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차별없는 사회를 꿈꾸었던 비밀결사 - 검계와 살주계

구름위 2013. 6. 19.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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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꾼들이 조직한 비밀결사


  조선 후기에는 민중들이 궁궐이나 주요 관청, 서울의 4대문, 전국 각지의 주요 시장 등 사
람이 많이 드나드는 곳에 벽보를 붙여  지배층의 비리를 공격하거나 체제를 비방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이를 괘서라고 하는데, 이는 정치투쟁의 성격을 지닌 일종의 민중들의  대자
보 투쟁이다.
  숙종 때 정체불명의 일단의 무리들이 남대문과 대간의 집에 벽보를 붙여  "우리들이 모두
죽지 않는 한 끝내는 너희들 배에 반드시 칼을 꽂으리라"는 섬뜩한 말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사건이 일어나 조정 안팎이 발칵 뒤집혔다. 이것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숙종 무렵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베일에 싸인 비밀조직들이 양반들을 공격하여 인명을  살
상하고 재물을 빼앗는 일이 적지 않게 벌어지고 있었다. 이들 조직들은 점차 검계와 살주계
라는 이름의 비밀결사로 알려졌다. 그 조직의 이름부터 무시무시하고 심상치 않다. "검계"에
는 자신들의 문제를 검, 즉 무기를  이용해 일거에 해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담겨  있고,
더욱이 '살주계'는 글자 그대로 자신들의 상전을 죽이려는  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이로
보아 지배층을 공포에 떨게 했던 검계나 살주계의 조직원들은 최하층의 신분인 노비들이 주
축을 이루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은 과연 어떠한 출신이었을까? 이들은 본래 향도계 출신이 주축을 이루고 있
었음이 밝혀졌다. '향도'란 본래 남의 상여를 메고 그 품을 받는 자들로서, 흔히 '상두꾼'으
로 불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향도계란  사람이 죽어 장사지낼 때 그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자들의 모임을 말한다.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고 있었고, 이에 따라  상례는 
가장 중요한 의례였다. 아무리 지체 높은  양반들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부모의 상례를 도
와주는 향도계를 무시해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궁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왜 향도계원들은 과격한 비밀결사를 만들었을까? 여기에 대해 정부에서는, 향도
계는 원래 순수한 단체인데 그 선발과정을  엄격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중의  무뢰배들이
끼어들면서 변질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지배층의 시각일 뿐이고,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 시기에는 가뭄이나 홍수, 전염병 등 매년 되풀이되는  자연재해와 날로 더해가는 관리
들의 수탈로 민중들의 삶은 하루하루를  버티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길거리에는 유민들,  즉
집도 절도 없이 각지를 떠돌아다니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아녀자나 어린이와 노인들은 구
걸을 하였고, 힘이 센 청년들은 화적떼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 무렵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
은 사람들만 해도 100만 명에 달한다고 하니, 임진왜란의 참혹함도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굶주림에 견디다 못한 민중들이 인육을 먹는 일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오죽
이나 굶주림에 시달렸으면 부모가 병으로 죽은 어린 자녀들의 시체를 삶아먹었다는  기록이
버젓이 조선왕조실록에 올라 있을까?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던 민중들의 삶 속에서 상두꾼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들도 일반 민중들의 삶을 자연스럽게 답습하였다. 이에 그들  가운데 일부는 집단으로 지
배층에 도전하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로 보아 상두꾼이  주축이 되어 비밀결사를 만
든 것은 그들이 무뢰배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은 평소 조직생활을 해오고 있는 터에 최
악의 사회상황으로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조직을 비밀결사 형태로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올
바른 설명일 것이다.
  여기에서 상두꾼들의 의식과 관련해 '향도'라는 말이 뜻하는 바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조
선시대에 와서 상두꾼이라는 뜻까지 갖게 된 향도의 본래 의미는 불교, 특히 변혁의 세계와
평등한 세상을 상징하는 미륵불교와 관계가 깊은 신앙 결사체를  말한다. 이러한 의미는 신
라와 고려시대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또한  향도는 신라시대의 화랑도와도 관계
가 있다고 한다. 화랑의 낭도를 '용화향도'라 부른 데서 확인할  수 있다. 향도라는 말은 민
중들의 변혁에의 열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향도계의 구성원들
을 주축으로 결성한 검계나  살주계는 단순한 무뢰배들의 집단이  아니라, 나름대로 변혁의
염원과 열망을 품은 민중, 특히 노비들이 모여 있는 비밀결사체인 것이다.

