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론 자체가 금지되는 예송
재론된 제1차 예송논쟁이 서인의 승리로 귀결되었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남인은 여전히 1년복이 틀리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현종 2년(1661) 4월 심한 가뭄이 들자 현종은 죄인을 사면하고 내외에 널리 구언했다. 행 부사직 조경이 구언에 응해 상소를 올렸다.
"전하께서 가뭄을 당하여 자기 몸을 낮추고 반성하시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원통한 옥사를 다시 심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심에 윤선도만이 빠져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선도의 죄는 무엇입니까. 선도의 죄라는 것은 적통. 종통 논읭 있어 효묘(효종)을 두둔한 것뿐입니다. 따라서 전하께서 선도라는 사람은 물리치더라도 그 종통. 적통에 관한 말은 결코 버리실 수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크게 결단하셔서 적통. 종통이 어디에 있는지를 선왕(효종)의 실록에 분명히 실어서 훗날 예법을 논하는 자로 하여금 다른 말을 못하게 하신다면, 하늘의 뜻인들 어찌 인정과 다르겠습니까. 신은 이 말이 세상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것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이 어찌 한 몸의 이해만을 생각해서 전하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현종과 승정원은 이미 길복으로 갈아입은 자의대비의 복제가 또 다시 논란이 되자 곤혹스러웠다. 이미 결정난 사안을 다시 거론하는 것도 그렇고 임금의 적통과 종통 문제가 자꾸 현안이 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승지 남취익, 원만석 등이 승정원에서 조경을 규탄하고 나섰다.
"조경의 상소는 윤선도를 위한 것입니다. 저 윤선도의 죄악으로 말하면 국인이 함께 분개할 뿐만 아니라 전하께서도 통촉하신 것인데 조경이 감히 윤선도의 말이 옳다면서 아무 기탄없이 말했습니다. 문서의 출납을 담당한 저희들이 무턱대고 아뢸 수도 없지만 그 상소 내용의 시비와 사정을 전하께서 가리실 수 있을 것이므로 소를 받아들였습니다."
현종은 더 이상 예송문제의 재론을 원치 않았다. 현종은 상소문을 도로 내주게 한 후 승정원에 하교를 내려 한탄했다.
"아, 전 판중추 조경은 세 조정을 차례로 섬겼으니 어찌 지식이 없겠는가마는, 애석하게도 소장이 내용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도록 잘못되었던 말인가."
심사에서 소를 돌려주는 것으로 끝낼 리가 없었다. 삼사가 곧 조경을 삭탈관직하여 시골로 추방할 것을 청하니 현종이 허락하는데, 서인 중진들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강경대응은 또 다른 시비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영의정 정태화는 경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경은 원래 시골에 살던 사람이니 시골로 추방한다 해도 그 사람에게는 아무 손해가 없고 나라의 체면만 손상될 것입니다."
좌의정 심지원도 마찬가지였다.
"조경은 세 조정의 원로대신인데 전하의 구언에 응하여 말하였다가 죄를 얻으면 이것이 나라를 망치는 길입니다."
젊은 서인이 포진한 삼사에서는 대신들이 조경을 두둔했다고 들고 일어서며 조경을 귀양보내야 한다고 탄했다. 현종은 한 달 이상 귀양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면서 버텼다. 이런 와중에 효종의 2주기가 다가왔다. 제사에 참여해 곡배하기 위하여 서울에 온 송시열은 현종 2년 5월 임금에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신은 뼛속까지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신이 시골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시열은 선왕이 태묘에 들어가는 것을 온당치 않게 생각한다'고 했다 하는데, 이 설이야말로 종통. 적통의 설과 서로 표리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원통한 일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은 쓸데없이 그냥 개인적으로들 이야기하다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영상 정태화가 이를 듣고 크게 놀란 나머지 신의 아들과 서로 아는 사람을 불러 물어보았으므로 신의 아들이 이를 토해 신에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긍익은 "연려신기술"에서 '양파시장'이란 글을 인용해 현종에게 했다는 말을 소개하고 있다.
