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19세기의 대표적 변란 - 광양란과 이필제의 난(2)

구름위 2013. 6. 19.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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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제의 난


  100여 년 전 그때 그 시절,  우리네 젊은이들 역시 눈앞에 전개되는  부조리를 그냥 보아
넘길 수가 없었나 보다. 무능한 왕권 아래,  끝이 보이지 않는 부패한  세도가들의 매관매직
과 가렴주구... 말세로 치닫는 조선왕조와 이에 기생하는 관료집단들에 대해 아무 것도 기대
할 수 없는 민중들은 조선이 아닌,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이끌어 내고자 하였다.
  당시 경제구조의 모순을 가장 무겁게, 가장 아프게 느끼고  있는 신분계층은 일반 농민들
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 나설 엄두는 못 내었다. 대신 모순덩어리 사회구조 속에서 뜻
을 펴지 못한  소외된 한유와 빈사들은 저항적 지식인이 되어 전국을 유람하며 농민들을 각
성시키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규합, 사회구조를 그 토대부터  흔들어 놓는 '조선식 민주
화투쟁'을  전개하였다. 더구나 19세기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서양세력의  침입이라는 전
대미문의 양상을 보임으로써  조선사회는 언젠가 닥쳐올 서양 오랑캐의 침공에 대한 위기의
식이 높아졌다. 이러한 국내의 봉건적 모순의 심화와  양이침공에  대한 불안감은 현실도피
적인 요소를 이루고 있는 정감록 사상을 전국적으로 번지게 하였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전국을 무대로 민중들과 소외된  지식인들의 한에 불을  지폈던 '직
업적  봉기꾼' 이필제의 구호와 행동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현실을 극복하며 내일을 준비하
다 좌절해갔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일반적으로 이필제란이라고 하면 1871년(고종 8) 3월 10일 이필제가 동학의 제2대 교주인
최시형과 함께 경북 영해에서 봉기한 사건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사실 그는 1869년부
터 1871년 말 체포되어 처형당하기까지 3년간 진천, 진주,  영해, 문경 등지에서 4회에 걸쳐
연속적으로 반정부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필제가 처음 반정부 구호를 내걸고 거사한 것은 1869년  진천작변이었다. 하지만 첫 거
사부터  내부 밀고자에 의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밀고자는 김병립이었다. 그러나 첫 
거사 실패에 좌절할 이필제가 아니었다. 그는 이듬해 다시 진주에서  난을 일으켰다. 이 모
의에서 이필제 외에도  정만식, 성하첨, 양영렬 등 직업적  봉기꾼들도 함께 주도하였다. 그
러나 이번에도 조용주 형제의 투서와 전낙운의 밀고로 발각되었다.
  삼세번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세 번째 이필제는 1871년 3월  영해에서 궐기하였다. 드
디어 거사에 성공, 전 조정 관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특히 이 거사에서 이필제가  종
전과는 다른 지도력과 조직력을 발휘하였다. 특히 동학 창시자  최제우의 순교일인  3월 10
일을 거사일로 잡고, 교조신원을 기치로 동학교도를  조직적으로 끌어들여 거사에 성공하였
다.
  특히 우리 나라 운동사에서 이 영해란에 대한 평가는 바로 농민봉기의 맹아적 성격을 지
닌 거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난을 통해 반정부 인사의 주자로서의 자신감을 얻은 이필
제는 다시  조령에서 난을 일으키려  하였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그의  편이 되어주지를 
않았다. 네 번째 거사 실패로 2년간 4회에 걸친 이필제의  반정부 투쟁은 형장의 이슬과 함
께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상이 바로 이필제난의 자취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이필제를 직업적  봉기꾼 내지
전문  반란지도자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4회에 걸친 반란  가운데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
1871년 영해봉기이므로, 이필제의 난을 영해봉기로 달리 부르기도 한다.
  이필제는 1824년(순조24) 충남 홍주에서 태어나 1871년(고종8) 조령거사  실패로 체포, 형
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아버지는 이규묵이다.  태어난 곳은 홍주이나 성장기 대부분을  충북
진천에서 지냈다. 스스로 "어려서부터 책을 읽고  자랐다"한 것으로 보아 그의 신분은 잔반
계층으로  이해하고 있다. 원래  그의 이름은 이근수였으나 필제로  고쳤으며, 급제 후에는 
이홍으로, 다시 주지문으로 성명을  바꾸었다. 진천작변에서는 김창정  또는 김창석, 진주와
거창에서는 주성칠, 주성필로,  영해에서는 이제발로, 문경에서는 진명숙  등의 가명을 쓰며
수색의 그물을 빠져나갔다.

