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19세기의 대표적 변란 - 광양란과 이필제의 난(3)

구름위 2013. 6. 19.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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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조 이름을 내걸어 거사에 성공하였는가? - 영해작변


  이팰제가 세 번째로 기도한 영해작변은 1871년 3월 10일  동학교조 신원운동을 가탁하여
영해지방의 동학의 조직을 이용, 거사하였다. 특히 4차례 변란 가운데 유일하게 거사를 일으
키는 데 성공하였다.
  진주거사에서 실패한 이필제가 고종 3년(1866)부터 알고 지낸  영해의 이수용과 남두병을
찾아간 것은 고종 7년 10월 전후한 무렵이었다. 당시 이필제는 스스로 동학교도로 자처하며
영해지역의 동하교도들을 포섭한 다음,  최시형에게 사람을 보내  교조신원운동을 가탁하여
거사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필제는 참여를  거부하던 최시형에게 최시형의 측근이던
이인언, 박사헌등을 여러 차례 보내 설득한 끝에 드디어 고종  8년 2월 최시형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최시형을 만난 이필제는 자신은 민족의 시조 단군의 영령으로서  이 세상에 나온 전지전
능한 인물이라고 소개하고 거사의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 한편으로는  교조의 치욕을 씻고,
한편으로는 민중을 온갖 재앙에서 구원하려는  뜻에서 중국에서 신왕국을 건설하려  한다는
의도를 전하였다.
  "내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고, 조정에서도 알기 때문에 5영이   모두 감응하고 6조가 머리
를 돌린다. 이 어찌 천운이 아니겠는가. 그대들이 만약 기꺼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대들의 목
숨은 내 손에 달렸으니 따르고 안 따르고는 내가 알  바가 아니다. 폐일언하고 선생이 억울
하게 돌아가신 날이 3월 10일이다. 그날로 정하였으니 다른 말은 하지 말고 따르라."
  아주 담대하고 구체적인 말로써 당시 동학교도의 최고의 어른으로서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던 최시형조차 압도되었다. 이필제의 수려한 외모와 언변뿐만 아니라, 이필제가 취제우의
신원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최시형은 그의 계획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보여진다.
  한편 이들은 세상이 어지러워 곧 왜선 수천 척이 쳐들어와 난리가 날것이니, 의병을 불러
모은 연후에야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퍼뜨려 민심을 동요시켰다. 그리고 이필제가 동해
의 섬에 있는  정진인 혹은  이인이라는 말로 사람을 끌어들였고, 거사에  성공하면 관직을
주겠다는 말로 군량을  조달하려 하였다. 이러한 모의과정에서 맹활약한  것은 정치겸과 동
학교도인 강수(다른  이름은 강사원 또는 강시원) 그리고 남두병이었다.
  정치겸은 가장 많은 사람들을 합류시켰고, 강수는 친인척 등을 통해 5백 명을 모았다.  역
시 동학교도인 정인철은 이미 오래  전부터 거사를 준비해왔다고 취시형에게 밝히면서  3월
10일의 거사를 다짐받고 있었다. 또  1866년부터 이필제와 교류가 있었던  남두병은 자기가
거느린 300여명을 이끌고 동참하기로 하였다.
  거사일인 3월 10일, 1차 집결지인 우정동 박영관의 집에  모인 150명의 일행은 먼저 도록
을 만들고, 중군, 별무사, 집사 등의 직책을  정하였다.  또한 성 안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염탐꾼을 파견하였다. 황혼 무렵 산에 올라 제사를 지낸 다음,  조총과 죽창, 칼  등으로 무
장하고 관아에 쳐들어간 것은 밤 열시경이었다. 관아에 쳐들어갈 때 그 수는 5600명으로 늘
어났다.