 

  비밀결사의 행동강령과 활동


  그러면 노비 신분으로서 상두꾼의 일을 하던  자들이 주축이 된 검계나 살주계는  어떠한
행동강령을 내걸고 어떠한 일들을 하였을까? 그들의 행동강령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살
주계의 강령 몇몇 조항은 알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그것은 "양반을 죽일 것", "(양반)부녀
자를 겁탈할 것", "(양반의)재화를 탈취할 것" 등으로 그 이름만큼이나 직설적이고 위협적이
다. 정부에서 보면 이 강령의 내용이야말로 반국가적이며 반인륜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
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과연 이 강령대로 행동하였을까? 몇몇  사례를 들어보자. 검계원들은 밤에
남산에 올라가 나팔을 불어대며  군사를 모으는 것 같이  훈련하였으며, 중흥동에서는 진을
치는 연습을 하는 등 군사훈련을 방불케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재물을 빼앗기도 하고 인명
을 해치기도 하였다고 한다. 청파 근처에는 살주계가 있었는데, 그들 조직원들은 모두  창포
검을 차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례로 볼 때 이들  검계나 살주계의 조직원들은 남산 일
대를 근거지로 삼아 비밀리에 또는 공공연히 활동하면서 부자들의 재물을 빼앗는  방법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키워가고 있었던 것 같다.
  숙종 때 경기도 광주에서 검계 조직원들이 한 사건을  일으켰는데, 이는 곧바로 사회문제
로 대두되었다. 광주의 길가에서 한 과부가 일곱 명의 무뢰한들에게 잡혀 겁간을  당했는데,
그 무뢰한 가운데는 과부의 서얼 사촌도 끼어 있었고 이들은 모두가 검계의 조직원으로 드
러났다. 과연 살주계의 행동강령이 무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난리가 일어날 것'이
라며 민심을 선동하기도 했다. 교하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때 한 사람이 나서
서 말하기를, "장차 난리가 일어나면 우리들은 양반을 아내로 삼을 수 있다"고 외쳤으며, 그
무리들 속에 있던 개천이라는 자는 "이제 우리는 양반의 처를 얻게 되었다"고 외쳐댔다. 사
슬과도 같은 신분의 굴레를 일거에 타파하려는 민중, 특히 노비들의 몸부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유일하게 이름이 알려진 개천이라는  자도 노비였을 것으로 추측이 되지만,  이들
대부분이 노비였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향도계 조직원, 즉  상두꾼들의
신분이란 지체 높은 양반집의 노비들이었던 것이며, 이들이 검계나 살주계의 주축이었던 것
이다.
  숙종 때 남인의 명문대가인 목내선은 자신의  노복이 살주계에 가담한 사실을 알고  그를
잡아 죽였다. 또 남인이 집권했을  때 목내선은 노론의 대가들인  김석주, 김익훈, 이사명의
노복들 가운데서 향도계에 가담하고 있는 자들이 많음을 알고 향도유대군을 금지할 것을 왕
에게 요청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그만큼 그들이 작당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더  정확
히 말한다면 정파간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향도계 조직원들의 조직력과 무장력이 동원될  가
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보아 이들 향도계 조직원들은  정권의 향배와도 연관되어 있
었던 것이다. 실제로 숙종 때  일어난 깁술환국 때 소론측에서 서울  사대부집의 가노 동원
계획, 즉 노비를 동원하여 무력기반으로 삼으려던 계획이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보아, 그들이 바로 향도계의 조직원이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러나 향도계원들은 양반들과 신분에 따른 주종관계로 얽혀 있는 이상 기본적으로  양반
들과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검계나 살주계를 결성한  것도 주종관계의 모순을 깨
뜨리려는 향도계원들의 고육지책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나 지배층의 입장에
서 보면 검계나 살주계는 매우 위험한 집단이 아닐 수 없었다. 지배층에서는 검계와 살주계
요원들의 행동이 워낙 패악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지배층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히 표방했
기 때문에 경계를 더욱 철저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좌의정 민정중은 "도하의 무뢰배가 검계를 만들어 사사로이 습진하니, 동네가
더욱 소란스럽게 되어 장래에는 외구의 침입보다 대응하기가 더 어렵게 될 것"으로 걱정할
정도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포도청으로 하여금 이들을 추적 조사하여 잡아들여 유배보내거
나 효수형에 처하는 등 중벌로 다스리도록 조처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강력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검계나 살주계의 조직원들은 쉽게 잡히지  않았
다. 이를테면 1684(숙종 10) 2월에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 지시가 내려진 후 약 5개월
동안에 겨우 검계원 10여 명이 잡혔을 뿐이었다. 아울러  이들은 체포당했다 하더라도 연루
자를 말하지 않고 끝까지 완강하게  버티는 뚝심을 보이고 있다. 이들  가운데 더욱 과격한
자들은 칼로 살을 긋거나 가슴을  베는 등 자해를 하며 거칠게  저항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오히려 심문을 맡은 포도청 관리들이 질리게 될  정도였다. 이처럼 동료들의 행방이나
신상에 대해 발설하지 않고 과격하게 버티고  있는 사실로 보아 이들은 단순한  저항단계의
차원이 아닌, 엄격한 조직의 강령에 따라 움직이는 '비밀걸사체'임을 짐작케 해 준다.

