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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100장면 [60~70/100]

구름위 2013. 6. 3.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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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 세계사 100장면
지은이 : 박은봉
출판사 : 가람기획

 

61. 다이너마이트와 노벨 상 -노벨, 다이너마이트 발명(1866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864년/흥선 대원군 집권,  1865년/경복궁 재건 시작

1896년 12월 10일 알프레드 노벨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 재산은 모두 돈으로 바꾸어 기금으로 만들고 해마다 그 이자를 지난 1년 동안 인류를 위해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상금으로 준다. 즉,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 문학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을 쓴 사람, 세계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또는 전쟁준비를 방지하거나 줄이기 위해서, 또는 평화회의를 열거나 확대하기 위해서 가장 훌륭한 공헌을 한 사람에게 주도록 한다. 이러한 부문의 상금은 어느 나라 사람에게 주어도 좋다'
  그의 유언에 따라 약 9백만 달러에 달하는 기금이 마련되었고, 상의 명칭은 그의 이름을 따서 노벨 상으로 정해졌다. 최초의 노벨 상 수상식은 1901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거행되었다.
  노벨은 1833년 10월 21일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네 형제 중 셋째였던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병약했다. 가난한 발명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로 건너간 그는 문학에 심취, 셀리의 시를 읽고 장차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꿈을 키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가 자신의 뒤를 이어 발명가가 되어주기를 바랐다.
  1850년 17세 되던 해 노벨은 혼자 미국을 거쳐 프랑스로 가서 기계공학을 공부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당시 러시아는 크림 전쟁이 한창이었으며, 노벨의 아버지는 무기제조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1862년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 연구를 시작했다. 액체로 된 니트로글리세린은 보통 화약의 몇십 배 강한 폭발력을 지녔지만 두드리거나 문지르기만 해도 폭발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했다. 이것을 안전하세 사용할 수만 있다면 종전의 어떤 화약보다도 강력한 힘을 내게 될 것이 분명했다.
  최초의 실험에서 성공을 거둔 노벨은 연구를 거듭한  끝에, 니트로글리세린을 채운 통 속에 보통 쓰이는 검정색 화약을 담은 유리관을 넣고 유리관의 뚜껑을 막으면 폭발력이 훨씬 강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듬해인 1863년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 화약에 대한 특허를 따내고 스톡홀름에 공장을 세웠다. 그해 말 옴메베루그 광산에서 노벨이 만든 화약이 최초로 사용되었다. 대성공이었다. 커다란 바위가 흔적도 없이 날아가고 구리 광석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광산 주인은 노벨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왔다.
  화약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노벨의 공장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동생 에밀과 직공 세 사람, 근처를 지나가던 행인 하나가 목숨을 잃었다. 공장은 물론 산산조각이 났다. 스웨덴 정부는 스톡홀름에서 화약제조를 일절 금지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노벨의 아버지는 충격으로 뇌일혈을 일으켜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노벨은 연구를 계속했다. 형과 함께 독일 함부르크 근처에 공장을 세우고 알프레드 노벨 회사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여기서 제조된 화약은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 미국, 호주 등 세계 각지로 팔려나갔다.
  그러나 1865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난 것을 비롯, 파나마 운하를 지나가던 화물선이 폭발하여 476명이 사망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니트로글리세린 저장창고가 폭발, 14명이 사망하는 등 사고가 잇달았다.
  그러자 노벨은 액체인 니트로글리세린을 고체로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고체로 만들면 운반하기 쉽고 따라서 폭발사고도 방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1866년 드디어 노벨은 위대한 발명을 해냈다. 규조토에 니트로글리세린을 스며들게 한 것이다. 그해 10월 노벨은 이 화약에 다이너마이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이너마이트는 인간의 노동을 대폭 줄이는 데 기여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만들어진 이집트의 수로는 길이 17킬로미터, 그중 터널이 6킬로미터에 달한다. 이 수로를 만들기 위해 3만 명이 11년간 일을 했다. 그런데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면 100명 정도의 인원으로 10개월이면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후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보다 화력이 강한 폭발성 젤라틴, 발리스타이트라는 무연화약을 연달아 발명했다. 그의 발명은 인간을 이롭게 하기도 했지만 인간 생명을 대량으로 살상하는 무기로 상용되었다. 노벨은 만년에 이 점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듯, 평화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돈을 희사하겠다고 말했다. 노벨 상은 이렇게 해서 생겨나게 된 것이다.
  1890년 그는 이탈리아의 산레모로 옮겨나 6년 후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62. 계급 없는 평등사회를 위하여 -마르크스, (자본론)제1권 출간(1867년)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1866년/제너럴 셔먼 호 사건. 병인양요로 프랑스와 싸움
 
