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생존을 위한 싸움 - 1894년 동학농민전쟁(1)

구름위 2013. 6. 19.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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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전쟁 유적지를 걷다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크게 바뀌어왔다.  우리는 같은 한 사
건을 놓고 '동학란'에서부터 '동학농민봉기', '동학혁명', '동학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 등
여러 이름으로 불러왔는데, 이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같은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평
가를 다르게 만든 것이다. 농민군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동비', '동도',  '비도'였다가 이제
는 '농민군'으로 크게 지위가 달라지게 되었다. 당시의 정권담당자들이나 개화파들은 농민군
을 '동비', '동도' 등으로, 그  사건을 '동학란'으로 불러왔으나, 식민지시대에  민족주의 사
학자들을 중심으로 서서히 그  사건의 역사적 의의와 혁명성,  민중성을 강조하기 시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동학농민본기', '동학혁명', '동학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  등으로 명칭이 바뀌어온 것이다.
  동학농민전쟁 기념물의 기념 대상에 대한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1894년부터 1996년까
지 동학농민전쟁 기념물이 총 61건인데, 기념  대상에 있어서 눈에 띄는 변화가 보였다.  즉
1894년부터 1945년까지는 모두 관군, 수성군, 민보군으로 26건이었는데, 45년 이후에는 관군
이나 수성군, 민보군으로 26건이었는데, 45년 이후에는 관군이나 수성군, 민보군을 기념하는 일은 것은 전혀 없어지고 농민군 지도자나 무명 농민군을 기념하거나, 봉기, 전투, 혁명 등 사건과 관련된 기념물이나 사적지가 기념물로 전환되었다(봉기, 전투, 혁명 등 사건과 관련된 기념물이나 사적지가 기념물로 전환되었다(박명규, 1997 봄 (역사적 경험의 재해석과 상징화 : 동학농민전쟁의 기념물)(사회와 역사)51집). 이는 농민전쟁에 대한 민중들의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여 왔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기념물이 상징한는 의미 체계도 45년 이전에는 국가권력의 힘이라든가, 유교적 충절을 강조한 데 대하여, 45년 이후에는 민중의 혁명성, 보국안민의 애국심 또는 동학 사상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따라서 그 사건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난에서 봉기, 혁명, 전쟁 등으로 격상하고 있다. 1994년에는 동학농민전쟁 100주년을 맞이하여 농민전쟁을 기념하는 대회와 학술적 연구가 곳곳에서 열린 바 있다.
  필자는 일찍부터 동학농민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고부민란이 발발했던 지역에 관심을 가
지고 몇 차례에 걸쳐 그 지역을 답사하고 사료조사를 한  바가 있다. 민란의 무대인 고부군
은 전라우도의 해안에 가까운 평야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의 정읍시는 조선시대의 정읍
현, 태인현, 고부군이 합하여 하나의 행정구역이 되었다.
  필자가 조사한 자료 가운데는 동학농민전쟁의 진원지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수집
한 것도 있다. 이제 그 자료들을 중심으로 해서 동학농민전쟁의 역사를 풀어가 보려고 한다.
  사료가 있는 곳은 고부군의 동북부에 소재하고 있는 수금면이라고 하는 곳이다(지금은 정
읍시 정우면 수금리). 넓디넓은 수금들을 앞에  하고 동쪽으로는 정도산이라고 하는 나지막
한 산이 있다. 비산비야의 넓은 들판 가운데에서는 꽤나 높이 솟은 산이다.
  수금리의 뒤편 해발 151m의 정토산에 올라 남쪽으로 멀리  바라보니 5km쯤에 큰 거북이
서해에 들어가려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는 두승산이 있고, 그  산 너머에 고부 관아가 있었
으며, 고부 관아 못 미치는 곳의 낮은 언덕이 농민군이 관군을 처음으로 격파한 황토재이다.
