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서북지방 최대의 민중항쟁 - 홍경래의 난과 여러 민란들(1)

구름위 2013. 6. 19.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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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세기


  조선후기 순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인 19세기는 저항의 시대, 민란의 시대로 불릴 만큼 민
중의 사회적 역할이 컸다. 조선왕조를 유지해왔던 유교적 봉건체제는 민중에 의해서 끊임없
이 도전을 받았으나, 당시의 지배층은 사회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과감한 개혁보다는 일시
적인 미봉책으로 구체제를 고수하고자 하였다.
  민중의 움직임은 18세기인 영조, 정조 시대에도 있었지만, 이들이 조직화되어 변란이나 민
란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19세기 초기부터였다. 1800년 6월 28일에 남인들을 등용하여 변화
의 시대에 맞게 대책을 준비해오던 정조가 갑자기 서거하고,  11세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할머니인 정순대비가 수렴청정으로 왕권을 대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조선의 19세기
는 그 벽두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정순대비는 영조의 두번째 왕비로서 경주 김씨이다. 그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그의 친
정 인물들과 영조대의 집권세력이었던 벽파와 결탁하여 정조대의 집권세력이었던 시파를 몰
아내었다. 이 과정에서 정조 때에 등장하여 활동하던 남인들이  천주교 박해에 연루되어 관
직에서 몰려나고 죽임을 당하였다. 이가환과 정약종은 옥사당하였고,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
는 전라도 지방으로 귀양갔다. 그리고 많은 천주교도들이 사형당하였다.
  그런데 1802년에 시파였던 김조순의 딸이 순조와  결혼하고, 1804년에는 정순대비의 수렴
청정이 끝나게 되자 다시 시파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왕은  아직도 어리고 정치에
미숙하였으므로, 시파의 중심이었던 김조순 등 안동 김씨 일가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
때부터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었고, 그 이전인 1801년에는  왕실이나 관청 소유의 공
노비들이 해방되었다. 순조대에는 가뭄과 홍수 등 천재지변이 자주 발생하였고 전염병이 크
게 번져 백성들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였다. 이 때문에 도처에서 크고 작은 민란들이 끊임없
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민란이나 반란들은 심정의 문란 등 조선후기의 누적된 사회 모순 위에 관직을 사
고 팔던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촉발된 것이었다. 과거시험의  부정부패로 가난한
선비들은 과거에 합격하기도 어려웠고, 또 어렵게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하더라도 벼슬을 얻
기가 어려웠다. 문벌을 통한 굵은 줄이 있거나 수천 수만  냥의 뇌물을 쓰지 않으면 벼슬하
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던 것이다. 이 때문에  가난한 선비들은 중앙권력에 참
여할 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얻을 수 없었고, 대다수는 향반이나 잔반으로 전락하여 명맥을
유지하거나 경제적 기반을 잃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과객의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지식
인들의 불만은 커지게 되었고, 그들의 선동에 의하여 사회적 불안도 고조되어갔다.
  반면 매관매직으로 벼슬을 얻은 관리들은  갖은 방법으로 부정부패를 자행하고  민중들을
착취하는 데 핏발을 세웠다. 투자한 자금을 회수하고 더 좋은 벼슬을 얻기 위하여 권세가들
에게 더 많은 뇌물을 바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주로  전세나, 군역, 환곡의 행정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백성들에 대한 착취는 그들의 저항의식을  고취하였고, 자포자기적인 난동을 유발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당시 농민을  비롯한 일반민들의 체제에 대한 도전은  더욱
격렬해져갔다. 이같은 사회적 추세에 대하여 다산 정약용은  "만일의 상황이 발생하여 백성
들이 작당하여 변란을 일으키면 그 누가 막을 것인가?"라고 걱정할 정도였다. 한 예언처럼
19세기가 시작되면서 민중들의 동요는 시작되었고, 그것은 한 세기가  끝날 때까지 내내 계
속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1811년의 관서지방을 뒤흔든 대대적인 반란, 즉 홍경래 난, 1862년
의 진주민란을 비롯한 농민항쟁,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었다.
  이 장에서는 19세기 초기의 대표적인 '변란'이었던 홍경래 난과 그에  앞서 일어났던  여
러 차례의 작은 '민란'들을 살펴보면서 '저항의 세기'의 문을 열어본다.

