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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항로 도전기 2. 북서항로론의 대두

구름위 2013. 6. 12.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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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버로우

상당한 희생을 치르기는 했지만 이로써 러시아와의 교역로가 개설되었다. 뇌제 이반의 치하였던 당시의 러시아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스웨덴 제국에 의해 서방 진출이 저지되고 있었고 발트해의 교역로는 한자동맹의 통제하에 있었다. 이들의 방해가 없는 신 교역로는 영국과 러시아 모두에게 이익이었고 당시에도 귀중품이었던 모피를 수입하게 되자 이에 고무된 모험회사의 투자가들은 3년뒤인 1556년, 스티븐 버로우(Steven Borough)의 지휘하에 새로운 북방항로 탐험대를 파견한다.

챈슬러의 항해사로 저번 항해에 참가했던 스티븐 버로우가 지휘하는 서치드리프트(Serchthrift) 호를 환송하기 위해 80세의 고령이 된 영국 최고의 도항사 세바스티앙 카보트가 그레이브샌드항까지 찾아와 직접 배를 둘러보고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3년전처럼 이번에도 험난한 항해가 예상되었지만 서치드리프트호는 활기차게 빙해를 뚫으며 노바야젬랴로 나아갔다.

지나쳐가는 고래가 배보다 클 때도 있을 정도로 작은 서치드리프트 호에게는 험난한 항해였지만 버로우는 노바야젬랴와 러시아 본토 사이를 징검다리처럼 연결하고 있는 바이가치 섬을 발견했고 이곳을 통해 얼음으로 갇혀있는 카라 해로 들어설 수 있음을 확인했다. 북극권에서 항해가 가능한 시간은 너무 짧았기에 그 시점에서 주변을 탐사하고 있던 탐험대는 우연히 사모예드 인들과 접촉하게 된다.

시베리아의 툰드라 지대에 거주하는 사모예드족은 호전적인 부족은 아니었지만 버로우는 이들의 생활과 종교를 관찰하고는 의식에 사용되는 우상이 "일찌기 본적이 없을 정도로 최악"이며 야만적이라고 보고 교역의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다. 이미 겨울이 다가오기 시작하여 유빙이 밀어닥치기 시작하자 버로우는 뱃머리를 돌려 아르항겔스크 부근의 북해에서 겨울을 보냈고 이듬해 봄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버로우의 보고는 스폰서들에게는 실망스러운 것으로 더 이상 전진한다 해도 교역이 가능할지는 의문이었다. 백해를 경유하는 러시아와의 교역이 순조로운 상황에서 상인들은 일단 더이상의 모험에 나서는 대신에 모험회사(Company of Merchant Adventurers to New Lands)를 모스크비 회사(Company of Moskvy)로 바꾸어 러시아와의 교역권을 독점한데 만족하면서 북동항로파와 북서항로파의 논쟁을 관망하기로 한다.[각주:1]


1582년경 영국에서 만들어진 북극지도 카타이로의 항로가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지도 제작자들은 북극 주변의 바다에서 항해가 가능하며 북아메리카 상단(왼쪽)에서 태평양까지 항해가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 같다.

북동항로 대 북서항로

북동항로파의 대표가 존 디라면 북서항로파에서 가장 열성적이었던 인물은 월러 톨리의 이부형제 험프리 길버트 경이었다.

대담성과 학력, 천부적인 기민성을 겸비한 젠트리의 기수, 험프리 길버트는 북동항로 파에 대항하여 물샐틈없는 논전을 벌이며 북서항로의 가능성을 옹호했다. 당시 길버트가 주장한 북서항로론의 주요 논지는 이러했다.

1. 북동항로의 존재는 인정할 수 있지만 항해가 곤란하고 북방 깊숙히까지 진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2. 반면에 북서항로는 일단 래브라도를 우회하기만 하면 해안선은 남쪽으로 뻗어있고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아니안 해협이라는 수로로 나갈 수 있다.

그가 제시하는 항로는 오늘날의 허드슨 해협을 지나 허드슨 만을 통해 내륙 수로로 진출하여 시애틀까지 간다는 것으로 이렇게 항해할 수 있다면 여정은 대부분 영국과 같은 위도대의 해상을 지나는 것이 된다. 그의 최대 논적은 러시아까지 도항하고 육상으로 카스피해까지 횡단했던 엔소니 젠킨슨으로 1565년 겨울 두사람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전에서 극지항로 문제를 둘러싼 논전을 벌이게 된다.

