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레바논 내전 2. 국가속의 국가 PLO

구름위 2013. 6. 12.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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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아랍권은 이집트 혁명(1952)과 수에즈 사건(1956)으로 나세르 주의가 열풍처럼 휩쓸고 있었고 이것이 인구 변화와 함께 레바논에 권력불균형을 초래했다. 그런 와중에 1958년 기독교 출신의 샤문(Camille Chamoun)?대통령이 1957년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추진하는 지역방위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자세를 보인자 이슬람 세력이 반발했다. 게다가 샤문 대통령이 1957년 의회선거에서 기독교 진영의 확대를 노리면서 헌법을 무시한 채 국가원수의 지위를 유임하려?하자 이슬람 세력은 국민통일전선을 결성하고 1958년 5월 전국적으로 소규모?반란을 일으켰으며 1개월 후 반란은 수도 베이루트까지 파급되어 정부 지지파와 반대파 간의 시가전으로 확대되었다.


샤문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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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이 악화되자 샤문 대통령은 1958년 7월 15일 미국에게 개입을 요청하였고, 미국은 영국과 터키 주둔 병력 15,000 명을 베이루트에 상륙시켰다. 미군이 개입하고 대통령 선출을 국회에 맡기기로 하면서 일단 사태는 수습되었다. 미국은 아랍연맹이 UN에 '중동평화결의안'을 제출하고 미군의 철수를 요구함에 따라 내전이 진정된 1958년 10월 중순부터 병력을 철수시켰으나 3개월간의 내전으로 2,7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미군도 240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아직은 기나긴 레바논 내전의 씨앗이 뿌려진 것에 불과했다. 이미 레바논은 기독교 계가 전체 인구의 과반수가 아니라 1/3에 불과했고 아랍계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유입되면서 급증하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서 레바논은 기독교와 이슬람, 빈민과 부자, 범아랍주의와 레바논주의, 우익과 좌익이 겨루는 혼란에 빠지고 있는데 집권세력인 마론파 기독교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나눠줄 의향이 없었다. 이로 인해 갈등이 쌓이는 상황에서 1970년대에 들어서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970년대의 아랍은 60년대의 희망이 무너진 시대였다. 나세르 주의의 이상은 아랍 지도자들 간의 알력으로 무너졌고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카운터로 결정타를 맞으면서 끝났다. 정부의 무능함과 부패가 드러났고 지도층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자 아랍은 새로운 얼굴, 새로운 희망을 구했고 새로 주목을 받은 것은 PLO였다. 1964년 팔레스타인을 자신들의 정치적, 군사적 목적에 이용하기 위해 아메드 슈커리를 내세운 PLO 를 창설했고 초기의 PLO는 아랍 형제국가들의 지원이 없다면 효과적인 투쟁이 불가능한 꼭두각시였다. 그러나 아라파트의 알파타는 독립적인 조직이었고 6일전쟁 이후 게릴라 조직들 간의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 후 1969년, 아라파트는 PLO의 통제권을 장악하여 팔레스타인 최초의 진정한 민족운동 기구로 변모시켰다.


야세르 아라파트

70년대의 세계는 저항운동의 절정기였고 무명의 게릴라였던 아라파트는 저항과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물론 그의 길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1970년 9월 팔레스타인의 급진 게릴라들이 여객기 3대를 납치해 요르단에 착륙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자 요르단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잃는 사태를 우려한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PLO 지배하의 난민촌과 수도 암만 지역에서 정예부대인 아랍군단을 투입하여 토벌 작전을 펼쳤다. PLO는 요르단에서 축출되었고 아라파트도 여자로 변장해서 암만을 빠져나와야 했지만 이런 패배는 PLO의 성장에 오히려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PLO는 인접한 레바논으로 이동, 정부의 통제력이 약하고 항공기 납치, 해외 이스라엘 공관에 대한 테러 등, 대외활동을 수행하기 쉬운 국제도시 베이루트를 무대로 캠프를 설치했다.