"신이 처음 사종지설을 말하니 정태화가 듣고 크게 놀라면서 그설은 인용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정태화는 반대당의 모함이 있을 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선견지명을 저는 따를 수 없습니다."
사실 예송논쟁은 다산 정약용이 "의례주소" '가씨소'의 양면성을 말하면서 3년복으로도, 1년복으로도 의정할 수 있는 사안이었기 때문에 그 중 후한 예를 따라서 3년복으로 정했다면 아무 문제의 소지가 없었다. 송시열 등 서인들이 소현세자 일가의 억울함에 대한 신원을 당론으로 삼은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는 효종의 종통과 맞물린 민감한 문제였다.
효종의 종통 자체를 부인하고 인조반정 같은 쿠데타를 결심하지 않고 자의대비의 복제를 기년복으로 박하게 의정한 것은 스스로 시비를 초래한 측면이 분명 있었다. 왕조국가에서 임금의 국상을 기년복으로 정한 것은 반대당파인 남인의 시비를 자초한 격이었고, 사실 자의대비가 탈상한 후에도 논란은 그치지 않았다.
현종 4년(1663)에 정6품 홍문관 수찬 홍우원이 또다시 윤선도와 남인을 옹호하며 올린 상소가 이런 상황을 말해준다.
"지금 사람들은 자기와 같지 않은 자를 싫어하여 억지로 같이 만들려고 하는 형편이어서 사대부 사이에도 다른 의견이 생기면 반드시 함께 일어나 공격합니다. 윤선도는 변방 섬인 삼수에 안치되었다가 북청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대간이 반대하여 다시 삼수로 되돌려졌습니다. 허목이 예법에 관한 소를 두 번 올리니 먼 삼척으로 내쫓았습니다. 허목이 그만두고 돌아온 후에도 다시 찾아서 벼슬을 주지 않았으며, 권시는 중한 탄핵을 받았습니다. 또 조경이 선도를 구하려 하자 간사하다고 지목하면서 그 아들까지 영구히 벼슬을 주지 않는 벌을 받았습니다. 생각하면 선도는 원래 기개있고 할 말은 하는 사람으로서 광해조 때에도 바른말하는 상소로 절개를 세웠으며 선왕조(효종)에는 사부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람 서리 찬 지역에 귀양가 백발 날리는 늙은 몸으로 언제 죽을지 모를 형편입니다. 만약 갑자기 죽어 버린다면 조정에서 선비를 죽였다는 누명을 남길까 두렵습니다."
대간에서는 즉각 홍우원의 관직을 삭탈하고 시골로 추방할 것을 청하였으나 현종은 듣지 않았다. 현종은 선인의 세에 밀려 1년설로 정했지만 내심으로는 3년설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종 5년에 조경과 홍우원을 다시 서용한데서도 현종의 속내를 읽을 수 있다. 재위6년 2월 현종은 윤선도를 고향 가까운 광양으로 유배지를 옮겨주면서 자신의 뜻에 반하여 금부에서 마음대로 안치했다고 꾸짖었다.
현종은 단지 그 지역에 정배하라고 했을 뿐인데 멋대로 안치라고 써 넣어 집에서 꼼짝 못하도록 했다는 꾸짖음이었으니 여기에서도 윤선도에 대한 현종의 속마음이 엿보인다. 현종 7년(1666) 예송논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이번 문제 제기는 서인 쪽에서 한 것이었으니 당초 기년복이 얼마나 문제가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분신한 서인 감상용의 손자 김수홍이 그 장본인이었다.
"서자는 첩자라는 허목의 예론이 맞는 것 같으니 자의대비는 3년복을 입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소현세자의 적통이란 것은 강빈의 옥사 때 이미 단절된 것 아닙니까?"
