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생존을 위한 싸움 - 1894년 동학농민전쟁(2)

구름위 2013. 6. 19.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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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발통문 참가층


  사발통문에서 군수 조병갑을 효수하고 그에게 아부하여 인민을 침탈하는 이서들을 격징하
자고 주장한 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의 문제가  한 고을 내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물론 군수와 그에 아부하고  탐학하는 이서들을 징계하려고 했다고  하여 고부군
내에서 끝나는 문제는 아니었다. 수령과 이서들의 결탁에 의한  민인들에 대한 탐학은 어느
고을에서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발통문에 서명을 한 통문 참가층의 정체에
대해서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후대에 정리된 것이지만, 이들의 이명,  생몰년 등을 정리해보면 다음의  표와 같다. 통문
작성시 이들의 나이는 15세에서부터 65세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전봉준을 포함한 30대가 13
명으로 가장 많고, 40대가 3명, 10대가 2명, 50대, 60대가 각각 1명이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연령층이 통문의 주모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혹자는 15세밖에 되지 않은 송국섭
의 참여를 들어 통문의 진위를 의심하기도 하는데, 당시  연령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었
고, 또한 10대 후반이면 당시로서는 성혼을 하기도 하는 등의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다지 적
은 나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측면이 있다.


                                          사발통문 참가층
순번   성명    이명(야명/자/호)      생년(통문시 연령)   졸년                  비고
 1    전봉준   초명 영준, 호 해몽    1855년생(39세)     1895년 3월 29일   서울 형사
 2    송두호   자 윤칠, 호 서산       1829년생(65세)     1895년 1월 6일     나주 형사
 3    정종혁   초명 종묵, 호 춘?     1862년생(32세)      1952년
 4    송대화   초명 주언, 호 삼하    1858년생(36세)     1919년
 5    김도삼   초명 진정, 호 도암    1856년생(38세)     1895년 1월 26일    전주 형사
 6    송주옥   자 성문, 호 죽산       1853년생(41세)     1895년 1월 6일     나주 형사
 7    송주성   자 정화, 호 성암       1863년생(31세)     1924년
 8    황공모   자 필수, 호 죽음       1855년생(39세)     1895년 1월 26일    전주 형사
 9    최흥렬   자 도원, 호 덕암       1862년생(32세)     1940년
 10   이봉근   자 순구, 호 해암       1863년생(31세)     1930년
 11   황찬오   초명 학모, 호 지송    1852년생(42세)     1894년 12월 16일  전주 형사
 12   김응칠   초명 두수, 호 입석    1858년생(36세)     1894년 12월 22일  나주 형사
 13   황채오   초명 성모, 호 죽곡    1854년생(40세)     1894년 12월 16일  나주 형사
 14   이문형   자 경언, 호 가암       1875년생(19세)     1917년
 15   송국섭   자 사심, 호 송은       1879년생(15세)     1945년
 16   이성하   초명 한하, 호 근암    1861년생(33세)     1926년
 17   손여옥   초명 성준, 호 하은    1860년생(34세)     1894년                나주 형사
 18   최경선   초명 만석, 호 석암    1895년생(35세)     1895년 3월 29일    서울 형사
 19   임노홍   자 응수, 호 운암       1855년생(39세)     1912년
 20   송인호   자 수칠, 호 인암       1842년생(51세)     1918년


