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레바논 내전 3. 베카 계곡의 공중전

구름위 2013. 6. 12.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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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9일, 시리아와 PLO는 전진하는 이스라엘 지상군을 레바논 중부의 방어 거점에서 저지하고 있었다. 자동차에 탑재한 Sagger 대전차 미사일(ATM) 팀에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이스라엘도 보병, 포병, 기갑에 의한 연계와 반응장갑을 활용하여 ATM 공격에 대응해 나갔다. 격렬한 지상전을 거듭하면서도 이스라엘 지상군이 베카 고원의 입구인 Joub Jannine을 장악하면서 시리아는 베이루트의 주둔군이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이 시점까지 아직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전면전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지만 레바논 주둔군이 괴멸될 것을 우려한 아사드 대통령은 시리아 군의 지대공 미사일(SAM) 망을 베카 고원으로 전진배치하도록 지시했다. 지난 전쟁에서 맹위를 떨치며 이스라엘 공군을 괴롭혔던 시리아군 SAM과의 2라운드가 시작된 것이다.

시리아 군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은 시리아 군의 SAM배치망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 군이 도입한 무인정찰기(RPV)들은 이 지역의 병력 이동을 낱낱히 관측했고 지상관측부대와 정찰기의 정보는 통신망을 관활하는 E-2C 호크아이 조기 경보기에 전송되었다. 이런 압도적인 정보력을 바탕으로 이스라엘군은 전진배치된 SAM을 걷어내고 시리아 공군에게 타격을 목표로 6월 9일 오후 2시를 작전 시간으로 계획한다.?


96기의 F-15, F-16, Kifr C-2S가 제공권을 장악한 가운데 RPV는 전파방해를 개시했고 F-4 전폭기들이 파상공세를 개시하자 전자장비가 마비된 시리아군 SAM기지는 혼란에 휩쌓였고 연이어 제2파 92기가 공격을 개시하고 지상군이 포격을 개시하자 SAM? 포대들은 차례차례 침묵했다. 불과 1시간 만에 19개소의 SAM기지중 17개소가 완파되었고 남은 기지도 심각한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다. 이스라엘의 손실은 A-4 1기와 F-4 1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스라엘군의 제2파가 공격을 개시함과 동시에 시리아 공군은 MiG-21, ?23, ?25 및 수호이 Su-7s을 대규모로 출격시켜 요격에 나섰으며 지상의 시리아군 대공포가 지켜보는 가운데 양측 합계 200기에 달하는 전투기들이 베카 계곡 상공에서 공중전을 벌였다. 하지만 시리아 공군기의 접근은 이스라엘 조기경보기에 완전히 파악되고 있었으며 상대는 당대 최강의 제공전투기 F-15로 무장한 이스라엘 공군이었고, 더욱 큰 문제는 시리아 공군의 훈련은 전적으로 지상 기지에서 통제를 받는것을 전제로 이루어졌다는 점이었다. 즉, 시리아 공군은 독립적인 체계가 아니라 지상의 통제를 받는 대공방어망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고 그 통제를 해주어야 할 기지들이 눈과 귀를 잃은 상황에서 이스라엘 공군의 전파방해(ECM)에 걸려든 상황에서는 전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날 이스라엘군은 제1전에서만 29기의 MiG기를 격추시켰고 그날 밤까지 41기 이상의 시리아 공군기가 격추된 반면 이스라엘의 피해는 전무했다. 2차대전 이후 단일 교전에서 공중전으로 발생한 피해로는 최대규모였고 전례없는 일방적인 승리였다. 이스라엘기의 격추는 대부분 1976년에 새로 도입한 신형 AIM-9L 사이드와인더에 의한 것으로 기체의 마찰열을 감지해서 적기의 전방향에서도 공격이 가능한 이 미사일은 적기를 HUD에 넣기만 하면 적기가 어떻게 회피해도 록온을 걸 수 있었다. 반면 시리아 군의 경우에는 전반적으로 공대공 유도미사일에서 열세에 있었고 소련의 신형 Atoll 도 성능면에서 훨씬 뒤쳐져 있었다.