눈을 서쪽 정면으로 돌리니, 가을을 맞아 수확의 황금물결을 이룬 수금들이 펼쳐지고,  그에
이어 배들이 이어졌다. 들판 가운데 비산비야의 낮은 구릉지대에  의지하여 크고 작은 마을
들이 취락을 이루고 있다. 들판을 4-5km쯤 건너 몇 개의 마을을 지나면 전봉준이 농민들을
불러모아 사자후를 토했던 말목장터가 있고, 말목장터에서  조그만 언덕을 넘어가면 전봉준
이 살던 고가가 있다.
  다시 눈을 서북쪽으로 돌려보면 멀리 동진강이 있는  듯 없는 듯 들판 사이를 흐르고 있
고, 그 어딘가에 물세 다툼의 진원지인 만석보가 있다. 만석보를 지나 3-4km를 더 가면  농
민군의 1차 봉기의 집결지 백산이 있는 둥 마는 둥  들판 가운데 버티고 있다. '앉으면  죽
산이요 서면 백산'이라는 조그만 야산이 농민군 1차 봉기의 집결지인 것이다.

평야지대라는 자연적 조건


  그 마을은 정토산의 서쪽 기슭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무릉도원과 같은  곳이었다. 꽃이
한창인 때에 수금들에게서 멀리 바라다본 그 마을은 복숭아꽃,  살구꽃 그리고 대나무 숲으
로 둘러싸인 아늑한 마을이었다. 수금마을은 단지 김해 김씨와 성주 배씨 두 성씨가 숙종대
에 태인 쪽에서 이곳으로 들어와서 3형제를 낳았는데, 이 세 집이 번성하여 한창 대는 거의
100여 호를 헤아리는 마을을 이루었다.
  수금 김씨 종가댁에 가서 그 선조들과 관련된 자료가 있는지를 조사하였다. 기대한 것 보
다 소득은 없었지만, 18-19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소지초, 매매문서, 수표 등 몇 가지 자료
를 찾을 수 있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농민전쟁 기간 중에  소모사로부터 발급된 것으로
보이는 증명서이다. 소모사이 서명, 즉 수결과 압인이 있는 이 증명서에는 종손의  증조부되
는 이의 직역과 성명, 연령, 거주지가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몇 장의 소지초가 있었는데, 그
중에는 향교의 향전을 금지하라는 고부군수의 하첩과 그 이면에는 잡역을 면제해주고  면을
통폐합해서 역을 줄여달라는 수금면 민인들의 등장이 있었다. 또한 정읍천과 태인천이 압류
하는 곳에 위치한 수금들의 제언 축조와 관련된 각 면민들의 갈등이 드러나는 소지초를 확
인할 수 있었다.
  전봉준의 재판기록을 보면, 민란의 원인을 고부군수의  가렴주구에 있었다고 하면서 가렴
주구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부정을 말하였다.


  1. 민보 아래에 보를 쌓고 강제로 민가에 전령을 내려, 좋은 논은 한 마지기에 2말의 수세
를 하고, 나쁜 논은 한 마지기에 1두의 세를 거두어 모두 700석을 거둔 일.
  2. 버려진 땅, 즉 진황지에 백성들로 하여금 갈아먹게 하여, 관가에서 문서를 주어 징세하
지 않는다고 하고는 추수할 때에 억지로 거둔 일.
  3. 부민의 돈 2만여 냥을 강제로 빼앗은 일.
  4. 그의 아버지가 전에 태인현감을 하였는데, 그 아버지를 위해 비각을 건립하는 데  천여
냥의 돈을 거둔 일.
  5. 대동미를 민간에서 징수할 때는 좋은 쌀 16말씩 거두고는 상납할 때는 나쁜 쌀을 사서
이득을 남겨먹은 일.


