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 세계사 100장면
지은이 : 박은봉
출판사 : 가람기획
91. 새로운 국제질서, 데탕트-중화인민공화국, 유엔 가입(197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73년/6, 23평화통일 외교정책 공표,
스푸트니크 2호에는 라이카라는 이름의 개 한 마리가 타고 있었다. 무중력 상태에서 생물이 견딜 수 있는가를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뒤이어 1958년 1월 31일 미국도 최초의 위성 익스플로러 1호를 쏘아올렸다.
최초로 우주비행을 하고 돌아온 동물은 두 마리의 개다. 1960년 8월 19일 소련은 스트레르카, 베르카라는 이름의 개 두 마리를 실은 우주선을 발사했다. 이 우주선은 지구를 18바퀴 돈 다음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다. 이 실험은 인간이 지구밖을 여행한 다음 지구로 귀환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우주시대의 개막을 한층 앞당겼다.
그리하여 인류 최초로 우주공간을 여행한 인간이 탄생했다. 그는 소련의 우주비행사 가가린이다. 가가린은 1961년 4월 12일, 우주선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지구를 한바퀴 돈 다음 무사히 귀환했다. 같은 해 8월 보스토크 2호는 치토프 소령을 태우고 지구를 17바퀴 돌았다.
미국도 뒤질세라 '머큐리 계획'에 의해 인간의 우주비행을 성공시켰다. 두 나라는 우주시대의 선두주자가 되기 위해 경쟁적으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리는 한편 인류의 오랜 꿈인 '달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1959년 가을, 소련은 루니크 2호를 달에 명중시켰다. 그리고 10월 4일 발사된 루니크 3호는 달의 뒷면 사진을 찍어 영원한 수수께끼였던 달의 뒷면을 인간에게 보여주었다. 1966년 1월 루니크 9호가 달의 '폭풍의 바다'에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잇달아 미국의 서베이어 1호도 달에 착륙했다. 미국은 곧바로 유인우주선을 보내는 아폴로 계획에 착수했다. 미국은 곧바로 유인우주선을 보내는 아폴로 계획에 착수했다. 마침내 1968년 12월 세 사람의 비행사를 태운 아폴로 8호가 달을 향해 떠났다. 그리고 1년 뒤 아폴로 11호가 인간을 달에 내려놓는데 성공한 것이다.
달에 갔다온 인간은 이번엔 인간이 과연 우주에서 살 수 있는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971년 6월 소련은 세 사람의 승무원을 실은 살류트 1호를 발사했다. 살류트 1호는 23일간 우주에 머물렀지만, 세 사람 모두 숨진 채로 돌아오고 말았다.
1973년 5월 이번엔 미국이 최초의 우주정거장 스카이랩을 발사했다. 스카이랩은 작업실, 공기저장실, 도킹실, 태양 망원경대, 사령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침실, 식탁, 샤워실, 화장실을 갖추고 있었다. 무중력 상태에서는 변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빨아내는 장치를 사용했다. 물과 음료수ㅡ70여 가지의 식품이 골고루 비치되었고, 일과가 끝나면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며 휴식을 즐길 수 있게 했다.
스카이랩 계획이 성공리에 끝나자, 미국은 스페이스 셔틀 즉 우주왕복선 계획에 착수했다. 1981년 4월 최초의 우주왕복선 컬럼비아 호에 이어 챌린저 호, 디스커버리 호, 어틀랜티스 호 등이 차례로 발사되었다. 그런데 1986년 1월 28일, 유인 우주왕복선 챌리저호가 발사 후 73초 만에 16km 상공에서 산산조각이 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러나 미국의 스페이스 셔틀 계획은 계속 진행되고 있으며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현재 지구 궤도에는 약 4,500개의 비행물체가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통신이나 기상관측 위성 같은 실용목적의 위성뿐 아니라 군사 목적의 위성들이 상당수 있다.
1983년 3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의 전략 유도탄이 목표물에 도달하기 전에 그것을 파괴할 수 있는 과학기술의 개발, 즉 전략방위구상을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인공위성으로 미사일을 감지하여 공격위성이나 지상에서 레이저 광선 혹은 입자 빔을 쏘아 이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공상과학영화 '스타워즈'가 현실화된다는 뜻이다.
