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4차 중동전쟁, 6. 종전으로 가는 길

구름위 2013. 6. 12.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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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제3군, 포위되다.

10월 22일,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는 미국과 소련의 주도하에 결의안 338호에서 즉각적인 정전을 요구했다. 결의안은 "현시점에서 전투중인 모든 국가, 분파들"에게 "모든 군사적 행동을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12시간 후인 이스라엘 시간 저녁 6:52분에 [각주:1] 위성을 통한 감시가 불가능해지는 일몰 시점에 정전선을 확인하고 휴전이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었다. [각주:2] 정전협정이 발호되기 전,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골다 메이어에게 "(비행기로) 그쪽에 가고있는 밤동안, 아무것도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워싱턴은 내일 정오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알렸다. [각주:3]





정전이 이루어진 시점에서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공식적으로 전투행동을 중단했다 [각주:4] 당시 이스라엘 군은 카이로와 수에즈를 열결하는 마지막 도로를 겨우 수백미터 남겨놓은 지점까지 진출해 있었다. 그런데 밤중에 이집트가 정전협정을 위반하고 9대의 이스라엘 탱크를 파괴하자 다비드 엘라자르 참모총장은 남쪽에 포위되어 고립된 이집트 군에 대한 공격을 요청했고 다얀 국방상이 승인했다. [각주:5] 이스라엘 군은 남쪽으로 전진하여 도로를 점령하고 수에즈 운하 동쪽에 위치한 이집트 제3군을 완전히 포위했다.



포위된 이집트 3군에게 음료수와 식료품이 전달되고 있다.

10월 23일, 정찰기로 이스라엘 군이 남쪽을 향하여 이동중인 것을 발견하자 소련은 정전협정 위반에 대해서 항의햇다. 헨리 키신저가 전화로 골다 메이어에게 "실수로 정전협정 위반이 발생한 것 같소. 사막에 선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자 골다 메이어는 "이제부터 알려줄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완전히 보급이 차단당한채 사막에서 복수심에 불타는 이스라엘 군에게 포위되어 이집트 제3군의 운명이 경각에 달한 시점에서 [각주:6]
키신저는 미국이 이집트에게 큰 은혜를 베풀 찬스가 왔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이집트를 소련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빼낼 수 있다고 보고 이스라엘에게 강력한 외교적 압력을 행사하는 동시에 이집트와의 협상을 중제에 나선 끝에 이스라엘 군은 이집트 3군을 더이상 압박하지 않고 22일의 종전협정선으로 후퇴하면서 물과 식량 의약품 같은 비군사적 보급품을 제공하는데 동의했다. 이스라엘 대사 심차 디니츠(Simcha Dinitz)와의 전화 통화에서 키신저는 이집트 제3군을 괴멸시키는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선택(is an option that does not exist)라고 조언했다. [각주:7]




핵전쟁 위기

정전협정이 이루어지고, 미국-이집트-이스라엘 간의 협상이 진행되던 시기, 브레즈네프는 미국의 닉슨 대통령에서 10월 24일 00시에 편지를 보낸다. 브레즈네프는 미국과 소련이 상호간에 정전협정을 보증하는데 협력하자고 제안하면서 "우리와 함께 이 문제에 대응해 나가는 것이 불가능할 경우에, 우리는 일방적으로 '적절한' 수단을 동원하여 이스라엘이 이 지역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유지하는 것을 막겠다" [각주:8] 면서 소련이 이집트 측에서 참전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소련은 이와 함께 중동에 배치할 7개 공수 사단을 동원하고 소련 남쪽에 공정단 사령부를 설치했다. 수개 비행대에도 소집이 발령되었고 "소련은 유고슬라비아에 1개 사단과 항공대를 배치하여 이 지역에 공수부대를 투입할 준비를 갖추" [각주:9] 었으며 7개 수륙양용정과 4만명의 해병을 지중해에 배치했다.

이 메세지가 도착했을 때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시달리던 닉슨은 자고 있었다. 키신저는 바로 슐레진저 국방장관, 윌리엄 콜비 CIA국장, 백악관 대변인 알렉산더 헤이그를 불러 고위층 회의를 열고 단독적으로 이 사건을 처리했다.
"키신저는 헤이그에게 닉슨이 깨어났는지를 물었고 헤이그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들은 닉슨이 만약 이 일에 관여한 다면 그가 정상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각주:10]
회의를 마치고 이들은 닉슨의 이름으로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장에게 답신을 보내며 동시에 데프콘을 4에서 3으로 상향조정한 다음 사다트에게도 메세지를 보내어 소련의 참전을 철회하라고 요구하면서 만약 소련이 참전한다면 미국도 이 지역에 참전하겠다고 경고했다. [각주:11]