  이들은 최연장자인 송두호의 집에 모여서 거사를  모의하였다. 이들이 동학도였을까 아니
면 근처의 촌락조직의 책임자였을까? 또한 여기에서 동학도들이 호응을 바라 마지않던 집강
들은 과연 누구일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통문을 발송한 이들은 동학도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통문의 본문에 '도인'들이라고 하는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통문의 받
는 이들은 도인이 아니라 각 마을의 집강들이었다. 물론 동학의 조직에 집강이 있다. 따라서
각 마을에 있는 동학 집강들에게  이 통문이 돌려졌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집강은 각 마을의  이정집강, 즉 동학조직과는 관계가  없는 이임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사실상 조선 후기 이래 촌락민들의 공동체 조직은 계속 성장해왔다. 16, 17세기  사족양반
을 중심으로 한 농민 지배조직들은 점차 하층민들의 저항과 내부의 분열에 의하여 약화되고
하층민들을 중심으로 한 촌계가 성장하게 되고, 국가도 공동납의 단위로서 면, 리를  파악하
게 된다. 면과 리는 하나의 생존과 이해관계를 같이 한  하나의 공동체로 성장하게 되는 것
이다. 동학도들이 저항의 단위로서 호응을 바라 마지않았던 것은  각 리의 집강들이었던 것
이다.
  이상에서 주로 농민전쟁의 진원지인 고부지역의 자연적 조건과 사발통문의 배경을 검토하
였다. 고부군 한 지역에만도 수  개의 면이 있고, 면에도 수  개의 리가 있는데, 사발통문의
회람 대상은 고부군의 한 면을 중심으로 각 리에 돌려졌다고 생각된다. 통문이 돌려졌던 당
시의 면 이름은 답내면이었는데, 답내면은 정읍천과 태인천이 만나는 평야지에 위치한 곳이
다. 고부군 자체가 큰 토호양반이 형성되기에는 적합한 지역이 아니었고 형성되지도 않았지
만, 답내면은 사대부의 가거처로는 애초부터 적당한 곳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 지역은  일반
평민들이 어느 정도 홍수의 범람을 각오하고  물과 가뭄과 싸우며 생존해온 민중들이  사는
곳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들 지역에도 비록 사서삼
경을 읽고 도학자로 성장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통문을 작성하고  문서를 만들 정도의 '일
을 아는 층'(해사층)이나 식자층들은 많이 성장하였다고 생각한다.

농민전쟁의 전개과정


  고부민란 단계


  동학농민전쟁 네 개의 단계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첫째 단계는 고부민란의 단계, 둘째  단
계는 민란이 확대되어 백산 봉기, 무장 봉기를 거쳐 제 1차 농민전쟁으로 확대되는 단계, 셋
째 단계는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전주화약이 이루어지고 관민이 서로 협조하며 집강소 정치
를 실시하던 시기, 넷째 단계는 일본군의 경복궁 침략 사건 이후 외세, 특히 일본군을  몰아
내기 위한 제 2차 농민전쟁의 단계이다.
  고부민란이 확대된 원인은 전반적인 부패구조, 즉 민씨 척족정치에서 비롯된 부정부패, 이
를 수행하기 위한 수령과 서리, 향임층들의 체계적인 수탈구조, 나아가서는 국가적 지배체제
의 모순에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개항에 따른 외세의 침탈과 사상적 경제적 위기가 고조
되어 민중들은 외세에 대한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다. 기존의  전통사상과 유교적 전례를 뚫
고 서학이 침투해들어오고, 신구제품간의 부등가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동학농민전쟁의 경과를 주요 사건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부민란 단계는 1893년 초부터의 교조신원운동을 통하여 동학의 사상적 자유를 위한  투
쟁과 동학도 간부들 사이의 연대의식이 강화되었다고  한다면, 3월의 보은취회는 '척양척왜'
의 기치를 내걸고 민중적인 집회와 투쟁의 예행연습과 같은 효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은취회에서 투쟁적인 민중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법포 주도하의 지도부는  정부의
탄압에 대하여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여기에서 민중적 투쟁의지를 반영하는 서포 중심
의 투쟁적 농민군 지도부의 싹이 잉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법포는 북적의 법헌, 즉 최시형의 지도하에 민중들의 생활보다는 동학의 종교적인 측면에
치중하는 부류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서포는 남접을 중심으로 서장옥의 휘하에 있는
동학조직으로 민중의 투쟁의지의 실천을 요구하는 세력이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오래 전부터 누적되어 왔던 고부군 내의 부정부패와 착취적인  상황은
민란으로 촉발하게 되고, 사발통문에서 '전주를 점령하고 서울로  직향할 것'과 같은 행동강
령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전투적인 민란이 계획되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만석보이 수
세 문제가 민란의 가장 큰 원인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누적된 부패구조는 비단 수세 문제만
은 아니었다.
  농민군들은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군수와 이서들을 축출하였다. 농민군은 전주 감영의 군
사 50여 명을 격파하고 백산으로 진을 옮겨 관곡을  분배하여 농민들의 사기를 앙양시켰다.
그러나 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파견되어온 안핵사 이용태의 가혹한 살육과 탄압은  민란
을 전쟁으로 확대시켰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농민들이 기다려온 것인지도 모른다.

