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세계사

세계사 100장면 [90~100/100]

구름위 2013. 6. 3.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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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 세계사 100장면
지은이 : 박은봉
출판사 : 가람기획

 

91. 새로운 국제질서, 데탕트-중화인민공화국, 유엔 가입(197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73년/6, 23평화통일 외교정책 공표,  


스푸트니크 2호에는 라이카라는 이름의 개 한 마리가 타고 있었다. 무중력 상태에서 생물이 견딜 수 있는가를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뒤이어 1958년 1월 31일 미국도 최초의 위성 익스플로러 1호를 쏘아올렸다.
  최초로 우주비행을 하고 돌아온 동물은 두 마리의 개다. 1960년 8월 19일 소련은 스트레르카, 베르카라는 이름의 개 두 마리를 실은 우주선을 발사했다. 이 우주선은 지구를 18바퀴 돈 다음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다. 이 실험은 인간이 지구밖을 여행한 다음 지구로 귀환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우주시대의 개막을 한층 앞당겼다.
  그리하여 인류 최초로 우주공간을 여행한 인간이 탄생했다. 그는 소련의 우주비행사 가가린이다. 가가린1961년 4월 12일, 우주선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지구를 한바퀴 돈 다음 무사히 귀환했다. 같은 해 8월 보스토크 2호는 치토프 소령을 태우고 지구를 17바퀴 돌았다.
  미국도 뒤질세라 '머큐리 계획'에 의해 인간의 우주비행을 성공시켰다.  두 나라는 우주시대의 선두주자가 되기 위해 경쟁적으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리는 한편 인류의 오랜 꿈인 '달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1959년 가을, 소련은 루니크 2호를 달에 명중시켰다. 그리고 10월 4일 발사된 루니크 3호는 달의 뒷면 사진을 찍어 영원한 수수께끼였던 달의 뒷면을 인간에게 보여주었다. 1966년 1월 루니크 9호가 달의 '폭풍의 바다'에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잇달아 미국의 서베이어 1호도 달에 착륙했다. 미국은 곧바로 유인우주선을 보내는 아폴로 계획에 착수했다. 미국은 곧바로 유인우주선을 보내는 아폴로 계획에 착수했다. 마침내 1968년 12월 세 사람의 비행사를 태운 아폴로 8호가 달을 향해 떠났다. 그리고 1년 뒤 아폴로 11호가 인간을 달에 내려놓는데 성공한 것이다.
  달에 갔다온 인간은 이번엔 인간이 과연 우주에서 살 수 있는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971년 6월 소련은 세 사람의 승무원을 실은 살류트 1호를  발사했다. 살류트 1호는 23일간 우주에 머물렀지만, 세 사람 모두 숨진 채로 돌아오고 말았다.
  1973년 5월 이번엔 미국이 최초의 우주정거장 스카이랩을 발사했다. 스카이랩은 작업실, 공기저장실, 도킹실, 태양 망원경대, 사령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침실, 식탁, 샤워실, 화장실을 갖추고 있었다. 무중력 상태에서는 변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빨아내는 장치를 사용했다. 물과 음료수ㅡ70여 가지의 식품이 골고루 비치되었고, 일과가 끝나면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며 휴식을 즐길 수 있게 했다.
  스카이랩 계획이 성공리에 끝나자, 미국은 스페이스 셔틀 즉 우주왕복선 계획에 착수했다. 1981년 4월 최초의 우주왕복선 컬럼비아 호에 이어 챌린저 호, 디스커버리 호, 어틀랜티스 호 등이 차례로 발사되었다. 그런데 1986년 1월 28일, 유인 우주왕복선 챌리저호가 발사 후 73초 만에 16km 상공에서 산산조각이 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러나 미국의 스페이스 셔틀 계획은 계속 진행되고 있으며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현재 지구 궤도에는 약 4,500개의 비행물체가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통신이나 기상관측 위성 같은 실용목적의 위성뿐 아니라 군사 목적의 위성들이 상당수 있다.
  1983년 3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의 전략 유도탄이 목표물에 도달하기 전에 그것을 파괴할 수 있는 과학기술의 개발, 즉  전략방위구상을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인공위성으로 미사일을 감지하여 공격위성이나 지상에서 레이저 광선 혹은 입자 빔을 쏘아 이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공상과학영화 '스타워즈'가 현실화된다는 뜻이다.
  다가올 우주시대가 인류에게 희망과 평화를 안겨줄 것인지, 아니면 지상에서 일어났던 것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전쟁과 파괴를 가져다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시대를 독점하려는 소수가 있는 한 지배와 피지배의 역사는 우주공간에서도 계속되리라는 사실이다.


91. 상처입은 거인-베트남 전쟁 종결(1975년)

 

*그때 우리나라에서는-1970년/경부고속도로 개통, 1972년/7,4남북공동성명 발표.10월유신


  1969년 7월 25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태평양의 한 섬 괌에서 미국의
향후 아시아 정책을 밝힌 닉슨 독트린 을 발표했다. 그 주요 내용은 베트남 전쟁과 같은 미국의 직접적인 정치, 군사 개입의 회피, 해외주둔 미국의 단계적 철수, 동맹국의 자주국방 노력의 강화와 미국의 측면 지원, 강대국의 핵 위협을 제외한 내란이나 침략에 대한 아시아 각국의 협력대처 등이다.
  당시 미국은 과도한 해외군사비 지출과 베트남 전쟁 장기화로 인해 경제사정이 몹시 악화되어 있었다. 닉슨 독트린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자리잡은 냉전체제를 불식하고 데탕트라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수립케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데탕트란 풀림, 휴식 을 뜻하는 프랑스 어이다. 미국과 소련을 두 정점으로 하는 팽팽한 긴장관계로부터 벗어난 국제적 해빙 무드를 가리키는 말로, 흔히 긴장완화 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부상한 나라는 미국과 소련이었다. 미국은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을 경계하며 전후 국제질서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노력해왔다. 한반도를 북위 38도 선으로 갈라 미국과 소련이 각각 진주한 것도 소련에게 한반도를 송두리째 내줄 수 없다는 미국의 경계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장개석이 패배하고, 거대한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자 미국은 반공 히스테리에 걸렸다. 게다가 한국전쟁의 발발은 이를 더욱 심화시켰다.
  1950년 2월, 위스콘신 주 출신의 공화당 상원의원 매카시는 국무성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이때부터 미국은 극단적인 반공주의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33개 주가 법률을 제정하여 교사, 교수들에게 충성서약을 하게 하고, 조금이라도 반공주의를 비판하는 책은 불살라졌다. 공무원과 방위산업체 근로자들은 익명의 투서나 밀고에 의해 하루아침에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힐까 봐 전전긍긍했으며, 언론은 비판의 자유를 봉쇄당하고 대학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빼앗겼다. 트루먼 전대통령이 러시아 간첩을 은닉했다는 혐의로 고발되었고, 심지어 루스벨트 아이젠하워, 케네디까지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극단적인 흑백논리에 의한 빨갱이 사냥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이웃이 적이나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살피도록 명령받을 때 그 사회는 이미 와해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라는 양식 있는 사람들의 경고는 무시되었다. 50년대를 휘어잡은 이 반공주의 선풍을 상원의원 매카시의 이름을 따서 매카시즘이라고 부른다.


