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전국을 휩쓴 민란의 열풍 - 임술민란(1)

구름위 2013. 6. 19.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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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의 원인


  1862년 2월 경상도 단성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농민항쟁의 물결이 진주를 거쳐 요원의 불
길처럼 번져 그해 5, 6월에는 전라도와 충청도, 그리고 그해 말에는 북쪽지방으로까지  확대
되었다.
  조선왕조는 19세기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기본적으로 
조선후기 이래 농사기술의 발달에 따른 생산량의  증가와 상업 및 수공업의 발달에  기인한
것이었다.  농촌에서는 양반지주층이나 부농들이 농지를 대량으로  확보하여 부를 축적해간
반면, 가난한 농민들은 그들이 가지고있던 적은 농지를 지주들에게  팔고 소작농민이나  품
삯 노동자로 전락해 가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 환경의 변화와  여러 요인들에 의한 신분질
서의 문란으로  종래 양반 중심의 사회체제가 서서히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많은 농민층들
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허울 좋은 양반 신분을 칭하기도 하였고, 반대로 기존의 양반 후예
들이 경제 기반을 잃고 농민들과  다름없는 가난한 처지로 떨어지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엄격한 신분질서가 점차 붕괴되어갔고, 농민들의 의식이  성장하여 사회 변화의 주도계층으
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농민층의 성장에는 농업생산력의  증가와 함께  몰락한 양반들이나 
농촌 지식인들이 큰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경제 형편이나 심정적으로 농민층들과 상통하였
고, 서당을 열어 농촌  자제들의 초급 교육을 담당하면서 농민들의 사회의식을 계도하고
향촌의 여론을 주도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1862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민란은 조선후기 사회경제적인 변화의 와중에서 농촌 지식
인들과 가난한 농민층이 연합하여 누적된 봉건적  수탈 체제와 부패한  관료들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봉건 투쟁이었다. 당시 가난한  농민층의 몰락은 지주층의 무거운  소작료에도 그
원인이 있었지만, 농민이 국가에 부담하는 각종 세금과 여러 명목의 잡부금이 큰 원인이 되
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중한 세금과  잡부금의 징수 과정에는 부패한 관료들과 아전들의 농
간이 심하였고, 이 때문에 농민들은 이중의  고통을 받았다.
  당시 국가의 수취체제는 보통 삼정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전세를 징수하는 전정, 군역 의
무자들에게 군포를 징수하는 군정, 각종 환곡을 관리하면서 이자를 거둬들이는 환정이다. 국
가를 다스리고 군대를 유지하며 기근에 대비하기 위한 이러한 수취체제가 법에 따라 공평하
고 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르면 온갖 부
정부패가 만연하여 정상적으로 되는 것이 없었다. 온갖 편법을 동원하여 자행되는 관리들의
착취는 가혹하고 끝이 없었지만, 정작 그것이  국고로 들어가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부담은 커졌지만 국가재정은 오히려  고갈되어갔다. 거기에서 생기는 차액
이나 이득은 모두 소수의 양반 관료들이나 아전들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갔다.
  이러한 수취체제의 모순을 당시의  정부는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국왕은 무능하였고, 탐
욕스러운 세도정권의 집권자들은 사리사욕에 빠져 국가통치의 원칙이나 백성들의 고통을 돌
아보지 않았다.  말단 관원들은 기강이 무너지고 탐욕에 차 있었다. 거기다 세도정권은 거액
의 뇌물을 받고  지방관직이나 각종 이권을 팔았다. 매관매직과  이권의  매매는 전국에 만
연해 있었다.  그것을 산 악덕관리들은 원금의 몇 배 혹은 수십 배의  이익을 챙기고 더 좋
은 벼슬을 사기 위하여, 또 더 많은 뇌물을 바치기  위하여 갖은 방법으로 백성들을 수탈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부패의 고리는 고질화되어 마침내  행정  관례처럼 되어버리고 말았
다. 그리고 이 모든 부패는 국가 수취체제의 근간인 삼정을 두고 자행되었다.