  광양란과 마찬가지로 난군은 먼저 무기 창고를  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고 부사를 죽인
다음 격문을 내걸었다. 격문에는 "이  거사는 다만 본관(영해부사)의 탐학이 극심하기에  그
죄를 성토하는 거시고, 읍민들을 해칠 마음은 없다"고 썼다. 이필제는 영해를 떠나 영양으로
가는 길에도 인근의 동민들을 모아놓고 위무하는 글을 써보내기도 했다. 또 격문과 함께 탈
취한 돈 150냥을 다섯 동네의 우두머리를 통해 동민들에게 나누어주며 민심을 안정시켰다.
  이필제는 그날 밤 여세를 몰아 영덕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동모자들의 반대로 미
수에  그쳤다. 원래 영해를 공격하고 서울로  직향하고자 다음날 일찍 영해 관청을  떠났다.
이필제는 영양으로 가는 도중 인근 동민들을 위무하였다. 주변의 주민들을 잡아다가 병사로
삼자는 주장도 반대하며  절대로  주민들을 동요시키지 말라고 하였으며,  부하들이 민가에
방화하자 명령을 듣지 않는다며 처벌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민인들의 힘을 얻어야 거사에
성공할 수 있다'는 이전 변란 시도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응은  예상
과 달리 냉담하였다. 더욱이 인근   고을의 관군이 몰려오자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일월산
쪽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영해란에는 수많은 동학교도들이 참가했다. 체포된  자들 중에는 동학교도가  많았다. 또
거사 당일에도 참가자들의 복장을 청색과  홍색으로 표시하여 동학교도와 평민을  구분하였
다. 이런 이유로 일부 학자들은 영해란의 기본 성격을 "교조신원원동" 또는 "동학란"으로 보
기도 한다. 물론 최시형을 비롯한 동학교도들은  기본적으로 동학교도의 입장에서 교조신원
운동에 자원 참가한 것뿐이다.
  따라서 영해란은 기본적으로 진천에서부터 남해와 진주 등 이필제가 주도한 일련의  거사
의 연장으로 파악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영해란 이후  이필제는 교조신원 등 동학과 관련
한 어떤 주장이나 행동도 취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교조신원은 한갓 이필제 거사의 수단
이었을 뿐이다. 이것은  이필제가 최시형을 만났을 때 자신은 천명을  받은 사람으로  뜻하
는 바는 중국에서의 창업이라는 표현에서 확인된다고 한다.
  물론 동학교도들도 이필제가 그들과 다른  뜻이 있었음도 알고 있었다.  당시 동학교도의
우두머리는 최시형이었지만, 박사헌, 이인언, 전동규들은 최시형에게  "우리가 그 무리에 들
어가는 것은 사리에 가깝지 않고, 이필제가 교조신원이 아닌 다른 듯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을 알지만 교조신원을  주장하기 때문에 따른다"고  하여 최시형이 동참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한편 이필제의 변란에 가담한 동학교도 가운데는 신향세력이 많다. 이것은 종교적 입장보
다는 향권을 둘러싼 구향과의 대립에 동학교단의 힘을 이용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
으로 이해하고 있는 학자도 있다.
  이필제는 동학교도만을 이용한 것은 아니었다. 진주거사 실패로 영해에 온 이필제는 진천
이나 진주에서와 같이 그 지역 변란세력과의 담합을 꾀하였다.  대쵸적인 인물이 바로 남두
병이다. 남두병은 경전에도 밝고 실무에도 능하였다. 1866년부터   이필제와 교류가 있었고,
휘하에  3백여 명을 거느리고 변란에  동참한 실력가이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을 변란에 
끌어들였고, 영해 관아를 빠져나갈 때도 이필제와 함께 가마를  타고 갔다는 정치겸이나 점
술에 밝고, 자칭 모사라고 한 이군협도 영해 일대를 근거로 한 반정부세력이라 할 수 있다.
  드디어 1871년 3월 10일 수백  명이 영해부의 관문으로 난입하여 부사를  살해하고 인부
를 강제로 빼앗았다. 부사 이정이 항의 질책하다가 피살되었다. 난 발생 보고에 접하자 조정
에서는 즉시 부사과 이정필을 영해부사로 파견하는 동시에 안동부사 박재관을 안핵사로  파
견하였다. 난의 진압을  소홀히 할 수 없다 하여 부호군 한치림을  영해부사와 접하고 있는
영덕현령으로 파견하고  전 부사 이정을 이조판서로 승진시켰다.
