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19세기의 대표적 변란 - 광양란과 이필제의 난(1)

구름위 2013. 6. 19.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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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란


  오늘날 우리들은 광양이라는 이름으로는  광양제철소를 떠올리게 된다.  일반적으로 우리
나라  산업구조에 있어 가장 경쟁력을  갖춘 것은 제철과 반도체 부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제철소가 위치한 광양은 우리 국민에게 적잖은 자긍심을
갖게 해주는 곳으로 기억할 수 있다. 그런데 130여 년 전 이 광양에서는 역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민중들의 저항, 즉 변란이 일어났다.
  이때 광양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는 당시 수없이  많이 기도된 변란 모의 가운데  처음으로
거사에 성공하였을 뿐 아니라,  변란의 전개과정에 나타난 조직성과  연계성으로 이후 우리
민중운동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누차 강조되었듯이 19세기는 '민란의 시대'라고  말한다. 이는 극에 달한  봉건왕조의 모
순에 최대 피해자인 민중들이 그들의 권리를 찾고자 맹렬한 반봉건투쟁을 전개하였기  때문
에 나타난 용어이다.
  물론 처음부터 농민들의 투쟁이 과격했던 것은 아니었다. 항조운동과 같은 온건한 방법으
로 관권에 맞섰다. 그러나 이것이 관철되지 않자, 농민들은 1811년의  홍경래난에서 보여지
듯이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전면적인 농민봉기를 전개하였다.  이를 기해 농촌의 농민과 도
시의 영세상공인들은 새로운 변혁의 가능성을 점치고  조직적인 저항운동도 전개하였다. 아
울러 곳곳에 흉서, 괘서가 나돌고,  양반이나 세도가 집에 돌팔매질을 하거나 불을 질렀다.
  그러나 이제는 이들을 계몽하고 봉건제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명분을
가지고 민중들을 규합하는 무리들이  나타났다. 곧 '직업적  봉기꾼들'이라 부르는 저항적 
지식인들의 변란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의 투쟁 방략은 민란이 아닌 병란으로 지칭되고 있
듯이 농민반란과 달리  조직적으로 무장을 하며, 지도부들의 성격도  특정 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여러 지역간의 연계를 갖는  응집력을 보이고 있다. 그 선구적인  모델이 바로 1869년
(고종6) 3월 전라도 광양현에서 발생한 광양란이다.
  1869년 3월 24일 밤, 머리에 하얀 수건을  두른 난민  70여 명이 총을 쏘아대며 성안으로 
돌진하였다. 종전 민란처럼 몽둥이와 쇠창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총을 소지한 이
들은 군기고와 창고를 열어 무기와 사창곡을 탈취하였다. 그리고  현감 윤연신을 잡아 항복
문서를 바치도록 위협하면서  관인(수령임명장과 군사지휘권)을 뺏으려 하였다.
  이들은 성문을 굳게 지키고 군부에 따라 시간마다  군졸을 점호하였다.  성 안을 완전 점
령한 것이다. 물론 갇혀 있던 죄수를 모두 풀어주고 백성들  중에서 건장한 사람을 뽑아 군
복을 입혀 같은 패로 감아 세를 불리었다. 그러나 읍민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위로하는 격
문을 적어 곳곳에 붙여놓았다.
  이상이 광양란 발생 첫날 밤 모습이다. 반군에 관청이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조정에
서는  현감 윤영신을 파직하고, 영광군수 남정용을 안핵사로 임명하여  즉시 현장으로 파견
하고 동시에  정라병영과 5진영으로 하여금 정예의 장요와 나졸을 보내 난군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강진은 비바람과 함께 날아가고


  사실 이 광양란 거사에 앞서 주모자 민회행, 전찬문, 강명좌,  이재문, 김학원 등 일당  25
명 동지들은 강진에서 난을 일으킬 계획이었다. 이들은 거사를  위해 장례식을 위장하고 거
짓 상여에 무기를 숨겼다. 이러한 방법은 당시 민중들이 관청의  눈을 속이기 위해 흔히 쓰
는 위장술이었다. 즉 1868년(고종 5년)  9월 민회행은 전찬문, 강명재,  이재문, 권학녀 등과
함께 장흥에서 장례식을 핑계삼아 25명을 동원하여 위장한 상여에 무기를 숨겨  강진병영을
공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마침 그날은 날씨가  놓지 않았다. 이들이 강진에서 5리 정도 떨어
진 주막에 이르렀을 때 난데없이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자  좋지 않은 징조로 여기고 섣달
그믐날 다시 거사하기로 약속하고 일단 흩어졌다.


