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임진왜란 와중에 일어난 변란 - 송유진과 이몽학의 난, 임진왜란과 시대상(2)

구름위 2013. 6. 19.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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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학의 난


  이몽학은 어떤 인물인가?


  필자는 어린 시절에 충남 부여 홍산에서 자랐다. 그곳에는  이몽학에 관한 전설과 유적이
많이 나아 있다. '이몽학 오뉘이의 힘겨루기'  전설이나, '이몽학의 용마 이야기', '이몽학이
축지법을 사용했다'는 전설 등이 그것이다. 홍산에는 여기저기에 패어  있는 연못이 많은데,
이것이 모두 이몽학이 반역했다가 역적으로 몰리자, 그와 일가  친척의 집이 모두 파가저택
(역적의 집터를 헐고 그곳을 파서 연못을 만드는 것)당한 유적들이라고 하였다.
  이몽학은 1596년(선조 29)에 충청도 홍산에서  군사를 모아 난을 일으켰다.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의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현재에도  그곳 사람들이 자세히 알지 못하
며, 또 그 내용을 조금 아는 촌로들도 좀처럼 일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반역!"
  역적으로 몰린다는 것은 온 동네가  시공을 초월하여 벌벌 떨 만큼  끔찍한 일인 것이다.
필자는 어렸을 때 이몽학의 전설을 들으면서 그를 영웅시하고 마음으로 동경하였다. 필자가
들었던 이몽학 오뉘이의 힘겨루기 전설은 다음과 같다.
  "이몽학은 홀어머니와 누이 세 식구가 살았다. 이몽학은 힘이 장사였으나,  지혜는 누이에
게 미치지 못하였다. 누이는 이몽학이 자기의 힘센 것만 믿고  언제나 거만한 점을 늘 걱정
하였다. 반면 이몽학은 어떻게 하면 자기가 누이의 지혜를 누를 수 있을까 궁금하였다. 그들
은 종종 힘과 지혜 겨루기 내기를 하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누이는 목숨을 건 내기를
하였다.
  이몽학은 나막신을 신고 일주일 걸리는 서울 나들이를 하루 만에 다녀오고, 그 사이에 누
이는 10리 성을 쌓기로 하였던 것이다. 이 내기에서 지는 사람은 목을 베기로 한 살벌한 시
합이었다. 드디어 운명의 시합은 시작되었다. 해가 거의 질 무렵 누이는 쉽게 성을 완성하고
막 성문을 매달려는 참이었다. 옆에서 이를 구경하던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남매가 늘 경쟁
상대였기 때문에 이 시합에서 지는 사람은 틀림없이 죽을  터였다. 어머니는 아들보다는 딸
이 죽은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재빨리 팥죽 한  동이를 쑤어서 딸에게
먹으라고 권하였다. 딸은 어머니의 의도를 빤히 알았지만 어머니의 뜻대로 팥죽을 받아먹었
다. 뜨거운 팥죽을 식혀서 조금 먹으려는데 이몽학이 들이닥쳤다. 이몽학은 누이가 성을  다
완성하지 못했음을 확인한 후 비정하게도 누이의 목을 쳐서 그 자리에서 죽였다. 지금도 은
산에 가면 그의 누이가 다 먹지도 못하고 버렸다는 팥죽땅이 있다."  위 전설에서 볼 수 있
듯이 이몽학은 힘이 세고 고집도  세었지만, 지혜는  모자랐던 것 같다. 누이는 이 점을 늘
걱정하고 마지막 목숨을 건 시합에서 이겨서  동생의 기를 꺾고 반역을 사전에  막아보려고
시도했던 것 같다. 아니면 이몽학의  재능을 아끼고 사랑하는  현지인들의 아쉬움에서 지어
낸 전설인지도 모른다.

