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서북지방 최대의 민중항쟁 - 홍경래의 난과 여러 민란들(3)

구름위 2013. 6. 19. 16:49
728x90

봉기가 시작되다


  순조 11년 12월에 이르러 주동자들은  군사를 더욱 활발히 모집하였다.  그리고 우군칙은
서울 물주의 자금을 받아 운산 촉대봉에 금광을 연다는  소문을 내어 광부들을 모집하였다.
이때 우군칙은 이희저와 박광유 등의 상인들에게서  나온 자금을 바탕으로 1냥 내지  3냥의
선금을 주어 사람들을 다복동으로 불러들였다. 봉기군의 일선 졸병들은 이들 광산 노동자층
으로 구성되었다. 봉기군의 깃발을 그리기  위한 병풍수리공, 무기를 만들기 위한  대장장이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도 포섭되었다. 걸인을 비롯, 소상인 마부 등 다양한 업종과 향임층
도 참가하였다. 가산 박천 지방의  땅 없는 농민이나 품삯  노동자들은 "가난하거나 굶주린
자들은 오라"는 말에 솔깃하여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봉기 날짜는 당초 12월 20일로  잡았다. 그들은 출병에 앞서 12월  15일에 사람을 평양에
보내 대동관을 폭파하고 그곳에서 소요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폭파장치가 물에 젖어
발화시간이 늦어지고 담당자도 도망하여, 그 계획은 단순 화재에 그치고 말았다.
  17일에는 여러 지역의 반군들이 다복동으로 모여들어 크게 소란하게 되었다. 미리 약속을
맺은 사람들이 이때 구성, 태천, 그리고 멀리  황해도 지역에서부터 다복동으로 모여들었다.
이렇게 소란한 사태는 곧 수령에게 포착되었다. 선천부사 김익순은  18일 아침 민간인 수십
가구가 일시에 도주하는 것을 보고 수상히 여겨 이들을 잡아들여 문초하였다. 그 결과 곽산
의 김창시, 박성신 등이 결당하여  난리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희저, 김창순
등의 이름도 거명되었다. 곧 이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일이 이렇게 다급하게 되자 홍
경래 등은 거사일을 이틀 앞당겨 12월 18일에 봉기하게 되었다.
  봉기군은 가산, 박천, 안주 방향의 남쪽 방향과 정주,  곽산, 선천, 철산을 거쳐 의주로 가
는 북쪽 방향의 두 갈래로  나누어 공략하기로 하였다. 남진군의 지휘는  홍경래와 그 밑의
선봉장 홍총각, 모사 우군칙, 후군장 윤후검이 주도하였다.  정주에서 의주로 향하는 북진군
의 지휘부는 부원수 김사용, 선봉장 이제초, 모사 김창시, 영장 김희련, 김국범, 이성항, 한처
갑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도총 이희저는 남북진군의 군량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홍경래가 이끈 남진군은 12월 19일 새벽 3시경에 가산  삼교에 이르렀다. 고을 아전 이맹
억과 김응석 등이 내응하여 봉기군은 마을로 들어갔다. 때마침 민가에 일어난 화재와 이 불
을 끄라는 나팔소리로 어수선하였다.
  가산군수 정시는 난리가 일어난다고 민심이 흉흉하고 군내가 떠들썩하며 백성들이 피난가
려 하자, 홀로 말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을 타이르며 피난을 중지시키고 있었다.  남진
군 선봉장 홍총각은 봉기군 50여 명을 이끌고 관아로  들이닥쳤다. 이들은 정시에게 수령의
인신과 군지휘 표신인 부절 및 보화를 내놓고 항복문서를  쓰라고 요구하였다. 정시는 목숨
이 다하기 전에는 항복할 수 없다고 버티고 그들의 대역부도함을 꾸짖다가 그 자리에서 칼
에 맞아 죽었다. 그의 아버지도 이 때 함께 죽었다. 정시 부자는 난이 진압된 후 그들의 의
연한 태도와 충성으로 포상되었다.
  남진군은 이렇게 쉽게 입성하여 윤원섭을 선천 주관장에 임명하여 지키게 하였다. 봉기군
은 관아이 무기를 확보하고 창고의 곡식을 풀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민심을 얻고 군
사를 더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와 동시에 봉기군은 각 지역의 수령들에게 격문을 보내 항복
하고 봉기군에 가담하라고 위협하였다.  이때 남진군의 군사력은  중간지휘자였던 기마병이
30-40명, 보병 군졸은 100-150명이었다. 봉기군의  숫자는 곧 늘어나서 300여  명이 되었다.
