드렸던 것뿐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겠습니까. 오직 다시 예법에 밝은 신하에게 물어 처리하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다만 예종이 돌아가셨을 해 정희왕후가, 또 인종이 돌아가셨을 때 문정왕후가 입으신 상복제도를 아울러 자세히 살펴서 정하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정태화도 1년복이 문제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었다. 예종은 효종처럼 세조의 차자였고. 문정왕후는 자의대비처럼 인종의 계모였으므로 이 두 경우를 아울러 참조하도록 권한 것이었다. 이경석과 원두표, 정태화 등이 이처럼 자의대비의 복제에 문제가 있음을 순순히 인정하고 나선 것은 이들이 '체이부정설' 이 갖는 위험성을 감지한 까닭도 있었지만 이때만 해도 허목의 문제제기를 정치 공세라기보다는 학문적 견해의 차이로 여긴 때문이기도 했다.
  경전 해석이 3년설이 옳다면 굳이 1년설을 고집하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영의정 정태화마저 기년복이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자 복제 변경 여부는 송시열에게 달려 있게 되었다. 송시열이 다른 신하들처럼 "예법에 어두워 잘못 헌의했습니다"라고 말하게 되면 자의대비의 기년복은 참최복, 즉 3년복으로 다시 결정나는 것이고 곧 상복을 벗을 예정이던 자의대비는 늘어난 기간 동안 더 상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 예학의 정통을 이었다고 자부하는 송시열이 예법에 어두워 기년복으로 의정했다고 자인할 수는 없었다.
  우찬성 송시열이 헌의했다.
  "허목은 상소에서 많은 말을 했으나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장자가 죽으면 제2장자를 세워서 역시 장자라 이름하여 부모가 그 제2장지에게 3년복을 입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자를 세워서 후사를 삼으면 3년복을 입을 수 없는데 이것은 첩의 아들이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송시열은 일개 장령이 자신이 틀렸음을 공박하고 나온 데 자존심이 상했는지도 모른다.
  "신이 일찍부터 의심하여 알고자 하던 것도 바로 이 조목에 있었습니다. 허목이 이 조목에 분명한 근거를 댔으니 지금이야말로 신이 의혹을 풀고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이 자신의 잘못을 자인한 것이 아니라 허목에 대한 조롱임은 다음 구절을 보면 명확해진다.
  "'장자가 죽으면'이라고 했으나 언제 죽은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미 성인이 되어서 죽은 것이라면 그 아버지가 이미 참최복 3년을 입었을 것입니다. 그런 후 다음 적자(차적자)를 세워 장자라 하였는데, 그 차적자가 죽으면 또 참최복을 입어야 합니까? 그렇게 되면 '두 정통이 없고 두 번 참최복을 입지 않는다'는 예의 원칙은 어떻게 됩니까? 아마도 그것은 장자가 어릴 때 죽어서 아버지가 복을 입지 않아 적통을 이루지 못한 경우일 것입니다."
  송시열의 반론은 역시 만만치 않았다. 허목의 말대로 한다면 두번 참최복을 입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반론이었다. 송시열은 참최복을 두 번 입을 수 없다는 자신의 견해를 예를 들어 설명했다.
  "만약 장자가 성인으로 죽었는데 차자를 장자로 이름하여 3년복을 입는다면 적통이 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 된 자로서는 한 몸에 참최복이 너무 많지 않겠습니까. 만약 세종대왕이 오래 사셔서 문종이 먼저 세상을 떠났으면 세종이 3년복을 입고, 제1대군을 세워서 후사를 삼았을 것인데 제1대군이 또 불행히 세상을 떠나면 또 참최복을 입고 또 제2대군을 세우고 이렇게 해서 제8대군에 이르기까지 모두 참최복 3년을 입는다면 이것은 문종을 포함해 27년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평민이라도 이렇게 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존귀한 제왕이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문제는 장자가 죽었을 경우 뒤를 이은 차자에게 장자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느냐하는 것이었다. 예송논쟁 1백여 년쯤 후에 남인 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문제를 정리한 것을 보자. 정약용은 '상례외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태자로 책봉한 장자가 죽으면 부모는 부득이 3년복을 입는다. 그 후 차자를 세워 태자로 삼는다면 적자라 이름하는 것은 괜찮지만 장자라고 이름할 수는 없다."