 

거사를 일으키다


  이몽학은 왕족인 전주이씨의 서자로서, 임란시 충청도에서 종군할 때 조련장관이  되었다.
그는 홍산 무량사에 머물면서 뒷날 반군의 선봉장이 된 한현 등과 친교를 맺었다. 이몽학은
힘이 장사였지만 지혜가 모자라 한현의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는 꾀가 많고 세상일에 밝았
다.
  당시 조정에서는 (기효신서)의 속오법을 가지고 군사를 배치하고 기량을 훈련시켰다. 한현
은 권인룡, 김시약 등과 함께 모두 서인으로 응모하여 함께 선봉장이라 호칭하였다.  그들은
어사 이시발에 소속되어 충청도의 군사훈련을 담당하였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민심이 이반
하여 백성들이 탄식과 원망으로 차 있고, 크고 작은 고을의  방비가 모두 허술함을 보게 되
었다. 그리하여 그 틈을 타서 난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때 한현은 마침  부친상
을 당하여 홍주에 있다가, 우선 이몽학을 시켜 거사하도록 하고 자신은 내포에서 서로 호응
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몽학은 무량사의 굴 속에서 중들과 함께 깃발과 무기를  만들었다. 충청도에는 흔히 동
갑회를 만드는 풍속이 있었다. 동갑회란  노소와 귀천을 막론하고 동갑마다  깃발을 세우고
그 갑년을 써놓으면 무리들은 각자 그 동갑을 찾아 모여들어 술을 마시며 즐기는 친목 모임
이다. 이몽학 등은 그들 패거리를 시켜 계를 만든다고 선전하고 사람들을 동네 어귀 들판으
로 모이게 했다. 그리고 이들을 선동하여 자신을 따르게 하였다.
  이몽학은 이와 같이 무량사에서 군대를 모은 후 출병하여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마
치 대장군처럼 깃발을 세우고 의자에 앉아 뿔피리를 불고 북을 치면서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동갑 모임 중에서 미리 정한  장정이 나와 칼을 뽑아 들고 무리를  선동하였다.
이몽학은 그들에게 "이번에 일으킨 의거는 백성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일
이다. 거역하는 자는 죽음을 당할 것이고 순종하는 자는  상을 받으리라"고 일장 연설을 하
셨다. 무리들은 모두들 좋다고 환호하면서 그를 따랐다. 사람마다 스스로 고관대작이 될  것
으로 여기고, 성불이 세상에 나왔다고 추앙하였다.
  이몽학은 승려와 무기들을 장군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문관과 무관  등의 높은 관직을 멋
대로 나누어주니 양반 자체와 무뢰배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사전  준비를 다 마친 이몽학은
1597년(선조29조) 7월 6일 밤에 김경창, 이구, 장후재, 승려 능운, 사노 팽종 등과 함께 1000
여 명의 반군을 동원하여 홍산현을 습격, 현감 윤영현을 사로잡은 데 이어 또 임천 군수 박
진국도 사로잡았다. 이들은 모두 항복하여 이몽학에게 붙었으므로 이몽학은 그들을 높은 빈
사로 대우했다.
  그들은 다음날 잇따라 정산을 함락하니, 현감 정천경은 몸만 빠져 도주하였다. 이어 8일에
는 청양을 함락하자 현감 윤승서는 도주했고, 9일에는 대흥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반란이
일어난 지 3일 후에야 충청도 순안어사 이시발은 홍산에서 일어난 변란을 조정에 보고하였
다. 보고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정산 현감 정천경의 보고에, '이달  7일 승려와 속인 및 군사  등 무려 1천여 명이 홍산
땅 쌍방축에 모여 진을 치고, 바로  홍산 고을로 가서 현감을  끌어내  군법을 시행하고 인
신을 가져와 바치도록 했으며 군기를 수색해냈다. 심지어는 호각을  불며 기치를 들고서 임
천까지 행군하였으며, 또한 관아로 돌입하여 군수를 끌어내 목을  묶고 조목을 받들게 하여
적들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고 했습니다. 보고 듣기에 지극히 놀라운 일이므로, 사실이고 아니고 간에 보고받은 대로 긴급 보고하는 한편, 가까운 고을의 포수와 살수들을 징발하여 토벌한 계획 중에 있습니다."  이러한 보고서를 접한 조정에서는 전라도와 충청도의 군사를 총동원하여 합동작전을 펴서 반군을 진압하라고 지시하였다. 조정에서는 옛날부터 황건적이나 홍두적이  당초에는 별것 아니었으나, 나중에는 점점 불어나서  천하의  환란이 된 것
