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대규모 무장을 갖춘 도적들 - 임꺽정과 장길산(2)

구름위 2013. 6. 19. 16:36
728x90

임꺽정 활동의 성격과 영향


  임꺽정의 활동은 반란으로 부를 만큼 당시로는 가장 크고 오래 지속된 민중들의 저항이었
다. 국왕이나 조정의 관리들은 이것을 매우 위급하고 중대한 사건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
'반란'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먼저 당시 왕과 집권 관료들이 이  사건에 대해 어떤  인식
을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명종 14년 3월 임꺽정의 활동이 처음 조정에 보고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크게 긴장하는 모
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대신들은  도적들을 모조리 잡아죽여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명종 15년 11월  평산 어수동에서 관군들이 크게
패전하고 부장 연천령이 살해당하자 상황이 심각함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명종은 국위를 손
상시키고 기강을 훼손한 한심한 노릇이라고 탄식하였다. 왕은  임꺽정 일당에 대하여 "이들
은 좀도둑에 비할 바가 아니니 진실로 특별히 조치를 더해야 한다"고 하면서 임꺽정 집단을
"보통 도적과는 다르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국왕과 관료들은  이들을 "반역질하는 악독한
도적"으로 지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임꺽정 일당을 체제도전적이 집단으로까지 느꼈
던 것 같다.
  임꺽정의 세력이 점치 확대대고 치열해지자, 명종은 마침내  임꺽정 일당을 '적국'에 준하
는 것으로 간주하고 두려워하였다. 명종 16년에 들어서자 임꺽정의 저항이 해주에서 평산에
이르는 지역을 비롯해서 개성, 장단, 서울, 평양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명종은 임꺽정을 국사
범으로 의식하고 체제도전적 문제로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임꺽정 일당이 국가전복의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에 대응하는 조
정으로서는 국가적인 위기로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임꺽정 일당이 대부대로 전열을 갖추고
관군을 향해 정면으로 공격해온 적은 없었다. 그러나 당시  국왕과 관료들은 이들의 활동과
공격이 거세어지자 일종의 전쟁사태로까지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국가보
위적인 차원에서 총력을 기울여 대응했던 것이다.
  임꺽정 일당은 봉건지배체제에 완전히 복속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체제 전반을 부정
하고 나선 것도 아니었다. 비록 그들의 왕성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임꺽정의 무리는 군도의
성격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군도란 농민들이 자기들의 생활기반을 벗어나서 무리를 지
어 싸우는 형태의 집단을 말한다.  군도 형태는 국가적 지배체제로부터  이탈했다는 점에서
소극적 저항이었고, 또 집단적인 무장항쟁을 했다는 점에서는 적극적 저항이었지만,  대변혁
을 이루기는 어려웠다.
  임꺽정의 활동은 조선시대 민중저항의 초기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농민저항과 도적활동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임꺽정의 저항은 군도의 형태를 빌린 농민저항의 한 현
상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군도  형태는 중세사회에서의 민중저항의 한  현상으로 파악되는
것이고, 당시 관료들의 관점 역시 '모이면 도적, 흩어지면 백성'이라  한 것으로  보아 농민
저항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꺽정의  난은 비록 도적의 활동 형태로 나타났지만, 
그 기본적인 성격은 중세사회 민중저항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저항은 16세기 중엽에 들어오면서 격화된 사회경제적 모순을 민중에게 전가시키는  지
배층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훈구파 정권  말기에 만연했던 권세가나 내
수사이 농장과 사유지 확대에 대한 저항이었다. 당시 기록에도 "도적이 생기는 것은 도적질
하기 좋아해서가 아니라, 배고픔과  추위가 절박해서 부득이 도적이  되어 연명하려는 자가
많기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천민층의  저항의식의 발로인만큼 봉건적인 지배질서
에 저항한 운동이라고 할 수도 있다. 특히 교통로, 국가수취 운반로, 상업의 유통망 등을 집
중적으로 노린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반란의 성격을 지닌 임꺽정의 활동은 하나의 민중적 저항의 한 모델이 되어 이후 군도의
형태를 띤 백성들의 저항운동에 지침이  되었다. 그 영향은 조선후기  장길산의 활동에서도
찾을 수 있다.

