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국익보다는 당익이 앞선다(2)

구름위 2013. 6. 19.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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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증이 유배지의 스승을 찾은 이유


  유배지 장기에서 송시열이 자신을 계속 공격하는 남인에 대한 원한을 (주자대전차의)찬술로 풀고 있을 때 그의 유배지를 찾는 한 유학자가 있었다. 명재 윤증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윤휴에 대한 사문난적 논쟁 때 송시열과 다투었던 윤선거였다. 윤증은 송시열이 한창 공격당하던 숙종 즉위년 12월 종 3품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었으나 "송시열은 신이 스승으로 섬긴 이"이고 자신도 예송논쟁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사양한 적이 있었다. 그는 벼슬을 포기하고 충청도 이성(현 논산시 노성면)에 은거한 채 학문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런 윤증이 머나먼 경상도 장기까지 송시열을 찾은 것은 어려움에 빠진 스승을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써준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을 고쳐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 그는 천리가 넘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머나먼 유배지에서 마주한 옛 스승과 제자의 만남이 회니시비라 불리는 조선 정치. 철학 사상의 유명한 논쟁으로 이어질 줄은 두 사람 모두 몰랐을 것이다. 조선 후기 회니라는 말은 각각 송시열과 윤증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송시열이 회덕에 살고 윤증이 이성에 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윤휴의 사문난적 여부를 놓고 황산서원과 동학사에서 두 번 송시열과 부딪쳤던 윤선거는 현종 10년인 1669년 향선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윤증은 박세채에게 아버지의 행장을 지어 달라고 요청하고, 연보는 자신이 직접 지었다. 다음해 아버지 윤선거를 고향의 노강서원에 배향한 윤증은 현종 14년에 송시열에게 비명을 지어주기를 요청했다.
  송시열은 이를 수락하고 약 반 년 후 비문을 지어주었다. 잔뜩 기대를 했던 윤증은 송시열이 지어진 비문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 내용이 크게 부실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생애를 조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송시열 자신이 비문을 지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박세채가 지은 행장에 따라 비문을 옮긴 후 이렇게 덧붙였을 뿐이다.
  "현석(박세채)이 윤선거를 극진하게 찬양하셨기에 나는 그대로 기술만하고 창작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윤선거의 생애에 대한 명백한 조롱이었다. 송시열이 윤선거의 생애를 조롱할 수 있었던 것은 병자호란 때 있었던 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강호도 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그것이다.
  강화도 사건은 윤증이 아홉 살, 윤선거가 28세 때인 병자호란 와중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병자호란 때 윤선거가 그의 부인 이씨와 아들 윤증을 데리고 강화도로 피난한 데서 사건은 시작된다. (숙종실록)재위 10년 5월 13일의 기사에 강화도 사건에 대한 시말이 적혀 있다.
  "(윤선거) 사인 김익겸. 권순장 등과 함께 성문을 나누어 지켜서 일이 급하면 반드시 주기로써 서로 맹세하고, 아내와 더불어 함께 주기를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강도(강화도)가 함락되자 김익겸 등이 과연 맹세를 저버리지 않고 모두 죽으니, 윤선거도 함께 죽고자 하여 그 아내 이씨를 몰아서 스스로 목매게 하였으나 윤선거는 죽지 못하였다. 이때에 종실인 진원군이 포위 속에서 오랑캐 장수의 시킴을 받아 남한산성의 행재소(임금이 임시로 머물러 있는 곳)로 가게 되었는데, 윤선거가 전에 진원군과 같은 마을에 살면서 서로 친하게 지냈으므로, 드디어 그 종이 되기를 구하여 이름을 선복이라 하고 진원군을 따라나오니, 한때의 더러운 비방이 사람으로 하여금 거의 차마 들을 수 없게 하였다. 윤선거도 스스로 원망하고 스스로 단속하며 장가들지 않고 벼슬하지 않으며 뜻을 굽혀 문경공 김집의 문하에 배움을 청했으니, 문하의 여러 사람이 그 진취를 인정하고 그 지나간 일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벗이 되기를 하락하였다."
  (숙종실록) 재위 13년 3월 17일에 인용된 나량좌의 상소문은 위의 기사와 좀 다른 내용을 전해 준다.