강빈이 역적이니 그 자손이 어찌 적통을 이을 수 있느냐는 반론이었다. 이는 서인 내부의 분열이었으나 이런 움직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세력은 역시 남인들이었다.
같은 해 남인의 본거지인 영남 유생 유세철등 1,400여명이 연명으로 상소하고 나섰다. 이들은 송시열을 격렬히 비판하면서 "상복고증"이란 책자를 함께 바쳤다. 책자의 내용은 윤선도의 말을 그대로 반복.부연설명한 것이었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예에 '천자와 제후의 상에는 모두 참최복을 입고 기년복은 없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예기" '증자문'의 "천자.제후의 상에는 모든 신하가 다 참최복을 입는다."는 내용을 뜻했다. 서인 승지 김수항은 승정원에 상소를 받아들이면서 이렇게 우려했다.
"이 상소는 전하의 마음을 움직여서 선한 사람들을 모두 없애려는 것입니다."
"문장과 의사가 들락날락하여 일정하지 않고 동쪽을 말하나 실상 그 뜻은 서쪽에 있으니 선비들 풍습이 어찌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놀라운 일이다."
이에 양사에서 소두 유세철 등을 죄줄 것을 청했으나 현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사실상 현종의 속마음은 자신의 아버지 효종을 높이는 남인에게 있으니 서인 정권 아래에서 이는 어려운 일이었기에 상소는 물리치면서 처벌은 하지 않는 방법을 쓴 것이다. 남인 유생들이 상소하는데 서인 유생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 홍득우와 충청도의 서인 유생 윤택 등이 상소를 올렸다.
"송시열의 복제설이 바른데도 억울하게 반대당에게 배척당했습니다."
현종은 이들의 상소를 우대하는 형식적 비답을 내렸다. 이런 상황들을 보면서 현종은 예송 자체를 끝내는 것이 바람직하겠다고 결심했다. 예론으로 해가 저물고 달이 기우는 것은 나라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느꼈던 것이다. 현종은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말했다.
"근래에 영남 유생들의 상소에 대하여 죄를 논하여 처벌하고 싶지않은 것은 아니지만, 다음날 분쟁의 폐단만 될 것 같으니 일정한 제도를 천백 년이 가도록 그대로 준행하는 것만 못할 것 같다. 기해년 국상 때 "국조오례의"에 따라 상복을 시행했는데, 지금 와서 무슨 고칠 일이 있겠는가. 차후에 다시 예론을 논하는 상소가 있으면 비록 많은 선비들의 상소라 해도 용서하지 않고 중형으로 다스리겠다. 이 뜻을 널리 중외에 알리라."
현종이 이처럼 강경한 태도를 취하자 이때부터 예론은 거론할 수 없는 금법이 되었다. 서인은 이로써 예송논쟁이 완전히 종결된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예송논쟁은 지하에 잠복한 불씨일 뿐이었다. 자연적으로 보아도 당사자인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 조씨(1624년생)는 며느리인 효종비 인선왕후 장씨(1618년생)보다 여섯 살이 어렸으므로 며느리의 상사때 시어머니의 복제는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같은 성격의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었다. 그리고 우려했던 상황은 실제로 다가오고 있었다.
서인과 남인은 어떤 철학적 차이가 있는가?
제1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1년설을 주장하고 남인이 3년설을 주장한 것은 엄밀히 따지면 그들 당파의 철학적 견해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남인의 사상적 종주인 퇴계 이황의 사상은 이일원론이었다.
그의 이기이원론은 이일원론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황은 "답정자중강목"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는 본래 항시적으로 실재하지만 기는 모여서 형체를 이룸으로써 실재했다가 흩어지면 소멸하니 무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항시적으로 실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황에게 있어 이와 기는 절대로 동등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는 절대적인 이 우위론자였다. 그의 주리론에 따르면 군신, 부자, 부부, 장유의 질서는 어길 수 없는 것이었다. 이들 사이의 귀천의 질서가 그 누구도 넘을 수 없는 인간관계의 질서, 즉 예였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가부장 중심의 종법질서를 합리화하는 것이었다. 이 종법질서는 비록 왕가라 하여도 어길 수 없는 근원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이황의 이런 사상에 따르면 자의대비의 복제는 1년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효종이 비록 왕위를 이었다 하더라도 인조의 둘째 아들이라는 종법은 변할 수 없는 근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황의 이런 사상과는 반대로 남인들은 3년설을 주장하였다.
