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민란의 시대 - 고종 때의 민란들(2)

구름위 2013. 6. 19.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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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동학농민전쟁까지


  개항 이후 동학농민전쟁 전까지 고종 때 발생한 민란은 대략  50여 회에 달한다. 이 시기
민란의 주요 목표는 반봉건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외세 자본주의 세력의  침투로 인해
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울산민란


  1870년대에 들어와 민란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는  대원군 정권의 반동정치 속에서
앞 시기의 민란들이 실패로 돌아가고 변혁적 국면이 침체된 까닭이었다. 그러나 1870년대에
발생한 유일한 민란이 있다. 바로 1875년 4월 경상도 울산부에서 발생한 민란이 그것이다.
  울산민란은 아전 김양서의 공금 횡령이 발단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부정이 들통날 것을
우려하여 과중한 세금(결세)을 거둬들여 공금을 채워넣으려고 하였다. 울산부민들은 과다한
세금 징수에 항의하여 남창과 동천에서 두 차례 집회를 갖고 감영에 소장을 올렸다.
  그러나 초기의 평화적, 합법적 집회는 폭력적인 양상으로 격화되었다. 난민들은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손에는 몽둥이를 들고  관아로 난입해 들어갔다. 그들은  관속들을 난타하고
부사를 고을 경계 밖으로 내쫓고자 하였다. 또한 감옥을  파괴하여 죄수들을 놓아주고 50여
호에 달하는 아전들의 집을 부수었다. 그후 난민들은 경상좌병사 정지용의 설득으로 해산하
였다.
  민란 발생 소식에 접한 중앙정부는 안핵사를 파견하여 실상을 조사토록 하였다. 안핵사의
보고에 따라 아전 김양서는 효수당했다. 울산부사 정기대와 전  부사 이희성은 아전에게 공
금을 유용토록 방관한 책임을 물어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민란 수장자로 지목된 박남표, 김연암, 이층감 등 3인은 효수되었다. 그 외에 다수의 민란
참가자와 아전, 장교배들은 혹독한 형장을 다섯 차례 맞은 후에 외딴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민란에 참가하지 않은 내성면, 상부면, 동면 세 면의 대표들에게는 관직을  제수하
였다. 이와 같은 조처로 울산민란은 일단락되었다.


  여주민란


  1885년 2월 18일 발생한 여주민란의 원인은 1856년 이래 이방 윤보길 일파가 자행한 불법
행위에 있다. 직접적인 발단은 1884년 8월 의정부의  명으로 도결(각종 잡부금을 전세에 부
과하여 징수하던 방법)을 혁파하고 환곡의 원금을 징수하는 과정에 있었다. 원래 도결은 사
정에 부과되는 세금을 모두 전결에  얹어서 징수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징수 방법은 주로
화폐가 이용되었다. 이 도결은 19세기 전반 삼정 문란의 집약적 표현이기도 하며, 1862년 농
민항쟁 때 주요 혁파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주의 경우 중앙정부의 도결 혁파가 반대로 농민들의 강한 반대를 초
래한 것이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로 화폐로 대납하던 것을  현물로
납부하게 되면서 실질적으로 세금이 인상되었음은 물론, 세금을 내어야 하는 호구가 증가한
것이다. 이들은 도결 납부 때 납세의 부담이 없던 호구로서 주로 하층 빈농들이었다. 곧  개
항 이후 곡물가의 상승과 실질 화폐 가치의 하락에 의한 급속한 인플레가 일어나는 상황에
서 세원이 미곡으로 되는 것은 농민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이었다.  반면에 실제 가치가 높은
미곡으로의 세입은 중간차익을 노리는 세금 징수자와 중앙정부에 유리하였다.
  둘째 조세제도의 운영과정에서 아전배들의 횡포가 극심하였다. 이들은 부호들과 결탁하여
납세액을 줄여준다든지, 세금이 면제된 전결이나 농사짓지 않는 땅에도 세금을  징수하였다. 더욱이 화폐로 대납할 때 쌀값을 높은 가격으로 책정하여 세금을 실질적으로 인상하는 편법을 자행하였다. 이는 결국 도결을 통한 안정적인 조세운영구조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정선민란