  그중에 보세를 강제로 거둔 일이 가장 첫머리에 거론되고 있는데, 역시 그 시기에 호남지
방의 평야지대를 범람하는 물길을 잡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고, 그것을 이용하여 수령
이 수탈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보나 제언을 쌓는  일은 단지 관과 민뿐 아니
라 각 면민들 사이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이제 새로 발굴된 사료를 매개로 하여 당시 제언의 축조를 둘러싼 문제들이 어떠하였는지
를 살펴보기로 한다. 새로 찾은 자료 중에서 제언 축조의 시비에 관련된 등장이 2매, 수금면
민인들에 부과된 잡역과 면의 통폐합에 관련된 등장이 1매  남아 있다. 이를 중심으로 만석
보와 그에 관련된 들의 수리 상황을 검토해보기로 한다.
  수금들은 정토산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정토산의 서쪽으로 정읍천이 흐르고,  북쪽으
로는 태인천이 흘러 동진강으로 합류한다.  이 지역은 원래 홍수나 물이  많게 되면 범람을
하여 둑을 쌓고 관개를 하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사실 요즈음의 넓은 호남평야가 경작할 수가 잇게 된 것은 그다지 오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8세기 후반의 기록인 (택리지)에  요즈음의 평야지대로 일컬어지는 곳에
서는 풍토병이 있다고 하여 사대부가 살 만한 곳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라도의 남
원, 구례나 경상도의 성주, 진주와  같은 산곡간, 즉 요즈음의  지질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산록완사면 지역이 사대부의 살 만한 곳으로 지목되었다. 산으로부터 복류하여 흐르는 물을
마시고 계곡물을 이용하여 관개를 하는 곳에 일찍부터 마을이 생기고 사대부들이 살기 시작
하였던 것이다. 한편 삼남 지방의  평야지대는 풍토병이 있어서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되지
못한다고 평가하였다. 따라서 전라도에서 평야지대는 풍부한 물을 얻을  수 있는 지역을 중
심으로 관개, 개간이 되면서 농경지가 확대되어갔다고 생각된다.
  (택리지)에서 전라우도 지역에 대하여 "태인, 고부 및 해안가의  부안, 무장 등 읍은 모두
풍토병이 있다"고 평가하였다. 따라서 동학농민전쟁의 진원지인 배들, 수금들 등의 평야지대
도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널리 개간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5만분의 1 지도를 잘 살펴보면
새말이니, 새터 등의 이름이 많이 보이는데, 이들은 이러한 강물의 범람이나 풍토병과  같은
자연적 조건을 극복하기 시작한 19세기 이후에 형성된 마을들로 추측된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을 가진 수금들, 배들은 19세기 후반까지도  완전히 홍수의 범람을 극
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두 장의 제방축조에 관련된 민인들의 등장을 중
심으로 이러한 자연조건을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민인들과 관과의 갈등관계를 검토
해보기로 한다.

관권과 민권의 충돌의 현장-치수와 만석보


  동학농민전쟁의 물세의 근원이 되었던 만석보는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여  동진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곳에 있다. 먼저 수금들과 예동들, 북촌들, 장순들, 우일들을 둘러싼 분쟁을 보
기로 하자.
  우리들이 경작하는 수금들은 예동들과 북촌들 사이에  있어서 개벽 이후에 세 들이  원래
수해가 없고 산이 무너지거나 내가 막히는 일이 없이 물이  제길을 잘 따라 흘렀는데, 중년
이후에 산이 무너지고 내가 막혀 물이 제길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서쪽은 예동들의 민인들
이 긴 둑을 쌓으니 큰 물이 질  때마다 물이 북쪽으로 흘러드는고로 북촌들 민인들이 그에
이어서 긴 둑을 쌓았습니다. 이에 수금들은 두 들 사이에 끼어 서쪽과 북쪽의 긴 둑이 만나
는 곳에 마치 항아리의 주둥이처럼 되어 물이 모이는 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상류인
장순들에서 시작하여 우리도 긴 둑을 쌓아서 여러 물들이 폭주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니 우
일면의 민인들이 전에 없는 일이라고 하며 세력을 끼고  터버렸습니다. 이에 저희들 세력이
없는 백성들은 어찌할 수 없이 500여 섬지기의 목숨이 달려 있는 들이 물구덩이가 되어  밥
먹을 희망이 없게 된 것이 한두 해가 아닙니다.