 

신출귀몰한 장길산의 활동


  소빙기의 자연재해와 도적의 발생


  동, 서양학계를 막론하고 17세기 사회를 이해하는 주요 단서로  소빙기의 기후 환경을 들
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소빙기의 실제는 조선왕조실록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
보면 1670(현종11)의 대기근과 1695(숙종  21)부터 1699(숙종 25)까지의  대기근이 대표적인
것이다. 이 시기에는 서리, 우박, 눈, 한파를 비롯하여 각종 냉해, 한발 혹은 홍수와 같은 자
연재해가 집중되었고, 연속적인 흉년으로 민중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1695년(숙종 21) 4월에 나라 전체에  큰 가뭄이 들었다. 거센 바람
이 연이어 불고 서리가 여러 번  내려 보리와 밀이 여물지 않았으며, 파종  시기를 놓쳐 큰
흉년이 들었다. 그 해 가을에는 곡식을 추수할 계절이  되었는데도 곡식이 없어 떠돌아다나
며 걸식하는 자가 길에 가득하였다.  다음해 봄이 오기도 전에 살아남을  사람이 별로 없는
참혹한 지경이었다. 이렇게 되자 평안도의  굶주린 백성 이어둔은 실성하여  사람의 고기를
먹었다. 또 용천부에서는 금춘과 예합이 양녀였던 기생을 짓눌러 죽이고 그 고기를  먹었다.
이억금은 초장을 파내어 시체의 옷을 벗겨 입고 그 고기를 먹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백성들의 굶주림이 날로 더해가자 조정에서는 서울과 각 고을에 진휼소를 설치
하여 기민들을 구제하였다. 이곳을 찾아 먹으러 오는 자가 날로 늘어나 서울은 1만 명이 넘
었고, 팔도에서 각각 수만 명이었다. 영남에서 올라온 보고는 기민이 56만여 명이라고  하였
다. 굶어죽은 사람들을 합치면 수만 명이 되었다. 이렇게 자연재해가 겹치자 가을에는  물가
가 150% 정도 앙등했고, 이듬해 보리 고개 철에는 600%로 폭등하였다.
  1699년(숙종 25)에 완성한 호구통계를 살펴보면, 전국의 호구수는 129만 3083호이고, 인구
는 577만 2300 명이었다. 이를 6년 전인 1693년(숙종 19)와 견주어보면 호구수는 25만 3391
호가 감소되었고, 인구수는 141만 6274 명이 줄어들었다. 1695년(숙종 21) 이후 기근과 유행
병이 참혹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엄청나게 인구가 격감된 것이다.  당시 인구의 25%-33%
정도가 자연재해로 희생된 것이다.
  숙종은 온갖 노력을 다하여  백성들을 진휼하려고 노력하면서,  "혹시라도 도적질하지 말
라"고 당부하였지만, 도적은 전국에서 벌떼같이  일어났다. 백성들은 굶주림과 추위가  겹쳐
도둑이 될 수밖에 없었고, 전국적으로 도둑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 없어 길에는 나그네가 거
의 끊어질 지경이었다. 심지어 서울의 경복궁 신무문 밖에서도  대낮에 사람을 죽이고 의복
을 약탈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좌의정 유상운은 전국적으로 도적이 성하므로 토포사를 죽산에 더 설치하고, 강원도 토포
사도 한 곳을 더 설치하자고  하였다. 영의정 남구만은 "황해도의  도적 피해가 타지방보다
심한데도 토포사가 없으니, 수령 중에서 토포사  몇 사람을 차출함이 마땅하다"고 건의하였
다.
  그러나 토포사만으로는 도적을 다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의 신고체제를 강화하고
신고자에 대한 포상을 대폭 늘려서 도적을 잡고자 하였다.  병조에서는 도적을 잡는 사람들
에 대한 포상절목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에 따르면 도적 5, 6명 이상을 잡은 평민과  한량
은 권관에 제수하고, 무과 출신은 만호에 제수하며, 전직 조관은 그 자격과 명망에 따라  상
당한 벼슬을 주고, 도적 중에서 자수한  자는 죽음을 면해주고 후한 상을 준다고  정하였다.
그후 조정에서는 포상규정을 고쳐 도적패 중에서 스스로 그 도당을 고발한 자들은 1-2명일
경우 고발한 자는 죄를 면하고 은 50냥을 주며, 3-4명을 고발한 자는 죄를 면제하고 명예직
과 은 50냥을 주며, 5-6명을 고발한 자는 죄를 면제하고 명예직과 은 75냥을 주며, 7-8명을
고발한 자는 죄를 면제하고 명예직과 은 1백 냥을 주며,  10명 이상을 고발한 자는 죄를 면
제하고 명예직과 150냥을 준다고 선포하였다.