  "윤선거가 병자년에 강도로 들어갈 적에 권순장. 김익겸과 함께 의병이 되기로 언약하여 성을 분담해 지키다가 적의 군사가 성에 들어오자 진원군 세완이 효종(당시 봉림대군)의 명으로 남한산성으로 봉사 나가면서 윤선거에게,  '그대가 나와 함께 가야 되겠다' 라고 말하므로 윤선거가 드디어 미복 차림으로 세완의 종자가 되어 갑진을 건넜었고, 남한산성에 이르러서는 성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드디어 세완을 따라 들어와 효종의 행중으로 들어갔었던 것입니다. 지금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이 일을 두고, ' 벗들과 같이 일하기로 해 놓고 벗들은 죽었는데도 죽지 못했고, 아내와 죽기로 언약해 놓고 아내는 죽었는데도 죽지 못했다.' 고 말합니다. 대개 윤선거는 직사(벼슬)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군사를 피해 들어갔다가 군사가 닥치므로 떠난 것입니다. 이는 곧 선비의 정해진 분수로서 진실로 반드시 죽어야 하는 의무는 없는 것이고, 강화가 이미 이루어지고 수비 또한 파하게 되어서는 비록 죽고 떠나지 않으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른바 '아내와 죽기로 언약했다'는 것은 윤선거가 문경공 김집에서 답한 서한에 이르기를, '그 때 윤선거가 여러 사우들과 모여 몸을 거처할 곳을 의논하고 있었는데, 죽은 아내가 사세의 위급함을 알고 계집종을 보내어 윤선거를 데리러 왔습니다. 가자마자 하는 말이 적병에게 죽기 보다는 일찍 자결하는 것만 못하기에 한 번 만나 보고 영결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므로, 윤선거가 차마 볼 수 없어 사우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강화도사건'을 한마디로 말하면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기로 약속하고도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훗날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의 소론 사이에 의리론을 두고 벌어지는 '회니시비'의 소재가 되는 것이다. 윤선거는 이후 고향에 은거해 평생토록 벼슬과 재혼을 포기한 채 학문에만 몰두하는 것으로 강화도 사건에 속죄했다. 그는 효종 4년 이를 한탄하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병자년 강도에 들아갔을 때 사우들과 함께 일을 하다가 성이 함락되게 되어 사우들이 모두 죽고 중부(숙부) 윤전도 목숨을 바쳤습니다. 신은 잔인하게도 한 번 죽는 것이 아까와 아내는 자결하고 자식은 버려둔 채 홀로 살기를 탐내어, 밖으로는 벗들을 저버리고 안으로는 처자에게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중부를 따르지 못하고 노예가 되어 구차하게 면하여, 난이 임해서는 천성을 잃어버렸고 의리에 처하기를  무상하게 했기에, 지금도 뒤쫓아 생각해 보며 부끄러워 죽으려고 해도 되지 않습니다."
  명분과 의리의 나라 조선에서 씻을 수 없는 콤플렉스를 안고 은자의 삶을 살았던 윤선거의 삶과 학문을 송시열은 이렇게 비꼬았다.
  "공(윤선거)은 고니(황곡)와 같으나 나는 땅속의 벌레(양충)와 같을 뿐만 아니라 내가 비록 공을 따른 지 오래 되었지만 그 깉은 학문은 엿보지도 못했다."
  이는 명백히 윤선거의 삶과 학문에 대한 조롱이었다. 윤증은 몇차례나 편지를 보내 비문의 개찬을 요구했고 숙종 2년에는 직접 장기까지 찾았갔으나, 송시열은 비문을 본뜻은 하나도 고치지 않은 채 지엽적인 몇 글자만 고쳐 보내왔던 것이다. 송시열은 본뜻을 고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 자신이 박세채를 높은 산악(교악)같이 존경하므로 그의 중망을 빌어서 쓰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 또한 박세채가 윤선거의 행장에, "실로 높은 산악과 같다"고 쓴 것을 조롱한 말이었다.
  윤선거가 강화도에서 살아남았을 때 송시열은 앞에 말했듯이 남한산성에 있었다. 윤선거는 일개 유자에 불과했지만 송시열은 대군사부로 있었던 벼슬아치였다. 남한산성에서 살아남은 벼슬아치가 강화도에서 살아남은 유자를 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다른 글과 달라서 비문은 고인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서 쓰는 글이다. 윤선거의 생애를 조롱하려면 비문 집필을 거부하고 다른 글로 비난했어야 했다. 자신의 무덤 앞에 자신을 욕하는 비문을 세워둘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 비문 사건은 윤증의 마음을 송시열로부터 영원히 떠나게 한다. 편협한 사고와 처신이 적이 되지 않을 수 있던 사람을 적으로 만든 것이다.