  신사적인 난군과 책임을 다한 현감


  이리하여 다시 후일을 기약한 것이 이 광양란이다. 원래  광양란은 하동장시 모임에서 비
롯되었다. 장흥에서 거사에 실패한 민회행은 진주민란을 본받아 민란을  일으켜  읍폐를 바
로잡는 데 그 명분을 두고, 이재문, 최두윤 형제, 금호도의  백내흥 등 14명과  결당하고 변
란을 모의하였다. 그들은 필요한 전곡과 화약을 마련한 다음 3월 18일 하동으로 갔다.  18일
30여 인이 하동에서 일단 모여 배에 올라 장사꾼을 가장하고 섬진강을 왕래하다가 그 무리
가 70여 명으로 늘어나자 우손도로 직행하였다.  당시 광양란에 대한 정부측 보고로 전라감
사 서상정의 보고와 통제사 이현직의 보고가 있는데,  그 내용에 차이가 있었다.
  서상정의 보고에 따르면, 이들은 3월 21일 밤 흰 수건을 두른 백건적 100여 명(사실은 70
명)이 2척의 범선에 나눠타고 순천부 하적면에 위치한  우손도에 침입하였다. 당시 그 섬에
는 최영길한 집만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최씨 집에 있는 각종 농기구를 탈취하고, 호주  최
영길과 품삯군 김총각,  낚시를 하려고 섬에  들어와 있던 하적동의 주민 2명  등을 협박해 
갑옷과 죽창, 깃발 등을 만들었다. 거사에  앞서 이들은 산에 올라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낸
다음 우손도를 떠났다고 하였다.
  이들은 21일 배를 타고 초남포에 도착하였고, 광양관아를  공격한 것은  2일 뒤인 3월 23
일 밤으로 하루의 차이가 있다. 반군은 군부를 점열하고 전열을 가다듬어 관아를 공격, 군기
를 탈취하여 화살과 총으로 무장하고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현감  윤영신이 갖고 있던 인부
를 탈취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통제사 이현직의 보고는 보다 자세하였다. 흰 수건을 두르고 죽창을 든 반란군 70여 명이
총을  쏘며 동문으로 난입하여 군기고를  탈취, 활과 총을 뺏었다는  사실까지는 마찬가지
이나, 수령임명권과 군사지휘권을 상징하는 인부를 뺏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에 관한 기록
이 보다 생생하였다. 당시  반군 가운데 장수급은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졸병들은 활과 총
을 나누어  가진 후 수령이 있는 동헌으로 달려가 현감을 잡아 온갖 공갈로 협박하여 인부
를 탈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현감 윤영신은 자기 몸에 인부를  갖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
라, 목을 자르는 한이 있어도 내어줄 수 없다고 버티어서  끝내 이를 빼앗지 못했다는 것이
다.
  이 날 난리로 민가 25호가 불타버렸고, 신체가 건장한  사람 300명을 뽑아 강제로 반군에 
가담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난군 두목은 그 휘하 사람들에게  만약 백성들을 살해하거나 그
들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는 경우가 있으면 반드시 중죄로 다스리겠다고 호령하였기  때문에
난리통에도 한 사람의 평민도 살해된 자가 없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난도들은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춘궁기에 진휼해야 한다며 사창으로 되돌리고  창
고문을 잠갔다고 한다. 그리고 동헌으로  돌아가 소를 잡고 밥을 지어 포식을  한 후 흰 띠
와 죽창을 버리고 혹은 검은 옷, 혹은 사령옷으로  갈아입고 성문을 굳게 지켰다는 것이다.
  이렇게 야밤을 틈타 짧은 시간  내 조직적으로 성을 점령했던 광양  거사였지만, 그 패배
또한  순식간에 이루어져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곤욕을  치른 다음 몰래 관아를 빠져나
갔던 현감  윤영신이 이끌고 온 관군의 공격을 받아 25일 밤 진압되었기 때문이다. 틈을 타
서 적지에서 탈출한 현감  윤영신은 25일 밤 수천 명을 이끌고  반란군에 반격하여 성을 수
복하고 반란군  수십명을 잡아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반란군에 쫓겼던  윤영신에 의해 난군
이 진압된 것이다. 이로써 윤은 오히려 벼슬이 높아졌다.