  1889년 1월에 발생한 정선민란은 군수가  외지인 및 향임배들과 결탁하여 평민들에  대해
탐학을 자행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는 다른 지역의 민란이  아전배들이나 토호들의 불법 탐
학이 주요 원인이 되어 발생한 것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정선군수는 죄 없는 상인들을 붙잡아들여  벌금을 매겨 착취하기도 하고, 불효,  불경죄로
향촌민들을 얽어들이는 등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그러나 정선민란의 또 다른 원인은 채광에 따른 문제였다. 개항 이후 사금을 비롯한 광물
의 일본 수출과 수공업의 발전으로 광산물에 대한 수요가 급속히 증대되었다. 이에 따라 정
부에서도 광무국을 설치하여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에  걸쳐 채광을 장려하였다. 광무국
에서 채광 승인서를 받은 사람은 금맥을 찾기 위해 장소를 가리지 않고 파헤쳤다. 심지어는
남의 전답이나 묘지까지 파헤치는 등의 횡포를 부려 농민들의 반발을 샀다. 따라서 한번 광
산이 개발되면 그 지역의 많은  전토가 황폐화되어 농민들의 소유권  행사가 침해당하였다.
더욱이 광산 개발로 농사짓지 못하는 전토에 대한 세금 징수가 행해져 농민들에 대한 피해
가 가중되었다. 이렇게 거둬들인 세금은 물론 수령과 아전배들의 주머니로 들어가기 일쑤였
다.
  더욱이 광산 개발에 따른 급속한 인구팽창은 소규모의 안정된 사회를 운영하던  향촌사회
에 많은 혼란과 갈등을 초래하였다. 치안 부재에 빠른 도적의 횡행으로 광부와 지역 주민간
의 충돌이 자주 발생하였다. 수령들은  이를 빌미로 광부들을 탄압하고  토색질을 자행하여
광부들의 불만을 사고 있었다. 때로는  광부들이 수탈을 견디다 못하여  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888년에 일어난 초원민란이 대표적이다. 정선민란은 결국 광산개발에 따른  폐단으
로 지역주민들이 봉기한 것이다.

함창민란


  1890년 8월 3일 현감과 이방, 향임배들이 불법 탐학을 일삼는 데 항의하여 함창민들이 봉
기하였다.
  함창현감은 부호들을 무고한 혐의로 치죄하고는 석방시켜주는 조건으로 5-6만 냥에 달하
는 거금을 수탈하였다. 또한 이방 김규목은 관수미 첨가를 통해 중간 수탈을 자행하고 있었
다.
  그러나 민란의 직접적 원인은 관청 근처에 있는 관남지의  준설에서 비롯되었다. 8월 2일
에 시작된 준설에는 양반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각 면의 민정,  젊은이들을 모두 징발하여
수천 명의 민정이 동원되었다. 민란의 주모자들은 부역에 동원된 농민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항쟁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그 동안의 폐단을 바로잡자는 여론을 일으키고 실천에 옮겼다.
  8월 2일 저녁 양범리에 있는 이장운의 유정점막에 관남지 준설역을 마치고 돌아가던 농민
들이 모였다. 이곳에서의 논의에 따라 각 면과 동에 통문이 발송되었다. 8월 3일 아침  농민
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유정점 앞의 냇가에서  민회가 개최되었다. 민회에  모인 농민들은
"등소는 등소이고 향중에서 일을 보는 자들의 집을  우선 부수자"고 결정하였다. 직접 수탈
을 자행한 아전과 향임배들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이처럼 민회를 통해 결집된 농민
들의 의사가 존중되고 있는 것이 이 항쟁의 특징이기도 하다.
  당시 항쟁을 주도한 남노선, 이장화는 모두 사족 출신으로, 이들은 읍폐를 감영에  등소하
여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민회가 열리고 농민들이 폭력행사 주장에
따라 사태는 그들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농민들은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몽둥이
로 무장을 한 후 아전, 향임배들의 집으로 쳐들어가 부수고 불태웠다. 봉기 농민들의 모습은
"적병을 향해 나아가는 병사"처럼 조직적이었고 격렬하였다.  봉기 불참자에 대하여는 벌금
과 벌책으로 위협하였다. 일종의 공동체적 강제가 동원되어 참여 농민들은 더욱 늘었다.
  봉기 농민들은 이방 김규목의 집을 불태우고 관아 앞에  있던 관남지로 모여들었다. 남노
선, 이장화는 이때까지도 등소를 통한 평화적인 해결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태는  걷
잡을 수 없이 진행되었다. 이들이 소장을 준비하고 있을 때 흥분한 농민들은 관아로 난입해
들어갔다. 농민들은 수령을 때리고 옷을 찢었으며 수령 임명장을 빼앗은 다음 고을 경계 밖
으로 축출하였다. 농민들을 만류하던 남노선과 이장화의  지시는 먹혀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구타당하기까지 하였다. 8월 4일에도 봉기 농민들의  이, 향가와 지주들에 대한 습격,  파괴,
방화가 잇달았다.
  5일 임시 겸관 문경현감이 도착하여 농민들에 대한 회유와 민란 주모자 색출에 들어갔다.
그러나 농민들이 각각 자신이 수창자라고 주장하여 주모자 색출은  여의치 않았다. 이때 봉
기 농민들은 사건의 본말을 정소하고 세금 과다 징수 폐단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
철시켰다.
  관군의 숫적 열세와 농민들의 심상치 않은 재봉기 움직임에  의해 함창민란 관련자 색출,
체포 작업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다. 9일 민란 주모자 남노선, 이장화 등 7명이 체포되고,
19일 조사관 이정재가 관련자 총 22명을 체포, 구금함으로써 함창민란은 일단락되었다.