이날의 공중전으로 제공권을 장악한 이스라엘은 해안에서는 해군의 지원포화에 힘입어 다무르(Damour)를 점령했고 밤까지 해안의 이스라엘 군은 베이루트를 불과 10km 남겨둔 지점까지 전진했지만 중부집단과 합류를 위해 대기에 들어갔다. 한편 중부군은 베이루트-다마스커스간 고속도를 점령해 나갔으나 시리아군 사령부는 제진(Jezzine)북부의 술탄 야쿠브(Sultan Yakoub)에 1특공대대와 제58 기계와 여단의 전차 및 대전차화기를 결집해서 매복시킨 채 이스라엘 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간에 시리아 군이 도로를 따라 맹포격을 가했기 때문에 야간에 전진하던 이스라엘 군은 10일밤 기습을 당했다. 시리아 군은 포격을 가해서 튀어오른 자갈들과 먼지로 시야가 차단했고 시계 확보를 위해서 해치를 열고 몸을 내민 이스라엘 군 전차장들은 매복해있던 시리아군 저격수들의 좋은 먹이감이 되었다.


새벽이 밝기까지 이스라엘 군은 혼란에 빠져있었지만 상황을 파악한 후방의 이스라엘 포병들이 인마살상탄으로 지원포격을 실시하면서 상황이 호전되었고 해가 뜰무렵에는 양측의 전차전이 벌어졌다. 시리아 군도 다마스커스-베이루트 고속도로를 통해 지원군을 보냈지만 이스라엘 공군은 증원을 방해하여 시리아군 제1기갑사단의 전차 절반이 이동중에 파괴되었다. 6시간이 넘는 전차전 끝에 시리아 군은 퇴각했고 이스라엘은 베카-제닌을 잇는 도로을 완전히 장악한다.

 

6월 11일 아침 이스라엘은 최신예 메르카바가 시리아군 T-72를 압도한데 힘입어 다시금 기갑부대간의 교전에서 승리를 장식했다. 이스라엘의 자국산 최신예 메르카바가 환상의 무적전차로 알려져 있던 소련의 T-72를 승무원 손실없이 제압해버리자?시리아 군은 더이상 내놓을 카드가 없었다.


메르카바는 히브리어로 전차(Chariot)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최초의 자국설계, 자국생산 전차인 메르카바는 두터운 전면장갑을 바탕으로 높은 생존성을 자랑하며 굴곡이 많은 지역에서 사용하도록 자국지형에 맞게 설계되었다. T-72를 상대로 압도적인 전과를 거두었다.


이미 예상을 훨씬 초과하는 피해를 입은 시리아 군은 결국 11월 정오 휴전에 합의했으며 PLO는 아랍세계에서 고립된채 베이루트에서 절망적인 농성을 벌이게 될 상황이었다. 이스라엘 군은 불과 6일만에 레바논 남부의 4,500 ㎦를 점령하고 시리아와 PLO를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또 한번의 6일전쟁에서 승리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에 따라 이스라엘의 침공에는 전세계의 비난이 몰렸고 이미 시돈에서 격렬한 시가전으로 많은 민간이니 희생자를 낸 이스라엘은 베이루트에서도 똑같은 속전속결을 시도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베이루트를 포위한채 직접적인 시가전에 돌입하기 보다는?확성기를 이용해서 항복을 권고했고?PLO는 이스라엘군의 정밀폭격에 맞서 지붕에 노약자로 만든 인간사슬을 올려놓는 방법으로 응수했다.

결사항전을 부르짖는 아라파트였지만 레바논 전체의 반응은 그와 같이하고 있지 않았다. 레바논 최대의 파벌이 된 시아파는 골치거리였던 PLO를 축출하기 위해?이스라엘을 방관했고 마론파 기독교는 자신들이 이스라엘군을 불러들인만큼 기뻐했고, 이스라엘군의 지원에 힘입어 적대시하던 이슬람 세력의 거점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PLO는 12살 어린아이에게 대전차로켓포(RPG)를 들려주면서까지 저항하고 있었지만 아랍권은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성명을 발표할 뿐 어느나라도 나서지 않았다.