  역사상 이름을 남긴 학자들 중 마르크스만큼 후대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의 사상은 혁명을 낳았으며 수많은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케 했다. 마르크스 자신의 말대로 마르크스의 사상은 단지 '세계를 해석하는 철학'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는 철학'이었다.
  칼 마르크스는 1818년 독일 라인 주 트리에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명망있는 법률가였으며 어머니는 귀족 출신이었다. 8남매 중 셋째이자 장남인 마르크스는 형제들 가운데서 가장 머리가 좋고 자잘이 뛰어나 부모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자랐다.
  트리에르 고등학교를 졸업한 마르크스는 1836년 본 대학 법률학부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법률공부보다는 시와 철학에 열중했다. 1년 후 베를린 대학으로 옮긴 그는 헤겔 철학이 풍미하고 있던 베를린에서 불타는 열정으로 지적 탐구에 몰두했다. 철학, 논리학, 언어학, 수학, 문학, 시 등등 그의 지적 섭렵은 온갖 분야에 미쳤다.
  그때 마르크스는 예니 폰 베스트팔렌이란 여성과 약혼 중이었다. 예니는 트리에르 사교계의 꽃으로 불릴 만큼 아름답고 지성적인 여성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젊은 마르크스의 재능을 아껴, 1838년 마르크스의 아버지가 죽자 대신 그를 극진히 보살펴주었다.
  두 사람은 7년간이나 약혼상태로 지냈다. 그 동안 마르크스는 공부를 계속했고, 예니는 온갖
소문과 주변의 악의에 찬 시선을 견디며 마르크스를 기다렸다. 예니는 의지 굳고 인내심 많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마르크스 못지않는 열정으로 헤겔 철학을 비롯, 지적 세계를 섭렵했다. 이후 그녀는 평생 동안 마르크스의 충실한 비서요 동반자로 일했다. 마르크스의 원고를 정리해주고 적절한 비판을 가하는 일은 그녀의 몫이었다.
  1841년 마르크스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라는 논문으로 예나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라인 신문) 편집장이 되어 날카로운 필봉을 휘둘렀다. 그가 쓴 몇 개의 논설 때문에 정부의 탄압을 받게 되자, 1843년 10월 마르크스는 임신 3개월의 예니와 함께 파리로 떠났다.
  파리에서 마르크스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 연구하는 한편 아담 스미스리카도의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러면서 (독불 연감)에 글을 썼다. 평생의 동지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만나 것도 이때였다.
  1845년 2월 마르크스는 프랑스에서 추방당해 브뤼셀로 갔다. 그후 엥겔스와 영국을 여행하고 공동저술에 착수하는 한편 공산주의자 회합에 참석했다.
  1848년 2월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다시 런던으로 망명했다. 런던에서의 생활은 몹시 힘겨웠다. 집세를 못내 쫓겨나야 했으며, 가난과 질병으로 두명의 아이를 잃는 비운을 맛보기도 했다.
  '아내와 꼬마 제니도 병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네겐 치료비가 없으니 의사를 부를 수도 없습니다. 근 열흘간 나는 가족들에게 빵과 감자만을 먹였고 오늘은 무얼 구할 수 있을지 걱정일 뿐입니다'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당시의 어려운 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그러나 그 같은 상황 속에서도 마르크스는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결과 1867년 (자본론)제1권을 탈고했다. 그 책은 마르크스의 표현처럼 '건강, 행복, 가족을 희생해서'이룬 작품이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했다. 그는 산업화가 낳은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직접 보았고, 혁명과 반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유럽사회를 체험했다. 그리하여 뛰어난 통찰력으로 자본주의란 모든 것을 상품화하며 인간이 인간을 소회시키는 체제라고 간파했다.
  일찍이 그는 (공산당 선언)에서 자본주의는 부르주아에게만 유리한 사회일 뿐 노동자들에게 주어지는 건 굶주림과 사슬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 사회, 지배계급도 피지배계급도 없는 평등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자본론)은 바로 그러한 사회의 건설을 위해 자본주의의 본질을 명쾌히 밝힌 필생의 업적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독일 고전철학, 영국의 고전경제학, 그리고 프랑스의  사회주의 사상을 모두 흡수하여 새로이 극복한 것으로서 종래의 관념론을 뒤집은 유물철학이다. 그는 인류사회가 일정한 법칙을 갖고 변화발전하며,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몰락하고 사회주의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러한 확신 아래 평생 혁명을 위해 일하고 글을 썼다.
  1881년 예니가 사망했다. 오랜 생활고와 망명생활에도 꿋꿋이 남편 곁을 지켜온 그녀는 장암에 걸려 병마에 시달리다 죽어갔다. 마르크스도 뒤를 다르듯 2년 후인 1883년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그가 죽은 뒤 더욱 널리 보급되고 실천에 옮겨졌다. 유럽 각지에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났으며, 1917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러시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63. 바다를 이은 최초의 운하 -수에즈 운하 개통(186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868년/독일인 오페르트의 도굴 사건
 
