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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항로 도전기 1. 북방으로

구름위 2013. 6. 12.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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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불가능한 꿈에 도전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15세기말 부터 유럽의 열강은 흑사병의 공포를 벗어나 자원 고갈로 인한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서서히 외부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레콩키스타를 통해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이슬람의 발달된 문화를 받아들여 발달된 항해술로 인도로 가는 길을 찾아나섰고 항로의 발견으로 막대한 부를 획득했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해안을 거쳐 인도양 무역에 뛰어들어 향신료와 황금, 노예 무역을 기반으로 했고 에스파냐는 신대륙의 금은을 긁어들이고 있었다. 신흥 강대국으로 급부상한 이들 국가들의 뒤에는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는 경쟁국들이 있었고 그중에 북쪽에는 오랜 전쟁으로 피폐했던 시절을 막 벗어난 잉글랜드가 있었다. 1540년대, 오스만 해적의 활동이 심해지면서 레반트 지역에서의 향료 교역로가 차단되면서 자 영국은 새로운 향신료 무역로 개척에 뛰어들게 된다.

하지만 이미 인도로 가는 동쪽 교역로는 포르투갈이 장악하고 있었고 서쪽은 에스파냐의 통제하에 있어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항로를 선택할 수 없다면 북쪽으로 돌아서 인도에 가는 길은 없을까?

포르투갈이 희망봉에 도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 뒤로는 비교적 수월하게 진출할 수 있었듯이 북방의 어떠한 지점을 지난다면 동쪽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리스본의 항구에 그득한 육두구와 후추가 런던이나 암스테르담에 쌓일지도 모른다는 상상만으로도, 북방항로를 찾아나서는 도전은 시도할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가 탐험항해의 많은 부분을 주도했던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니아와 달리 북유럽에서는 왕실의 기여는 남유럽에서 이루어진 것에 비교하면 기여가 미미했다. 이 때문에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모험항해는 열성어린 독지가들과 회사 형태로 구성된 투자자들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이런 투자자들 중에는 항해자는 아니었지만 당대의 수학자이며 석학으로 요술사라고 생각될 정도로 머리가 틔어있던 존 디나 존 데이비스세바스티앙 카보트처럼 경험이 풍부한 항해사들, 험프리 길버트경을 비롯한 신흥 젠트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어쩌면 대항해시대의 패권을 뒤바꿀지도 모를 중대한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이제 발견해야 할 항로는 다만 하나, 북방으로의 진출 뿐이다. 이미 에스파냐는 서방의 바다를 발견했고 포르투갈은 동방의 바다를 발견하여 인도 제국에 도달했다."?? 1527년, 로버트 손

1494년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중재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토르데실리야스 조약을 체결하여 유럽 이외의 지구 대부분을 양분한 상태였으나 이 협약의 효력은 카나리아 제도 이남에 미치는 것으로 북방의 바다에 관해서는 특별한 내용이 없었다. 당초 탐험가들은 바닷물은 얼지 않는다라는 관념에 의존하여[각주:1] 북방항로 통과가 가능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유럽의 탐험가들이 북방의 항로에 대해 무지함을 드러내는 좋은 반증이었다. 북방항로는 다른 항로보다 물부족의 위협은 덜해도 훨씬 더 험난했다. 열대에서는 1년 내내 항해가 가능하지만 북해에서는 겨울이면 몇달이나 맹렬한 눈보라가 게속되어 시계를 꽉 막아버리고 만다. 안개속에서 예고없이 맞닥드린 빙산에 배가 부딪히면 여지없이 두쪽이 나고 무엇보다 북으로 다가갈 수록 나침반을 믿을 수 없게되어 정확한 위치를 측정할 수 없는게 문제였다. 게다가 해협, 협만, 섬이 복잡하게 뒤얽힌 극지의 양상은 계절마다 변화하며 사람의 접근을 거부했다.

도전자들

북방의 항로에 있는 수많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한 운명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특히 영국이나 네덜란드 처럼 뒤늦게 항로개척에 뛰어든 후발 주자들에게 북방항로의 가능성은 시장의 판도를 뒤엎을 수 있는 블루오션으로서 크나큰 매력이 있었다.

항로 개척을 주장하고 직접 뛰어든 이들은 운명을 건 모험에 매혹된 이상주의자들이었지만 그와 함게 모험 가능성을 신중히 저울질할 줄도 아는 학구적인 인물들도 있었다.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여 젠트리 계급이 된 상인계층답게 이재에도 밝았고 왕실과의 커넥션을 통해 지도층이 소장하고 있는 중요한 지리 정보를 접할 수도 있었다.?