RPG공격을 받아 불타는 메르카바. PLO는 어린아이들에게 휴대가 간편한 RPG를 들려주고 이스라엘군을 공격하게 해서 RPG Kids로 유명해졌다.

시리아와 정전을 맺은 4일후, 베이루트를 포위한 이스라엘 군은 보병과 포병을 투입해서 시가전을 벌였다.?PLO는 항복을 거부한채 서베이루트에서 저항했지만 외부의 지원을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농성은 한계가 있었다. 레바논의 이슬람 계파까지 나서서 PLO에게 명예로운 후퇴를 요구하는 상황에서?베이루트는 스탈린그라드 [각주:1] 가 될 수 없었다.

1982년 7월 3일 아라파트는 PLO 지도부를 이끌고 레바논을 떠나겠다는 의사를 미국 정부의 레바논 특사인 필립 하비브에게 전달한다. 레바논에 남겨진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아라파트가 최후까지 저항하지 않았다고 비난했고 6일전쟁으로 나세르 주의가 빛을 잃었듯 아라파트도 빛을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
8월 둘째주부터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은 국제평화유지군의 호위를 받으며 베이루트에서 철수했다. 소총과 수류탄뿐인 팔레스타인 해방군이 최신예 전차와 제트기로 무장한 시리아가 6일도 버티지 못했던 이스라엘 군을 상대로 2달을 버틴 것은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지도부의 후퇴로 패배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레바논에서 오일머니와 70년대에 세워졌던 아랍 민족주의의 낭만시대는 무너져 내렸다. 레바논의 역사학자 케말 살리비는 베이루트 항에서 아라파트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왈리드 줌블라트(드루즈파 지도자)는 그다지 친분이 없던 아라파트가 배에 오를 때까지 수행했습니다. 아라파트를 태운 배가 출항하려고 하자 그는 권총을 꺼내 예포 형식으로 허공을 향해 쏘았습니다. 그건 아라파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상징하던 모든 것을 향한 예우였습니다. 서베이루트는 아랍민중의 양심이 담긴 저수지였고 PLO가 떠나기를 바랐지만 아라파트의 목까지 이스라엘에 주고싶지는 않았습니다. 서베이루트 사람들은 아랍의 존엄성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왈리드는 아라파트를 배웅하면서 ‘아랍놈들아! 우리가 마지막 남은 진정한 아랍인이다. 진정한 아랍인은 서베이루트다’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각주:2]



베이루트를 떠나는 PLO 승리를 다짐하는 V사인을 하고 있다.

아라파트는 레바논 내의 난민들로 구성된 작은 팔레스타인을 잃고 튀니지로 거점을 옮겼다. 레바논에서 순교자가 되기보다 상징으로 남는 것을 선택했다는 비난이 아라파트에게 몰렸고?직속 무장조직인 PATA가 시리아의 원조를 받으며?PLO에 반기를 든 것은 근거지를 잃은 것만큼이나 큰 타격이되었다. 하지만 1982년 10월, 아라파트가 후세인 국왕을 방문했을때 팔레스타인은 아라파트에게 환호로 화답했다. 아라파트는 여전히 팔레스타인이 쏘아올린 작은 공이었다.?

 

전쟁은 도박과 같아서 시작하기는 쉬운데 그만두기가 힘들다. 이스라엘은 PLO가 국제적인 승인을 받으며 레바논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군비를 확충하고 있음을 전재로 전쟁을 시작했고, 시리아와 PLO가 레바논에서 축출되면서 물러날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문제는 어떻게 전쟁을 끝내냐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전쟁을 시작하기 전 계획했던 종전 작업은 레바논에 마론파 기독교 팔랑헤당의 젊은 지도자 바시르 제마엘을 내세워 친이스라엘 정권을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계획대로 1982년 8월 23일 바시르 제마엘은 단독후보로 출마해서 레바논 대통령이 되었고 그가 레바논 군을 재조직하여 시리아와 PLO? 세력을 몰아낸다면 리쿠드 당이 약속했던 40년간의 평화도 멀지 않을듯 했다.