제 1차 농민전쟁 단계


  안핵사 이용태의 가혹한 진압에서 다시 집결한 농민군은 백산에 진을 치고 사방에 격문을
돌렸다. 그것이 이른바 (백산격문)이다. 백산격문에서는 전봉준을  중심으로 멀리 무장의 손
화중, 태인의 김개남 등에게까지 연결을 모색하여 적극 호응을 얻게 되어 이를 계기로 농민
군 지도부가 형성되었으며, 적어도 호남 일도에 걸친 전쟁으로 전선은 확대되었다.
  이들은 먼저 감영이 있는 전주를 지향하여 금구와 부안의  관아를 습격하였다. 이 과정에
서 이들은 우선 전라우도, 즉 법성포에 세곡이 수집되는 과정에서 자행되는 불법, 적 전운사
의 불법을 제기하기도 하고, 일반적인 부세 문제와 관련해서는 균전사의 불법을 규탄하였다. 이를 계기로 고부, 김제, 부안, 흥덕, 무장, 고창  등 전라우도 민중의 전반적인 호응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농민군 봉기 소식에 접한 전주에서는  감영 군사 800명과 보부상군  800명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주도면밀히 대응하고 준비해왔던 농민군에 대해서 감영군과 보부상군의 혼합
군은 오합지졸이었다. 이들을 맞아 농민군은 황토재 싸움에서 처음으로 승리를 거두어 농민
군의 위력을 실감나게 하고, 다급해진 전라감사는 중앙정부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황토재 승리 이후 농민군들은 흥덕, 고창 등 여러 관아를 격파하고 무장에 진주하여 이른
바 (무장포고문)을 발포하였다.
  중앙정부군은 군산에 상륙하여 전주를 비워두고 남하하는  농민군을 뒤쫓았다. 초토사 홍
계훈은 전주 감영에서 먼저 농민군과 내통한 혐의가 있는 전주 영장 김시풍 등을 효수하여
농민군과 협조하는 세력에 경고를 보냈다. 그리고는 전라우도 일대를 휘쓸고 있는 농민군을
뒤쫓았다. 농민군을 남하하는 정부군을 맞아 장성 황룡강 싸움에서 정부군을 격파하고 비어
있는 전주성에 무혈입성하였다.
  앞에서 고부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회경제적  상황을 설명하였는데, 그러한 상황
은 다만 고부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그러한 모순  구조,
부패 구조는 전국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고부민란이 전쟁으로 확대된 것은  극히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고부민란이 단순히 고부군 내의  문제 제기에 그쳤다고 한다면, 이후  전쟁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는 백산봉기, 무장봉기에서는 호남과 호서에 걸치는 농민군의 조직과 지
도부가 결정되고, 봉기의 목표도 보다 분명히 하게 되었다. 이러한 광범위한 조직을  가능하
게 한 것은 물론 동학이 조직이 매개가 된 것이었다.
  백산봉기와 무장봉기를 계기로 동학농민군의 지도부가 확정되었다. 전봉준이 대장이 되고
손화중, 김개남이 총관령이 된 것이다. 그러나 부대 편성에 있어서는 전봉준, 손화중 부대와
김개남 부대가 상호협력 관계를 가지면서도 별개로 행동을 하였다. 전자가 주로 전라우도를
무대로 활동하였다면 후자는 주로 좌도를 담당하였다.
  농민군들은 양반, 부호, 방백, 수령 들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는 민중들을 총궐기하여 투쟁
할 것을 호소하였다. 3월 27일 백산에서 발포된 격문은 민중을 양반, 부호, 탐관오리의 수탈
로부터 구하여 국가를 안정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백산격문)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른 것은 그 본의가 다만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에
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의 위에다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
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코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의 앞에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
백(감사)과 수령의 밑에 굴욕을 받는 소소한 이서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
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갑오 3월 27일 호남창의대도소 재백산
  4월에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의 명의로 발포된 무장에서의 격문도 기본적으로 (백산격문)
과 뜻을 같이하지만, (백산격문)보다는 훨씬 가다듬어지고  봉기의 목표도 뚜렷해졌다. 즉 '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들에게서 국왕에 반대하는 것을 볼
수는 없다. 다만 국가에 기생하여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탐관오리들을 구축하자는 것이다.