  제주민란


  중국 및 일본 어민의 우리 연안에 대한 불법어업은 개항 직후부터 빈번하게 나타났다. 특
히 제주 지역에 대한 일본  어민들의 행패는 극심하였다. 1891년  3월에 발생한 제주민란은
일본 어민들의 행패에 대한 항쟁이었다.
  일본 어민들은 발달된 어업기계를 이용하여 연안의 고기를 모두 잡아 제주도 어민들의 생
업을 어렵게 하였다. 심지어는 일본 어민들은 조업 중이던  제주어부들이 잡은 물고기를 빼
앗고 그들을 묶어 물 속에 던지며 육지에 올라와 총칼로 주민들을 살해하고 노략질까지 자
행하였다. 이러한 일본 어민들의 횡포에 대하여 정부는 속수무책일 뿐이었다. 여러 차례  일
본 공사에게 일본 어민들의 불법행위를 항의한느 데 그쳤다.
  결국 제주 어민들의 항쟁은 일본 어민의 침탈을 막아주지 못하는 봉건정부의 무능력에 대
한 항의 표시였던 것이다.
  이 난을 통해 제주민들은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봉건정부에 대한 불만과 아울러 반외
세의 저항의식을 심화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제주도민의 반봉건, 반외세의 저항의식은  1898
년과 1901년이 제주민란을 통해 구체적인 형태로 표출되기에 이른다.


  함흥민란


  1892년 2월 24일 주남사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봉기한 함흥민란은 감사, 아전배, 향임배들
의 가렴주구에 의해 발생하였다. 관원과 아전들은 하나의 수탈집단을 형성하여 순영의 존문
채 명목으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제 징수하였다.
  더욱이 쌀이나 곡물을 시중에 내다 팔면 곧바로 존문채를 비롯한 각종 잡세를 거둬들였으
므로, 시중에 땔나무와 쌀이 반입되지 않는 등 상업활동이 마비될 정도였다. 더욱이  야간순
찰을 하면서 밤늦도록 불이 켜져 있는 집을 발견하면 붙잡아다 벌금을 징수하여 착복한 것
이 3400냥에 달했다. 제사나 아기 분만을 위한 경우일지라도 사정을 보아주지 않았다.