다가올 우주시대가 인류에게 희망과 평화를 안겨줄 것인지, 아니면 지상에서 일어났던 것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전쟁과 파괴를 가져다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시대를 독점하려는 소수가 있는 한 지배와 피지배의 역사는 우주공간에서도 계속되리라는 사실이다.
91. 상처입은 거인-베트남 전쟁 종결(1975년)
*그때 우리나라에서는-1970년/경부고속도로 개통, 1972년/7,4남북공동성명 발표.10월유신
1969년 7월 25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태평양의 한 섬 괌에서 미국의
향후 아시아 정책을 밝힌 닉슨 독트린 을 발표했다. 그 주요 내용은 베트남 전쟁과 같은 미국의 직접적인 정치, 군사 개입의 회피, 해외주둔 미국의 단계적 철수, 동맹국의 자주국방 노력의 강화와 미국의 측면 지원, 강대국의 핵 위협을 제외한 내란이나 침략에 대한 아시아 각국의 협력대처 등이다.
당시 미국은 과도한 해외군사비 지출과 베트남 전쟁 장기화로 인해 경제사정이 몹시 악화되어 있었다. 닉슨 독트린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자리잡은 냉전체제를 불식하고 데탕트라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수립케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데탕트란 풀림, 휴식 을 뜻하는 프랑스 어이다. 미국과 소련을 두 정점으로 하는 팽팽한 긴장관계로부터 벗어난 국제적 해빙 무드를 가리키는 말로, 흔히 긴장완화 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부상한 나라는 미국과 소련이었다. 미국은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을 경계하며 전후 국제질서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노력해왔다. 한반도를 북위 38도 선으로 갈라 미국과 소련이 각각 진주한 것도 소련에게 한반도를 송두리째 내줄 수 없다는 미국의 경계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장개석이 패배하고, 거대한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자 미국은 반공 히스테리에 걸렸다. 게다가 한국전쟁의 발발은 이를 더욱 심화시켰다.
1950년 2월, 위스콘신 주 출신의 공화당 상원의원 매카시는 국무성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이때부터 미국은 극단적인 반공주의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33개 주가 법률을 제정하여 교사, 교수들에게 충성서약을 하게 하고, 조금이라도 반공주의를 비판하는 책은 불살라졌다. 공무원과 방위산업체 근로자들은 익명의 투서나 밀고에 의해 하루아침에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힐까 봐 전전긍긍했으며, 언론은 비판의 자유를 봉쇄당하고 대학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빼앗겼다. 트루먼 전대통령이 러시아 간첩을 은닉했다는 혐의로 고발되었고, 심지어 루스벨트 아이젠하워, 케네디까지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극단적인 흑백논리에 의한 빨갱이 사냥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이웃이 적이나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살피도록 명령받을 때 그 사회는 이미 와해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라는 양식 있는 사람들의 경고는 무시되었다. 50년대를 휘어잡은 이 반공주의 선풍을 상원의원 매카시의 이름을 따서 매카시즘이라고 부른다.
미국은 세계의 경찰로 자부하면서 공산주의와 관계있다고 생각되면 자유세게의 방위를 위해서 어디든지 개입했다. 자연 미국과 소련은 세계 곳곳에서 부딪치게 되었고, 세계는 미국을 대표로 하는 자본주의권과 소련을 대표로 하는 공산주의권으로 양분되어 날카로운 대립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미국의 정치평론가 리프맨은 뉴욕 트리뷴 지에 이같은 상황을 해설한 기사를 기고했다. 그는 기사 제목을 냉전 이라 붙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열전이라면 거기까지 이르지는 않지만 그에 못지 않은 전쟁이란 의미이다. 이후 냉전이란 말은 전세계적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50년대와 60년대를 풍미한 매카시즘과 냉전체제는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가 평화공존 정책과 함께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고 1962년 10월 쿠바 위기를 무사히 넘기면서 데탕트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1970년 11월 21일 유엔 총회에서는 중국 대표권 문제가 표결에 붙여져 중공초청, 대만 추방의 알바니아 안이 찬성 51, 반대 49로 과반수를 얻었다. 이듬해 4월 10일에는 미국의 탁구 팀이 처음으로 중국 북경을 방문했다.
