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4차 중동전쟁, 4. 골란전역

구름위 2013. 6. 12.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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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0


골란 작전도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4/4a/1973_Yom_Kippur_War_-_Golan_heights_theater.jpg



골란고원 지도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en/7/78/Golan_heights_rel89.jpg


골란고원

이집트가 그러했듯이 시리아도 6일전쟁의 치욕을 설욕하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시리아는 대전차호 극복을 위한 교량전차 활용 등으로 이스라엘이 건설한 대전차호와 각종 장애물 돌파를 위한 훈련을 집중적으로 실시하면서 보병부대 전체가 거대한 대전차 장애물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구성해나갔다. 10월 2일이 되자 시리아군 정치지도부는 이스라엘 측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선전을 시작하면서 이스라엘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반격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해나갔다. 수년동안에 걸쳐서 소련 교리에 따라 공격계획을 준비한 시리아군은 전쟁개시와 동시에 제1제대로 휴전선을 돌파하고 제2제대인 보병사단과 전차여단은 초월공격을 시도하여 휴전선 전면에 걸쳐 광정면 공격을 실시하고 충분한 예비대를 준비하여 돌파할 것을 계획했다. 시리아군 지도부는 10월 8일까지는 골란고원의 이스라엘 군 대부분을 격멸할 수 있다고 예측하고 있었고 10월 7일 이후부터는 2단계 작전으로 돌파한 시리아군을 재편성하면서 이스라엘의 역습을 대비한 대전차 방어지대를 구축한 다음 이스라엘 영내로 진격하도록 되었다. 마지막으로
시리아는 이스라엘을 포위하고 있다는 전략적 이점을 활용하기 위해 이집트의 협조하에 욤키프르 단식이 끝나는 10월 6일 오후 2시를 동시공격개시 시간으로 맞춘다. 이스라엘도 항공정찰 등으로 공격징후를 예측하면서 경계태세를 증가시켰지만 이스라엘군의 2개 여단과 11개의 포대에 시리아 군은 기습의 이점을 최대한 발휘, 5개 사단, 188개 포대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10월 6일 14시 55분간에 걸친 준비포격을 실시한 뒤, 1,300대의 시리아 군 전차대의 탱크는 전차 188가 방어하는 이스라엘 측 방어선에 공세를 개시했다. [각주:1] 이스라엘의 운명을 건 절망적인 골란고원 방어전의 시작이었다.



골란고원

골란고원 전역을 감시할 수 있는 헤르몬 산의 이스라엘 측 거점 자발 알 샤이크(Jabal al Shaikh)에 헬기부대를 투입, 점령한 시리아군은 우세한 장비의 질 [각주:2], 압도적인 물량, 지대공 화망에 의한 대공방어체계 등으로 수많은 전략적 이점을 누리고 있는 상황으로, 이스라엘은 동원병력이 도착하기 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했다.


무엇보다
골란고원은 이스라엘 최고사령부에게 가장 중요한 요충지였다. 시나이 반도에서의 전투는 이스라엘의 인구밀집지역에서 상당한 거리가 있으므로 당장은 위협이 아니었지만 골란고원이 돌파당한다면 시리아군은 단숨에 티베리아스, 사페드, 하이파, 네타냐, 텔아비브 등 이스라엘 심장부로 돌입할 수 있었다. 예비병력들은 제대별 편성이나 기관총 탑재나 시간이 걸리는 포구 정렬 등의 준비과정을 모두 생략하고 장비를 수령하는 즉시 골란고원으로 달려갔고 시나이에 투입될 예정이던 동원부대도 준비가 되자마자 골란고원으로 돌려졌다.

시나이 반도의 이집트 군이 그랬듯이 시리아 군도 강력한 지대공미사일 방어체계와 대량의 대전차무기가 확보되어 있었지만 지형상의 문제와 방어전이 아닌 공세전이었기 때문에 골란 고원에서 보병의 대전차 병기는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시리아 측은 24시간 정도면 이스라엘 동원병력이 골란고원에 투입되기 시작하리라고 보고 있었으며 예상대로 15시간만에 이스라엘 측의 동원병력이 배치되기 시작했다.