 

검계는 19세기에도 존재했다


  검계는 숙종 때인 17세기에 등장했다가  사라졌는지 18세기의 왕조실록에는 보이지  않는
다. 그러나 19세기 기록인 (순조실록)에 검계에 대한 주목할 만한 상소문이 실려 있어 눈길
을 끈다. 사간 이동식은 검계의 행패가 심각함을 예로 들어 법의 기강을 엄히 할 것을 상소
했다.
  "문무백관이 게으르고 법강이 해이해졌으며, '검계'의 이름이  나오기에 이르러 풍속이 허
물어지고 세도가 무너짐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일종의 무뢰한들이 사람들을 불러 모아 당을
이루고, 소를 팔아서 검을 차고 다니며 하늘을 두렵게 여기지 않고, 돈을 추렴하여 개와  돼
지를 잡지 않는 날이 없으며, 약탈하는 것을 가계로 삼고, 남을 모욕하는 것을 장기로  삼고
있습니다. 심지어 주문에 횡행하여 재상을 꾸짖어 욕보이고 깊은 규방에 도입하여 부녀자를
때리는 등 예의를 끊어버리고 기강을 어지럽힘이 여지가 없습니다".
  이처럼 19세기의 검계도 17세기와 마찬가지로 위정자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한 반인륜적이
며 반사회적 조직체이다. 더욱이 검계는 재상을 욕보이기까지  했다. 이는 '신분제의 질곡에
대한 저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검계 조직원들의 
 폭력적 행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울의 백성들   가운데 검계에 들어가는 사
람이 늘어나는 데 있었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사간  이
동식은 병조와 의금부 및 포도청으로 하여금 검계의 조직원들을 강력히  단속하게 하는 한
편, 이들의 행패와 백성들이 검계에  들어가는 이유가  술이 범람해 있기  때문이라고 하여 
서울에서 술빚어 파는 집들 가운데 큰 곳들을 단속하도록 건의했다.  그러나 체제모순에 대
한 해결책이 전무한 상황에서 검계를 단속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명화적과는 어떻게 다른가?