 

북방항로 논전

이 논전이 정확히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10년후 길버트는 "카타이로 가는 새항로의 발견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당시의 논전의 진행을 기록하고 있다. 논란 당시에 길버트나 젠킨슨는 북동항로건 북서항로건 실제로 항해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양측은 모두 당시에 입수 가능했던 자료들에 의존해서 논쟁을 이어나갔다.

젠킨슨은 북동항로를 꽤 전진한 후 그 앞에 다시 열려있는 바다를 보았다는 타타르인 어부와 실제로 이야기를 나눈 경험을 들어 북동항로를 옹호했다. 그에 대하여 길버트는 "타타르인은 미개한 민족이며 항해 기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더우기 해상에서 32km이상이나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이에 젠킨슨은 바렌츠 해에서 일각수의 뿔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거론했는데 당시 일각수는 카타이에 산다고 알려져 있었으므로 이 뿔은 북동항로를 따라서 바렌츠 해로 흘러들어온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도 길버트는 뿔이라면 유럽에 닿기 훨씬 전에 가라앉았을 것이라면서 중세의 저명한 권위자는 스칸디나비아에 아시누스 인디쿠스라는 일각수가 살았다는 기록을 남겼음을 들어 긴뿔을 가진 물고기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이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젠킨슨의 주장을 하나하나 충분히 논박한 뒤 길버트는 플리니우스의 말을 인용해서 게르마니아의 해안에 태풍 때문에 인도인이 표착했던 기록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 1160년 인도인이 같은 해안에 표착했다는 다른 기록을 거론하면서 인도에서 사용되는 작은 배로는 역풍이나 거친 바다를 지나 희망봉을 돌아서 올 수는 없었을 것이라며 이들이 북서항로를 이용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 외에 노바야젬랴를 넘어 카라해를 통해 북동항로에 접근하려던 시도가 모두 실패해온 사례를 거론해가면서 북동항로의 난점들을 차례차례 열거한뒤 길버트는 북극권을 직접 통과하는 항로를 비롯해서 개별적인 다른 가능성도 검토하면서 최종적으로 카타이로의 실행가능한 북방항로는 오로지 북서항로 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마지막으로는 "우리들은 이들 나라의 일부에 살 수도 있고 지금 우리 왕국의 골치거리인 빈민들을 식민시킬 수도 있다. 그들은 모국에서는 곤궁 때문에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 매일처럼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있다."라면서 이들 "빈민"에게 식민지를 만들게 해서 북서항로를 항해하는 배들의 중개지로 삼고 모피나 건어물 교역의 중심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존 디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러한 착상은 아일랜드에서의 실험을 통해 훗날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등에 대한 영국의 식민정책의 기조를 이루게 된다.

북방을 통해 카타이로 가는 항로는 존재한다. 영국은 이것을 이용해야만 한다. 콜롬부스는 더욱 희미한 단서만으로 아메리카를 발견했지 않은가. 이것이 길버트가 적은 논전의 결론이 되었고 이로써 북서항로 탐사가 대세로 등극하게 된다. 사실 영국에는 이전에도 북서항로에 접근했던 항해자들이 있었고 그들의 탐사도 희망적인 관측을 보여주고 있었다.

 

북서항로의 선구자

1492년 크리스토발 콜론은 신대륙을 발견하여 인류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지만 그 전에도 신대륙에 도착했을 가능성이 있는 모험을 한 사람들은 꽤 있었다. 8세기 경에 코라틀을 타고 아이슬랜드를 발견했다는 아일랜드의 수도사 성 브랜든이나 그린랜드까지 정착한 바이킹 중 일부가 서쪽으로 진출해 이누이트들과 교역을 한 기록이 있다. 특히 레이프 에릭슨이 발견한 빈랜드가 뉴펀틀랜드 근처였을 가능성은 고고학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다.[각주:1] 하지만 14세기 부터 이어진 소빙기와 이누이트와의 대립 때문에 바이킹은 그린랜드를 포기했고 신대륙 발견의 영광은 역사의 중대한 변혁을 이루게 된 크리스토발 콜론에게 넘겨지게 된다.