40대와 20대


  주모자 민회행은 당시 44세로 전라도 광양에서  출생하였는데, 직업은 의술이고 천문지리
에  밝았다고 한다. 그는 이미 20여 년 전부터 남다른 뜻을 품고  영남과 호남 일대를 두루
다니며 뜻을  함께하는 동지를 규합했는데, 이때 만난 사람이 전찬문과 이재문이었다. 이들
은 민회행의 충실항 동지가 되어 1년 전인 1868년(고종5)에도 강진 변란에 뜻을 같이하였다.
  전찬문 역시 44세로 전라도 태인 사람이나 살기는  구례에서 터전을  잡았다 한다. 그 역
시 전국을 돌아다니며 뜻을 같이한는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분주하게   전국을 누빈 전찬문
은 강명좌 집에  모여 무기를 들고 난동을 일으키자고 하였으며, 강명좌와 함께 하동장시에
서 민회행과 합류한 후 광양민란에서는 스스로 군무총찰이라 부르면서 난군을 지휘하였다.
  이재문은 다른 사람보다 나이가 어린 27세로 광양 사람이다. 하동장시때부터 민회행과 행
동을 같이하여 광양민란에서는 현감에 욕을 보이고 죄수들을 풀어주고 군기를 탈취하는  등
의 행동대장 역할을 하였다.
  23세의 권학녀는 남원 사람이다. 민회행의 오른팔이 되어 거사에  앞서 제사를 지내는 일
부터  분위기 조성과 반란군의 대열정비 등 주장하지  않은 일이 없고 간섭하지 않은 일이
없다. 23일에  육지로 나올 때 군부를 점열하여 편대를 만들어 광양성으로 직행하였다. 강명
좌는 41살로 강진에서 태어났고 생활근거지는 구례였다.  강진거사 때부터 하동장시에 모이
는 일, 우손도에 가서 군비 마련하는 일 등을 민회행과 함께하였다.
  민란이 진압되자 주모자 민회행, 전찬문, 이재문, 권학녀와 강명좌, 김문도 등  6인이 한양
의 의금부로 잡혀갔다. 그리고 바로 네사람은 모반대역죄로  무교동  대로에 설치한 형장에
서 능지처참의  형에 처해졌고, 그 가족들은 적몰하여 노비로 전락하였다. 당연히 광양은 읍
으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김문도는 49살로 강진 태생의 향리인데, 난도들과 함께 장흥취회
와 광양난 거사에 부화뇌동했다 하여  불고지죄로 서소문 밖에서 참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광양현에 잡혀 감금되었던 한경삼 등 44명의 난민들은 죄수영으로 압송되어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김학수 등 2인은 섬으로 유배하고 그외 추종자들은 석방하여 난의 처
리를 마무리지었다. 물론 이들과 달리 백성들을 불러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진사 유
병오는  벼슬길에 올라 팔자를 고쳤다.


  민란과 변란의 다리


  이상이 고종 6년 3월 23일에 일어나 25일에 끝난 광양란의 전말이다. 시정 혁폐를 관철시
키고자 무력으로 관아를 점령한 병란이었다. 그 주모자들의 출신을  보면 전라도 각지의 인
사들이 망라되어  있다. 장차 난리가  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동모자를  규합한 민회행
등의 행적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오래 전부터 자신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전국을  돌
며 동지들을 규합해왔다. 그들은  향촌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농민층이 아니라 '잔반파
락호'로서  한결같이 천문지리나 술수에 능통한 이들이 전국적 거사를 의도하였다는 점에서
볼 때 단순 농민반란이 아니라 변란인 것이다.
  그러나 광양란은 전주민란을 본받아 읍폐를 시정하려  하였으며, 왕조를 무너뜨리려 하지
는  않았다는 점에서 민란적 성격도 강하게 띠고 있다. 한마디로  변란과 민란의 교량적 위
치에 선 광양란은  이로써 막을 내리고, 이필제란의 지향점을 제시해주었다고 하겠다.