  전세의 경우에는, 공평한 부과와 징수를 위하여 20년마다 토지조사, 즉 양전을 하도록  법
으로 정해져 있었으나, 조선후기에는 그것이 오랫동안 행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토지의
소유관계나 생산성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세금은 공평하게 부과되지 않았
다. 이를테면 생산이 많은 땅에 적은 조세가, 생산이 적은 땅에 많은 조세가 부과되기도  하
였다. 토호나 이서배들의 부정과 농간으로 조세를 포탈하는 경작지, 즉 은결도 광범하게  있
었다. 은결은 조세대장에서 빠진 것도 있고,  면세전으로 처리된  것도 있었다. 이들은 아전
들이 실제로 조세를 거두어 착복하면서도 국가에는 바치지 않고 횡령하는 것이었다. 은결은  18세기에 비해서 19세기에  더 많아졌고 또 나날이 증가하고 있었다.
  아전들은 이밖에도 조세를 거둘 수 없는 땅에 부과하거나 여러 가지 명목으로 법정 세액
보다 많은 조세를 거두었다. 토지에 직접 부과할 수 없는 세목의 조세까지도 토지에 부가하
여 징수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각종 명목의 조세와  잡부금을 전세에  얹어 징수하던 관행
을  도결이라고 하였다. 도결은 조세 난맥상의 원천이 되었다.
  문제는 세목이나 세율의 증가에만 있지 않았다. 사실상 납세자의 빈부, 권력, 신분과 영향
력의 차이에 따라 부정과 불공평이  자행되고 있었다. 양반과 부유한  지주층들은 아전들을
위협하거나 매수하여 그들이 내야할 세금을 농민들에게  전가하였다. 그리하여 힘없고 가난
한 농민일수록 부당하게  과중한 세금을 부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군정의 경우에는, 1750년(영조26) 균역법 시행 이후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군역  의무가
있는 사람들에게 군포 1필씩 납부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중  일부는 전세에 부가되어 1결
당 쌀 2두가  부가되었다. 그러나 군역 자원은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고 빠지는 사람도 태반
이었다. 결국 그것은 고을마다 할당제로 지정되어 군현 단위로 납부해야 할 군포가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양반, 이서, 역리,  승려, 교생 등과  같이 양반이거나 특수한 직역에 종사하
는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이유로 군역이 부과되지 않았다. 결국 그것은 농민들을 중심으
로 한 피지배 계층에만 몰아서 부과되었다. 그런데 조선후기에는 사회변화와 함께 군역에서
빠져나가는 피역이 늘어나고 있었다. 피역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향교나 서원의
학생이 되기도 하고, 양반을 사칭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군역을 도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
면 결국 그  부담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부과되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이미 죽은 사람에
게 군포를 부과하거나(백골징포),  어린아이들에게 징수하였고(황구첨정), 친척이나 마을 사
람들에게 전가하여 거두는 것이 관례화되어갔다. 동시에 군포 대신  돈으로 거두는  전납도
확대되었다. 이는 농민들에게 군포 대신에 군포값을 높은 가격으로 환산하여 납부토록 하고  그 차액을 중간에서 횡령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군역의 부과와 군포의 징수를 둘러싸고 지방관과 이서배들의 농간과 횡령이  자행
되었다. 이서배들의 횡령으로 군포에 결손이 날 경우에는 그것을 토지에 부가하여 징수하였
는데, 이를 결렴이라고 하였다. 군정의 폐단은 전정의 폐해를 동시에 가중시키고 있었다.