  수금들을 경작하는 민인들은 예동들과 북촌들의 민인들이 먼저 긴 제방을 만드니 그 사이
에 낀 수금들이 큰 물이 지면 물바다가 되어 그 물을 막기 위하여 장순들에 잇대어 둑을 쌓
았는데, 그 둑을 쌓음으로써 피해를 보게 된 우일면의 민인들이 그 둑을 터버렸다는 것이다.
수금들의 민인들은 예동과 북촌의  둑을 이용한다면, 수금에서 장순들에  이어서 막은 둑을
허용하고 그렇지 않다면 모든 제방을 터달라고 청원하였다. 이에  대한 관의 결정이 어떻게
내려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 이 지역 평야지대의  관개를 둘러싼 마을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또다른 민장이 있는데, 이 경우는 수금의 민인들과  이선달이라고 하는 개인과의 분
쟁이다. 선달이란 원래 과거에 합격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조선후기가 되면 과거제도
가 흐트러지면서 전쟁이나 큰 공사 때에 수백 몇 내지 수천 명의 무과 합격자를 뽑았기  때
문에 무과 출신들을 천하게 여겼다.  따라서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는 19세기  말 즈음에는
선달이 무뢰배를 지칭하는 말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도 "매번 수백 인
을 뽑다 보니 스스로도 천하게 여기고 관청 심부름꾼의 청사나 주막의 벽에까지 홍패가 걸
리지 않은 곳이 없고 향곡의 무뢰배들이 약간 말을 잘 하고 술 몇 잔만 사도 얻을 수 있다.
이웃들이 우습게 알고 아무개 선달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이 등장에 나오는 이선달도 그
러한 무뢰배의 한 명으로서 고부 관아나 전주 감영과 연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제 이선달이 둑을 막는 일로 의송을  올려 특별히 향소를 파견하여 잘못을  조사하였는
데, 저희들이 사는 세 면의 민전들이 해를 입는 것이 특히 크다는 것은 향소의 도형에서 볼
수 있습니다만, 저희들도 어찌 함께 호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개 세 면의 민전이  태
인과 정읍 두 큰 물이 합해지는 곳에 있고 또 예동, 북촌 두 들판의 사이에 있는데, 두 촌의
민인들이 각각 긴 둑을 쌓아 이미 수해를 막아서 두 큰 물이 합해지는 구멍이 상처의  구멍
처럼 좁아서 일시에 비가 오면 세 면의 민전은 도리어 물을 담는 곳이 되어 완연히  하나의
큰 강처럼 되는데, 저희들이 해를 입어 원망을 한 것이 몇 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이 물 구멍 안에 크게 둥근 둑을 쌓아서 전에 상처 구멍과 같던 물구멍이 도리어  바늘구멍
만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정읍, 태인의 두 큰 물이 흘러들어오게 되면 세 면의  민인
만 홍수의 피해를 당하게 되니 장차  어떻게 농사를 짓고 살겠습니까? 또 이선달이  하려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사욕으로  진전을 기간할 계책입니다만, 세 면의  민전은 오래 전부터
원전인바 한 사람이 사사로이 기경한  것으로 만민이 경작하는 원전을 폐할  수 있으며, 또
이선달이 몰래 민인들의 의송이라고 사칭한 것으로서 관가에서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거짓
관령으로 조역하여 둑을 쌓았으나, 저희들의 부역으로 도리어 그 해를 입는 것은 제 손으로
뺨을 때리고 돌을 안고 물에 들어가는 것과 같으니, 어찌  스스로 사지에 보낼 이치가 있겠
습니까?
