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4차 중동전쟁, 5. 이스라엘의 반격

구름위 2013. 6. 12.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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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반격

10월 7일 저녁, 골란고원의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자 골다 메이어는 체임 바레브 장군을 북부전선의 소방수로 기용했다. 전선을 시찰한 바레브
장군은 바라크 여단이 궤멸되어 시리아 군이 갈릴리 호수 근처의 인구밀집지대를 노릴수 있는 상황에서 막 동원된 펠레드 사단을 79, 17 기갑여단에 이어서 방어선에 증원하는 대신 골란 남쪽에서 반격토록 명했다. 진출해온 시리아군의 측면을 노린 펠레드 사단은 10월 8일 아침 8시30분 부터 역습을 개시 대전차 지대에서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3개 축선으로 나뉘어 전진했다. 라너 장군의 제21기갑사단 소속 79, 17 기갑여단의 증원과 제7기갑 여단의 방어를 뚫지 못한 상황에서 남동쪽의 펠레드 기갑사단이 점차 시리아 기갑여단을 조여 나감에 따라 시리아 군은 휴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했고 골란고원에는 시리아 군이 남긴 수천대의 전투차량, 대전차 차량, 대포를 비롯하여 867대의 전차가 뒹굴고 있었다. [각주:1]


10월 10일, 전쟁이전의 국경선에 도달한 이스라엘군 최고사령부는 이곳에서 방어를 굳힐 것인가 더욱 진격할 것인가를 놓고 하루종일 논의를 거듭했다. 골란고원은 방어측에게 유리한 좁은 회랑지역으로 여기서 방어를 굳힌다면 시리아 군의 진격을 우세한 공군력으로 제압하면서 지상군 예비전력을 시나이로 보낼 수 있었다. 반면에 시리아 영내로 진격하려면 지금까지 시리아 군의 대전차 지대에서 입었던 피해를 고려하면 시리아 영내로 진출할 때 어느 정도의 피해가 누적될지를 고려해야 했다. 그와 함께 시리아를 돕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이라크의 증원군이 출발했다는 점과 지금까지는 개입하지 않던 요르단도 더 이상은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었다. 반면에 지금 상황에서 정지한다면 후퇴한 시리아 군이 소련의 지원으로 전투력을 회복할 수 있는 상황에 이스라엘 최고사령부는 10월 10일 밤 10시에 회의를 열고 휴전선에서 진지를 강화할 것인지, 시리아로 공격을 계속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다얀 국방상은 소련의 참전 가능성 때문에 공격을 주저했지만 엘라자르 참모총장은 적어도 20km정도는 시리아 영내로 진출해야 시리아 군 능력을 무력화 시키면서 이집트에 압박을 가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고 이것이 사령부의 입장으로 수상 골다 마이어에게 전달되었다. 마이어는 군사 외적 측면을 고려했다. '만약 현 위치에서 군을 돌린다면 시나이에 배치하는데 4일은 걸릴 것이다. 만약, 그동안에 전쟁이 외교적인 문제로 종료된다면 이스라엘은 시나이에서 영토를 손실한 상태로 반격을 준비하다가 북쪽에서 아무런 이득도 없이 종전을 맞게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아랍과의 휴전은 전쟁의 중단이 아니라 다음을 위한 준비기간을 갖자는 것에 불과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다.' [각주:2] 라고 결론이 내려지자 이스라엘은 10월 11일 시리아 영내로 진격을 계속하기로 결정한다.



전장을 방문한 골다 메이어, 모세다얀, 이즈하크 호피. 여성 군인이 끼어있는 것에 주목.

