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정치적 변란인가, 민중의 반란인가? - 영조 무신란

구름위 2013. 6. 19.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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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과 소론의 갈등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전국적  규모의 반란이었던  무신란은 흔히  '이인좌의 난'으로
도 불린다. 이 반란은 당시 당쟁의 와중에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일부 소론 과격파 사대부
들이 중심이 되고, 여기에 정치적으로 몰락한 소수의 남인과 소북  계통의 당인들이 합세하
여 일으킨 일종의 정권 쟁탈전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몰락한 하급 양반들이나 지방  토호, 
좌수나 별감과 같은 향임층, 중인, 군교, 일반 상민들 및   노비, 도적(명화적) 등 각계 각층
의 사람들이 가담하였다. 그러므로 이 반란은 민중봉기의 성격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이 난의 직접적 계기는 영조의 즉위 이후에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를 위협받게 된 소론 과
격파들이 영조와 노론 정권의 타도를 꾀한 것이었다. 당초의 주모자들은 박필현, 이유익, 심
유현 등 소론 과격파들이었다. 그들은 갑술환국 이후에 정치적으로  완전히 실세해 있던 일
부 남인들과 극소수 소북계 인물들을 끌어들여 반란을 모의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역성혁명
까지는 꾀하지 못하고 왕족을 추대하여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반정의 형태를 기도하였다. 이
때 그들이 왕으로 옹립하려던 인물은 소현세자의 증손자였던 밀풍군 탄이었다. 그러나 밀풍
군 자신은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는 측근들을 통하여 추대 의사를 전해 듣기는 하였지만,
반대나 찬성의 의사를 명백히 표시하지 않았다.
  먼저 이 난의 정치적 배경을 살펴보자.
  1721년 경종이 즉위하자, 그 다음해에  노론은 왕위를 계승할 세제의 책봉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경종의 후계자로 정하고,  또 몇 달 후에는 그에게  왕권을
대행시키는 대리청정을 하도록 정국을 몰아갔다. 그러나  대리청정은 소론의 극렬한 반대로
취소되고 말았다. 소론은 노론의 횡포를  공격하여 그해 12월에는 그들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듬해(1772) 3월에는 이전에 연잉군의 집사 일을 보았던 목호룡이란 인물이 노론 명문가
자제들의 역모를 고발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살륙을 동반한 대대적인 옥사가 일어나게 되었
다. 이를 '신임옥사'라고 한다. 이때 경종이 지위를 위태롭게 하였다고  지목을 받은 노론 4
대신(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을 포함하여 60여 명의 노론계 인사들이 처형되거나 숙
청되었다. 이로써 노론은 소론에 대하여 극도의 원한을 품게 되었다.
  신임옥사는 노론이 너무 성급하게 영조의 계승권을 확보하려는 과정에서 무리수를 범하여
일어난 사건이었다. 또 일부 노론 명문가의 자제들이 작당하여 궁중과 내통, 모험적인  공작
을 기도한 부도덕한 행태도 한몫 하였다. 여기에 김일경을 비롯한 소론 강경파의 집권 욕심
으로 사태는 더욱 참혹하게 되었다. 이 일로 노론은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1724년 경종이 갑자기 서거하고, 영조가 즉위하였다. 그러자 그의 후원  세력이었
던 노론이 득세하여 신임옥사는 하루아침에 소론들이  꾸며낸 조작극이라고 번복되었다. 즉
노론 자제들의 모의는 역모가 아니라 충정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주장이었다. 이 때문에 소
론들은 정권에서 실각하게 되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신임옥사를 준엄하게 처리하자고 주
장한 급진파들(이를 준소라고 한다)은 큰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소론 급진파들은 당시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소수의 남인과 소북 인사들
을 규합하여 영조의 세제책봉 부당성, 경종의 사인 의혹, 영조의 출생 배경 등에 관한  여러
가지 유언비어를 유포하면서 소현세자의  증손자였던 밀풍군을 옹립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이괄의 난 이후 최대 규모로, 한때 충청도 일대를 휩쓸었다. 영조의 계승권에  대
한 의문과 그 세제책봉 과정에서의 노론 일파의 무리수가 신임옥사와 무신난의 직접적인 원
인이었다.

