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민란의 시대 - 고종 때의 민란들(3)

구름위 2013. 6. 19.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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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수의 난


  민란의 발생과 천주교


  1898년의 방성칠의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제주도 농민들은 이  민란을 통해 조직화된 운
동과정에 참여함으로써 경험의 폭을 넓혔다. 동시에 운동의 실패과정에서 민란 지도부의 한
계와 토착 지배층의 실상을 제대로 인식하는 등 모순된  현실을 점차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러한 측면은 3년 뒤에 발생하는 1901년의 제주도민란으로 이어졌다.
  1901년 발생한 제주민란은 이재수의 란이라고도 한다. 이재수는  제주민이 2차 봉기 때에
서진장으로 비타협 무장투쟁을 전개한 인물이다. 그는 본래 대정현의 관노 출신이었다. 갑오
개혁으로 노비제가 혁파된 이후 관아의 급사 노릇을 하다가 제주민란 당시 향장(좌수) 오대
현의 하인으로 있었다. 당시 21세의 청년으로 제주민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항쟁을 주도하였
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제주민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현재까지도 역사적인 영웅
으로 칭송, 구전되고 있다. 더욱이 대정 일대의 촌로들 사이에서 신나게 이재수의  영웅담을
토해내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1901년의 제주민란은 천주교의 교세 확장과 이에 따른 폐단, 정부의 조세 수탈에 의해 발
생하였다. 천주교는 1886년 한불수호조약과 1896년 교민조약 등을 통해 선교와 신앙의 자유
를 획득하였다. 모진 박해의 시련이 지나간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는 1900년을 전후하여  특
권 세력화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 국왕이 지방  관리들에게 "신부를 나처럼 대하라"는 엄명
을 내렸으므로 신부의 위세는 거리낌이 없었다. 천주교는 조선의 고유한 가치체계나 토착종
교 등을 교리에 위배된다 하여 전면 부정하였다.
  제주도에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은 1899년  5월부터였다. 1901년 봄까지 2년간의
포교로 242명의 영세자와 6-7백 명의  예비신자를 배출하는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다. 이는
당시 제주도 전 인구의 2.5%에 해당하는 비율이었다. 그러나 입교자의 태반은  사이비 교도
였다. 그들은 종교적 신앙심에 의해 입교하지 않았다. "관리와 동등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
으므로"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어서" "죄를 지어도  성당에 들어가면 못 잡아가기 때문에"
등등 천주교가 갖고 있는 특권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한편으로 입교자 대부분은 토착 양반세력과 제주도에  귀양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1898년 농민항쟁 당시 농민군을 토벌하던 집단이었다. 결국 양적 팽창에 주력한 선교활동이
필연적으로 드러낸 문제점이라고 하겠다.
  천주교도들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챙 온갖 불법행위를 자행하였다.  심지어 사람을
붙잡아다 머리를 말꼬리에 붙들어 매서 끌고 다니는 등의  사형까지 자행하였다. 이 와중에
천주교를 박해하는 정의군 효돈 마을의 명망있는 유생을 성당으로 끌고가 고문을 하다 치사
케 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지방관은 살인범을 구금하기는커녕 수사조차 진행하지 못하
였다.
  제주도는 천주교도들에 의해 무법천지가 되었으며, 통치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신
부는 천주교인들의 불법행위에 대해 방관하거나 보호하는  입장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치외법권을 남용하여 지방행정에까지 간섭하는 등, 제주도민의 반천주교 의식을 자극하였다.
  특히 천주교인과 제주도의 경제적 전권을  장악한 봉세관의 결탁은 제주도민의  생존권을
더욱 열악하게 만들었다. 대한제국의 정부는 수취제도의  근대적 개혁이라는 명목으로 지방
재정을 전부 중앙 재정에 편입시켜 일원화하였다. 그 결과  지대와 지세의 인상으로 농민에
대한 수탈만 가중되었다. 더욱이 부족한 재원을 보충하기 위해 정부는 전에 없던 각종 잡세
를 부과하였다.
  잡세는 왕실재정을 충당한다는 명목으로 내장원에서 징수하였는데, 제주도에서 1899년 봉
세관 강봉헌이 파견되었다. 그는 전권을  행사하면서 세금징수가 가능한 거의  모든 토지와
산물을 조사하여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그는  철저하게 제주농민의 생존권을 도외시한
채 국가와 왕실재정 확충만을 위해 종사하였다.
  이에 따라 봉세관은 제주도민들에게 적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자신의 신변보호와 업무수
행을 위해 천주교도인들을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천주교인들은  프랑스 인 신부와 봉세관이
라는 두 개의 절대권력을 바탕으로 법적, 경제적 특권을 누렸다. 결국 침탈적인 봉세관과 천
주교인, 귀양인 세력과 그에 대항하는 지방세력과 일반 민중의 적대적인 대립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등소에서 무력충돌로