이스라엘 군은 북부에서 왼쪽에 헤르몬 산을 끼고 반격에 나선 라풀 사단과 라너 소장의 21사단, 펠레드 준장의 14사단이 남부에서 진출하여 2개 축선에서 진격을 개시했다. 이스라엘군은 14일까지 보병을 대전차 방어벽으로 활용하는 시리아 군에게 피해를 입으면서도 다마스커스를 40km 앞둔 지점까지 진출했다. 전력이 고갈된 시리아군은 잔여병력을 다마스커스에의 접근로에 집결시키는 한편, 필사적으로 우방국 지원을 요청했고 소련을 포함한 친 아랍진영에서는 지금까지 중립을 지키고 있던 요르단까지 급히 지원군을 파견했다. '전장에서 아랍의 위치가 흔들리자 후세인 국왕은 요르단 군이 영내에서 공격해 들어가는 대신 시리아에서 이스라엘과 싸우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후세인에게 요르단 영토가 직접 이스라엘 공군의 공격에 노출되지 않는 상태로 전쟁을 원하는 국민의 요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와 함께 이스라엘이 요르단과 싸우지 않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미국을 통해서 전달했다. ... 다얀은 어떠한 보장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이스라엘은 더 이상 전선을 늘릴 이유가 없었다.' [각주:3] 북부에서는 모로코 파견군이 방어에 나섰고 남부에서는 요르단 군의 1개 기갑여단에 더해 이라크군이 3만명의 병력과 500대의 탱크, 700대의 장갑차량 [각주:4] 으로 이스라엘 군에게 공격을 가했다. 측면이 위협을 받게 된 라너 소장은 마스차라-자바-마츠-나세즈를 연결하는 곳에 호구형 대전차 방어지대를 구축하여 함정에 빠진 이라크 군을 통타 큰 타격을 입혔지만 이스라엘 군의 전진은 확실히 둔화되었다. 전략적으로 기습을 당한 이스라엘 군은 진출부가 포위당하지 않기 위해 약간 후퇴하여 정지, 방어선을 구축했고, 시리아-이라크-요르단 연합군은 이스라엘 군에게 대항할 수 있을만한 전선을 구축했지만 이스라엘군을 후퇴시킬 여력이 없었다. 북부에서 전쟁은 대치국면에 돌입했다.

10월 22일, 골라니 여단과 아예레 마트칼(Sayeret Matkal) 특공대는 헤르몬 산에 배치된 시리아 군 저격수들로 많은 피해를 입으면서도 전초기지를 탈환했다.  2주 전의 공격은 사망 25명에 부상 67명, 두번째 공격에서는 사망 55명에 부상 79명이었다. [각주:5] 이스라엘 군의 D9 불도저를 앞세운 이스라엘 보병은 정상으로의 통로를 개척하면서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시리아 측 전초기지까지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시나이 전선 - 후기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0/1973_sinai_war_maps2.jpg

시나이 지역 작전도. 후기.

한편 남부전선에서 이집트는 초기의 공세와는 달리 진출한 지역에서 방어진을 굳히고 전진하지 않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이집트는 지금까지의 패배를 분석해서 이스라엘 측에 유리한 단기결전과 기동전의 형태로 전쟁이 진행되지 않도록 계획을 세워두었다. 전략적으로 이집트가 원한것은 일정한 수준의 승리를 통해서 이스라엘과 협상을 통해 영토를 회복하는 것으로 이집트는 무리하게 요새화된 시나이 반도를 돌파하는 것보다 소모전을 유도해 나가려고 했다. 게다가 공군전력에서 이스라엘의 우위를 인정하고 전력강화의 중점을 육군에 맞추었기 때문에 더이상 전진할 경우 육상부대의 대공화력만으로 이스라엘 공군을 상대해야 할 경우 승리를 보장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이유로 전진을 중지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북부전선에서 시리아가 위기에 처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의 요구에 응한 사다트는 2단계 작전 실시를 명령했다.

사드 엘 샤즐리(Saad El Shazly)와 아흐메드 이스마일 알리(Ahmad Ismail Ali) 사령관은 공격 명령에 반대했으며 샤즐리 장군은 공개적으로 작전에 반대하면서 전략적 실패라고 조언을 했다가 해임되었다. 이집트 군은 운하 서안에 예비대로 확보하고 있던 2개 기갑사단 전력을 증원, 이집트 군은 800~1,000대의 전차를 2개 축선에 투입, 공격을 개시했으나 이집트 군은 몇시간 만에 과거에 보여주던 모든 단점을 보여주면서 패했다. 제벨 아타카의 감청기지가 이스라엘 공수부대에게 기습을 당하면서 전황 정보를 파악하지 못하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방어가 약한 와디 [각주:6] 방향이 아니라 이스라엘 군의 정면에서 기동전에 돌입한 이집트 군은 265대의 전차를 상실한 반면, 이스라엘 군의 손해는 단 40대, 그 중에 6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수리후에 재투입되었다. 전쟁 개시 후 이집트가 최대의 전력을 투입한 루스 엘스토 회전은 이집트 군의 대패로 끝났고 [각주:7] 수에즈 운하 서안의 예비전력이 약화되었다.