그들은 19일 저녁 박천, 진두로 진격하여 다음날 새벽에는 박천읍에 도달하였다. 박천은  조
그만 저항도 없이 함락되었다. 군수 임성고는 처자와 노모를  버려둔 채 서운사로 도망하여
은신하다가, 노모의 구금 소식을 듣고는 봉기군에게 항복하였다.
  박천을 점령한 봉기군은 영변을 공격하고 이어 안주를 함락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
다. 그런데 박천을 점령한 후 직접 안주를 공격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즉 안주병영의 집
사였던 김대린과 이인배 등이 안주를 먼저 치자는 건의를 한 것이다. 도원수 홍경래가 이를
승낙하려 하였으나, 모사 우군칙이 원래의 계획대로 영변을 친 후에 안주를 칠 것을 고집하
였다. 안주, 영변의 진공을 앞두고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김대린 등은 그들의 의견이 받아
들여지지 않자 홍경래를 죽여 공을 세우려고 하였다. 그래서 김대린이 갑자기 칼을 뽑아 휘
둘러 쳤다. 홍경래는 민첩하게 피하여 목숨은 건졌으나 이마에 상처를 입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무경 등 안주 병영에서 가담한 다른 인물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지도
부는 홍경래의 회복을 기다리기  위해 21일에 가산 다복동으로  돌아갔고, 병졸들은 대정강
가에 모여 있게 되었다. 홍경래가 부상을  당해 시일을 끌게 되자 진격에 차질이  빚어졌고,
이후 봉기군의 작전에 커다란 착오를 가져오게 하였다.
  한편 북진군을 이끈 김사용은 선천부사  김익순의 체포령으로 붙잡힌 박성신을  구출하고
곽산으로 향하였다. 곽산군수 이영식은 벽장 속에 숨어 있다가 잡혀 옥에 갇혔고, 그의 아우
는 칼에 맞아 죽었다. 이영식은 한 장교의 도움으로 8세 된 아들을 업고 야반도주하다가 추
격을 받게 되자 중간에 아들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김사용은 이영식이 버리고 간 인신과 병
부를 압수하고, 박성신을 곽산의 주관장으로 삼았다. 이어 김사용의 봉기군은 능한산성을 공
격하고 정주성으로 향하였다.
  정주성에서는 12월 16일에 벌써 난리가 난다고 흉흉하였다. 18일에는 좌수 김이천, 수성중
군 이성천, 독진장군 홍하진 등과 기타 아전들이 모여 내응을 준비하였다. 봉기군은  정주성
에서도 무혈입성하였고, 목사 이근주는 도망하여 향교로 피신하였으나, 곧 잡혀서 인신과 병
부를 빼앗겼다. 김사용은 최이륜을 정주 주관장으로 임명하고  각지에서 모여든 군병 500명
가량을 봉기군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당시  지방사회의 지식층이며 실력자라고 할  수 있는
좌수, 풍헌, 별감 등의 향임과, 별장, 천총, 파총, 별무사 등의 군사 계층을  흡수하여 봉기군
의 지도부를 편성하였다. 이들은 경제적으로는 중, 소 부농층 또는 경영형 부농층들이었다.
  24일 아침에 김사용의 봉기군은 정주를 떠나 곽산을 거쳐  그날 저녁 선천에 입성하였다.
검산산성으로 피신하였던 선천부사 김익순은 25일 봉기군에  투항하였다. 이후 그는 봉기군
의 참모가 되었다가 틈을 보아 도망쳐 나갔다. 김익순은 당시이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 출신
이었으나, 난이 평정된 후 비겁한 죄로 처형되었고 가족들도 모두 연좌되었다. 그는 흔히 장
렬하게 죽은 정시와 대비되었다. 그의 손자 김병연은 연좌를  피해 도망하였다가 후에 조부
의 불명예스러운 사실을 알게 되자, 세상에 뜻을 버리고  방랑하면서 시국을 풍자하는 시를
많이 남기게 되었다고 한다. 후세에 사람들이 그를 그를 김삿갓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봉기군은 남진군, 북진군으로  나뉘어 군사를 일으킨 지  열흘만에 관군의 별다른
저항없이 가산, 곽산, 정주, 선천, 철산 등 청천강  이북 10여 개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것은
각지에서 내응세력이 적극적으로 호응한 때문에 쉽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때 각처에서 내
응한 자들은 주로 좌수, 별감, 풍헌 등의 향임과 별장, 천총, 파총, 별무사 등 군직을 가지고
있었던 부호들이었다. 이들은 부농이나 상인들로서 대부분 돈을 내고 향임 계층으로 올라간
자들이 많았다. 봉기군은 곧 관아의  곡식을 방출하여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한편,
민폐를 끼치지 않고 엄한 군율에 따라 행동하였으므로 민심을 얻었다.