  환정의 경우에는, 원래 흉년에 빈민들을 구제하기  위한 진휼의  목적으로 춘궁기에 비축
된  곡식을 분배해주고 가을에 받아들이던 제도였다. 그후 여기에  일정한  이자를 붙여 받
아 지방재정과  수령의 경비에 보태 쓰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환곡은 진
휼곡 외에도 군량미와 세곡의  비축미 교환, 즉 개색이나 각종  기금을 증식시키기 위한 용
도로 폭넓게 운용되었다. 그래서 지방관들은 농민들이 원하지 않더라고 억지로 환곡을 배급
해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갚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환곡의 규모는 턱없이 늘어났고, 온
갖 부정과 부패가 일어나게 되었다. 마침내 환곡은 빈민들을 위해서나 지방재정을 보충하기
위해서도 쓰이지 않았으며,  탐관오리들의 축재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부담은 가난한 농민들에게 넘겨졌다.
  환곡의 폐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환곡을 거두고 나누어줄 때 생기는 폐단,  환곡을
돈과 곡물로 바꾸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단, 묵은 곡식을 새 곡식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단, 아전이 환곡을 횡령하고 장부상에는 허위로 기재하는 폐단, 채무자가 죽거나 도망했을 때 친척과  이웃에 전가하여 징수하는 폐단 등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 가운데
서도 폐단의 핵심이 되었던 것은 이무와 작전이었다. 이무는 원래 지방에 따라 차이가 많은
환곡의 물량을  고르게 하기 위하여, 액수가 많은 고을에서 돈으로  바꾸어 액수가 적은 고
을에 넘겨주는 제도로서, 지역간의 공평하지 않은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와서 본래의 목적은 퇴색하고  오로지 돈으로 바꾸어 이자만을 챙기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결국 그 피해는 언제나 농민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환곡으로 인한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켰던 것은  각 고을의  아전들이었다. 이들은 환곡을 
분배하고 거둬들이는 실무를 맡아보면서 갖은 방법으로  횡령을 자행하였다. 횡령의 규모도
시기가  내려갈수록 커져서 19세기에는 그것이 수천 석에서 수만 석에 이르기도 하였다. 원
래 환곡은 만약을 대비하여 일정 수량을 창고에 보존하여야 하고 전액을 대출할 수 없는 것
이었다. 그러나 지방관과 결탁한 아전들은 전액을 대출하여 이자를 받아들이고, 환곡을 이용
하여  상업자금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결손이 나기도  하고 흉년이 연속되어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도 많았다. 이렇게 결손된 환곡을 포흠이라고 하였다. 부패한 관리들은 이 결손을 채우기 위하여 부정하고 가혹한 방법으로 농민들을 수탈하기도 하고 곡식에 돌
이나 짚 등의 불순물을 섞어 수량을 늘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제때 거두어들이지 못한 환곡
은 장부에만 상환과 대출을 반복하여 결국 곡식은 없고 빈 장부만 남아 있는 일도 허다하였
다.
  19세기 이후 환곡은 지방재정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환곡을
배급하지 않더라도 이자는 반드시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것을 백징의 폐단이라고  한다. 그
러나 나누어주지 않은 환곡에 이자를 거두는 백징이 결코 용이하지 않았으므로 이것을 전세
에 얹어서 징수하는 일이 보편화하였다. 이를 도결 혹은 가결이라고 일컬었다. 도결이나  가
결은 환곡 폐단의 총괄적 모습이며  삼정문란의 표본이었다. 1862년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을 때 규탄의 주대상이 되었던 것도  도결과 가결이었다. 환곡의 폐단으로 인한 농민
들의 불만이 더욱 컸던 것은 그 부과와 징수가 신분간  빈부의 차에 따라 공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세가나 부유층들은 신분상의 우월적 지위와 관권을  배경으로 환곡의 분배에서
빠지고, 힘없고 가난한 농민들이 그들의 몫까지 부담해야 했던 것이다.
  전정, 군정, 환곡 삼정의  문란은 이  시기에  진행되고 있던 농민층 분화를  촉진하였다. 