  안핵사의 보다 자세한 보고에 의하면, 반란군은 100여 명으로 그 가운데에는 자칭 모사가
있고  또한 정탐꾼이 있어 동정을  사찰하기도 하였으며, 행동시에는 각각 대를  나누어 몇
사람이 이들을 통솔하고 허리에는 백기를 꽂은 자가 향도가  되었다. 난도들은 관문으로 돌
입하자 먼저 무기를  탈취하고 이어서 옥문을 열어 죄수를 석방하고 부사를 살해한 후 인부
를 탈취하고, 소를 잡아 무리에게 나누어주고 난도들의 일부는 철창을 들고 관문 밖을 감시
하였다고 한다.
  이상으로 볼 때 영해란도 광양란과 같은 성격의 변란이다.  무기를 탈취하고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배포해주는 등으로 볼 대 그렇다. 하지만  광양란의 경우 난군들이 성을 점거하
고 있다가 현감을 이끌고 온 창솔군에게 소멸되었지만, 영해란의  난민들은 스스로  흩어졌
다. 난민들의 그후 행동은 자세하지 않으나, 일부는 영양을 거쳐 조령관에 집결하여  변란을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이상과 같은 사정들을 고려할 때, 영해란이란 진천, 진주작변과 마찬가지로 정감록을 이
념적 무기로 한 변란이다. 다만 영해에는 오래 된 신향과 구향의 갈등,  이것과 깊은 관련을
가진 동학교도 조직 등 변란에  이용할 만한 좋은 자원이 있었고,  이필제는 이러한 자원을
잘 이용함으로써 거사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영해란은 동학이  변혁의 무기로 활용
될 수 있는 좋은 자원을 확인해 주었다는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영해민란의 주모자는 이제발, 즉 이필제,  김운균, 강사원, 남두병,  박영관  등 5명이었는
에, 일부는 도망가고 일부는 죽임을  당하였다. 조정에서는 안핵사의 보고에 따라  자진해서
참여한 김인철 난민들과 부화뇌동한 장성진, 모사를 자칭한 이군협, 스스로 염탐꾼이 되어
동정을 사찰한 박기준 난민의 심복이었던 박한용, 흉록에 이름이 들어 있는 권석중,  약속
을 들어준 이병권, 분대를 지휘  감독한 정덕창, 정창학 한상엽, 군기를 탈취한 김천석, 이
기수, 남기환, 동헌에 들어가 창호를  파괴한 신화범, 포도청으로  달려가 동정을 살핀 권두
석, 철창을  들고 문 밖을 살핀 이재관, 허리에 백기를  꽂고 향도  역할을 한 최기락, 연환
을 지고 다닌 황억대, 소를   잡아 동지들에게 나누어준 허성언, 부자,  형제가 함께 참여한
취준이, 박영빈, 불을 들고 선구가 되었으며 죽창을 들고 후원이 되기도 한  김창복, 박명관,
임영작, 손경석, 최영화, 김정환, 박한대, 박춘집, 김일언, 임욱이, 반군에 내응한 박영수 등32명은 관찰사로 하여금 군민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효수하게 하였다.
  또 민란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명부에 그 이름이 올라와  있던 전제옥, 전종이 2인을 비
롯하여  20여 명을 먼 외딴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정백원 이하 10명의  죄수와 김순록
이하 19명 죄수는  수령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였다.

마지막 불꽃이 타다 - 조령작변


  이필제의 4번재 시도는 고종8년(1871) 8월  문경의 정기현과 도모한 조령작변이다.  이때
이필제는 진명숙이라는 또다른 가명으로 난을 주도하였다. 조령작변의 명분 역시 "동정서벌
하여 제세안민한다"는 것이었다.