반란 주도세력


  1728년의 무신란은 경종 때 김일경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과격한 소론 이른바 준소에 속
하는 박필몽, 박필현, 이유익, 심유현, 이하 등에 의하여  모의되었다. 이들은 1724년 8월 영
조 즉위 후 김일경이 처형당하고 박필몽이 제주로 유배되면서 정치적 좌절과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노론이 다시 등장하여  신축소(김일경이 노론의 처단을 주장한  상소)에 참여하였던
이진유 등 6인의 처형을 주장하는 가운데 극단적인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이들의 반역 모
의는 김일경의 처형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박필현과 이유익이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점차 같은 소론계의 장수들을 포섭하고  오랫동안 정치적 진출이 막혀 있어  울분을
품고 있었던 남인 세력들과도 내통하였다.  또 이들은 당시 노론 중심의  중앙 정치 권력에
불만을 품고 있던 지방 양반들이나 토호들과도 결탁하였고, 지방의 중소상인이나 부호들 및
그들의 지원을 받던 토적들과도 연결되었다.
  소론 급진파와 일부 남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모의의 주동자들은 모두 서울  명문대
가의 후예들이었다. 참판, 강화유수, 도승지 등 화려한  벼슬을 역임하였던 박필몽과 사마시
에 장원급제한 수 태인현감에 임명되었던 박유현은 인조 때 대사헌을 지낸 박황의 후손이었
다. 그들은 대학자로 명성을 날렸던 박세당, 박세채와 같은 명문 반남박씨로 소론 핵심 가문
이었다. 박필몽은 1727년 오명항 등의 구원으로 제주도에서 풀려나와 전라도 무장의 유배지
에 있었다. 그는 당시 태인현감으로 와 있던 6촌 동생 박필현과 함께 모의에 깊이 관여하였
다.
  이유익은 왕족이었던 전주이씨 익안대군파의 후예로서, 1701년에 장희빈과 세자(경종)  보
호를 앞장서 주장했던 지평 이명세의 아들이었다. 그는 서울에서  모든 일을 지휘한 모방의
중심 인물이었다. 심유현은 경종의 첫 왕비였던 단의왕후의 동생으로서 이른바 왕실의 외척
이었다. 한성참군 이하는 인조반정 일등공신 이귀의 현손자였다. 그들은 같은 소론계의 장수
였단 포도대장 남태징, 평안병사 이사성과 선전관 이사필 종형제, 총융사 김중기 등을  포섭
하였고, 또 당시 소론계 장수였던 훈련대장 이삼, 총관 이사주, 전라도관찰사 정사효 등과도
내통하고 있었다.
  주동자들이 끌어들인 남인과 소북계 명사들로는, 남인 명문가인 좌의정 민희의 손자 민원
해와 원보 형제, 우의정 민점의 손자인 민언량과 민관효 부자 등을 비롯하여, 숙종 때  형조
판서를 지낸 이의징의 아들 이홍발과 그의 사촌형제들인 이인좌, 웅좌 등 4형제를 들 수 있
다.
  이인좌 형제들은 전주이씨 임영대군(세종의 아들)의 후예로서, 인조-효종 때 대사헌, 함경
도관찰사 등을 지낸 남인 이응시의 증손자들이었다.  이인좌의 당숙이었던 이홍발은 이의징
의 아들이었다. 또 이인좌의 할머니는 남인으로서 드물게 영의정을 지낸 권대운의 딸이었고,
그의 부인은 윤휴의 손녀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남인의 핵심 가문에 속하였다. 또한  이덕형
의 현손이었던 이지인도 서울에서 병력모집의 주동자로  참여하였다. 그들은 대부분 갑술환
국 이후에 숙청되어 벼슬에 가망이 없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울분을 품고 있었다.
