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임진왜란 와중에 일어난 변란 - 송유진과 이몽학의 난, 임진왜란과 시대상

구름위 2013. 6. 19.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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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유진의 난과 이몽학의 난은 임진왜란 도중에 일어난 반란이었다. 이 두 난은  임진왜란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먼저 그 배경이 되었던 임진왜란 당시의 급박한 상황과 민중의 참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어떤 측면에서 왜군의 침입으로 야기되었던 임진왜란이야말로 조선시대 최대의  변란이었
다. 이러한 미증유의 국난을 당한 당시 조정의 모습은 어떠하였던가? 왕과 신하들은 자신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하여 수도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이것이  전란 기간 내내 백성들
이 조정을 불신하고 원망하는 구실이  되었다. 조정에 대한 불신은  백성들의 저항운동으로
나타났다. 궁궐과 종묘를 불태운 것은 왜군이 아니라 서울 시민들이었다. 또 전국  도처에서
텅 빈 관아를 습격하거나 난동을 부리고 관물을 훔쳐가는 일도 많았다. 그들 중에서 본격적
으로 조선왕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면서 혁명을 도모하였던 것이 송유진의  난과
이몽학의 난이었다.
  일본은 조선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선조 25년(1592) 4월 14일에 28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
여 침략하였다. 선발대 1만 7천 명은 700여 척의 군선을  타고 4월 13일에 부산포에 상륙하
였다. 부산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이 죽음으로 항전하였지만,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
되었고 그들도 장렬히 전사하였다. 적은 두 갈래로 나누어 진격하여 김해, 밀양 등을 함락시
켰다. 조선은 2백여 년 동안 전쟁을 모르고 지냈으므로 관리들과 백성들은 왜적이 침입한다
는 풍문만 듣고도 놀라 달아났다.
  급보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조정에서는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정예병을 이끌고  상주에
내려가 왜적을 막도록 하였으나, 이일은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하고 패하여 혼자 달아났다. 조
정은 다시 여진정벌에 공이 많은 신립을 삼도순변사로 삼아  왜적을 막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군사 요충지인 조령을 포기하고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항전하다가 처참하
게 패배하였다.
  충주 패전의 보고에 접한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파천하자는  말을 꺼냈지만, 대신과 중신
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부당함을 진언하였다. 그들은 종묘와  궁궐이 있는 경성을 고수
하면서 외부의 원군을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우승지  신잡은 스스로 자결할지언정 선조의
뒤를 따르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수찬 박동현도 "전하께서 일단 도성을 나가시면, 인심을 보
장할 수 없습니다. 전하의 연을 멘 인부도 길모퉁이에  연을 버려둔 채 달아날 것입니다"하
고 민심이 극도로 나빠진 상황을 말하였다.
  선조는 "내가 여기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마땅히 경들과  더불
어 목숨을 바칠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파천은 결정된 사실이었다. 6, 25사변 때 이
승만 대통령이 서울을 사수한다고 방송하면서, 정부는 이미 대전으로 천도했던 사실과 흡사
하다.
  4월 그믐날 선조는 평안도 쪽으로 피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호위하던 군사들은 모
두 달아나고 궁문엔 자물쇠도 채워지지  않았다. 시각을 알리는 북소리마저 끊어졌다.  밤이
깊어 선조는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타고 돈의문을 나가고 왕비는 걸어서 인화문을 나왔다. 밤
은 칠흑같이 어둡고 비까지 내려 지척을 분변할 수 없었는데, 도승지 이항복이 촛불을 잡고
앞을 인도하는 형편이었다.
