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의적인가, 화적인가? - 활빈당

구름위 2013. 6. 19.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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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의 후예들


  활빈당은 (홍길동전)에 나오는 의적단의 이름이다. 그 시대적 배경은 조선초기 세종 때였
다. 그들은 기지와 도술을 써서  탐관오리들을 습격하고, 그들이 토색질해간 재물을  탈취한
다. 그리고 그것을 가난한 빈민들에게 나누어주되, 그들을 추호도 괴롭히지 않는다. 양반 서
얼이었던 행수 홍길동은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하며 조선 8도에서 출몰한다. 국왕의  체
포명령으로 8도에서 잡혀온 홍길동은 300명이나 되었지만,  조정에서는 길동의 도술을 달하
지 못하고 결국 그를 병조판서에  임명한다. 소원을 이룬 홍길동과  활빈당원들은 서해안의
율도국에서 이상향을 건설한다.
  광해군 때 형조판서를 지낸  허균(1560-1618)이 꿈꾸었던 이  장쾌한 의적단이, 20세기가
문을 열자마자 우리 나라의 각처에서  봉기하기 시작하였다. 이 활빈당의  두목은 홍길동이
아니라, 맹감역 혹은 마중군이었다.  전국의 여기저기서 맹감역과 마중군이 신출귀몰하듯이
무리를 끌고 부호의 집과 절간을 습격하고 재물을 약탈하여 빈민들에게 나누어준다. 때로는
관아를 습격하여 옥에 갇힌 죄수들을 풀어주고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한다.
허균이 꿈꾸었던 활빈당은 세종 때가  아니라, 300여 년이 지난  1900년대에 비로소 환생한
것이었다. 이것은 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1900-1906년 사이에 우리 땅에 실재로 있었
던 역사였다.
  활빈당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은 본색이 화적단이었다. 그러나  이전이 명화적 무리와는 달
리 빈민의 구활을 깃발로 내세웠다. 그럴듯한 명분을 내걸고  양반 부자들의 재물을 약탈하
여 백성들에게 뿌리기도 하였다. 백성들은 한편으로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 두려워 하면서, 밥을 짓고 술을 빚어 그들을 대접하였다.
  활빈당 중에는 본래 화적  출신들이 많았지만, 얼마 전까지  동학군에서 싸우던 사람들도
있었고, 먹고 살 것이 없어  새로 들어온 양민들도 있었다. 그들은  적게는 10-20명, 많게는
100여 명씩 떼를 지어 백주에 장시를 덮치기도 하고  절간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일부는 배
를 타고 서해안 여러 곳을 습격하거나 지나가는 상선을 나포하는 해적질을 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에 대하여 속수무책이었다. 지방 고을의 허약한 군대는 출동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경찰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지역마다 유생들이 나서서 자위
단을 만들기도 하고, 부호들은 자체 경비인들을 두기도 하였다.
  그래도 그들은 활빈당을 제대로 잡을 수 없었고, 신고하기도 어려웠다. 복수를 당할  후환
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1904년 러,  일 전쟁을 겪으면서 일본 군대가 전국에  파견되어
경찰 노릇을 하면서 활빈당도 시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에 들어와 주요 간부들이
체포되거나 처형됨으로써 활빈당은 사라지게 되었다.

실체를 드러내는 활빈당


  19세기 세도정치의 학정과 대원군의 쇄국정책, 그리고  개항기의 혼동을 겪으면서 조선의
국력은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지고, 민생은 병들게 되었다. 인구는 폭증하는데  흉년과
기근은 연속되었고, 많지 않은 토지의 소출은 소수의 양반과 지주들이 독차지하였다. 여기에 일본이나 중국에서 새로 유입되는 옷감이나 신발, 식기와 같은  양품들은 민간의 살림을 더욱 조이게 하였다.