  사건이 이렇게 된 데는 윤증이 비문 집필을 요청한 시기가 나쁜것도 한몫했다. 비문 집필을 요청한 얼마 후 제2차 예송논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제2차 예송논쟁 당시 송시열은 현종과 숙종에 맞서 '천하의 예는 같다(천하동례)'는 논리로 대결하다가 끈내 귀양길에 올랐던 것이다. 게다가 남인들은 70노구의 그를 죽이기 위한 공세를 그치지 않았다. 사문난적 논쟁의 당사자 남인 윤휴가 송시열 공격에 가담했던 것이 윤선거에 대한 송시열의 감정을 악화시켰던 것이다.

 

절대성과 상대성


  윤선거가 죽었을 당시만 해도 송시열의 감정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송시열이 보낸 제문이 이를 말해 준다.
  "천지가 어두운데 별 하나가 높게 빛났다."
  이런 칭송이 조롱으로 바뀐것도 윤휴 때문이었다. 송시열은 윤증이 윤휴의 제문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발끈한 것이다. 송시열은 윤선거가 윤휴와 관계를 끊은 줄 알았다가 제문을 받는 것을 보고 이들 부자가 계속 윤휴와 관계하고 있다고 짐작한 것이었다.
  당초 윤휴가 제문은 보내자 윤선거의 문인들은 이를 거절하려 했다. 윤증은 받는 것 자체의 거절은 너무 심하다 하여 받아들였으나, 윤증 또한 윤휴의 제문 내용을 보고 곧 후회했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던 것이다.
  "공은 나보고 공연히 세상의 화를 산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공이 스스로 자립하지 못하는 것 같소."
  즉 스스로 소신을 세우지 못하고 송시열에게 끌려다녔다는 비난이었다. 굳이 이런 사실을 지목한 것 또한 윤휴의 편협함이었다. 윤증은 윤휴의 제문을 받아들임으로써 송시열에게는 원망을, 윤휴에게는 윤선거의 삶에 대한 비판을 들었던 것이다.
  '기유의서 사건'도 송시열과 죽은 윤선거 사이를 갈라 놓았다. 기유의서란 윤선거가 사망하는 해인 현종 10년(기해년) 송시열에게 쓴 편지에 얽힌 사건을 말한다. 윤선거는 이 편지에서 송시열에게 윤휴와 허목 같은 남인들과의 화해를 종용했다.
  "오늘날 양현(송시열과 윤휴)의 논의가 정해진다면 이단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인재도 기용할 수 있을 것이니, 오직 이 양쪽이 융합한 후라야 조정이 바로잡히고 여러 치적도 빛날 것입니다. 예송논쟁은 처음엔 예법의 시비로 시작되었으나 지금은 변하여 옳은 것과 그른 것의 논란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 불평하는 자, 억울하게 굴복당한 자가 많았습니다.
  윤선도는 탐욕하고 음란한 인물이므로 등용해서는 안되지만 그외 조경같은 인물은 오래 금고를 당했으니 이제 다시 기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율곡이 계미년(1583년)에 자신을 비방했던 삼사를 다시 임용한 교훈입니다. 윤휴,허목 두 사람이 일부 과실이 있다고 해서 어찌 적으로 간주해 용납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먼저 이 두 사람을 비롯해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을 보여준다면 안으로는 우리의 아량을 넓힐 수 있고, 밖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을 것이니, 저 두 사람(윤휴,허목)인들 어찌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윤선거는 이 편지를 막상 송시열에게는 보내지 않았다. 오리혀 갈등을 부추길까 두려워했지 때문이다. 송시열이 이 편지를 본 것은 윤증을 통해서였다. 윤증이 윤선거의 비문을 청하면서 아버지 윤선거와 스승 송시열 사이에는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 편지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윤휴의 제문을 받은 것이 역효과가 났던 것처럼 윤선거의 편지를 솔직하게 보인 것도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송시열은 윤선거 부자가 계속 윤휴와 교제하고 있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고, 이 의심이 제2차 예송논쟁과 맞물려 윤선거의 삶을 조롱하는 비문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 특히 윤선거 비문 사건은 송시열과 윤증 양자를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정적 사이로 변화시켰다. 이 사건은 좁게는 윤선거의 비문 내용을 둘러싼 시비지만 크게는 주자학 절대주의 체제를 고수하려는 지배층과 주자학 상대주의 체제로 만들려는 지배층 사이의 갈등이었다. 나아가 자신들만이 올바른 정치세력이라고 믿는 세력과 상대방의 가치도 인정하는 세력 사이의 갈등이기도 했다.
