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민란의 시대 - 고종 때의 민란들

구름위 2013. 6. 19.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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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민란의 시대인가? 19세기는 중세봉건사회가 해체되고 근대사회로 이행해가는 변혁기였
다. 봉건사회 내부의 모순이 심화되는  가운데 각 계층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화되면서  갈등,
대립이 격화된 시기였다. 특히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조선사회의 해체
와 갈등이 더욱 급격하고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 피지배층인 민중에 대한 수탈, 억압이 극심해지면서  민중들은 생존을 위한 자
기 보호의 문제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제 백성들은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
면 안되게 된 것이다. 이에 민중들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수탈을 벗어나고자 폭력적
인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움직임 민란, 곧 농민항
쟁이다. 19세기 전반기는  민란 형태의  직접적인 봉기가 자주  발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862년 이후의 시기는 이른ㅂ나 민란의 시대였다고 하겠다.
  1862년의 전국적 농민항쟁을 경험한 뒤 농민들의  운동역량은 크게 고양되었다. 농민들은
다수의 힘으로 폭력적인 저항을 통해 자신들의 뜻을 이루는 데 매우 익숙해져 있었다. 축적
된 항쟁경험들은 누군가의 지도에 이끌리지 않고서도 농민들 스스로 항쟁의 주체로 나설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농민역량이 고양을 지배층은  "농민들이 조금이라도 여의치 않으
면 무리를 지어 난리를 일으키고,  기강과 분수를 어기며 넘보는 일을  호쾌한 일로 여기고
있어 교화가 불가능할 정도"라고 여겼다.
  고종 시대는 민란의 발생이 일상화된  시기였다. 1862년 농민항쟁이 폭발한  이후 대원군
집권기에는 상대적으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으나,  1880년대 이후 다시  빈번하게 발생하기
시작하여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걸쳐  끊임없이 일어났다. 때문에 정부
에서도 민란을 예사로운 일로 여기기조차 하였으며, 민인들도 민란을 일으키는 것을 보통으
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한 인식은 "백성들이 모두 덕을 생각하고 의리를 두려워하니 반드시
부들이해서 (민란을) 일으켰을 것"으로 인식하는 지배층의 모습에서나, "감히 관리를 죽이거
나 성지를 약탈하지는 않고 오직 깃대를 세우고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국왕의 회유가 있으면
곧바로 평정"되는 농민들의 모습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고종 시대에 이처럼 많은 민란이 일상화되고 만성화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부적,
외부적 모순의 중첩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62년 농민항쟁은  봉건사회의 구조적 변혁을 추
구하였다. 농민들은 실제로 농지를 경작하는  농민이 토지를 소유할 것을 원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이와 같은 농민의 요구를  수용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곧  지주제를 해체시킬 만한
능력을 지니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주제의 해체 대신 균등한 조세 부과를 통해 사
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것이 바로 삼정이정책의 시행이었다.
  고종 또한 1862년의 농민항쟁에서 제기되었던  사회문제들을 처리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왕위에 올랐다. 나이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실권을 장악한  대원군은 일련의 사회안정화 정
책을 수행하였다. 그는 호포법, 사창제 등의 조세개혁을 실시하여 대내적인 위기를 수습하고
자 하였다. 그러나 토호를 억제하는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으나 농민들의 사
회변혁 욕구를 충족시키지는 못하였다. 곧 농민들의 사회변혁 요구를  수용하지 못한 채 최
소한의 대응책밖에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고종 즉위 한달 만에  황해도 풍천의 민란(1863년) 발생을 시작으로,  칠원(1868
년), 통영(1869년) 등에서 잇따라 민란이 일어났다.  이와같은 항쟁들은 철종 때 발생하였던
민란들과 마찬가지로 반봉건을 지향하였다. 결국 고종 때에 계속적으로 발생한 민란은 이미
해체기에 있던 조선 봉건사회의 해체를 더욱 촉진하는 한편 동학농민전쟁의 원류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전까지 고종 때 발생한 민란은 대략  59회 정도로 추산된다. 그러나
이는 자료가 남아 있는 경우이며, 중앙에 보고조차 되지  않은 민란까지 합하면 100여 건에