회령민란


  1892년 9월 20일 회령부민들이 각사에 통문을 돌려 민회를 열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회령부사 홍시형은 부민들의 움직임을 진압할  목적으로 장교 이한회를 운두사에  파견하여
민회 참석자들을 일일이 조사해 오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이한회는  소기이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아무도 민회 참석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이한회는 향도소임 2명
을 붙잡아다 매질하여 12명의 이름을 작성할 수 있었다.
  그날 운두사민 100여 명이 이한회의 집에 몰려들어 몽둥이와 낫 등으로 위세를 과시하며
위협하였다. 그러나 이한회가 이름을 적은 명단을 찢고 선처를 약속하여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으며 주민들은 흩어졌다. 이들이 흩어진 틈을 타서 이한회가 읍내로 도망가자, 운두사민
들은 관에 소장을 올리기로 하였다. 곧 이한회의 강압, 이중적 태도가 민란의 직접적 원인으
로 작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운두사민 300여 명이 읍으로 출발하였으나, 통문이  전해지면서 수천 명에 이르
는 농민들이 읍에 모여들었다. 민들의  처음 의도는 평화적이고 합법적이었다. 그러나  겁을
먹은 회령부사가 피신하고 아전과 향임배들이 관아로 숨어들자, 부민들의 움직임은 점차 과
격해졌다. 이들은 관아로 쳐들어가 관청 일부를 파괴하고 폐단을 일삼은 아전과 향임배들의
집을 부수었다. 분풀이를 한 후 곧바로 해산하는 다른 민란관느 달리 회령민들은 사태를 예
의 주시하며 주도면밀한 항쟁을 계속하였다.
  9월 29일 회령민란의 소식이 전해지자, 온성부사가 조사관으로 임명되었다.  회령부민들은
연명으로 상소하여 민폐를 바로잡아줄 것을 호소하였다. 여기에서 향교와 향임의 직책을 억
지로 파는 폐단, 향리들의 공전  가렴주구, 중앙저우로의 공물 진상  폐단 등이 거론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회령민란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회령민들의 조직적 투쟁은 부사를 비롯하여 그들의  주된 공격목표였던 향교의 책임자들,
향임, 향리배들을 처벌받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민란은 앞서 전개된 다른 민란과는 달
리 한층 게획적이고 조직적인 전개 양상을 보여준다. 이는  민들의 의시이 한층 성숙되어졌
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청풍민란


  1893년 청풍민란은 주로 삼정 운영 과정에서 세금의 불법 인상과 과다 징수 등 수취제도
의 문란 때문에 일어났다. 특히 잡역, 잡세의 징수 기구인 민고의 폐단과 고리대 성격을  가
진 관청의 식리전은 지방관이나 아전배들의 자의적인 수탈을 용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민
고가 설치되어 운영되던 군현의 농민들은 막중한 세금 부담에 허덕이고 있었다.
  "각 고을에는 관고나 민고가 있는데...... 설치된 이래 용도가 절제가 없고 거둬들이는 명목
이 없어 백성들의 큰 고통이 되고 있다. ...... 가전 하던 것이 지금은 몇 냥에 이르니, 백성들
이 어찌 곤궁하지 않을 것이며, 고을이 어찌 폐허가 되지 않겠는가" 할 정도로 관고와 민고
의 폐단은 심각하였다.


  황주민란


  1893년 황주민란은 진전과 궁장토의 폐단이  원인이 되어 발생했다. 황주이  전폐는 다른
지역보다 특히 심하였다. 황주에는 수진궁과 순화궁의 막대한 장토가 있었고, 1890년 경에는 2000여 결이나 추가되고 있었다. 또한 이에 편승하여 기존의 민전이 궁결에 편입되기도 하고 궁결이 사유지화되는 양상도 빚어졌다.
  문제는 이들 궁장토에 대해서는 잡역이 면제되는 데 있었다.  궁장토에 대한 면제액은 곧
바로 민전을 가진 농민들에게 부과되었다. 그래서 한 농민이 10명 분의 세금을 납부하는 등
토지 수확량으로는 도저히 과중한 세금을 충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궁장토를 경
작하는 농민들 또한 도장배들의 과다한 소작료 징수로 인하여 생계조차 힘들 정도였다.
  더욱이 1889년 큰 장마가 들어 농사를 짓지 못한 땅이 모두 980여 결에 달하였으나, 이들
땅에 대해서도 세금이 부과되었다. 결국 이러한 세 부담은 농민들의 생계유지를 불가능하도
록 만들었던 것이다. 농민들은 이제 생활기반인 농촌을 떠나거나  이와 같은 수취구조에 대
해 저항을 하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고부민란