남부전선의 바라크 기갑여단

개전 첫날 시리아 군은 9:1이라는 압도적 수적 우위를 활용한 파상공세로 성공을 거두었다. 전쟁전 이스라엘의 북부사령부는 골란고원에 골라니 여단, 지역여단과 제188 "바라크" 기갑여단을 배치하고 있었으며 10월 5일 시리아 군의 병력전진에 맞추어 제7기갑 여단을 이곳에 증원시켰다.
골란고원 남쪽 방어를 맡은 바라크 기갑여단은 몇시간 동안 방어체계를 활용하여 선전했지만 16시30분이 지난 시점부터 상황은 심각해져 있었다. 적전차들은 수도없이 파괴되고 있었지만 시리아 기갑부대의 양은 과거에 이스라엘이 경험하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시리아 군이 투입한 전차는 무려 600대로 이스라엘의 전차 57대는 10:1의 열세 앞에 한계에 달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모든전선에 걸친 공격으로 A-5, A-6 요새진지 간 텔 아크샤(Tel Aksha)지역에서 최초의 돌파가 이루어지자 이곳에 시리아군 제9보병사단의 주전력이 집중되며 부스터 능선 일대는 운명의 결전장이 되었다. 시리아군 선두의 도저전차와 교량전차에 모든 사격을 집중한 끝에 2km 내의 모든 교량전차가 파괴되었지만 교량전차 2대가 살아남아 헤르모니트 언덕 맞은편 A-3 요새진지 북쪽의 대전차호에 통로를 개척했고 이를 통해서 시리아군 전차 대가 돌입하기 시작했다.


 
골란 고원의 이스라엘 대전차호를 지나는 시리아 전차들. 이스라엘측 전차에 피격되어 불타고 있는 전차 1대가 버려져 있고, 시리아 군 가교전차 옆에 또 한대가 뒤집힌 채 방치되어 있다. 왼쪽에서 시리아 전차대가 방어진을 돌파하기 위해 전진하고 있다.



첫날 시리아 군은 남부축선과 쿠드네 축선을 돌파하여 2개 여단 규모의 전차 200대가 휴전선을 넘는데 성공했다. 전선이 혼재된 상황에서 바라크 여단은 혼전속에 소모되기 시작했고 여단장까지 직접 탭라인 송유관 방어에 나섰다. 야간이 되자 상황은 더욱 심각해져서 과거에 이스라엘 기갑부대는 야간전에서 우세한 입장이었지만 시리아군 신형전차들은 적외선 장비를 갖추고 있었기에 입장은 역전되었다. 암시장비가 없는 이스라엘 전차들은 조명탄과 전차소음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고 쿠드네 지역에서 통로를 건너온 시리아 전차는 100대가 넘었다. 대전차 무기를 갖춘 특수보병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이스라엘 전차들은 계속 진지를 전환하면서 쉴새없이 전투에 노출되었고 더 이상 예비대가 없는 상황에서 탄약이 떨어져가고 바라크 여단의 남은 전차는 15대에 불과한 상황에서 450여대의 전차와 휴식도 없이 교전중이었다.

고립되어 소대 단위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바라크 여단은 빨리 증원병력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즈비카 그린골드 중위도 이 시기에 나파크의 여단지휘소 부근에 도착한 인물들 중 하나였다. 바라크 기갑여단 부여단장 이스라엘리 중령은 그에게 즈비카 부대라는 호출명칭을 부여하고 송유관 도로를 따라 접근하는 적과 교전할 것을 명령한다. 50:1로 시리아군 기갑부대의 주공에 맞서게 될 즈비카 부대의 탄생이었다.