  1901년 4월 9일, 강우백을 중심으로 한 대정군민들이 군수에게 소장을 올려 봉세관 및 천
주교도에 의한 수탈과 폐단의 시정을 호소하였다. 12일에는 정의군에서 이와 동일한 집단행
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제주민들의 움직임은 봉세관과 이를 매개로 한 천주교인들의 경제적
수탈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자구책이었다.
  분산적인 농민들의 움직임과 달리 4월 초에는 위로부터의 저항형태인 대정상무사가  조직
되었다. 중심인물은 대정군수 채구석과 향장 오대현 등이었다. 이들은 자위조직을 결성하여
조직적인 반천주교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국 상무사이 주요  목적은 천주교인들의 폐단을 방
지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충돌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4월 29일, 반천주교운동을 해오던 상무사원 송희수에 대한 천주교인들의 구타사건이 발생
하였다. 이로써 민심이 동요하고 긴장된 분위기가 팽배하는 등 불안이 가중되었다. 5월  6일
에는 천주교인들과 상무사원들간에 무력충돌이 발생하였다. 이때  천주교인인 전 이방 김옥
돌이 향장 오대현이 기생첩을 간음한 사건이 일어났다. 대정군수는  두 사람을 태형에 처한
후 김옥돌은 수감하고 오대현은 석방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천주교인인  진사 김명현이
50여 명의 천주교인을 이끌고 와서 옥문을  부수고 김옥돌을 빼낸 후 상무사원들을  잡아갔
다. 그러나 뒤쫓아온 상무사원들과 천주교인들 간에 충돌이  빚어져 천주교인 2명이 빈사지
경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제주민란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상무사는 향촌조직을 통해 대정군민들을 집
결시키고 인접 지역에도 통문을 돌려 민회를 개최하였다. 민회에서는 봉세관의 세폐와 천주
교인들의 교폐를 성토한 후 제주성으로 가서 목사와 봉세관에게 등소하여 이들 폐단의 시정
을 요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서래민 장두 오대현, 동래민 장두 강우백을 선두로  하
여 제주민들은 두 길로 나누어 제주성으로 향하였다.
  봉세관과 천주교도인들의 폐단에 시달리던 다른 제주도민들이 적극 호응하여 민중의 세력
은 급격히 늘어났다. 민중의 위세에 놀란 봉세관 강봉헌은 서울로 피신하였다. 12일  민들이
한림동에 도착하자, 제주목사 김창수는 일체의 폐단과 교폐를 정부에 보고하여 혁파할 것을
약속하고 해산토록 종용하였다. 제주민들은 일단 5월 16일  등소절치를 밟은 후 제주목사의
약속을 문서화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해산키로 결정하였다.
  이것이 1901년 제주민란의 제 1차 봉기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합법적이고 비폭력적인 등
소운동이었다. 제주민들이 온건한 노선을 취한 것은  1898년의 방성칠란이 무력투쟁을 전개
하다가 비참한 결과를 맞이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대안이었다. 이는 수탈적 조세수취 구조의
변혁에 주안점을 둔 반봉건운동이었다.
  그러나 신부와 천주교인들은 이를 폭도들에 의한 반란으로 규정하고, 이교도에 대한 성전
을 선포하였다. 천주교측은 교인 천여 명을 소집하여 제주목의  무기고에서 꺼낸 총기 등으
로 무장하였다. 5얼 14일 800여 명의 교인이 한림동 민회소에 가서 농민들에게 발포하고, 장
두 오대현을 비롯한 6인을 체포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대정현으로 쳐들어가 인명을 살상하
고 무기고를 열어 중무장하였다.
  천주교측은 장두 오대현만 체포하면 민중이 해산할 것으로 오판하였다. 그러나 민회의 실
상을 무시한 천주교측의 강경대응은 오히려 제주민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이제 등소를 통
한 온건노선은 무력투쟁에 의지한 강경노선으로 급선회되었다.