미국은 세계의 경찰로 자부하면서 공산주의와 관계있다고 생각되면 자유세게의 방위를 위해서 어디든지 개입했다. 자연 미국과 소련은 세계 곳곳에서 부딪치게 되었고, 세계는 미국을 대표로 하는 자본주의권과 소련을 대표로 하는 공산주의권으로 양분되어 날카로운 대립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미국의 정치평론가 리프맨은 뉴욕 트리뷴 지에 이같은 상황을 해설한 기사를 기고했다. 그는 기사 제목을 냉전 이라 붙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열전이라면 거기까지 이르지는 않지만 그에 못지 않은 전쟁이란 의미이다. 이후 냉전이란 말은 전세계적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50년대와 60년대를 풍미한 매카시즘과 냉전체제는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가 평화공존 정책과 함께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고 1962년 10월 쿠바 위기를 무사히 넘기면서 데탕트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1970년 11월 21일 유엔 총회에서는 중국 대표권 문제가 표결에 붙여져 중공초청, 대만 추방의 알바니아 안이 찬성 51, 반대 49로 과반수를 얻었다. 이듬해 4월 10일에는 미국의 탁구 팀이 처음으로 중국 북경을 방문했다.
  한편 1971년 10월 25일 유엔 총회 본회의는 중국 초청안을 찬성 76, 반대 35, 결석 3으로 가결시켰다. 중국은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되었으며, 이어 대만은 유엔을 탈퇴했다.
  1972년 2월 21일 마침내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북경으로 날아가 모택동 주석, 주은래 수상과 회담하고 평화 5원칙을 발표했다. 그해 5월 닉슨은 또 소련을 방문, 브레즈네프 서기장과 회담을 갖고 전략무기 제한협정을 체결했다. 두 나라 사이에 군축협정이 맺어짐에 따라 비로소 데탕트가 제도화되었다.
  그렇지만 지상에서 전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미, 소 두 나라가 직접 충돌하지 않는 대신 제3세계에서는 끊임없는 국지전이 발생했다. 이는 사실상 미,소 양국의 대리전이었다.
  70년대는 화해의 시대였다. 그러나 197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함으로써 데탕트 체제는 막을 내렸다. 그후 81년 미국 대통령이 된 레이건은 대소강경책으로 전환, 국제질서는 신 냉전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92. 세계를 뒤흔든 아랍의 자원 민족주의-제1차 석유파동 발생(1973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74년/긴급조치 1,2,3,3호 선포, 육영수 여사 피격 사망
  1975년/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실시 (찬성 73.11%), 1979년/박정희, 피격 사망

 

  비동맹 운동의 기수였던 나세르 대통령이 암살 당한 뒤 새로 이집트 대통령에 취임한 사다트는 제3차 중동전쟁으로 빼앗긴 시나이반도를 되찾는다는 명분 아래 1973년 10월 6일 수에즈 운하 건너 이스라엘 기지를 공격했다. 제4차 중동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세계의 화약고 중동은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열흘 후인 10월 16일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아랍 에미리트 연합의 페르시아 만 6개 석유수출국은 OPEC회의에서 원유 고시가격을 종전의 1배럴당 3달러 2센트에서 3달러 65센트로 17%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이어 17일에는 이스라엘이 아랍 점령지에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매월 원유생산을 5%씩 줄여나가며,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과 네덜란드에 대해 석유수출을 금한다고 했다.
  그해 말 원유가는 배럴 달 5.110달러에서 11.651달러로 다시 인상되었다. 단기간에 4배 가까이 치솟은 원유가는 세계경제를 강타했다. 기간산업의 대부분을 석유에 의존하고 있던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제품생산 부족과 제품가격 상승으로 심각한 불황과 인플레이션에 휘말렸다. 1967년 이스라엘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제3차 중동전쟁에서 아랍은 참패를 했다. 6일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이 전쟁으로 이집트와 요르단은 단 엿새 만에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 요르단 강 서안, 가자 지구를 이스라엘에게 빼앗겼다.
  이듬해인 1968년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리비아는 아랍 제국의 이익을 위해 석유를 무기로 한다는 견해를 갖고 공동활동을 한다.는 목적으로 아랍 석유수출국기구 OAPEC를 결성했다

그후 이라크, 아랍에미리트 연합, 카타르, 바레인, 시리아, 알제리, 이집트가 가맹했다.
이에 앞서 1960년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결성되었다. 국제 석유자본에 대항하는 조직으로서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베네수엘라, 쿠웨이트, 이라크 등 5개국으로 출발한 OPEC은 리비아, 나이지리아, 알제리, 인도네시아, 아랍 에레미트 연합, 카타르, 에콰도르, 가봉이 차례로 가맹, 13개국이 되었다. 그 중에는 OAPEC회원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국제석유자본, 통칭 메이저는 엑손, 모빌, 걸프, 소칼, 텍사코의 미국계 5개 사와 네덜란드, 영국계인 로열 더치 셸, 영국의 브리티시 페트롤리엄의 7대 사를 일컫는다. 세븐 시스터즈라고도 불리는 메이저는 석유 탐사부터 채굴, 회수, 수송, 정제, 판매, 석유화학에 이르기까지 석유에 관한 각종 부문을 분할 독점하고 있었다.
  석유를 무기로 단결한 아랍의 위력은 세계를 뒤흔들었다. 미국 대통령 닉슨은 하루 1천 톤씩 매일 이스라엘에게 무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서방세계의 중동노선은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프리카, 유럽, 일본이 이스라엘과 외교를 단절하고 급속히 친 아랍 노선으로 기울었다. 이집트는 3주일에 걸친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종전까지 국제 석유자본이 독점하고 있던 원유가격 결정권은 OPEC으로 넘어갔으며, 아랍 산유국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OPEC은 자원민족주의의 산실이 되었다.
  몇 년 후 또 한 차례의 석유파동이 전세계를 휩쓸었다. 1978년 12월 OPEC은 배렬달 12.7달러이던 원유가를 단계적으로 14.5% 인상키로 했다. 이와 동시에 이란이 국내사정을 이유로 석유생산을 대폭 감축하고 수출을 중단한다는 선언을 했다. 이란은 미국의 지지를 받던 팔레비 왕을 축출하고 호메이니를 새 지도자로 추대, 민족 혁명의 길을 걷고 있었다. 원유가는 배럴당 20달러를 넘어섰고, 현물시장에서는 40달러에 육박했다. 제2차 석유파동이 시작된 것이다. 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은 78년 4.0%에서 79년 2.9%로 떨어졌으며,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0.3%를 기록했다. 우리 나라 경제도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79년의 경제성장률은 6.5%, 80년에는 5.2%의 마이너스 성장을 면치 못했다. 물가상승률은 30%에 달했다. 경상수지 적자폭은 79년 42억 달러, 80년 53억 2천만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외채는 200억 달러를 넘어 섰다.
  석유자원을 무기화하여 서방세계에 도전한 아랍 민족주의, 이것이 석유파동을 낳은 근본원인이었다.