  1894년 1월 10일 전라도 고부군에서 민란이 발생하였다.  이 민란은 동학농민전쟁의 전초
였다. 이 난은 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불법 자행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였다.
  당시 고부는 비옥한 농토와 서해안의 풍부한 해산물까지 유통되는 매우 번성한  공르이었
다. 조병갑은 이곳에 부임해오자마자 온갖 불법과 탐학을 일삼았다. 핍박을 참다 못한  군민
들이 두 차례에 걸쳐 관아에 몰려가 등소를 올려  폐단을 바로잡기를 호소하였지만, 붙잡혀
매맞고 쫓겨났을 뿐이었다.
  군민들은 합법적, 평화적 시위는 폐단을 바로잡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등소 운동의 장두였던 전봉준을 중심으로 무력봉기를 준비하였다. 이 사
이에 군수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전보되기도 하였지만, 그는 재취임 공작을 벌여 1894년 1월
9일 다시 고부군수로 재부임하였다.
  1월 10일 저녁, 사전 연락에 의해 말목장터에 모인  사람들은 전봉준의 지휘 아래 관아로
달려갔다. 그러나 조병갑은 이미 피신한 뒤였다.  이들은 관아를 점령한 후 옥에 갇혀  있는
자들을 풀어주었고, 무기고에서 꺼낸 무기로 무장하였다. 그리고 과다징수한 세금을  농민들
에게 환급하고 민폐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만석보를 허물어뜨렸다.
  고부민란의 소식이 전해지자, 중앙정부는 조병갑을 직위 해제하여 서울로 압송하고, 그 후
임으로 박원명을 임명하였다. 2월 말쯤 신임 군수 박원명이 고부에 부임했다. 그는 조병갑의
잘못을 인정하고 군민들의 뜻을 받아들여 폐단을 시정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와 같은 유화
책에 따라 봉기에 참가했던 농민들이 하나둘 해산하기 시작했다. 민란 지도부 또한 다른 곳
으로 옮겨가 고부민란은 일단락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이 해산한 뒤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오지 않던 안핵사 이용태가 고부에 도
착하였다. 그는 봉기 참가자와 주모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고을을 발칵 뒤집었다. 그들은 백성들을 동학교도로 몰아 붙잡아들이고 집을 불태우고 부녀자를 살육하는 등 온갖 횡포를 자행하였다. 결국 이용태의 횡포는 동학교도들의 봉기에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반봉건, 반외세 항쟁 제주민란 - 방성철과 이재수의 난, 방성칠의 난


  제주민란과 남학당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실패 이후에도 농민항쟁은 계속되었다.  그 항쟁은 종래의 자연발
생적, 지역분산적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였고, 혹은 농민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학당, 활
빈당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농민항쟁의 주된 원인은 봉건적 토지소유 문제와 국가의 농민층에 대한 조세수탈, 그리고
이에 기생한 관료들의 부정부패 등이었다. 요컨대 농민항쟁의 우선적인 목표는 반봉건의 문
제였다.
  시흥(1898년), 용인(1899년), 경흥(1900년), 임실, 은진, 영산 의령, 창녕(1903년) 등지에서는 과다 세금(결세) 징수와 흉년 때의 무자비한 납세 독촉 등이  원인이 되어 민란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환곡문제를 둘러싸고  제주(1896년), 함흥, 울진(1902년), 간성(1903년) 등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이중 1898년과 1901년의 제주도 농민항쟁은 대표적인 민란이었다.
  1898년의 제주민란은 이른바 '방성칠의 난'이라고 불린다. 방성칠은 본래 전라남도 동북군
(현 화순군 동북면) 사람으로 남학교도였다. 그는 1894년 제주도로 건너가 화전민으로 정착
해 살다가 1898년 민란을 주도하게 되었다.
  남학은 동학과 거의 비슷한 시기인 1860년대에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에 유포되었던  신흥
종교였다. 이 종교는 동학과 마찬가지로 유, 불, 선 3교와 민간신앙까지를 포괄하였으며,  후
천세계와 무량낙원의 개벽을 기치로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였다. 이들이 믿은 후천세계는
낮과 밤의 차이나 춥고 더움의 구별이  없으며,  빈부와 귀천의 차별이 없는  '이상향'이었
다.
  사람들은 800세까지 장수하며, 죄와 고통이 없는 이른바 지상천국이다. 특히 남존여비 의식
이 팽배한 당시에 남녀평등이라는 파격적인 기치를 내걸었다. 그런데 후천세계로 가는 과정
에는 3재와 8난이 있으며, 인간의 선악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사람들이  후천세
계로 가기 위해서는 남학의 무극대도를 닦아야만 함을 역설하였다.  이는 남학의 기본 교리
로 일상사에서 겸허한 태도와 수양을 중시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시작과 더불어 남학교도들도 용담 대불리에서 봉기하였다. 그러나
남학교도들의 봉기는 농민군과 계획되거나 지원을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들이 믿
는 후천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일어난 독자적인 봉기였던 것이다.  이들은 누런 저고리를 입
고 오방기 아래 집결하여 "남문 열고 바라  치니 계명 산천 밝아온다..."는 노래를 부르면서
기세당당하게 대벌리까지 진출하였다. 봉기의 주도세력은 주로  교단의 하급 간부들과 일반
신도들이었다.
  그러나 교단 지도부의 행태는 상당히 기회주의적이었다. 그들은 난세를 당해서는 오직 도
덕을 닦고 안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도들의 집단행동을 극력 저지하였다. 결국 지도부
의 방해로 봉기는 좌절되고 말았다. 동학농민전쟁이 실패로 끝난  후 신흥종교에 대한 대대
적인 탄압이 가해졌다. 1895년 봄 교주 김광화를 포함한 남학 지도부 8명은 전주 서문 밖에
서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되었다.
  박해를 피해 제주도로 이주한 남학교도 일부는 당시 화전 개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대
정군 광청리의 산간지대에 주로 정착하였다. 이들은 종교의식을 해하는 한편 주위 농민들에
게 남학의 교리를 전파하는 등 포교활동도 조심스럽게 행하였다.  당시 사회적인 불안과 더
불이 민심의 이반 등으로 이들은 정착지를 중심으로 교세를 점차 확대할 수 있었다.