  이 민장의 초고도 관의 판결이 없어서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선달이라
는 자가 태인과 정읍의 두 물이 합해지는 곳에 둥근 둑을 크게 지으려고 하고 또 민을 부역
에 동원하는 것을 보면, 관권과 유착된 세력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이선달이 전주감영에  의
송을 올려 유리한 판결을 받아냈으니, 아마도 감영과 결탁한 세력으로 추측된다.
  보통 백성들이 관에 청원할 일이 있으면 청원서를 올리는데, 그것을 소지라고 한다.  평민
이하가 올리는 소지를 발괄, 원정이라고도 하고, 여러 백성들이 함께 올리면 등장이라고  하
였다. 그런데 관할 읍에서 제대로 된 판결을 얻지 못하였을  때는 상급 관청인 감영에 다시
소지를 올리게 되는데, 그것을 의송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선달이 의송을 올렸다는 것은  감
영에 올린 것으로 이선달이 감영과 연결된 세력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수금면 민인들의 주장은 세 면의 민전이 태인현과 정읍현이 두 물이 흘러들어와 합해지는
곳에 있고, 예동들과 북촌들에 이미 둑이 있어 물이 빠지는 구멍이 좁은데, 기존의 둑  위에
다시 둥근 제언을 막아 홍수가 진다면 그곳은 저수지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지
금 이선달이 막은 둑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 일대의 들판은 식민지
시대 이후 여러 차례의 농지정리와 관개사업으로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
다. 그러나 민장의 설명으로 추측해보건대, 이선달이 쌓은 둥근 보라는 것이 바로  만석보가
아닌가 생각한다. 설령 이선달이 만든 보가 만석보가 아니다  하더라도 적어도 만석보와 이
선달이 쌓은 둥근 둑은 민인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관의 권력을 빌려 그 일대의 민인들을 동
원하여 축조했다는 점에서 만석보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보로 생각된다.
  전봉준의 공초에서 농민봉기의 원인을 말하는 가운데, "민보 아래에 보를 쌓고 강제로 민
간에 전령을 내려 좋은 논은 한 마지기에 2말의 세금을 거두고, 못한 논은 한 마지기에 1말
의 세금을 거두어 모두 700여 석을 거둔 일, 진황지를 백성으로 하여금 갈아먹게 하여 관가
에서 문서를 주어 징세하지 않는다고 하고는 추수할 때에 억지로 거둔 일"을 첫째로  든 것
은 모두 그러한 정황을 말해준다. 만석보라고 하는 이름은  사료상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
으로 후대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관의 수탈과 잡세


  그런데 위의 두 장의 제언 관련 소지 외에 그곳에는 면의 민인들이 올린 또 하나의  소지
가 있다. 이 민장에는 수금면민의 어려움이 그대로 요약되어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
과 같다.