한편 1971년 10월 25일 유엔 총회 본회의는 중국 초청안을 찬성 76, 반대 35, 결석 3으로 가결시켰다. 중국은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되었으며, 이어 대만은 유엔을 탈퇴했다.
1972년 2월 21일 마침내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북경으로 날아가 모택동 주석, 주은래 수상과 회담하고 평화 5원칙을 발표했다. 그해 5월 닉슨은 또 소련을 방문, 브레즈네프 서기장과 회담을 갖고 전략무기 제한협정을 체결했다. 두 나라 사이에 군축협정이 맺어짐에 따라 비로소 데탕트가 제도화되었다.
그렇지만 지상에서 전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미, 소 두 나라가 직접 충돌하지 않는 대신 제3세계에서는 끊임없는 국지전이 발생했다. 이는 사실상 미,소 양국의 대리전이었다.
70년대는 화해의 시대였다. 그러나 197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함으로써 데탕트 체제는 막을 내렸다. 그후 81년 미국 대통령이 된 레이건은 대소강경책으로 전환, 국제질서는 신 냉전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92. 세계를 뒤흔든 아랍의 자원 민족주의-제1차 석유파동 발생(1973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74년/긴급조치 1,2,3,3호 선포, 육영수 여사 피격 사망
1975년/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실시 (찬성 73.11%), 1979년/박정희, 피격 사망
비동맹 운동의 기수였던 나세르 대통령이 암살 당한 뒤 새로 이집트 대통령에 취임한 사다트는 제3차 중동전쟁으로 빼앗긴 시나이반도를 되찾는다는 명분 아래 1973년 10월 6일 수에즈 운하 건너 이스라엘 기지를 공격했다. 제4차 중동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세계의 화약고 중동은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열흘 후인 10월 16일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아랍 에미리트 연합의 페르시아 만 6개 석유수출국은 OPEC회의에서 원유 고시가격을 종전의 1배럴당 3달러 2센트에서 3달러 65센트로 17%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이어 17일에는 이스라엘이 아랍 점령지에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매월 원유생산을 5%씩 줄여나가며,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과 네덜란드에 대해 석유수출을 금한다고 했다.
그해 말 원유가는 배럴 달 5.110달러에서 11.651달러로 다시 인상되었다. 단기간에 4배 가까이 치솟은 원유가는 세계경제를 강타했다. 기간산업의 대부분을 석유에 의존하고 있던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제품생산 부족과 제품가격 상승으로 심각한 불황과 인플레이션에 휘말렸다. 1967년 이스라엘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제3차 중동전쟁에서 아랍은 참패를 했다. 6일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이 전쟁으로 이집트와 요르단은 단 엿새 만에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 요르단 강 서안, 가자 지구를 이스라엘에게 빼앗겼다.
이듬해인 1968년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리비아는 아랍 제국의 이익을 위해 석유를 무기로 한다는 견해를 갖고 공동활동을 한다.는 목적으로 아랍 석유수출국기구 OAPEC를 결성했다
그후 이라크, 아랍에미리트 연합, 카타르, 바레인, 시리아, 알제리, 이집트가 가맹했다.
이에 앞서 1960년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결성되었다. 국제 석유자본에 대항하는 조직으로서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베네수엘라, 쿠웨이트, 이라크 등 5개국으로 출발한 OPEC은 리비아, 나이지리아, 알제리, 인도네시아, 아랍 에레미트 연합, 카타르, 에콰도르, 가봉이 차례로 가맹, 13개국이 되었다. 그 중에는 OAPEC회원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국제석유자본, 통칭 메이저는 엑손, 모빌, 걸프, 소칼, 텍사코의 미국계 5개 사와 네덜란드, 영국계인 로열 더치 셸, 영국의 브리티시 페트롤리엄의 7대 사를 일컫는다. 세븐 시스터즈라고도 불리는 메이저는 석유 탐사부터 채굴, 회수, 수송, 정제, 판매, 석유화학에 이르기까지 석유에 관한 각종 부문을 분할 독점하고 있었다.