  소북계 명사로는 양명하, 정희량 일가 등을 들 수 있다. 정희량은 인조 때 척화파의  대학
자 동계 정온의 후손으로서, 경상도 일대에 큰 명성과 재력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
었다.
  무신란의 주모자들이 반란에 동원하고자 하였던  병력은 대부분 자신들의 집에서  부리고
있었던 하인과 노비 소작농들이나, 전라도 부안 경기도 양성  등지의 산악에 소굴을 가지고
있었던 명화적 무리인 녹림당 패들이었다.
  녹림당은 이 무렵에 태인, 부안, 변산 지방의 전라도에 4-5백여 명, 용인, 양성 등지의 경
기와 충청도 접경지역에 4-5백여 명 정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안 변산 지역의 녹
림당은 그 지방의 부호였던 김수종이 관리하고 있었는데, 그는  당시 태인현감으로 있던 박
필현과 무장의 유배지에 있던 박필몽 등과 연결되어 있었다.  양성의 녹림당은 후에 반군의
부원수로 추대되었던 정세윤이 지휘하고 있었다. 녹림당의 무리들은 (정감록)의 정도령 출현
을 믿고 있었는데, 정세윤은 성이 정씨였으므로 은근히 자신을 정도령인 것처럼 암시하면서
개인적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주동자들이 동원할 수 있는 사병들은 매우 허약하였고, 실제로 동원하여 집결시키
기도 용이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서울의 주모자들은 이사성과  남태징 등의 장수들을 포섭
하여 관군을 동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사성은 거사 전에 평안병사로 임명되어 외방으로
나갔고, 남태징은 인품이 졸렬하여 관군을 동원할 만한 영향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인좌  등
이 청주를 함락한 후에는 인근 고을에서  모병을 하거나 농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여
한때 대단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반란의 준비와 봉기


  1727년 겨울부터 전국 각처에서는 괘서(대자보)를 통한 유언비어가 유포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주로 경종이 대비와 영조에 의해 독살되었으며, 영조가 숙종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노론이 거사하여 소론이 전멸될 것이라는 등이었다. 노론측의 관측에 의하면 이러한
유언비어는 심유현 박필현 이유익 등 소론 강경파에 의해  유포된 것이었다. 심유현은 경종
의 원비 단의왕후의 동생으로 경종의 임종 때 측근에 있었는데, 그의 죽음에 의혹이 있다는
설을 처음으로 유포시켰다. 이 때문에 그는 경종과 관련된 유언비어이 주모자로 지목되었다.
  유언비어는 전라도의 전주, 남원, 임피 옥구, 부안 등지의 장시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유
포되었고, 1728년 1월부터 서울의 종루와 서소문 그리고 경상도 곤양 등지로 전파되었다.
  이러한 유언비어는 대자보의 형태로  전국에 전파되었는데, 오래지  않아 삼남지방에서는
경종 시해설이 상식화되다시피 하였다. 이는 모반 주모자들의 교묘한 공작 때문이기도 하였
지만, 그만큼 여조의 계승에 문제의 소지가 있었던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인좌 일당은 청주를 점령한 후 서울로  진공하면서 충청도 일대에 뿌린 격문에서  경종
시해설을 과격하게 강조하였다. 이들은 모두 수거되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당시의
민심을 동요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전국의 인심은 매우 흉흉해졌고, 특히 서울
에서는 피난을 가거나 준비하는 사람들로 소란스러웠다.