인동에서 일어난 변란


  유학자 장시경의 도전


  1800년 8월 15일 경상도 인동의 유학자였던 장시경 형제들이 몇몇 마을의 농민들 수십 명
을 동원하여 인동 관아를 습격하려다가 실패하고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비록 제
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소규모의 변란이었지만, 19세기의 문을 여는 민중들의  몸부림이었다.
이 변란은 좌절과 불만에 가득했던 농촌 지식인들과 거기에 동조했던 농민들이 합작하여 일
으킨 전형적인 소요사태였다.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갑자기  서거하고 11세 어린 나이의  순조가 즉위하였다. 정조는
그가 급서하기 한 달 전인 1800년 5월에 탕평정책을 강조하고 남인을 등용하려는 의지가 담
긴 하교를 내렸다. 이에 오랜 동안 정권을 잡아왔던 노론들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
었다. 그런 후 한달 만에 정조는 갑자기 서거하였다. 이러한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일부
남인들 사이에서 그가 독살당했을 것이라는 의문을 제기하게하였다.
  영남지방의 명망 있는 사림으로서 이러한 소문에 자극을 받은 사람이 바로 인동의 장시경
이었다. 장시경은 인조 때의  대학자였던 여현 장현광(1554-1637)의  직계 후손으로서 남인
계열의 선비였다. 명문가의 후예로서 글 읽는 것을 일삼고 바깥 사람과의 접근도 많지 않았
다. 장시경은 (주역)을 많이 읽었으므로 괘를 푸는 방법을 대강  알고 있었다. 그는 또 천문
을 공부하여 28수의 별자리를 보고 다가오는 운세를 알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는 평상시 점
을 치면 반드시 그 상을 해석하여 써서 상자 속에 보관하여 두었다 한다.
  이 난의 동기와 경위에 대하여는  상반되는 두 가지 기록이 전하고  있다. 먼저 인동부사
이갑회가 조정에 보고한 공식문서에 기록된 난의 경위는 아래와 같다.
  장시경은 7월 20일경에 서울의 국상 소식과 유언비어를 듣고 의심을 품은 것으로 보이며,
7월 그믐께는 동생 장시호의 아내에게 쌀 30되와 명태 30마리를 준비하게 하고, 또 8월 9일
에는 술을 빚게 했는데, 그 용도를  알리지 않았다. 이때는 정조가 죽고 대비가  수렴청정을
시작한 지 1개월이 채 안된 시기로서, 정치권에서는 노론이 득세하고 남인이 밀려난 상황이
었다. 장시경의 목표는 우선 인동 관아로 돌입해서 수령을  결박하고 차차로 전진하여 성루
로 올라간 다음, 노론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좋은 벼슬을 차지하겠다는 것이었다.
  8월 15일 저녁에 장시경은 그의  노비 이영태에게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으게 하여, 술을
주면서 나누어 마시게 하고 부근 묘향산 아래에 있는 공터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말하기
를,
  "지금 국가에서 임금님의 약을 과도하게 써서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당하게 되
었다. 어린 세자가 왕위를 계승하고 노론이 득세하게 되자  남인은 남김없이 쫓겨났으며 민
생은 날로 고달프게 되었다. 이렇게 국세가 외롭게 되었는데  나와 너희들이 어떻게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봉기를 선동하였다. 그는 자신이 주역을 점친 결과, 근래에 반드시 난리가 있게 될
것이라 하고, 그러므로 군대를 일으켜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기 위하여  먼저
관아로 가서 본 고을의 수령을 결박하고, 계속 나아가  선산과 상주를 점령하고 서울에까지
육박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그는 참가한 무리들에게 상으로 돈 1백 냥씩을 지급하기로 약속
하였다. 이 때 모인 인원은 약 20명 내외였고 그 중에는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어쩔 수
없이 따라갔다.
  장시경은 이들을 데리고 인근 각암촌으로 가서 무리  8명을 불러모았고, 다시 도토곡으로
가서 20인을 더 모았다. 그의 아들 장현경이 10여 명을 데리고 뒤따라왔다. 장시경이 이들을
데리고 출발하려 할 때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사촌 장시하와 친척인 장시정, 장시즙,  장시익
등이 소식을 듣고 와서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무리는 모두 61명이었는데, 열 명씩 대오
를 이루어 각기 울타리나무 한 개씩을 가지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친족인 장시강과 장시려는 이 난을 중지시키려고 뒤쫓아갔으나  장시경은
이미 먼저 가버렸고, 장현경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탈락하는 자를 막고 있었다. 장시려  등이
"도망하여 흩어지면 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고 소리치자,  마을의 장정들이 일
제히 도망쳐 흩어지고 앞에 있던 수십 인은 함께 관아  정문 밖에까지 갔다. 그때는 새벽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장시경 등 4인이 먼저 나아가 관아의 문을 두드리면서, 사촌이 남에게 맞아죽었으므로 관
가에 고발하려 한다고 핑계하고, 문을 열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문지기가 완강히  거
부하고 들여보내지 않았다. 서로 실랑이를 하는 즈음에 한 무리가 문 곁의 담장을 몽둥이로
뚫어 흙과 돌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고 때는 이미 새벽이 되었다. 뒤따라오던 마을 사람들은
당황하고 겁이 나서 도망가버렸다. 일이 실패한 것을 깨달은  장시경 형제는 도망가다가 낭
떠러지에서 떨어져 자살하였는데, 위의 두 형제는 죽고 장시호만 살아남았다.