석유를 무기로 단결한 아랍의 위력은 세계를 뒤흔들었다. 미국 대통령 닉슨은 하루 1천 톤씩 매일 이스라엘에게 무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서방세계의 중동노선은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프리카, 유럽, 일본이 이스라엘과 외교를 단절하고 급속히 친 아랍 노선으로 기울었다. 이집트는 3주일에 걸친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종전까지 국제 석유자본이 독점하고 있던 원유가격 결정권은 OPEC으로 넘어갔으며, 아랍 산유국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OPEC은 자원민족주의의 산실이 되었다.
몇 년 후 또 한 차례의 석유파동이 전세계를 휩쓸었다. 1978년 12월 OPEC은 배렬달 12.7달러이던 원유가를 단계적으로 14.5% 인상키로 했다. 이와 동시에 이란이 국내사정을 이유로 석유생산을 대폭 감축하고 수출을 중단한다는 선언을 했다. 이란은 미국의 지지를 받던 팔레비 왕을 축출하고 호메이니를 새 지도자로 추대, 민족 혁명의 길을 걷고 있었다. 원유가는 배럴당 20달러를 넘어섰고, 현물시장에서는 40달러에 육박했다. 제2차 석유파동이 시작된 것이다. 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은 78년 4.0%에서 79년 2.9%로 떨어졌으며,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0.3%를 기록했다. 우리 나라 경제도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79년의 경제성장률은 6.5%, 80년에는 5.2%의 마이너스 성장을 면치 못했다. 물가상승률은 30%에 달했다. 경상수지 적자폭은 79년 42억 달러, 80년 53억 2천만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외채는 200억 달러를 넘어 섰다.
석유자원을 무기화하여 서방세계에 도전한 아랍 민족주의, 이것이 석유파동을 낳은 근본원인이었다.
93.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고르바초프, 페레스트로이카 추진(1986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80년/광주민주화 항쟁 발발, 1981년/제5공화국 출범
1983년/KAL기 소련에 피격. 버마 아웅산 묘소 폭발 사고
1986년 2월 25일부터 3월 6일까지 모스크바 크레믈린 궁에서 소련 공산당 제27차 대회가 열렸다. 5년 만에 열린 이 대회에는 소련공산당 사상 처음으로 서방측 공산당과 사회당, 좌익정당 대표들이 초청되어 총 113개국 152개 정당, 대의원 4,993명이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처음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정치보고에서 소련 경제의 타개와 정치 개혁을 위한 당의 기본방침을 제시했다. 그는 소련사회의 침체가 주로 주관적 요인들-타성, 관료주의, 관리형태와 방법의 경직성, 동적인 사업경향 감퇴-때문이라고 하면서, 그 해결책으로 현대 과학기술 진보의 성과를 기반으로 하는 국민경제 재편, 식량 문제의 최우선 해결, 새로운 경제관리 메커니즘 창출, 경제성장 잠재력 활성화, 인민의 복지증진과 사회적 공정성 확립을 주장했다.
개혁의 골자는 경제제도 개편과 스탈린식 관료주의의 극복이다. 식료품을 사기 위해 줄지어 늘어선 사람들, 돈은 있어도 살 물건이 없는 만성적인 물자부족과 상품 품귀현상, 실업자는 없지만 아무도 열심히 일하지 않는 무시안일주의와 형식주의의 만연 등등 소련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스탈린식 사회주의라는 왜곡된 형태에서 비롯된 것이니만큼 마라크스-레닌주의로 되돌아가 제대로 된 사회주의를 해보자는 것이다. 이후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을 대변하는 용어가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일약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정치가로 떠올랐다. 그의 개혁정책은 사회주의권은 물론 자본주의권에도 지대한 관심거리이자 중대한 변수가 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영향을 제일 먼저 받은 곳은 동유럽이었다. 동유럽 각국은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 중 민족해방운동을 전개, 독립을 쟁취한 역사를 갖고 있다. 그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한 소련의 영향하에 전후 동유럽에는 사회주의 국가가 대거 들어섰다. 소련 사회주의가 갖고 있던 문제들은 고스란히 동유럽에 이전되었으며, 혹은 더욱 왜곡된 형태로 인민을 억눌렀다.