  정약용은 송시열이 영수인 노론에 의해 축출당한 남인 정치가이자 학자였다. 그는 송시열과 허목이 논란을 벌였던 '의례주소' '가씨소'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주장을 펼쳤다.
  "'가씨소' 원래 양면성이 있다. 하나는 장자의 이름으로서 차자나 삼자도 가 하다고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자가 전중을 한 것을 체이부정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모순으로서 양자는 반드시 서로 통할 수 없다. 우암 송시열은 뒤의 설을 취한 것이고, 미수 허목은 앞의 설을 취한 것이다."
  소현세자의 비상한 죽음이란 특수한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이는 특정한 정치적 의도를 배제하면 그리 다툴 문제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둘이 싸운 내용은 정약용의 말대로 같은 책의 서로 다른 조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한 세기 후의 해석이고 당시는 송시열과 허목, 그 누구도 물러설 수 없었다. 송시열은 첩의 아들이기 때문에 3년복을 입을 수 없다는 허목의 주장에도 강하게 반박했다.
  "소위 서자가 후사가 되면 3년복을 입을 수 없는 것은 첩의 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본래 '의례소'에 나오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첩의 아들이기 때문'이란 말은 허목 자신이 붙인 것으로서 의례소에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의례소'에는 '서자는 첩의 아들이나, 적자의 제2자도 같이 서자라 이름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효종대왕을 인조대왕의 서자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서 라는 것은 천한 칭호가 아니라 여럿을 의미하는 중의 뜻입니다. 이는 대저 신이 의심하면서 결단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송시열의 말에도 분명한 논리가 있었다. 서자란 말은 첩의 아들이란 뜻과 장자 이외의 모든 아들이란 두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자신은 후자를 말한 것이라는 반론이었다.
  "대게 제왕가는 사직을 중히 여기기 때문에 옛날에도 장자를 버리고 서자를 세우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법을 만들 때에는 장자와 차자의 구별에 주의했습니다. 주나라 문왕이 장자인 백읍고를 버리고 무왕을 세웠지만 주공이 예법을 세울 때는 반드시 장자와 차자의 구별에 힘썼습니다. 오늘 논란이 된 것도 바로 이 예문인데 주공이 예법을 정한 의사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송시열은 소현세자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없었지만 소현세자가 인조의 적장자임을 비유로 설명했다.
  "'의례'가씨의 소는 제1자가 죽은 경우만을 말하고 제1자가 후손 없이 죽은 경우는 말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아마도 제1자가 미성년으로 죽었을 경우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허목은 소의 본뜻을 자세히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운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기'에 나오는 단궁의 문도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궁의 말은 공의중자라는 사람이 장자가 죽었을 때 장손이 있음에도 차자를 세운 것을 비난한 것이다. 곧 인조가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을 두고 효종을 세운 것이 잘못이라는 비유였다. 송시열은 후세 예가들의 심판을 기다리자는 휴전 제의로 상소를 마쳤다.
  "옛날 이황이 군신의 복제를 수숙으로 하였다가 기대승의 반박을 듣고 놀라 소견을 고치면서 '만일 기대승이 아니었다면 천고의 죄인이 될 뻔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신이 허목에게 바라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대저 시비가 엇갈리는 곳은 정주(장자와 주자)와 같은 큰 안목과 역량이 없이 한때의 의견만으로 결단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의심나는 곳은 그대로 남겨 후세의 예가들이 바로 잡기를 기다리고, 우선은 명백하여 의심이 없는 곳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사관은 현종에게 실록을 참조해 덕종. 인종. 순회세자(13세에 죽은 명종의 세자)의 장례 때 복제를 적어 바쳤다. 조 선은 원래 아들의 장례 때 3년복을 입는 제도가 없었다. 따라서 모두 1년복을 입었던 것인다. 정태화, 심지원 등은 모두 의논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고 실록에 실린 대로 따르자고 말했다.
  현종은 "여러 대신의 의논대로 시행하라"고 명할 수 밖에 없었다.
  송시열이 나름대로 근거를 세워 3년설을 반박했으므로 서인 대신들은 다시 송시열의 의견에 따라 1년복이 맞다는 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현종은 드디어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자의대비의 복제를 원래대로 기년복으로 결정하였다. 서인은 이것으로 예송논쟁이 종지부를 적은 것으로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탄 이는 착각이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 즉 왕가는 사가와 다르다는 윤휴와 허목의 주장에 대해 정확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이 점에 주목해 윤휴, 허목에 이어 예송논쟁에 뛰어 든 또 한 명의 남인 논객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고산 윤선도였다.  