정부군의 반격과 송림전투의 패배


  한편 중앙정부는 12월 20일에 평안병사 이해우의 밀계를 받고 18일의 가산봉기 소식에 접
하게 되었다. 평안감사 이만수는  22일에야 순안현 장십부군 2초(1초는  1개 중대 규모로서
약 120명 내외)를 발동하여 안주를  구원하게 하였다. 이때는 이미  가산, 박천, 곽산, 정주,
희천 등 여러 고을이 차례로 함락된 뒤였다.
  사태의 진전에 경악한 중앙정부는 신홍주를 정주목사로,  정주성을 가산군수로 각각 임명
하고, 이들에게 편의대로 접전하고 모병할 것을 명령하였다. 23일에는 운산군수 한상묵을 파
직하고 백경해로 교체하고, 곽산군수 이영식을 정경행으로 바꾸어 임명하였다. 이때  정경행
은 벌써 봉기군에 가담하고 있었으나, 중앙정부에서는 아직 그런  사실도 모르고 있었던 것
이다. 또 정주목사 신홍주는 하루만에 다시 영변부사로 임명하는  등 혼돈이 계속되고 있었
다. 12월 27일까지 열흘도 채 안되는 사이에 이미 가산,  박천, 곽산, 정주, 희천, 선천, 철산
등 7개 지역이 함락되었다.
  12월 24일, 정부는 금위영 안에 양서순무영을 설치하고, 이요헌을 양서순무사로  임명하여
반란의 진압의 전권을 부여하였다. 순무사 이요현은 27일에 출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안주
에서 봉기군이 주춤한 것을 알고는 순무사의  출동은 뒤로 미루고 우선 훈련도감과  금위영
개성부 등의 보군과 마군 일부를 차출하여 서북 지방에 출정토록 하엿다. 그 동안 서울에서
는 강도들이 부잣집을 습격하는 등 민심이  매우 흉흉하여 왕은 백성들이 동요되지  말도록
전국에 유시를 내렸다.
  12월 28일 평안감사는 평양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는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관군은 비로소
전열을 가다듬고 봉기군과 본격적인 전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2월 29일 아침, 관군과  봉
기군이 박천의 송림에서 대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송림에는 홍총각의 부대 300여 명이 이미  24일부터 진을 치고 있었고, 26일에는  홍경래,
김창시, 우군칙 등이 500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합류하였다. 봉기군은 각지의 농민들이 합세
하여 천여 명 이상이 모여들었다. 한편 관군은 평안도 일대의  군졸을 모아 2000여 명의 병
력을 이루었으나, 그중 전투력을 갖춘 것은 약 9초의 병력이었다.
  봉기군은 세 갈래로 진을 이루어 관군을 맞아 싸웠다. 그중 홍총각이 이끄는 선봉대는 병
영 우후 이해승이 이끄는 진압군의 본대를 공격하였다. 평안병사 이해우는 백상루에 올라서
서 양군의 전투를 조감하면서 작전을 지휘하였다. 봉기군은 중앙돌파에만 주력한 나머지 전
체 군사의 2/3가 관군의 중앙을 대적하고 나머지가 우익군을 공략하는  결과가 되어 관군의
좌익에 대하여는 방치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병사 이해우는 관군의 중앙군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곽산 전군수 이영식으로 하여금 군
졸 천여 명을 이끌고 출격한  봉기군의 후방을 치게 하였다. 이에  봉기군의 일부는 꼬리를
거두고 후퇴하게 되었다. 한편 선봉장 홍총각의 용맹으로 관군의  선봉이 의기를 잃고 후퇴
하려 하자, 관군의 좌영장 오치수가 기세를 돋우며 봉기군을 진격하며 압박하였다. 이에  봉
기군의 기병 3, 4명이 총을  맞고 말에서 떨어지자 봉기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전열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 전투에서 봉기군은 크게 패하여 머리를  베인 자가 수백명이고 생
포된 자는 30여 명이나 되었다.