  농사를 지을 땅도 없어지고 먹고 살기도 힘든 백성들은 떠돌이가 되어 품팔이 일을 찾아
나서기도 하고, 밑천 없는 고달픈 장사치 노릇을 해보기도 하지만 입에 풀칠하기는 역시 어
려웠다. 그래서 그저 쉬운 것이 도적질이었다. 처음에는 좀도둑이 되었다가 간이 커지면  소
도둑이 되고, 때로는 작당하여 강도짓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이 많아지면 화적이  되어
산 속에 소굴을 두고, 산과 강을 타고 다니면서 노략질을 하게된다. 이러한 유형의 명화적은
조선시대에 내내 있던 것이었지만, 19세기 중엽부터 도처에 창궐하게 되었다. 그리고 1860년
대부터는 전국 각처에서 헤아릴 수 없이 출몰하게 되었다.  그만큼 민중들의 고통이 심각해
지고 있었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각처에 흩어져 있던 명화적들은 점차 주도적인 세력들을 중심으로 횡적으로 연계하여  일
정한 세력을 형성하고 상호 협력하는 체제를 만들게 된다. 그것이 더 발전하여 일정한 지휘
체계나 나름대로의 규범을 가진 지역별 혹은 전국 규모의  단체로 조직화하기에 이른다. 전
국적인 규모의 명화적 조직은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대개 개항 이후의
한말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조직이나 결사의 관행은 백범 김구의 (백범일지)
에 잘 묘사되고 있다.
  백범에 의하면, 남한 지역에서 유명한 명화적으로는 크게  강원도의 '목단설'과 삼남 지방
의 '추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본래 한갈레에  나온 것으로서, 지도자를 노사장
이라고 하였다. 양집단은 일년에 한 번씩  전국적인 집회를 가졌는데, 이를 '대장을  부른다
'고 하였다. 그 장소는 큰 절이나 장시 거리였다. 그리고 이 모임이 끝나면  으레 큰 고을이
나 장거리를 습격하여 세력을 과시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조직이 빈민의 구제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미약하지만 사회개혁의 이념을 가지면서
전국적인 규모의 조직과 연계를 가지고 발전한 것이 한말의 활빈당이라고 할 수 있다. 활빈
당이 본격적으로 자신들을 '활빈당'이라고 칭하면서 도처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00년
부터였다. 그러나 그들은 실상 1890년대부터 여러 지역에서 도적 활동을 하고 있었다 . 1885
년부터 일부 화적의 무리들  중에는 '활빈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전례가 있었다. 그리고
1886년에는 잠시 조직적인 활빈당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활빈당은 극
히 단편적이고 그 활동도 일회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활빈당의 명칭이 처음보이는 것은 1885년 3월 6일의 (고종실록) 기사이다. 이때 호남지방
에서 활빈당이라는 비적이 상당한 규모의 조직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었다고 하나, 그 구체
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그 다음은 1886년 1월에 충청동 음성의 김덕원 집에서 오순철,  김
몽돌, 박순길 등 7명이 활빈당을 결성하고 박순길을 선생으로 추대하였다고 한다. 그후 그들
은 총칼을 들고 음성, 괴산 등지의 양반 집들을 습격 약탈하였다. 그러나 2월에 16명의 도당
이 괴산의 김진사 집을 습격하다가, 그중 6명이 체포되어 곧 흩어졌다. 그렇지만 이를  계기
로 삼남 여러 지방에서 활동하던 비적들이 서로 연대하여 조직화하는 양상을 나타내게 되었
다.
  1890년대에 삼남 지역의 명화적 조직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윤동굴이었다. 그는 문
경-금산 부근에 근거지를 두고 삼남 지방의 명화적들을 대체로  통합하여 조직하게 되었다.
윤동굴은 이러한 화적의 두목으로 직접 대장을 지휘하기도 하다  .그는 1897년 동료들과 함
께 금산 부근에서 체포되었다. 그후에는  경기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민도사라는 인물이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1899년 4월  경기도 송파장에서는 팔도도감대민도사란 직함을  거고,
민도사의 지휘 아래 82명이 참가한 대도회가 열렸다. 도회를 마친 후에 그들은 오미동 신승
지 집을 습격하여 18,000냥을 탈취하였다.
  경기와 충청도 일대에는 마중군이라는 인물이 유명하였다. 1892년경부터 보통 10-100명의
적당을 이끌고 경기도 광주, 음죽,  충청도 충주 등지에 출몰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때로는
경상도나 강원도에도 출몰하기도 했다. 그는 남한 일대의 여러  명화적 단체에 일정한 유대
를 형성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890년 대  중반 남한 지역 명화적의 도
괴수라고 지칭되었던 윤동굴이 지휘 아래서 여러 적당의 모임에 참여하고 부호가들을  습격
하였다. 그는 독자적으로 경기, 충청도 지역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도 장시의 약탈, 행상의 물화 탈취, 부호가의 습격 등을 일삼아 다른 명화적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마중군은 1900년 3월 경기, 충청도 일대의 활빈당 결성을 주도하게 되었다. 마중군은 1895년 2월에는 충주 장원에서 후에 맹감역이라고 불린 송종백 등 100여 명과 도회를 가졌다. 그리고는 여
주 윤덕천의 집을 습격하여 귀금속과 돈 100원을 탈취하였다. 송종백은 1900년 전라도와 경
상도 접경지대에서 악명을 날리던 활빈당 두목이었다.