진천에서 중원으로 - 진천작변


  이필제의 첫 번째 반정부 거사는 1869년(고종 6) 4월 자신이  살았던 충북 진천을 무대로
일어났다. 하지만 그와 함께 난을 모의한  사람은 진천 사람에 국한되지  않았다. 이필제는
목천에 사는 김낙균, 공주 사람 심홍택 부자와 양주동 등  충남의  인사들과 함께 제세안민
을 위해 군사를 일으켜, 북으로 중원(중국)을 정벌한다는 기치  아래 거사하였다. 또한 이들
은 자신들의 행동이 단순한 개인의 영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보존을 위한 의병으
로 자임하고 있었다.
  진천거사의 명분이 단순한 조선왕조의 전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원정벌까지 외치게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가 예전과  다르다는 대외적인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었다. 1861년(철종11) 영불연합군은 텐진조약의 의무를 제대로 이행
하지  않는다는 구실을 붙여 중국에 쳐들어왔다. 그런데 외침을 받은 중국은 무력하게 북경
을 내주고 황제는 열하까지 피난가야  했다. 양이침공에 어이없이 무너지고 있는 중국에 대
한 소식은 조선사회 전체에 엄청난 위기의식과  혼란을 가져왔다.
  이필제 역시 이 소식을 듣고 중국을 침략한 서양 오랑캐가 곧  조선 땅에도 쳐들어올 것
이라고 분석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거사명분은  봉건 조선정부의 타도만이 아니라,  서양
세력의 퇴치를 통해 제세안민에 두어져야 했다. 이처럼 그들의  봉기는 야심과 명분이 뚜렷
한 거사였다.
  여기에 19세기 중엽 이후 대외적인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었던만큼  정감록이 그 어느
때보다 민중세계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당시 팽배했던  피난사상 가운데에는 병란이 일
어났을 때 보신을 위한 피난처로서 산에도 이롭지 않고 물에도 이롭지 않은 궁궁이 가장 좋
다고 하고, 그 곳은 병화나 흉년도 들지 않는 보신지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에 편승하여  이
필제 역시 임진송송지설을 내세웠다.
  "궁이 2번 들어가니 피난처로 가장 좋은 곳을 뜻하는 궁궁이고, 필제가 태어난 해가 을유
년으로 을을을 말하니(이필제의 운명은) 임진란 때의 이여송과 같다"는 논리로, 서양세력이
연합하여 우리나라를 침략한다면 당연히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같은
존재로 자신을 자처하고 있었다.
  요컨대 진천작변은 정감록의 피병설과 서양오랑캐의 침공이라는 대외적 위기의식이  결부
되어 동모자들과 함께 반정부 투쟁 내지는 신 왕국 건설을 실현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더구나 중원정벌이라는 기치는 조선인의 자부심을 고취시킨  것으로, 운동자금 마련에 더
없는  명분이 되었다. 이들은 인척이나 평소 친분관계를 이용하여  동지를 포섭하였고 거사
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유층을 끌어들였다. 이필제에 대한 말을 전해듣고 진천
까지 찾아온 공주 진사  심홍택은 상당한 재력가였는데, 이필제의 수려한 외모와 청중을 압
도하는 언변에 반하여 이필제를 위해서는 천금도 아까워하지 않는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다.
  서양세력의 침입이라는 국가 위기를 이용, 국가  보전과 새로운  국가 건설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던 진천작변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철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동지
김낙균의 당숙  김병립의 고발로 사전에  발각되었다. 결국 심홍택과 양주동은  포도청에서
심문받다가 죽었으며, 이필제는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작금의 국가정세는 산 넘어 산이다 - 진주작변