93.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고르바초프, 페레스트로이카 추진(1986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80년/광주민주화 항쟁 발발, 1981년/제5공화국 출범
  1983년/KAL기 소련에 피격. 버마 아웅산 묘소 폭발 사고

 

  1986년 2월 25일부터 3월 6일까지 모스크바 크레믈린 궁에서 소련 공산당 제27차 대회가 열렸다. 5년 만에 열린 이 대회에는 소련공산당 사상 처음으로 서방측 공산당과 사회당, 좌익정당 대표들이 초청되어 총 113개국 152개 정당, 대의원 4,993명이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처음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정치보고에서 소련 경제의 타개와 정치 개혁을 위한 당의 기본방침을 제시했다. 그는 소련사회의 침체가 주로 주관적 요인들-타성, 관료주의, 관리형태와 방법의 경직성, 동적인 사업경향 감퇴-때문이라고 하면서, 그 해결책으로 현대 과학기술 진보의 성과를 기반으로 하는 국민경제 재편, 식량 문제의 최우선 해결, 새로운 경제관리 메커니즘 창출, 경제성장 잠재력 활성화, 인민의 복지증진과 사회적 공정성 확립을 주장했다.
  개혁의 골자는 경제제도 개편과 스탈린식 관료주의의 극복이다. 식료품을 사기 위해 줄지어 늘어선 사람들, 돈은 있어도 살 물건이 없는 만성적인 물자부족과 상품 품귀현상, 실업자는 없지만 아무도 열심히 일하지 않는 무시안일주의와 형식주의의 만연 등등 소련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스탈린식 사회주의라는 왜곡된 형태에서 비롯된 것이니만큼 마라크스-레닌주의로 되돌아가 제대로 된 사회주의를 해보자는 것이다. 이후 페레스트로이카(개혁)글라스노스트(개방)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을 대변하는 용어가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일약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정치가로 떠올랐다. 그의 개혁정책은 사회주의권은 물론 자본주의권에도 지대한 관심거리이자 중대한 변수가 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영향을 제일 먼저 받은 곳은 동유럽이었다. 동유럽 각국은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 중 민족해방운동을 전개, 독립을 쟁취한 역사를 갖고 있다. 그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한 소련의 영향하에 전후 동유럽에는 사회주의 국가가 대거 들어섰다. 소련 사회주의가 갖고 있던 문제들은 고스란히 동유럽에 이전되었으며, 혹은 더욱 왜곡된 형태로 인민을 억눌렀다.
  유고슬라비아의 화보잡지 오스미카에 실린 한 풍자기사를 보자. 사회주의의 6개 경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기존 사회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고 있다.
   첫째, 실업은 없으나 아무도 일하지 않는다. 둘째, 아무도 일하지 않으나 모두 임금을 받는다. 셋째, 모두 임금을 받지만 이것으로 아무것도 살 수가 없다. 넷째, 아무것도 살 수 없지만 만인은 모든 것을 소유한다. 다섯째, 만인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만인이 불만이다. 여섯째, 만인이 불만이지만 선거 때는 모두 체제에 찬성투표를 한다. 
  동유럽 인민들은 개혁과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헝가리, 체코, 폴란드, 불가리아, 동독에서 수십, 수백만이 모인 대규모 시위가 연일 벌어졌으며, 각국의 공산당은 자구책으로 개혁과 개편을 서둘렀다. 1989년 11월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사회주의 사상과 혁명적 페레스트로이카 라는제목의 고르바초프 연설문이 실렸다. 그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제창하며 동유럽의 개혁을 지지했다.
   ... 이제 우리는 처음에 제기한 근본적인 문제, 즉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이해 속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가? ...우리는 어떤 이상적인 미래의 모델에 대한 서술에 노력을 집중해왔다. 그리고 그 모델에 따라 사회 속에서 진행되는 변화들을 짜맞추려고 했다. .... 하지만 삶은 객관적 조건에 따라 다른 길로 움직여갔다. 삶을 예정된 도식에 따라 강제로 움직여가려는 노력은 교조주의, 이데올록적 잔혹성, 폐쇄성, 자기기만, 인간과 역사에 대한 억압을 초래했다. 인민은 기다리기에 지쳤다. 그들을 맹목적으로 믿게 하려는 실행되지도 않는 호소와 약속이 너무 많았다. ... 결국 위대하고 강력한 국가를 세운 후에 국가는 모든 문명국가에서 누려야 할 당연한 삶의 조건들을 대중에게 창조해주지 못했던 것이다.....사회주의의 새로운 모습-이것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이다. 이는 마르크스 사상과 완전히 일치하며 미래의 사회는 실현된 휴머니즘이다. 그러한 사회의 창조가 바로 페레스트로이카의 중요한 목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인도적인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임을 단언한다. ...
  페레스트로이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 미래는 고르바초프의 예견처럼 낙관적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동유럽 사회주의는 결국 무너졌으며, 공산당은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시장경제가 도입되었다. 동유럽 최강의 부국 동독은 서독으로 흡수 통합되어 지도상에서 그 이름이 사라졌다. 인민은 공산당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소련은 각 공화국의 분리독립운동으로 인해 연방이 해체되고 독립국 공동체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라는 이름의 훨씬 느슨한 형태로 변모했다. 이전의 소련이 지녔던 사회주의 종주국으로서의 강력한 파워는 사라진 지 오래다.
  페레스트로이카와 사회주의의 미래, 이것이 어디로 갈 것이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로 인한 동유럽과 소련의 변화는 어떤 이념이든 간에 인민의 삶을 억누르고 그 자발성과 창조력을 무시하면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인간은 누구든지 공평한 삶의 기회를 누리며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94. 새롭게 펼쳐지는 팍스 아메리카나-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개시(1986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86년/서울, 제10회 아시안 게임 개최,
  1987년/6월항쟁, 6.29선언 공표. KAL858rl 폭파사건

 