조선후기에 들어와 농업기술의 발전과 유통경제의 발달에 힘입어 지주층을 중심으로 토지의 겸병이  확대되었다. 즉 이 시기의 농촌사회에서는 지주층이나 부농층의 토지 겸병이 진행되는 가운데 영세한 자작농들은 영세농이나 소작농으로  전락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소작농의 경우에도 차등이 생겨 조금 형편이 넉넉한 소작 농민층과 품팔이 노동자로 나뉘고 있었
다.
  계층분화는 양반 신분에도 일어나고 있었다. 즉  양반 중에서는  부유한 경제력을 그대로 
유지하는 층도 있었으나, 일부는  자영농의 지위마저도 잃고  소작농이나  품팔이 노동자로
전락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당시에는 1결(약  30두락)의 농지를 가진 부농은 천에 
하나도 안되고 대부분이 그 이하였다. 뿐만 아니라 토지에서  완전히 쫓겨나 상업이나 수공
업 혹은 품팔이로 목숨을 이어가는  몰락 농민층도 절반 정도나 되었다.
  이 시기 소작 농민의 부담이 늘어난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수취의 부담 때문만은 아니었
다.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하자 수탈의 방식이 군정이나 환곡을  합쳐  대부분 도결과 가결
이란 이름으로 토지에 집중되고 있었다. 이들 전세는 원래  지주가 부담하여야 하는 것이었
지만, 이때에 이르면 거의 전적으로  소작농들에게 전가하고 있었다. 이처럼 삼정의  문란은
몰락해가고 있던 빈농층을 더욱 몰락시켜갔다. 1862년의 민란은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던
농민들이 봉건정부의 수탈에 대항하여 그 시정을  요구하며 일으킨 항쟁이었다.

농민항쟁의 꽃 진주민란


  민란의 전야


  19세기 중엽에 들어와 진주 지역에서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삼정의 문란이 심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환곡의 폐단으로  인한 농민들의 부담이 커져갔다. 이  지역은 진주목과
경상우병영이  부족한 재정을 환곡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으므로, 그  부담이 날로 증가되
어 이에 대한 고통을 하소연하는 일이 많았다.
  조선시대의 법에는 백성들이 억울한  일이 있으면, 자기가 거주하는  관아에 소장을 올려
호소할  수 있었고, 여기서 해결되지 않으면 상급 관아에 제소할 수 있었다. 즉 자기가 거주
하는 지방 관아에 소장을 올려 들어주지 않으면 감영에  호소하고, 감영에 상소하여 들어주
지 않으면 서울의 비변사에  호소하고, 그래도 들어주지 않으면 꾕과리나 징을 치며 국왕에
게 호소할 수 있었다.
  진주 지역의 농민들도 처음에는 이러한 절차를  밟아나갔다. 1850년에는 박수익등이 소를
올려 환곡의 양이 늘어나서 감당할 수 없다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그는 함부로 자기의 사정
을  하소연하였다고 처벌받았을 뿐이다. 사실 이 무렵에 들어와서  진주에서는 관리들의 횡
령으로 결손된 환곡의  수량을 채우기 위해 토지에 붙여 거두는 결렴이 빈번하였다. 그러면
서 주민들의 부담은 급격히 불어났다. 처음에는 1년에 한 차례씩 거두었으나, 이후 차츰  그
회수가 잦아져서 1년에도 여러 차례 거두기도  하였다.
  진주 농민들은 이 문제를 시정하기 위하여 법에 따라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고
을에  상소하고 이어 감영에 상소하였다. 그러나 문제가 조금도  해결되지 않자 1859년에는
마침내 집단  상경하여 비변사에 호소하였다. 이에 대해 비변사에서는  결손된 환곡은 횡령
한 자에게서 추징하고  문제가 된 결렴은 혁파하라고 조처했다. 그러나 환곡의 횡령 문제에
대하여는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결렴은 쉽게 근절되지 않았다.