  반란의 주모자들은 밀풍군에게 처남이었던 조덕징과 그의 장인 이하를 통하여 추대  의사
를 전했다. 밀풍군은 비록 응답이 없었다고 하지만 그들의 모의를 알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
다. 그는 추대를 명확히 거부하지 않았고, 끝내 고발하지도 않았던 점으로 보아 은근히 도조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모반 주동자들이 억지로  추대하는 것을 불가피하게 보고
있었다. 이유익 등의 주동자들은 밀풍군이 모르고  있거나 거부하더라도 억지로 추대하려는
생각마저 가지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밀풍군의 장남인  상대를 추대하자고 거론하는 사
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이렇게 밀풍군이나 그의 아들을 추대하려고  했던 것은 그들이 말하는 바  왕실의
"장파(큰 집)의 장파"라고 간주하였던 소현세자의 종손을 추대함으로써 반정의 명분을 얻고
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란 주동자들이 모두 영조를 축출하고 밀풍군을 세우려는 소론 급진파의 뜻과 합
치했던 것은 아니었다. 반군의 부원수로서  녹림당을 지휘하고 있던 정세윤은  매우 걸출한
자였다. 그는 스스로 정도령을 믿고 대권을 넘보는 야심을 가졌다. 그는 반란군 부원수로 추
대된 후에는 행민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그리고 이인좌 자신도  이 일을 이미 8년째 준비해
왔다는 말을 하고 있다.
  "내가 평생 술을 좋아하였지만 이 일을 도모한 이후로는 8년 동안이나 술을 끊었다."
  따라서 그의 모반은 단지 경종을 위해 영조를 축출하자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남인이
었으므로 갑술환국 이후 정치에서 철저히 소외된 이후부터 정변에 마음을 두고 있었던 것으
로 보인다.
  반란 주동자들은 그 해 2월부터 호남 전역에 유언을 유포시키며, 그들의 노비나 하인들을
중심으로 부안, 고부, 순창 등지의 녹림당  및 일부 지방의 하급 군교들을 동원하여  병력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들 중의 일부는 경기도 양성 등지로 이동하기도 하였다. 청주의  이인
좌와 양성의 정세윤 등은 1728년 3월 7일 각지의 병력 300여 인을 양성의 구만리와 가천 등
지에서 집합시켰다. 그들은 12일 밤 야음을 타고 전군을 구만리에 집결하여 대기시켰다.  이
들은 3월 14일 부근 소사에서 전군을 모아 거사하기로 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용인에 낙향해 있던 소론계 원로 대신 전 판서 최규서가 상경하여 이
들이 모반을 고발하였다. 그는 모반에 참여했던 중인 출신의  지리학교수 안호와 그의 노비
막실에게서 정보를 입수하였던 것이다. 영조는 반란 소식을 들은  초기에도 이것이 일부 도
적들의 난동쯤으로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양성의 반군들은 청주로 집결하여 이인좌 세력과 합세하고, 성내의 장교, 향리 등과  결탁
하여 3월 15일 한밤중에 병영을 습격하였다. 그들은 병사 이봉상과 영장 겸토포사였던 남연
년 등을 살해하고 청주성을 장악하였다.
  청주 함락의 소식은 18일에야 서울에 보고되었다. 조정에서는 급히 서울의 방비를 서두르
고 16일에는 총융사 김중기를 토벌대장으로 임명하여 청주로 출동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김
중기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출정을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병조판서 오명항
이 출정을 자청하였다. 그는 즉시 토벌대장인 사로도순무사에 임명되었고, 그날로  출정되었
다.
  이인좌와 정세윤 등은 청주를 점령하고 난 후에 각기  대원수와 부원수에 추대되었다. 그
리고 최경우를 좌장군, 신천영을 충청병사 등으로 임명하였다. 그들은 곧 대원수의 이름으로 인근 각 고을의 수령들에게 공문과 격문을 돌려 거사의 취지를 밝히고 협조할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병력을 징발하여 보내도록 명령하였다.
  반란군은 경종의 죽음을 영조에 의한 시해라고 선전하고, 그에  대한 복수를 거사의 명분
으로 내세웠다. 그들은 진중에 경종의 빈소를 설치하고 아침저녁으로  모여 곡을 하기도 하
였다. 반란군은 삽시간에 황간, 회인, 청안, 목천, 진천  등을 점령하고 이들 지역에 임시 수
령을 파견하였다. 이렇게 되자 반군의 수도 삽시간에 불어나게 되었다. 청주 함락 후에 자발
적으로 반군에 가담하거나 징병된 병력은 당초의 병력의 10여 배에 달하게 되었다.
