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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이 전역 작전도 (10월 6일~15일) 확대 버전은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6/68/1973_sinai_war_maps.jpg
와신상담
3자 중동전쟁의 패배는 이집트에게 1차 중동전이나 2차 중동전의 패배와는 충격의 강도가 달랐다. 1차 중동전의 이집트 군은 현대적인 군대라기 보다 국왕의 정권을 지키기 위한 군대였다. 2차 중동전의 패배도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하여 패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군사적인 패배는 외교적인 승리로 상쇄되었다. 게다가 예맨 내전에서도 만족할만한 작전 수행능력을 보여준 이집트 군은 아랍 최강의 군대로 위풍당당했다.
그런 이집트 군이 개전 첫날 450대중 350대의 전투기가 파괴되면서 4일만에 괴멸된 6일전쟁의 패배는 과거와는 달리, 국가적 트라우마가 되는 문제였다. 대통령 나세르는 사퇴 성명을 내었고 청문회와 재판을 통해 패전의 원인을 찾는중에 총사령관 아메르 원수는 재판에 회부되기 전에 자살했다. 사다트 정권하에서도 계속된 숙군작업에서 대령 이상의 장교 800명이 퇴역시키고 이집트 군을 정치적 군대에서 실질적인 군대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각주:1]
아흐마드 이스마일 알리 (Ahmad Isma'il Ali) [각주:2] 를 비롯한 이집트 군의 수뇌부는 6일전쟁과 소모전의 패배를 인정하고 이스라엘군과 이집트군의 장단점을 철저하고 엄격하게 분석, 평가했다. 이집트 군은 자군의 문제점을 첨단기술의 활용능력 부족 [각주:3] [각주:4] 과 자국의 문화에 맞는 군사적 담론 형성 실패에서 찾고 소련식 육군교리의 도입 [각주:5] 과 재해석, 민간기술인력의 적극적인 도입 [각주:6] 으로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오는 것은 무기가 아니라 인적요소, 즉 '전사의 능력'에 의한다" [각주:7] 는 신념하에 이집트 군을 재편한다.
또한 이스라엘 군이 기동전과 공군력에서 우위에 있음을 인정한 이집트 수뇌부는 이스라엘의 방법대로 따라가기 보다 자신들의 강점을 살리는 대책을 강구한다.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 공군은 개전과 함께 제공권을 장악하여 전쟁내내 아랍군을 마음껏 유린했고, 이한 공군력 격차는 소모전 기간에도 더욱 두드러졌다. 이집트는 소련으로 부터 제공받은 지대공 미사일 기지를 휴전선 부근에 조밀하게 배치하여 더 이상 이스라엘 공군이 상대할 수 없을만큼 강대한 방어선을 형성하여 공중전 능력이 현저하게 부족한 공군력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위험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방위예산의 상당부분을 투자해 중동 최강의 공군을 구축했지만 1대당 6~7발씩 쏟아지는 SA-6 지대공 미사일과 SA-7 보병용 견착식 지대공 미사일, ZSU-23-4 레이더 조준 자주기관포 화망앞에서는 접근조차 불가능했고 이스라엘 공군은 개전 100시간 만에 50기 이상의 피해를 입는다.
SA-6 Gainful |
새거 대전차 유도미사일과 그 조종기. 잠망경 장치에 의해서 조준, 스틱으로 유도한다. |
SA-7 Grail 욤키프르 전쟁 당시 이집트 군이 발사한 미사일의 총 수는 당시 미국이 보유한 지대공 미사일 총량보다 많았다. [각주:8] |
또, 이스라엘 기갑부대를 상대하기 위해 소부대 단위의 즉각적인 대응력이 부족한 이집트 군이 기동전으로 맞서기 보다는 일단 운하를 도하하면 의식적으로 기동전을 회피하고 보병과 포병에 의한 대전차 공격으로 기갑부대를 처리하게 했으며 이를 위해 4년동안 새거 대전차미사일 부대원을 매일같이 훈련시켜 반사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다. [각주:9]
무엇보다 중점을 둔 것은 바 레브 라인의 방어를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돌파할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18m 높이의 장벽을 구축해두었고 모래로 된 이 구조물은 충격을 자연스럽게 흡수해서 중포의 집중포격도 무력화시켰다. 원래 이집트 공병대는 통로 확보를 위해 폭발물을 사용하려고 했지만 한 젊은 장교가 고압 물펌프를 사용하자는 견해를 내놓으면서 계획은 급전진했다. 수차례의 실험끝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자 이집트는 독일에서 몇대의 고압 물펌프를 수입한다.