유고슬라비아의 화보잡지 오스미카에 실린 한 풍자기사를 보자. 사회주의의 6개 경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기존 사회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고 있다.
첫째, 실업은 없으나 아무도 일하지 않는다. 둘째, 아무도 일하지 않으나 모두 임금을 받는다. 셋째, 모두 임금을 받지만 이것으로 아무것도 살 수가 없다. 넷째, 아무것도 살 수 없지만 만인은 모든 것을 소유한다. 다섯째, 만인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만인이 불만이다. 여섯째, 만인이 불만이지만 선거 때는 모두 체제에 찬성투표를 한다.
동유럽 인민들은 개혁과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헝가리, 체코, 폴란드, 불가리아, 동독에서 수십, 수백만이 모인 대규모 시위가 연일 벌어졌으며, 각국의 공산당은 자구책으로 개혁과 개편을 서둘렀다. 1989년 11월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사회주의 사상과 혁명적 페레스트로이카 라는제목의 고르바초프 연설문이 실렸다. 그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제창하며 동유럽의 개혁을 지지했다.
... 이제 우리는 처음에 제기한 근본적인 문제, 즉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이해 속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가? ...우리는 어떤 이상적인 미래의 모델에 대한 서술에 노력을 집중해왔다. 그리고 그 모델에 따라 사회 속에서 진행되는 변화들을 짜맞추려고 했다. .... 하지만 삶은 객관적 조건에 따라 다른 길로 움직여갔다. 삶을 예정된 도식에 따라 강제로 움직여가려는 노력은 교조주의, 이데올록적 잔혹성, 폐쇄성, 자기기만, 인간과 역사에 대한 억압을 초래했다. 인민은 기다리기에 지쳤다. 그들을 맹목적으로 믿게 하려는 실행되지도 않는 호소와 약속이 너무 많았다. ... 결국 위대하고 강력한 국가를 세운 후에 국가는 모든 문명국가에서 누려야 할 당연한 삶의 조건들을 대중에게 창조해주지 못했던 것이다.....사회주의의 새로운 모습-이것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이다. 이는 마르크스 사상과 완전히 일치하며 미래의 사회는 실현된 휴머니즘이다. 그러한 사회의 창조가 바로 페레스트로이카의 중요한 목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인도적인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임을 단언한다. ...
페레스트로이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 미래는 고르바초프의 예견처럼 낙관적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동유럽 사회주의는 결국 무너졌으며, 공산당은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시장경제가 도입되었다. 동유럽 최강의 부국 동독은 서독으로 흡수 통합되어 지도상에서 그 이름이 사라졌다. 인민은 공산당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소련은 각 공화국의 분리독립운동으로 인해 연방이 해체되고 독립국 공동체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라는 이름의 훨씬 느슨한 형태로 변모했다. 이전의 소련이 지녔던 사회주의 종주국으로서의 강력한 파워는 사라진 지 오래다.
페레스트로이카와 사회주의의 미래, 이것이 어디로 갈 것이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로 인한 동유럽과 소련의 변화는 어떤 이념이든 간에 인민의 삶을 억누르고 그 자발성과 창조력을 무시하면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인간은 누구든지 공평한 삶의 기회를 누리며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94. 새롭게 펼쳐지는 팍스 아메리카나-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개시(1986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86년/서울, 제10회 아시안 게임 개최,
1987년/6월항쟁, 6.29선언 공표. KAL858rl 폭파사건
1986년 9월 남미의 우루과이에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통칭 가트GATT각료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여덟 번째 다자간 무역협상 개시를 선언했다. 이 협상을 우루과이 라운드라 한다. 87년 2월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협상을 시작한 우루과이 라운드의 주요내용은 농산물 분야와 서비스, 지적 소유권에 관한 교역문제이다.
가트는 1948년 관세, 수출입규제 등의 무역장벽을 다각적인 교섭을 통해 제거한다는 목적으로 미국 주도하에 발족되었다. 무력수단을 동원하지 않고 협상과 조정으로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폐지케하는 교섭의 장인 것이다. 전후 국제무역 질서는 가트를 중심으로 재편되었으며, 미국이 그 주도권을 쥐었다.