달한다. 시기적으로는 유례 없을 정도의 한재가 발생한 1888년을 시작으로 1893년에 집중적
으로 나타나고 있다.
  19세기 중엽의 조선 사회는 외세의  침투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  시기에 서구 열강의
조선 침투가 노골화되면서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라는 전쟁을 수행하였다.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척화비를 세우는 등, 구미 열강과의 수호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그러나 1873년(고종 10) 대원군이 실각하고 민씨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자, 조선정부의 국
내외 정책에 수정이 가해졌다. 그러한 변화의 물결은 열강과의 수호조약 체결로 귀결되었다. 이제 조선 봉건사회는 반봉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외세의 침략이라는  또다른 모순이 추가된 것이다.
  대외적인 위기상황 속에서 농민항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1870년대에는 경상도 울산부
(1875년) 외에는 이렇다 할 민란이 없었다. 그러나  황해도 장연현(1880년)의 민란은 소강상
태에 있던 민란의 재연을 예상케 하는 움직임이었다.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민란 발생 양상
은 1883년 이후 곳곳에서 재연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자본주의 열강의 침탈과 지배층의 극심한 수탈,  착취는 농민들의 삶에 최소한의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이와 같은 농촌 경제의 파탄으로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더욱 팽배
해갔다. 게다가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의 정치적 위기는 국가체제를 동요시키면서  농민저항
의 움직임을 더욱 활발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888년을 계기로 민란은 더욱 격화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갔다. 민란은 해마다 일상적
으로 일어났으며, 인접 지역으로 쉽게 확산되었다. 마침내 1890년대 초에는 민란 발생이  전
국적으로 만연하고 일상화되었다. 특히 1893년에는 민란의 절정기라 할 정도로 민란이 발생
하였다. 이 해에만 65건 이상의 민란이 전국 각지에서 발생하였다.
  이러한 폭발적인 민란의 전개는 결국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발생으로 이어졌다. 그리하
여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민란형태의 농민항쟁은 조직적인 농민전쟁의 형태로 바뀌게 된  것
이다.
  이렇듯 민란이 폭증하게 된 근본 이유는 이 시기 조선왕조가 온갖 쌓인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제 국가권력은 민들을 보호해주지  못하였다.
더욱이 거듭된 자연재해와 온갖 세금 징수  명목의 증가로 농민층의 납세 능력은  한계점에
달하였다. 그러나 탐관오리의 가렴주구는 극에 달하여 농민들이 도저히 감내할 수 없었다.
  또 한편으로 외세 자본세력의 침투로 인해 농촌지역도 급속도로 식민지적 무역구조인  미
면 교환체제로 편입되어갔다. 일본으로의 미곡 수출로 인해 곡물 가격은 상승하였으며, 농민
들은 등골이 휘도록 일하고도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리하여 민심은 매우 흉흉해졌
다. 이 시기 이씨왕조가 망한다는 참언이나 (정감록)의 후천개벽설이 유행하면서 민심은 빠
르게 이탈되고 있었다.
  한편 고종조의 민란은 전국 팔도에서 골고루 발생하였다. 이는  철종 때의 임술민란이 주
로 삼남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요컨대 민란이 전국적으로 확
산되고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이들 지역 가운데 철종, 고종 때 모두 민란이 발생한 곳은  울
산, 성주, 함흥, 황주 등지이고, 고종 때만 두 번 발생한 곳이 수원, 낭천 지역이다.
  이 시기 농민항쟁의 특징은 도 단위로 일정한 지역,  일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이다. 사호 밀접한 연계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1888년에는 함경도, 1889년에는  강원도,
1892-1893년에는 평안도 및 전라도  등 항쟁의 규모가 도  단위로 확대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1893년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된 일련의  민주항쟁은 지역적으로 볼  때,
1894년 농민군의 활동지역과 대부분 중첩되어 농민전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당
시 사회적 분위기를 지작할 수 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전라도 지역에서 발생한 민란의 지도자인 오지영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농민군의 지도부가 되었다. 덕산에서 봉기를 주도한 나성, 이영탁 은 민란을 일으킨 후 도망
하여 농민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  같이 1893년의 민란의 주체
는 곧바로 1894년 농민항쟁의 주체로 연결되기도 하였다.