  봉기군이 이 전투에서 패한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관군과 봉기군은  비슷한
병력을 가지고 평야에서 전투를 벌인 점이다. 겨울이어서 은폐할  것이 없는 평야에서의 전
투는 활과 총으로 무장한 숙련된 관군에게 크게 유리하였던 것이다. 둘째, 봉기군은  중앙돌
파에만 주력한 나머지 전력을 효율적으로 배치하지 못하였다. 셋째, 봉기군의 지휘부는 평야
에 있었고, 관군의 지휘부는 언덕 위에 있었다. 이 때문에 관군은 전체적인 전황을 파악하면
서 지휘하는 반면, 봉기군의 작전지휘는 매우 국지적이었다. 이렇게 봉기군은 전술 전략면에
서 관군에 비하여 훨씬 미숙하였던 것이다. 송림전투는 봉기군에게 재기불능의 치명적인 타
격이 되었다.
  관군은 송림을 휩쓸어 봉기군의 근거지를 불태우고  진두에까지 봉기군을 추격하였다. 관
군의 한 부대는 가산 다복동에까지 쳐들어가서 그곳 근거지도 불태웠고 이어 박천을 수복하
였다. 관군이 밀고들어가는 곳마다 불지르지  않은 곳이 없었고, 남녀노소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도륙하였다. 이른바 초토전술로 봉기군의 근거를 없애는 전술이었다. 이때 관군의 초토
전술은 정부 안에서도 두고두고 논란이 될 정도로 극심하였다.
  이 같은 관군의 초토전술 때문에 홍경래의 남진군이 정주성으로 후퇴할 때 가산과 박천의
남녀노소 백성들이 많이 따라 들어가게 되었다. 홍경래를 비롯한 봉기군 지휘부는 패주하면
서 경황이 없는 중에도 봉기에 가담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 농민들을 적극적으로 정주에
끌고들어갔다. 관군의 학살에서 그들을 구하고 항거의 기반을 튼튼히 하려는 의도였다.
  한편 600-700명 규모의 북진군은  구성 공략을 준비하던 중에  송림 본대의 패전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자 12월 30일에서 다음해 정월 초하루 사이에 군사들은 대부분  흩어졌고,
그 주동층과 남은 병력은 정주성으로  들어가 합세하였다. 태천을 점령하고  있던 봉기군은
영변 관군의 습격을 받아 해산되었고, 곽산에서도 1월 8일 진압군의 공격으로 패하였다.  곽
산을 지키던 유진장 박성신은 패주하여 선천으로 가서 정부군의  북진을 알렸다. 1월 9일에
는 정주성에서 김창시가 진압군과 싸울 것을 건의하여, 그곳에  있던 이제초가 기병과 보병
천여 명을 이끌고 곽산으로 내려와  시송야에서 싸웠으나 역시 패하고  말았다. 관군은 1월
15일에 쉽게 선천을 점령하였다.
  부원수 김사용이 이끄는 북진군은 남진군의 패전 소식에 접하자 정주 이북을 완전히 석권
하기 위해 1월 초하루 이후  작전을 개시하였다. 북진군은 힘들이지  않고 용천에 입성하고
이어 의주 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의주 진공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관군의  계속되
는 공격으로 북진군 지휘부는 해체되고 말았다.
  김사용은 용천 지방에서 진사급 중간  실력자들을 종사관으로 임명하여 이들을  회유하였
다. 그리고 그 아래 이임, 면임, 풍헌 들로 하여금 농민들 중에서 군대를 뽑아올리게 하였다.
이 때문에 하층 농민들은 자발적으로 봉기군에게 가담하지 못하고 중간 향반층을 통하여 소
집되었다. 이렇게 하층 농민층을 실질적으로 파악하고  장악하는 것은 중간 향반층이었으므
로 이들을 통하여 병력을 소집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는 봉기군이 전열을 정비하는 데 약점
으로 작용하였다.