당시 지리정보는 국가의 중요 기밀로 포르투갈 같은 국가에서는 지도를 국외로 반출할 경우 극형에 처할 정도로 항로의 비밀을 유지하는데 극성이었다. 북방항로에 뛰어든 이들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할 경우 얻게될 이익을 꿈꾸며 항해왕 엔리케가 그러했듯 하나하나 항로에 대한 정보를 모아나갔고 항해중에 만나게 될 많은 위험을 극복할 방법을 연구하면서 야심차게 북방항로에의 진출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들이 북방항로를 통해 카타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북동으로 갈 것인지 북서로 갈것인지의 방법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북동항로파와 북서항로파는 서로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 끊임없이 주도권 쟁탈전을 벌였고 불확실한 정보들에 휩쓸리기 쉬웠기에 북방항로의 역사는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의 탐험과는 달리 시종일관 실패담으로 점철되게 된다.

 

북방 진출에 있어서 먼저 시도된 것은 북동항로로, 이 항로는 무엇보다 경제적인 이점을 강조하는 일단의 이론가들에 의해서 지지를 받고 있었고 이들의 필두에는 존 디가 있었다. 당대의 대수학자이며 천문학과 지리학에도 조예가 깊고 메르카토르와 친분이 깊은 존 디는 당시 궁정점성술가로 엘리자베스 1세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에녹어"라고 하는 독특한 언어를 제창하여 대천사장 미카엘과도 의사소통할 수 있다는 바디랭기지의 달인 띠딕 존 디 선생은, 아라비아 지리학자들의 저작을 근거로 타빈곳이라고 하는 지점을 지나면 항로가 남동쪽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일단 이 항로를 통한다면 카타이와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북해안으로 바로 갈 수 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가 항로를 발견하여 막대한 부를 쌓아올려 유럽의 주역으로 나섰듯이 야심많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멋진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존 디는 대영제국의 거창한 비전을 제시할 뿐 아니라 당시 북미대륙을 통과하는 북서항로 주변의 거주민은 모피를 입고다니는 야만족이지만 북아시아의 거주민들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제대로 된 옷을 입고 있을 것이고 남방의 비단이나 사치품을 따듯하고 수명이 긴 영국의 모직천과 교역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들어 당시 영국의 주요산업이었던 양모직조업 종사자들에게 매력적인 이익을 제시했다. 즉, 머나먼 중국까지 도달하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도중에 만나는 사람들과의 교역으로도 어느 정도는 이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있었다.

1551년 리처드 챈슬러와 세바스티앙 카보트, 휴 윌로비 경은 상업모험회사(Company of Merchant Adventurers)[각주:1] 를 설립하여 에드워드 국왕의 특허를 얻어 240여명의 투자자에게서 25파운드씩 자금을 모아 북동항로 탐사를 준비했다.

1553년 휴 윌로비 경은 Bona Esperanza(120t), Bona Confidentia(90t), Edward Bonaventure(60t) 이상 3척의 배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머나먼 중국을 향해 출발했다. 도중에 태풍을 만나서 함대는 뿔뿔이 흩어졌지만 윌로비 경은 노르웨이의 노드 곶을 지나 노바야젬라 군도의 남서단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이미 여름은 끝나가고 있었기에 랩랜드에서 겨울을 나기로 하고 배 위에서 거처를 마련했지만 이 선택은 참담한 결과를 빚어? 추위와 괴혈병으로 모든 선원이 사망했다.

그러나 윌로비 경의 Edward Bonaventure호에 탑승했던 리처드 챈슬러는 백해를 통과하여 오늘날의 아르항겔스크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모스크바 까지는 1,000Km 이상 떨어져 있었지만 이반 뇌제의 치하에서 번영의 기틀을 다지고 있던 모스크바는 이미 런던보다도 더 큰 도시로 성장하고 있었고 발틱해를 가로막고 있는 적대국가들 때문에 서방과 교역하지 못하고 있어 발전이 정체되고 있던 모스크바 공국은 기꺼이 영국과의 교역로 건설에 나서기로 했다.?

이로써 북방항로 발견 자체는 실패했지만 모스크바 공국과의 중요한 교역로가 발견된 것이 항해의 성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