  이 난의 원래 계획은 "전라. 충청, 경상의 3도 사람들을 모아 사원철폐에 대한 반대집회를
열어 이를 기회로 조관을 빼앗고, 이러 문경, 연풍을 차례로 공략하여 마침내 태원성을 파한
후 서쪽으로 향한다"는 것이었다. 역시 거사계획은 광양란을 모델로   하여 서울 진격을 그
최종목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필제는 영해란 이후 영남인 권성거와  함께 그해 3월 정기현의  집으로 가서, 진천작변
때  동모했던 괴산 사람 임덕우와 최응규를 불렀다. 이들 두  사람은 이필제의 연락을 받고
정기현의 집으로  와서 정기현에게, 이필제는 권성인이 아니라 홍주에 사는  이홍임을 밝히
고, 그에게 영웅호걸의 재주가 있고 손바닥에는 천문이 있으며 그의 뜻은 북벌에 있다고 하
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먼저 조선을 정기현에게 주고,  이필제와 김낙균, 초응규등은 정기현
으로부터 많은  병력을 얻어 중원을 정벌하기로 약속하고 난을  구체적으로 준비하였다. 요
컨대 이필제는 진천작변과 마찬가지로 정감록을 이씨의 조선왕조를 부정하는 이데올로기로
이용하면서 이미 정감록을 이용하여 난을 계획하고 있던 세력과 제휴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은 정씨가 아니므로 자신의  목표는 조선 타도가 아니라 북벌에  있다고
하였다. 이필제는 정기현에게 "서호주인은 정가로서 조선을 경영하고, 동산주인은 권가로서
남경을 도모한다"는 참서를 들며 원대한 자신의  계획을 정당화시키고 사람들을 모았다. 동
모자들에게는 조선은  정기현에게 맡기고, 그에게 병력을 빌려 전횡도를  거쳐 등주와 채주
로 들어가 중원을 취하려는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영해에서 동학을 이용하여 거사에 성공항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지지집단을  찾았
다. 그런데 마침 당시 대원군의 실정과 서원철폐령으로 전국  유림들이 집단 상소와 상경을
하고 있었다. 이에 이필제는 백성들의 고통이 오늘과 같은 때가 없었다고 천명하고, 다시 서
원철폐의 최대 피해자인  유림들을 그의 지지자로 보고 서원철폐  반대  집회를 이용, 민중
을 모으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이필제는 선비된 자의 도리고서 어찌 입을 다물고만 있겠는
가 하며, 초곡에 유림들이 모여 복합상소를  하여야 한다는 조령유회의 통문을 돌려 변란을
꾀하고자 했다.
  정기현은 이 통문을 권응일에게 전하여 내응을 약속받았고, 정기현의 심복으로서 경기 음
죽에서 단양 산내로 이사한 최해진은 음죽 사람들을  모으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이필
제, 김낙균,  최응규 등은 충주,  괴산, 연풍 등지의 일을 담당하였다.  특히, 김낙균은 5,6년
전 토호사로 정배당한  적이 있는 연풍에 사는 정해청을 동지로 설득하면서 정감록의 참설
을  인용하며 조선왕조의 국운이 이미 쇠하였음을 논하고 은근히 새로운 사회를 위한 거사
라고 부추겼다.
  또 이들은 "요즈음 영남의 선비들이 치송도회라고  일컫는 것도  실은 이런 심정을 표한
것이며 영남 전체가 모두 한마음으로 서로 약속되었다"거나 "밖으로는 서양 오랑캐가 8월에
다시 오기로 약속되었다"는 말로 유림세력을 끌어모았다. 풍기의 권응일, 충주의 송회철, 상
주와 김공선 등은  각기 백여 명씩 동원하기로 하였는데, 그 방법은 모두 유회를 가탁한 것
이었다.