 

종통과 적통이 어찌 다르랴 - 송시열의 정적들-시인 절객 윤선도


  허목과 송준길이 기년복을 놓고 논란하던 무렵인 현종 1년 4월 남인 논객 고산 윤선도가 이 논쟁에 뛰어들어 파란이 재연된다. 윤선도는 효종의 장지를 수원으로 주장했다가 서인 송시열 등의 반대로 좌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병을 청탁하고 집으로 돌아간 것이 무엄하다며 파직까지 당한 원한이 씻기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나마 국문해야 한다는 서인들의 거듭된 주장을 현종이 거부해 파직에 그친 것이었다. 이런 그가 마음먹고 올린 상소인 만큼 조정에 파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적통을 이어 받은 아들은 할아버지와 체가 되는데, 아버지가 적자의 상에 복제를 꼭 참최 3년으로 한 것은 자식을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조종 통을 이어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가 서도 그렇게 하는데 하물며 국가이겠으며,..신이 선왕의 상사를 듣고 대왕대비 복제에 대하여 '예경'을 상고하였더니 성인이 예를 만든 사실은 천리에 근원을 두고 종통을 정하자는 뜻이어서, 당연히 재최 3년으로 하는 것이 너무나 분명한일이요, 의심할 것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윤선도의 논리는 서자가 첩자냐 중자냐를 넘어 그 초점을 조종에 맞춘 것이었다. 아들이 장자이기 때문에 3년복을 입는 것이 아니라 그가 조종의 계통을 이었기 때문에 3년복을 입는다는 논리였다. 즉 효종이 조종의 계통을 이었으므로 3년복이 마땅하다는 말이었다.
  "전하께서 송시열에게 하문 하신 것은 유신을 우대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시열은 마땅히 이황이 기대승의 말을 듣고 놀라 깨달은 것처럼 자신의 의견을 고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시열은 도리어 잘못을 우기며 허물을 꾸미려 '예경'의 여러 구절을 주워 모으고 거기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번거로운 말을 만들어 냈습니다."
  윤선도는 송시열을 직접 지목해 공격했다.
  "초상 때 당황하여 이런 실수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며 허목이 보인 최소한의 여유도 윤선도에겐 없었다. 그는 그만큼 송시열에게 숙원이 많았다.
  그 뿌리는 선조 21년(1589) 발생한 정여립의 난 까지 소급된다. 동인 정여립의 난때 위관은 서인 정철이었는데, 이 때 죽음을 당한 이발은 윤선도의 할아버지인 윤의중의 사위였다. 이런 집안 내력 외에도 서인에 의해 여러 번 가로막힌 정치적 야망 송시열에 대한 윤선도의 원한을 크게 했다. 윤선도는 송시열이 그랬던 것처럼 광해군 때 이이첨을 탄핵하다가 유배를 간 일이 있었다. 송시열은 이이첨이 실각한 후 그 공로를 높이 인정받았으나 윤선도는 유명수의 사주를 받고 한 일로 폄하되어 공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던 것이다. 윤선도도 송시열처럼 효종이 봉림대군이었을 때 사부로 있던 효종의 스승이었다. 자신이 보도한 왕자가 임금이 되면 그 사부는 중용되는 것이 판례이자 사람 사는 세상의 인지상정이지만 윤선도는 효종이 즉위한 후에도 별로 중용되지 못했다. 윤선도는 그 이유를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의 방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만큼 서인을 겨냥한 그의 상소는 과격할 수밖에 없었다. 윤선도는 해석하기에 따라서 송시열을 역적으로 모는 내용으로도 여겨질 수 있는 주장을 펼쳤다.