작전을 논의하고 있는 이스라엘 수뇌부.


이튿날인 10월 15일, 이스라엘군은 아비레이-레브 작전을 전개하여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집트 본토를 공격하는 과감한 반격을 시도한다. 지금까지의 교전을 통해서 이집트 군의 대전차, 대공화력의 강력함을 절감한 이스라엘 군은 전면적으로 전술을 변경해서 SAM 기지와 대전차 방어선에 보병을 돌입시켜서 먼저 방어를 약화시킨 다음에 기갑부대와 공군을 투입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16일, 아리엘 샤론이 직접 지휘를 맡은 1개 사단이 샤론 사단은 북부의 이집트 제2군과 남부의 제3군 사이의 틈새를 찾아내어 이스마일리야(Ismailiya) 근처의 개활지로 돌격해 들어갔다. 중국농장 근처에서 격전 끝에 운하 건너편에 발판을 마련한 이스라엘군은 보병부대를 소규모로 나누어 24시간 동안 쉴새없이 M72 LAW 대전차로켓을 휴대하고 고무 보트로 운하를 도하했다.




도하 성공 소식에 기뻐하고 있는 모세 다얀과 아리엘 샤론

전쟁이 일어나기 전, 이스라엘 군이 운하를 건너 이집트 쪽으로 진격할 가능성을 우려한 서방진영은 이스라엘이 도하장비를 갖출 수 없도록 제한했지만 비밀리에 이스라엘은 프랑스가 폐기처리한 2차대전 시절에 사용되던 부교를 고철명목으로 사두었다.


기갑부대가 부교를 통해 운하를 건너는 모습.


부교에 더해서 보다 정교한 이동식 가교를 설치하는 와중에 보급 문제로 진출이 지연되기는 했지만 10월 16일과 17일, 수에즈 운하에 부교가 놓이고 아브라함 "브렌" 아단이 지휘하는 162사단이 수에즈 운하를 건너 남쪽으로 진출 이집트 제 3군을 포위했다.


이스라엘 공수부대가 '부다페스트' 거점에서 시나이 전선으로 이동하는 중 이집트군 특수부대의 기습공격을 받는 장면

동시에 보병부대가 대전차 지대를 제압하고 기갑부대가 SAM기지를 파괴하면 전폭기들이 돌파구를 확대하는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조직력이 살아난 이스라엘군은 후퇴하는 이집트 군을 일방적으로 몰아친 끝에 19일, 이스라엘 군 지휘부는 이집트 군을 포위하고 기갑부대가 카이로에서 101km 떨어진 지점에 도달했음을 밝혔다.



해전


http://en.wikipedia.org/wiki/Image:Battle_Latakia_en.svg

이스라엘과 시리아 군 간에 10월 7일에는 세계 최초의 함대함 미사일을 탑재한 보트간에 해전이 벌어졌다. 오랫동안 이스라엘 군의 골칫거리에 불과했던 해군은 보다 발달된 ECM과 지대지 미사일로 이 해전에서 완승을 거두어 실력을 입증했다. 이 해전의 승리로 이집트와 시리아 해군은 항구에 대기하게 되었고 미국이 제공한 보급품의 96%를 수송한 지중해 수송로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홍해에서는 상황이 달라 엘리앗 항을 통해서 석유를 보급받고 이스라엘 군은 배치된 미사일 보트가 부족하여 이집트의 봉쇄를 돌파하지는 못했다. 양국 해군이 신경전을 벌이는 중에 이스라엘은 고속정을 사용해서 해군 특공대를 투입 항만에 기습공격을 시도했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아랍 제국의 참전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는 재정적인 지원을 담당했으며 모로코는 3개 연대를 파견했다. 팔레스타인 에서도 1개 사단을 구성했고 [각주:8] 파키스탄은 인도와의 내전에서 단련된 16명의 항공기 조종사를 파견했다. 리비야는 미라쥬 전투기와 10억달러 상당의 무기를 1971~73년간 이집트에 공여했으며 알제리도 자국 공군과 기갑연대를 파견했다. 튀니지는 1,000여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나일지역에 방위군을 구성했으며 수단도 3,500명을 파견한 바 있다. 우간다의 이디 아민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우간다 군을 파병하겠다고 선언했고 쿠바는 1,500명의 병력과 헬기조종사들을 파견했다. [각주: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