검은9월단 사건

1972년 뮌헬 올림픽에서 검은9월단(70년 9월 요르단에서 축출된 것을 기억하는 이름)이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를 습격하여 11명을 살해한 사건이 상징하듯 수많은 테러행위는 PLO의 무시할 수 없는 존재를 세계에 보여주었다. 73년 10월 전쟁 이후 중동전쟁에는 오일머니가 쏟아졌고 그에 탄력을 받은 PLO가 정치적, 군사적으로 레바논을 잠식하면서 UN 무대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게되자 레바논의 국위는 PLO 앞에 무릎을 꿇었다. PLO는 훈련된 전투조직과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된 병사가 있었고 시리아를 통해 풍부하게 무기를 공급받는데 비해 마론파 기독교는 오합지졸의 민병에 불과했다. 궁지에 물론 마론파는 이스라엘에서 무기를 공급받았고 외세가 레바논의 내전에 개입하는 것은 이제 비밀이 아니었다. 레바논은 스스로 붕괴하고 있었고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레바논 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레바논 정부가 PLO와 카이로 협정을 맺음으로써 남부 지역에 파타랜드라고 불리는 PLO 지배 지역이 형성되면서 이 지역을 거점으로 이스라엘에 테러활동을 묵인하는 결과가 되었다. PLO는 1974년 4월의 Kiyat Shmona 학살이나 5월의 Ma’alot 학살을 비롯한 테러활동을 거듭했고 이스라엘은 이에 대응해서 공군이나 특수부대를 투입해서 남레바논 및 베이루트를 공격했고 이것이 다시 레바논 내에서 분쟁이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1975년 4월, 기독교 마론파 소속의 팔랑헤당이 교회에서 집회를 거행하던 중,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던 PLO지지자들의 버스가 교회에 발포, 팔랑헤당도 이에 응전함으로써 총격전으로 27명이 사망하여 내전이 재개되었다. 또 같은 시기 남부의 시돈에서도 수니파의 어민이 마론파 수산회사가 설정한 어업권에서 조업을 하여 소란이 발생했다. 레바논 군은 이를 진압하려 했지만 무장한 어민에게 헬리콥터가 격추되자 이슬람 좌파가 격렬하게 반발했다. 내전 자체는 저격, 로켓탄 공격등에 의한 산발적인 것이었으며 마론파, 이슬람, PLO 등의 민병조직은 교전 자체보다 각기 검문소를 설치하여 대립하는 파벌의 민간인들을 유괴, 고문, 처형하는 잔학행위에 열심이었다. 특히 주말은 블랙 먼데이라고 불리어 잔학행위가 빈발했고 자동차 폭탄이 베이루트에 등장하여 요인을 포함한 다수의 시민이 사망했으며 이로써 치안이 붕괴된 베이루트는 전투와 범죄로 황폐해졌다. 베이루트는 이슬람교도와 팔레스타인 난민이 많은 서베이루트와 마론파가 거주하는 동베이루트로 분열되었고 경계선에는 그린라인이라는 분리대가 설치되었다.