공병은 도하작전의 성공을 위해 4년동안 매일 두번씩 교량 부속품을 조립, 분해했고 실제 상황과 최대한 유사한 환경에서 훈련하기 위해 실제 목표물과 비슷한 모형으로 훈련을 거듭해서 샤즐리 장군에 의하면 이집트 육군이 훈련한 것은 전체 예행연습만 35회였고 소부대 훈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각주:10]
반복훈련과 치밀한 작전 수립으로 이집트군 수뇌부는 만월 작전의 초반부 도하작전을 위한 사원의 첨탑(High Minerets) 계획을 다듬었고 철저한 비밀 유지속에 계획이 수립되고 일단 작전이 하달되고 목표가 주어진 뒤에는 특별한 이유 없이 하급부대에서 계획을 변경하지 못하도록 했다. [각주:11]
운하를 도하하며
1973년 10월 6일 오후 2시 5분 수에즈.
이집트 군의 최신예 MiG-21MF 전폭기(사진의 기체는 폴란드 공군)
이집트 공군의 MiG-21 전폭기들이 시나이 반도로 날아가고 일제포화가 운하 건너편 이스라엘 군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각주:12] 그와 함께 북부전선에서도 시리아가 기습공격을 개시하여 수천문의 야포, 박격포가 불을 뿜고 200여대의 항공기가 이스라엘군의 진지를 공습했다. 최초의 53분동안 이집트 군은 1,850문의 야포를 동원하여 10,500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이스라엘의 최전선 지휘소, 야포진지, 전자전 센터, 통신소, 항공기지들은 큰 피해를 입었고 이스라엘은 긴급 소집을 발령한다. 제4차 중동전, 욤키프르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박격포를 메고 이집트 보병들이 수에즈 운하를 건너고 있다.
이집트 군은 개전과 동시에 사전에 준비해온 대로 포병, 보병, 공병이 완벽한 연계를 보이며 작전을 수행해 나갔다. 준비포격이 시작되고 15분 후, 8,000명의 이집트 특수부대원들이 개인용 고무보트 뒤에 장비를 실은 보트를 연결하고 불과 7분만에 도하를 완료했다. 동시에 전투공병대는 준비한 고압펌프로 수에즈 운하의 물을 발사하여 2시간 만에 바리케이드를 파괴해 버린다.
바레브 라인의 최종방어장비
이스라엘은 이 바리케이트의 돌파에 적어도 하루 반 내지 이틀이 걸리리라고 예측하던 중에 허를 찔렸고 준비했던 석유관을 이용해서 운하 수면을 화공하려고 했지만 그 전날 밤, 이집트 특공대가 송유관을 미리 파괴해둔 터였다.
이집트 공병대가 운하에 설치한 부교로 트럭이 건너오고 있다.
이집트 군의 수륙양용 장갑차가 운하를 도하하여 공격부대에 합류하여 교두보를 확대하는 동시에 공병대는 재빨리 부교를 설치하여 보병과 전차의 도하를 준비했고 그날 자정까지 20여개의 부교를 완성하여 15분마다 새 공격부대를 운하에서 출발시켰다. 작전 계획단계에서 최초의 도하작전에서만 전사자 1만명을 포함하여 사상자 25,000~35,000을 각오하고 있던 이집트 군의 전사자는 208명에 불과했고 1,200여명의 이스라엘군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그야말로 "전쟁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도하적전"이었다. [각주:13]
불패신화는 깨어지고
바레브 라인이 무력화되자 250대의 이집트 공군기의 지원하에 이집트는 전차 1,000대, 대전차화기 1,000문으로 무장한 2개 군 [각주:14] 을 투입하여 시나이 반도로 쇄도했다. 이집트 군은 보병과 포병, 기갑부대의 연계하에 시나이 반도에서 개전 첫날 약 15km를 전진하면서 점령지역을 확대하고 지대공 미사일의 방호구역 내에 전체 지역을 연결하는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집트 군 수뇌부는 작전 개시 전에 이미 이스라엘 기갑부대가 신속하게 반격해올 것을 예측하고 선봉부대를 전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보병용 대전차 화기로 무장시켜두었다. "전장에 이토록 조밀한 대전차 화력이 결집된 적이 없었다" [각주:15] 는 표현대로 3명당 1명꼴로 RPG-7 로켓포, 새거 대전차 유도 미사일를 비롯한 대전차 화기를 장비한 이집트 군은 전진한 위치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이스라엘 기갑부대를 맞을 준비를 완료했다.