다산이 들은 이야기


  그러나 다산 정약용이 전하는 이 사건이  동기나 진행 과정은 변란이라고 하기도  어려울
만큼 판이하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원래 장시경과 부사 이갑회의 아버지는 먼  친척간으로서 가끔 관아에서 만나 세상  일을
이야기하기도 하는 처지였다. 세상의 이야기들 중에는 당시의 정승이 의원 심인을 추천하여
정조의 병을 치료하였는데, 독약을 바쳐서 임금이 죽게 되었다는 말도 있었다. 이 때 장시경
은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갑회는 국상의 공식 애도 기간(25일간 일체의  정사를 중지하고 애도함)이 끝나
기도 전에 부친의 회갑연을 열고 기생을 불러 가무를  질기면서 장시경 부자를 초청하였다.
이에 장시경이 심부름 온 아전에게 "임금이 돌아가신 이런  때에 잔치를 베풀다니, 세상 되
어가는 꼬락서니를 알겠다"고 비난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이갑회는 자신이 탄핵될 것을
염려하여 장시경을 모함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감영에 긴급 보고를 올려 장시경의 장현경이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고 조정의 악당들을 제거하려고 반란을 일으킬 기미가 있다고 고발
하였다. 보고를 들은 관찰사였던 신기는 그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하였다. 이갑회는 장교와 나
졸 200여 명을 동원하여 횃불을 들고 장시경의 집을  포위하였다. 장시경 부자는 영문도 모
르고 도망치다가 장시경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고  장현경은 달아나버렸다. 장시경의 친척
들과 마을 사람들 수십 명은 잡혀 갇히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안핵사 이서구를 파견하여 사건을 처리하게  하였다. 장시경의 집에서 압수한
증거라고는 점치는 책 한 권과 점괘를 풀이한 종이 한 장이었다. 거기에는 '건마서분'이라고
씌여 있었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안핵사 이서구는 비교적 온건하게 사건을
처리하여 잡힌 사람들을 대부분 풀어주었다. 그래서 영남에서는 일을 잘 처리하였다고 안핵
사를 칭송하기까지 하였다 한다. 다만  도망간 장현경의 아내와 자녀들은  전라도 신지도로
귀양을 보내었다. 거기서 그의 가족은 한 군졸에게 핍박을 받다가 아내와 큰딸이 바다에 투
신자살하였다. 그때 마침 다산이 강진에 귀양가 있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 내막을 기록한 것
이다.