  1986년 9월 남미의 우루과이에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통칭 가트GATT각료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여덟 번째 다자간 무역협상 개시를 선언했다. 이 협상을 우루과이 라운드라 한다. 87년 2월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협상을 시작한 우루과이 라운드의 주요내용은 농산물 분야와 서비스, 지적 소유권에 관한 교역문제이다.
  가트는 1948년 관세, 수출입규제 등의 무역장벽을 다각적인 교섭을 통해 제거한다는 목적으로 미국 주도하에 발족되었다. 무력수단을 동원하지 않고 협상과 조정으로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폐지케하는 교섭의 장인 것이다. 전후 국제무역 질서는 가트를 중심으로 재편되었으며, 미국이 그 주도권을 쥐었다.
  가트의 가맹국은 89년 12월 현재 96개국, 우리 나라는 67년에 가입했다. 가맹국은 협상을 통해 67년 케네디 라운드에서는 공업제품과 농산물 관세를 평균 35% 인하했고, 73년부터 79년에 걸친 도쿄 라운드에서는 평균 33%의 관세를 인하했다. 도쿄 라운드의 합의에 따른 관세인하가 87년 종료됨에 따라 이를 대신할 우루과이 라운드가 86년 9월 선언된 것이다.
우루과이 라운드는 종전의 내용에 금융, 정보통신, 건설 등 서비스 분야를 새로이 협상대상에 넣었다.
  우루과이 라운드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는 각료급으로 구성된 무역협상위원회이며, 그 산하에 관세, 비관세 농산물, 지적 재산권, 긴급수입제한 등 14개 분야의 상품협상 그룹과 처음 도입된 서비스 협상그룹, 도합 15개 협상 그룹이 있다.
  1990년 7월 2일 농업협상 그룹 의장은 미국의 입장을 반영한 초안을 제출, 선진 7개국의 동의를 얻었다. 그 내용은 모든 수입제한 품목의 자유화, 농업보조금 폐지, 이중곡가제 페지, 영농자금 융자 중단, 수출보조금 철폐 등이다. 이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은 자국의 농업을 전혀 보호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예외 없는 전면개방을 주장하는 미국의 강경한 태도 뒤에는 나름의 계산과 이유가 숨어 있다. 80년대 들어 농업공황, 제조업의 쇠퇴, 서비스 산업 팽창으로 산업구조가 변한 미국은 그에 따른 새로운 국제 무역 질서를 구축할 필요에 직면했다. 즉 농업과 서비스 산업의 비교우위를 무기로 세계경제의 패권을 회복, 강화하려는 것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범세계적 자유무역 질서의 확립 이것이 우루과이 라운드르 통한 미국의 의도이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소련의 국제적 지위와 영향력이 크게 떨어지자 미국은 세계유일의 강대국으로 급부상했다. 걸프 전쟁으로 TEKA 후세인을 지칭했고, 이스라엘과 아랍을 한자리에 불러모아 중동평화회의를 열게 했으며, 이어 로마에서 개최된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에서는 미국은 유럽에서 물러설 것을 원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하지도 않겠다. 는 태도를 보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되는 미국의 영향권을 고수하겠다는 강력한 의지표명인 것이다. 80년대 초 레이건이 주장했던 팍스 아메리카나가 실현되어가는 느낌이다. 한편 미국의 막강한 정치외교력과 군사력에 맞서 유럽은 경제통합뿐 아니아 정치통합까지 추진, 이른바 유럽 일가를 세울 전망이다. 유럽공동체 EC와 유럽 자유무역연합이 통합된 유럽 경제지역EEA 창설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 유럽 시장이 하나로 통합되면 유럽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현재의 17%에서 10년 뒤에는 37%로 대폭 증가, 미국과 일본을 앞지르게 된다.
  미국도 자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서 경제 및 군사, 안보 블록을 형성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세계경제의 블록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21세기를 앞둔 세계질서의 재편성 과정이기도 하다. 1991년 11월 12일 서울에서 제3차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 각료회의APEC가 열렸다.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일본, 한국, 아세안ASEAN 6개국, 그리고 중국, 대만, 홍콩의 중국 3국이 참석, 총 15개국이 모인 가운데 열린 이 회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경제협력과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방향에 대해 집중토의했다.
  회의 직전, 말레이지아가 불참을 통고해왔다. 미국을 배제한 동아시아 경제협의체를 결성하자는 말레이지아의 주장에 미국이 보인 태도에 불만의 표시였다.
  미국의 베어커 국무장관은 미국이 배제되는 무역체계를 발전시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는 내용의 비망록을 일본에 보내는 한편, 한국에는 말레이지아는 한국을 위해 피를 흘리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랬다 며 압력을 가했다.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의사대로 말레이지아 안에 반대할 것을 약속했다. 이 같은 미국의 압력에 대해 말레이지아 마하티르 총리는 말했다.
  미국은 작은 나라들의 미래에 위협이 돼가고 있다.


95. 루마니아 영웅 에서  독재자로-루마니아, 차우세스쿠 대통령 처형(198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88년/제6공화국 출범. 서울 제24회 올림픽개최. 국회청문회 열림.

 

  1989년 12월 27일, 루마니아 텔레비전은 대통령 차우세스쿠와 그 부인 엘레나 부통령의 재판기록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방영했다. 차우세스쿠는 쓰고 있던 털모자를 집어던지며 화가 난 표정으로 뭔가를 말했으며, 옆에 앉은 엘레나는 시종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후 이들은 총살형에 처해졌다.
  구국위원회는 두 사람이 12월 25일 비밀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사형집행 직후의 두 사람의 시체를 찍은 사진이 일간지 머릿기사를 크게 장식했다.
  차우세스쿠는 1918년 부쿠레슈티 근교에서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5살 때인 1933년부터 공산당 활동을 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반나치 운동을 벌여 수차례 투옥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루마니아의 영웅이라고 불렀다. 1965년 공산당 서기장이 되고, 74년에 유럽 최연소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여타의 동유럽 사회주의국들과는 달리 분명한 독자노선을 걸었다. 68년 바르샤바 조약국의 체코 침공을 비난했으면,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추진한 중공업정책이었다. 석유파동이 일어나자 수출 위주의 석유화학공업에 치중한 그의 중공업정책은 수출 비용의 엄청난 증가로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석유화학 투자에 끌어들인 외채 110억 달러를 갚을 길이 막막해졌다.
  어쩔 수 없이 차우세스쿠는 정책의 우선순위를 외채상환에 두고 극도의 긴축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식량, 원자재 등 수출할 수 있는 것은 무어든 수출했다. 국민들은 희생과 인내로 견뎌야 했다. 1인당 육류 배급량 월 500g, 빵 하루 160g, 영하 25도의 강추위가 계속되는데 전력과 휘발유 공급까지 제한되어야 했다.
  국민의 드높아지는 불만과 쿠데타 위협을 누르기 위해 차우세스쿠는 족벌체제를 구축했다. 군대가 미덥지 않자 보안군에게 각종 특혜를 주어 자신의 친위대로 키웠다. 보안군 내에는 비밀경찰을 두었다. 차우세스쿠의 몰락은 89년 12월 16일 루마니아 서부 티미시와라에서 시작되었다. 이 지방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헝가리 영토였으며, 주민의 대부분이 헝가리 인이다. 이날의 시위는 이들 헝가리인의 인권옹호에 앞장섰던 개신교 목사 토에케스를 국외로 추방하기 위해 경찰이 강제연행하는 데 항거, 주민들이 인간사슬을 만들어 저항한 데서 비롯되었다. 경찰은 이들에게 무차별 발포, 대규모의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그로부터 닷새 후인 21일,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 광장에서는 관제 궐기대회가 열렸다. 차우세스쿠의 사진과 그를 칭송하는 수많은 현수막이 내걸린 가운데 수십만의 군중이 모였다.
  차우세스쿠가 연단에 올라 지난 주말부터 계속되고 있는 시위를 제국주의자들과 그 스파이들에 의해 야기된 것이라고 격렬히 성토했다. 순간 군중 속에서 야유와 함께 차우세스쿠 퇴진을 외치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사람들은 일제히 그에 호응했다. 궐기대회를 생방송하던 국영 텔레비전 화면이 갑자기 텅 빈 하늘을 보여주더니 노래가 나오다가 이내 흰 브라운관으로 변해버렸다. 그런데 국영 라디오는 한동안 분노에 찬 군중들의 외침을 방송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함성은 곧 아비규환으로 바뀌고 방송은 중단되었다. 보안 요원들은 군중을 무차별 구타하고 체포했으며 현장에서 8명을 즉결 처분했다. 잠시 후 차우세스쿠는 다시 연설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날 밤 늦게까지 부쿠레슈티시는 시민과 학생들로 이루어진 수만명의 시위대로 들끓었다.
  다음날 22일, 시위는 계속되었다. 보안군의 총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오후, 병사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진압에 투입되었다가 시위대에 가세한 루마니아 정규군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성난 시민과 함께 대통령 관저로 행진해왔다. 차우세스쿠는 군중에게 연설하려다가 야유를 받고 부인 엘레나와 함께 공산당 본부 건물 옥상에 대기시켜 놓은 헬리콥터를 타고 도피했다. 이어 부쿠레슈티 라디오 방송국은 마네스쿠를 중심으로 하는 구국위워회가 전권을 장악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3일 후 구국전선은 비공개 비밀 군사재판을 열어 차우세스쿠 부부를 전격적으로 처형시키고, 국민에게 녹화 테이프를 공개했다. 그러나 그 테이프는 절반 이상이 삭제되어 본래 2시간짜리가 45분짜리로 줄어 있었다.
  우리는 루마니아 역사를 피로 물들인 소름끼치는 독재자를 제거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행복해지자.
  구국위원회는 방송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루마니아의 영웅에서 소름끼치는 독재자로 전락한 차우세스쿠의 몰락은 불과 일주일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루마니아에는 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일리에스쿠를 대통령으로 하는 새 정부가 출범,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