을  상기하면서 반란군을 조기에 일망타진하고자 하였다.
비변사에서는 반란군을 토벌하는 계책을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1. 반군들이 오랫동안 음모를 꾸미고 다른 도당들과  연합하였을 것이므로 치밀한 계획으
로 대처해야 함.
  2. 지난날 송유진의 난을 진압했을 때와 같이 그 도당을 이간시켜 자체 안에서 서로 도모
하게 하여 체포하는 것이 용이할 것임.
  3. 사람들은 상이 중하면 죽음을 무릅쓰고  공을 세우게 마련이므로, 이러한 사람을  가려
뽑아 다방면으로 계책을 마련해야 함.
  이러한 건의에 대하여 선조도 그대로 시행하라고 지시하였다.
  반란군은 거사 3일만에 6개 고을을 함락시켰으므로 기세가 대단하였다. 수령들은 먼저 도
망치고 아전과 백성들은 반란군의 호령에 따랐다. 그들은 술과  음식을 차려서 반란군을 대
접하였고 다투어 그들에게 가세하였다. 이에 인근의 백성들은 소문만 듣고도 호미를 던지고
그들에게 투항하는 자가 줄을 잇게 되었다. 그리하여 반군의 수는 한때 수만 명에 달하였다.
반란군은 "충용장 김덕경과 의병장 이덕형이 서울에서  내응한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
자 나라 전체가 놀라 민심이 술렁거리게 되었다.
  부여 현감 허수겸 같은 자는 반란군이 경내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지레 겁을 먹었다. 그
는 부하들이 무기를 반군에게 반출하는 것을 알고도 막지  못하였고, 반군이 도착하자 모든
공문서를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또 서산군수 이충길은 그의  동생 3인을 반란군에게 파견하
여 돕기도 하였다.
  이몽학은 짧은 기간에 6개 군현을 점령하자 용기백배하여 "곧장 서울로 향한다"고 큰소리
쳤다. 그래서 부근에서 제일 큰 고을인 홍주목을 공격하였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원래 이몽
학의 모사였던 한현은 서얼 출신으로서 영악스럽고 꾀가  많았다. 그는 이몽학에게 "승승장
구하는 바람을 타고 곧장 서울로  침공하는 것이 상책이요. 주위의 성곽  없는 약한 고을을
공격하는 것이 중책이요, 견고한 홍주를 진격하는 것이 하책이라"고 건의한 적이 있었다. 당
시 한현은 초상을 당하여 홍주로  가고 없었는데, 이몽학은 그의 계책을  따르지 않고 곧장
홍주를 공격하다가 대패하게 되었다.
  홍주성을 지키던 목사 홍가신은 일찍부터 명망이 높았으며, 행실이 청렴결백한 것으로 세
상에 이름이 나 있었다. 그는 홍주 목사에 제수되자 정성을 다해 방어전략을 수립하고 군사
를 훈련시켰다. 그래서 왜적이 홍주성에 쳐들어오자 단번에 무찔러 흩어지게 함으로써 충청
도 지역을 안전하게 지켜낸 적이 있었다.
  갑작스럽게 반란군의 침입을 당한 홍주 목사 홍가신은 민병을  모으는 한편, 그곳에 사는
무장 임득의, 박명현과 전 병사 신경행  등을 불러 성을 지킬 대비책을 논의하였다.  그들은
우선 성 밖에 연이어 있는 민간 초가집들을 불화살을 쏘아 모두 태워버렸다. 그대로 놓아두
면 적들이 비를 피하고 밥을 해먹기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이때 홍주목 인근의 남포 현감 박도선은 변란 소문을 듣고 충청수사 최호에게 급히 알려
수군을 동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수사  최호는 수군은 육지에서 싸우는  병사가 아니라고
난색을 표했다. 박동선은 큰 소리로 "지금이 정말 어느 때인데 수군과 육군의 다른 점을 따
지는가"고 윽박지른 끝에, 드디어 수영에 있는 군병을 모두 동원하여  홍주목을 후원하였다.
또 보령 현감 황응성도 군사를 소집하여 함께 홍주성에 합세하였다.
  홍주성은 이들 원병을 얻자 크게 사기가 오르게 되었다. 그들은 밤이 되자 성가퀴에 횃불
을 벌려 세워 성 안팎을 환히 밝히고 군사력을 과시하였다. 반군들은 관군의 증원군이 속속
도착하여 기세를 올리자, 성을 함락시킬 수 없음을 알고 어둠을 타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이몽학은 "한현이 오게 되면 목사의  머리를 베어서 깃대에 매달아놓겠다"고  큰소리치면서