  중국의 고대 한나라는 붕당결성을 상형에 해당하는 중죄로 다스렸지만 중세 송나라의 구양수는 붕당을 진붕과 위붕으로 나누었다. 진짜 당, 즉 진붕은 군자들의 당이고 가짜 당, 즉 위붕은 소인들의 당이란 뜻인데 결성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던 붕당의 허용 자체가 커다란 변화였다. 이는 사대부 세력의 성장을 기반으로 한 발전이었다.
  율곡 이이는 선조 때 나뉘었던 서인과 동인 모두를 진붕으로 생각해 양자의 화합을 추구하는 조제론을 펼쳤다. 윤선거가 편지에서 율곡을 인용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반면 송시열은 남인을 위붕으로 여겼다. 성리학 사회에서 위붕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모인 소인들의 집단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소멸해야 할 대상이었다. 반면 윤선거 부자는 남인을 진붕으로 생각했다. 즉 공존의 대상으로 본 것이다.
  남인을 진붕의 일원으로 생각하는 윤선거 부자와 타도 대상으로 생각하는 송시열 사이에서 합일점을 찾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이는 서로간의 감정 차원을 넘어 정치 사상의 차이, 세계관의 차이였기 때문이다. 이 차이가 서인을 송시열 중심의 노론과 윤증 중심의 소론으로 분당시킨 것이다.
  양자 사이가 화해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요인은 남인들의 정치 자세였다. 위에서 보았듯이 남인들은 막상 정권을 잡자 화해와는 거기가 먼 행보로 일관했다. 윤휴와 허목은 송시열을 공격하고 나섰다. 그들 역시 송시열을 진붕이 아닌 위붕으로 보았고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로 대했다. 남인들은 심지어 집요하게 송시열의 목숨을 요구했다.
  가시울타리로 둘러싸운 유배지의 송시열은 언제 금부도사가 사약을 들고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종일관 윤휴를 옹호한 윤선거의 비문을 고쳐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은 당연했다. 윤선거는 이미 죽었지만 그의 행적에 대한 평가는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송시열은 자신의 귀양을 정을 지키다가 사의배척을 받는 수난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그가 현실을 받아들이는 자세이기도 했다. 그는 귀양을 가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윤선거를 보지 않았는가. 흑수(윤휴)가 주자를 공격할 때 그를 끊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마침내 그와 하나가 되어 밝은 것을 누르고 어두운 것을 도와서 마침내 큰 화가 하늘을 쓸고 집과 나라가 다 망할 지경이 되었다. 맹자와 주자가 사설을 원수같이 여겼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내가 보잘것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앙령되게 맹자와 주자를 본받아 사문(성리학)을 어지럽히는 이단은 누구나 책망할 수 있다는 교훈을 믿다가 유배생활로 죽게 되는 화를 입게 되었으나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이처럼 송시열은 윤휴와 윤선거를 사로 규정하고 바른 도를 지키기 위해서 이단을 막는다는 생각으로 그들을 대했다. 비문의 내용이 좋게 나올 리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윤휴도 송시열처럼 서로를 적으로 대했으니 싸움이 치열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청남과 탁남으로 갈리는 남인


  예송논쟁의 여파로 정권을 잡은 남인들은 둘로 분당되었다. 분당의 이유는 둘이었다. 하나는 서인에 대한 대응자세의 차이였다. 즉 서인에 대한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뉜 것이다. 온건파의 영수는 허적과 권대운이었는데 이들은 탁남이라고 불렀고, 강경파의 영수는 윤휴와 허목이었는데 이들을 청남이라고 불렀다. 남인들은 숙종 1년부터 나뉘어지기 시작했으나 숙종4년 이조판서이자 청남이었던 홍우원이 이옥을 예문관 부제학에 추천한 것을 계기로 크게 분열했다. 그러자 이조참의이자 탁남인 유명천이 반대하고 나섰다.