  반봉건, 반외세 항쟁으로


  무장한 천주교측에 의해 무참하게 진압된 민인들은 새로이 항쟁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들
은 대정현에서 동진, 서진의 두 진으로 구성된  민군을 결성하였다. 지도체계도 개편되었다.
화전민 강우백과 관노 출신인 이재수가 동, 서진 대장이 되었다. 이들은 조총 300자루와  죽
창으로 무장하는 한편, 3군에 통문을 돌려 봉기를 촉구하였다. 이에 제주도민 전체가 분연히
호응하면서 항쟁은 제주도 전역의 무장투쟁으로 확대되었다.
  5월 17일 농민군은 신부가 지휘하고 있는 제주성으로 진격하여 성 밖의 황사평에 집결하
였다. 이때 집결한 농민군은 수만 명에 달하였다. 제주성 내의 천주교측은 성문을 굳게 닫는
한편, 대포를 성벽 위에 설치하는 등 방어체제를 구축하였다. 17, 18일에는 천주교측의 선제
공격으로 농민군 18명이 살해되었다. 농민군 또한 일본인에게 양총 50자루를 구하여 전력을
증강하였다. 이로부터 서로 공방전을 전개한느 가운데 신부는 20일 유배중이던 장윤선을 목
포로 파견하여 프랑스 군함의 급파를 요청하였다.
  농민군은 20일에는 동, 서, 남, 북진,  24일에는 동, 서, 남진, 27일에는 동,  서진으로 진을
나누어 제주성에 대한 철저한 봉쇄작전을  수행하였다. 제주성 내로의 식량과  땔감 판매도
금지되었다. 한편으로 성내에 통문을 돌려 농민들의 봉기를 촉구하였다. 이때 제주목사와 대
정군수는 5월 18일과 21일 두 차례에 걸쳐 중재를  시도하지만, 난민들은 세폐와 교폐의 근
절 및 민인들을 살상한 천주교도들의 처단을 요구하며 화해  요청을 거부하였다. 결국 그들
은 위기 촉발의 상황을 인식하고 성 밖으로 피난하였다.
  천주교측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프랑스 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고자 하였다. 그리하
여 23일에는 장두 오대현 등 12명을 풀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강화를 중재하도록 하였다. 그
러나 이들의 노력 또한 실패로 돌아가고, 오대현은 동진대장으로 농민군의 선봉에 섰다.  25
일에는 제주성 내의 민인들까지 봉기하였다. 이들은 28일 옥문을 때려부수고 성내의 천주교
도들과 충돌을 전개하였다. 결국 안팎으로 공격당한  천주교도측은 패배하고 농민군의 무혈
입성이 이루어졌다.
  입성한 농민군은 서진대장 이재수의 주도하에 천주교도를 색출하여 250여 명을  살해하였
다. 그러나 여기에는 "장군이 덕에 힘입어 천주교인들을 모두 죽이니, 이로부터  3군의 민인
이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다"는 제주도민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있었다. 한편 정부군 파견 소
식이 전해지자 이재수는 3군민에게 통문을 보내 15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자를 모두 징발하
여 방어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방성칠란 당시 진압세력이었던 재지 양반과 유배중인 양반
들, 관리들을 색출하여 처단하고 지방관아를 접수하였다.
  그러나 천주교도와 양반 세력의 처단문제는 갈등과  대립을 초래하였다. 동진대장인 오대
현은 이재수의 강경노선에 반발하였다. 이는 출신 성분의 차이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이
재수가 관노 출신이었던 반면, 오대현은 고을의 좌수로서 양반, 향임 등의 토호 세력을 대표
하고 있었다. 그 결과 두 진이 서로 총을 겨누며 싸우는 내분 상황까지 초래하게 되었다. 두
진의 내분은 진압군 파견 후에도 계속되어 봉기군의 통일된 대응전략이 마련되지 못하였다.

 