도, 이튿날에는 군대를 이끌고 덕산 길로 후퇴하였다.  그러면서 "장차 김덕령, 홍계남의 군
대와 함께 합류하여 곧장 서울로 쳐들어가겠다"고 떠벌였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비로소 그의 말을 불신하기 시작하였고, 도중에서 도망치는 자가 속출하였다. 이 틈을  노려
박명현, 최호 등이 바짝 반군을 추격하여 압박을 가하였다. 또 전주 판관의 부하였던 윤성이
적진에 돌진하여 "적장의 목을 베어 오는 자는 화를 면하고 상을  받을 것이다"고 선무공작
을 폈다.
  연속적인 패배로 반란군은 더이상 이몽학의 말을 믿지 않고, 각자 자기들의 살 길만을 도
모하게 되었다. 그중 김경창, 임억명, 태근 등 3인이 배신하여 이몽학의 막사로 난입해 누워
있던 그의 목과 사지를 베어 관군에게 헌납하였다. 그러자 반란군은 일시에 흩어졌다.  머리
와 수족이 잘린 이몽학의 시체는 서울로  압송되어, 종로 철물전 앞에 3일  동안 효수된 후
사방으로 보내 전시되었다.
  한현은 반군의 실패 기미를 미리 알고  몰래 면천군으로 도망쳤다가 면천 군수  이원에게
잡혀서 옥에 갇혔다. 그는 결국 능지처사당하였는데, 심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끌어넣었
다. 당시 쟁쟁한 의병장이었던 김덕령, 곽재우,  고언백, 홍계남 등을 모두 끌고들어갔던  것
이. 그러나 조사 결과 대부분 무고였기 때문에 불문에 부쳤는데, 김덕령만이 잡혀가 심한 고
문 끝에 죽었다.
  한현의 아들 한의연은 역시 당고개에서 교수형당했으며, 이몽학의 삼촌인 이익,  김양호의
삼촌인 김환생, 한현의 조카 한호연 등은 모두 삼수와 갑산 지역으로 귀양갔다. 이몽학이 살
던 집은 파가저택되었고, 그가 살던 홍산현은 혁파되고 말았다. 이 때 능지처사당한  사람이
33명이었으며, 서울로 송치된 자는 1백여 명이었다.  처형된 자들의 가족은 모두 법에  따라
연좌시키고, 가산을 몰수당하였다.
  반란군을 적극적으로 막지 못했던 수령들도 탄핵을 다하였다. 부여 현감 허수연은 역적들
이 지경을 범하지도 않았는데도, 제 스스로 먼저 겁을 내어 그의 하인들이 반군들에게 무기
를 실어보내는 데도 감히 손을 쓰지 못하였다. 반군들이 쳐들어와 문서를 펴놓고 읽을 적에
도 그대로 듣고 있다가 마치 애걸하는 사람처럼 행동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처벌을 받았다.
임천 군수였던 박진국과 홍산 현감이었던 윤영현 등은 뚜렷한  처벌 조항이 없었지만, 수령
으로서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반군에게 협조한 죄목으로 치죄하게 되었다.
  홍산의 역모에 관련되어 체포된 반란군의 수는 너무나 많아 일일이 서울로 잡아오기 어려
운 형편이었다. 조정에서는 도원수 권율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그가 현지에 머무르면서 반군
의 가담 정도에 따라 처벌하도록 하였다.
  난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선조는 비변사의 건의대로 민심을 추스리기 위하여 승지 유희서
를 보내 반군의 협박에 의해 협력한 사람은 죄를 다스리지 않겠다는 뜻을 선포하여 나머지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데 힘썼다. 민심을 위무하기 위하여 반란  지역을 다녀온 유희서가 보
고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그가 부여와 임천 등 고을을 순회하며 백성들을 모아 놓고 조정의 선의를 전달하며 염려
하지 말고 각기 생업에 전념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모두들 "역적의 변이 난 뒤부터 감사, 병
사, 수사의 군관들이 역접을 잡는다는 핑계로 마을에 돌입하여  남자들을 무조건 결박해 가
므로 모두 두려워서 산골짜기로 숨게 되었다. 집에 있는  재물은 역적의 장물이라고 닥치는
대로 모두 거두어가므로 동리가 쓸쓸해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반란을 겪은 고을
이 얼마나 황폐하게 되는지 알 수 있다. 백성들은 또한  관원들이 말을 징발하는 폐단에 넌
더리를 내고 있었다. 그 동안 죄인의 송치나 선전관 등의  연락을 위하여 도로 연변의 마을
들은 민폐가 많았다. 그들은 적당들이 거의 모두 잡혔으므로  도시와 선전관을 요란하게 자
주 내려보내지 않는다면 좋겠다고 하소연하였다.