  이필제의 난


  100여 년 전 그때 그 시절,  우리네 젊은이들 역시 눈앞에 전개되는  부조리를 그냥 보아
넘길 수가 없었나 보다. 무능한 왕권 아래,  끝이 보이지 않는 부패한  세도가들의 매관매직
과 가렴주구... 말세로 치닫는 조선왕조와 이에 기생하는 관료집단들에 대해 아무 것도 기대
할 수 없는 민중들은 조선이 아닌,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이끌어 내고자 하였다.
  당시 경제구조의 모순을 가장 무겁게, 가장 아프게 느끼고  있는 신분계층은 일반 농민들
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 나설 엄두는 못 내었다. 대신 모순덩어리 사회구조 속에서 뜻
을 펴지 못한  소외된 한유와 빈사들은 저항적 지식인이 되어 전국을 유람하며 농민들을 각
성시키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규합, 사회구조를 그 토대부터  흔들어 놓는 '조선식 민주
화투쟁'을  전개하였다. 더구나 19세기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서양세력의  침입이라는 전
대미문의 양상을 보임으로써  조선사회는 언젠가 닥쳐올 서양 오랑캐의 침공에 대한 위기의
식이 높아졌다. 이러한 국내의 봉건적 모순의 심화와  양이침공에  대한 불안감은 현실도피
적인 요소를 이루고 있는 정감록 사상을 전국적으로 번지게 하였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전국을 무대로 민중들과 소외된  지식인들의 한에 불을  지폈던 '직
업적  봉기꾼' 이필제의 구호와 행동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현실을 극복하며 내일을 준비하
다 좌절해갔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일반적으로 이필제란이라고 하면 1871년(고종 8) 3월 10일 이필제가 동학의 제2대 교주인
최시형과 함께 경북 영해에서 봉기한 사건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사실 그는 1869년부
터 1871년 말 체포되어 처형당하기까지 3년간 진천, 진주,  영해, 문경 등지에서 4회에 걸쳐
연속적으로 반정부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필제가 처음 반정부 구호를 내걸고 거사한 것은 1869년  진천작변이었다. 하지만 첫 거
사부터  내부 밀고자에 의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밀고자는 김병립이었다. 그러나 첫 
거사 실패에 좌절할 이필제가 아니었다. 그는 이듬해 다시 진주에서  난을 일으켰다. 이 모
의에서 이필제 외에도  정만식, 성하첨, 양영렬 등 직업적  봉기꾼들도 함께 주도하였다. 그
러나 이번에도 조용주 형제의 투서와 전낙운의 밀고로 발각되었다.
  삼세번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세 번째 이필제는 1871년 3월  영해에서 궐기하였다. 드
디어 거사에 성공, 전 조정 관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특히 이 거사에서 이필제가  종
전과는 다른 지도력과 조직력을 발휘하였다. 특히 동학 창시자  최제우의 순교일인  3월 10
일을 거사일로 잡고, 교조신원을 기치로 동학교도를  조직적으로 끌어들여 거사에 성공하였
다.
  특히 우리 나라 운동사에서 이 영해란에 대한 평가는 바로 농민봉기의 맹아적 성격을 지
닌 거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난을 통해 반정부 인사의 주자로서의 자신감을 얻은 이필
제는 다시  조령에서 난을 일으키려  하였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그의  편이 되어주지를 
않았다. 네 번째 거사 실패로 2년간 4회에 걸친 이필제의  반정부 투쟁은 형장의 이슬과 함
께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상이 바로 이필제난의 자취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이필제를 직업적  봉기꾼 내지
전문  반란지도자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4회에 걸친 반란  가운데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
1871년 영해봉기이므로, 이필제의 난을 영해봉기로 달리 부르기도 한다.
  이필제는 1824년(순조24) 충남 홍주에서 태어나 1871년(고종8) 조령거사  실패로 체포, 형
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아버지는 이규묵이다.  태어난 곳은 홍주이나 성장기 대부분을  충북
진천에서 지냈다. 스스로 "어려서부터 책을 읽고  자랐다"한 것으로 보아 그의 신분은 잔반
계층으로  이해하고 있다. 원래  그의 이름은 이근수였으나 필제로  고쳤으며, 급제 후에는 
이홍으로, 다시 주지문으로 성명을  바꾸었다. 진천작변에서는 김창정  또는 김창석, 진주와
거창에서는 주성칠, 주성필로,  영해에서는 이제발로, 문경에서는 진명숙  등의 가명을 쓰며
수색의 그물을 빠져나갔다.