  가호가 모여서 리가 되고 리가 모여서 면이 됩니다. 저희들이  사는 면은 가호수가 백 호
에 못 미치고 리가 셋에 불과하니 이를 면이라고 하겠습니까? 대개 본면은 예전에는 실호가
200여 호에 가까워서 연요와 신역도 그 수만큼 되었습니다. 또 다른 잡역을 막기 위하여 지
보에 의탁하여 매년 관에 납부하는 돈을 65량으로 정하고 가을 추수를 하면 비납하기로 한
것은 바뀔 수 없는 규정입니다. 근년 이래로 계속 수해와  한해를 입어 백성들이 점차 유산
하여 마을도 빈터가 되어 당시에는 200여 호였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원호를 계산하면
70-80호에 불과합니다. 당초에 200여 호가 당하던 역을 70-80의 산락한 호에서 책출하니 면
이 예대로가 아닌데, 역은 전일의  배가 되어서 민인이 어찌 지탱하겠으며  면은 어찌 능히
모양이 되겠습니까? 불과 몇 달 사이에 대호가 4-5인, 소호가 10여  인이 계속 이산을 하고
혹 다른 읍으로 가거나 다른 면에 가서  살아서 지금 남아 있는 인인들도 안도하지 못하고
아침 저녁으로 흩어질 생각만 하고 있으면서 언필청 여기에서  떠야 되겠다고 합니다. 이러
하니 비록 연역을 독촉해도 위령이 미치지 못하고 향악을 하려고 하여도 흩어진 백성을 합
하기가 힘듭니다. 이런 상태로 그냥 있으면  몇 년 이내에 한 호도 남아  있니 않을 것이니
이 어찌 공사간에 걱정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대개 백성들이 조그만 역을 번거롭게
생각하는 데서 온 것입니다.(수금면민 등장 '군수의 수금면 훈장집강에서의 하철  이면에 등
시됨')
  계속되는 수해와 한해로 백성들은 흩어지는데, 부과되는  잡역은 그대로이니 백성들이 더
욱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반 잡역에서  수금면민이 어렵게 생각하는 잡역
은 다음 네 가지였다. 첫째 한정 20여 명을 마을에서 징수하고 대정을 세우지 않는 것, 둘째
속오군 20여 명이 지금은 30명으로 증가하여 1인이 2-3명의 속오군역을 지고 있는 것, 셋째
지보전을 추수 후에 내기로 하였는데, 불시에 독촉하여 동임,  이서가 호미, 낫이나 단벌 옷
을 빼앗아 가니 품을 팔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 넷째 궁민이 거듭된
부역으로 도산하면 면임이 그 책임을  져야 하므로 풍헌, 약정을 서로  하지 않으려고 하여
약정을 임명할 수 없고, 또 두민들을 침탈하여 안돈할 수 없어 유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네 가지 고통에 대하여 수금면민들은 1)부공 한정 20여 명은 이미  감영의 판결을 받았으니
대정으로 분부해주고, 2)속오군 30여 명은 군안을 상고하여  10여 명의 부역을 분간하여 감
해주고, 3)지보전은 보민청이 만들어진 후에 잡역을 면제하는 대신 만들어진 것인데, 본면에
서는 하나의 혜택도 받지 못하니 지보전 60여 량이 오히려  무명 잡세가 되었다는 것, 그래
도 전의 규정에 따라 가을에 납부하게 해달라는 것, 4)면임은 아침에 차임하면 저녁에 도망
하여 맡을 사람이 없으니, 전에도 면을 통합해달라는 정소를 한  것은 이 때문이니 이웃 장
순면과 한 면으로 통합해달라는 것 등을 요구하였다.
  이와 같이 한정, 속오군 등 신역과 지보전과 같은 잡역에 수탈당하는 민인들이 도산을 하
게 되고, 이러한 면 단위의 신역과 잡역을 감당할 수 없는 면임마저 유망을 하게 되어 면임
을 맡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이웃 면과 통합하여 면임의 부담이나마 줄여보고자 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부담을 견디지 못하는 임금노동자나 하민들이 유망하게 되고, 이에  따
라 두민이라고 지칭되는 층들이 따라서 유망하여 결국 면임까지 유망을 하게 되면 그 지역
은 완전히 마을을 이룰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한 장의 '사발통문'


  이상에서 동학농민전쟁 진원지인 만석보 주변의 백성들의 상황을 보여주는 몇몇 고문서들
을 통하여 당시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펴 보았다. 이러한 어려움에 대하여 민인들은 관에 민
장을 올려 시정을 호소하고, 그래도 되지 않으면 감영에 의송을 올려 해결을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민장을 올리는 것 자체가 그다지 쉽지는 않았다. 관의 문턱은 매우 높았다. 다산  정
약용은 (목민심서)에서 그것을 '혼권'이라고  표현하였다. 정약용은 따라서  관아의  하인들
을 제대로 통제하는 것이 선정의 중요한 한 요인으로 보고 문졸들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하
였다.