  유명천은 이옥이 서인 집권 시절 송시열의 고향인 충청도 도사로 있으면서 송시열에게 두 번 편지를 보내 자신을 소자라고 일컬으면서 그의 학덕을 찬양하고 스승으로 모실 것을 간청했다고 폭로했다. 송시열은 그 뜻을 칭찬하는 답장을 써주었으나 서인이 실각하고 송시열이 유배되자 송시열의 고묘를 주창하고 나섰다는 비난이었다. 이옥이 고묘론을 주창하는 데는 송시열도 분개했다. 그는 민대수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분개했다.
  "전에는 나를 사마천의 문장이요, 정자,주자의 도학이라고 추켜올리더니 어찌 머리 한 번 돌릴 사이에 내가 용서할 수 없는 흉악한 죄인이 되었단 말인가."
  탁남인 민희,오시복,유명천 등이 이를 문제 삼아서 이옥을 희양부사로 좌천시켰는데 이조판서 홍우원이 부제학으로 끌어올리자 유명천이 홍우원을 공격하고 나선 것이었다.
  이 사건은 청남과 탁남을 크게 다투게 했다. 두 파로 나뉜 남인은 급기야 허목이 허적을 탄핵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판중추부사 허목은 숙종 5년 차자를 올려 영의정 허적을 탄핵하고 나섰다.
  "허적은 외척과 결탁하고 내시를 밀객(간첩)으로 삼아 전하의 동정을 엿보았습니다. 그는 송시열 때 정승에 올랐고 서로 사이가 좋아서 의논을 같이하더니, 송시열이 패하자 공론에 부합하여 마치 처음부터 영합한 것이 없는 듯이 하였고... 고묘론이 일어날 때 외척 김석주와 짜고 시행치 못하도록 방해했고, 강화 흉서가 있을 때도 곧바로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남인의 두 거두가 충돌하자 그 옳고 그름을 판정할 사람은 임금 숙종밖에 없었다. 숙종은 허목의 차자에 엄한 비답을 내렸다. 허적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허목의 탄핵을 받은 허적은 벼슬을 내놓고 향리인 충주로 향했다. 형식적인 사직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해 가족 모두를 데리고 떠났던 것이다. 숙종은 하루 동안에 세 번이나 허적에게 자신과 주서를 보내 돌아오도록 효유했다. 허적은 광나루와 여주를 거쳐 충주로 향했는데 숙종은 선전관에게 밀부를 주면서 허적을 좇게 했다. 그 밀부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과인의 잠자리와 먹는 것이 편하지 못해 병을 얻은 것 같다."
  무한한 신임의 표시였지만, 허적은 끝내 사양했다.
  "신의 지금 형편이 백천간두에 있으니 결코 다시 궐문에 들어갈수 없습니다."
  숙종은 허목을 비롯한 청남을 퇴진시켜야만 허적을 돌아오게 할수 있음을 알았다. 숙종은 허목이 대죄하는 상소를 올리고 연천으로 떠나자 만류하지 않는 것으로 허목을 버렸으며 또 다른 청남 홍우원의 직책을 갈아버렸다. 그리고 청남을 쫓아낸 후 탁남인 예조판서 민암을 충주로 보내 돌아오라고 효유했다. 예조판서가 직접 찾아오자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진 허적은 서울로 올라왔다. 어쩌면 이 대우는 전례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어쨌든 허적으로 대표되는 탁남이 정권을 잡은 것이 송시열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만약 윤휴나 허목으로 대표되는 청남이 정권을 잡았다면 송시열은 이들에 의해 불귀의 객이 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탁남의 승리는 우리 역사에서 드물게 보이는 온건파의 승리였다. 그러나 그 승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숙종의 신임에 의한 것이었다. 숙종의 신임이 거두어지는 날, 탁남의 운명은 끈날 것이었다. 이것이 탁남과 청남을 막론한 남인들의 한계였다. 서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정권을 쟁취하고 유지해 왔다. 하지만 남인들은 국왕과 연합해 정권을 잡았다. 즉 국왕과의 연합정권이었다. 하지만 그 연합은 채 1년을 가지 못했다.