  선조의 행차가 지나가려 할 즈음 도성 안이 성난 백성들이 먼저 내탕고에 들어가 보물을
다투어 훔쳐갔다. 이윽고 선조가 떠나자 난민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웠
다. 이 두 곳의 관서를 먼저 불태운 것은 공사 노비의 장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궁성
이 창고도 크게 노략질하였고, 모두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다. 잔류 부대장격인 유도대장이 몇 사람의 목을 베어 군중을 경
계시켰으나, 난민이 떼를 지어 일어나서 금지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새벽에 선조의 행차가 모래재를 넘었다. 계속해서 많은 비가 내려 일행이 비를 맞
으며 벽제역에 이르러 벽제관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왕과  왕비의 반찬은 겨우 준비되었
으나 급하게 임명되었던 동궁(광해군)은 반찬도 없었다. 병조판서 김응남이 흙탕물 속을 분
주히 뛰어다녔으나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따라왔던 많은 관리 중 다수는 도로 서울로
들어가 가족을 데리고 피난하기 바빴기 때문에 왕을 수행하는 관리는 백여 병도 되지 않았
다.
  선조의 행차는 저녁에 임진강 나루에 다달았다. 밤은 칠흑같이 어두운데 도선장을 밝혀줄
등불도 없었다. 마침 근처에 있던 빈 정자에  불을 질러 길을 밝힐 수 있었다. 파주  목사와
장단 부사가 임시로 주방을 마련하여 임금의 수라를 준비하였으나, 호위하던 군사들이 갑자
기 난입하여 음식을 빼앗아 먹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선조가 굶게 되자, 장단 부사는 두려워
도망치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에 선조가 동파관을 출발하면서, 대신들을 불러 괴로운  듯 손으로 가슴을 두
드리며 부르짖었다. "이산해야, 유성룡아!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
는가? 꺼리거나 숨기지 말고 속에 있는 대로  털어놓고 말하라"하니, 여러 신하들이 엎드려
눈물만 흘리면서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결국 도승지  이항복이 의주가 좋다고 건의하
여 그곳으로 가기로 정하였다.
  의주로 가는 도중에 선조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입국  허가를 요청하였고, 조정을 둘
로 갈랐다. 젊고 건장한 신하들은 자기를 따르게 하여 의주로 달아나고, 늙고 쇠약한 신하들
은 세자인 광해군을 따르게 하여  전선에 투입하였다. 이를 분조라고 불렀다.  명나라에서는
선조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왕의 행차는 의주에  머무르고 말았다. 이와 같은
선조의 비겁한 행동과 조치는 관리들과 백성들의 비난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상소를 올
려 선조가 세자에게 양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말로만 양위할 것처럼 하고 끝
내 물러나지 않았다. 왕의 권위는 완전히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송유진과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게 된 첫 번째 원인은 임진왜란이었다. 임진왜란
은 조선시대를 전, 후기 둘로 나누는 분수령이 될 정도로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왜군의  침
입으로 인한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왕이 서울을 버리고 의주로 파천함으로 말미암아 정부
의 권위와 통제력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국가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각지에서 반
란이 일어났다.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기 2년 전에 천안의  송유진이 난을 일으킨 것을 필두
로, 각지에서 백성들이 반란을 꾀하였다.
  둘째로는 국가 재정의 궁핍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만으로는 왜군을 막
기 어려워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나게  되었고 명나라의 원병들이 오게  되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탄난 형편에 많은 의병과 명군에게 군량미를 공급하고, 말먹이를 대는 일은 심
각한 문제였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왜군에게 약탈당하고 국가에 수탈당하여 끼니를 이을 수
가 없는 형편이었다.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보면 당시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기근이 극도에 이르러 심지어 사람의 고기를 먹으면서도  전혀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길가에 쓰러져 있는 굶어죽은 시체에 완전히 붙어 있는 살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산 사람을 도살하여 내장과 골수까지 꺼내  먹었다." 

  기근이 얼마나 심했으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식인종화되는 사태까지 발생했겠는가? 

  셋째로는 신분 질서의 혼란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사태가 발생하자 국가에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전란을 막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왜군을 잡아오는 자에게는 서얼이나 양인, 노비를 막론하고 전공에  따라 파격적으로 신분 상승과 해방을  약속하였다.