  진천에서 시도한 변란이 사전에 발각되어 도망한 이필제는 그해 12월 진주 일대를 무대로
두 번째 변란을 기도하였다. 주성칠 또는  주성필로  이름을 바꾼 이필제는 거창으로 가서,
전부터 알고 있던 양영렬과 그의 소개로 정만식, 성하첨 등을  만나 일단 남해에서  거사할
것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 남해거사는 자금부족과 동모자의 비협조로 중도에 포기하였다.
  진천작변 이후 도망하게 된 이필제는 그해  여름 선산을 거쳐 거창으로 가서  김영구 집
에 머물다 그 지방의 양영렬을 만나 진주작변을 다시  준비하게 되었다. 양영렬은 정만식과
성하첨에 대해  자신은 이들과 일찍부터 알고지내는 사이로 두 사람은 병법에 능하며 만약
에 일이 있으면 기꺼이 창의할 것이며, 두 사람이 사는 동네에는 함께 일을 꾀할 사람이 많
다고 소개하였다. 따라서 양영렬 등은 이필제가 오기 전에 거사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양영렬은 의병장의 후예로 알려졌다.  원래 평양에 살았으나 1852-1853년  북경에 난리가
났다는 소문에 두려움을 느끼고 남쪽으로 내려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진주작변에서 그
의 활약은 대단하였다. 이필제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명을 쓰며  격문을 써 돌리고 동조자
를 불러들였다.
  정만식은 서울 사람으로 병법에 능하고  왕가의 종실 선춘군을 사칭하였다.  병인양요 후
피난차  고령으로 이사한 그는 이미 고종2년 무렵부터 만민을 구하기 위해  제주와 울릉도
등에서 큰일을 일으키려는 야심을 가진 반정부 인사가 되어버렸다.  창년 사람 성하첨 역시
병법과 술수에 능통하며 관운장에 비견될 담력의 소유자이다.
  진주에서 정만식, 성하첨 등과 합세한 이필제는  기왕의 민란들의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며 거사에 완전을 기하려 하였다. 예를 들면 성하첨은 이필제에게 진주민란이 실패한
이유로 난군이  쉽게 모이고 쉽게 흩어지는 등 굳은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
으며, 고종6년 3월 광양란에 대해서는 짧은 시간 내에 3-4개 읍을 공략하였기  때문에 성공
할 수 있었으며, 8월의 통영민란에 대해서는 주사와 군병이  모두 장교의 수중에 있어서 실
패하였다고 분석하였다. 나아가 계획을 보다  조직적으로 지도하고 행동하기 위해서 이데올
로기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를 위해 이들의  거사 모의에는 (고산자 비기), (상주신도
록 비기) 등의 비기가 인용되었다.
  이필제는 당시 서구 자본주의 열강이 침탈과 일본의 침략성,  중국 농민란으로 인한 불안
등의 국제정세와 당시 국내 빈발한 명화적 등 대내외적 봉건  조선왕조의 취약성을 파악하
고 의리와 명분으로 창의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장차   조선이 동서남북 4개의 제후국
으로  나누어질 것인바, 자신은 정만식의 얼굴빛이 예사롭지 않고 손바닥에 신비한 무늬(점)
가 있다는 사실에 그를 정진인으로 내세웠다.
  "지금의 시세는 양요가 자주 있고  북쪽이 소요하여 강을 건너올  우려가 있으며, 왜구가 
엿보는 조짐이 있고 해도에는 또한 도적이 많으니  나라의 형편이 산 넘어 산이다. ... 만약
지금  한 곳에서 병사를 일으키면 사방에서 봉기하고 곳곳에 전쟁의 기운이 있어서  온 나
라가 삼분사열되어 북요를 막기 어렵고, 군정(여러  명의 정진인)이 함께 나타나는 것  역시
저지하기 어려우므로, 나는 의병을 일으켜 해도로 들어가 안정을  도모하여 집과 나라를 함
께 건지는 것이다."
  진주거사에 필요한 병력은 평소 자신의 문명을  이용하거나 넉넉한  삯을 준다는 소문을
퍼뜨려 짐꾼을 모았다. 자금은 성하첨이 밭을  팔아 마련한 170냥으로  충당하였고, 남해로
들어가기 직전 부족한 배값을 충당하기 위해  명화적을 위장하여 인근 김부자 집의  재물을
탈취하려고도 했다.
  이들이 거사에 착수한 것은 12월 11일이었다. 먼저 남해현에서 어사출두 형식으로 재물
과 무기를 모으고 섬사람들을 동원하여 통영, 고성, 김해를 거쳐 육지로 나가  성을 공격하
고 곧장 서울로 향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모군한 사람 가운데에는 약속한 돈을 주지 않는다거나,  혹은 어사로 가장하여 남
해에  들어가 재물을 빼앗는다는 계획에 실망하고 대열에서 이탈하는  자가 속출하였다. 또
남해 죽도로 가려 했으나 장교 하나가 함께 배에 오르자 그들의 계획이 탄로날 것이  염려
되어 중도에 포기하고 모두 배에서 내렸다. 결국 이번 거사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남해거사에서 실패한 이필제 등은 다음해 2월   28일 또 다시 덕산에서 변란을 시도하였
고,  그들은 나무꾼들을 모아 관청으로 들어가 관장을 둘러메고  읍촌을 돌아다니면 군정들
이 모여들 것으로 기대하였다. 이를 위해 선산, 진주, 거창 등지에 서찰을 보내거나 직접 찾
아다니며 정감록의 내용이나  혹은 사회모순을 거론하여 동지를 포섭하고 자금과  장정들을
모으고자 했다. 그러나 동모자로  포섭한 조용주의 투서와 홍종선, 전낙운의 고발로 실패하
였다.
  내부 동지에 의한 밀고로 진주거사  역시 불발로 끝나고 이들은  진주병영에 수감되었다.
조정에서는 사태의 중대성에 비추어 주모자를 비롯하여 더불어 모의하거나 적어도 거사계획
을 사전에 알았던 사람들까지 반란세력으로 규정하고 많을 사람들을 잡아 서울로  압송하여
신문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우두머리인 주성칠이 도망하여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종용이나
협박에 의하여 음모에 가담한 종범들을 문책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덕분에 사형
에 처해진 사람은 없었다.
  대신 정만식은 추자도, 양영렬은 흑산도, 양성중은 신지도, 성하첨은 김갑도,  박만원은 지
도, 양경노는 임자도, 정재영은 사도, 정홍철은  위도, 어치원은 녹도, 최봉의는  여도, 박사
원은 마도, 장경노는 고금도 등등 수많은 남해의 여러 섬에 흩어 유배되었다. 진주병영에 수
감되어 있던 또다른  죄수들은 그 지방에서 재량권을 갖고, 죄의  경중에 따라 처리하게 하
였다. 한편, 전 정언 김희국이 민란에 가담했다 하여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곧 혐의가 벗겨
져 풀려나고 정언에 재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