  등소에서 무력 항쟁으로


  1898년 2월 7일 방성칠을 지도자로 한 광청리 일대 화전민 수백 명이 제주성 내의 관아로
몰려와 소장을 제출하였다. 소장의 주요 내용은 일찍부터 이곳의 농민들에게 불만의 대상인
화전세, 목장세, 및 호포의 과다징수와 환곡의 폐단을 바로잡아달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제주성으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각 마을에 통문을 돌렸으며, 도민들은 제주목사가
억누르기 어려울 정도로 술렁대고 있었다. 당황한 제주목사 이병휘는 일단 소장을 받아들여
폐단 시정을 약속하는 등, 평화적인 시위로 해결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제주목사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토착 양반들의 집단거주 지역인 조천
에서 비밀리에 장정 60여 명을 모아 부족한 관군의 무력을 보충하는 한편, 격앙된 도민들의
움직임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장두인  방성칠을 잡아들이고자 하였다.  제주목사는 철저하게
위장된 술수로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였다.
  이 소식에 접한 방성칠과 화전민들은  크게 분노하였다. 이들은 보다  적극적인 대응책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제 등소라는 평화적인 방법보다는  물리력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주장
을 관철하려는 입장을 견지하게 이르렀다.
  남하교도의 간부인 방성칠, 강벽곡, 정산미 3인이 지도자가 되어 육지에서 이주해온  화전
민 남학교도 수백 명으로 친군을 구성하였다. 따라서 1898년 제주농민항쟁의 주체는 토착민
보다는 남학당을 중심이었다.
  이들은 각 마을에 통문을 돌려 집집마다 장정 1명씩  내보낼 것을 독려하였다. 이렇게 하
여 모인 난민들은 모두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몽둥이로 무장하는  등, 일전을 불사하는
대오를 정비하였다. 특히 남학당 출신의  친군은 모두 누런 색의 전립을  쓰고 남자를 써서
몸에 붙여 토착민들과 자신들을 구별하였다. 친군은 명령체계가 잘 짜여진 정예군이었다. 이
들의 대오는 질서정연하고 조직적이었다.
  2월 26일 친군 선도하에 난민들은 3대로 나뉘어 제주성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28일 제주
성 밖에 도착한 난민들은 진을 치고 공격채비를 갖추었다.  이날은 동궁의 생일이었기 때문
에 성 안에서는 목사와 3군수가 모여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방성칠은 중간 착취를 일삼은
향리들을 성 밖으로 내보낸다면 더  이상 사태를 확산시키지 않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당시 관군으로 수많은 이들을 제압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그런데도 목사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끝내 회답하지 않았다.
  3월 1일 남학당 친군을 선두로 난민들은 성 안으로  쳐들어갔다. 이들은 목사와 대정군수
채구석을 구타하고 성 밖으로 내쫓았다. 혼란의 와중에서 목사를  지키던 이방은 죽음을 당
하였다. 그러나 난민들이 죄를 묻고자 했던 향리들은 이미 달아나서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3월 2일 민란 지도부는 관청 앞에 방문을 내걸어 민란의 성공을 알렸다. 그 내용은 "제주,
대정, 정의 3군수를 내쫓고, 환곡 부담을 절반으로 줄인다"는 것이었다.