또 국가에서는 부족한 군량미를 충당하기 위하여 납속(곡식 기부)을 받고 노비는 상민으로,
상민은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주었다. 그러므로 노비나 백성들은 신분 해방이나 상승의
호기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백성들의  바람을 쉽게 성취시켜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
송유진이나 이몽학과 같은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호언장담으로  백성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송유진의 난


  정권 장악을 기도하다


  임진왜란 중에는 크고 작은  반란사건들이 여러 차례  발생하였다. 그 가운데  선조 26년
(1953)에 일어난 송유진의 난과, 29년(1596)에 일어난 이몽학의 난이 가장 두드러진다. 왜란
초기의 산발적인 소요는 신분해방을 위해 일어났다고는 해도, 전란을 틈탄 우발적인 사건이
었으며 비조직적인 행동이었다. 또 이러한 행위는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던 적의 세력권 안
에 있었던 사건이었고, 직접 왕정의 전복을 겨냥한 반란은 아니었다.
  그러나 송유진, 이몽학의 난은 그 규모나 조직면에서 양상이 판이했다. 이 두 반란은 왜군
이 화의를 조건으로 이미 남쪽으로 철수하여 국가의 통치권이 미치던 충청도 지역에서 일어
났다. 반란의 주모자들도 정면으로 왕권을  타도하고 새 나라를 수립하여  백성을 도탄에서
구제하겠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송유진은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오직 군량과 기계를 모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몽
학은 "나라를 태평하게 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임란 초
기 감사 수령들의 수탈과 혹사에 불만을 품었던 민중들의 폭동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들
은 왜군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바라만 보다가 흩어지는 관원과 장수들을 증오하였던 것
이다.
  송유진의 난은 당초 선조 27년(1954) 정월 대보름에 일당을 이끌고 거사하기로 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충청도 일대를 주무대로  한 이 반란음모는 본도
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고, 다른 지역에까지도 상당한 동조세력을 갖고 있었다.
  반란이 발각되기 전에 송유진 일당의 포진상황을 보면 1진은 청계산에, 1진은 지리산에, 1
진은 속리산에, 1진은 광덕산에 포진하는 등 여러 산골짜기에  분포된 자가 2천여 인이었다
고 생각한다. 이러한 진술은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여러  지역에 그들의 동조자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송유진과 같이 거사를 계획하다가 배반하여 그를  체포하는 데 앞장섰던 홍
우는 선조의 문초에서 "유진의 흉칙한 정상으로는 그 군사가 10명이면 1백명이라 하고, 1백
명이면 1천명이라고 일컫습니다"라고 진술하였다. 이러한 과정에도 불구하고 당시 지방관들
의 보고 내용을 보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란세력들이 서로 연
계되기 전에 발각되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충청도 조도어사 강첨이 조정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반란군들  중에는 양반과 무관들도
섞여 있었으며, 이들이 반란에 주도적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천안에서는 무기를 관리하던 관원이  송유진 일당에 사로잡히기도 하였고,  본 고을 사람
중에서도 자진하여 적중에 들어가는 자도 있었다. 중앙 정부는  천안의 군기감관 송망기 등
이 반군에게 사로잡힌 사건을 중시하여, 선전관을 급히 파견하여 송망기의 거처를 탐지하는
한편, 병사 변양준과 순변사 이일 등에 명하여 비밀리에 탐문토록 하였다.
  송유진은 충청도 천안과 직산 사이를 왕래하면서 서울의 수비가 허술함을 알았고, 의병장
을 사칭하여 반란세력을 규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한때 지리산, 속리산, 청계산 등지에 은신
하고 있는 그들 일당의 수가 2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들은 군량미와 무기를 수집하여 양
을 많이 비축하였다. 그들은 먼저 각처의 반란세력과 약속하고 군사를 움직여 아산,  평택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명기를 탈취하였고, 그 뒤 서울에 침입하기 위해 언제 먼저 전주에 밀서
를 보내 국가 전복을 꾀하였다

 

송유진의 체포와 사건의 마무리


  조정에서는 송유진이 전주에 밀서를 보낸 같은 날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요지의 포고문을 지방에 선포하였다.