 

진정한 북벌론자 윤휴


  남인이 청남과 탁남으로 분열된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북벌에 대한 차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두 정파 사이의 더욱 근본적인 차이이기도 했다. 송시열이 입으로만 불벌을 주장하던 시기에 실제로 북벌을 주장했던 인물은 백호 윤휴였다. 윤휴는 현종 15년(1674) 7월 밀소를 올렸는데 그 밀소 내용이 주목된다. (현종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이때 윤휴를 포의신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미 학문으로 효종 7년 자의를 제수박았고, 현종 즉위년에도 청요직인 사헌부 지평을 제수 받았으므로 포의는 아니었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사직소를 올리고 재야에 은거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가 비밀 상소인 밀소를 올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지금 북벌을 단행하자는 상소이기 때문이다.
  "아, 효종대왕께서는 10년 동안 왕위에 계시면서 새벽부터 주무실 때까지 군사정책에 대해 묻고 인사를 불러들여 사전에 대비하셨으니 어찌 북쪽으로 전진해 보려는 마음을 하루라도 잊은 적이 있었겠습니까. 안배도 완전하게 하였으며 부서도 두기 시작했으나, 하늘이 순리대로 돕지 않아 중도에 승하하시어 웅장한 계획과 큰 뜻이 천추에 한을 남기고 말았습니다만, 이는 천명이 아직 이르지 않아 그런 것으로서 전하께서 근심해야 합니다. ...때는 쫓아갈 수 없으며 기회는 놓쳐서는 안 됩니다. 시기를 이용하고 사세를 틈타 자신의 보존을 도모하는 것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에 '때가 이르렀는데도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도리어 어지러움을 당하게 되고 하늘이 주는데도 가지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오직 지금이 그러한 때입니다."
  윤휴가 '때는 쫓아갈 수 없으며 기회는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지금이 그러한 때입니다'라며 급박하게 북벌을 주장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윤휴가 상소를 올린 현종 15년(1674)에는 명나라의 마지막 유장으로서 번왕에 봉해졌던 오삼께가 청나라 타도를 외치면서 군사를 일으켜 중국 대륙이 요동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효종이 기해독대 때 송시열에게 "기회를 봐서 오랑캐들이 예기치 못했을 때 곧장 관(산해관)으로 쳐들어갈 계획이다. 그러면 중원의 의사와 호걸 중에 어찌 홍응하는 자가 없겠는가"라고 예언한 내용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기회를 놓치지 말고 북벌을 단행하자는 것이 윤휴의 주장이었다. 그의 주장을 계속 들어보자.
  "추악한 것들(청나라)이 점령한 지 오래되자 중국 땅에 원망과 노여움이 바야흐로 일어나 오삼계는 서쪽에서 일어나고 공유덕은 남쪽에서 연합하고 달단(몽고)은 북쪽에서 엿보고 정경은 동쪽에서 노리고 있으며 머리털을 깎인 유민들이 가슴을 치고 울먹이며 명나라를 잊지 않고 있다 하니, 가만히 태풍의 여운을 듣건대 천하의 대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웃에 있는 나라로서 요충 지대에 처해 있고 저들의 뒤에 위치하고 있어 전성의 형세가 있는데도, 이때 군대를 동원하고 격서를 띄워 천하에 앞장서서, 그들의 세력을 가르고 마음을 놀라게 하여 천하의 근심을 같이 근심하고 천하의 의리를 붙들어 세우지 않는다면, 칼을 쥐고도 베지 않고 활을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쏘지 않는 것이 애석한 뿐만 아니라, 실로 우리 성상께서 유업을 계승하려는 마음이 우리 조종과 선왕을 감격시키거나 천하 후세에 말을 남길 수 없게 될까 염려됩니다."
  그러나 효종이 세상을 떠난 조정은 북벌을 이룰 수 없는 일로 두려워할 뿐이었다. 게다가 윤휴가 이 상소를 올린 다음달 현종마저 세상을 떠나 윤휴의 북벌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윤휴는 이에 굴하지 않고 숙종 즉위년 12월에도 밀봉한 책자를 올려 북벌을 주장했다. [숙종실록] 즉위년 12월 1일자를 보자.
  "장령 윤휴가 상소하고 밀봉한 책자를 올려 복수와 설치할 뜻을 전달하였는데, 그 말이 종횡으로 패합(변론술의 일종)하여 책사의 설과 유사하였다. 임금이 소사는 이미 보았으며, 책자는 궁중에 남겨두겠다고 하였다."