 

장길산의 활동과 체포 작전


  장길산은 광대 출신으로서, 광대놀이를 잘하고 용맹스러웠으므로 쉽게 사람들을 불러모을
수가 있었다. 그는 처음에 황해도 일대에서 활동하였는데, 조정에서는 1686년(숙종 12)에 특
별히 신엽을 황해감사로 삼아 체포하게  하였다. 신엽은 그의 도당 한  명을 잡아 장길산의
은신처를 알아내어 체포하려 하였으나, 그들은 이 사실을 염탐하고 모두 달아나 실패하였다.
  장길산은 1692년(숙종 18) 평안남도 양덕 부근에서 활동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포도청의
장교를 파견하여 체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그의 행방은 묘연하였으나, 함경도 두
만강 입구에 있는 서수라에서 활약한 것으로 보인다.
  1695년(숙종 21)에는 명화적 수십 명이 기를 세우고 총을 쏘며  철원 읍의 인가에 돌입하
여 약탈을 자행하였으나, 부사 황진문이 겁을 먹고 체포하지 못하였다. 이 명화적이  장길산
부대라는 확증은 없지만, 수십 명이 부대를 이루고 철원부사가 겁을 먹고 출동하여 잡지 못
한 도적의 규모로 볼 때 장길산 일당이었을 것이다.
  1697년(숙종 23)에 역적 모의의 고변이 있었는데, 이영창이라는 자가 금강산에 있는 승려
운부 및 장길산과 손을 잡고 거사를 도모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장길산은 서수라나 벽
동 등지에서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마상으로 위장하여 무기를 뺏는 등 활동이 활발하였다.
  숙종은 아연 긴장하여 장길산을 체포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극적 장길산은 날래고 사납기가 견줄 데가 없다. 여러  도로 왕래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
한데,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지난번 양덕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체
포하려고 포위하였지만 끝내 잡지 못하였으니, 역시 그 교활함을 알 만하다. 지금  이영창의
초사를 관찰하니 더욱 통탄스럽다. 여러 도에 은밀히 신칙하여  있는 곳을 상세히 정탐하게
하고, 별도로 군사를 징발해서 체포하여  뒷날의 근심을 없애도록 하라."  조정에서는  여러
도에다 은밀히 밀지를 내려 감사와 장수들이  별도 방략을 세워 장길산을 체포하도록  하였
다. 또 비변사에서는 은밀히 군대와 포도청에 명령하여 장길산을 잡으면 후한 상과 높은 벼
슬을 아끼지 않겠다고 독려하였다.
  그러나 경기도 지평에서 토포관이 살해당하는 일까지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장길산은
끝내 체포되지 않았다. 임꺽정은 체포되었는데, 장길산은 왜 잡히지 않았을까? 시대상과  관
련이 있지는 않을까.
  성호 이익은 조선시대의 3대 도적으로 홍길동, 임꺽정 그리고 장길산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