  한편 경상도의 정희량은 이인좌의 동생이었던 이웅좌와 함께 그이 세력 근거지였던  안음
에서 3월 20일에 거병하였다. 그들은 당일에 안음과 거창을 함락하고 22일에는 합천과 삼가
를 점령하였다. 이들 지역의 점령에는 그곳 향청 좌수들과의  결탁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
다. 합천에서는 좌수 정상림 등이 변란을 일으켜 군수 이정필을 축출하였고, 삼가에서는  좌
수 신만항이 현감 이정수를 축출하였다. 또 안동에서도 미리  그곳의 좌수와 결탁해 있었으
나, 거사 직전에 동참을 거부하여 무산되었다. 그러나 거창의 좌수 이술원은 반군에  저항하
다가 죽었다. 이 지역의 반란은 곧 경상우병사 이시번에게 보고되었으나, 그는 조정의  지휘
를 기다린다는 핑계로 군대를 출동시키지 않았다. 관찰사 황선의  진압 명령을 받은 주변의
수령들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호남 지역은 유언비어가 가장 무성하였고 모의 참가자도 많아 분위기가 성숙되었으나, 거
사는 제대로 되지 못하였다. 무신란의 핵심 주동자였던 태인현감 박필현은 담양부사 심유현
과 무장에 유배되어 있었던 박필몽 그리고 관찰사 정사효 등과 연락하여 예하의 관군을 동
원하여 전주에 결집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약속한 날 정사효가 거부하여  집결은 실패하고
말았다.
  박필현은 3월 17일 반군의 진압을 명분으로 병력을 동원하여 훈련시키고 25일 전주로 나
아갔으나, 정사효는 그들의 전주성 입성을 막아 동참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군사들은 흩어지고 박필현도 도망하였다. 무장에 있던 박필몽도 잡군 30여  명을 데리고 합세하려 하였으나 태인의 실패를 듣고 역시 도망하였다. 이로써 호남의 봉기는 좌절되고 말았다.

난의 진압


  조정에서는 장단, 개성, 춘천 등 각지에서 근왕병을  소집하는 동시에, 18일에는 오명항을
도순무사, 박찬신을 중군, 박문수를 종사관으로 임명하여 토벌군을 출정시켰다. 영의정 이광
좌는 영병조사를 겸직하면서, 조정의 모든 군사업무를 지휘하였다.
  3월 20일에 반군의 일부는 이미  용인까지 진격해 있었다. 반군은  22일 진천에서 잔치를
벌이고, 23일에는 부대를 둘로 나누어 두 갈래로 진군하였다. 한 부대는 이인좌가  인솔하여
안성으로 향하였고, 한 부대는 부원수 정세윤이 인솔하여 죽산으로 향하였다.