  (무장창의문)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귀하다 하는 것은 인륜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부자는 인
륜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이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곧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고
아들이 효도한 연후에야 집과 나라에 끝없는 복이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임금은
인효자애하고 총명한지라, 현량방정한 신하가 있어서 그 총명을 도울지면 요순의 덕과 문경
의 선치를 가히 바랄 수 있으리라.
  그러나 오늘날의 신하 된 자는 보국은 생각지 아니하고 부질없이 녹위만 도적질하여 총명
을 가리고 아부와 아첨만을 일삼아 충간하는 말을 요언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라 하
여, 안으로는 보국의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을 학대하는 관리가 많도다. 인민의  마음은
날로 흐트러져 생업을 즐길 수 없고 나아가 몸을 보존할 계책이 없도다.
  학정은 날로 더해가고 원성은 그치지 아니하니,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명
분은 무너지고 말았다. 관자가 가로되, 사유(인, 의, 예, 지)가 바로서지 못하면 나라는  멸망
한다 하였으니, 오늘의 형제는 옛날보다 심하도다. 공경 이하 방백수령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난은 생각지 아니하고 부질없이 일신의 비대와 가문의 윤택만을  꾀하고, 과거의 문을 돈벌이와 길이라 생각하고 응시의 장소는 매매하는 저자로 변하고 말았다.
  허다한 돈과 뇌물은 국고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개인의  사보만 채우고 있도다. 국가에
는 누적된 빚이 있으나 갚을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교만과 사치와 음란한 일만을 일삼으
니, 팔로는 어육이 되고 만민은 도탄에 빠져 허덕이도다.
  수제가 탐학하니 백성이 어찌 곤궁치 아니하랴.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라. 근본이 쇠잔하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는도다. 보국안민의 방책을 생산치  아니하고 밖으로는 향제를 설치하여
오로지 제 몸만을 위하고 부질없이 국록만을 도적질하는 것이 그 어찌 옳은 일이라 하겠는
가! 우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일지라도 나라에 몸붙여  사는 지라. 국가의 위망을 앉아서 보
겠는가! 팔역이 마음을 합하고 수많은 인민들의 뜻을 모아 이에  의기를 들어 보국안민으로
사생의 맹세를 하노니, 금일의 광경은  비록 놀랄 만한 일이기는 하나  경동하지 말고 각자
그 업에 안착하여 같이 태평 세력을 빌고 함께 임금의 덕화를 입게 된다면 천만다행으로 생
각하노라.
  갑오 4월 일 호남창의소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여기에서 우리는 농민전쟁의 한계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국가를 새로운 체제로 만드는 어
떠한 비전을 가지지는 못하고 다만 농민들을 중심한 정의로운  국가를 지향한 것이었다. 그
것은 근대국가로 지향하는 데 있어서는 분명 한계를 가지는  것이긴 하였지만, 기존의 부패
구조를 재생산하는 국가와는 다른 것을 지향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전주성을 빼앗긴 홍계훈은 다급해져 농민군을 뒤따라와 전주성을 포위하고 부내가 내려다
보이는 완산에 진을 치고 포격을 가하였다. 농민군들은 적어도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영장
이 있는 경기전이 있기 때문에  직접 포격을 가할 것으로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홍계훈은
그런 것을 가릴 정신이 아니었다.  183cm의 유리한 위치에 진을  친 경군은 부내를 향하여
몇 차례 포격을 가하니 경기전의 일부가 파괴되었다. 경군의  포격을 받은 농민군은 반격에
나서 문을 열고 나와 경군을 공격하였으나 도리어 많은  사상자를 내고 성내로 후퇴하였다.
5월 3일에는 다시 북문으로 나와 용머리고개의 경군 기지를 공격하였으나 이번에도 많은 전
사자를 내고 대장기와 500여 자루의 총검을 빼앗겼다. 이처럼 출격전서 아무런 성과를 거두
지 못하고 타격을 입자 농민군들은 전의가 크게 저하되었다.  또 농민군들은 모내기철을 맞
아 하나둘 성을 빠져나갔다. 농민군 지도자는 협상에 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청군이 조선에 파견되어 오고, 뒤
이어 일본군도 출동하여 사태가 복잡하게 되었다. 이에 정부로서도 빨리 농민군을 해산시킬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전봉준과 전라감사  김학진은 선화당에 앉아 협상에  임하여 12개
조항의 폐정개혁을 약속하고 농민군을 해산하였다. 12개 조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도인과 정부 사이에는 숙혐을 씻어버리고 서정에 협력할 것.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사득하여 일일이 엄징할 것.
  3. 횡포한 부호배는 엄징할 것.
  4. 불량한 유림과 양반배는 징습할 것.
  5. 노비문서는 불태워버릴 것
  6. 칠반천인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 쓰는 평양립은 벗어버릴 것.
  7. 청춘과부는 개가를 허할 것.
  8. 무명잡세는 일절 거둬들이지 말 것.
  9. 관리의 채용은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0. 왜와 관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11. 공사채는 물론이고 기왕의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12.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케 할 것.