  "아, 고공( 고공단보, 주 문왕의 할아버지)이 비록 계력을 후계자로 세웠지만, 태백 (고공단보)이 자손이 있으면 고공의 적통은 그래도 태백의 자손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나라 안 백성들 마음이 일정치 못할 것인데 계력의 자손들이 어떻게 배겨나겠습니까? 문왕이 비록 무왕을 세웠으나 백읍고가 후사가 있었으면 문왕의 적통이 그래도 백읍고 자손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까? 그리되면 천하의 마음들이 헷갈려서 무왕의 자손들이 어떻게 배겨날 것입니까? 시열은, 종통은 종묘 사직을 맡은 임금에게로 돌리고 적통은 이미 죽은 장자가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적통. 종통이 둘로 갈리게 되는데 그러한 이치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고공과 계력의 고사는 중국 고대 주나라의 태왕이 첫째 아들 태백과 둘째 아들 우중을 제쳐두고 막내아들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준 고사로서, 차자의 왕위승계가 정당함을 주장할 때 자주 인용되는 기사이다. 즉 효종이 소현세자의 아우로서 임금이 된 데 대한 정당함의 표명이다. '계력을 후계자로 세웠지만, 태백이 자손이 있으면 고공의 적통은 그래도 태백의 자손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까? 라는 말은 효종을 후계자로 세웠지만 소현세자가 자손이 있으면인조의 적통은 소현의 자손에게 있어야 하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렇다면 나라 안 백성들 마음이 일정치 못할 것인데 계력의 자손들이 어떻게 배겨나겠습니까' 라는 말은 그렇다면 효종의 자손, 즉 현종이 어떻게 배겨나겠느냐는 무서운 말이었던 것이다.
  윤선도의 논리대로라면 송시열의 1년복 설은 효종의 종통과 정통성을 부인한 역적의 의논이었다. 효종을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이미 죽은 장자의 자손', 즉 소현세자의 살아 있는 3남 석견을 적통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서인들은 효종이 아니라 석견을 임금으로 여기고 있다는 주장이었으니 이는 서인들이 역적이라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이 상소의 과격한 주장에 송시열은 두말할 것도 없고 서인 전체가 크게 놀랐다. 이 상소의 과격한 주장에 송시열은 두말할 것도 없고 서인 전체가 크게 놀랐다. 이는 송시열을 역적으로 처단하라는 상소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송시열이 역적이라면 그와 같은 당으로서 1년설을 주장한 대신과 유신들 모두가 역적이 되는 것이었다. 윤선도는 송시열과 송준일의 여럿인 아들이 계속 죽으면 아버지는 계속 참최복을 입어야 하느냐는 논리도 거칠게 반박했다.
  "시열은, '아비 된 자 한 몸에다 너무나 많은 참최복을 지고 있지 않은가'라면서, 심지어 세종조의 여덟 대군을 들어 변증을 하였는데,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세종의 수명이 비록 끝이 없고 여덟 대군 모두가 비록 단명했다 하더라도, 어찌 여덟 대군 모두가 각기 3년복이 되게 불행해질 이치가 있으며, 게다가 문종.세조 두 대왕까지 합쳐 3년짜리가 아홉이 될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서 비록 소진(변설가)의 궤변으로도 틀림없이 그리한 말로 감히 남을 꺾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송준길이 차자에서 말한 '가령 사대부 집의 적처 소생이 10여명 되는데, 맏이가 죽어 그 아버지가 그를 위해 3년을 입고 둘째가 죽어 그 아비가 또 3년을 입고, 불행히 셋째가 죽고 넷째가 죽고 다섯째가 죽으면 모두 3년씩 입을 것인가?' 한 그 말과 함께 모두 있을 수 없는 이치인 것입니다. 그들 말이 그렇게 딱 들어맞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그 두 사람 견해야말로 진자 형제지간이라고 하겠습니다."
  효종의 장지 문제로 서인과 송시열에게 벼르던 윤선도가 예송논쟁을 맞아 올린 상소는 과격할 수밖에 없었다.
  "대저 적이라는 것은 형제 중에 그 이상의 맏이나 대등한 사람이 없음을 말하는 호칭이고, 통이라는 것은 왕위를 받아서 모든 백성의 위에서 위로 계승하여 아래로 전하는 것입니다. 차장자가 왕위를 이었다 해서 어찌 별도로 적통을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차장자가 아버지의 명과 하늘의 명을 받아 왕위를 계승했는데도 적통은 다른 사람(이미 죽은 장자)에게 있다면, 이는 가짜 세자란 말입니까? 섭정황제란 말입니까? 또 왕위에 오른 차장자는 이미 죽은 장자의 자손에게는 임금 노릇을 못하며 이미 죽은 장자의 자손 역시 왕위에 오른 차장자에게 신하 노릇을 못한다는 말입니까?"
  이는 송시열이 효종을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송시열은 효종의 종통을 부인한 역적입니다"라는 말이었던 것이다.
  "아! 고공이 비록 태백이 아닌 계력을 세웠더라도 적통은 오히려 태백의 후손에게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한 나라의 인심이 안정되지 못할 것이니, 계력의 후손을 어떻게 보존하겠습니까?"