  그렇다면 이들 검계나 살주계는 당시 서울과 지방에 자주 출몰하고 있던 떼도적인 명화적
과는 어떻게 다를까? 이들 조직이나 화적 조직은 모두 최소한의 생존조건도 보장받지 못하
던 사회 현실 속에서 탄생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행태, 즉 이들의  행위
또한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우선 무장을 하고 지배층을  공략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더욱이 화적들도 규모가 크고 짜임새 있는 집단은 꽤 세련된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먼저 하나의 화적조직에는 그 조직을 대표하는 두목이 있었는데, 이자는 통상 '장군
'으로 불렸다. 이자가 호령하면 무리들이 모두 복창하며 따랐다. 두목의 밑에는  몰락한  양
반으로 추측되는 자가 조직의 모사를 맡아서, 약탈한 물품과 약탈대상 물품의 목록 등을 기
록한 중요 문서를 관장하고 각종  모의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이를테면  조선시대의 대표
적 도적인 임꺽정 집단에서의 서림과 같은 존재가 대표적이다.  이밖에도 약탈한 물품의 처
리를 담당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자는 흔히 도시에 거주하는 지정된 사람, 즉 단골을 정하여
지속적으로 거래하였다. 이는 명화적 집단과 시장을  연결해주는 중간상인이 존재하고 있었
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화적 집단이 이처럼 잘 짜여진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규
모가 비교적 큰 집단에서나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있는 사실이 있
다. 영조 때 명화적 관련 기록 가운데 조직의 이름, 즉 단호를 가진 조직이 등장하고 있었다
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서울의 대표적 명화적 조직으로는  후서강단, 평양은 폐사군단, 유민
이나 걸인들이 주축이 된 유단, 광대와 재인들이 주축이 된  채단 등이 이름을 날리고 있었
다. 특정 지역이나 집단의 명화적들이 이 같은 단의 이름  아래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은 그
만큼 조직체계가 잘 갖추어졌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들로 볼 때 검계나
살주계 조직도 화적, 또는 명화적으로 불러도 틀리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검계나 살주계 조직은 이들만의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우선 이
들은 양반에 대한 적대감을 끊임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앞에서 본 괘서, 살주계의  행동강령
내용, 개천이라는 노비의 행동에서도 양반에 대한 적대감의 강도가 잘 나타나 있지만,  이들
은 공공연히 "내일은 양반이 지배하는 세상은 사라지고 상민이 지배하는 세상이 올 것이다"
라는 체제변혁의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마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활약했던 '활
빈당'의 존재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요컨대  검계나 살주계가  현실사회의 신분구조 타파
를 외치는 이러한 구호의 참뜻은 신분차별이 없는 진정으로 평등한 사회를 바라는 하층민들
의 몸부림인 것이다.
  이것은 이들의 출신성분이 노비라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화적들은
대부분이 농촌사회에서 발붙일 것이 없어 고향을 등지고 각지를 전전하고 있던 유민들이 주
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인  호구지책의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투쟁하였다.
반면에 검계나 살주계 조직도 호구지책을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이
들은 기본적으로 '노비'라는 최하층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투쟁의 목표를  신분제
의 굴레라는 사회구조의 모순을 타파하는 데로  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러한 사실을 세밀히 관찰해보면, 두 조직 사이에는 미미해 보이나 그 지향하는 바에 있어서
중요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한편 이들 조직의 주축이 된 향도계의 '향도'의 본래  의미는 미륵불이 다스리는 세계, 즉
만민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뜻하고 있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미륵신
앙과의 연관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검계와 살주계는 겉으로는 명화적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신분제도의 모순이
질곡의 현실세계를 타파하고 신분해방을 추구하는 결사체로서의 성격을 보다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