남인들이 3년설을 주장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철학적 견해 때문이 아니라 정권에서 소외된 야당이기 때문이다. 즉 여당인 서인에 대한 야당의 정치공세가 3년설인 것이다. 서인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서인들의 사상적 종주인 율곡 이이의 사상에 따르면 서인들이야말로 3년설을 주장해야 했다. 이이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했다 해서 그의 사상을 주기론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 또한 이가 우위에 있다고 본 점에 대해서는 이황과 차이가 없었다. 그는 "덥성호원"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가 아니면 기가 근거할 데가 없으며 기가 아니면 이가 의거할 데가 없습니다. 이는 두 개의 물건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나의 물건도 아닙니다. 하나의 물건이 아니니 하나이면서 둘이고 두 개 물건이 아니니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하나의 물건이 아니란 것은 무엇을 가지고 말하는 것일까요? 이기는 상호 떨어지지 않을 수 없으나 신묘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자기 스스로 이이며 기는 자기 스스로 기이지만 분리도지 않으니 그 사이가 없습니다. ...이는 시초가 없으며 기도 시초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근본적인 면에서는 이의 우위성을 인정했다. 그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이기는 시초가 없으니 실로 선후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근본에 있어서 그렇게 되는 까닭(소이연)은 이가 추뉴이며 근저입니다. 따라서 이기 앞설 수밖에 없습니다. 성현의 말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관건은 이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만약 사물을 가지고 이를 관철한다면 분명히 이가 먼저 있고 기가 후에 있습니다."
이처럼 율곡도 근본적인 면에서는 이가 기보다 우위에 있음을 인정한 이 우위론자였다. 하지만 그는 이기의 형태와 운동능력에 대해서는 기의 우위를 인정함으로써 이황과는 다른 견해를 표출했다. 즉 이는 형태도 운동능력도 없으나 기는 모두 있다는 견해를 밝힘으로써 이가 형태는 없으나 운동능력은 있다는 이황의 견해를 비판한 것이다.
이이는 사람의 생사에 대해서도 이의 절대성을 인정하면서도 기의 중요성을 함께 인식하는 상대론적 태도를 보였다. 즉 사람이 살기 전에는 사람의 이만이 존재하며 죽은 다음에도 이만 존재한다. 그러나 사람이 살면 기가 있게 된다. 죽으면 기는 없어지지만 이는 남는다.
즉 이이는 인간의 생사와 독립하여 실재하면서, 생사를 지배하는 이의 절대성을 인정하지만 기의 상대성도 인정함으로써 변화의 여지를 남긴다. 그는 사단도 기가 발하고 이가 여기에 탄다고 하여 기의 세계성을 인정했다. 그의 이런 이기에 대한 상대성이 현실적으로는 개혁사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런 상대성을 예론에 대입한다면 자의대비의 복제는 3년설이 될 수도 있었다. 비록 장자가 우위에 있다는 종법은 변할 수 없지만 이는 때에 따라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물의 상대성을 인정한다면 자의대비의 복제도 경우의 특수성을 인정해 3년복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인은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해 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들이 집권당이기 때문이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존재는 임금 혼자가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였다. 더군다나 자신들은 인조반정을 주도한 세력이었다. 인조반정 직후에 일어난 '원종추숭시비'도 그 한 예이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재야 예학자들은 인조가 선조를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반정세력들은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선조의 다섯째 아들)을 그대로 아버지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야 예학자들이 왕통 계승만을 중시하려는 견해를 지녔다면 후자는 혈통 계승의 기반 위에서 왕통을 세우려는 견해였다. 결국 혈통 우선의 명분을 내세운 반정세력들에게 승리가 돌아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승했는데, 이는 인조의 종법적 지위를 확립해 반정의 명분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서인들은 반정 후 왕통의 종법적 지위마저도 새로 확정지을 만큼 강력한 세력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인조반정 후 관제야당으로 출발한 남인들은 예송논쟁을 이용해 야당의 지위에서 벗어나 권력을 장악하려 하였다. 남인들은 막강한 신권에 불만을 느끼는 국왕을 자당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3년설을 주장한 것이었다.