7일 새벽 1시경. 바라크 여단장 벤쇼함 대령은 보고를 통해 자신이 포위된 상태임을 깨달았다. 송유관 도로쪽으로 시리아군 전차가 몰려드는 상황에 예비대는 거의 없고 각 예하부대는 고립된 상태에서 보급이 거의 다된 상태로 싸우고 있었다. 시리아군은 이미 방어선 대부분을 돌파하여 제5보병사단의 일부부대가 제132 기계화 보병여단과 합류했고 제47독립전차여단은 동이 틀 무렵에 갈릴리 호반의 티베리아스 시가 내려다보이는 지점까지 전진한 상황이었다. 이에 시리아군 최고사령부는 돌파에 성공한 남부지역에서 전과를 확대하기 위해 제1기갑사단에 더해 제3기갑 사단의 기계회 보병여단도 투입하여 총 600대의 전차로 이스라엘 군 잔존 전차 12대가 방어하는 지역을 휩쓸어나갔다. 최후의 저항을 시도하던 바라크 부여단장 이스라엘리 중령이 직접 전차를 육탄돌격시켜서 전사하고  상황에서 공중지원을 지시하던 여단장 벤 쇼햄 대령이 기관총탄에 전사하면서 바라크 여단은 지휘부가 무너진다.

"라피드 갭(Rafic Gap)을 통과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송유관 도로(Tapline Road)에 시리아군은 골란고원을 돌파하여 사단 사령부가 있는 교통의 요지 나파(Nafah)로 바로 진격할 수 있었었다. [각주:3] 나파로 몰려드는 시리아 전차대에 맞서 사단 전술지휘소 요원들까지 투입되어 최후의 방어선에서 저항을 하는 중에 탄약이 떨어지고 더이상 저항할 수단이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나타난 것은 약 20시간 전 이 기지를 출발하여 송유관 도로에서 밤새도록 싸워온 즈비카 그린골드와 오리 대령의 제79동원기갑여단이었다. 즈비카는 이때까지 "시리아 기갑부대와 홀로, 때로는 함게 사우면서 6번이나 탱크를 갈아타면서 싸우다가 마지막 순간까지 눈부신 활약을 보였"고. [각주:4] 이 공로로 그는 전후에 Medal of Valor를 수여받았다. (이스라엘 전군에 이 훈장을 수여받은 사람은 총 32명 뿐이며, 욤-키프르 전쟁에서 이를 수상한 사람은 8명 뿐이다.)


이 부분의 상세한 내용은 즈비카 그린골드 참고


이스라엘 군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골란고원 남부는 시리아군에게 돌파되어 활짝 개방되다시피했고 나파의 북부사령부가 위협받고 있었다. 다얀 국방상은 이곳에 막 편성된 제14펠레드 동원기갑사단을 투입하는 한편, 방어선을 후퇴할 준비를 해두고 7일부터 공군력을 총동원해서 시리아 군의 공격을 저지해야 한다고 골다 메이어 수상에게 설명했다. 골다 메이어 수상의 일생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가 지나가고 있었다.


눈물의 계곡

한편 북부전선을 방어하는 제7기갑여단은 비교적 수월하게 시리아군을 저지하고 있었다. 밤새도록 부스터 능선과 헤르모니트 언덕 사이 "눈물의 계곡(Valley of Tears)"에서 시리아군의 진격을 저지해온 제7기갑여단은 절대적인 수적 열세 속에서도 적절한 예비대 활용으로 끈질기게 저항을 계속했다. 10월 6일 밤부터 교전에 들어간 제7기갑여단은 첫날 야간에 70여대의 시리아 전차를 격파했지만 시리아 군은 최정예 제3기갑사단을 합류시키고 병력을 재차 증강하여 7일 밤 10시 대규모 포병사격과 함께 400대 이상의 전차를 투입하여 40여대의 이스라엘 전차가 방어하는 눈물의 계곡으로 쇄도했다.