이탈리아가 낳은 이 위대한 항해자는 신대륙을 발견했지만 그곳을 인도라고 착각했거나 또는 스스로와 투자자를 기만하여 에스파냐 국왕으로부터 "돈 크리스토발 콜론 대양의 제독, 인도 제국에서 발견된 섬들의 부왕 겸 총독"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받았다. 이 이야기는 유럽 각국에 퍼져나갔고 수많은 항해자들이 제2의 크리스토발 콜론을 꿈꾸었다.

카보토 부자

그 중에는 콜롬부스와 같은 제노바 출신의 항해자 지오바니 카보토가 있었다. 젊은시절 베네치아에서 활동했던 그는 1484년 영국으로 이주했고 1495년 그는 크리스토발 코론의 발견에 관한 정보와 그 항로를 추적해나갈 계획을 세운다. 이미 1480년대부터 대서양 건너편에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상이 나돌던 브리스톨 상인들의 지지와 국왕 헨리 7세의 특허장을 얻어 지오바니는 1497년 5월 범선 메튜호를 타고 브리스톨을 출항하여 긴 항해 끝에 북아메리카를 발견한다. 지금에 이르러는 그의 항해, 발견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므로 그가 탐험한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남아있는 기록을 통해서 아마도 카보트가 도달한 곳은 뉴펀틀랜드와 노바 스코티아 사이로 추측할 수 있다.

크리스토발 콜론이 그러했듯 낙천적인 성격의 카보트는 자신이 도착한 곳이 카타이의 변경이라고 믿었으며 돌아와서 자신이 귀중한 비단을 입수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덕분에 그는 1498년에는 카타이의 중심부에 도착하기 위해 다시 항해에 나설 수 있었지만 그의 행적에 관해서는 더이상은 알려진 것이 없고 항해중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불분명한 항해업적은 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모험가의 대부로 떠오른 아들 세바스챤 카보트에게로 넘어간다. 세바스챤은 1508년 북미 동해안을 탐사해 허드슨 만이나 허드슨 해협을 발견했고 플로리다 근처에 도달했다. 그의 탐험으로 영국은 향신료나 비단을 얻지는 못했지만 어떤 의미로는 그보다 더 중요한, 뉴펀틀랜드 앞바다의 그랜드 뱅크스 어장을 발견했고 이곳에서 발견된 방대한 어군으로 어업활동이 잦아지면서 영국은 북미해안에 대한 탐사를 꾸준히 파견하지만 새로 즉위한 헨리8세는 항해 관련 출자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영국의 탐험활동은 이후 한동안 침체기를 맞는다.

1513년 발보아가 태평양을 발견했고 6년후에는 마젤란이 세계를 일주함으로써 아메리카 대륙이 아시아와 다르다는 것이 입증되었지만 유럽에는 여전히 아시아-태평양-아메리카의 지리적 관계, 특히 태평양의 끔찍할정도로 넓은 거리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고 카보트가 1497년 확인한 육지가 중국의 최북동부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적인 관측은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왔다.

그리고 1523년, 사반세기가 지난후에도 여전히 이 꿈을 추구한 죠바니 다 베라차노라는 피렌체 출신의 프랑스 항해사가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모험항해를 떠나게 된다.

 

베라차노

죠바니 다 베라차노(Giovanni da Verrazzano)의 삶에 관해서 많은 것이 알려져있지 않지만 그는 1485년 피렌체에서 약 50km 떨어진 카스테라 베라차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507년 프랑스의 디에프 근처로 이사한 후 항해자로 경력을 쌓았으며 동 지중해와 대서양일대를 항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1524년 베라차노는 프랑스 국왕 프랑소와 1세의 측량사로 근무하던 중 왕의 명을 받아 북아메리카 연안의 탐험여행에 나서게 되고 그 탐험으로 북미대륙에 관한 많은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다.

베라차노는 플로리다와 뉴펀틀랜드 사이의 지역을 탐험하였으며 현재의 남 캐롤라이나 해안을 따라 남하한 후 다시 북쪽으로 돌아 체샤피크 만과 델라웨어 강을 비롯한 오늘날의 뉴욕만 근처를 탐사했고 허드슨 강의 존재도 확인하였다.