  1890년대 충청도 일대의 명화적 두목 중에서 또 하나이 중요한 인물로 맹사진을 들 수 있
다. 그는 공주-충주 일대 5인의  두목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100여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1896년 예산에서  백통진가의 분묘를 도굴하고 협박하여  400원을 갈취하기도
하고, 1897년 온양과 예산에서 부호들을 습격하였다. 또 1898년에는 내포 지방으로 이동하여 활동하였다. 그리고 1900년에는 마중군의 적당과 연합하여 활빈당을 결성하였다.

숱하게 많았던 맹감역과 마중군, 그리고 그들의 종말


  위에서 말한 큰 규모의 명화적들은 1900년 3월부터 활빈당이라는 공통된 명칭으로 조직화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통일된 조직은 아니었고, 서로 횡적인 연계를 가지는  그러한
조직으로 생각된다. 그들이 어느 정도로 연락을 취하며 서로 협조하고 있었던지, 또는  공통
의 이념이나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활빈당이라는 공통된 이
름하에 연계활동을 벌이던 집단들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아래의 3개 조직이었다.
  첫째는 3월 충청도 내포 지역에서 맹사진을 중심으로 조직된 적당이며, 둘째는 같은 시기
경상도에서 결성되어 8월경부터 청도 운문령을 중심으로 활동한 한세봉으로 추정되는  김창
성 일파이다. 셋째는 소백산맥을 끼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접경지대에서 주로 활동한 송종백
일파였다.
  맹사진의 충청, 경기 활빈당은 1900년 3월부터 활빈당을 칭하면서, 황주와 연산  등지에서
부자집들을 습격하여 은화와 곡식을 탈취하여 빈민들에게  나누어주곤 하였다. 그들의 수는
좀 과장하여 수천 명이라고 보고되기도 하였다. 맹사진은  도처에서 칭해지던 '맹감역'의 원
조격인 인물이었다. 그들은 문의, 옥천, 회덕, 진잠, 연산 등지에서  40-50명씩 떼를 지어 부
자들의 재산을 약탈했으며, 그들은 총과 칼을 휴대하고 말을  타거나 가마를 타고 다니면서
위세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내포에서 시작하여 충청북도 지방까지 세력을 넓혔던 그들 중의
일부는 경상도 상주 지역으로 진출하여 '활빈당대장의기'라는 깃발을  들고 활동하기도  하
였다. 또 1900년 겨울 무렵부터는 연해로 진출하여 충청도와 경기 연안에서 해적으로  활동,
통진과 부평, 인천 등지에서 상선을  약탈하고 연해의 부자들이나 촌락을 습격하기도  하였
다. 1901년에는 그들이 해적활동이 더욱 극심하였다.  그들은 1903년까지  태안, 비인, 남포
등지에서 노략질을 하였고, 전라도 일대에 출몰하기도 하였다.
  경상도 동부지역의 활빈당 역시 1900년 3월경에 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 활빈당의
두목은 역시 맹감역으로 불린 김창성이었다. 그는 장기군 출신으로 한세봉이라는 가명을 사
용하면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험한 산맥이 연결된 운문령을 중심으로 언양, 양산, 경
주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운문령은 청도, 밀양, 언양, 양산, 경주 일대를 첩첩이 연결
하는 산맥들이 교차되는 요해처이다(이 지역은 요즈음 등산객들에게는 영남  알프스라고 불
리고 있다).
  그들은 그해 8월 17일-18일 양일에 걸쳐  대규모로 양산 통도사 일대를 습격하여 관원들
을 놀라게 하였다. 그들은 40-50호의 민가를 불태우고 수백 명이 통도사 경내에 활빈당기를
세우고 도회를 열면서, 언양성 침공을 논의하였다. 결국 그들은 이때 언양성을 습격하지  않
았지만, 1905년 4월 18일에 다시  관아를 습격하여 관청 건물들을  파괴하고 무기와 재물을
탈취해갔다. 1900년 9월 15일경에는 마중군, 김운이, 배공원  등 각파의 활빈당이 경주 일대
의 부호들을 약탈하였고, 1901-1902년에는 마중군 맹감역으로 불리는 두목들이 인솔하는 대
소 규모의 적당들이 계속 노략질하였다. 1903년에는 의성 지역까지 활동무대를 넓히기도 하
였다.