독립국가 건설을 구상하다


  이러한 과정에서 방성칠은 단순한 조세  거부가 아니라 정치적 병혁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제 제주민란은 농민항쟁의 차원을 넘어서서 이상향을 향한 독립국가 건설을 시도하는  단
계로 진행된 것이다.
  그는 우선 새로운 왕조의 도래를 (정감록)과 같은  예언서들을 인용하여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정당설을 제시하였다. 제주도가 임금이 솟아날  방성분야라는 천문지리설과 자신의 성
씨가 일치된다는 것, 그리하여 바로 이때가 진인이 해도에서 나타난다는 정감록설이 실현될
때라는 것이다. 나아가 제주도에서 독립국가를 건설한다 하더라도 외세에 시달리고 있는 정
부가 군대를 파견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와 같은 방성칠의 독립국가 건설 구상은 봉건적 수탈과 개항 이후 일본 어민의 침투에
시달려온 농, 어민들의 욕구를 구체화시킨 것이었다. 물론 이 구상은 근대지향적이고 혁신적
인 성격의 주장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정감록류의 예언서에 바탕을 둔 매우 신비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으며, 제주도에 독자적인 왕국을 건설하려는 데에 그치는 소극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는 정도령이 해도에서 솟아나 군사를 이끌고  육지로 건너가 조선왕조를 멸
망시키고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여 새로운 왕조를 연다는 구상보다도 훨씬 제한적이었다. 더
욱이 이와 같은 계획은 먼저 민란  지도부 수준에서만 논의되었을 뿐 공식적으로  천명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목표 아래 민란 지도부는 우선 각 포구에 명령을 내려 배의 출입을 막아  육지
와의 연락을 차단하였다. 제주도민의 민란 지도부에 대한 지지는 열성적이고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민란 지도부도 재구성되었다. 새로운 민란 지도부는 남학당의 방
성칠, 강벽곡, 정산마와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김낙영, 최형순 등으로 이루어졌다.
  민란 참여자에 대한 전열 재정비와 무장도 이루어졌다. 남학당만으로 구성된 어남군은 민
란군의 핵심부대였다. 이들은 무기고에서 꺼낸  총검으로 무장하고 성 안을 장악하였다.  각
마을에서 차출된 장정들 가운데 2천 명을 선발하여 좌, 우 대장 김낙영, 최형순 휘하에 각각
천 명씩 배치하였다. 이들은 성 밖을 지키고 각 마을을 돌면서 무력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렇
게 내, 외진의 편제와 역할분담이 이루어지는 한편, 훈련도 병행하였다.
  3월 4일 민란 지도부는 제주도에 유배중이던 정병조, 황병욱을 지도부로 끌어들이려 하였
다. 그러나 두 사람은 5일 새벽에 성을 빠져나와 조천으로 도망하였다. 뒤이어 제주성  내에
있던 유배중인 사람들과 토착 양반 일부도 성을 빠져나와  조천으로 도망하였다. 그들은 조
천의 토착 양반인 김씨 문중과 연합하여 6일 아침에 민란 대항군인 창의군을 조직하기에 이
르렀다. 창의군은 조천진 무기고에서 꺼낸 창 80자루로 무장하였다. 그러나 대항군으로 선발
된 농민들과 포수들은 김씨 문중의 위세 때문에 억지로 모였을 뿐이다.
  6일 낮, 대항군 형성 소식이 전해지자,  민란 지도부는 조천에 대한 선제공격을  단행하였
다. 억지로 모여 있던 대항군 대부분이 공격도 받기 전에 도망가벼려, 민란군은 별다른 싸움
없이 조천을 함락할 수 있었다.  이 와중에 양반가 7-8채가  불탔으며, 김씨 문중의 김희선
등이 죽음을 다하였다. 이렇게 조천 공격이 성공리에 이루어짐으로써 민란군의 사기는 하늘
을 찌를 듯하였다.