96. 고르바초프로 시작해서 헬무트 콜로-독일 통일(1990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90년/한,소 수교

1990년 10월 3일 0시,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바로 옆에 자리잡은 제국의회 의사당 앞 광장에는 수십만의 인파가 모여 있었다.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 빌리 브란트 전총리, 동독의 바이츠제커 대통령, 데메지에르 총리, 인민의회 의장 자비네 베르그만 폴 여사 등 동서독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면 계단 앞에 세워진 국기 게양대에 삼색기가 천천히 올라갔다. 군중들은 일제히 독일국가를 합창했다. 자유의 종이 은은히 울려퍼졌다. 뒤이어 환성이 터지고 폭음소리와 함께 찬란한 불꽃이 치솟아 밤하늘을 수놓았다. 동서로 갈려 있던 독일이 45년 만에 하나로 통일되는 순간이었다.
  이에 앞서 2일 저녁 9시, 동베를린의 샤우슈필하우스에서는 동독 정부 해체식이 거행되었다. 시종 무거운 분위기였다. 쿠르트 마주르의 지휘로 게반트 하우스 오케스트라가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환희의 송가만 아니라면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착잡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통일 기념행사는 의외로 차분히 진행되었다. 3일 오전 11시, 카라얀의 옛집인 베를린 필하모니 연주 홀에서는 통일 독일 출범행사가 개최되었다. 동독 인민의회 의장 자비네 베르그만 폴 여사가 맨 먼저 연단에 올라섰다.

  오늘은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무슨 일을 함께 하며 무슨 결과를 기다려야 할 것인지 생각하고 물어야 할 시간입니다.... 오후가 되자 브란덴부르크 문과 제국의회 광장은 다시 인파로 뒤덮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두 건물에 얽힌 역사를 설명해주는 부모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동독, 정식 명칭 독일민주공화국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신 서독, 정식명칭 독일연방공화국이 면적 37만 5천km2, 인구 7천 760만 명을 가진 유럽의 거인으로 재탄생했다.
  면적으로는 프랑스, 에스파냐 다음의 3위이지만 인구는 서유럽 제1위이며, 유럽 전체로 보아도 소련 다음 가는 대국이 된 것이다. 통일 이전의 서독은 국민 총생산 세계 3위, 제일의 수출국, 유럽 공동체 공업생산량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동독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운데 가장 선진이었다.
  89년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 자유, 민주 를 외치는 10만 군중의 시위로 시작된 동독의 개혁은 꼭 일년 만에 서독으로의 흡수통합에 의한 독일 통일로 종결되었다.
  동독은 노동자들에게 버림받았다. 90년 3월 18일의 총선에서 동독 노동자들의 63%가 서독과의 급속한 통합을 지지하는 기독교민주연합 등 우익정당에 몰표를 던졌다. 그간 살아온 사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낳은 결과였다.
  첫째, 당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었다. 당의 선전매체들은 항상 동독이 최고라고 해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동차를 사려면 15년을 기다려야 하고, 집을 얻으려면 1천 마르크의 뇌물을 줘야할 정도로 부패가 만연했다. 노동자들 사이엔 다음과 같은 농담이 퍼져 있었다. 한 동독시민이 경찰에 가서 외국으로 여행하고 싶다고 했다. 어디로 가고 싶으냐는 물음에 그는 동독으로 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이상하게 여긴 경찰이 어떤 동독으로 가고 싶으냐고 묻자,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나오는 동독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둘째, 비밀경찰 슈타지의 감시에 대한 불만이 매우 컸다. 8만의 정규요원, 12만의 비정규요원을 거느린 슈타지는 직장뿐 아니라 사생활까지 비집고 들어왔다. 비정규요원들은 월 1천 마르크와 자동차를 빨리 공급받을 수 있는 혜택을 누리기 위해 자진해서 슈타지에 협력했다.
  셋째, 공장경영에 대한 불만이었다. 극단적인 획일주의가 노동자들의 의욕을 떨어뜨렸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나 빈둥거리며 시간만 보내는 사람이나 받는 보수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간부들의 무사안일주의, 관료적 태도는 노동자들의 창의력을 결정적으로 파괴했다.
  넷째, 낙후된 서비스 산업과 질 나쁜 소비재에 대한 불만이 컸다. 국가에서 경영하는 서비스 산업은 노동자들이 일하는 시간에만 영업을 하기 때문에 라디오나 자동차가 고장나면 근무시간에 자리를 비워야만 했다. 한편 좋은 품질의 소비재는 모두 수출되고 정작 국민들에게는 질 나쁜 것만 공급되고 있었다.
  동독 노동자들의 불만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그들은 실업상태가 어떤 것인지 몰라 불안하기 하지만 지금까지처럼 일할 수는 없다. 그러느니 차라리 실업자가 되는 게 나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동독 사회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이들의 불만을 자유와 민주, 시장경제에 대한 열망으로 타오르게 했다. 독일인이 통일 직후 가장 많이 쓴 말은 당케, 고르비 였다. 동독 정권이 위기에 몰렸을 때, 소련이 무력개입을 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함으로써 통일에 결정적인 일조를 했다는 뜻에서이다. 탈출하는 동독인에게 국경을 개방하여 통독의 기폭제 역할을 한 헝가리도 감사의 대상이 되었다.
  라이프치히에 있는 카를 마르크스 대학의 철학교수 바바라 안더스는 동독의 변화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동독의 비극은 지난해 필연적으로 발생한 민주혁명이 서독으로의 병합으로 끝났다는 데 있다. 고르바초프로 시작해서 콜로 끝났다. 


