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레바논 내전 1. 백향목의 레바논

구름위 2013. 6. 12.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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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그 날개속에 숨은 칼이
그대를 상처입힐 지라도.
?- 칼린 지브난


오늘날의 레바논은 오스만 투르크 시절 이 지역을 통치한 두르즈파의 파할 앗디가 지배하던 “소 레바논” 지역을 근거지로 한다.아랍의 일부지만 마론파 기독교도를 비롯해서 그리스 정교들이 다수 존재하는 독특한 사정으로 반독립적인 세력권을 유지하던 이 지역에서?1860년 오스만이 지배권을 강화하는 와중에 마론파 그리스도 교도들과 드루즈파 무슬림 간의 분쟁으로 마론파 1만명이 학살당하자 프랑스는 군대를 보내 질서를 회복했다. 이후 프랑스는 레바논의 기독교 사회를 보호하는 어머니 역할을 수행하여 이 지역의 자치권을 보장했다.?오스만으로부터 자치권을 얻자 기독교도를 중심으로 하는 레바논 사회는 유럽과 교류를 쌓았으며 해외에서 축적한 부를 환원하여 경제력을 키웠고 서구의 선교사들이 병원과 학교를 건설하여 기독교 공동체는 19세기 후반부터 경제, 정치, 문화 부문에서 이슬람 공동체를 뛰어넘는 우위를 갖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만이 패하자?중동지역을 획득한 연합국은 영국이 맥마흔 선언을 통해 아랍인들의 자주국가건설을 돕겠다고 약속했음에도 이 지역을 프랑스와 분할해서 자국의 영향권에 편입한다.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의한 가상의 경계선

사이크스-피코 협약으로 사실상의 종주국이 된 프랑스는 마론파 그리스도교도들이 많은 본래의 소 레바논(mount lebanon) 이외에 본래는 시리아에 속해있던?베카 고원과 레바논 북부 및 남부 레바논을 병합하여,?대 레바논(Greater Lebanon)을 임의로 형성하고 이 지역을 위임통치했다.?이후 1926년 자치국가가 되고 1944년 완전 독립을 달성했지만?레바논은 마론파 기독교, 두르즈 이슬람, 그리스 정교, 그리스 카톨릭, 아르미네안, 수니파, 시아파 등등의 다양한 집단들로 구성된 모자이크적?'조각 국가'로서, 어떤 파벌도 국내에서 압도적 다수를 형성하지 못한채 국가보다 부족, 종교 집단의 귀속력이 강한 부족 연합체 성격을 띄게?되었다.
각자 고유의 특성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들은 기독교와 이슬람 양대 축으로 갈려졌으며 기독교 세력은?레바논주의(Lebanism)를 주창하면서 완전한 독립국가로서의 레바논을 건설하려 하였고, 이슬람 세력은 아랍주의(Arabism)를 주창하면서?레바논을 아랍세계의 일부로 편입시키려고 하였다.?


대 레바논

두 세력은 1943년, 1932년의 인구조사 결과를 근거로 하는?국민협정(National Pact)에 합의, 신사협정을 통해 권력을 분할함으로써 일단 갈등과 대립을 종식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협정에 따라 대통령은 기독교 마론파, 수상은 이슬람 순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에서 맡는 정부를 구성한 레바논은 이후, 정치적으로는 중립주의를, 경제적으로는 철저한 자유화 정책을 추진하여 아랍의 여러나라와 물자, 정보를 제공하는 중간자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독자적인 번영을 유지했다.

아랍에서 가장 서구화된 국가로 수도인 베이루트가 중동의 파리라 불리울 정도로 발전한 레바논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인구변동에 의하여 기존의 정치적 합의가 깨질 경우에 대응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난점이 있었다. 본래 국민협정은 불문협정으로 잠정적이며 인구조사를 근거로 변동할 수 있다는 조건부로 체결된 것이지만 이후 인구조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이슬람계 인구가 계속 증가하는 것이 반영되지 않자 불리한 입장이 된 이슬람 교도들의 반발이 일어났고 각각의 민족, 신앙 공동체들은 거주지, 학교, 사회 풍습이 다른 것은 물론이고 군대까지도 각자가 소유하는 형태가 되어 통합을 이루지 못한채 위태로운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에서 약 40만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난민이 레바논으로 유입되자 레바논의 기독교 인들은 이슬람 인구 유입 증가와 그에 따른 정치적 변화를 우려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