정주성에서 농성하다


  12월 29일 박천의 송림에서 관군에게 패하여 정주성으로 들어온 봉기군은 홍경래  이하의
지휘부를 정비하여 농성에 들어갔다. 정주성은 매우  견고하였고 군량이 풍부하게 비축되어
있었다. 홍경래는 김사용, 홍총각 등과  함께 서장대에 머물면서 대원수로서 총지휘를  하였
고, 성내의 일반 사무는 동헌에 기거하는 유진장 김이대가 맡아보았다. 농성에서 가장  중요
한 임무였던 성문의 수비는 김석하, 신덕관, 오용진, 이하유, 윤효검 등 장사들이 맡았다. 그
들은 진압군이 성에서 100보 밖에 있을 때는 활로 쏘고, 100보 안에 들어오면 총을 쏘며, 성
밑에 도달하면 돌을 던지는 전투법을 택하였다. 그들은 평상시에  성 밖에 복병을 배치하는
등, 관군의 공격에 적극적이고 조직적으로 대비하였다.
  진압군의 선발대는 1월 2일 정주에 도착하여 농성자들의 항보과 양반들의 의병을  권고하
였다. 5일에는 곽산군수 이여식, 우후 이해승, 함종부사 윤욱렬, 소모장 제경욱, 순천부사 이
유수, 순천군수 오치수 등이 이끄는  병력으로 정주성을 일차 공격하였다. 그러나  진압군은
봉기군의 반격을 받아 다수의 사상자를 내며 퇴각하였다.
  한편 박기풍이 이끄는 순무영 군사는 12월  27일 서울을 출발하여 1월 10일 안주를  거쳐
정주성에 도착하였다. 여기에 송림전에서 승리한 안주 관군도 합세하였다. 그리하여 11일에
정주성을 포위한 진압군의 숫자는 서울과 개성에서 동원된 천여 명과 안주 평양 및 인근지
역에서 동원된 군사들을 합하여 8천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진압군은 1월 16일 대포와 구름다리를 동원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봉기군은 응
전하지 않고 있다가 관군이 성에 접근하자 맹렬히 반격하였다.  봉기군의 전술에 말려든 관
군은 소모장 제경욱과 순무영 군관 김대택을 포함하여 21명의 사망자와 50여 명의 부상자를
내는 등 큰 타격을 입고 퇴각하였다. 이후에도 관군은  수차례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봉기군
에 패배하여 물러났다.
  봉기군의 농성전술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정비되었다.  진압군의 야습에 대비하여 횃불
을 밝히고 총을 쏘기도 하였고, 군악을 연주하여 기세를 돋우는 한편, 진압군의 사기를 떨어
뜨렸다. 그들은 장기농성에 대비하여 부유층들이 가지고 있던 곡식과 반찬을 징발하고 충분
한 우물을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얼마 동안은 진입군이 봉기군이 사기에 압도되어 있었다.
  정주성 내의 봉기군은 관군의 진격에 대비하여 성 밖  인가의 곡식을 실어들이고, 동남문
밖 수천호의 민가에 불을 질러  관군이 접근을 막았다. 이에 대해  진압군은 민간의 재물을
약탈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방화와 살인을 계속하였다. 각 진의 관병들은 마을을  횡행하
면서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여 군막 안에 쌓아두기도 하였고,  약탈시에 멋대로 행패를 부
리기도 하였다. 진압군들 중에는 무고한 자의 목을 잘라  전과를 과장하는 일까지 생겨나기
도 하였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이를 단속하는 금령을 거듭 내려야만 했고, 심한  경우에는
난동자를 효수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농성과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봉기군 지휘부는 '오랑캐 병력'이  구하러 올  것이
라고 선전하면서 민심을 이끌어갔다. 실제로 그들은 1월 말에 창성, 벽동 등지로 가서  원군
을 이끌어올 사람들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2월 3일 진압군은 병력을 총동원하고, 특별히 만든 사다리차 5대를 앞세워 총공격을 감행
하였다. 사다리차는 성을 내려다볼 정도로  높았다. 밖에는 두꺼운 널빤지를 대고  소가죽을
씌워서 그 위에 총수가 엎드려 있고 안에는 군졸들을 숨겼다. 이는 성에 육박하여 군졸들이
성을 넘게 하는 장치였다. 그러나 봉기군은 성루에 은신하여 총을  쏘는 데 비해 관군은 은
신처가 없이 노출되어 싸우는 형편이었다.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계속하여 싸웠으나 관군은
봉기군을 당할 수 없었다.