97. 아랍 민족주의의 화신, 후세인-걸프 전쟁 발발(199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91년/지방자치제 부활.

 

  1991년 1월 17일 새벽 0시 50분, 미 공군 F15E 전폭기 중대가 사우디아라비아 중부에 위치한 미 공군기지에서 발진,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를 공습하기 시작했다. 이어 2천 5백 대에 달하는 F15E 전폭기 편대가 잇달아 사우디 중부와 동부지방에서 이륙했다.
  몇 시간 후 부시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끝내 후세인은 쿠웨이트에서 떠나지 않았다. 따라서 무력 이외에는 후세인을 쿠웨이트에서 떠나게 할 다른 선택이 없었다.... 나는 미국민에게 이번 전쟁이 제2의 베트남전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한다....

  걸프 전쟁의 발단이 된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은 1990년 8월 2일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새벽 3시, 이라크 군의 탱크가 쿠웨이트 국경을 넘어섰다. 왕과 그 가족은 재빨리 사우디로 도망을 쳤고, 이라크 군은 별반 저항도 받지 않고 7시간 만에 쿠웨이트를 손에 넣었다.
  세계의 화약고 중동은 다시 주목거리가 되었다. 세계는 바짝 긴장했다. 그러던 중 10월 8일,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경찰이 발포, 팔레스타인 인 20여 명이 죽고 150명이 다친 사건이 일어났다.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유태인들에게 돌을 던지자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실탄, 고무탄, 최루탄을 무차별 발사한 것이다. 이는 유태인들이 통곡의 벽 위 예루살렘 신전 터에 새 신전을 세우려 한다는 보도가 있은 후 일어난 사건이었다. 67년의 중동전쟁 이래 최악의 유혈사태였다.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이번 학살에 대한 보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한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1월 29일, 오는 1월 15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이라크에 대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사용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한국전쟁 이후 40년 만에 유엔 사상 두 번째로 유엔군이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이미 미국은 20만의 병력을 페르시아 만에 배치해놓고 있었다.
  안전보장이사회가 정한 시한을 넘긴 지 24시간 후인 1991년 1월 16일 자정을 기해 미국은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전면 공습, 베트남 전쟁에서 손을 뗀 지 25년 만에 다시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서방측에는 잔인한 독재자요 아랍제국 건설의 야망에 들뜬 전쟁광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아랍 인들은 그를 아랍 민족주의의 영웅으로 생각했다.
  아랍 인들은 수세기 동안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수탈과 모멸을 받아왔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이며 바빌로니아 영광과 십자군을 물리친 살라딘 장군, 제국주의 열강과 맞섰던 나세르 대통령을 기억하는 아랍 인들은 후세인을 그 연장선상에 놓았다.
  걸프 전쟁은 서방측의 최신예 무기가 첫선을 보인 화련한 무기 전시장이었다. 30cm밖에 오차가 나지 않는 토마호크 크루즈 미사일, 레이더에도 포착되지 않는 F117A 스텔스 기, 스커드 미사일을 공중에서 요격하는 패트리어트 미사일, 아파치 헬기, 뿐만 아니라 미국의 군사위성의 활약도 눈부셨다. 미사일 공격을 미리 알고 경보를 발하는 조기경보 위성, 구름층은 물론 사막의 모래층까지 3m가량 투시할 수 있는 레이더 위성 라크로스, 적진관측 사진을 찍어 보내주는 사진정찰위성 등 첨단 과학기술과 전자장비가 총동원된 전자오락 게임 같은 전쟁이었던 것이다. 다국적군은 이 최신무기로 하루 평균 2천 회, 30초에 한 번 꼴로 이라크와 쿠웨이트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2월 24일 미, 영, 프, 사우디 11개국으로 구성된 다국적군은 지상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앞서 소련의 고르바초프의 중재로 이라크가 제시한 8개안의 종전 평화협의안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26일 새벽 1시 35분, 이라크는 쿠웨이트 주둔군을 철수한다고 방송했다. 그러나 미국은  아무러 통보를 받지 못했다.면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27일, 부시 대통령은 밤 12시를 기해 종전을 선언한다고 발표했다. 휴전회담은 3월 3일 이라크 남부 사프완 공군기지에서 열렸다. 미국의 슈와르츠코프 다국적군 사령관, 사우디의 할리드 빈 술탄 아랍군 사령관, 이라크이 아미드 국방부 작전국장, 마흐무드 3군 사령관이 참석한 가운데 이라크는 미국측이 제시한 평화안을 전면 수용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40일에 걸친 걸프 전쟁은 이라크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98. 핵과 인류의 미래-미국, 단거리 핵 폐기 선언 (199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91년/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1991년 9월 27일 대통령 부시는 백악관 집무실에서 TV중계를 통해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지상 및 해상 발사 단거리 핵무기를 일방 폐기 또는 철수할 것을 선언했다.
  미국이 폐기하겠다고 선언한 핵무기는 유럽에 배치된 수천기의 핵폭탄, 지상 발사 미사일, 잠수함과 전함에 탑재된 4백기 이상의 토마호크 핵 크루즈 미사일, 항공모함의 핵폭탄 등이다. 여기에는 미국이 공식적으로 시인하고 있지는 않지만 한국에 배치되어 있는 핵무기도 포함된다. 미국의 핵무기 전문가가 펴낸  핵전장이란 책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군산 미공군기지에 핵폭탄 60개, 8인치포 핵포탄 40개, 155밀리 곡사포 핵포탄 30개, 핵지뢰 21개, 총 151개의 전술핵무기가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1976년 미국 방위정보 센터는 주한 미군의 F4팬텀을 비롯하여 지대지 로켓, 지대지 미사일 등 핵무기 운반기능 무기에 운반가능 탄두 수를 곱하는 산출방식으로 계산, 661개 내지 686개의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부시 선언으로 단거리 핵이 폐기되어도 대륙간 탄도 미사일 ICBM과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 SLBM등 전략 핵무기가 그대로 남아 있고, 별들의 전쟁이라 불리는 전략 방위구상은 계속 추진되고 있어 핵전쟁의 위협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핵전쟁은 온 인류를 파멸시킬 아킬레스 건이다. 지금까지는 지구상 어느 곳에서 원자폭탄이 터졌을 경우, 인류의 반수가 즉사 혹은 단기간에 죽더라도 나머지 반수는 어떻게든 생명을 유지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연구는 생존자의 앞날에 핵겨울 이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져 결국 온 인류가 멸절하고 말 것이라고 한다.
  우선 원자폭탄 투하로 대규모 화재가 일어나고 그 때문에 생긴 그을음 섞인 연기가 상승기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원폭 투하 후 약 10일쯤에는 두터운 연기층이 북반구를 뒤덮게 된다. 핵공격을 면한 지역에도 강한 편서풍에 의해 두터운 연기층이 몰려올 것이다. 몇 주일 후 이 연기층은 남반구에까지 퍼진다.
  원폭투하 20일 후, 연기층이 태양광선을 차단하여, 북반구의 중위도 지방은 평균기온보다 약 50도 정도 기온이 떨어진다. 그뿐 아니라 지구 전체의 기온이 급격히 떨어져 어둡고 지독히 추운 겨울이 계속된다. 이러한 기온변화로 우선 농업이 괴멸된다. 북반구 중위도 지방은 농업지대이므로, 설령 핵전쟁에 휘말리지 않은 나라라 해도 세계농업의 파탄으로 인한 기아상태를 면할 수 없다. 이윽고 모든 동식물은 집단적인 멸종위기에 빠지고 만다. 인간도 예외일 수는 없다.
  현재 미국과 소련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의 단 10분의 1만 써도 핵겨울이란 대규모 기후변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한다. 미국은 이미 1950년대 초 그 충분량을 넘어섰다.
  인류를 파멸시킬 또하나의 위험은 온실효과 이다. 지구를 알맞게 따뜻이 데워주는 것은 대기주위 이산화탄소이다. 이산화탄소가 태양광선의 적외선을 흡수, 열의 대기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기중의 이산화탄소의 양이 계속 늘어나는 데 문제가 있다. 이는 오랜 기간 석유, 석탄, 천연가스 같은 화석연료를 대량 사용해온 결과이다. 아직까지 대기중의 이산화탄소를 제거하는 기술은 개발되지 못하고 있다.
  만약 이대로 화석연료를 계속 사용한다면, 21세기 중반에 이르러 지구의 기온은 전체적으로 몇 도쯤 상승할 것이라고 한다. 그 정도의 온도변화가 미치는 영향은 실로 대단하다. 우선 빙하가 녹기 시작한다. 지구상의 빙하가 다 녹으면 해면이 10m가량 높아져 연안의 도시들은 모조리 물속으로 가라앉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200만년 전, 원숭이로부터 인간을 진화케 한 것은 평균 5도 정도의 기온 변화였다. 온실효과로 인한 기후변화는 이번엔 인류를 멸절시킬지도 모르는 것이다.
  지구 가까이에는 금성이 있는데 그곳 대기에는 실로 엄청난 이산화탄소가 함유되어 있다. 이 때문에 대량의 태양열이 대기밖으로 방사되지 못해서 금성의 표면온도는 무려 섭씨 470도라는 고온을 유지하고 있다. 바로 서양의 고전 문학작품 속에 묘사된 지옥의 세계인 것이다. 지구도 이대로 이산화탄소를 계속 방출한다면 틀림없이 금성처럼 된다. 코스모스의 저자인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말이다.
  온실효과를 막으려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줄여야 하고 현재로선 화석연료를 쓰지 않는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태양열, 지열, 조류, 핵융합 등 대체 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 그중 실용화에 따르는 경제성을 고려할 때 가장 주목받고 있는 것이 핵융합에 의한 원자력 에너지이다. 그러나 원자력은  절대로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 기술 이다. 1986년 5월 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상 최악의 사고가 발생, 원자력 에너지의 사용에 경종을 울렸다. 원자력 사용에 따르는 방사성 폐기물의 처분도 커다란 문제거리이다. 원자력 발전에 사용된 핵연료에서 나온 플루토늄 239는 극히 적은 양으로 폐암을 일으키는 맹독성인데다가 10kg만 가지면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는 위험한 물질이다. 그 위험이 없어지려면 반감기의 열 배인 무려 24만 년 동안 엄중히 관리해야 한다고 한다. 그에 비해 원자로의 수명은 불과 평균 30년이다.
  이렇게 볼 때 원자력의 이용은 분명 파우스트의 거래이다. 일시적인 편리의 대가로 후손들에게 위험한 방사성 폐기물을 남겨주는 셈인 것이다.
라듐 발견으로 원자력 시대의 문을 연 퀴리는 1903년 라듐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범죄자의 손에 들어가면 라듐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그래서 도대체 인간이 자연의 비밀을 안다는 것이 좋은 일인가, 그것으로 이익을 얻기에 충분할 정도로 인간정신이 성숙해 있는가 하는 의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99. 현대의 흑사병, 에이즈-제4차 세계 에이즈 날(199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91년/한반도 비핵화 선언, 서울 APEC 제3차 각료 회의 개최