가트의 가맹국은 89년 12월 현재 96개국, 우리 나라는 67년에 가입했다. 가맹국은 협상을 통해 67년 케네디 라운드에서는 공업제품과 농산물 관세를 평균 35% 인하했고, 73년부터 79년에 걸친 도쿄 라운드에서는 평균 33%의 관세를 인하했다. 도쿄 라운드의 합의에 따른 관세인하가 87년 종료됨에 따라 이를 대신할 우루과이 라운드가 86년 9월 선언된 것이다.
우루과이 라운드는 종전의 내용에 금융, 정보통신, 건설 등 서비스 분야를 새로이 협상대상에 넣었다.
우루과이 라운드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는 각료급으로 구성된 무역협상위원회이며, 그 산하에 관세, 비관세 농산물, 지적 재산권, 긴급수입제한 등 14개 분야의 상품협상 그룹과 처음 도입된 서비스 협상그룹, 도합 15개 협상 그룹이 있다.
1990년 7월 2일 농업협상 그룹 의장은 미국의 입장을 반영한 초안을 제출, 선진 7개국의 동의를 얻었다. 그 내용은 모든 수입제한 품목의 자유화, 농업보조금 폐지, 이중곡가제 페지, 영농자금 융자 중단, 수출보조금 철폐 등이다. 이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은 자국의 농업을 전혀 보호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예외 없는 전면개방을 주장하는 미국의 강경한 태도 뒤에는 나름의 계산과 이유가 숨어 있다. 80년대 들어 농업공황, 제조업의 쇠퇴, 서비스 산업 팽창으로 산업구조가 변한 미국은 그에 따른 새로운 국제 무역 질서를 구축할 필요에 직면했다. 즉 농업과 서비스 산업의 비교우위를 무기로 세계경제의 패권을 회복, 강화하려는 것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범세계적 자유무역 질서의 확립 이것이 우루과이 라운드르 통한 미국의 의도이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소련의 국제적 지위와 영향력이 크게 떨어지자 미국은 세계유일의 강대국으로 급부상했다. 걸프 전쟁으로 TEKA 후세인을 지칭했고, 이스라엘과 아랍을 한자리에 불러모아 중동평화회의를 열게 했으며, 이어 로마에서 개최된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에서는 미국은 유럽에서 물러설 것을 원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하지도 않겠다. 는 태도를 보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되는 미국의 영향권을 고수하겠다는 강력한 의지표명인 것이다. 80년대 초 레이건이 주장했던 팍스 아메리카나가 실현되어가는 느낌이다. 한편 미국의 막강한 정치외교력과 군사력에 맞서 유럽은 경제통합뿐 아니아 정치통합까지 추진, 이른바 유럽 일가를 세울 전망이다. 유럽공동체 EC와 유럽 자유무역연합이 통합된 유럽 경제지역EEA 창설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 유럽 시장이 하나로 통합되면 유럽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현재의 17%에서 10년 뒤에는 37%로 대폭 증가, 미국과 일본을 앞지르게 된다.
미국도 자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서 경제 및 군사, 안보 블록을 형성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세계경제의 블록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21세기를 앞둔 세계질서의 재편성 과정이기도 하다. 1991년 11월 12일 서울에서 제3차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 각료회의APEC가 열렸다.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일본, 한국, 아세안ASEAN 6개국, 그리고 중국, 대만, 홍콩의 중국 3국이 참석, 총 15개국이 모인 가운데 열린 이 회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경제협력과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방향에 대해 집중토의했다.
회의 직전, 말레이지아가 불참을 통고해왔다. 미국을 배제한 동아시아 경제협의체를 결성하자는 말레이지아의 주장에 미국이 보인 태도에 불만의 표시였다.
미국의 베어커 국무장관은 미국이 배제되는 무역체계를 발전시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는 내용의 비망록을 일본에 보내는 한편, 한국에는 말레이지아는 한국을 위해 피를 흘리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랬다 며 압력을 가했다.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의사대로 말레이지아 안에 반대할 것을 약속했다. 이 같은 미국의 압력에 대해 말레이지아 마하티르 총리는 말했다.