대원군 집권기의 3대 민란


  풍천민란


  이 사건은 향촌사회의 권력을 놓고 향임층과 서리, 군교층의  대립이 수취제도 운영의 부
정과 얽히면서 농민항쟁으로 발전한 것, 즉 향전이 농민항쟁으로 발전한 사례이다.
  풍천의 조세 운영은 대부분 토지에 집중되고 있었다. 많은 조세가 모두 토지에 집중된 결
과 토지소유자들을 중심으로 한 향임배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이들은 조세운영권을 장악
하고 있던 현직 유리(지방 관아의 이방 아전)와 상정색을 교체하고자 하였다.
  향임들은 우선 향회를 열어 "고을의 폐단과 백성들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직 유
리인 박인희와 상정색 이익주를 부민인 김낙기와 김용운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를 관철시키고 통문을 돌려 농민들을 동원하였다. 이때  농민들은 만약 기일을 어
겨 나가지 않는 사람은 벌금을 징수하고, 나아가 집을 부순다고 하여 공동체적 강제에 의해
동원되고 있다.
  이렇게 동원된 수백 명의 민인들은 1863년 12월 26일 관아로 들어가서 유리이 교체와 더
불어 7개 항에 달하는 읍폐의 혁파와 원장전의 반환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항쟁은 평화적인
시위로 끝나지 않았다 사태가 처음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자, 통문을 돌려 농민군
을 동원한 윤장언은 "슬프다! 저 우매하고 완고한 무리들이 사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나에게 '통문을 발해 무리를 모았으나 우리들의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것을 오히려 막는다'
면서 무수히 난타를 가했다. 겨우 살아서 집에 돌아왔다"고 애통해하였다.
  이제 농민들은 향임층의 통제를 벗어나  폭력적인 저항의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통문을
돌려 정소운도을 주도하였던 향임층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농민들을  동원하였으
나, 농민들은 향임층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행동으로 나아갔다. 결국 향임층의 계획은 어긋나게 되었으며, 그들 또한 농민들의 공격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농민들의 저항이 자신들에 대한 교체운동과 관련된 것임을 알게 된 유리 박인
화와 장교 안원봉 등은 사령들을 동원하여  모여 있는 농민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였
다. 이에 많은 농민들이 부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일단 관아에서 물러
나와 해산하였다.
  이때 동원된 민인들은 주로 "나이 어리고 어리석은 부류들"이었다. 읍내 공격을 주도하여
처벌된 황기장, 조여익, 조양록 등은 마땅한 생업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벌금
을 걷거나 집을 부수겠다는 향임들의 말에 이끌려 난에 참여하였다. 곧 민란에 참여, 동원된
사람들 대부분이 최하층 빈민이었던 것이다. 벌금을 낼 정도의  여력이 있는 집안에서는 벌
금을 내고 불참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득이한 경우 대부분  머슴이나 노비를 대신 참여시켰
기 때문이다.
  민란 발생 후 중앙정부에서는 풍천부사 신명은을 파직하는 한편, 의금부에 압송하여 곤장
을 치고 금갑도로 유배보냈다. 또한 항쟁을 유발시킨 유리 박인희, 향임 윤장언 등은 엄형 2
차 후 육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러한 조처는 철종 때의 농민항쟁에
따른 처벌에 비해 아주 가혹한 조처였다. 결국 대원군 정권은 민란의 원인을 향촌사회 유력
자층이 수령의 통제에서 벗어났기 때문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항쟁에 가담한 농민층에 대해서는 철종 때보다도 훨씬 관대한 처분이 내려지고 있
었다. 철종 때에는 항쟁의 주도자는 효수되었으나, 풍천민란의 주모자로서 황기정 한 사람만 2차례 형장을 맞은 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으로  유배되는 처분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 나머지 조여익, 조양록 등은 한 차례 형장을 맞은 후 석방되었다.
  또한 수령과 책객(조선시대 고을 원의 비서 사무를 맡아보던 사람)  및 유리가 횡령한 원
징전은 모두 반환조처하고 책객 송지겸은 황해 감영에 압송하여 풍천민들이 보는 가운데 엄
형 1차 한 후 원악도에 유배보냈다. 이와 같은 중앙정부의 조처로 풍천민란은 일단락되었다.