  결과와 영향


  이 사건의 동기나 내막에 대하여는 이와 같이 상반되는 두  가지 기록이 있다. 그러나 두
가지 기록이 모두 미심쩍은 면이  없지 않다. 부사 이갑회의 보고는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난의 동기가 불분명하고 또 앞뒤의  정황을 살펴보면 명문가의 학자였
던 장시경이 그렇게 무모하고 어리석은 난동을 일으켰을지 의심스럽다. 반면 다산의 기록은
순전히 전해들은 이야기로서 그 사건의 동기는 설득력 있게  들리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결
여되어 전모를 알 수 없다. 위의 두 기록을 종합해보면  장시경은 단순히 당시의 정국에 대
한 불만을 토로했을 뿐만 아니라  모종의 행동을 기도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상민들
중에서 연루된 사람들이 매우 많았고, 그의 아들 장현경이 도망한 것도 미심쩍기 때문이다.
  어떻든 이 사건은 장시경 등의 주동과 부추김으로 농민들이 참여하게 된  소요사건으로서
매우 짧은 기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안핵사 이서구의 선처로  농민들은 불문에 부쳐지고 장
시경 일가만이 처벌됨으로써 사건은 큰  물의 없이 처리되었다. 살아서  도망갔던 장현경은
10여 년 뒤에 경원 월명사에 숨어 있다가 붙잡혔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인동부는 강등되어
현으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인동의 소요사건 이후에도 경상도에서는 괘서  사건이 뒤를 이었다. 다음  해 8월 하동의
두치장에 대자보를 붙이는 괘서의 변이 있었는데, 여기에 관련된 사람은 이진화, 정양선, 이
방실, 정철손 등이었다.
  이 괘서는 읍과의 거리가 5리쯤 되는 시장 가에 걸려  있었는데, 흰 명주를 한 자 남짓하
게 대나무 장대에 종이 끈으로  꿰뚫어서 매단 것이었다. 명주  가운데에는 "문무의 재주가
있어도 권세가 없어 실업한 자는 나의 고취에 응하고 나의  창의에 따르라. 정승이 될 만한
자는 정승을 시킬 것이고, 장수가 될 만한 자는 장수를 시킬 것이며, 가난한 자는  풍족하게
해주고 두려워하는 자는 숨겨준다"라고 하였다.
  창원 지방에도 흉서를 게시한 곳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알려져있지 않다. 그리고  의령에
서도 괘서사건이 발생하여 집권층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아직 농민들의 조직적
인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다.

단천과 북청의 민란


  1808년(순조 8)에는 함경도의 단천과 북청에서 백성들이 소요를 일으켰다. 단천부의  향인
김형대 등은 좌수를 쫓아내고 관문에 들어간 다음, 지팡이를  가지고 관아에 올라가서 해당
수령을 쫓아내기까지 하였다. 또 북청부에서는 아전 김치정 등이  관장을 모해하고 떼를 지
어 향청에 들어가서 아관을 불로  지졌다. 북청부사심후진은 모욕을 받고 비웃음을  샀으며,
단천부사 김석형은 겁을 먹고 피하여 숨어버린 것이다.


  단천의 소요


  1808년 1월 3일 함경도 단천에서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다. 먼저 부사의  사주를 받은 한
무리의 고을 사람들이 향청에 모여 민폐를 의논하던 중, 지나간 일들을 들추면서 좌수 심지
원을 몰아내고 말았다. 그러자 좌수의  편을 들고 나선 수백 명의  고을 사람들이 몰려들어
다툼이 일어났다. 그들은 관아 건물에 올라가 부사 김석형을 몰아내었다. 부사는 처음에  서
재에 숨어 있다가 다시 장창으로 도망하여 5일 동안이나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그 후에 돌아온 부사는 이 사건을 향전(향권의 장악을 둘러싼 싸움)이라고 규정하고, 사건
을 주동한 김형대 등을 묶어서 옥에 가두었다.
  이 사건은 실상 단천부사였던 김석형이 향권을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향회를 구실로  당시
향청의 책임자였던 좌수 심지원을 몰아내려고 한 데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기존의 향인층들이 백성들을 동원하여 부사를 축출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중앙정부의 대행
자라고 할 수 있는 수령과 토착 양반  세력인 향청 사이에 자주 일어나던 수령권과 향권의
한 대립 양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이면에는 더 깊은 원인이 있었다. 그 해 6월 17일에 함경도관찰사 조윤
대가 올린 조사 보고서에는 단천부사 김석형의 탐학 불법한 죄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에 의하면, 김석형은 원래 탐욕이 많아  불법한 짓을 많이 저질렀는데, 각종 명목으로  불법
착취한 돈이 18,148냥, 은이 831냥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의  죄목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
은 향청의 임원인 좌수 향소 창고지기 중군(지방군 참모장)으로부터 천종(대대장급) 초관(중
대장급)에 이르기까지 모든 직책을 돈을  받고 팔았던 것이다. 또  나루에 운행하는 배들에
대하여는 상세를 부당하게 과외로 징수하였고, 광산에서는  소정의 세금을 무시하고 생산되
는 은을 빼앗다시피 하였다. 그는 수령으로 있으면서 부유한 농민이나 상인층, 또는  광업으
로 재산을 축적한 사람들로부터 심한 착취를 해왔던 것이다.
  김형대 등이 향인층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단천의 작변은 이런 부사의 수탈이 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북청 아전들의 봉기