  이후에는 주로 봉기군이 선제공격을 하였다. 농성이  계속될수록 진압군도 초조해지게 되
었다. 봉기군의 입장에서는 식량이 줄어들고 보급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포위를 벗어나
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성 밖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활로 타개를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압군은 2월 25일 또 한번 전군을 동원하여 공격을 가하였으나 별로 성과
를 올리지 못하였다.
  3월에 들어오자 봉기군은 더욱 적극적이  되었다. 3월 8일에는 홍경래가  직접 천여 명을
이끌고 함종부사 윤욱렬과 의병장 허항의  부대를 불로 공격하여 사망  70명, 부상 137명의
피해를 입히고, 봉기군도 46명이 죽는 대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활로를 뚫을 수는 없었다. 3
월 20일에는 봉기군 1천여 명이 북문으로부터 공격하여 나왔다. 이때 관군은 군량을 나르기
위해 포구에 많이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대오가 허약하였다. 봉기군은 이 같은 형
편을 성 위에서 탐지하고서 목책을  부수고 돌격해들어갔다. 그리하여 의병장  허항과 관군
22명을 전사시키는 등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봉기군도 관군의  반격을 받아 48명의 사망자
를 내는 등 피해를 입었다. 홍총각과 엄계량은 22일 다시 공격하여 17명의 관군을 죽였으나,
봉기군도 69명이 전사하고 87명이 포로가 되었다가 처형당하였다.
  시일이 경과하면서 정주성 내의 사정은 점점 어려워갔다. 곡식이 떨어져 군병들에게 당초
하루 2되씩 주던 배급을 1되 5홉, 1되, 나중에는 6홉까지로  줄였다. 소나 돼지는 물론 나중
에는 말도 10여 필을 남기고는 거의 다 잡아먹었고, 횃불을  올리기 위해 성채의 집도 부수
지 않을 수 없었다. 3월 말에는 인구를 줄일 목적으로 두 차례에 걸쳐 노약자와 부녀자 227
명을 성 밖으로 내보냈다. 그런 가운데 이제초의 동생인  이제신을 중심으로 홍경래를 암살
하려는 시도가 있기도 하였지만, 전체적으로는 일사분란한 지휘체계가 유지되었다.
  4월에 들어서도 관군의 공격은 봉기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관군은 봉기군의 양식이 고갈된 약점을 이용하여 공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봉기군
은 관군의 공세에 대비하여 밤에는 한층더 많은 횃불을 성 주위에 밝히고 총소리와 함성이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4월 3일부터 관군은 서의 동북 모퉁이에 모래를 쌓아 성 높이에 육박하고 사방에서 성을
공격하는 한편, 북장대 쪽으로는 땅 밑을 파기 시작하였다. 양동작전을 써서 성을  폭파하려
는 것이었다. 굴착은 18일에 완료되었고, 인근 광산의 화약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화약  1800
근을 장전하였다. 드디어 4월 19일 새벽, 화약에 불을 댕기자 1시간 뒤에 굉음을 내면서  폭
발하였다. 성은 파괴되고, 진압군은 성 안으로 돌입하였다. 홍경래는 총에 맞아 전사하고, 홍
총각, 김이대, 윤언섭, 양시위 등은 사로잡혔다. 우군칙, 이희저, 최이륜 등은 난군에 섞여 달
아났으나 구성에서 체포되었다. 그들은 모두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농성에  참여했다
가 정주성에서 체포된 사람은 모두 2983명이었다. 이중 10세 이하의 소년 224명과 여자 842
명을 제외한 1917명은 23일에 모두 참수에 처해졌다.
  홍경래를 중심으로 한 서북지방의 민란은 이렇게 정주성에 고립된 채 병력의 수나 군비에
있어 몇 배 우세한 중앙군 지방군  민간의병의 진압군과 맞서 거의 4개월간 공방전을  펼쳤
다. 관군의 초토전술에 피해를 입은 이 지역의 대다수 농민들이 정주성에 들어가 저항에 가
담하였으며, 관군의 약탈에 피해를 입은 성 밖 농민들의 협조도 컸다. 정주성의 농성군은 주
로 박천과 가산 일대의 농민들이었다.