 

  1991년 12월 1일은 세계보건기구 WHO가 정한 제4차 세계 에이즈 날이다.
이날 160개국에서 이 병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여러 가지 행사가 벌어졌다. 미국의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에이즈로 사망한 10만 명의 미국인을 추모하는 뜻에서 이날 밤 대형 빌딩과 교각의 불이 일제히 꺼졌으며, 프랑스에서는 파리 시내에 세워진 크리스마스 트리에 8백 명의 어린이 에이즈 환자를 상징하는 8백개의 트리 장식물을 내걸었다. 영국에서는 수백 개의 교회가 예배를 통해 문제의 심각성을 다루는 한편, 성공회의 조지 캐리 켄터베리 대주교와 가수 클리프 리처드 등이 에이즈 퇴치를 호소했다. 소련 모스크바 시 청사 부근에서는 러시아 동성연애자협회 회원들이 콘돔과 함께 안전한 성생활에 관한 책자를 무료로 배포했다.
  세계보건기구의 발표에 따르면, 91년 10월 현재 보고된 세계의 에이즈 환자 수는 약 42만 명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150만 명의 환자와 800만 내지 천만의 보균자가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서기 2000년에는 에이즈 환자 수가 1,200만 내지 1,800만으로 늘어날 것이며, 에이즈를 발병케 하는 HIV바이러스 양성 반응자 수는 무려 4천만에 다다를 것으로 내다보았다.
  일단 걸리면, 신체의 면역성이 떨어져 급기야 사망하고 마는 불치의 병 에이즈, 에이즈가 맨처음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아프리카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최초로 환자가 발견된 것은 미국에서라는 정도이다.
  매우 빠른 속도로 전염되며 치료법이나 예방법이 아직 발견되지 못하고 있는데다가, 그 전염경로가 주로 성적 접촉을 통해서라는 점에서 에이즈는 현대인의 도덕성 문제와 결부되어 현대의 흑사병, 신이 내린 천형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현재 세계 각처에서 매일 5천 명 꼴로 새로운 감염자가 발생하고 있다.
  미국에서 에이즈 환자가 처음으로 보고된 것은 1981년이다. 미국 공중보건 당국은 이 병은 반드시 피를 통하거나 성적인 접촉을 통해서만 전염되는 것이지, 공기나 음식으로는 절대 옮기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악수를 하거나, 화장실을 같이 쓰거나, 샤워를 같이 하거나, 음식을 같이 먹거나, 사무실 집기를 같이 쓰는 것으로는 전염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이즈에 대한 공포는 대단했다. 뉴저지 주 워싱턴보로에 사는 9살 된 소년은 누이 동생이 이 병의 증세를 갖고 있었다. 사실이 알려지자 소년의 학급 학생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교회의 예배양식도 달라져야 했다. 성찬식 때 사람들이 빵만 받아들고 포도주 잔에는 입에 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90년 3월 현재 보사부에 공식통보된 주한 미군 에이즈 감염자는 33명, 그러나 이 숫자는 한국인 여성과 접촉한 사실이 있는 경우에 한하므로 실제 숫자는 50여 명에 달한다고 보사부는 발표했다. 우리 나라에서 에이즈 환자가 처음 발생한 것은 1985년 6월이다. 외국인 교환 교수였던 그 환자는 본군으로 돌아가 사망했다. 이후 우리나라 에이즈 환자 수는 급증, 90년 3월에는 총 78명, 91년 12월에는 그 두배를 넘는 총 167명이 보고되었다. 그 가운데 15명이 사망하고 1명은 출국, 현재 151명이 있는데 남자가 134명, 여자가 17명이다.
  에이즈는 성관계가 문란한 사람이다. 동성 연애자들이 걸리는 병으로 여겨져 왔지만, 최근에는 수술시 수혈받은 피를 통해 감염된 경우가 상다수 보고되었으며, 91년 11월 한달 동안에만 목사, 가정주부, 외향선원 등 5명이 새롭게 감염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제 에이즈는 동성 연애자나 윤락여성만 걸리는 병이 아니라 누구든지 언제라도 걸릴 수 있는 병이 되어버린 것이다.
  1991년 6월 21일 이탈리아에서 세계 에이즈 대회가 열렸다. 여기서 96년경 예방백신이 개발될지 모른다는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현재 에이즈 예방백신에 대한 연구는 미국, 영국 등지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에이즈 바이러스와 겉모양만 똑같은 바이러스를 반들어 항체형성을 유도하는 방법, 에이즈 바이러스를 대량 배양하여 바이러스를 죽인 다음 표면 단백질을 잘게 나눠 항원으로 만들어서 체내에 주입하는 방법, 에이즈 바이러스의 핵심 유전자를 죽여 바이러스를 불활성화시킨 다음 그대로 체내에 주입, 항체를 유도하는 방법 등 백신 개발을 위한 접근방법도 다양하나 그 어느 것도 성공 여부는 아직 미지수이다.
  14세기에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절반을 쓰러뜨리고 중세를 몰락시킨 한 원인이 되었다. 20세기 말, 급격히 퍼져나가고 있는 에이즈는 과연 어떤 역사적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심각히 대두되는 환경문제, 핵문제와 더불어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한 요인이 되진 않을까 생각한다.