서인들은 왕권과 신군의 차별보다는 치자 계급인 사대부의 보편성을 중시한 데 비해 남인들은 신권에 대한 왕권의 우위를 극대화함으로써 왕실의 지지를 얻으려 한 것이다. 이는 또한 송시열. 송준길로 대표되는 주자예론과 윤휴. 허목. 윤선도 등으로 대표되는 반주자예론의 대립이기도 했는데, 정통 주자학이 신권 중심의 정치 운영을 통해 지주들의 권익을 옹호하려는 수구. 보수적 견해를 나타낸 것이라면 반주자학은 군주권의 강화를 통해 농민들의 이익을 보장하려는 진보. 개혁적 견해의 표출이었다.
예송은 이처럼 예론을 이용해 정권을 장악하려는 경쟁의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 나아가 예론을 이용한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의 대립이란 측면도 지니고 있었다. 어쨌든 예송논쟁을 통해 인조반정 이래 유지되어 오던 서인과 남인의 상호 공존적 측면은 붕괴되었다. 당쟁의 악화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어찌 감히 주자와 달리 해석하랴 - 송시열의 정적들-반주자학자 윤휴
병자호란 직후 속리산 복천사에서 만난 윤휴와 송시열은 통곡하면서 굳게 약속했다.
"혹시 우리가 정치를 하게 된다면, 결코 오늘의 치욕을 잊지 말자."
하지만 제1차 예송논쟁 당시 두 사람은 이미 정적으로 변해 있었다. 송시열과 윤휴는 이미 '사문난적'논쟁을 통해 서로 화해할 수 없는 학문적. 정치적 적대자로 변해 있었다. '사문'이란 유학이나 성리학을 뜻하는 말로서 '사문난적'은 성리학을 어지럽힌 적자라는 뜻이다. 윤휴는 사실 송시열 못지 않은 저명한 학자였다. 윤휴는 송시열보다 10년 어리지만 일찍부터 학문으로 명성을 얻어 권시. 윤선도 같은 남인은 물론 송준길. 유계. 이유태 같은 서인과도 학문적 교류를 가졌다. 서인 중에서도 송시열과 미촌 윤선거는 한때 윤휴가 가장 가깝게 지내던 인물들이었다. 송시열도 한때 윤휴를 칭찬한 적이 있었다.
"백호(윤휴의 호)는 학문이 높아 다른 사람들이 따를 수 없으며 전인들이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것을 추구하고 새로운 이치를 발견해 낸다."
윤휴 사상이 독창적이란 칭찬이었다. 이런 윤휴를 송시열이 비판하게 된 까닭이 바로 윤휴 학설의 독창성에 있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윤휴는 "중용장구보록서", "대학설", "중용설", "주례설", "중용대학후설"등 많은 책을 펴냈는데 여기에 담긴 독창적인 사상들을 송시열이 문제 삼으면서 사문난적 논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윤휸는 학문이나 사상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유연한 인물이었다. 그에게 어떠한 사상은 부분적인 진리만을 담고 있는 상대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율곡 이이나 퇴계 이황의 학설은 물론 주희의 학설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는 울곡의 '이선기후'나 퇴계의 '이통기국'설 등을 모두 비판하는 '기일원론'을 내세웠다. 나아가 그는 주희, 즉 주자의 학설까지 비판하고 나섰다.