민란의 실패


  5월 31일 270명의 프랑스 해군과 신임 제주목사 이재호를 태운 두 척의 프랑스 군함이 제
주도에 입항하였다. 6월 2일에는 정부군인 강화도 진위대  100명과 궁내부 고문관인 미국인
산도가 급파되고 일본 군함까지 출동하였다.
  이제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프랑스 군함의 제독은  6월 1일 신임 제주목사
로 하여금 전 대정군수 채구석을 포함한 난민의 지도자들을 체포하도록 위협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프랑스 군인들이 직접 토벌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미국인 고문관 산도도 무력진압을
희망하였지만, 정부의 정책에 의해 프랑스 군함의 철수를 주선하였다. 그리하여 정부군과 신
임 제주목사는 난민들에게 선 해산, 후 민폐 혁파라는 조건으로 자진 해산을 종용하였다.  6
월 2일에는 동진 대장 오대현과 제주목사 정부군 대장 사이에 화해가 성립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제주도민들은 이를 단지 사태수습을 위한  임기응변의 미봉책으로 간주하였다. 게
다가 제주민들의 1차 봉기 때 도망갔던 봉세관 강봉헌이 대정군수로 부임하여 제주도민들을
자극하였다. 농민들은 통문을 돌려 "어찌 산포 4-500명이 농민군 수백을 다할 수 있겠는가"
하며 제주도민들의 궐기를 촉구하였다. 더욱이 6월 9일 재차  입항한 프랑스 군함의 무력시
위는 제주도민들의 강한 반발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운동 지도부의 노선은 통일되지  못하였다. 정부군의 파견으로 내부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동진은 중앙정부와 협상을 전개하는 한편, 합법적인 등소를 통해 운동목표를 실
현하고자 하였다. 서진은 천주교인을 색출하여 모두 처단하는 강경노선을 취하였다. 6월 7일
까지 살해된 천주교도는 600여 명에 달하였다. 난민들은 민폐 혁파와 천주교도들의 처단 및
도민들의 죄를 묻지 않겠다는 확실한 보장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난민들의 요구는 수용되지
않았다.
  협상이 지지부진함에 따라 6월 10일 신식무기로 무장한 정부군 200명과 13명의 순검이 급
파되었다. 정부군 대장 윤철규는 서진대장 이재수와  면담하고는 서진의 요구사항을 수용할
것을 약속하고, 대신에 농민군측에게 다음날 제주성 내로 들어올 것을 요구하였다. 6월 11일
약속대로 봉세관 강봉헌과 폐단을 일삼은 천주교인들을  체포하였다. 농민군 또한 약속대로
제주성 내로 들어갔다. 그러나 정부군은 약속과는 달리 농민군 지도자 40여 명을 즉시 체포
한 뒤 무력으로 농민군을 강제해산시켰다.
  그후 제주민들은 집단시위를 통해 농민군 지도자들의 석방과 제주도에서의 공개재판을 강
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주민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7월 18일 이재수, 오대
현, 강우백을 비롯한 40여 명의 민란 지도부가 서울로 압송되었다. 결국 이재수, 오대현,  강
우백 세 사람은 영사재판에 의해 10월 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다른 민란 관련자들은 징역
이나 곤장형에 처해지거나 무죄 석방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정부의 끈질긴 피해보상 요구로
배상금 6315원이 제주도민 전체에게 부과되었다. 1904년  6월 도민 1인당 15전 6리씩  갹출,
배상함으로써 제주민란의 사후 처리도 종결되었다.
  한편 프랑스측 요구에 의해 피살된 천주교도들의 묘지도 황사평으로 설정되었다. 지금 현
재 이재수의 묘지는 찾을 수 없다. 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묻혀 있던 서대문 밖은 일
제시대 택지개발로 일본인들의 고급주택으로 변하였다.
  1901년의 제주항쟁은 기본적으로 내부의 봉건적 모순을 계기로 제기되었으나 천주교 문제
와 관련되어 확대되었다. 제주민들의 1차봉기는 봉세관에 의한 봉건적 수탈구조를 타파하려
는 반봉건 농민운동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신부들의 오판으로 인해 항쟁은 확대되었다. 그리
하여 제주민들은 천주교 세력을 하나의 침탈적인  외세로 간주하여 무력항쟁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농민군은 천주교인들을 "법국의 년놈"이라 하여 프랑스 인으로 간주하였다. 이는
한편으로 천주교인들이 평소에 프랑스 인으로 자처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5월 28
일의 무혈입성 수 "양인을 토멸하고 제주성을 회복하였다"는 기치가 내세워지기도 하였다.
  한달간이나 계속된 민중항쟁을 통해 제주민들은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하기도 하였다. 6
월 17일 세폐 혁파에 대한 17조항이 관철되었다. 또한 7월 2일에는 12조로 된 교민화의약정
이 체결되어 교폐 문제에 대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01년 제주민란의 가장 큰 의의는 세폐와 교폐의 혁파라는 두 가지 목표를 놓고
전 제주도민이 참가한 농민항쟁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하층민중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반
봉건, 반외세의 민중항쟁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901년의 제주민란은 1905년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반제국주의적 농민항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