한편, 이에 맞서는 이스라엘은 이미 바레브 라인의 수비부대는 수적으로 압도당했고 부다페스트(바레브 라인의 최북단) 요새를 포함한 몇몇 거점만이 포위된채로 최후의 저항을 시도하고 있었다. 예비군이 동원될때까지 가용한 자원은 18,000명의 병력과 300대의 전차 뿐이었지만 이스라엘 군은 적극적인 대응에 나선다.
불과 3개월전 퇴역한 6일전쟁의 영웅 아리엘 샤론 장군의 후임으로 이스라엘의 남부전선군 사령관에 취임한 사뮤엘 고넨 장군에게 당장 투입할 수 있는 예비 기갑전력은 멘들러 장군 휘하의 레쉐브 여단 뿐이었다.(다른 2개 여단 보다 동쪽에서 대기중이었다.)
오후 2시 30분, 레쉐브 여단 휘하의 전차중대는 6일전쟁에서 큰 효과를 보았던 전차돌격을 시도하여 과감하게 이집트 군 교두보를 향해 달려나갔다. 예상했던 이집트 기갑부대와의 조우가 없어서 안심하는 순간 급작스럽게 타오르는 선두의 M48전차.
이날 이집트 보병의 대전차 화망에 걸려든 이스라엘 군은 사각에서 전차의 취약부를 공격당해 막심한 피해를 입는다. 공격이 실패하면 후퇴, 재편성한 다음 공격을 재시도했지만 저녁이 될 무렵 레쉐브 여단의 전차 100여대는 대부분 파괴되었고 저녁 8시 다른 2개 여단이 공격태세를 갖추고 도착하여 동일한 방법으로 공격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10월 7일이 되자 멘들러 기갑연대의 보유전차 300대 중 남은 것은 절반에 불과했고 그날 저녁에 작전에 투입가능한 것은 100대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스라엘 측보다 두배나 높은 운하의 서안의 이집트 쪽 방벽은 포격에 유리한 고지를 제공하여 압도적인 이집트 포병화력은 접근중인 이스라엘 기갑부대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고 있었다.
10월 8일 사뮤엘 고넨 장군은 제162, 제143기갑연대가 추가투입되자 휘하의 가비 아미르 이스라엘 기갑연대에게 히자욘(Hizayon)의 이집트 군 진지에 반격을 명령한다. 아미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격은 속행되었고 보병의 보조없이 진격한 이스라엘 기갑부대는 발사지점을 파악하지도 못한채 대전차 화력에 무차별로 유린당하여 불과 30분만에 전차의 절반이 피해를 입고 퇴각한다. 게다가 아단 장군이 총반격을 실시하는 중에 샤론은 3개 여단 중 1개 여단만 반격에 투입하는 등 전체 병력의 집중도 엉성해서 이 작전은 훗날 "의심할 여지없는 이스라엘 군 역사상 최악의 패배"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각주:16]
그날 밤이 되어서 이집트 군의 반격은 143기갑사단에게 간신히 막혔지만 상황은 여전히 이스라엘에게 불리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8일 큰 타격을 당한 이스라엘 군을 포위섬멸하는 대신 이집트군이 최초의 계획대로 방어를 강화했다는 점이었다. 서로가 상대방이 먼저 공격하기를 기다리는 상황에서 [각주:17] 엘라자르 참모총장은 고넨으로는 상황을 감당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바 레브 장군에게 지휘를 맡겼다. 다만, 사기저하를 우려하여 사뮤엘 고넨은 남부 방면군 참모장으로 유임되었고 시나이 반도는 이집트가 유리한 상태에서 짧은 소강상태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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