  소백산 일대의 활빈당은 1900년 봄에  전라도 고산 지역에서 출몰하였고,  8-12월에는 운
봉, 삼가, 창원, 함양, 안의, 무주, 산청, 함안 등지에 출몰하였다. 1904년에는 맹감역 등 80여 명이 영산, 의령, 삼가, 합천, 성주 금산 등지에 출몰하였고, 1905년 3월에는 맹감역의 지휘 아래 함안 관아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두목들도 맹감역과 마중군을 자칭하였는데, 경기, 충청의 그들과는 별개의 인물들이었다. 그는 1901년에 체포된 김지연의 진술에 의하여 송종백으로 판명되었다. 송종백은 1890년대부터 충주에서 개최된 삼남지방 대도회에 참석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1900년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접경지대에서 맹감역이라는 이름으로 위세를 떨쳤다. 그는 충청, 경기 지역이  활빈당과 일정한 연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전국에는 맹감역 혹은 마중군을  자처하는 소규모의 비적들이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어느 것이 활빈당 주류의 행동인지, 그들 상호 간에 어떠한 연계가 있었는지를 판단
하기 어려운 것도 적지 않았다. 비적들 중에는 활빈당을 자칭하지 않은 자들도 많았는데, 그
들이 전혀 활빈당과 무관한 것이었는지에 대하여는 의문이 남아 있다.
  위에서 언급한 주요 3파는 그 위에 상위의 지휘체계나 상하관계의 조직을 가졌던 것은 아
니었고, 상호 횡적인 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 구성원의 일상적인 수는 대
체로 100여 명 정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시기에 따라 체포되거나 탈락되기도 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인력을 보충하기도 하였다. 충청도의 맹감역이었던  맹사진은 한때 그 일
당의 수를 5772명이라고 한 적도 있었다.  이는 과장된 감이 있지만, 대체로 전국  활빈당의
총인원수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활빈당의 조직은 대체로 상하의 조직원들끼리만 연결되고 횡적으로는 알 수 없는  일종의
점조직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원래 명화적들은 입단시에 일종의  사제 관계처럼 계보를 형
성하고 있었다. 단원의 직속 상사는 사장이라고 하였고, 그 위는 노사장, 또 그 위는 노노사
장이라고 하였다. 그 이상은 알 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1900년 활빈당을 공칭할 무렵부터는
이러한 복잡한 위계조직 대신 단원과 사장의 관계만으로 단순화되었다. 이는 조직을 단순화
하고 보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더라도 그들의 조직 연줄은 층
층의 상하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다.
  활빈당의 입단식은 명화적 때와 마찬가지로 매우  삼엄하게 진행되었다. 신입단원은 선배
동당들이 둘러싼 가운데 칼을 입에 물리우고 결박당하여 땅에 꿇인 채 매를 맞으면서 충성
서약식을 진행하였다. 그것은 주로 조직의 기밀을 유지하고 체포되었을 때 동료들을 실토하
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사장을 정해주기도 하고, 별명인 적호를 붙여주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활빈당 조직은 쉽게 드러나지 않았고, 조직원들은 일반 민중들 사이에 섞여 살거
나 약탈활동을 하면서도 오랫동안 그들의 조직을 지키고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1900년부터 시작된 전국 활빈당의 활동은 1904년까지  극성하였다. 정부에서는 그들을 체
포하기 위하여 5가 작통법을 강화하고, 군대를 파견하기도 하고, 포군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백성들이 자치경비대를 두기도 하였고, 부자들 중에서는 자체 경비병을 고
용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정부의 소규모 군대 파견이나  경찰력으로는 그들의 활동을 근
절할 수 없었다. 활빈당은 그들을 체포하거나 고발하는 사람들에게 잔인하게 복수하였기 때
문에, 백성들은 그들을 보고서도 제지하지 못하였고, 도리어 음식을 장만하여 대접하기도 하
였다.