베이루트 그린라인


내전의 혼란은 시리아 정규군이 사태 수습 명분으로 국경을 넘어 개입하자 더욱 악화되었다. 1946년부터 20년간 16명의 대통령이 취임할 정도로 정치가 불안했던 시리아에서 1970년 쿠데타로 집권한 아사드는 잔혹함과 인내심이라는 무기로 향후 30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시리아는 대시리아 추구하며 연고가 깊은 레바논을 합병하기 위해 레바논에서 독점적인 세력이 등장하지 않도록 세력균형을 조절해나갔다. 1976년 5월 레바논 정부의 요청에 의해 시리아 군은 레바논에 들어왔으며 범아랍주의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레바논 내전에서 기독교 마론파 공동체의 팔랑주 당을 지원하고 급진적인 PLO및 이슬람 두르즈파를 제압했다. 이 때문에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시리아의 개입은 내전에 의한 혼란을 일시 억제시켰고 이른바 ‘시리아의 평화’가 레바논에 도래했지만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마론파와 시리아의 연합은 애초부터 불안정한 것이었기에 마론파는 1976년 9월 반시리아, 반팔레스타인을 기치로 삼아 레바논 군단(LF)이라는 민병연합조직체를 결성했으며 시리아 군과 LF는 산발적으로 충돌했고 PLO나 두르즈 파와도 전투를 펼쳤다. 열세에 놓인 LF 는 이스라엘의 지원과 개입을 모색하게 된다.



4차 중동전(욤키푸르 전쟁, 10월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이집트의 수도를 위협할 위치에 있었고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여 군사적으로는 승리했지만 정치권은 초기의 고전에 책임을 지고 집권 노동당 정부가 물러나는 변화를 겪어야 했다. 더 중요한 것은 3차 중동전으로 들떠있던 이스라엘에게 여전히 한번이라도 패한다면 이스라엘의 미래는 불투명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각인시켰다는 점이었다. 전쟁의 승리가?이스라엘의 국제적 고립을 해결해주지는 못했고 중동에 쏟아진 오일머니는 국제무대에서 이스라엘의 위상을 악화시키는데 일조했다. 집권한 우익 리쿠드 당은 레바논을 이스라엘의 영향력에 편입하고 PLO 를 축출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생존투쟁에서 최종 라운드가 될 것이라는 논리로 노동당을 설득시켰다.


1976년 레바논의 세력권



1976년에 군사개입을 시작할 때 시리아는 이스라엘과 ‘레드라인’협정을 체결하고 있었다. 이는 베이루트 이남에 여단 규모를 웃도는 시리아군 주력부대를 주둔시키지 않으며 레바논에 이스라엘을 사정권에 둘 수 있는 장거리포, 미사일, 로켓탄을 배치하지 않으며 전투기나 폭격기는 일체 레바논 국내에 주둔시키지 않는다는 불문협정이었다. LF는 이 협정에 주목하여 시리아 군을 도발, 마론파의 거점인 동 베이루트에 포격을 가하도록 유도했다. 이스라엘은 이를 중대한 협정위반으로 비난했고 특수부대와 공군기를 출동시켜서 리타니 이남의 레바논 남부를 점령했으나 국제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이스라엘은 전 레바논군 장교였던 하다트 소령에게 점령지를 양도했다. 그는 점령지역에 자유레바논군이라는 민병 조직을 결성해서 이스라엘의 괴뢰부대로 협력했다. 또 1980년에는 레바논 각지에서 시리아 군과 LF가 충돌하여? 베이루트와 베카 고원을 연결하는 군사도로를 구축한 LF에게 시리아가 공격을 가하면 이스라엘이 시리아를 공격하고 시리아는 보복으로 지대공 미사일을 베카고원에 배치하는 등 협정은 유명무실화 되고 레바논 내전에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개입하는 것이 점차 가시화되었다.

비록 PLO 가 빈번하게 이스라엘에 공격을 가했지만 실질적으로 이스라엘이 입은 손해는 1년에 전사자 1명 수준에 불과하다는 점은 고려사항이 못되었다. 이스라엘은 중동 최강을 자랑하는 자국의 군사력이 이집트의 압박에서 해방된 것을 이용하려는 유혹에 빠져들었고 그렇게 시작된 전쟁은 빠져나오지 못하는 수렁이 되었다. 1981년 7월 10일, 레바논 남부에서 교전이 벌어지자?이스라엘은 공습을 개시했고 5일 뒤에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 북부에 포격을 개시했다. 7월 17일, 이스라엘 공군이 베이루트 시내의 PLO본부에 대규모 공격을 실시하여 약 3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800명이 부상당했다. 남 레바논의 PLO 거점들도 이스라엘 군에게 공격을 받았지만 팔레스타인의 로켓공격을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 PLO는 비축된 탄약을 집적하기 보다 널리 분산시키는 전략으로 이스라엘 군의 맹공을 버텨내었고 계속되는 교전으로 레바논 접경지대에 거주하던 이스라엘 시민 수천명이 남부로 대피했다.