  1869년 세계 교통사상 획기적인 두 개의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아메리카에서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된 것이고, 또 하나는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것이다. 그중 수에즈 운하는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대운하라는 의의 외에, 유럽 선진국들이 본격적으로 아프리카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당시 이집트는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이집트 총독은 투르크로부터의 독립을 원하여 영국과 프랑스에 후원을 요청했다. 1859년 총독은 수에즈운하 건설이라는 대규모 공사를 일으켰다. 프랑스 인 리셉스가 그 총책임을 맡게 되었다.
  영국은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이 운하가 건설되면 인도양과 아시아로 가는 항로가 대폭 단축되어 식민지 경영이 훨씬 유리해지리라는 생각에서 운하 건설에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렇지만 운하의 규모상 영국의 자본만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아 프랑스에게 합작을 청했다.
  프랑스는 영국이 이집트를 장악하면 손해를 볼 뿐이라고 생각하여 합작을 주저했다. 영국 수상 글래드스턴은 이집트에서 영국의 군사적 행동은 없을 거라고 약속, 프랑스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1869년 11월 17일 착공한 지 10년 만에 운하가 완공되었다. 총길이 162.5킬로미터, 바다와 바다를 잇는 세계 최대의 운하였다.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런던과 싱가포르간의 항로는 2만 4천킬로미터에서 1만 5천 27킬로미터로 절반 가량 줄어들게 되었다.
  이집트 인들은 이에 반발, 1881년 아라비 파샤의 지도하에 반란을 일으켰다. 영국은 군대를 보내 반란을 진압하고, 이 기회에 아프리카 남부로 진출하고자 했다.
  1883년 나일 강 상류에 있는 수단에서 이슬람 교도들이 이집트와 그를 배후조종하는 영국에 대해 성전을 선포했다. 영국은 이집트 총독의 군대 만여 명을 동원, 영국군 장군 윌리엄 힉시의 지휘하에 수단을 정복하게 했다. 그러나 전쟁은 수단측의 승리로 끝났다. 이집트 군은 이 싸움에서 전멸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글래드스턴은 새로운 수단 정복 계획을 세웠다. 1885년 영국은 고든을 수단으로 파견했다. 그는 바로 중국에서 상승군이란 용병대를 지휘, 무력으로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고든 역시 수단의 지도자 마흐디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의 목은 창 끝에 꿰어져 부도덕한 정복자의 말로로서 공개되었다.
이에 영국은 1898년 옴두르만 전투에서 기괸총으로 수단 인 11,000명을 무차별 사살, 고든의 복수전으로 삼았다.
  그후 영국은 보어 전쟁을 일으켜 남아프리카 연방을 만들어 식민지로 삼고, 케이프, 카이로, 캘커타를 거점으로 하는 이른바 3씨정책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영국의 뒤를 이어 유럽 열강은 질세라 아프리카로 진출했다. 지금까지 미지의 세계로 알려져 있던 아프리카 내륙지방에 대한 탐험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탐험가는 스코틀랜드의 의사 리빙스턴과 영국인 기자 스탠리이다. 리빙스턴은 1840년 아프리카로  건너가 약 30년 동안 아프리카 중남부 일대를 탐험했다. 그의 탐험기는 유럽 인들의 호기심을 부채질하기에 충분했다.
  스탠리는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후원을 받아 중앙 아프리카의 콩고를 탐험, 원주민과 협정을 맺어 벨기에를 콩고에 진출케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 열강은 앞을 다투어 탐험가를 후원하여 아프리카 진출을 서둘렀다.
  아프리카는 순식간에 서구 열강의 식민지 혹은 보호령이 되어갔다. 프랑스는 사하라 사막을 중심으로 아프리카 서부, 북부, 중부 일대를 장악했으며, 벨기에는 콩고를, 이탈리아는 트리폴리와 리비아를, 독일은 카메룬, 토고를 손에 넣었다. 아프리카  대륙에 남은 독립국은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뿐이었다.
  아프리카 지도를 보면, 나라간의 국경선이 다른 대륙과는 다르게 일직선으로 곧게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를 분할하면서 정복국의 편의에 따라 마음대로 경계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원주민의 삶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그들에게 유럽 백인들이 갖다준 것은 학살과 노예사냥, 착취와 굴종뿐이었다.
  