송시열이 금과옥조로 여긴 유학 경전은 "논어", "맹자"등 사서 자체가 아니었다.
송시열은 사서 자체보다도 사서에 대한 주희의 해석을 더욱 중시했다. "논어" 자체보다도 주희가 주를 달아놓은 "논어집주"를 경전으로 더 높이 생각했던 것이다. "중용"도 마찬가지로 주희가 해설해 놓은 "중용집주"를 경전으로 섬겼다. 그러나 윤휴는 달랐다. 윤휴는 주희의 "중용집주"를 개작하여 자신의 견해로 주석을 달겠다고 나섰는데 송시열은 바로 여기에 발끈했다. 송시열은 윤휴가 경전을 주희와 다르게 해석하자 격분했다.
"고금 천하에 어찌 악한 자가 없겠는가. 하지만 윤휴처럼 주자를 공격하고 배척하는 자는 있지 않았다. 비록 중국의 왕양명이나 이탁오와 같은 양명학자들의 말이 불손하다 해도 윤휴보다는 덜했다."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하늘이 공자에 이어 주자를 내셨으니 참으로 만세의 도통이다. 주자 이후로는 일리도 밝혀지지 않은 것이 없고 일서도 명확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윤휴가 감히 자신의 견해를 내세워 가슴속의 억지를 늘어놓으니, 윤휴는 진실로 사문난적이다."
송시열과 윤휴의 대립은 이처럼 주희의 경전주석에 대한 수용자세의 차이에서 나온 것이다. 송시열은 주희의 해석 자체를 경전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윤휴는 주희의 해석을 뛰어넘어 독창적인 해석체계를 갖추려 했다.
송시열이 받아들인 주희의 주자학은 중국 중세의 유학이었다. 말하자면 북송과 남송 시대의 중국 유학자들이 바라본 세계관이 성리학이었고 송시열은 여기에 충실했다. 하지만 윤휴는 이를 뛰어넘어 한당 시대의 중국 고대 유학에 직접 접근하려 하였다. 주희를 뛰어넘어 직접 공자,맹자와 만나려 했던 것이다. 윤휴는 그 유명한말로 송시열의 공격에 반박했다.
"천하의 많은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르겠는가? 이제 주자는 그만 덮어두고 오직 진리만을 연구해야 한다. 주자가 다시 살아온다면 나의 학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공자가 살아온다면 내 학설이 승리할 것이다."
말하자면 윤휴는 고대 경전, 즉 공자나 맹자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윤휴와 송시열의 논쟁은 특정한 학문이나 종교가 교조화된 곳에서는 시대의 고금이나 동서를 떠나 존재했던 논쟁이다. 루터의 종교개혁도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잇다는 중세 카톨릭의 교의에 대한 반발이었다. 윤휴가 주희에 반대하고 공자를 내세운 것은 루터가 중세 교회의 교조성에 반발하며 '오직 성서'와 '오직 신앙'을 내세워 예수와 직접 접촉하려 한 시도와 마찬가지였다. 종교개혁과 루터를 보호한 것이 황제의 경쟁자 작센 공의 현실적 힘이었듯 윤휴의 옳고 그름에 대한 평가도 주자나 공자가 아닌 현실적 힘을 가진 조선 유학자들일 수 밖에 없었다.
효종 4년 (1653) 충청도 강경의 황산서원(현 죽림서원)에 유력한 서인 학자들이 모인 이유는 바로 윤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아래로 금강의 지류가 흐르는 황산서원에서 송시열과 윤선거, 윤원거,권성원 등 10여 명의 서인학자들은 윤휴 문제를 두고 밤늦도록 논쟁을 벌였다.
논쟁은 주로 송시열과 윤선거 사이에서 벌어졌다. 송시열이 사문난적으로 규정한 윤휴를 윤선거가 옹호하고 나선 것이었다.