  한편 북청에서는 아전인 전치정 등이 무리를 지어 향청에 들어가 그 책임자인 좌수와 풍
헌을 불로 지지고 부사 심후진을 모해하려 한 사건이 일어났다.
  부사 심후진은 북청에 부임한 후 창고 곡식 500여 석과 대동별수전 1만여 냥이 민간에 대
출된 후 오래도록 걷히지 않아 떼어먹힌 지경으로 된 채 그때까지 덮어두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향청의 우두머리인 좌수 김원후와 창고감독 이인혁을  시켜 그 수를 조사케
하고 떼인 곡식과 돈을 거두어들이고자 하였다. 그러자 이 곡식과 돈을 가지고 농간을 부리
며 이익을 보던 아전들이 원한을 품게 되었다.
  1808년 3월 5일 백여 명  가까운 아전들이 이안(아전명부)에서 이름을  지우고 떼를 지어
향청에 돌입하였다. 그들은 좌수 김원후와 창고 감독 이인혁의  옷을 벗겨 구타하고 불태워
죽이려고 하였다. 그리고 부사 심후진까지 해치려고 하였다. 이것은 곧 부세 징수와 관리 과
정에서 농간을 부리던 아전들과 이를 시정하려는 체 명분을 내세우면서 또 다른 이권을 챙
기려던 수령 사이에서 일어난 분쟁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수령의 권한을 행사하려는 데 대
한 고을 사람들의 반발이라는 점에서 단천의 소요와 공통성을 가진 사건이었다.


  함경도 변란의 성격


  비변사에서는 단천의 백성들이 관아를 부수고 관장을 쫓아낸 일과 북청에서 좌수를  불로
지지고 고을 수령을 해치려던 사건을 변란의 일종으로 보고 모두  주동자들을 효시(목을 베
어 매달아 사람들에게 보이는 형벌)하여 사나운 불한당들을 징계하도록 처분하었다. 그들이
비록 무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만약 무기를 들었다면 바로 반란이나 다를 바 없었다는 이유
에서였다.
  1808년 함경도 단천과 북청에서의 변란은 그 내용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수령들의 향촌 침탈에 대한 저항이었다. 조선후기 함경도나 평안도 지방은 삼남지방에 비하
여 토착 양반들이 세력이 크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들의 권세는 절대
적이었고 그들을 견제할 지방 세력이 확고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삼남지방과는 달리 지방
사회의 구심점이 되는 향회나 향소에 참여하는 향임들은 대체로 수령의 명령에 잘 복종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고을 사람들이나 아전들이 향회나 좌수 향소 등을 공격하는 경우, 그
들의 최종적 저항 목표는 이들에 대해 실질적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던 수령이었다.
  "난민들이 세력만 강하였다면 그 저항의  목표가 수령을 넘어서 곧바로 감사와  병사에게
미쳤을 것이다"라고 표현한 재상 김재찬의 우려는 바로 그러한 형편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
의 우려는 바로 홍경래의 난에서 중앙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현실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