바시르 제마엘. 팔랑헤당의 창립자인 피에르 제마엘의 아들로 경쟁조직들을 무자비하게 제압하며 레바논 대통령까지 올랐다.

아민 제마엘. 바시르 제마엘의 형. 동생과 달리 사업가로 활약하고 있었지만 동생이 암살되면서 레바논 대통령이 되었다. 온건파로 분류되었지만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이슬람계에 불리한 정책을 펼쳐 레바논의 혼란을 초래했다. 그의 아들 피에르 제마엘은 2000년에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산업장관 재직중인 2006년 괴한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그러나 1982년 9월 14일, 바시르 제마엘은 팔랑헤당 회합에 참석했다가 시리아의 비밀요원 하비브 사르투니에게 암살당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루어낸 성과는 일순간에 쓰래기가 되었다. 계획이 틀어지자 이스라엘은 테러의 책임을 PLO에 돌렸고 미국과의 구두약속을 파기하여 서베이루트를 침공하며 사브라와 샤틸라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일어난 팔랑헤당의 학살을 방관했다. 일련의 사건으로 이스라엘은 국제사회로부터 강력한 비난을 받았다. 이스라엘은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고자 뒤를 이어 레바논 대통령이 된?바시르의 형 아민 제마엘을 지지하고 그와 "’이스라엘-레바논 평화조약’조인 및 국회 가결을 요구했지만 아민 제마엘은 바시르를 대신할 수 없었다.

사브라 샤틸라 학살

바시르 제마엘은 잔인하기는 했지만 혼란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높은 추진력과 결단력이 있었다. 아민 제마엘은 온건했지만 정치력에서는 동생과 비교될 수가 없었다. 레바논은 다시금 혼란에 빠져들었고 이스라엘도 정치적 추진력을 상실했다. 국제적 압력에 밀려 사브라-샤틸라 학살사건의 자체조사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국방장관 샤론과 참모총장 라파엘 에이탄, 이갈 얄론에게 책임을 물어 각기 현직에서 해임시켰고 83년 메나햄 베긴은 공식적으로 사임했다.

이스라엘 군은 여론의 악화에 의해 1983년 9월 부터 철수했다. PLO 축출이라는 대의에는 시아파도 동조하고 있었지만 레바논 남부는 이스라엘의 영향력에 두려는 의도가 드러나자 레바논의 각 정파도 적대감을 드러냈으며 1983년 10월 16일 레바논 남부의 나바티야에서 이스라엘군이 시아파 민간인에게 총격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스라엘군은 격렬한 저항에 시달렸다. 매복공격, 차량을 이용한 자살폭탄공격, 폭탄테러 등등 수단과 장소를 가리지 않은 테러앞에 이스라엘 군은 끝이없는 수렁에 빠져들었다.

이스라엘군이 빠져나간 자리를 미국을 핵심으로 하는 프랑스, 이탈리아 군이 메웠지만 그들도 침략자로 비친것은 마찬가지였다. 미군은 레바논 대통령 아민 제마엘의 요청에 의해 레바논 정부군의 재건에 나섰지만 아민은 그러한 지원을 자국의 재건이 아니라 적대 세력의 탄압에 사용했다. 1983년 10월?5,400kg의 다이너마이트를 적재한 트럭이 미해병대의 베이루트 사령부에 돌진, 241명이 폭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계속되는 자살폭탄테러에 시달리는 미군도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1984년 이후 레바논은 통제불가능한 상황에 빠져들었다.

1983년 미해병대 막사 폭탄테러 사건.

1990년 집권 마론파가 세력변동을 반영한 헌법 개정에 동의하면서 레바논 정국은 다소 안정되었지만 1978년부터 1990년까지 이어진 레바논 내전은 15만명의 희생자를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