집강소 단계


  난후 수습책을 찾던 전라감사 김학진은 전봉준에게 협조를 요청하였다. 농민군의 도움 없
이는 전라도 53읍을 제대로 통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구금에 머물고 있던 전봉준은 감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당당하게 감사와 협조하여 전라도 집강소 정치를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었다. 당시 감사와 협의하는 과정을 시종 지켜본 정석모는 전봉준의 풍모를 다음과 같이 묘
사하였다.
  관찰사의 요청으로 전봉준을 감영에 맞이하였는데, 이때 수성군졸이 각각 총과 창을 들고
좌우로 정렬하고 있었다. 전봉준은 높은 관에 삼베옷을 입고 조금도 거리낌없이 위세당당하
게 들어갔다. 관찰사와 관민이 서로 화합할 방책을 상의하여 각 군에 집강을 두기로 허락을
받았다.
  이리하여 전라도 53개 읍에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집강소는 일종의 농민 자치기구로서 농
민군들이 자치적으로 집강소의 우두머리인 집강을 두고, 그 밑에 서기, 성찰, 집사,  도몽 등
임원을 두어 행정사무를 보게 하였다. 그리고 전주에는 집강소의 총본부인 대도소를 두었다. 난을 피하였다가 돌아온 수령들은 형식상 자리를 지킬 뿐이고 서리들도 모두 동학에 입도하여야 자리를 보전할 수 있어서 모두 앞을 다투어 동학에 들어왔다.
  그러나 모든 군현에서 다 순조롭게  집강소가 설치된 것은 아니었다.  나주, 남원, 운봉의
경우는 보수적 유생층과 수령들의 저항이 극심하였다.  전주의 대도소에서는 격문을 보내어
설득하다가 끝내 듣지 않자, 급기야는 김개남, 최경선 등을 보내어 공격을 하였다. 나주목사
는 민병과 합세하여 최경선이 이끄는 3000명의 농민군에 대항하였다. 이에 전봉준은 나주목
사와 담판을 하기 위하여 위기에 처한 국내외의 정세, 전주화약의 내용, 집강소 설치의 이유
등을 설명하여 목사를 설득하여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남원과 운봉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김
개남이 이끈 3000명의 농민군은 남원성을 함락시키고 부사를 잡아 처형하였다. 운봉도 김봉
득의 계략으로 쉽게 함락시켜 각각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전봉준은 금구, 원평 등지를 근거로 하여 전라우도를 호령하였고, 김개남은 남원
을 근거로 하여 전라좌도를 지배하였다.