  거사일을 8월 2일로 잡혔다. 원래 7월 29일을 거사일로  택하였으나, 한양 사람들을 동원
하려던 계획이 늦어져 연기하였다. 일단 조령에 모여 먼저 문경읍을 탈취한 다음, 한패는 괴
산, 연풍으로  직향하고, 또 한편은 충주를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권응일은 대원수, 정
기현은 진인,  정해창은 모사, 김원명은 선봉 등 각기 직책을 맡아 거사를 진해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들은 어이없이 붙잡히고 말았다. 김태일이라고  가명을 쓴 정기현이 동네사람에
게  붙잡혀 거사계획이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8월 2일 50-60명이 조령 주막에서  머물렀는
데, 조령 별장이 군사를 풀어 군기고를  지키게 하였던 바, 야반에 이들이 주막을  출발하여
일제히 고성을 지르며 군기고에 난입하였다는 것이 보고된 이후 이들의 동정은 이미 관에서
주목되고 있었던 터였다. 그런데 주막에 있었던 김태일이 술에  취해 다리에 떨어지는 바람
에 모든 것이 탄로난 것이다.
  그런데 공초에서 정기현은 당초 수천 명이  모의하고, 조령에서  군기를 탈취하여 병란을 
야기코자 계획한 지 오래 되었으며 군기탈취를 위하여 매복하고 있는 자들이 천여 명이라고
허풍을 떨었다. 결국 이들은 경상감사의 주관하에 상주진과 안동진에 나누어 수감되고, 주모
자들인 정기현, 정옥현,  진명숙 등 3인은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정기현은 35세로서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충청도  단양으로 이사하였는데, 그는 정몽주
의  후예로서 유업에 종사하였다. 태백산의 요승 초운을 지나치게 믿어 남다른 야망을 갖고
이를 실현코자  300일 산중에서 기도하였다. 그러던 중 이필제를 만나 의기투합하여 작변을
꾀하고자 많은 무리를  모았던 사람이다.
  정옥현은 38세로 정기현의 형이다. 동생  기현과 요승 초운의 감언이설을  믿고 이필제의
언번에  감명받아 조령 초곡에 참여하여 조령관 무기를 정탐하는 데 활약하였다.
  김태일, 아니 정기현의 실수로 사전에  발각된  조령작변의  실패로 이필제는 더  이상의
변신을 할 수 없었다. 조령에서 이필제는  12월  23일 모반대역부도죄로 군기시 앞, 오늘날 
무교동 길에 설치된 형장에서 능지처참되었다. 정기현은 모반대역죄로, 정옥현을 사실을  알
고서 고발하지 않았다 하여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형에 처해지고 동시에 가산이  적몰되었
다. 또 최응규는 이미 포도청에서 심문 도중 사망했으며, 그외 각 영에 나누어 수감되어  있
던 난민들은 그 죄의 경중에 따라  효수되거나  유배되었고, 석방된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진천작변부터 이필제와  함께 행동했던 김낙균을 도망하여 목숨을 부지하였다.
  이필제는 진천에서 이홍, 진주에서는 주성칠로, 영해의 이제발로, 그리고 조령의 진명숙으
로 이름을 바꿔가며 여러 민란을 조도하며 모순덩어리 조선왕조를 극복하기 위한 자신의 꿈
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진주나 조렬란의 목적이 금병도를 거쳐 중국으로 직향하려는 북벌
계획에 있었다는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는 데서 이것이  증명된다. 이를 위해  이필제 등은 
도참설을 이용하여 인심을 선동, 무리들을 불러모았다.
  그러나 반봉건투쟁과 양이침입에 대항해 중국북벌론을 펼쳤던 이필제의 꿈은 수포로 돌아
갔고,  이후 동학교도들은 정부의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한 관
헌의 추적은 경상도뿐 아니라 강원도, 충청도, 나아가 경기도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결국 실
패로 끝났지만 기왕의 연구자들이 밝혔듯이 동일한 사람에 의한 연속적인 반정부투쟁이라는 점, 홍경래란 이후 임술민란을 거치면서 분산적 고립적이었던 민중운동이 비로소 그 괴리를 좁히고 그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이필제의 난은 조선후기 민중운동사의 분명한 이정표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