  오명항은 먼저 안성으로 내려가, 한밤중에 반군을 습격하여 대파하였다. 다음날 관군은 여
세를 몰아 죽산으로 진격하여 아침밥을 해먹던 반군을 간단히 궤멸시키고 정세윤 등을 참살
하였다. 이인좌 등은 생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26일에는 평안도에서 체포된 이사성과 서
울의 주모자였던 이유익을 처형하고, 27일에는 이인좌 등을 능지처참하였다. 이날  청주에서
는 반군들이 임시 병사로 임명하였던 신천영을  상당산성에서 결박하여 처형하였다. 이로써
충청도의 반군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경상도의 반군은 28일 함양으로 들어가 지리산을 넘어 전라도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길
이 봉쇄되어 지체하고 있었다. 그 동안에 경상도 각 고을의 관군이 도래하여 30일에는 성주
목사 이진혁이 합천을 탈환하였고, 4월 2일 함양에서 거창으로  돌아온 반군을 선산부사 박
필건 등이 격파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희량과 이웅보 등은  부하들에게 결박되어 관군에 넘
겨져 처형되었다. 이로써 경상도의 반군도 완전히 진압되었다.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있었던 진압 작전에서는 사실상 단 한 명의 관군도 다친 사람이 없
을 만큼 전투다운 전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관군의  용이주도한 작전과 회유 때문
이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오합지졸로 이루어졌던 소수의 반군이 대규모 관군을 보자마자 스
스로 흩어져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밀풍군은 반란의 초기부터 추대의 대상자로 거명되었다. 그는  3월 20일에 체포되어 국문
을 받게 되었으나, 자신의 관련을 부인하였다. 그는 처남인 조덕징과 이하 등을 통해 추대를
권유받았거나 통보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모반 주동자들의 심문과정에서 나온 말로서,
그들 내부의 논의였는지 밀풍군 자신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이유익 등은 미리 밀풍군에게 내통하지 않더라도 거사 후에 억지로 추대하면 그가 거부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무신란에는 각계각층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가담하였으므로 그들이 한결같이  밀풍군
추대에 합의하였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인좌는 남인 중심의 반정을 꾀하였고, 정세윤과  같
이 개인적인 야심을 가진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역성혁명이란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으므로, 임시 방편으로라도 전주 이씨의 왕족들  중에서 한 사람을 추대하여
이른바 '반정'의 형태로 추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밀풍군은 왕족이었기 때문에 국문과
정에서도 다른 죄수들과 달리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영조는 그를 살려주고자 하였으나,  신
하들의 완강한 반대로 결국 다음 해에 사사되었다.


  무신란의 의미


  1728년의 무신란에는 서울과 경기, 강원, 삼남 및 평안도의 각지에서 소론 남인 소북의 문
무관, 명문 양반, 몰락 양반, 지방 토호, 향임층, 중인, 군교, 상민, 노비,  도적(명화적) 등 각
계각층의 인물 등을 망라하여 동조세력이 규합되었다. 그들은 충청, 전라, 경상도의 3도에서
거의 동시에 거병하여 한때 기세를 오리기도 하였다. 이는  그만큼 노론의 장기집권 때문에
소외된 계층이나 집단이 많았음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경종에서 영조로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무리를 처사들이 전국적인 저항을 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물론 모
반 주도자들의 교묘한 선전활동 때문이기도 하였으나,  기본적으로 당시의 왕위계승이 안고
있었던 문제점에서 말미암은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전국적인 규모의 반란은 조선시대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특이한 것이
다. 그것은 또한 이 시대에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던  하층민의 성장과 중세사회의 전반적인
붕괴에 따르는 복잡한 현상들에서 유래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난의 직접적인 요인은 왕실의
계승과 종통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음모 및 노론 독제정치에 대한 여타 양반 계층의 오랜 불
만에서 야기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바닥에는 조선후기 사회의  성장과 함께 오래 누적되어
왔던 사회적인 모순과 민중들의 고통이 깔려 있었다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변혁 여건의 성숙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거사한 반군들은 관군이  출동하자
마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단시간에 진압되고 말았다. 이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나 의
식에 비해 반군의 준비와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들 조직의
가담자들 중에는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혼잡되어  있어 통일된 이념이나 목표를  설정하기도
어려웠다. 당시 소론계 주동자들이 내세웠던 경종 시해설과 복수의  의리는 어떻게 보면 하
층민들에게는 별로 절실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선전도 기만에 가까운 것이어서
민중들이 생사를 걸 만한 힘을 도출해낼 수 없었다.
  결국 당시의 조정은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효율적이고 강력한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중앙정부는 지배계층의 보수적  봉건윤리와 비교적
잘 관리된 국가 조직, 그리고 신속한 대응으로 무난히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이는  아직
도 기층사회의 의식이나 실제의 역량이 무장봉기로 사회의 변혁을 가능하게 할 만큼 성장하
지 못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반대로 기성의 보수적 이념이나 사회체제가 당시까지도 완강하
게 유지되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