  사관이 윤휴의 북벌 주장을 '책사의 설과 유사'하다고 냉소하고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조정에서 이미 북벌은 물 건너간 일이었다. 다음날 인견할 때 숙종은 "윤휴의 상소는 곧 화를 도발하는 말이다"라고 반대했다. 이에 대해 허적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 뜻(북벌)은 군신 상하가 잊을 수 없는 것이지만, 지금의 사세와 힘으로는 미칠 수 없는 것이니, 다만 마음속에 둘 따름입니다. 만약 전파하게 된다면 말할 수가 없습니다. 윤휴는 선조(현종)에서도 일찌기 이러한 상소를 올린 일이 있어서 정지화가 통렬히 배척하여 승정원에서 받아들인 것이 잘못이라고 했는데, 신은 이러한 의논이 없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조에서 받지 말라는 명이 있었다면, 지금도 받지 말게 하는 것이 옳겠다."
  이에 허적은 받지 않으면 더욱 번거롭게 될 것이라며 반대했으나, 권대운은 "형세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큰소리 치기 좋아하는자는 매우 옳지 아니합니다."라고 윤휴를 비난했다.
  윤휴는 숙종 1년에는 병거를 만들 것을 주장했다. 이 병거는 외적을 방비햐려는 뜻도 있었지만 북벌에 사용하려는 뜻이 더 강했다. 이 계획이 예산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좌절되자 윤휴는 사직 함으로써 이를 항의하기도 했다. 숙종 1년 4월 한인 정금이 청나라에 반대하는 군사를 일으키자 윤휴는 중국인 황공에게 상소하게 해 정금에게 사신으로 갈 것을 자청하게 했다. 역시 강력한 북벌의 의지였다. 조정에서 북벌 주장에 냉담하게 대하자 중국인을 시켜 상소하게 할 정도로 강한 북벌론자가 윤휴였다. 이 문제를 두고 조정의 남인들이 둘로 갈린 것은 숙종 2년이었다. 그해영상 허적은 숙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신은 윤휴와 견해가 다르니, 윤휴는 바로 중원으로 쳐들어 가려고 하고, 신은 비밀히 준비하여 때를 기다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누가 명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만, 시세로 보아 불가합니다."
  윤휴가 북벌을 주장하고 허적, 권대운 등이 반대함에 따라 남인들이 둘로 갈라지기도 했다. 북벌을 주장하는 윤휴 등이 청남, 북벌을 반대하는 허적 등이 탁남으로 갈린 것이다.
  윤휴는 숙종 4년에도 정금, 오삼계와 연합해 북벌하자고 주장했다. 윤휴는 정금과 오삼계가 청나라와 대적하는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대개 오늘의 형세는 우리가 이미 지세가 좋고 편리한 곳에 처하였으며, 요해한 구역에 있으니, 우리가 능히 의를 붙들고 스스로 분발하면서, 요충에 외거하여 지키면서 사활을 잡을 것이고 천하를 흔들며 태산을 공고히 하는 형세인데, 진실로 여기서 벗어나지 않고서 위축되어 눈앞의 안락만을 탐하여 오래도록 적인과 싸우고 악직을 앓는 화를 다시 받는다면 신은 사직의 근심과 백성의 하가 실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을까 저어합니다."
  그러나 이미 문약에 빠진 조정은 북벌을 두려워만 할 뿐 중국 내륙이 한족과 만주족의 내전으로 요동치는 정세를 이용할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윤휴가 줄기차게 북벌을 주장하는 중에 국내 정세는 급격히 변하고 있었다. 남인 정권에 위협을 느낀 숙종이 국사의 파트너를 서인으로 바꿈에 따라 정권이 남인에서 서인으로 바뀐 것이다. 서인이 집권하는 이른바 경신환국이 그것이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윤휴는 그 직후인 숙종 6년 5월 15일, 사형 당하고 말았다.

 

잔칫날 무너진 남인 정권


  허적은 이제 조선에서 임금 다음가는 실력자였다. 허적에게 적대적인 세력들은 모두 쫓겨났다. 심지어 청남이었던 윤휴마저 허목을 비판하고 허적에게 협력할 정도로 그의 권력은 절대적이었다.
  숙종은 재위 6년 봄 허적에게 궤장을 하사했다. 이는 인신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조부 잠에게까지 시호를 내렸다. 숙종 6년 3월 허적은 궤장과 시호를 하사받은것을 축하하는 연시연을 열었다. 허적의 집은 물론 온 시내가 떠들썩한 잔치였다. 이 잔치는 남인 영상 허적의 위세를 천하에 떨쳤다.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한 권력이었다. 그러나 이 잔치가 남인 정권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으니 반전도 이런 극적인 반전이 없었다.