국제사회의 개입으로 이스라엘 군은 일단 철수했지만 상황은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1982년 1월 30일,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에게 보낸 알 헤이그의 보고서는 레바논과 이스라엘 간의 긴장상태를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묘사했다. 이스라엘 군의 지원을 받는 남레바논 군은 국제기구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있었으며 1982년 4월 21일 남레바논군의 포대를 방문한 이스라엘 군 장교가 지뢰를 밟고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이스라엘 공군은 팔레스타인이 통제하고 있는 다무르의 항구마을을 공격하여 23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5월 9일 이스라엘 공군은 레바논을 재차 공격했고 이날 UNIFIL은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 북부에 로켓공격을 가하는 것을 관측했지만 부정확한 사격때문에 이스라엘 거주지에 명중되지는 않았다.

UNTSO 사령관인 에르시킨 소장(가나)은 1981년 8월 부터 1982년 5월까지 2,096회에 걸쳐서 레바논 영공 침범이 발생했으며 652회에 걸쳐 레바논의 영해를 침범했다고 보고했고 PLO는 240회 이상 이스라엘을 공격했으며 이스라엘은 이를 정전협정 위반으로 규정했다.?

 

1982년 PLO는 병력 15,000명에 정규훈련을 받은 병력 4,500명을 포함한 6,000여명이 남부 레바논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60대의 T-34/85와 T-54, 55 20여대를 장비하고 있었으며 기동중인 이스라엘 전차를 상대할 경우를 대비하여 전차호에 은폐되어 있었다. 또 130mm포와 155mm중포를 포함한 야포가 90문, 122mm 카츄사 방사포 80문 및 120mm~ 160mm 박격포 200문으로 포병전력을 구성했다. 이 외에도 대공화기, 대전차미사일 등을 장비하여 게릴라 조직의 수준을 넘어 준 정규군 급의 무장을 장비했으며 무장의 속도도 밀수의 천국이 된 레바논을 통해 급격히 증가해서 이스라엘의 정보부가 분석한 바로는 1981년 6월에 약 80문이었던 야포와 로켓포의 수를 불과 1년만에 3배 이상 증가한 250문으로 증강시킬 정도였다.


 

UNFIL 지역 내의 PLO 기지.

그러나 정식군대가 못되는 PLO가 장비나 규모에서 이스라엘을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이스라엘은 PLO 처리를 목적으로 했지만 레바논 침공시에 가장 강력한 저항이 될 것은 시리아 군으로 예상했다. 시리아는 소련의 원조로 욤키프르 전쟁에서 괴멸되다시피한 공군력을 재건하여 MiG-23, 25, Su-22등의 공산권의 최신예 전투기를 도입했고 북한이나 소련, 베트남 등지에서 군사고문을 초빙하여 훈련을 강화했다. 지상군에 있어서도 당시에는 신비의 전차로 불리던 T-72를 도입해서 10년전보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독립된 6개 사단으로 구성된 시리아 군은 1976년이래 항상 1개 사단전력을 레바논에 주둔시키고 있었으며 레바논의 시리아 주둔군은 베카계곡과 베이루트에 둘로 나뉘어 병력 3만에 전차 712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한편 군비의 발전에는 이스라엘도 뒤쳐지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건국 초기부터 적대국가에 포위되어 있었고 국방에 많은 노력을 쏟아부어야 했지만 국방력에 대한 과도한 투자는 이스라엘의 잠재역량을 확실하게 저하시키는 원인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평시에는 적절한 소규모 기간병력을 유지하다가 전쟁이 발생하게 되면 아랍최강의 공군력이 지원하는 지상군이 공격을 방어하는 동안 예비군이 소집되어 병력을 완편하고 공세로 전환하는 것을 방어전략의 기본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은 국방예산의 대부분을 공군력 강화에 투자했고 그런 전략의 허점이 4차 중동전에서 드러나기는 했어도 전략 자체는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는데에 기여했음을 확인했다. 따라서 1973년의 전쟁 이후에도 공군력을 강화하여 제공능력이 부족한 F-4는 전폭기로 돌리고 F-15와 F-16을 적극적으로 도입, 주변 아랍국가보다 최소 10년은 앞서가는 공군력을 구축했다.