고지대에 방어진을 친 이스라엘 전차대는 카할리니 중령이 이끄는 제 77 전차대대. 고지대를 향해 돌진하는 시리아 군을 맞아 카할리니 대대의 센츄리온 전차들은 유리한 사격진지에서 신중히 조준하여 전진하는 시리아 전차들을 저격해 나갔다. 야시장비 없이 시리아군 포병의 공격과 대전차호를 건너온 보병들의 공격을 받으며 필사의 저항을 계속한 끝에 전투는 8일 새벽 1시에 절정을 맞이했다가 잠잠해졌다. 그날 새벽. 눈물의 계곡이 밝아오자 제7기갑여단은 자신들이 간밤에 130여대의 시리아 전차를 격파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제7보병사단, 제3기갑사단, 아사드 공화국 수비대 전차여단을 비롯하여 모든 예비대를 동원한 시리아 군의 공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리아 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계속 공격의 강도를 확대했고 방사포를 포함한 시리아군의 집중적인 공격과 MiG-17을 포함한 시리아 공군의 지원까지 합쳐서 타격하는 상황에서 전투력이 많이 소진된 제7기갑여단은 최후의 저항을 준비했다. 접근해오는 100여대의 시리아 전차를 정교한 사격술로 저지하고 있었지만 중과부적으로 이스라엘군의 방어망은 흔들리고 있었다. 포병의 탄막사격을 벗어난 상태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제77전차대대의 카할리니 중령은 역습부대로 편성되어 포격이 멎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포격이 멎은후, 시리아 군이 고지를 점령하고 한차례 교전을 벌인끝에 물러나자 카할리니 중령은 전속력을 고지를 향해 돌격하도록 명령하고 간신히 정상에 오른 순간 직사거리에서 수대의 시리아 군 전차를 발견하게 된다. 불과 몇초 차이로 고지를 선점한 카할리니는 표적도 확인하지 않은채 포격을 명령했고 간신히 부스터 능선을 다시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이스라엘 군의 영국제 센츄리온 전차



마지막 남은 15대의 이스라엘 전차는 360도를 회전하며 혼재된 상태에서 최후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탄약은 소진되어 각 전차당 3~4발만이 남았고
기관총을 붙잡고 최후의 각오를 다지던 순간, 반대측 고지에서 갑작스럽게 센츄리온과 M60전차들이 등장하며 맹렬한 포격을 가해왔다. 바라크 여단의 잔여 전차 11대였다. 이들은 맹렬한 기세로 이동 포격을 가하며 덤벼들었고 예봉이 꺾인 시리아군은 썰물같이 후퇴했다. 포성이 멎은 눈물의 계곡에는 260대의 시리아 전차와 수백대의 장갑차, 차량들이 널려 있었다. 라풀 사단장의 침착한 목소리가 제7기갑여단의 무전망에 흘러나왔다. "여러분은 이스라엘 국민들을 구했습니다."



사령부의 판단미스로 축차투입된 병력은 급속히 소모되었지만 골란고원의 전세는 이스라엘 예비군이 증원이 본격화된 10월 8일 부터 역전되기 시작했다.고 시리아 군은 골란고원 남부에서 대규모 돌파구를 형성했고 제17동원기갑여단의 선도부대 투입이 30분만 늦었더라도 요르단 강까지 진출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시리아 군은 계속 전진을 지연해나갔다. 시리아군 제5보병사단과 제132기계화 보병여단, 제47독립전차여단이 우세한 전력을 확보하고도 8일 전진을 멈추었던 이유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무래도 시리아 군이 교리에 너무 충실해서 급변하는 상황에 따르지 못했거나 전술원칙에 너무 사로잡혀서 상황판단이 늦었다는 설명이 일반적이다. 시리아군은 확보하도록 명령받은 선까지 도달하게 되면 이스라엘 군의 방어유무에 관계없이 작전계획에 의거해서 후속제대가 초월공격을 시작할때까지 기다리도록 명령을 받고 있었으며 최고사령부는 북부지역에서 돌파가 힘든데 반해서 상대적으로 남부에서 용이하게 돌파가 이루어진 것을 "이스라엘의 함정"으로 의심한 것일 수 있다.
아무튼 전쟁발발 100시간이 지나면서 전쟁의 주도권은 이스라엘에게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