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4차 중동전쟁, 2. 전쟁전야

구름위 2013. 6. 12.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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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습작전


73년 10월 5일의 Aman첩보 보고서.
전쟁발생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첩보사의 가장 큰 수치.


이스라엘 군의 첩보 업무를 총괄하는 "아만(Aman)" 위원회는 당시 두가지 가정에 기초해서 전쟁 징후를 판단하고 있었다.

첫째, 시리아는 이집트가 전쟁을 벌이지 않는 이상 단독으로는 전쟁을 개시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를 노리고 있지만, 다음의 조건이 갖추어져야 전쟁에 돌입할 것이다.
  1. 소련이 이집트 공군에 이스라엘을 상대할 수준의 전폭기를 제공한다.
  2. 이스라엘 군이 폭격할 경우 이에 보복할 수 있는 스커드 미사일을 제공한다.


4차 중동전의 발발이 임박한 시점에서 소련이 아직 전폭기를 제공하지 않았고 스커드 미사일은 8월 중순에 막 도착했을 뿐이었으며 이집트 지상요원의 훈련에만도 4개월이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아만은 이집트의 전쟁가능성을 부인했다. 후자의 가정 즉, 이집트의 전략적 상황에 대한 가정인 "대조건(the concept)"의 바탕이 되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이집트 고위 정보통으로만 알려져 있었고, 이 정보는 이스라엘 첩보부서에 강한 편견을 심어주어 다른 전쟁발발 징후들을 외면하게 했다. 나중에 영국의 이스라엘 역사가 로니 브레그만은 이 정보의 출처가 오늘날 이중스파이로 의심을 사고 있는 아쉬라프 마완(Ashraf Marwan)에게서 제공된 것이라고 주장한바 있다. [각주:1]

이집트도 오해를 더욱 부채질 했다. 당시 이스라엘과 미국은 소련 군사고문단의 추방으로 이집트 군의 효율성이 저하되었다고 판단했는데, 이집트는 자국군이 새로 도입한 소련제 신형장비들의 정비체제에 문제가 발생했으며, 예비부품과 조작요원 확보에도 어려움을 겪고있다는 일련의 정보를 흘렸다. 게다가 이집트가 대 이스라엘 강경발언을 내놓는 것은 나세르 시절부터 계속되어온 일이었기 때문에 사다트의 전쟁위협은 습관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다. 또, 사다트는 비교적 무명인데다가 눈에 띄는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도 아니었기에 이스라엘은 이집트가 당장 위험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집트 군은 73년 5월과 8월에 국경지역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시행했으며 이스라엘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경계태세를 강화하고 군을 동원하느라 매번 천만 달러에 가까운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고 있었다.


욤키프르 1주일 전에, 이집트군은 7일 예정으로 수에즈 운하 부근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했으며 이스라엘 첩보부는 이집트 군이 국경지역으로 대대적인 병력이동을 실시하고 있는데도 훈련의 일부로만 판단하고 있었다. 시리아 군도 국경에서 활동을 증가시켰지만 여전히 이스라엘 첩보부는 소련의 무기공급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상 이집트와 시리아가 연쇄적인 공격준비에 들어가지 않으리라 믿고있을 뿐이었다.

욤키프르는 유대교의 "속죄절"로 중요한 절기이며 1년중 가장 성스러운 날로, 태양력 9월이나 10월(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음력을 사용한다.) 10일에 유태인들은 회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서 특별히 양을 잡아 희생제를 드리는 의식을 거행했다. 고대에는 성막의 지성소에 대제사장이 출입할 수 있던 이 특별한 날은 이스라엘 전체가 정지되는 날이었다. 보수파 유대인들은 불이나 전기를 사용하지 않고 통화도 삼가하며 도로에 자동차도 운행하지 않는 상태에서 요리도 하지 않는, 하다못해 엘리베이터 버튼도 누르지 않는 이 "거룩한 안식"의 날은 전략적으로 기습공격에 가장 좋은 날이었다. 많은 군인들이 군사시설을 떠나 집에서 명절을 지키기 위하여 귀향해 있었고 대부분의 부대는 소집해제된 상태였다. 게다가 이 시기는 무슬림의 가장 중요한 절기이며 대부분의 무슬림 병사들이 금식하는 라마단과도 가까웠으므로 더욱 경계태세는 허술해져 있었다.


한편, 아랍측의 참전요청을 거부한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9월 25일 밤, 극비리에 텔아비브에 들러 이스라엘 수상 골다 메이어에게 "사다트와 (시리아 대통령)아사드를 2주 전에 알렉산드리아에 만났을 때, 아랍 지도자들 간의 상호 견제를 피하기 위해 전부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으며 아마도 그들은 요르단이 공격계획에 동참해주길 바랬다"고 귀뜸했다. [각주:2] 골다 메이어는 "이집트가 참전하지 않더라도 시리아가 전쟁을 시작할까요?"라고 반문했고 후세인은 그렇지는 않지만 "내 생각에는 (이집트가) 협조하고 있는 것 같다" [각주:3] 그러나 이런 최고위 첩보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첩보부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Aman은 후세인 국왕이 알고있는 것을 모두 말한 것은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9월 이후, 신빙성 있는 전쟁의 첩보만해도 11건을 넘었다. 그러나 (이집트 첩보부 모사드 국장) 즈바이 자미르(Zvi Zamir)는 여전히 전쟁이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했으며 후세인 국왕의 정보에도 그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각주:4] 나중에야 자미르는 '우리는 단순히 아랍이 전쟁을 시작할리 없다고 믿었다'고 회상한다. [각주:5]



Aman의 최고 극비문서, 6시간 30분 뒤에 전쟁이 발생할 것을 내용으로 한다.