  계력은 중국 고대 주 임금 고공단보의 막내아들이었다. 고공은 큰아들 태백이 아니라 막내아들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 고사는 동아시아에서 장남이 아닌 다른 아들이 후사를 이었을 경우 정통성을 입증하는 사료로 많이 사용되어 왔다. 윤선도의 상소에서는 고공의 큰아들 태백은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를, 막내아들 계력은 효종을 뜻한다.
  "왕위에 오른 차장자는 이미 죽은 장자의 자손에게는 임금 노릇을 못하며"란 말은 송시열의 말대로라면 효종은 소현세자의 아들 석견 등에게는 임금 노릇을 모하며, 이들 또한 효종의 신하 노릇을 할 수 없지 않느냐는 물음이다. 나아가 "계력의 자손을 어떻게 보존할 것입니까?"라는 말은 효종의 자손, 즉 현 임금인 현종과 그 자손을 어떻게 보존할 것이냐는 물음이었다. 장자가 아닌 다른 아들이 후사를 이었을 경우 이는 적장자가 아니니 그는 가짜 세자며 가짜 임금에 지나지 않으므로 어떻게 나라 사람들이 충성을 바칠 것이며 정통이 아니니 그 자손을 어찌 보존할 것이냐는 반문이었다.
  "시열이 종통은 종묘 사직을 계승한 임금에게 돌리고, 적통은 이미 죽은 장자에게 돌리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종통과 적통이 갈라 져서 둘이 되는 것이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종통과 적통을 둘로 나누려고 한다는 말은 결국 효종의 종통에 대한 부인이니 어찌 역적이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시열이 또, '효종 대왕이 대왕대비에 대하여는 군신의 뜻이 있는데, 대왕대비가 도리어 신하가 임금을 위하여 입는 복으로 대왕의복을 입을 것인가?'하였는데, 그것은 더욱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참으로 그 말대로라면 성인이 예를 만들면서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 참최를 입게 했는데 그것은 자식이 아버지를 위하여 입는 복이 아니며, 임금이 세자를 위하여 참최를 입게 했는데 그것은 신하가 임금을 위하여 입는 복이 아니랍니까? 어쩌면 그의 말이 이렇게도 사리에 당찮습니까." 조선 후기 이건창의 '당의통략'에는 윤선도의 상소에 "아버지의 명을 이어 천명을 받았음에도 오히려 정통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것은 가짜 세자란 말입니까? 가짜 황제(섭황제)란 말입니까?"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 선왕조 시절부터 믿고 소중히 여겨 모든 것을 맡겼던 자로 양송만한 자가 없었습니다. ...조정에서도 그들을 유현으로 쳐주었고, 그 두 사람 역시 그 이름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야의 공론은 그들을 현자로 여기지 않으며, 신과 같이 어리석은 자도 그들을 현자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맹자가 이르기를, '군자가 그 나라에 있을 경우 임금이 써주면 그만큼 안부존영을 누린다'하였는데, 이들 두 사람이야말로 임금의 신임을 그렇게 독차지했고 그리고 또 상당히 오랜 기간을 그리하였으나, 자기 자신들 안부존영은 최고를 누렸다 할 수 있지만 임금을 안부존영하게 만들었다고는 듣지 못했습니다. ...재궁(임금의 관)을 제대로 쓰지 못했던 일 같은 것은 국가를 가진 이로서는 만고에 없었던 이변으로서 그러한 일들을 볼 때 편안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양송 자신들은 효종 밑에서 안부존영을 누리고도 정작 효종은 안부존영을 누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관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는 비판이었다.
  "신은 오직 군부와 종묘 사직이 있음을 알고 자신이 있음을 생각지 않았기에 시대의 저촉을 범해 가면서 바른말을 올리는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사람으로 하여 말까지 폐기하지는 마소서. 신은 이 상소가 받아들여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와, 이 말대로 실현이 되느냐 안 되느냐로 주세가 굳건하고 못하는 여부와, 국조가 연장되고 안 되는 여부를 점칠 것입니다."
  이 상소를 본 서인들은 깜짝 놀랐다. 승지 김수항. 이은상. 오정위등은 상소 내용이 "예를 논한다는 핑계로 마음 씀씀이가 음흉하였고, 어지러울 정도로 남을 속이고 허풍을 치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면서 호되게 물리치라고 주청했다. 현종은 상소문을 도로 내주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중한 법으로 다스려야 마땅하겠으나 죄주지 못할 사정이 있으니, 그냥 가벼운 법을 적용하여 관작을 삭탈하고 시골로 내쫓으라."