"윤휴는 성인에 가까울 만큼 학문이 고명한 사람이어서 나는 그의 학문을 다 측량할 수 없습니다."
즉 윤휴가 성인의 경지에 이른 고명한 학자이므로 경전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송시열이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나는 그의 학문이 고명한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가 사문난적임은 알고 있습니다."
윤선거는 다시 윤휴를 옹호했다.
"의리는 천하의 공도이므로 윤휴도 주자의 주석에 대해 논평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어찌 불가하다고 공박하십니까?"
송시열이 다시 반박했다.
"주자 이후로는 일리,일자도 밝혀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무슨 의혹이 있다고 논란을 일으키는 것입니까? 또 문제가 있더라도 주자의 어느 구절이 의심스럽다고 말하면 혹시 모르겠지만 그가 어찌 감히 주자의 '중용'를 일소해 버리고 자신의 학설로 대치 할 수 있습니까?"
윤선거가 대답했다.
"이는 윤휴가 고명하기 때문입니다."
송시열은 성내어 반박했다.
"주자보다 윤휴가 더 고명하다는 말입니까?"
누가 누구보다 더 고명하다는 식의 공세는 이미 학문적 차원을 넘어선 것이었다. 위기감을 느낀 윤선거는 한발 물러섰다.
"고명하다고 말한 것은 저의 실언입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그러나 송시열은 이 정도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이미 난적이라고 말했으니 경솔하다는 말은 당치도 않습니다. 대저 군왕이 춘추의 법을펼칠 때 난신적자를 따르는 자를 다스린다고 했으니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공은 윤휴보다 먼저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군왕이 춘추의 법을 펼칠 때면 윤휴보다 그를 따르는 윤선거가 먼저 죽게 되리라는 비이성적 발언이었다. 이는 이미 학문적 논쟁은 아니었다. 수준 높게 말하면 서로간의 세계관의 차이이자 낮게 말하면 감정 차원의 문제였다.
'법의 심판' 운운하는 판에 더 이상의 논쟁은 의미가 없었다. 윤선거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고 둘 사이의 논쟁에서 송시열은 외견상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는 학문적 토론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얻어진 승복이 아니라 '사문난적'이란 비이성적.교조주의적 논리와 '춘추의 법'이란 정치적 무기로 얻어낸 물리적 승리였다. 윤선거가 마음속으로 승복할 리 만무했다. 마음속으로 승복하지 못할 때 논쟁은 재연되게 마련이다.
효종 4년(1653)에 시작된 이 논쟁은 12년 후인 현종 6년(1665) 동학사에서 재론 되었다가 끝내는 숙종 때 윤선거의 아들인 윤증에게 전수되어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는 한 단초가 된다.
오늘날의 잣대로 바라보면 송시열의 완고함에 모든 잘못이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 사문난적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송시열과 윤휴의 사문난적 논쟁은 양란 이후 위기에 봉착한 조선사회에 대한 지배층 내부의 대응 방식의 차이를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양란 이후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지배체제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송시열의 수구 사상과,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현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윤휴의 개혁사상 간의 충돌이 사문난적 논쟁이었다.
윤휴의 새로운 사상은 교조적인 주자학 지배 이념에 대한 지배층 내부의 반성이자 개혁 요구였다. 만물의 근원적 존재인 태극에 대해 주자학은 이라고 설명해 왔다. 하지만 윤휴는 태극 자체가 기라고 설명했다. 주자학자와 윤휴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윤휴는 '중용해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가 처음 생기는 것을 태극이라 하고 음양이 나뉘는 것을 양의라 하며 기가 합해서 형태를 이룬 것을 사상이라 한다. 태극이 생기면 음양과 양의를 주관하고, 나뉘면 태양.소음.소양.태음이 된다. 사상은 합해지면 음양과 체용을 겸하니 태극은 기이다."