미국은 작은 나라들의 미래에 위협이 돼가고 있다.
95. 루마니아 영웅 에서 독재자로-루마니아, 차우세스쿠 대통령 처형(198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88년/제6공화국 출범. 서울 제24회 올림픽개최. 국회청문회 열림.
1989년 12월 27일, 루마니아 텔레비전은 대통령 차우세스쿠와 그 부인 엘레나 부통령의 재판기록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방영했다. 차우세스쿠는 쓰고 있던 털모자를 집어던지며 화가 난 표정으로 뭔가를 말했으며, 옆에 앉은 엘레나는 시종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후 이들은 총살형에 처해졌다.
구국위원회는 두 사람이 12월 25일 비밀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사형집행 직후의 두 사람의 시체를 찍은 사진이 일간지 머릿기사를 크게 장식했다.
차우세스쿠는 1918년 부쿠레슈티 근교에서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5살 때인 1933년부터 공산당 활동을 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반나치 운동을 벌여 수차례 투옥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루마니아의 영웅이라고 불렀다. 1965년 공산당 서기장이 되고, 74년에 유럽 최연소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여타의 동유럽 사회주의국들과는 달리 분명한 독자노선을 걸었다. 68년 바르샤바 조약국의 체코 침공을 비난했으면,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추진한 중공업정책이었다. 석유파동이 일어나자 수출 위주의 석유화학공업에 치중한 그의 중공업정책은 수출 비용의 엄청난 증가로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석유화학 투자에 끌어들인 외채 110억 달러를 갚을 길이 막막해졌다.
어쩔 수 없이 차우세스쿠는 정책의 우선순위를 외채상환에 두고 극도의 긴축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식량, 원자재 등 수출할 수 있는 것은 무어든 수출했다. 국민들은 희생과 인내로 견뎌야 했다. 1인당 육류 배급량 월 500g, 빵 하루 160g, 영하 25도의 강추위가 계속되는데 전력과 휘발유 공급까지 제한되어야 했다.
국민의 드높아지는 불만과 쿠데타 위협을 누르기 위해 차우세스쿠는 족벌체제를 구축했다. 군대가 미덥지 않자 보안군에게 각종 특혜를 주어 자신의 친위대로 키웠다. 보안군 내에는 비밀경찰을 두었다. 차우세스쿠의 몰락은 89년 12월 16일 루마니아 서부 티미시와라에서 시작되었다. 이 지방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헝가리 영토였으며, 주민의 대부분이 헝가리 인이다. 이날의 시위는 이들 헝가리인의 인권옹호에 앞장섰던 개신교 목사 토에케스를 국외로 추방하기 위해 경찰이 강제연행하는 데 항거, 주민들이 인간사슬을 만들어 저항한 데서 비롯되었다. 경찰은 이들에게 무차별 발포, 대규모의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그로부터 닷새 후인 21일,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 광장에서는 관제 궐기대회가 열렸다. 차우세스쿠의 사진과 그를 칭송하는 수많은 현수막이 내걸린 가운데 수십만의 군중이 모였다.
차우세스쿠가 연단에 올라 지난 주말부터 계속되고 있는 시위를 제국주의자들과 그 스파이들에 의해 야기된 것이라고 격렬히 성토했다. 순간 군중 속에서 야유와 함께 차우세스쿠 퇴진을 외치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사람들은 일제히 그에 호응했다. 궐기대회를 생방송하던 국영 텔레비전 화면이 갑자기 텅 빈 하늘을 보여주더니 노래가 나오다가 이내 흰 브라운관으로 변해버렸다. 그런데 국영 라디오는 한동안 분노에 찬 군중들의 외침을 방송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함성은 곧 아비규환으로 바뀌고 방송은 중단되었다. 보안 요원들은 군중을 무차별 구타하고 체포했으며 현장에서 8명을 즉결 처분했다. 잠시 후 차우세스쿠는 다시 연설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날 밤 늦게까지 부쿠레슈티시는 시민과 학생들로 이루어진 수만명의 시위대로 들끓었다.