  서인들은 윤선도의 삭탈관작과 문외출송에 그친 데 반발했다. 이 상소문을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역적으로 모는 고변서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윤선도에 대한 서인의 공세
  이 상소를 보고 서인은 비로소 1년설을 거듭 물고 늘어지는 남인의 속셈을 확실히 읽게 되었다. 남인의 의도가 예론을 바로잡자는 학문적인 차원이 아니라 이를 이용해 송시열을 죽이고 서인 정권을 몰아내는 데 있음을 명확히 알게 된 것이다. 즉 학문논쟁이 아니라 정치공세임을 알게 된 것이었다. 예송논쟁을 제기하는 남인의 속뜻이 서인 정권의 타도에 있음을 안 서인은 일제히 들고 일어나 윤선도를 공격했다. 부제학 유계, 교리 안준은 현종을 면대하여 윤선도에 대한 강한 처벌을 주청했다.
  "돌려준 윤선도의 상소를 가져다 조정에 보여서 그 죄상을 밝힌 후 상소를 불사르고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야 합니다."
  현종이 이를 받아들여 윤선도의 상소는 불살라지고 그 몸은 삼수로 귀양보내졌다. 그러나 귀양으로도 파문은 가라앉지 않았다. 젊은 만큼 더 과격했던 성균관과 사학의 서인 유생들은 윤선도에게 더욱 엄한 국법의 적용, 즉 사형을 요청했다. 사간원의 대사간 이경억과 사간 박세모, 그리고 사헌부 정언 권격등은 합계하여 유생들 편에 가담했다.
  "윤선도의 상소는 예법을 논한 상소가 아니라 고변서이니 엄하게 국문하여 법대로 처리할 것을 청합니다."
  조선의 법은 남을 무고하면 무고한 그 죄를 대신 받게 되어 있었다. 이를 반좌율이라고 하는데 이 경우 송시열을 역적으로 무고한 죄가 인정되면 반좌율로 그 자신이 사형당하게 되어 있었다.

 

윤선도를 지원하는 우윤 권시


  윤선도가 반좌의 위기에 몰렸을 때 그를 구원하고 나선 인물이 있었으니 우윤 권시였다.
  "지금 윤선도의 상소문을 보면 식은 땀이 등을 적시는 것을 모를 정도입니다. 송시열.송준길을 국가를 쇠망으로부터 부흥시키고 난리를 평정할 수 있는 재목으로서 선왕의 뜻을 이어 무엇인가 해내려는 성상의 마음에 틀림없이 부응할 수 있는 인물들이라고 한다면 신이 감히 믿지 못하겠지만, 요컨대 내리잡더라도 누구나 친근하고 싶어하는 선인임에는 틀림없고, 또 옛사람들 학문하는 요령을 이미 터득하였으며, 인자하고 진실하며 충성스럽고 알찬 마음씨는 이미 조야의 미쁨을 사고 있습니다."
  권시의 상소는 양송에 대한 비꼼으로 시작되었다.
  양송을 "선왕의 뜻을 이어 무엇인가 해내려는 성상의 마음에 틀림없이 부응할 수 있는 인물들이라고 한다면 신이 감히 믿지 못하겠지만"이란 말은 양송이 북벌에는 정작 뜻이 없는 인물이라는 비유이기 때문이다. 그도 3년복이 맞다는 데 가세했다.