  1. 수령이 사려가 깊고 담력이 있는 자를 가려서  반란세력에 침투시켜 적의 동태를 자세
히 살필 것.
  2. 충청도에 장수 한 사람을 고정 배치시켜 반적을 체포하고 토벌하는 일을 일임할 것.
  3. 반적 중에 귀순하는 자는 죄를 면해주고, 반적의 두목을 체포하거나 목을 베는  사람은
후히 포상한다.
  충청병사 변양걸은 송유진 등이  반도를 규합하여 무기, 군량을  갖추어 서울을 침입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리하여 군사를 인솔하여  온양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주모자의
소재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송유진 일당의 거사가 사전에 실패하게 된 것은 진천에 사는 무
사 김응룡의 계책 때문이었다. 그는 조카뻘 되는 홍각이 반란 주모자이 심복이 되어 종사관
으로 행세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홍각을 직산의  자기 집으로 끌어들여 위협하는
한편, 이해타산을 따지며 그를 설득시켰다.  그리하여 반도들의 실상을 파악한 후  홍각으로
하여금 송유진을 꾀어내게 하였다. 송유진은 홍각의 거짓 초청에 응하여 부하 수십 명을 데
리고 함께 왔다. 김응룡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역사 홍우 등과 함께 송유진 일당을 포박
하는 데 성공하였다.
  선조는 송유진 등의 체포 소식을  들었으나 안심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송유진이 스스로
판서라고 사칭한 때문에, 그 위에 괴수가 있으리라고 우려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선조는  서
울의 각 성문을 철저히 지키게 하는 한편 한강의 경비를 엄격히 하게 하였다. 또 남산 위에
는 장수와 병졸들로 대오를 짜서 주야로 망을 보게 하였다. 송유진 일당을 체포했다고 하여
반란세력에 대한 방비가 해이해지는 것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또 병조에  명하여 장사들을
모아 부대를 편성시켜 대기시켰고, 조경을 포수대장으로 삼았다. 이와는 별도로  금군대장을 두어 함께 입직시키게 하고, 좌우영에 있는 화기, 화약, 궁시, 검창 등을 모두 대궐 안 군기시로 들여놓아 방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 또한 용산창에는 용맹한 군사를 배치하여
항시 계엄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영의정 유성룡과 병조판서  이덕형으로 하여금 대궐 안에
서 숙직토록 하고, 모든 일을 수시로 변통하여 대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송유진의  반란음
모 이외에는 더 이상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체포된 송유진의 송치 문제를 두고  조정의 중신들간에 구구한 논쟁이  있었다. 현지에서
처단할 것인가 아니면 서울로 압송하여 국문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많은 논란
끝에 송유진을 서울로 압송하기로 하고,  선전관, 금군, 도사 등을  보내어 뱃길을 이용하여
10여 일 만에 서울로 압송하였다.
  그리하여 대궐 뜰에서 국문이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대신과 양사의 장관만이 참석토록 하
였는데, 송유진 일당과 무관한 사람들의 억울한 옥사를 막기  위하여 전일 송유진 일당으로
자수하여 송유진을 포박하는 데 공을 세운 직산의 홍응기와 부장 송난생 등 7인을 입회하도
록 하였다.
  정월 24일 국문이 시작되자, 송유진은 처음 진술할 때 자신이 괴수가 아니고 적괴는 바로
이산겸이라고 둘러대었다. 그 자신은 훙근에게  의탁하여 아동들을 모아 훈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고 발뺌하였다. 그러나 주모자 격인 김천수, 오원종, 유춘복 등을 국문한 결과, 괴수는 송유진과 오원종으로 밝혀졌다.수원에 살았던 오원종은 침을 잘 놓는 한의사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과 접촉하면서 그들을 포섭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월 15일 반란을 일으켜
서 서울로 침범하기로 결의하였다고 한다.
