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4차 중동전쟁, 7. 머나먼 평화

구름위 2013. 6. 12.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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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장기적 효과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협정은 1948년 1차 중동전 이후 아랍국과 이스라엘의 첫 공식 회담이었다. 이 전쟁으로 아랍국가들은 6일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떨쳐낼 수 있었고 특히 부분적이나마 승리를 거두고 실지를 회복한 이집트에서 이러한 효과가 더욱 컸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에서는 더 많은 영토를 획득했고 수에즈를 넘어 아프리카 까지 진출함에 따라 아랍권이 더 이상 이스라엘에게 군사적인 승리를 거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각주:1] 협상과 외교전술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했다.

이스라엘에게 이 전쟁은 재앙에 다름아니었다. 6일전쟁의 승리로 이스라엘이 유지하던 압도적 군사력의 이미지가 퇴색되었으며 초기의 기습을 당한 충격은 이스라엘 인들에게 심리적인 충격이 되었다 [각주:2]. 이스라엘은 연전연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번이라도 패배하면 갈 곳이 없는 벼랑끝에 있음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자국군이 동원되지 않은 상태에서 양 전선에서 기습을 당해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강대국을 무릎꿇리고 양국의 수도까지 위협할 수 있었지만 역사는 여전히 평행선을 그리고 있었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심각한 인명손실을 당하였고 3주동안의 전투로 입은 인명 피해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10년동안 싸우며 입은 전사자의 3배에 달했다. [각주:3]

한편, 미국이 이스라엘에 물자를 지원하자 사우디 아라비아가 주도하는 OPEC는 10월 17일 석유감산조치에 들어가 매월 5%씩 석유산출량을 줄여나갈 것을 결정한다. 또, 10월 19일 닉슨 대통령이 22억 달러 상당의 군수품을 이스라엘에 제공하기로 결정하자 사우디 아라비아는 미국에 석유 금수조치를 취하면서 네덜란드를 제외한 모든 석유 수출국이 석유 금수조치에 참가하여 1973년 석유파동이 일어난다. [각주:4] 중동은 이스라엘과 공식적인 친교를 맺는 모든 국가에게 석유금수조치를 취하겠다고 위협했고 국제유가는 배럴당 3달러에서 폭등을 거듭하여 1980년대 중반, 38.63달러까지 치솟아 올랐다. 아랍은 이제 풍족한 자금력으로 원하는 데로 무기를 구입하고 반-이스라엘 테러를 지원하였으며 아랍의 외교력을 증대시켜 이스라엘을 외교적으로 고립시켰다.



석유파동으로 차들이 주유소 앞에 줄을 서 있다.


석유파동과 국제유가의 변동

사다트는 전쟁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이집트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여 개혁을 시행할 수 있을 만한 지지를 확보했다. 1977년 카이로에서 식량난으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을때 시위대의 슬로건은 여전히 "Hero of the crossing, where is our breakfast?" ("?? ??? ??????? ??? ???????", "Y? batl al-`ab?r, f?n al-fut?r?")였다.



이스라엘의 추락

바 레브 라인에 고립된 '부다페스트' 거점을 끝까지 사수했던 모티 아쉬케나지(Moti Ashkenazi) [각주:5] 는 전쟁이 끝난 4개월 후 정부에 책임을 묻는 운동을 개시했다. 이스라엘 정부와, 특히 모세 다얀 국방상에게 비난이 빗발쳤고 이스라엘 최고법원장, 시몬 아그라나트(Shimon Agranat)을 위원장으로 하는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위원회는 전쟁 발발 초기의 대응을 면밀히 재검토 하고 핵심 쟁점들을 1974년 4월 2일 공개하여 이스라엘의 위기에 대해 6명이 문책의 대상이 되었다.

- 이스라엘 군 참모총장 다비드 엘라자르(David Elazar) "전쟁 대비가 미흡했던 점에 대하여 책임을 질 위치"임을 고려하여 해임.
- 정보국장 아뤼프 엘리 자이라(Aluf Eli Zeira) 해임
- 조사국장 아르에 샬레브(Aryeh Shalev) 해임.
- Aman 이집트 부분 정보처장 밴드맨 중령(Lt. Colonel Bandman) 전쟁 발발 6시간 전 상황을 파악해낸 공을 참작하여 좌천
- 남부 사령부 정보부장 게델리아 중령(Lt. Colonel Gedelia) 좌천.
- 남부방면군 사령관 사무엘 고넨(Shmuel Gonen) 첫 보고서에서는 유임되었지만 [각주:6] 공개된 최종 보고서에서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고 위험한 상황에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이유" 로 해임 [각주:7]

보고서는 대중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이상의 안보유지 실패는 내각의 책임만이 아니라 사태를 등한시한 의회의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지만 메이어와 다얀에 대한 비난이 격렬해 짐에 따라 사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확대되었다. 결국 승전에도 불구하고 1974년 4월 11일, 골다 메이어 수상이 사임했고 다얀 국방상의 사표가 두번에 걸쳐서 반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각도 총사퇴를 단행했다. 또, 엘라자르의 비공식적 조언자로 기여했던 [각주:8]
이즈하크 라빈이 이끄는 새정부가 6월에 구성되었다.