태극을 기라고 규정한 것은 태극을 이라고 해석해 온 주자학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윤휴는 만물의 근원에 대한 생각에서부터 주희와는 다른 견해를 가진 독창적 사상가였다.
조선 사회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더욱 주자학을 받들어야 한다는 송시열은 이를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사상으로 받아들였다. 송시열은 당연히 '태극은 이'라는 주희의 이론을 신봉하는 인물이었다. 송시열은 '한 음과 한 양을 도라고 이른다(일음일양지위도)'란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찍이 주자는 '태극이 동하여 양을 낳고 정하여 음을 낳는다'고 하셨다. 태극이란 본연의 묘요, 동정은 여기에 탄 기란 기다."
즉 태극은 이란 말이었다. 이런 송시열에게 태극을 기라고 주장하는 윤휴는 '사문난적'일 수 밖에 없었다.
송시열의 자리에서는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공격함으로써 그의 사상이 더 이상 전파되지 못하게 해야 했다. 송시열은 이렇게 말했다.
"주자는, '사단(인.의.예.지)을 밝힌 것이 바로 국가 사직을 편안하게 한 공이요, 이단(성리학 이외의 다른 학문)을 물리친 것이 바로 이적의 외침을 막아낸 공이다'라고 말하셨다. 또 '임금을 살해한 역적은 누구나 죽일 수 있는 것으로 반드시 군사만의 일은 아니다'라고 말하셨으니 내가 오늘날 죽음을 무릅쓰고 이단을 물리치는 일이 다행히도 죄가 될 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에게 이단을 막는 일은 사단의 고귀함을 지키는 일이자 국가 사직을 지키는 일이요, 국가를 외침에서 막아내는 일이었다. 그 객관적인 평가는 보는 시각에 따라서 달라질지라도 송시열 자신을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흔히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았기 때문에 윤휴가 죽음을 당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윤휴가 죽은 것은 사문난적으로 몰린 효종4년(1653)이 아니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정권을 잡은 숙종6년(1680)이었고, 그를 죽음으로 몬 인물은 송시열이라기보다는 임금인 숙종 자신이었다.
효종 때는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해서 그를 죽일 수 있을 만한 권력이 없었다. 송시열이 윤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의 제자인 권상하의 증언이다.
송시열이 권상하에게 물었다.
"윤휴의 죄 중 가장 큰 것이 무엇인가?"
"역모의 죄가 가장 큽니다."
권상하의 이 대답에 송시열은 빙긋 웃었다.
"그대는 아직 궁리에 대한 공부가 깊지 못하구나."
이에 권상하가 물었다.
"그렇다면 주자를 능멸한 것이 가장 큰 죄입니까?"
송시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다. 사람이 진실로 성현을 능멸한다면 무슨 일인을 하지 못하겠는냐."
이처럼 송시열은 역모보다도 주자에 대한 능멸을 더 큰 죄로 생각했다. 사문난적 논쟁은 송시열에게 윤휴 한 사람의 생사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올바른 정과 그릇된 사와의 싸움이라는 도에 관련된 문제였던 것이다.
사문난적 논쟁은 송시열과 당사자인 윤휴는 물론 같은 서인인 윤선거와 윤증, 박세채 사이를 갈라놓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12년 후인 현종 6년(1665) 이들은 동학사에서 만나 다시 사문난적 논쟁을 벌인다. 이때 이들은 이미 서로 정적이 되어 있었다.
'역사 ,세계사 > 옛 우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익보다는 당익이 앞선다(1) (0) | 2013.06.19 |
---|---|
왕위에 올랐다고 가통까지 이은 것은 아니다 - 예송논쟁(4) (0) | 2013.06.19 |
왕위에 올랐다고 가통까지 이은 것은 아니다 - 예송논쟁(2) (0) | 2013.06.19 |
왕위에 올랐다고 가통까지 이은 것은 아니다 - 예송논쟁(1) (0) | 2013.06.19 |
북벌의 시대, 대동법의 시대(3) (0) | 2013.0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