  1861년 5월 당시 신임 진주목사였던  신억은 결손을 보충하기 위하여 매결당  2냥 5전씩
거두고자 하였다. 이때 진주민들은 결렴을 거부하고 유계춘이  중심이  되어 비변사에 상소
하려고 하자  목사는 결렴 징수를 포기하고 말았다.
  1861년 겨울 부임한 신임 목사  홍병원은 다시 결렴 징수를 꾀하였다.  그는 결렴에 앞서
환곡의  보유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47,386석이 진주민들에게 환곡으로
대여되었는데, 이중 60%에 해당하는 28,649석은 경저리 양재수와  전목사 박승규 등에 의해 이미 증발되었고, 나머지도 경저리에 의해 조운선을 운반하는 사공들에게 분배되어 실제로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환곡은 거의 없었다.
  이때 밝혀진 환곡 포탈의 범인은 주로 아전과 조운을 담당하던 사공들이었다.
  당시 경상감사는 홍병원이 조사한 바에 따라 증발된 28,000여 석에 대하여는 그 이자를
탕감하고, 환곡 액수가 적은 읍으로 이송하여 거둘 것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그러나 비변사
에서는 28,000석 중 8000석만을  탕감하고 나머지 20,000석은  반드시 거둬들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포탈한 범법자들은 사형하여 효수하거나 섬으로 유배하는 엄한 처벌을  지시하였다. 이처럼 나라에서는 환곡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처벌에만 중점을 두었고 실질적인 예방책은 마련하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횡령으로  부족하게 된 수량을 채워놓도록 요구함으로써, 그 부담은 결국 주민들에게 돌아갔다.
  이에 홍병원은 전임 목사들이 했던 것처럼 환곡의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서 토지에 부담
을 지우는 도결 징수를 시도하였다. 그는 향회를 소집하여 도결에 대하여 논의하도록  하고,
각 면의 조세담당자들을 차출하여 도결을 결정하였다. 이때 1결당 부담 액수는 6냥 5전이었
는데, 이는 그 이전의 결전이 2냥 5전이었음에 비하면 턱없이 무거운 것이었다.
  1861년 12월 도결이 결정되자, 진주민들은 진주목과 경상감영에 다시  이의 부당함을  호
소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그러던 중 경상우병영에서도 진주목의 도결 결정을 틈타 우병영
에서 운영해왔던 환곡 중 부족한  물량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우병영이  운용해왔던 환곡은
모두 39,218석인데, 그 가운데  아전들에 의해서 약60%에 해당하는 24,154석이 횡령으로 증
발되고 없었다. 이에 1862년 1월에 읍내 주민들을 불러모아 회유하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하
여 약 6만 냥을 가구별로 분담토록 결정하였다. 이를 통환이라고 하였다.
  도결에 뒤이어 통환이 결정되자 진주민들은 충격을 받고 분노하였다.  이 때문에 다시 한
번 진주 지역의 도결과 통환의 부당함에 대한 여론이 들끓었고,  이 와중에 그 이전과는 전
혀 다른 농민항쟁, 즉 민란의 분위기가 성숙되었다.

무력봉기의 준비와 주동자들


  진주민란은 처음부터 무장봉기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봉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 방
법을 두고 두 가지 견해가 나와  논쟁을 벌였다. 하나는  종래와 같이 법의  테두리 내에서
호소하자는 주장이었다. 다른 하나는 철시와  같이 법이 금하는 방법으로 하자는  견해였다.
논쟁을 벌이던 끝에 결국 후자의 과격한 방법이 채택되었다.