항해일지에 따르면 그는 원주민들과 교역하면서 현재의 롱아일랜드 근처에서 식수를 보급했다고 되어 있으며 역사가들의 연구에 의해 그가 상륙한 장소가 브루클린 근처라는 것이 확인되어 뉴욕에 도착한 최초의 유럽인으로 인정받았다. 베라차노의 연안조사로 에스파니아가 발견한 북미대륙의 남부와 잉글랜드가 발견한 북미대륙의 북동부 사이의 해안선이 탐사되어 북미대륙이 두개의 섬이 아니라 거대한 하나의 대륙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베라차노는 이후에도 북미연안을 다시 한번 답사했으며 1528년에 플로리다, 바하마제도, 안틸제도를 탐험하던 중 원주민들과 교역을 시도하다가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기록들은 나중의 탐험과 별로 연관되지 않기 때문에 19세기 부터 한동안 신빙성 논란이 있었다. 베라차노가 북미대륙 동해안을 최초로 탐험한 유럽인이라는 것에 관한 유일한 증거는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뿐으로 탐험한 지역의 지형, 식물, 동물상과 원주민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 설명의 신뢰도가 낮아서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각주:1]?다만 나중에 프랑수아 1세의 서명이 있는 다른 편지에서 베라차노의 편지에 대한 언급이 나오면서[각주:2]?점차 그의 탐험이 실제로 있었다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게 되었다.[각주:3]

뉴욕시에서는 1609년에 헨리 허드슨을 따르는 유럽인들이 이주한 것을 뉴욕시 역사의 시초로 간주하고 있었지만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쳐 베라차노의 업적이 재평가되면서 비슷한 시기에 건설된 스테텐 아일랜드와 뉴욕을 잇는 다리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그 외에도 그의 이름을 딴 유람선이나 리틀리그 야구팀이 만들어져 있어 오늘날에는 뉴욕 근처와 특히 스텐텐 아일랜드 지역에 거주하는 프랑스인이나 이탈리아 인들 사이에서는 최초로 뉴욕을 알린 유럽인으로써 상당한 인지도가 있다.[각주:4]


베라차노의 바다

아메리카 대륙이라는 신대륙 너머의 카타이를 목표로 하고 있던 베라차노에게 하나의 거대한 북미대륙이 태평양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그는 한걸음 양보해서 대서양 연안 어디인가에 아시아로 통하는 확인되지 않은 틈바구니가 있으리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고, 북캐롤라이나의 팜 리코 만 근처에서 넓은 해원을 발견하자 그 너머로 계속 바다가 이어질 것이라고 성급한 판단을 내리게 된다.

베라차노는 태평양이 북미대륙의 캐롤라이나 곶까지 파고들어있으리라고 예측했으며 그의 항해에 대해 기초하여 제작된 지도와 그 후 약 반세기에 걸쳐서 나온 북아메리카 지도의 대부분에는 이 부분에 "베라차노의 바다"라는 거대한 바다가 표시되었다.

이보다 앞서 1509년에는 세바스티앙 카보트가 오늘날의 허드슨 만에 해당하는 큰 후미의 입구를 발견했었다. 카보트는 부빙과 전진을 거부하는 승무원들 때문에 되돌아왔지만 그가 발견한 이 거대한 만은 이 해안이 남쪽으로, 어쩌면 태평양으로 통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카보트가 발견한 거대한 만과 베라차노가 자신의 탐험 여행을 프랑소와 1세에게 보고한 내용에서 등장하는 "베라차노의 바다"에 대한 정보가 혼재되면서 당시 유럽에는 북미대륙 어딘가에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항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했고 앞서 말했던 길버트의 주장은 바로 그러한 희망적 관측에 기초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길버트의 주장은 서서히 지지층을 모으게 되었고 마이켈 록이라는 상인이 그 가능성을 주도면밀히 조사해야 한다는 입장을 모아 지원자들을 구성했다. 스테판 버로우가 소환되어 북서항로의 가능성 확인을 위해 증언을 했으며 마침내 탐사대가 구성되었다.

1576년 마틴 프로비셔를 지휘관으로 하는 북서항로 탐험대가 서쪽을 향해 출발할 준비를 갖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