100. 사가라드는 현존 사회주의-소연방해체, 독립국가공동체 출범(199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991년/국제노동기구ILO가입, 제5차 남북고위급 회담, (남북 화해,
불가침, 교류협력을 위한 합의서) 채택

 

  1991년 12월 8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을 비롯하여 크라프추크 우쿠라이나 공화국 대통령, 슈시케비치 벨로루스(구 백러시아) 최고회의 의장 3인 독립국가 공동체 창설을 선언했다. 벨로루스의 부크 강변에 있는 브레스트에서 비공개 회담을 가진 이들은 소비에트 연방을 해체하고 대신 외교, 국방 핵 통제권을 공동관장하는 독립 공화국들의 공동체를 결성한다고 발표했다.
  연방 대통령 고르바초프는 3개국만의 합의로 소련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는 없다. 고 반대했다. 그러나 나머지 8개 공화국들이 속속 공동체에 가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대세가 기울자 고르바초프도 하는 수 없이 이에 승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발트 3국이 독립해 떨어져나간 후, 나머지 공화국들을 묶어 새로운 연방을 결성하려던 고르바초프의 신연방조약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은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1917년 세계에서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키고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로 당당히 출범한 지 꼭 74년 만의 일이다.
  독립국가 공동체는 겉으로는 소비에트 연방과 비슷하지만, 실인즉 아주 다르다. 우선 공동체는 구 소련 같은 강력한 중앙정부를 갖지 않는다. 구 연방 하에서는 중앙정부 밑에 있는 행정단위 정도의 지위를 갖고 있었는 데 비해, 이제는 각 공화국이 저마다 하나의 독립국이 되어 독자의 법률, 정책, 외교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공동체의 본부는 모스크바가 아니라 벨로루스의 수도 민스크에 위치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11개 공화국 가운데 가장 큰 러시아 공화국이 공동체의 주도권을 쥐고, 그 대통령인 보리스 옐친이 고르바초프를 대신하여 새로운 지도자로 떠올랐다. 보리스 옐친은 러시아 공화국이 구 소련의 모든 채무를 승계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보리스 옐친, 그는 1931년 2월 1일 우랄 산맥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우랄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건설기술자가 된 그는 1961년 공산당에 입당했다. 67년부터 85년까지 지방 당에서 일하다가 81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발탁되어 승진했다.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주창하며 소련 내부의 개혁을 단행하자, 옐친은 고르바초프보다도 더 진보적인 개혁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자유의 기수로 자타가 인정할 만큼 각광을 받은 것은 91년 8월, 보수파의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용감하게도 쿠데타 군의 탱크 위에 올라가 열변을 토한 순간부터였다. 이 순간 이후 옐친은 고르바초프를 누르고 새 시대를 열 주인공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후 옐친은 고르바초프가 지니고 있던 연방대통령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차례차례 빼앗기 시작했다. 옐친은 고르바초프의 신연방조약은 구 체제를 부활시키려는 헛된 노력에 불과하며, 연방이라는 껍데기를 고수해서는 결코 새로운 소련을 건설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구상은 러시아 공화국이 패권을 행사하는 러시아 패권주의에 다름아니다. 각 공화국들의 독립주권을 인정하되, 러시아 공화국의 세력권 안에 묶어둔다는 구상인 것이다.
  옐친의 계혹은 일단 성공한 듯하다. 고르바초프는 12월 26일 연방대통령 직에서 물러났으며, 독립국가공동체는 순조로운 항해를 시작했다. 그렇지만 공동체의 미래와 옐친의 앞날이 장미빛인 것만은 아니다.
  독립국가공동체가 우리를 배불리 먹여주기나 했으면 바랄 것이 없겠다. 모스크바에 사는 어느 부인의 말처럼, 소련인의 최대 관심사는 경제난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옐친은 그 해결책으로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제시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계획경제 체제를 유지해온 소련을 하루아침에 시장경제로 바꾸는 데는 무한정한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옐친 자신을 비롯하여 소련 국민의 대다수는 시장경제 를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구 소연방 시절에는 국가가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해주는 대신 그 관료주의와 무사안일주의에 진저리를 쳐야 했다면, 앞으로 소련인들은 경쟁에서 살아남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냉혹한 시장경제체제에서 생존하는 법 부터 궁리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 시장경제체제는 당분간 어떤 의미로든 견디기 쉽지 않을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다음과 같이 소련의 앞날을 우려했다.
  ...소련사회는 정치적으로나 정신적 양면에서 다 같이 자유로워졌습니다...저는 현상황에 대한 여러분의 불만은 물론 전반적 전위체계와 저 자신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과거 수년간의 민주적 성과들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몹시 중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성과들은 많은 고통과 비극을 겪을 끝에 얻어진 역사적 산물입니다. 어떤 상황이나 이유 아래서도 이들을 포기해선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보다 나은 장래에 대한 모든 희망을 땅 속에 묻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어쨌든 소련은 죽었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가 불붙인 민족주의 돌풍을 너무 과소평가한 건 아니었을까? 20세기가 사회주의의 시대였다면, 그 마지막 10년의 첫해는 현존 사회주의의 대거 참잠을 알리는 서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