  이필제의 난


  100여 년 전 그때 그 시절,  우리네 젊은이들 역시 눈앞에 전개되는  부조리를 그냥 보아
넘길 수가 없었나 보다. 무능한 왕권 아래,  끝이 보이지 않는 부패한  세도가들의 매관매직
과 가렴주구... 말세로 치닫는 조선왕조와 이에 기생하는 관료집단들에 대해 아무 것도 기대
할 수 없는 민중들은 조선이 아닌,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이끌어 내고자 하였다.
  당시 경제구조의 모순을 가장 무겁게, 가장 아프게 느끼고  있는 신분계층은 일반 농민들
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 나설 엄두는 못 내었다. 대신 모순덩어리 사회구조 속에서 뜻
을 펴지 못한  소외된 한유와 빈사들은 저항적 지식인이 되어 전국을 유람하며 농민들을 각
성시키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규합, 사회구조를 그 토대부터  흔들어 놓는 '조선식 민주
화투쟁'을  전개하였다. 더구나 19세기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서양세력의  침입이라는 전
대미문의 양상을 보임으로써  조선사회는 언젠가 닥쳐올 서양 오랑캐의 침공에 대한 위기의
식이 높아졌다. 이러한 국내의 봉건적 모순의 심화와  양이침공에  대한 불안감은 현실도피
적인 요소를 이루고 있는 정감록 사상을 전국적으로 번지게 하였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전국을 무대로 민중들과 소외된  지식인들의 한에 불을  지폈던 '직
업적  봉기꾼' 이필제의 구호와 행동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현실을 극복하며 내일을 준비하
다 좌절해갔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일반적으로 이필제란이라고 하면 1871년(고종 8) 3월 10일 이필제가 동학의 제2대 교주인
최시형과 함께 경북 영해에서 봉기한 사건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사실 그는 1869년부
터 1871년 말 체포되어 처형당하기까지 3년간 진천, 진주,  영해, 문경 등지에서 4회에 걸쳐
연속적으로 반정부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필제가 처음 반정부 구호를 내걸고 거사한 것은 1869년  진천작변이었다. 하지만 첫 거
사부터  내부 밀고자에 의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밀고자는 김병립이었다. 그러나 첫 
거사 실패에 좌절할 이필제가 아니었다. 그는 이듬해 다시 진주에서  난을 일으켰다. 이 모
의에서 이필제 외에도  정만식, 성하첨, 양영렬 등 직업적  봉기꾼들도 함께 주도하였다. 그
러나 이번에도 조용주 형제의 투서와 전낙운의 밀고로 발각되었다.
  삼세번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세 번째 이필제는 1871년 3월  영해에서 궐기하였다. 드
디어 거사에 성공, 전 조정 관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특히 이 거사에서 이필제가  종
전과는 다른 지도력과 조직력을 발휘하였다. 특히 동학 창시자  최제우의 순교일인  3월 10
일을 거사일로 잡고, 교조신원을 기치로 동학교도를  조직적으로 끌어들여 거사에 성공하였
다.
  특히 우리 나라 운동사에서 이 영해란에 대한 평가는 바로 농민봉기의 맹아적 성격을 지
닌 거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난을 통해 반정부 인사의 주자로서의 자신감을 얻은 이필
제는 다시  조령에서 난을 일으키려  하였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그의  편이 되어주지를 
않았다. 네 번째 거사 실패로 2년간 4회에 걸친 이필제의  반정부 투쟁은 형장의 이슬과 함
께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상이 바로 이필제난의 자취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이필제를 직업적  봉기꾼 내지
전문  반란지도자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4회에 걸친 반란  가운데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
1871년 영해봉기이므로, 이필제의 난을 영해봉기로 달리 부르기도 한다.
  이필제는 1824년(순조24) 충남 홍주에서 태어나 1871년(고종8) 조령거사  실패로 체포, 형
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아버지는 이규묵이다.  태어난 곳은 홍주이나 성장기 대부분을  충북
진천에서 지냈다. 스스로 "어려서부터 책을 읽고  자랐다"한 것으로 보아 그의 신분은 잔반
계층으로  이해하고 있다. 원래  그의 이름은 이근수였으나 필제로  고쳤으며, 급제 후에는 
이홍으로, 다시 주지문으로 성명을  바꾸었다. 진천작변에서는 김창정  또는 김창석, 진주와
거창에서는 주성칠, 주성필로,  영해에서는 이제발로, 문경에서는 진명숙  등의 가명을 쓰며
수색의 그물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