 

칠원민란


  1868년 가을에 발생한 칠원민란은 현감  조현택의 부정, 탐학에 항거하여 일어났으나,  그
외의 항쟁 원인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밝혀져 있지 않다.
  난의 주동자인 황상기, 이도여, 전홍이 등은 통문을 돌려 동리별로 농민들을 동원하고, 만
약 참여하지 않으면 집을 부수는 등의 공동체적 의무를 강제하였다.
  동원된 수천 명의 난민들은 우선 객사에 모여 통곡하고 등소를 올려 수령의 부정과 고을
의 폐단을 혁파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 등소에는 일반  농민들뿐만 아니라 아전들도 참여
하였다. 이는 대부분의 농민항쟁에서 아전들이 농민들의 공격대상이 되는 것과는 다른 양상
이었다. 현감 조현택은 난민들의 공격을 받아 고을 경계 밖으로 쫓겨났다. 난민들은  감옥을
파괴하여 죄수를 석방하였으며, 항쟁에 불참한 사람들의 집을 부쉈다.
  주모자 황상기는 통문을 발하고 농민을  모아 관청을 습격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여러
차례 감영에 소장을 올리느라 가산을 탕진한 자"였다. 이는 1862년 진주민란의 지도자인 유
계춘이 "읍에 정소하고 감영에 정소하는 것으로 생애를 보냈다"는  것과 함평민란의 지도자
인 정한순이 "여러 차례 감영과 중앙에 정소하고 심지어 격쟁까지 행한"  것과 일맥 상통한
다. 이러한 사실은 이들이 부세의 공납제적 운영에 따라  발생하던 수많은 정소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농민들을 대신해 소송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곧 농민적  지식층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정소운동 과정에서 광범하게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황상기는 1862년 농민항쟁 당시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농민 반란세력의  일부로
보이는 함안아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도여는 1862년 농민항쟁에 참여했던 자로서, 간신히 풀
려나와 소상인으로 전전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사회 저변에 변혁을 지향
하는 저항세력이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농민적 지식계층이 농민항쟁을 적극적
으로 주도함으로써 농민항쟁은 보다 조직화되고 이념화될 수 있는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한편 민란 발생 당시 무근동과 구산면에서는 한 사람도  가담하지 않았는데, 무근동은 주
세붕의 후예가 대대로 사는 마을이었다. 농민들을 동원하기 위해 통문을 돌리자, 그들은  엄
중히 꾸짖으며 물리쳤을 뿐 아니라 동구 밖의 출입을 금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난민들이
현감을 내쫓은 후에 마을에 쳐들어와 집을 부수고 불태웠다.  그러나 민란 후에 중앙정부는
이 마을에 상을 내리고 무근동의 원로인 주희상을 참봉에 임명하였다.
  난민에 대한 중앙정부의 대책은 풍천민란의 조처와는 달리 가혹하였다. 병인,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야기된 농민층의 동요를 우려한 중앙정부는  강력한 탄압책으로 일관하였다. 결국
황상기, 이도여, 전홍이, 윤달주 등 민란 주모자들은 모두 효수되었다. 그밖에 등소에 참가한 아전들과 다수의 민란 참여자들은 심한 형장을 맞은 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민란의 원인을 제공한 현감 조현택은 파직된 후 의금부에서 조사를 받고 강진현에 유배되니, 이는 통상적인 조처였다.
  중앙정부는 "이러한 변이 일어난 것은 토호들의 무단을 막지  못했기 때문"으로 파악하였
다. 곧 향촌사회의 유력자층이 주도하여 일어난 항쟁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칠원민란은 토호들의 주도로 일어나지 않았다. 항쟁의 지도자는 농민적 지식인층이었던 것이다.