  숙종은 청남 허목이 축출된 후 허적에게 권력이 집중되자 의구심을 가졌다. 숙종의 이런 의구심을 부추긴 인물이 외척 김석주였다. 숙종과 김석주는 허적을 쓰러뜨릴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열린 잔치가 연시연이었다. 연시연을 둘러싸고 정계에는 많은 소문이 퍼졌다. 그 중 하나가 허적의 서자 허견의 거사설이었다. 잔치에 오는 병조판서 김석주와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 김만기, 그리고 나머지 서인들을 독살한 후 허견이 무사를 모아 거사한다는 소문이었다. 이 소문은 서인들의 연시연 참석을 막았다. 김석주도 참석을 회피한 서인의 한 명이었다. 김석주는 허견이 여러 차례 직접 찾아와 초청했음에도 병을 핑계로 사양했다. 김석주는 대신 김만기에게 참석을 권유했다.
  "우리 두 사람이 모두 가지 않으면 저들이 의심할 것이니 대감은 가는 것이 좋겠소."
  김만기는 일부러 늦게 참석하고는 자리에 앉자마자 배가 고프다며 남의 술잔을 빼앗아 마셨다. 또 안주로는 나물만 먹으며 자신의 순배가 오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음식에 독을 탔을까 염려해서였다.
  한편 잔칫날 내린 비는 숙종에게 허적을 쓰러뜨릴 구실을 주었다. 비가 오자 숙종은 내시에게 궁중에서 쓰는 기름 장막을 빌려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장막은 이미 허적이 가져간 터였다. 내시로부터 이 보고를 들은 숙종은 분개했다.
  "궐내에서 쓰는 장막을 제 맘대로 가져가는 짓은 한명회도 하지 못한 일이다."
  숙종은 내시를 보내 잔치판을 엿보게 했다. 잔치에 참석한 서인은 오두인,이단서 등 몇 사람뿐이고, 남인들만 가득 찼는데 허견이 모은 무사들이 매우 많다는 보고를 들은 숙종은 비상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숙종은 일단 결정하면 행동에 주저가 없는 인물이었다. 이는 어린 나이에 오른 왕위를 지키게 해주는 최선의 방편이기도 했다. 숙종은 급히 장수를 부르는 패를 내려 잔치에 참석중인 김만기와 남인 훈련대장 유혁연, 그리고 포도대장 신여철을 불렀다.
  숙종은 곧바로 비망기를 내렸다.
  "사태가 위태하니 병권을 왕가의 지친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다. 유혁연을 해임하고 광성부원군 김만기를 즉시 훈련대장에 제수하며, 신여철을 총융사로 삼아라. 오늘 안으로 병부를 주어 임무를 보게 하라."
  숙종은 사태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병권을 먼저 장악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임금이었다. 훈련대장과 총융사를 전광석화처럼 재빨리 갈아치운 것이었다. 병조판서는 외척 김석주였으므로 병권을 모두 빼앗긴 남인들은 손 한번 써볼 방법이 없었다.
  무신들이 급히 불려가자 사태가 심각함을 깨달은 허적은 민희와 함께 초헌을 재촉해 궐문 앞에 나갔다. 하지만 이미 비망기가 내려 병권이 바뀐 뒤였다. 허적은 등골이 오싹했다. 그는 다음날 새벽 한강에 나가 대죄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해가 바로 1680년 경신년이었다. 우리 역사상 그 유명한 경신환국이 단행된 것이다. 환국은 정권교체를 뜻하는 조선의 정치용어이다.
  숙종의 조치는 계속되었다. 이튿날 철원에 유배되어 있던 서인 감수항을 방면하고 남인 이조판서 이원정을 삭탈관직하여 도성밖으로 내쫓은 후 서인 정재승을 임명했다. 서인 이상진을 판의금, 정재승을 이조판서, 유상운을 대사간에 임명하고, 방면된 김수항을 영의정, 정지화를 좌의정으로 삼았다.
  6년여 만에 남인들의 세상이 가고 서인들의 세상이 온 것이다. 이는 또한 거제도의 유배지에서 남인들에게 칼을 갈고 있던 송시열의 세상이 다시 온 것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