하지만 후세인의 진지한 태도는 마침내 자미르가 개인적으로 유럽으로 건너가 10월 5일~6일밤 극비 면담을 갖게 했다. 이 자리에서 마완은 그에게 시리아와 이집트의 연합공격이 임박했음을 알려주었고 이 정보는 결정적이었다. 이미 다른 곳에서도 적색 경계경보가 점멸하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최고 사령부는 행동을 개시했다. 공격 개시 몇시간 전에 이스라엘 예비군에게 부분적인 비상동원령이 선포되었다. [각주:6]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이나 회당에서 대기중인데다가 도로와 통신회선이 비어있기 때문에 동원령의 시행은 평소보다 쉬웠다.




선제공격 포기

당시 이스라엘의 기본전략은 전쟁이 임박할 경우 이스라엘 정보부가 늦어도 아랍측 공격개시 48시간 전에 정보를 입수한다는 가정하에 예방적 선제공격을 실시하기로 되어 있었다.  개전까지 6시간을 남겨둔 욤키프르 아침 8시 5분, 이스라엘 수상 골다 메이어와 국방상 모세 다얀, 참모총장 다비드 엘라자르는 최종회의를 갖게 된다. 다얀은 전쟁이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라는 말로 회의를 시작했고 엘라자르는 선제공격을 실시하기로 한다면 시리아에 대해 정오에 비행장을 공격하고 미사일 기지는 오후 3시, 지상군에 대한 공격을 오후 5시에 시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다비드 엘라자르 참모총장. 4차중동전쟁에서 초기의 혼란에 책임을 지고 사임한다.

"설명이 끝나자, 수상은 잠시 주저했지만 곧 명확한 결론을 내렸다. 선제공격은 없다. 이스라엘은 아마도 곧 미국의 지원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고, 선제공격을 시작하게 되면 전쟁의 책임 문제로 비난을 받게 될 것을 우려한 수상은 '만약 우리가 먼저 공격한다면 우리는 다른 국가들에게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없을겁니다'라고 말했다" [각주:7] 아랍의 석유 금수조치와 불매운동을 우려할 유럽 국가들은 이스라엘 군수품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오직 미국에만 군사적 지원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며 {선제공격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메이어는 선제공격을 실시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미 안보담당 보좌관 헨리 키신저는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메세지를 보내왔다 [각주:8]

이 결정은 이스라엘에게 초기 피해를 키우게 되었지만 적어도 수습단계로 한정한다면 이 결정은 현명한 것이었다. 10월 6일, 전쟁발발과 함께 골다 메이어는 각국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아랍연맹이 이스라엘의 항만을 봉쇄하고 이스라엘에게 군수물자와 보급품을 지원하는 어떤 국가에 대해서도 석유수출을 금지하겠다고 발표하자 미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이스라엘의 지원요청을 외면한다.



벤구리온 공항에 착륙한 C-5 갤럭시 수송기에 M-60 패튼 전차가 하역되고 있다.

민간항공사들에게도 협조를 요청했으나 국립항공사 El Al을 제외한 모든 항공사들은 전후 발생할 아랍의 보복을 우려하여 거절했고 아랍이 바다와 하늘을 봉쇄한 상황에서 미국은 10월 12일부터 니켈 그라스 작전을 개시한다. 미국은 항공수송으로 탱크, 야포, 탄약을 이스라엘에 공수할 준비를 갖추었지만 유럽 전역이 공항이나 항구의 사용을 거절했기에 작전은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포르투갈이 Lajes공항 1개소에 한해서 이착륙을 허가해주었고 이곳을 거점으로 Lajes - Ben Gurion간에 니켈 그라스 작전이 진행되었다. 공중호위는 미 제6함대 소속의 함재기들과 이스라엘 공군이 담당했고 공항에 하역된 물자는 도색을 변경하기도 전에 동원인력에 의하여 즉시 최전선으로 급파되었다. 36기의 팬텀 전폭기를 포함하여 22,325톤 분량의 군용장비가 이스라엘에 전달되었고 작전은 11월 14일에 끝났다. 이 작전으로 이스라엘이 입은 손실이 즉시 대체되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이스라엘 군은 보다 빠르게 병력을 증강 배치할 수 있었다. [각주:9]


골다 메이어와 닉슨.
닉슨 바로 뒤에 있는 인물이 헨리 키신저. 73/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