통영민란


  1869년 여름에 경상도 고성현에서 민란이 발생하였다.  이것이 그동안 고성민란으로 불린
이유이다. 그러나 민란의 발생이 고성현임에는 틀림 없으나, 고성현민 전체가 항쟁에 가담한 것이 아닐, 통제영이 소재한 춘원면민들에 의해 일어난 항쟁이었다.
  이 민란의 발단은 고성현 호적감색이 엉터리 호적작성이 문제가 되었다. 천민이 유학으로,
유학이 사천으로 뒤바뀌고, 부와 조 혹은 성과 이름이 뒤바뀌기도 하고, 노와 상전이 구분되
지도 않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살아 있는 사람이 죽었다고 된 경우도 있었다.
  이에 춘원면의 집강과 약정이 이를 시정하고자 했으나 고성현에서 군전 납부를  독촉하므
로 잘못된 호적대장대로 징수를 강행하였다.  고성현의 행정집행기구라 할 수  있는 집강과
약정이 군전 징수를 강행하자, 춘원면민들은 향촌 자치기구로 보이는 민소를 중심으로 이에
대한 사정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우선 춘원면 69동에 통문을 발하여 제1차 민회를 개최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등
장을 작성하여 통제사에 올렸다. 이에 통제사는 호적감색을 대령케 하고 식년의 호적대장과
대조하여 잘못된 호적을 고치도록 제결하였다. 통제사의 제결에 따라  호적 수정 작업에 착
수하였지만, 한가위 명절로 인해 수정 작업을 마치지 못한 채 민인들이 해산하였다.
  8월 16일 다시 통문을 돌려 제2차 민회를 열었다. 이때는 이미 무르익은 무력봉기를 준비
하는 단계로 진행되고 있었다. 각  기구마다 한 명의 장정을 출정토록  하고 만약 참여하지
않으면 집을 부수고 징벌하겠다며 농민들을 동언하였다.
  민회 장소인 어변정에는 수만 명의 농민들이 모여들었다. 유학 이남준이 엉터리로 호적을
작성한 호적감색 이정권을 질책하는 것을 계기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었다. 난민
들에 의해 호적감색 이정권과 그 아들 이인규, 색리 김탁호가 살해되고 그 시체가 불태워졌
다. 그 다음 날인 8월 17일 시체를 불태워버린  후에 난민들이 자연스레 해산함으로써 통영
민란은 일단 끝났다.
  통영민란은 처음에는 민소판행과 공원 등이 중심이 되어 통문 발송과 정소운동 등 합법적
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폭력적인 봉기의 형태로  전환하면서 이들은 주도권은 상실하였으
며, 빈민층이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통영민란에서 주목할 점은 걸인이나 소상인들이 폭넓게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걸인 김
원동은 "비록 떠돌아 다니는 걸인이라도 장작 하나를 가져오지 않으면 쫓아낼  것이라고 하
여 할 수 없이 장작을 가지고 시체를 불태우는 데 가서 던지고 왔다"고 하여, 협박에 못 이
겨 부득이 참여한 것처럼 발뺌하고 있지만, 이들은 실제 항쟁 과정에서 폭력적인 항쟁을 주
도하였다. 호적에 입적조차 안되어 집적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자들이 항쟁에 적극 가담하고
있다는 것은 빈민층, 더욱이 향촌사회에서 유리한 계층이 반봉건 농민항쟁으로 결집하고 있
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앙정부의 지시에 따라 통제영은 난의 실상을 조사하는 한편,  난의 수창자로 지목된 김
봉구, 윤보출, 김명필 등 3명을 효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걸인 3명은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고성현감 심의직은 파직되었고 전 현감 윤석오도  호적 일을 잘못 처리하여 난을  일으키게
하였다는 죄로 의금부에 압송되었다. 통문을  발한 민소판행이나 공원 등은  가벼운 처벌을
받는 데 그쳤다. 그러나 정부는 통제영의 조치가 매우 소홀함을 지적하고 다시 순영에서 재
조사하도록 명령하였다. 순영의 조사에 의해 민란의 주모자와 원인 제공장들이 형장을 맞은
후 유배되었다.
  한편 정부에서는 고성현과 통제영의 관할구역간의 대립도 민란 발생의 한 원인으로  파악
하였다. 1900년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통제영이 폐지된 이후에 통제영 소속과  고성군 인민
들이 서로 원수처럼 바라보며 물과 불도 같이 쓰지 않는다"는 것처럼  고성현과 통제영에서
관할하는 지역주민의 갈등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1870년 고성현을 고성부로
승격시켜 통제영의 직할 기관으로 편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