 

대사령을 내리고 공신을 봉하다


  난을 진압한 후 선조는 대사령을 내려 민심을 안정시키려고 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
다.
  "나는 답답하게도 끔찍한 왜란을 당하여 큰  원수를 갚지 못하고 큰 치욕을 씻지  못하였
다. 비록 너희들 신민의 위에 있기는 하지만 언제나 슬프고  답답한 심회가 마치 곤궁한 사
람이 의지할 데 없는 것과 같았다. 이번 역적들의 변란은 이 어려운 때에 일어나니, 그 까닭
은 진실로 내가 나라를 잘못 다스린 탓이다. 마음이 아프고 얼굴이 부끄러워 진실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너희들 신민들은 골수와 고혈이 이미 모두  빠져버렸는데 세금은 더욱 높아
갔고, 근력은 이미 지쳤는데도 징역은 더욱 급해갔다. 충청도와 전라도는 형편이 조금  낫다
고 하나, 부역의 고통이 더욱 심하였고, 형벌을 사용함이 지나치고 혹독하였다. 백성들이 역
적들의 간사한 말에 쉽게 빠져든 것이 어찌 그들의  본성이겠는가. 종범은 너그럽게 다스린
다는 방침에 특별히 진념하고자 하였으나, 미처 선처하지 못하여  옥석구분의 화를 면치 못
하게 되었다. 거듭 백성들에게 죄를  얻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슬프다.  앞으로는 일 하나
행동 하나에도 백성을 편하게 하는 방향으로 힘쓸 것이다.  백성에게 근심이나 해를 끼치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 부역이 가볍고 조세가 줄어들어  정치는 안정되고 백성은 편안
해져서 융성한 정치로 함께 나아가게  하겠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공신들을 대대적으로  봉하였는데, 이몽학의 난의 토버자도 모두 공신으로 봉하였다. 서울에서 의주까지 시종 왕을 호위한  관원들은 호성공신으로 봉하였고, 왜적을 토벌한 여러 장군들과 군량을 주청하러 간 사신들은 선무공신으로 삼았고, 이몽학의 난을 토벌한 관원들은 청난공신으로 봉하였다. 이들을 임란 3공신이라고 부른다. 공신은 모두 3등급으로 나누고 차등 있게 공신의 봉호를 내렸다.
  이몽학의 난을 토벌한 관원들도 호성공신이나 선무공신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중에
도 청난공신은 1등에 홍가신, 2등에 박명현, 최호, 3등에 신경행, 임득의 등 모두 5인이었다.
  이몽학의 난에 두목급을 체포하여 전공을 세운 사람들도 후한  상을 받았다. 그중에서 홍
산 복병장 이수담은 능운을 잡았고, 홍주의 생원 이익빈은 팽종을 잡았다. 전 군수 이형남과
군공정 박모르금 및 청용관 김효남 등은 모천지를 잡았고, 전 판관 이용침은 정붕을 잡았다.
정산의 교생 김경서는 장후재를 잡았고, 전 현감 한덕수는 이구를 잡았고, 김경복은  강봉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