  그러나 그들은 1906년에 들어오면서 급격히 해체되기  시작되었다. 1904년 이후에는 국내
치안을 일본 군사들이 담당하였고, 1906년에는 고문경찰제가  확대 시행되면서 조선인 경찰
의 수도 크게 확대되었다. 이러한 치안의 강화로 활빈당의  지도부가 대부분 체포되는 사태
를 맞게 된 것이다.
  1906년 경상우도의 맹감역(송종백)이 경상북도 인동에서 부호가를 습격하다가, 동민들에게 붙잡혀 매장되었다. 그해 5월에는 충청도의 맹감역이었던 김성숙이 문의에서 부잣집 분묘를 파다가 체포되었다. 동부 경상도에서 역시 맹감역을 자칭하며 활빈당의 지도자로 활동하던 한세봉으로 추정되는 김창성은 그해 가을 울산에서 군대에 체포되었다. 그 지역에서 간부급이었던 강인원, 채순명, 진영달 등은 그 이전에 모두 체포되었다. 이리하여 활빈당의 지도부가 무너지면서 그들의 활동은 지리멸렬하게 되었고, 일부는 당시 전국에서 일어났던 의병운동에 흡수되기도 하였다. 1908년부터 1910년 사이에 봉기한 의병장들 중에서 30여 명이 출
신성분을 알 수 없거나 화적 출신자들이었다. 화적 출신의  의병들은 유생 의병들과 불화를
일으키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결국  그들끼로 독자행동을 하거나 평민  의병장들의 휘하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활빈당의 이념과 구호


  단순한 비적을 넘어 의적을 자칭하였던 활빈당의 이념은 바로 (홍길동전)에서 온 것이다.
그들은 바로 허균의 (홍길동전)에 묘사된 활빈당을 계승했다고 자청하였다. 1902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른바 '활빈당발영'이라는 문건에 이러한 의식이 보이고 있다.
  "우리는 경기 감악 이하 오천칠백일흔두 명 활빈유라. 옛날 고래지풍으로 길동 선생 이후
로 이칠성, 그후로는 맹감역이니, 편답팔도뿐 아니라 열국에도  편답하고, 이제 궁궁에 거하
노라. 우리도 막비군운이요. 천하를 얻은 후에는 이 허물을 면할 사"('활빈당발영')
  여기서 홍길동이나 이칠성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맹감역은 바로 충청과 경기 일대에서  활
동하던 맹사진으로서, 1906년 황간에서 체포된  김성숙이었다. 그는 보다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마중군보다 지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종전의 단순한  화적단체를 의적을
표방하는 그럴듯한 이념을 계발하여 활빈당으로 발전시킨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이념의 근
원이 바로 (홍길동전)이었다. 그는 마중군 등이 장시를 자주 습격한 데 비하여, 이를 삼가고
주로 부호들의 집을 약탈하거나 그들의 무덤을 도굴하여 흥정하는 수법을 사용하였다. 그리
고 빈민들에게 재물을 분배하는 방법도 주로 그에게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활빈당발영'에는 단순히 구민이나  사회개혁의 의지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공담같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기에는 "천하를 얻는다"는 포부가 있다. 이는 "궁궁에 거한다"거
나 "국운 아님이 없다"는 말에서 알 수  있다. 이때의  '궁궁'은 동학의 '궁을가'의 한 대목
인 "이재궁궁을을(이로운 것이 궁궁을을에 있다)"이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궁
궁을을'은 해석이 구구하지만, 대체로 '궁궁'은 '무극'을  말하고, '을을'은 '태극'을 의미하
는 것으로서, 곧 도교나 천도교에서 도덕의 본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즉, 궁궁은 무극의 최고 지위를 말한다.  이는 곧 관념적 입장에서나 주술적 입장에서  그
자신이 최고의 지위에 오름을 말하는 것이다. 세속적으로 말하면  임금의 자리와 같은 것이
다. 그리고 "국운 아님이 없다"거나 "천하를 얻는다"는 등의  말을 보면, 은연중 역성혁명까
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발영문의 말미에는 "우리는 세 가지를 하니, 돈 아니 주면 집에 불놓기와 유부
녀 겁탈하기와 파묘하기를 잘하는지라"한  것으로 보면, 그들의  야심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행동은 대단히 비루하고 교활한 것이었다. 이는 그들이 커다란  포부를 가진 듯 표방하면서
도, 결국 명화적의 무리에 지나지 않음을 잘 보여주는 자료라고 하겠다.