  "신이 언젠가 말했듯이, 대왕대비 복제가 당연히 3년이어야 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1백 세를 두고 질정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애석하게도 시열. 준길. 유계가 그렇게 현자이면서도 당연히 3년으로 해야 한다는 그 사리를 사리지 못했기 때문에, 거리에서도 말들을 하고 시골 마을에서도 논의가 분분하여 마음에 불쾌함을 느끼고 있는지 이미 오래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에 와서는 그 논의가 이미 조정 위에서 발발하였는데도 여러 사람들이 아직까지 미궁에 빠져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시열의 '선왕(효종)이 (인조의)서자가 되어 해로울 것 없다'는 말은 매우 잘못된 말이라는 것을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말하는 자 없어, 그게 바로 선도의 참소를 부른 원인이 된 것입니다. 선도가 현자를 헐뜯고 시기한 점은 매우 나쁜 짓임에 틀림없으나, 자기 신상에 틀림없이 화가 닥치리라는 것도 계산하지 않고 남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말한 점으로는, 역시 할 말은 하는 선비입니다. ...조정 논의가 너무 과격하여 이 극한 상황까지 오게 되어 권세가 아래로 옮겨갔다는 참소를 사실화하고 말았으니, 까닭없이 선비를 죽인다는 그 말에 불행히도 가깝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선도는 일찌기 선왕의 용잠(임금이 되기 전의 사저)시절 사부였던 옛 은의가 있어, 비록 그가 착하지 못함을 아시고서도 그의 장점만을 취하여 잊지 않고 계속 생각하여 작위도 중대부에까지 이르렀으니, 가볍게 죽여서 안 될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현종은 윤선도를 지원하는 이 상소에 대해 좋은 뜻으로 비답한 뒤 면대하여 유시하겠다는유지를 내렸는데, 이는 현종도 권시의 말을 지지한다는 뜻이었다. 권시가 윤선도를 구하고 나서자 서인의 예봉이 이번에는 권시에게 향해졌다. 대사간 이경억과 사헌부 장령 윤비경 등이 권시를 탄핵하고 홍문관의 유계 등이 가세했으며 사헌부 정언 권격은 권시를 파직하자고 청했다. 모든 대간들이 권시의 파직을 청하자 현종은 그 말을 좇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현종은 권시를 아꼈다. 권시가 도성 밖으로 나가자 현종은 사관을 보내어 유시했다.
  "이런 선비들이 자꾸 조정을 버리고 나가니 내 마음의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다. ...지금 형편으로는 가지 않을 수 없겠지만 곧 마음을 돌려서 돌아오기 바란다."
  이는 현종이 속마음으로는 3년설을 지지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승정원에서 유시의 환수를 거듭 청하여 권시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현종은 승지를 가둔 후에야 사관을 보내 유시를 전달할 수 있었다.
  권시는 이처럼 윤선를 옹호한 까닭에 서인의 공박을 받았지만 사실상 그는 남인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그는 서인 윤선거와 사돈사이였던 데다 윤휴와 허목의 공격을 당한 송시열이 조정을 떠나자 송시열을 만류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또 권시는 송준길에게도 조정을 떠나는 것을 만류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송시열과 송준길의 자존심으로 조정에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조선의 관료들, 특히 유신들은 옳든 그르든 공박을 받으면 사직하고 떠나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자신들이 논쟁의 대상이 되면 옳든 그르든 처벌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하나의 관례였다. 송시열이 먼저 조정을 떠나 고향인 회덕으로 돌아가 버렸고, 송준길도 창황히 조정을 떠나 고향에 내려가 처벌을 요청했다. 물론 서인 정권 아래서 이들이 처벌당할 리 만무하므로 이는 관례에 따른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남인은 실제적인 처벌을 당했다. 윤선도가 삼수로 귀양간 것을 비롯해 허목은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당시 허목은 지방관을 할 나이가 아니어서 이조에 정장해 부당한 인사조치라고 항의했으나 소용없었다. 이런 파문이 계속되자 우의정 원두표는 차자를 올려 현종의 결단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미 시행중인 1년복을 입든, 아니면 연제에 대왕대비가 길복으로 갈아입지 않고 상복을 입어 3년복을 입든 전하께서 결단하십시오."
  현종이 예조에 하문해 유신들의 의견을 묻게 하자 서인 이유태는 양송과 같은 입장이라고 말했고, 영의정 정태화와 좌의정 심지원도 마찬가지였다. 영중추 정유성도 같은 견해였다.
  "대왕대비의 복을 1년복으로 한 것은 예법에 근거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실로 선조를 따른다는 의미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에 문제를 제기했던 윤휴는 더 이상 적극적인 의결 개진을 하지 않고 현종의 뜻에 맡긴다고 한발 물러섰다.
  "그것은 국가 대례로서 대소 제신들이 각기 자기 의견을 고집하여 저마다 논설이 있었으니, 오직 성상께서 가리시어 정할 일입니다. 다만 그게 인심과 관계가 밀접하고 대경과도 관계되는 일이니, 선왕의 예에 어긋나지 않은 것을 골라 행하면 되겠습니다."
  드디어 현종은 결단을 내렸다.
  "다수의 의논에 따라 결정하게 하라."
  재론된 예송도 서인의 승리로 끝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