  문졸들이란 "옛날의 이른바 조예로서, 관속 중에서 가장 교화에 따르지 않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문졸은 일수, 사령 혹은 나장이라고 불려졌는데,  그들이 손아귀에 틀어잡은 권리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첫째는  혼권이고, 둘째는 장권(곤장을 치는 권한)이고,  셋째는
옥권(옥을 지키는 권한)이고, 넷째는 저권(면리의 일과 연락을 대행하는 권한)이고, 다섯째는 포권(범인을 체포하는 권한)이다. 혼권이란 백성이 소장을 가지고 관아문에 이르렀는데 그 호소하는 바가 이속에게 관계될 것 같으면 문지기는 백성을 막아버려, 여러 날 배회하여도 한갓 품을 버리기만 하여 그 백성은 마침내 울며 돌아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다산은 수령
이 된 사람은 모름지기 먼저 다짐하고 거듭거듭 경계하여 백성이 관정에 들어오기를 어머니
집에 들어오는 것 같도록 하여야 하고, 그래도 범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최고형을 시행하
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산의 이와 같은 경고를 목민관들은 제대로 귀담아 듣지 않았을 것이
다. 문졸들이 관아의 턱을 그렇게 높여놓으니, 그렇게 될 경우에는 관과 민의 정면충돌로 이
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대첼 민원이 생기면 먼저 소지, 즉  민장을 제출한다. 그러나 민장 제출의 어려움은  앞에
말한 문지기들의 '혼권'에 부딪히면서부터 좌절을 하게 된다. 이에 민인들은 다중의 힘을 빌
어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려고 하게 된다.
  19세기 이후에 많이 보이는 등장류의 민장은  관에 다중의 힘을 빌려 민원을  호소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다수의 민인들이 연명한 등장, 연판장 등이 등장한다. 등장이나 연판장은 의
견을 같이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서명함으로써 다중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다. 청원의 대상은
다르지만, 예컨대 서얼들이 국가에  자신들의 관직 진출을 허용해줄  것을 요구한 상소에는
무려 천여 명, 순조 대에는 와서는 거의 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서명을 하였다. 그  뿐 아
니라 그들은 민장을 올린 우두머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원형으로  연명을 하게 되는데, 그것
을 사발 민장이라고 하였다.
  한 고을의 관아를 상대로 한  민원의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문중 등장이든  촌락 등장이든
수십 명에 이르는 다수의 민인들이 서명함으로써 관에 압박을 가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
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등장에는 물론 주모자가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주모자를  장
두라고 하였는데, 관에서는 이러한 주모자를 잡아 처벌하게 마련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 이러한 민원을 올리는 과정에서 장
두로 나서 곤장을 맞고 장독으로 죽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 이렇
게 억울하게 죽은 사실에 대해서는 잘 찾아보기가 어려운데,  1936년 그 지역의 향토사가인
장봉선이 쓴 (동학란실기)에는 전창혁이 조병갑의 곤장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
이 서술하고 있다.
  조병갑이 모상을 당하여 집으로 돌아가자 추세를 좋아하는 궁유이속들이 부조를 주창, 이
천 량을 분배하여 향교의 장의 김성천과 전장의 전승록에게  수금을 의뢰한바, 김성천이 이
를 흠용(떼어먹음)하고 말하기를, '병갑은 본군 재직중에  추호도 선치가 없었으며, 또 기생
의 죽음에 무슨 부조냐'고 대언을 토하였다. ...  병갑은 고부 재임을  생각던 중에 이  말을
듣고 원한이 사무쳐 더 적극적으로 재임운동을 하였다. 재임해 와보니  김성천은 이미 죽고
없어 전승록만 잡아다가 곤장을 난타하여 보내니, 돌아온 뒤 장독으로 죽어...