  송유진은 나라가 위태하고 어지러운 시기를 틈타 관원들의 인신과 공문을 위조하여  백성
들을 속이고 유혹하였다. 그리고 무기와 군량을 탈취하여 군사를  일으켜 반역을 꾀하고 여
러 곳에 반군을 결성하였다. 그는 오원종이 "서울이 허술하여  임금이 있는 곳은 모두 울타
리로 둘러쳤으므로, 2백 명의 군졸만으로도 해볼 수가  있다"는 말을 믿고 서울을 침범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는 오원종과 함께 통유문을 돌리고 군대명부를 작성하고, 유춘복을 돌격대
장으로 삼았다. 그들은 평상시 자기들끼리 말할 때는 백동은 황동이라 부르고, 대동은  소동
이라고 부르는 등, 암호나 중국어를 사용하여 비밀조직을 확대해나가다가 체포 처형되었다.
  이 난에 연루되어 처형된 사람은 송유진을 비롯하여 오원종, 김천수, 유춘복, 김언상, 송만
복, 이추, 김영 등 16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능지처참당하였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가  1
명, 추국을 받다가 사망한 자가 1명으로 모두 18명이었다. 그들의 가재, 전답, 잡물 등은  그
를 체포하는 데 공을 세운 홍응기 등에게 분배되었다. 그밖에  이 난에 연루되어 추국을 받
은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이들 중에는 송유진 일당에게 속아서 빠져
든 의병장, 현직 관원, 양반 등 광범한 인물들이 체포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산
겸, 여대로, 노일개, 조원, 신응희, 김달효, 조희진 등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석방되었으나, 이산겸만은 반란의 동모자라는 죄명을 입고 끝내 구제되지 못하였다.
  이산겸은 충청도 보령 사람으로 이지함의 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조헌의 휘
하에서 종사하였다. 조헌이 금산싸움에서 전사하자 흩어진 병졸들을 수습하여 평택, 진위 등
지에서 싸웠고, 건의대장 심수경의 지휘를 받았다. 그는 여러 지역으로 의병을 이끌고  다녔
으나 그리 큰 전과를 올리지는 못하였다. 그는 한때 의병을 해산시키고 본가로 돌아간 적도
있었으나, 송유진 일당에게 연루되어  잡혀올 때는 소수의 의병을  거느리고 전라도에 있을
때였다. 이산겸이 적괴라는 말은 송유진과  그의 일당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는데,  이산겸이
구속되자 그 영향이 중앙정계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부수찬 정엽은 군졸과 군량미를 수집하
러 지방에 있을 때 의병장 이산겸을 도와주었다는 이유 때문에 벼슬길에 지장을 받게 되었
다. 신곡과 신기일 등은 이산겸의 장인, 처남 사이로 추국에 말려들었다.
  이산겸이 반란에 가담했는지의 여부는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적괴라는 진술
을 끝까지 부인하였고, 송유진 일당을 잡아들이게 한 홍응기, 홍각 등도 이산겸과 대질한 결
과 그 사실을 부인하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미루어보면 그는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듯싶다.
  한편 송유진 일당 체포에 공을  세운 사람들은 많은 포상을 받았다.  적정을 고발한 직산
좌수 임달신, 송유진 등 10명을 체포한 홍응개, 홍난생, 홍우, 신계축, 홍찬, 김응추, 홍각 등
에게는 차등 있게 관직과 상이 주어졌다. 그밖에도 충청병사 변양걸이 반적 체포에 공이 크
다 하여 승진시켰고, 국문을 담당했던 신하들도 모두 포상하였다. 그런데 홍각은 같은 해 12
월에 다시 송유진의 일당으로 지목되어 삭탈관직되고  노비와 전택은 몰수되었으며, 추국을
받다가 매에 못 견디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