  제2차 농민전쟁 단계


  농민군들이 전주화약 이후 전라도 각 지방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뒷수습을 하고 있는 동안
국내외의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하여 민씨정권을 몰아내
고 대원군을 옹립하여 새 정권을 세웠으며, 청과 일본 사이에는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경복궁 점령 소식을 들은 전봉준은 일본인의 만행에 분개하며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하여
다시 봉기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추수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9월에 기포하기로 하고 각
지에 통문을 띄워 삼례에 집합하도록 하였다. 9월 18일을  전후하여 삼례 벌판에 모인 농민
군은 10만 명에 이르렀다. 처음 봉기를 꺼리던 북접도  항일투쟁이라는 명분에 동의하고 함
께 봉기하였다. 북접 동학군은 청산에서 집결하여 남접 농민군과 논산에서 합세하였다.
  농민군은 이 여세를 몰아 충청도의 수부인 공주성을 점령하고 바로 서울로 직행하려고 하
였다. 전봉준은 북상하기에 앞서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항일구국투쟁에 함께 나설 것을 주장
하는 격문을 보냈다.
  남북접의 동학농민군이 논산에 집결했다는 소식은 박제순에 의하여 정부에 보고되고 정부
는 곧 호위부장 신정희를 양호도순무사로 임명하여 출동하게 하였다. 그러나 6월 21일 일본
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이미 조선군은 무장해제를 당하여 조선정부군은 이름만 남아  있
을 뿐 실제로는 일본군의 감독과 지휘하에 있었다.
  사실상 일본군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서 청국과 전쟁을 하고 있었으므로 일본군의  주력
부대는 조선에 없었다. 새로 공사로 부임해온 이노우에 가오루는 9월 28일 서울에 도착하는
즉시 일본정부에 증원군을 요청하여  독립제19대대가 급파되었다.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한
후, 10월 15일 3개 중대로 나누어져 3개 방면으로 남진하였다. 각 중대는 조선정부군을 앞세
우고 서로는 천안 부근, 중로는 죽산 부근, 동로는 충주에서 농민군이 북상하기를 기다렸다.
  논산에 집결한 농민군은 20여 만에 달하는 대군이었으나 사실상 무기도 변변치 않은 농투
성이에 불과하였다. 자칭 20만이었으나 실제  병력은 만여 명을 헤아릴 뿐이었다.  일본군과
정부군은 목천 세성산에 포진하였던 북접의 김복명 군을 격파하고 공주로 향하여 농민군 북
상의 길목인 우금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전봉준이 거느리는 농민군의 주력부대는 노성읍에서 경천점을 거여 치인으로 전진하였고,
다른 한 부대는 공주 동쪽  30리 지점인 대교로 나아가 공주를  포위하는 형국을 취하였다.
이인과 효포에서 몇 차례 정부군과 공방전을 벌인 농민군은 11월 15일에 웅치에 대한 총공
격을 감행하엿다. 그러나 도리어 일본군의 반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고 경천점까지 후퇴하
고 말았다.
  경천점에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있을 때, 김개남군이 다시  5000여의 병력을 이끌고 북
상, 합세하여 농민군의 기세는 다시 충천할 듯하였다. 농민군은 정부군을 공격하여 우금치에 있는 일본군 진지로 격퇴시켰다.
  서울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 우금치에서의 대회전이 전개되었다. 농민군은 6, 7일간에 걸쳐
4, 50여 회의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우세한 화력을 가지고 정규훈련을 받은 일본군과
가슴에 부적을 붙이고 화승총을 든 농민군의 싸움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우금치의 격
전 끝에 농민군은 많은 사상자를 낸 채 노성, 논산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10,000여 명의 병