  이후 항쟁은 삼정 문란을 주도한 아전들을 죽이고, 그 문란을  틈타 자기 배를 채운 토착
양반과 부유층들의 집을 부수고, 나아가 도결과 통환을 결정한  목사와 우병사에게 이의 철
회를 요구하여  관철하였다. 민란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봉건적인 압박과  모순의  혁파를
요구하는 쪽으로 발전하였으나, 힘의 한계로 이를 관철하는 데 실패하였다. 진주민란은 비록 여기서 머물렀으나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진주목사와 우병사가 각기 도결과 통환을 결정하자 여기에 반발하여 처음으로 궐기를  촉
구하는 통문을 돌린 사람은 1861년 5월에도 그것을 저지시키는 데 앞장섰던 축곡면의 유계
춘이었다. 그는 1862년 1월 29일에 도결과 통환의 철폐를  위해 2월 6일 열리는 수곡장시에
서 모이자는 통문을 돌렸다.  1월 30일에는 유계춘과 전직  관원이었던 이명윤 등이 산기촌
에서  모여 도결과 통환을 철페시킬 것을 논의하였다. 이명윤은  집회장소를 수곡장시로 정
하고, 유계춘에게 통문을 발송토록 하였다.
  2월 1일 유계춘은 별도로 모임을 준비하던  가서면 정원팔과  청암면 강천녀 등으로부터
그들의 통호나 철폐 모임에 참석해달라는 편지를 받았으나, 그는  이에 응하지 않고 수곡집
회를 준비하였다. 정원팔 등은 예정대로  시위를 하였으나 처벌만 받았을 뿐이었다.  다음날
유계춘은 이명윤과 상의  없이 철시를  요구하는 한글 통문을 진주 읍내에  붙이도록 하고,
박숙연의 집에서 정홍팔 등과 함께 모의하던 중에 이명윤의 방문을 받고 시위방법을 논의하
였으나, 이명윤은 불법적인 시위를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들은 격렬한 논쟁 끝에 합의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이후 유계춘은 계속해서 한글 통문을 읍내 여러 곳에 붙이고, 초군(나무
꾼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집단)패의 두목격이었던  이계열의 요청에 따라 한글  가사체로 된
통문을 작성해 초군의 동참을 호소하였다.
  이리하여 2월 6일 수곡장시에서 집회가 열리게 되었다. 유계춘. 이계열 등 각 지역의 대표
자 300여 명을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이 모였다. 그들은  군중대회를 열고 도결과 통환의 부
당함을  경상감영에 호소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날의 시위로 다음날 유계춘은 병영에 체포되
었고, 결국 초군들을 중심으로 장시를 습격하는 등 무력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  봉기에
는 유계춘 등의 계획된 준비가 있었다.
  이상의 농민들의 항쟁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은 이명윤, 유계춘,  이
계열 등이었다. 이들은  당시 신분상으로 보면 각각 명문 양반, 몰락 양반, 농민층을 대표한
다고 볼 수 있다.
  이명윤(1804-1863)은 정종의 15대 후손으로  왕실의 먼 일가였다. 그는   1838년(헌종4)에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원을  지냈고, 철종대에는  홍
문관 교리 등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에 은거하고 있었다.  그는 부유한   명
문 출신에다 청요직을 지냈고 향촌에서도   명망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세도가와
연줄이  없어 중앙 정치에서 소외되었고, 진주  지방의 향권에서도  멀어진 처지였다. 이런
이유로 그는  도결이 결정되던 향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결,  통환이 자신에게도
할당되자 직접 목사에게 면제시켜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유계춘 등과 접촉하여
초기 항쟁 준비과정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계춘, 이계열 등과 달리 문제를 법의  테두리 안에서 온건하게 해결하자고 
주장하였다. 그것이 1월 30일과 2월 2일에 항쟁 방법을  둘러싼  유계춘과의 논쟁으로 나타
났다. 그는 2월 2일 이후의 모의에서 탈퇴하였고 이후에는 항쟁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진주민란의 주모자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첫째  유계춘 등이 그가 민
란의 배후지도자인 것처럼 소문을  퍼뜨렸고, 둘째 도회에 참석하지 않은 그를 향리들이 미
워하여 주동자로 지목하였고, 셋째 안핵사로 내려온 박규수가 보고서에서 그를 주모자로 판
단하여 처벌하도록 국왕에게 건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그를 진주민란
의 주도층에 포함시킬 수 없다.