레바논 전쟁(1982) 당시의 M60 베이스 마가크 6c 전차 반응장갑이 두드러진다.

그에 더하여 4차 중동전의 전훈을 철저히 연구하여 공군은 전자전기와 와일드 위젤 도입으로 SAM 대응력을 향상시켰고 지상군은 보병의 대전차화기에 대응하기 위해 반응장갑을 채용하는 한편 시리아 군의 소련제 최신예 T-72에 대한 대응으로 신형 메르카바 전차를 준비했다.

1982년 6월 6일, 영국 주재 이스라엘 대사에 대한 PLO의 테러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이스라엘은 ‘갈릴리의 평화’ 작전을 개시한다. 이스라엘 군은 약 6만~7만8천의 병력을 이즈하크 모르드카이 소장의 서부군(지중해 방면)과 아미르 드로리 중장의 중부군(레바논 산지 서쪽 능선), 아비그도르 벤갈 소장의 동부군(베카 계곡과 헤르몬 산지), 이상 3개 임무부대(Task Force)로 나누어 레바논 영내로 진입한다.



11일까지의 작전도

개전 첫날 가장 중요시된 목표물 중 하나는 PLO가 장악하고 있는 뷰포트 성채(Beaufort Castle)였다. 10세기경 십자군이 건축한 이 요새는 북쪽 능선을 제외하고는 깍아지르듯한 암반위에 높이 자리잡고 있어 다마스커스로 향하는 도로를 감제할 수 있는 장소였다. PLO는 이 성채를 이스라엘 영토 포격용 관측기지로 활용하고 있었는데 폭격이나 포격으로는 거의 타격을 줄 수 없었다. 이스라엘 군의 골라니 여단 소속 2개 중대 병사들은 갈고리를 이용해서 암벽을 기어 올랐고 Fatah는 참호에서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방어진지의 견고함을 추구한 나머지 야간 공격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신형 갈릴소총으로 무장한 이스라엘 군은 격렬한 기관단총 사격이 난무하는 백병전 끝에 요새를 점령했다.

이튿날 이스라엘 군은 공격을 재개하여 티레를 고립시켰으며 북쪽의 시돈에 함포사격을 가하면서 특수부대를 상륙시키고 레바논 남부의 UNIFIL 지역을 돌파하고 각 거점을 우회하면서 빠르게 레바논으로 진격하고 있었지만 야간이 되자 진출선을 정돈하기 위해 후퇴한채로 8일을 맞았으며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점차 PLO 대신 시리아 군과 교전을 치르게 된다. 제진에 도달한 이스라엘 중부군의 선두 기동부대는 후속부대가 화력으로 이 거점을 점령하도록 맡겨두고 베이루트를 향해 진격했으며 이에 시리아 군은 이곳을 버리고 베이루트로 후퇴해갔다.

해안에서는 아침에 공중전이 벌어져 이스라엘 공군기가 시리아의 MiG 2기를 간단하게 격추시켰고 티레가 함락되고 시돈이 포위되면서 베이루트로 향하는 길에는 더 이상의 장애물이 없었다. 그리고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정면충돌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