력 중에 남은 것은 500여 명에 불과하였다. 농민군은  일본군의 추격을 받으면서도 계속 전
열을 정비하여 저항하였으나 패배를 거듭할  뿐이었다. 전주, 금구를 거쳐 태인까지  후퇴할
뿐이었고,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깨달은 농민군은 뿔뿔히 흩어져갔다.
  전봉준은 처참하였다. 같은 동족간에 총질을  하는 것이 너무도 분하였다. 봉기의  목적은
일본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자는 것인데, 11월 12일 전봉준은 경군과 영병, 서리, 시민들에게
고시를 하여 동족끼리 서로 싸우지 말고 일본군을 몰아내자고 호소하였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추운 겨울날 드넓은 호남평야를 뒤로 하고 한 사나이가 걷고 있다. 서해의 짠 바닷바람이
일망무제의 들판을 가로지르며 길 가는 사람의 발걸음을 바쁘게  한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
판에는 지푸라기들만 바람에 흩날릴 뿐 회색의 죽음의 빛으로 변해 있다. 지난봄 새 생명이
약동할 때의 붉은 황토밭들도 이제는 다만 모두 회색일 뿐이다.
  난리가 휩쓸고 지나간 들판에도 올망졸망 모여  있는 마을에도 언제 난리가 있었냐는  듯
조용하기만 하다. 동네 어귀에 모여 노는 아이들 사이에서는  어느 사이엔가 파랑새 노래가
널리 퍼져 있었다. 파랑새 노래는 물론 난리 전부터 불려지던 것이었는데, 난리가 나던 한해
전부터는 더 많이 불려지더니 그즈음에는 숨죽여 부르는 노래가 되어버렸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백산의 언덕에서 사자후를 토하고 전주 선화당에서 도배과 나란히 당당하게 정사를  논하
던 녹두장군도 이제 서울의 일본군에 잡혀가 처형될 날만을  기다린다. 결국 일본군이 문제
였다.
  지난봄 1차 농민전쟁에서 파죽의 기세로 전라도의 여러 관아를 격파하고 전주성을 점령하
였을 때만 해도 농민군의 기세는  충천하였다. 그러나 농민군들은 말 그대로  농민군이었다.
전주성을 점령하고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이 전주성을 에워싸고 공격할 때, 이미 농민들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농사꾼의 마음이야 농사를 빼놓고  무엇이 있겠는가? 하나둘
전주성을 빠져 나가 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봉준도 감사와의 담판을 통하여 이제 농민들의 의견을 국왕에게 전달하고 수령들도  이
제 농민들을 얕잡아보지 않을 거이라고 판단하였다. 아니, 오히려 이제 올바른 정사를  시행
하기 위해서는 수령들이 동학농민군의 협조를 간절히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좌도와 우도로 나누어 전라도를 순행하고 있던 전봉준과 김개남에게 왜군이 경복궁을  점
령하여 국왕을 협박하고 국권을 좌지우지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들은  이제 올 것이 왔
다고 생각하였다. 부정부패 앞에 흔들리는 나라를 반석에 올려놓기 위하여 봉기하였던 농민
군들에게 왜군의 침략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찍부터 대원군과 연락을 하며 중앙권력에 농민군들의 의사를 전달하고 있던 동학의  선
배 서장옥도 전봉준, 김개남 등에게 궐기할 것을 촉구하였다. 봄의 봉기에 좌시하고 있던 법
포들도 반외세의 기치에는 적극 호응하였다. 추수가 끝난 삼례 벌판을 가득 메운 10만의 농
민군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대군이었다.
  부적을 가슴에 차고 그렇게도 충천하던 농민군의 기세가 일본군의 신식 무력 앞에는 그렇
게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패주하는 농민군들들 다시 되잡아 전열을 정비해도 농민군들 앞에
놓인 건 패퇴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가? 민중들은 거대한 철벽처럼 단절되어 놓여 있
는 문명의 간격에 다시 한번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조용히 되뇌인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글 김현영

 