  이 민란의 사실상의  주동자는 유계춘(?-1862)이었다. 그는  준비단계에서부터 민란을 주
도하였다. 그는 신분이 양반이었으나 사회적 기반과 자신의 토지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
아 이 시기에 양산되고 있었던 몰락 양반 지식인으로 보인다. 유계춘은 민란 이전부터 향회
나 이회를 자주 주동하여 환곡의 폐단을 지적하고, 여론을 주도하여 수시로 읍과 감영, 비변
사에 해결을 호소한 경력이 있었다.  그는 항쟁의 초기단계에서 실질적으로  논의를 주도하
였고, 주변 인물들을  모아서 항쟁을 준비하였다. 그는 항쟁이 전개된 이후에 우병사 백낙신
과 진주복사 홍병원으로부터 통환과 도결의  혁파를 받아내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유계춘 자신은 체포된 후 자신이 항쟁 주동자였음을  부인하였다. 안핵사 박규수 또
한 유계춘이 토지 한조각 없는 농민임을 들어 앞장서서 항쟁을 주도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
각하였다. 박규수는 그가 일을 꾸며 한몫 챙기려고 했거나 명문 양반인 이명윤에게  조종당
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진주민란의 성격을 대표하는 인물은 이계열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계열은 이 지역의 명문 
양반이었던 이명윤과는 6촌형제간이었으므로 몰락한  양반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는 실상
가난하고  언문조차 모르는 무식한 농사꾼이었다. 이 점에서 학문적  소양이 있던 유계춘과
는 차이가 있었다. 유계춘이 가난한  지식인이라면 그는 순전한 농민이었다. 그는  나무꾼패
(초군)의 일원이었고, 나이가 많아  그들의  두목격이 되었다. 이계열은 항쟁초기  단계에서
초군의 대표로 초군들을 항쟁에 참여시키기 위해 유계춘에게 통문을 만들도록 하였고, 항쟁
단계에서는 초군들을 지휘하여 진주목사와 우병사로부터  도결과 통환의 철폐 완문(관문서)
을 받아내는  등 항쟁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박규수는 이계열이 무식한 농민이라는 이유로
그를 주모자에서 제외시켰다. 박규수는 그가 무식한 농민으로서 항쟁을  독자적으로 지휘하
였다기보다는 사족들의 사주에 따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항쟁 준비과정에서 유계춘과 긴
밀한 관계를 가지고 항쟁을 준비한 점, 항쟁시 중심세력인 초군의 우두머리였던 점 등에 비
추어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봉기가 시작되다


  수곡시장시의 집회가 있은 다음날(2월 7일) 유계춘은 전격적으로  병영에 체포되었다. 그
러나 그는 2월 13일 제사를 구실로 휴가를 얻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2월 14일)
수청가에서 회의를 하였다. 이 모임은 항쟁에 참여할 대중, 즉 초군패들을 조직적으로  동원
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이  모임은 14일 새벽에 개최되어 초군들을 소집하는 통문을 유포하
고  나서 바로 초군들이 모여 덕산장시를 공격하였다. 서쪽에 위치한   마동과 원당의 농민
들은 수곡시장을  습격하여 장악하였다. 덕산에서 농민들은 도결 결정에  참여한 훈장 이윤
서의 집을 파괴하였다. 세력을 확대한 농민들은 동쪽으로  덕천강을 따라 진주읍 쪽으로 진
출하였다. 도중에 그들을  평소 농민 착취를 일삼아온 부유한 집 수십 호를 파괴하였다.