  여기에서 전봉준의 아버지가 향교의 장의를 하였는가 또는 천안 전씨가 고부 지역이 양반
층인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의 죽음에 대하여 많은
구전 자료를 수집하여 사실을 밝히려고 노력한 소설가 송기숙씨의 고증에 의하면, 전창혁이
민소의 장두로 소를 올린 것이 빌미가 되어 장살되었다는  설과, 고부군수 조병갑이 모친상
을 당했을 때의 민부전 까탈로 장살당하였다는 설이 있다는 것을 소개하였는데, 기본적으로
두 가지 설 모두 관권의 폭력으로 살해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송기숙, 1983(동학농
민전쟁의 발자취)(한국사회연구)1. 한길사)
  민인들은 이러한 처벌을 피하기 위하여 다수가 원형으로 연명하여 주모자를 은폐하게  된
다. 수십 년 전에 농민전쟁이 발발된 지역의 한 농가에서 발견된 사발통문도 바로 농민들의
민원을 올리고 그것이 좌절되자 여러 농민 세력들을 규합하고 조직하기 위해서 작성된 것으
로 보인다.
  사발통문은 1893년 11월에 만들어진 것으로 크게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부분은
전봉준 등 발통자 20명이 둥근 원형으로 연명을 하였고, 다음에 '각 마을 집강 좌하'라고 하
여 각 마을의 집강들에게 격문을 보내고 여론이 들끓어서 난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민중들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 서론 부분과, 동학 도인들이 고부군 서면 죽산리의 송두호의 집에 모
여서 행동강령을 정하였다고 하는 본문이  있다. 행동강령으로는 1)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 효수할 것, 2)군기창과 화약고 점령할 것,  3)군수에게 아첨하고 인민을 침탈하는 탐
리를 격징할 것, 4)전주 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직향할 것을 결의하였다. 마지막 부분은 망
실되어서 일부분만 남아 있는데,  추측컨대 군략에 능하고 서사에  민활한 사람을 영도자로
추대하자는 내용일 것으로 짐작된다.
  이 사발통문에서 주목되는 점은 통문의 주도한 것은 동학도인들이라는 것이다. 연명에 참
가한 20명이 모두 동학도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이들 동학도인들로만 거사가 이
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관에 수탈당하여 고통을 겪고 있는 민중들을 동원하였던 것이
고, 민중들을 동원하고 거사의 의사를 전달할 대표로 각 마을의 집강을 설정하였던 것이다.
  아직 사발통문에 대하여 그 위작의 가능성을 의심하는 학자가  있다. 그러나 전후 정황으
로 보아 사발통문이 위작이 아님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발통문과 같은 동학도들의 움직
임이 혁명적 거사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이미 1893년 보은 취회, 삼례 집회 등 교조신
원운동과 농민운동 등을 통하여 그 가능성을 찾아볼 수가 있다. 이들은 이러한 집회를 통하
여 각 지역의 동학 접주들이 서로 연결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사발통문에서 "낫네 낫어 난
리가 낫어"라고 하는 표현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보은, 삼례 집회에서 동학도들과 민중들의
전투성, 투쟁성을 목격한 결과었다. 양집회를  통하여 서장옥 휘하의 남접 세력의  투쟁성이
확인되고 맹아적 형태의 지도부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에서의 집회는 아직 고부 관내의 문제가 초점이었다.  즉,
군수 조병갑의 탐학을 응징하고, 그에 빌붙어 위세를 부리는 이서들을 규탄하려는 것이었다.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하여 처음부터 무력투쟁으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던 것은 1893년 보은 취회, 삼례 집회 이래의 전투성을 계승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 전주를 함락하고 서울로 직향할 것이라고 하는 표현은 지방 정부, 특히 의송 처리에  있어서 감영 세력과 결탁한 이서들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고, 서울로  직향한다고 하는 것을 서울 함락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서울에 있는 최고의 의사 결정권자와의  연맹, 연결을 도모하는 것으로 생각된다(그
것이 뒷날 대원군과의 결탁으로 전개되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