다음날 22일, 시위는 계속되었다. 보안군의 총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오후, 병사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진압에 투입되었다가 시위대에 가세한 루마니아 정규군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성난 시민과 함께 대통령 관저로 행진해왔다. 차우세스쿠는 군중에게 연설하려다가 야유를 받고 부인 엘레나와 함께 공산당 본부 건물 옥상에 대기시켜 놓은 헬리콥터를 타고 도피했다. 이어 부쿠레슈티 라디오 방송국은 마네스쿠를 중심으로 하는 구국위워회가 전권을 장악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3일 후 구국전선은 비공개 비밀 군사재판을 열어 차우세스쿠 부부를 전격적으로 처형시키고, 국민에게 녹화 테이프를 공개했다. 그러나 그 테이프는 절반 이상이 삭제되어 본래 2시간짜리가 45분짜리로 줄어 있었다.
우리는 루마니아 역사를 피로 물들인 소름끼치는 독재자를 제거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행복해지자.
구국위원회는 방송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루마니아의 영웅에서 소름끼치는 독재자로 전락한 차우세스쿠의 몰락은 불과 일주일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루마니아에는 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일리에스쿠를 대통령으로 하는 새 정부가 출범,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
96. 고르바초프로 시작해서 헬무트 콜로-독일 통일(1990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90년/한,소 수교
1990년 10월 3일 0시,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바로 옆에 자리잡은 제국의회 의사당 앞 광장에는 수십만의 인파가 모여 있었다.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 빌리 브란트 전총리, 동독의 바이츠제커 대통령, 데메지에르 총리, 인민의회 의장 자비네 베르그만 폴 여사 등 동서독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면 계단 앞에 세워진 국기 게양대에 삼색기가 천천히 올라갔다. 군중들은 일제히 독일국가를 합창했다. 자유의 종이 은은히 울려퍼졌다. 뒤이어 환성이 터지고 폭음소리와 함께 찬란한 불꽃이 치솟아 밤하늘을 수놓았다. 동서로 갈려 있던 독일이 45년 만에 하나로 통일되는 순간이었다. 오늘은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무슨 일을 함께 하며 무슨 결과를 기다려야 할 것인지 생각하고 물어야 할 시간입니다.... 오후가 되자 브란덴부르크 문과 제국의회 광장은 다시 인파로 뒤덮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두 건물에 얽힌 역사를 설명해주는 부모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동독, 정식 명칭 독일민주공화국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신 서독, 정식명칭 독일연방공화국이 면적 37만 5천km2, 인구 7천 760만 명을 가진 유럽의 거인으로 재탄생했다.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91년/지방자치제 부활.
1991년 1월 17일 새벽 0시 50분, 미 공군 F15E 전폭기 중대가 사우디아라비아 중부에 위치한 미 공군기지에서 발진,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를 공습하기 시작했다. 이어 2천 5백 대에 달하는 F15E 전폭기 편대가 잇달아 사우디 중부와 동부지방에서 이륙했다. 걸프 전쟁의 발단이 된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은 1990년 8월 2일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새벽 3시, 이라크 군의 탱크가 쿠웨이트 국경을 넘어섰다. 왕과 그 가족은 재빨리 사우디로 도망을 쳤고, 이라크 군은 별반 저항도 받지 않고 7시간 만에 쿠웨이트를 손에 넣었다.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91년/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1991년 9월 27일 대통령 부시는 백악관 집무실에서 TV중계를 통해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지상 및 해상 발사 단거리 핵무기를 일방 폐기 또는 철수할 것을 선언했다.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91년/한반도 비핵화 선언, 서울 APEC 제3차 각료 회의 개최
1991년 12월 1일은 세계보건기구 WHO가 정한 제4차 세계 에이즈 날이다.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91년/국제노동기구ILO가입, 제5차 남북고위급 회담, (남북 화해,
1991년 12월 8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을 비롯하여 크라프추크 우쿠라이나 공화국 대통령, 슈시케비치 벨로루스(구 백러시아) 최고회의 의장 3인 독립국가 공동체 창설을 선언했다. 벨로루스의 부크 강변에 있는 브레스트에서 비공개 회담을 가진 이들은 소비에트 연방을 해체하고 대신 외교, 국방 핵 통제권을 공동관장하는 독립 공화국들의 공동체를 결성한다고 발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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