  2월 18일에 초군들은 아침부터 대오를 정돈하고  읍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모여  도결과
통환을 혁파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진주목사는 사태에 놀라 배후조종자로 소문이 난 이명윤
에게 농민들을 설득하여 해산시켜줄 것을 간청하는 한편, 농민들의  요구대로  도결을 혁파
하라는 결정문(완문)을 발급하였다. 농민들은 도결 혁파의 결정문을  받아들였다. 소기의 성
과를 얻은 초군은  기세를 올리며  다시 병영으로 향하였다. 가는 도중에  진주목의 아전들
집을 부수고 불태웠고, 그밖에 평소 아전들과 결탁하여 읍민을 착취한 서리, 상인들의  집을
부수고 물건을 빼앗았다.
  2월 19일 아침에는 수만명의 농민들이 진주목 객사 앞에 모여서 통환 철폐와 통환 결정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였다. 기세가 등등한 농민들의 요구에  당황한 우병사 백낙신은 통환 결
정의  장본인으로 서리인 김희순을 지목, 책임을 전가하여 때려죽였다. 그러나  이러한 우병
사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계속하여  통환 철폐를 요구하자, 그는 할  수 없이 통환
철폐 완문을 발급하였다. 이리하여 도결과 통환의 철폐는 농민들의 요구대로 이루어지게 되
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환곡 문란의 책임자들을 추궁하였다. 농민들은
서리로서 원성이 자자한 권준범을 처단하여 김희순과 함께 불태웠다. 권준범의 아들 권만두
는 아버지를 구하려다 맞아죽었고, 권준범의 동생 종범과 진주  이방 김윤구는 생명의 위협
을 느끼고 도망하였다. 농민들은 밤새도록 우병사를 풀어주지 않고  그의  탐학과 서리들의
부정행위를 추궁하였다.
  2월 20일이 되자 농민들도 도망간 아전들을 추적하는 한편, 목사와 우병사에게 그들의 신
병을 양도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진주목사가 아전들을 옹호하고 나서자 농민들은
진주목사의 동헌에 처들어가, 이방 김윤구의 행방을 수색하는  한편, 목사를 교자에 태우고
우병사가  있는 객사 앞으로 갔다. 점심때 쯤 농민들은 봉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생각
하고 목사와 우병사를 풀어주었다. 이방 김윤구는 이날 끝까지  추적한 이귀재를 비롯한 용
봉면 초군들에게 붙잡혀 불타죽었고, 그  아들은  심하게 구타당하였다. 봉기군들은 오후에
차후의  행동 방향에 대해서 토론을 벌였다.  그 결과 그들은 진주 각지에  공격 목표를 정
하고, 이들을 공격한 후 다시 진주읍성으로 회군할 것을 결정하였다.
  진주민란은 초군의 난으로도 불린다. 여기에 초군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또 중심세력이 되
었기 때문이다. 초군이란 원래 나무꾼을 뜻하는 것이었으나, 대부분은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공동  임야뿐만 아니라 벌채가 금지된 개인소유의 산과 주변 지역까지 집단적, 조직적으로 벌목하여 수시로  문제를 일으키곤 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항쟁에 참여하게된 계기
는 무엇일까? 초군은 빈한한 농민들로 환곡과 같은 피해를 가장  많이 입고 있었다. 초군의
우두머리였던 이계열은 초군을 농민항쟁의  주체로서 참여시키는 데 앞장섰고, 초기부터 모
의에 깊이 관여하였다.
  초군의 조직적인 활동을 잘 보여주는 사례는 이방 김윤구에 대한 수색 체포 과정이다. 농
민들이 진주목에 몰려갔을 때 그는 이미 도망쳐버리고 없었다.  그러나 그 일대를 초군들이
수색에 나서 결국 그를 체포하여 죽이고 말았다. 이처럼 초군은 진주농민항쟁의 중심세력이
었다. 그들이 항쟁에 집단적으로 참여함에 따라 민란의 폭발력이 커지게 되었고, 그들의  목
표를 성취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