  그들은 관원들에 대하여 그들의 요구조건을 내걸기도 하였다. 그것은 이른바 '대한사민논
설 13개조' 및 '활빈당격문'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다음은  이 두 문건을 요약하여 정리한
것이다.


  '대한사민론설 13개조' 및 '활빈당격문'의 주요 내용
  1. 요순의 법을 행할 것.
  2. 사치하지 않은 선왕의 복제를 본받을 것.
  3. 백성이 소원하는 문권을 임금에게 올려 일국의 흥인을 꾀할 것.
  4. 무익한 개화 대신 민간 화목하고 상하 원없는 정법을 행할 것.
  5. 방곡을 실시하여 구민법을 채용할 것.
  6. 사전을 혁파하고 균전으로 하는 목민법을 채용할 것.
  7. 곡가의 양등을 막기 위해 곡가안정책을 쓸 것.
  8. 금광의 채굴을 엄금할 것.
  9. 약형의 여러 법을 혁파할 것.
  10. 세금을 경감할 것.
  11. 도살을 금할 것.
  12. 행상자에게 징세하는 패를 금할 것.
  13. 통상무역을 금할 것.
  14. 시장에 외국 상인의 출입을 금할 것.
  15. 타국에 철도부설권을 허여치 말 것.


  이러한 내용을 보면, 그들이 당시까지 매우 보수적인 유교적  전통 관념을 가지고 있었음
을 알 수 있다. '요순의  법'이라든지 '선왕의 복제'를 추구하고 균전법을  지향한다는 것이
이러한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위의 구호들 중에는  당시의 현실적 민생문제와 관련
된 조목들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방곡령의 요구나 세금 경감, 외국 상인의 통제, 철도
부설권의 양여 반대 등이 그러한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동학의 '폐정개혁안'과 일
면 유사한 점이 있다. 또한 이 점이 그들을 사회변혁 의식을  가진 민중 저항세력으로 보는
주요 논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활빈당이 이러한 자신들의 이념이나 구호를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활동을 한 흔
적은 잘 나타나 있지 않다. 그들은 이를 정책에 반영하거나  언론을 통해 여론을 형성할 만
한 수단이나 도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불법자들이었기 때문에 국가기
관이나 언론이 그들의 선전을 수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그들의 불법적
약탈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내세운 명분이나 선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민중들간에는 그들의 구호나 선전에  공감하기도 하고, 그것을 통하여  민중 생존권에 대한
각성이 다소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활빈당의 빈민구제 활동도 그 불법적 성격 때문에 사회적으로 그다지 도움이  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부자들로부터 약탈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것은 민중들에게 정신적인
카타르시스를 주는 행사이기는 하였지만, 폭력을 동원하여  이루어지는 이러한 행위가 민중
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이 역시 민중에 대한 그들의 선전행위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이었다. 사실 활빈당들이 약탈하여 분배하는 것은 주로 그들이 대량으로 운반하기 어려웠
던 곡물류였다. 반면 돈이나 귀금속 또는 무기류를 민중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은 많지 않았
다. 결국 그들이 가지고 갈 수 없었던 장물들을  '활빈'이란 이름 아래 민중들에게 나누어주
었던 것이다.
  20세기 초에 우리 나라의 각지에서 일어났던 활빈당은 당시의 사회적 모순 속에서 야기된
민중들의 일탈 행동으로서, 이는 누적된 대내외적 모순 속에서  고통받던 민중들의 항거 행
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민중들이 삶을 영위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자활 노력의 하나라고
도 할 수 있다. 그들은 약간의 사회개혁적인 이념을 표방하기도 하였고, 비록 구호와 선전을
위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실제로 약탈물을 민중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또  봉건잔재적
인 여러 특권을 이용하여 생산물을 독점하던 양반 부호들을 습격하고 약탈함으로써  반봉건
적인 투쟁양상을 보이고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불법적인 도적활동은 당시 민중들로부터 진
정한 동조를 받지 못하였다. 따라서 활빈당의 활동이 역사적으로 발전을 가져왔다고 적극적
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활빈당 단원들 중 일부는 동학도들의  잔존세력이 흡수된 것이었다. 그들은  1906년 일본
경찰력의 힘으로 대부분 해산된 후,  일부 단원들이 의병운동에 투신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민족운동사적으로 어느 정도 의미 있는 활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본질적으로
토벌당하여 궁지에 처했던 그들의 자구적인 처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항일 민
족운동의 일화이었던 것처럼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