소련도 미국이 방어태세를 강화한 것을 확인했고 이 답신에 대해 어떻게 응해야 할지를 놓고 크레믈린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기술위원장 니콜라이 포드고르니(Nikolai Podgorny)는 "미국 인들이 이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인정했고 군부의 알렉세이 코쉬킨(Alexei Kosygin)은 "이집트와 시리아 때문에 이곳에서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이성적인 대안이 아니다."는 의견을 내놓았으며 KGB 국장 유리 안드로포프(Yuri Andropov) 도 "3차대전을 벌여서는 안된다."고 거들었다. [각주:12]
마침내 소련은 아랍이 이 지역에서 패배했음을 인정하고 미국 측의 회신에 대해 브레즈네프는 '미국은 너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며 대화할 용의가 충분히 있다'고 미국에 회답했다. [각주:13] 다음날 아침 이집트는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소련에게 요청한 참전제안을 철회하였고 이리하여 양대 강대국의 전면전쟁으로 확대될 위기가 멈추었다.



최후의 북부전선

어느 정도 군을 추스린 시리아군은 10월 23일로 예정된 대규모 반격작전을 준비했다. 시리아군 5개 사단과 이라크군 2개 사단, 요르단을 포함한 아랍 각지의 연합군이 소련에서 보내준 신형 장비들을 수령하면서 아랍군의 사기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공격이 시작되기 바로 전날, 국제연합은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동의하에 다시금 정전을 명령했다. "이집트가 금요일(10월 22일)에 정전에 들어가자 아사드는 딜레마에 빠졌다.
정전협정은 그에게 의미가 없었지만 그에 담긴 의미는 무시될 것이 아니었다. 비록 몇몇 장군들은 여전히 공격을 지지했고 이집트도 곧 전쟁을 재개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럴 경우 이스라엘은 이집트 제3군을 괴멸 시킬 것이었다. 그럴 경우 이집트는 시리아에 협력하지 않게 될 것이고 북부로 몰려들 이스라엘 군을 시리아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면 아마도 시리아의 산업기반은 파괴되고 다마스커스까지 위험에 노출될 수 있었다. [각주:14]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의 긴장이 미국의 중재로 완화된 것을 알자, 아사드 대통령은 결국 공세를 포기하고 10월 23일, 시리아는 정전협정을 받아들였으며 이라크도 자국군을 회군했다.






정전 협정 이후


휴전협정 당시, 이스라엘의 점령지역과 상실지역 

10월 24일, 안보리는 결의안 338호에 이어 결의안 339호를 통해 다시금 이 지역에서 모든 세력에게 정전을 명령했고 10월 26일, 모든 조직적인 전투가 중지되었다. 10월 26일 모든 전선에서 포성이 멎었지만 우발적인 충돌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고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집트 제3군은 이스라엘의 협조하에 보급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키신저가 이스라엘에게 국제연합의 철군안을 받아들이도록 종용하는 상황에서 철수가 시작되기 전에 이집트의 국방장관 하페즈 이스마일은 키신저를 통해서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직접 대화할 용의가 있으며 이스라엘이  있는 이집트 제 3군에게 비군사적인 보급을 허용한다면 종전을 수용하겠다는 놀라운 메세지를 전해왔다.

10월 28일, 이스라엘의 야론 야리브 장군과 무하마드 알 카니 알 가마시(Muhammad al-Ghani al-Gamasy) 사이에 회담이 개최되었고 이 자리에서 10월 28일, 이스라엘군의 아론 야리브 소장과 이집트 군의 무하마드 알 가니 알 가마시 소장이 만났고 키신저는 마침내 미국이 사다트와 대화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국제연합이 이스라엘 군을 대신해서 비군사적 보급을 전달했고 양측은 전쟁포로를 교환한 후, 제네바 협정에 의하여 종전협정을 체결했다. 이듬해 1월 18일, 이스라엘 군은 수에즈 운하 동편으로 철수하기 시작했고 3월 5일에는 수에즈 운하 서쪽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각주:15]

시리아 방면에서도 키신저의 중재로 휴전 협정이 74년 5월 31일 체결되어 전쟁포로를 교환하고 이스라엘 군이 UN의 중립지대를 경계로 두고 철수했으나 이스라엘은 시리아가 제네바 협약을 위반하고 전쟁포로를 고문했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각주:16] 그러나 양측 정찰대간의 교전과 포화 교환으로 양측의 합의는 결렬되었고 이후 유엔 감시단(UNDOF, UN Disengagement and Observer Force)가 골란고원에서 평화유지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