  이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조선사회에 큰 타격을 가하여 봉건사회체제이 붕괴
를 가속화시켰다. 홍경래는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존재로 민간이 의식 속에 남아 있
었고, 이 난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광범한 소농, 빈민층은 이후 그후 임술민란에서 오
히려 적극적인 주도층으로 성장하였다

 

항쟁의 역사적 의의


  홍경래 난은 근대 초에 일어난 민중항쟁의 선구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전반기이 소요들
은 대부분 이를 모형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난에서는 홍경래를 비롯한 '저항지식인'들과 장사층이 봉기를 조직하고 이끌었다. 이들
은 경제 형편과 사회적 처지에 있어서 농민과 별로 다를  바 없었으므로, 그들은 의식과 행
동 면에서 농민들과 강한 친화력을 가졌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중간 실력자들이 농민들 중
에서 군대를 뽑아올리게 하였으므로, 농민들은 자발적으로  봉기군에 가담하지 못하고 중간
향반층을 통해 참여하였다. 봉기군의 전세가  급격하게 약화된 것도 이런  주력부대가 가진
취약성에도 원인이 있다고 보겠다. 빈민층의 자발적인 참여는 이후 민란의 단계로 발전되었
다.
  이 난은 정치적으로 보면 신흥 상공업세력과 기존 정치권력에서 배제된 몰락양반의  연합
에 의해 추진된 반봉건 투쟁이었다. 이들은 군대를  조직하여 '이씨왕조'를 타도하려 하였으
나, 그들 지도부 자체는 아직도 상당 부분 봉건적 색채를 띠고 있엇다. 결국 홍경래 난이 지
향한 것은 반봉건 투쟁이라는 측면보다는 지방행정권이나 세도정권에 대한 저항이라는 반정
부적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난의 모의나 진행 중에  토지개혁이나, 신분제 폐지,
삼정의 개혁 등 가난한 하층농민들을  위한 정책은 아무것도 구상되지  않았다. 격문에서는
단지 서북인에 대한 차별대우, 세도정권의 가렴주구, 정진인의  출현 등만을 언급하였고, 정
작 소농과 빈민층의 절박한 문제는 대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난을 패배로 이끈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홍경래 난에는 신흥 상공업층의 참여라는 자본주의적  맹아기적 현상도 내포되어 있었다.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이 누적되고 있었던 당시에 조선왕조 타도라는 기치를 내걸고 4개월
동안 항쟁을 지속한 일은 그후 반봉건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또 하층농민으로 하여금 전
제왕권과 지배체제를 부정하는 정치적 각서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홍경래  난이 끝난 후 민
간에는 정감록이나 해도진인, 미륵신앙과 함께 홍경래 불사설이 끊임없이 떠돌았다.


  항쟁의 여파


  1811년의 봉기는 서북지방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홍경래군이 가산, 박천 등지를  석권하고
있을 때, 그 영향을 받아 해주, 황주, 서울 등에서도 소규모의 소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먼저 12월 28일 해주의 귀락방에서 수백명이 무리를 이루어 창과 칼, 몽둥이를 들고 횡행
하면서 난동을 일으켰다. 이에 감영의  군대가 나갔으나, 그들은 대항하면서 흩어지지  않았
다. 그중 노인담, 김여철, 홍잉죽, 곽성즙 등 4인은 주동자를 자칭하면서 난민들을  지휘하였
다. 이들은 관군과 싸우다가 노인담과 곽성즙 등 10여 명이 잡히고 나머지는 흩어져 달아났
다. 붙잡힌 사람들은 당일로 현장에서 효수되었다. 이에  대한 황해병사의 장계에는 '관서의
적'과 서로 연결될 염려가 업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보면 그들이 홍경래군의
봉기 소식을 듣고 여기에 호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황주 효진포에서는 1812년 1월 홍경래가 정주성을 지키고 있을 때, 뱃사람들이 마장리, 요
암리 등 12포구에서 3백여호를 불질러 태우고 4명을 죽이는 등 난동이 일어났다. 그들의 괴
수였던 뱃사람 김덕춘, 김사옥 등 3명은 체포되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효수되었다. 이  또
한 홍경래군의 봉기에 호응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성루에서도 민간에 흉흉한 말들이 유포되고 있었다. 홍경래 일당은 성루에 첩자까지
두어 조정의 정세를 탐지하고 성루의 동정을 일일이 입수하는  한편, 이들을 동원하여 민심
을 선동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염탐꾼은 각 도의 감영과 고을에도 있었다. 각지의 요
소마다 그들 동조자들을 배치하여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활동하였던 것이다.