  민란의 종말


  조천 공격을 성공리에 수행한 민란 지도부는  이제 전열을 재정비하는 등 관군의  공격과
일본군의 내습 가능성에 대비하였다. 허물어진 성벽을 수리하고, 성벽 위에 돌 수만 개를 날
라다 놓는 등 방어와 장기전에 돌입하였다.
  한편 성 안에 있던 유배자들은 전직 교리 이용호를 중심으로 토착 양반 세력들과 합세하
여 다시 대항군을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이용호는 최형순, 김낙영과 비밀리에 만나 민란  지
도부의 내부사정을 파악한 다음, 지도부 교란책을 제시하였다. 이용호가 내놓은 방안은 최형
순, 김낙영이 방성칠에게 일본 복속을 제의하여 그들 세 명이  배를 타고 일본을 향해 가는
척하다가 도중에 방성칠을 죽인 다음, 대항군을 일으켜 구심점을 잃은 민란군을 격파한다는
것이었다.
  최형순과 김낙영은 계획을 실천에 옮겨나갔다. 중앙 정부군이나 일본군이 공격할 경우 승
산이 없다고 판단한 민란 지도부는 최형순, 김낙영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3월 12일 방성칠은
제주도민들에게 중앙정부에 사정을 알리려 상경한다는 거짓말을 하고는 배를 타기 위해  산
저포로 갔다. 그러나 민중들 사이에는 일본 복속설이 유포되었다. 이는 대항군이 교란책동으
로 이용한 계략이었다. 더욱이 일본 배를 타고 떠나는 방성칠의 행동에 민중들의 의심은 더
욱 커졌다. 결국 민란 지도부의 이율배반적인 행위는 실질적인 지지기반인 민중들의 불신감
을 초래하였다.
  배를 타기 위해 포구에 간 방성칠 일행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려 승선하지 못하였다. 13일
에는 배를 탔으나 거센 바람으로 배가 나아가지 못하여  되돌아와야만 했다.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자 김낙영과 최형순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더욱이  방성칠도 초조한 기색인 그들에게
점차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결국 김낙영과 최형순은 말을 타고 성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이들이 성 안에 들어오자 대
항군은 성문을 닫아걸고 창의를 선포하고 성 안을 장악하였다.  민란 지도부와 어남군 대부
분이 방성칠을 환송하기 위해 포구에 나와 있었기 때문에 성 장악은 손쉽게 이루어졌다.
  상황의 급격한 변화는 민란군의 사기를  땅에 떨어지게 하였다. 더욱이  일반 농민들조차
민란군에게 더 이상의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방성칠과 민란군은  성을 포기하고 성에서 서
쪽 40리 밖에 있는 귀리로 퇴각하였다.
  성을 장악한 대항군은 각 마을에 통문을 돌려 농민들을 징발하여 민란 토벌군을 구성하였
다. 민란 토벌군은 전열을 갖춘 다음 귀리로 쳐들어갔다. 토벌군 5백 명은 관군 복장을 갖춰
민란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들의 작전은 성공하였다. 민란군은 정부군이 내려온 것으로 착
각하여 별다른 저항없이 패주하였다.
  민가로 숨어들었던 방성칠은 창과 칼에 찔려 죽었다. 강벽곡  등 민란 지도부 7명도 잇따
라 죽임을 당했다. 또한 민란군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과 보복이 단행되는 등 아비규환의 살
육이 자행되었다. 이로써 1898년 2월 7일 등소운동으로 시작된 제주민란은 30여 일 만에 일
단락되었다.
  1898년 제주민란, 즉 방성칠의 난은 실패로 끝났다. 민란의 주요 세력은 남학당이라는  종
교 집단이었다. 민란 초기 일반  농민들의 지지는 적극적이고 열성적이었다. 그러나  항쟁이
계속되면서 남학당 중심의 민란 지도부와 일반 농민간의 결속력은 약화되었다. 더욱이 민란
지도부는 민중들을 신뢰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민중들을 운동의 주체에서 소외시켰다.  실질
적인 지지기반인 민중에 대한 불신은 곧바로 민중들의 신뢰를  잃게 되었으며, 민란 실패의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