1999년 이 문제는 이스라엘 정계의 쟁점으로 재고되면서 이스라엘 국가 안보 위원회는 각 안보부서와 정보부 간의 협조 기구를 신설했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

이스라엘이 4번의 중동전에서 승리하면서도 정전에 기꺼이 응했던 것은 군사적인 요인보다 정치적이거나 심리적인 요인에 있었다. 네차례의 전쟁에서 힘의 균형이 존재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고 아랍측은 몇번을 패배하더라도 더 많은 인구와 더 넓은 영토로 패배를 감당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승리가 평화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만약 한번이라도 패한다면 이스라엘이라는, 아랍의 바다에 떠있는 유대인들의 섬은 파도에 쓸려내려갈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언제나 가장 위험하고 압도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적으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집트는 전쟁을 통해 민족의식을 드높이고 중동에서의 주도권을 다지는 것보다 국내 정세의 안정을 원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이스라엘이 점령했던 이집트의 영토에는 1967~73년 사이에 유전이 개발되어 상당하나 경제적 가치가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역사적 유산과 관련이 없는 땅에 큰 미련이 없었다. 욤 키프르 전쟁 초반에 이집트가 거두었던 성공은 그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했고 이제서야 적어도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평화의 희망이 싹텄다.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노동당이 주를 이루는 연립내각이 주도적인 정치세력이 국경에 대해서 융통성있는 대처를 해왔으나
라빈 총리는 몇가지 스캔들에 시달리다가 1977년 물러났고 메나헴 베긴이 이끄는 극우파 리쿠드 당이 다수당이 되는 정계의 지각변동이 있었다. [각주:9] 시나이 반도를 이스라엘에게서 회복하기 위해 전쟁을 치른 사다트는 1977년 CBS뉴스의 월터 크론카이트와의 인터뷰에서 평화 수립을 위한 보다 건설적인 대화에 나설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이것이 물꼬를 틀면서 이스라엘-이집트 간에 화해무드가 조성되었고 그해 11월 사다트는 아랍권 최초로 이스라엘을 공식 방문하는 과감한 시도를 통해 평화협상을 급진전시켰다.

리쿠드 당이 승리한지 반년이 되지 않은 1977년 11월 9일, 메나헴 베긴도 이집트에 종전협상을 제시하였고 지미 카터 대통령이 사다트와 베긴을 사이에서 중재역을 맡았다. 1978년 9월 5일부터 17일까지 미 대통령의 여름별장인 캠프 데이비드 [각주:10] 에서 역사적인 이스라엘-이집트 평화협정이 조인되었다. 극우 과격파 정당의 수장이며 1차 중동전 이전부터 강경파 테러리스트로 매나헴 베긴이 벤 구리온 이래 온건파 노동당 지도자들 누구도 할 수 없었던 방식, 즉 점령지를 매매한다는 방식으로 평화를 얻어낸 것이다.

최종적으로 협상이 성공하여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1979년 평화조약을 맺고 이스라엘 군은 이집트와 항구적인 평화의 대가로 자국군과 정착민들을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했다.


평화회담의 주역들, 메나헴 베긴, 지미 카터, 안와르 사다트


메나헴 베긴 수상과 이집트 국방장관 하페즈 이스마일이 체스를 두고 있다.


담소를 나누는 사다트와 지미 카터

아랍 국가들은 일제히 이집트를 배신자로 규탄했고 그 전까지 "아랍권의 지도자" [각주:11] 로 인정받아오던 이집트는 아랍연합에서 즉각 축출되었다.

2년후인 1981년 10월 6일 안와르 사다트는 전쟁 8주년 기념일 행사에서 이스라엘과의 협상에 분노한 극렬 아랍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메나헴 베긴은 오랜시간 그와 함께했던 정치적 동반자들에게 버림받았고 이스라엘 측은 예루살렘이라도 내어줄 용의가 있다며 아랍국가들과 평화회담을 진행하였으나 팔레스타인은 협상을 거부했다.

85년, 국제유가는 서서히 안정세에 접어들엇고 86년에 유가는 배럴당 25달러, 4월에는 10달러까지 내려갔지만 아랍측은 이미 상당한 자금을 확보했고 이를 테러전과 외교적인 고립에 투자할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중동전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