  서울에서는 김사용의 지시를 받은  유한순이 조정의 정세와 관군  소식을 탐문하고, 남문
기둥과 옛 장용영 대문에 괘서를 붙여 민심을 선동하다가 2월에 잡혀 처형되었다. 유한순은
본래 영유 사람이었는데, 서울과 지방을 출입하면서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활동하였다. 그는 한때 향리를 가칭하다가 백령도에 충군된 적도 있었다. 여기서 풀려난 이후 그는 김사용을 만나 지시를 받게 되었다. 그는 김사용의 자금을 받고 서울에 잠입하여 아내를 얻고 정탐활동을 하였다. 그는 관군의 소식을 탐문하여 선천의 홍경래군에게 전해주었고, 다시 김사용의 지시를 받아 서울에 들어와서 궁성  부근에서 기밀을 정탐하다가 포교에게 잡혔던 것이다. 양반인 한기조는 서울에 살면서도 봉기 지도자들에게 글을 보내 거사에 가담했다가, 봉기군이 용천에서 패퇴한 후 그 문서가 알려짐으로써 처형당하였다.
  또한 현직 관원이었던 박종일, 이진채 등도 봉기군에 은밀히 가담하여, 도성에서 난을  일
으키려 했다는 죄로 처형당하였다. 박종일은 1812년 봄 홍경래 난으로 정국이 어수선해지자
사옹원 봉사로 있으면서 당시 백성들 사이에 널리 유포되고 있는 참설을 이용하여 이진채와
더불어 사당을 만들었다. 그들은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던 은언군의 아들을 추대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건너가 군량조달을 꾀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조정이 홍경래에 쫓겨 남쪽의 공주나
안동으로 피난갈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이때 성내의 포수 3백여 명의 호응을 얻어 봉기하면
내응이 있을 것이고, 또 분원의 군사가 돕고 전라관찰사가 협조할 것이라고 선전하면서 동
조자들을 모았다. 그들은 "국가의 운수는 4백 년"이라고 하면서, 도참서의 말을 빌어 변혁이
올 것이라고 전파하였다. 그리하여 "중인, 서민의 무리가 양반을 도륙하고, 액정서의 환관들
과 결탁하여 내용을 받는다"고도 하였다. 그들은 3월에는  새로 수립된 정부군이 도성을 공
격하여 서울의 지배층을 모두 살해한다는 등으로 민심을 선동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또 "2월에 화공, 3월에 기병"이라는 계획을  세우고 군량미의 확보를 위해 미전인
들과 자산가들을 선동했다. 이들 주모자인 홍주 출신의 이진채, 서울 출신의 고령인 박종일,
양주의 서얼 출신 한광우는 중인과 서얼로  주축을 이루고 포수와 환관들을 모아  거사하려
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잡혀서 신문을 받게 되자 "계략을 써서 재물을 빼앗을 모의"라고 했
지만, 그 퍼뜨린 말들은 인심을 선동하기 위한 유언비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평안도'와 '황해도'의 소동을 틈타  평민층이 양반을 죽이고 국가를  전복시키려
는 다소 비현실적인 거사계획은 농민층의 봉기와 성격이 상통되는 점이  많다. 다만 서울의
평민층을 중심으로 하여 난동을 꾀한 점이 이채롭다고 할  것이다. 서울의 민중들을 동원하
려는 이러한 구상은 일찍이 그 전례가 없었던 것이다.
  19세기 전반의 변란 가운데 대부분은  준비단계에서 고발당하거나 가담자의 배반에  의해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그것은 아직도 주도층이 광범한 농민들을 동원할  수 있을 만큼의 역
량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봉기를  일으키는 데 성공하여 집권층과  직접 무력대결을
벌인 것은 '홍경래의 난'이 유일한 사례이다. 홍경래가 남긴  상징적 영향은 매우 커서 난이
진압된 1812년 이후에 일어난 변란들 속에는 이른바  '홍경래 불사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는 홍경래가 죽지 않고 섬에서 살고 있다는 것으로서,  당시 변란을 도모하는 세력들에게
홍경래는 고무적이고 모범적인 본보기로 인식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