  1894년 농민전쟁 연표


1893년
  (1) 2월 11일 교조신원운동-서울 복합상소(소수 박광호)
  (2) 3월 11일 보은취회(척왜척양)
  (3) 11월 (사발통문) 집회(고부 송두호가)
  (4) 11월 만석보 수세 감면 운동-구금 후 석방
  (5) 12월 다시 수세 문제 제기-거부당함
1894년
  (1) 1월 10일 고부관아 점령
  (2) 1월 17일 주력부대를 고부 이평 마항 시장으로 이진
  (3) 1월 22일 잠입한 전주영병 50여 명 격파
  (4) 1월 25일 백산으로 이진-관곡 분배
  (5) 3월 21일 백산에서 다시 기병(안핵사 이용태의 탄압에서 비롯됨) 3월 27일(백산격문)
  (6) 4월 4일 금구현 원평에 진출, 금구관아 습격, 다른 일대가 부안관아 습격, 2통의 (동학
군통문)을 법성포 등에 발송
  (7) 4월 7일 황토현 전투에서 전주영병 800명, 보부상군 800명 격멸
  (8) 4월 7일-8일 고부 삼거리에서 흥덕으로 진주. 흥덕관아 격파, 고창관아 격파.
  (9) 4월 9일 무장에 진주. 농민군 1만 명을 헤아림. (무장창의문)
  (10) 4월 13일 영광에 진주.
  (11) 4월 17일 함평에 진주.
  (12) 4월 22일 장성에 이동. 윤음을 가져온 초토사종사관 이효응, 배은환 체포
  (13) 4월 23일 황룡강 전투에서 경군 격파(100명 격멸, 종사관 처단, 장태 전술)
  (14) 4월 27일 전주성 점령 (방문) 개시
  (15) 5월 1일-3일 전주성 방어전
  (16) 5월 4일-7일 초토사와 협상
  (17) 5월 7일 전주화약 성립. (폐정개혁안)
  (18) 5월 8일부터 농민군, 전주성에서 철수.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 설치. 폐정개혁 단
행.
  (19) 9월 12-13일에 척왜기병을 위한 남북접 삼례회의
  (20) 9월 18일 교주 최시형이 남접과 합작봉기를 허락함.
  (21) 10월 초, 기병하여 충청도계에 이름.
  (22) 10월 23일 공주 웅치  전투에서 관군(서산군수 성하영, 경리  청대관 윤영성, 참모관
구완희), 일본군 연합군을 격퇴
  (23) 10월 24일 전주 유진의  김개남군에 후원을 요청, 군대와 식량  보급, 성하영의 관군
격파, 공주감영의 뒷산 봉황산 포위, 무넘이고개를 넘어 효포로 진격, 관군은 공주성에 웅거. 일본군 일개 대대 내원.
  (24) 10월 25일 농민군 공주총공격.  우금치전투에서 패배. 30리 후퇴하여 경천점에  퇴각,
전선 재정비.
  (25) 11월 2, 3일부터 다시  공격. 8일경에 다시 공주영에 육박.  농민군은 효포에서 웅치,
우금치 등 3면에 걸쳐 전투를 전개하였으나 패배, 후퇴.
  (26) 11월 12일, 동도창의소의 이름으로 (경병과 영병, 이교, 시민)의 국한문 고시.
  (27) 11월 14일 논산으로 후퇴. 일군과 격전, 패배. 11월 15일 황화대에서 일군과 관군  연
합군에 패배.
  (28) 11월 25일 금구 원평과 태인 석현점에서 군대를 모집한 후에 다시 태인의 산삼에 웅
거하여 최후의결전, 다시 패배.
  (29) 전봉준은 11월 28일 정읍 입암산성을 벗어나 순창 복흥산  소의 피로리 김경천의 집
에서 12월 2일 체포됨.
1895년
  (1) 전봉준, 서울로 이송되어 2월 9일 1차 심문, 2월 11일 2차 심문, 2월 19일 3차 심문, 3
월 7일 4차 심문, 3월 10일 5차 심문. (공초)
  (2) 3월 29일 교수형 집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