64. 철과 피만이 통일을 가져다준다 -비스마르크, 독일통일 달성(1871년)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 1871년/신미양요로 미국과 싸움. 처화비 건립. 호포법 실시
 
  나폴레옹 몰락 후 유럽은 봉건반동의 회오리에 휘말렸다. 빈 체제로 불리는 이 시대를 주도한 인물은 오스트리아의 외상 메테르니히였다. 각국의 국경선이 혁명 이전으로 되돌려지고 나라마다 일제히 봉건왕조가 부활되었다.
  독일은 빈 회의의 결정에 의해 35개 국가와 4개 자유시로 분립되었다. 프로이센은 그중의 한 소국이었다.
  1861년 즉위한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융커 출신의 비스마르크를 수상으로 등용, 독일통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융커란 독일 북동부의 지주층을 가리키는 말로, 이들은 군대와 고위관리의 요직을 독점하고서 국왕의 충실한 지지기반이 되어주고 있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815년 태어났다. 그는 독일이 통일되면 프랑스, 영국 못지않은 세계적인 강대국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인물이었다.
  청년 시절, 무려 28번의 결투를 벌인 경력을 지닌 그는 32살에 의원으로 당선, 황제 통치라야 국민이 행복과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보수정치가로서 입지를 굳혀나갔다. 왕은 그를 신임하여 독일 연방희회의 프로이센 대표로 임명했다. 그의 나이 36살 때의 일이다.
 
비스마르크는 이 직책을 7년간 수행했고, 그후에는 러시아 대사, 프랑스 대사로 활약하면서 무력으로 누르는 방법밖에 없다고 주장, 군제 개혁을 단행했다.
  '오늘의 문제는 말이나 다수결로가 아니라 오로지 철과 피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그는 의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이른바 철혈정책을 천명한 것이다. 그리고 군비확장에 반대하는 의회를 눌러 4년 동안 그 권리행사를 정지시키고 국민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 군비확장에 총력을 기울였다.
  비스마르크는 참모총장 몰트케, 육군대신 론과 함께 독일통일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통일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였다.
  비스마르크는 우선 프랑스와 비밀리에 협약을 맺어 오스트리아를 고립시켰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라인 강 유역의 합병을 인정받는다는 조건하에 중립을 지킬 것을 약속했다. 1866년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공격했다. 오스트리아는 7주 만에 무너졌다. 프로이센은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프랑크푸르트 등을 합병하고 라인 강 이북을 손에 넣어 북독일연방을 결성했다.
  다음 목표는 프랑스였다. 비스마르크는 미리 오스트리아, 러시아, 이탈리아에 비밀외교를 벌여 프랑스를 원조하지 못하게 하고 교묘하게 프랑스를 유도, 선전포고를 하게 했다. 1870년 7월 마침내 전쟁(보, 불전쟁)이 시작되었다. 전황은 프로이센에게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오랫동안 준비해온데다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경험까지 갖춘 프로이센 군을 프랑스는 당해내지 못했다.
  8월 프랑스 군의 본거지 메스 요새가 점령당하고 이를 구원하러 나선 나폴레옹 3세가 세당에서 포로로 잡혔다. 프랑스는 즉시 휴전을 제의했으나 비스마르크는 이를 거절하고 파리로 진격, 1871년 1월 파리를 함락시켰다. 프랑스는 철과 석탄의 보고  알자스 로렌 지방을 떼어주고 배상금 50억 프랑을 지불해야 했다.
  파리 함락을 눈앞에 둔 1871년 1월 18일, 빌헬름 1세는 프랑스 왕가의 상징 베르사유 궁에서 독일제국의 황제 취임식을 가졌다. 이로써 수십 개로 분립해 있던 독일연방은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되었으며, 프로이센호헨촐레른 왕가는 독일 황실이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통일된 독일의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약 20년 동안 그는 탁월한 외교수완을 발휘했다. 동맹정책을 써서 독일의 지위를 강화하고 프랑스의 부흥을 저지하는 데 주력했다. 당시 유럽 정치는 기실 비스마르크에 의해 움직여졌다. 때문에 이 시기를 비스마르크 시대라고 한다.
  그렇지만 유럽 각국은 독일의 팽창을 매우 경계하고 있었고, 국내적으로는 카톨릭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성장, 그를 위협했다. 당시 독일 사회주의 운동은 라살레와 빌헬름 리프크네히트가 각각 이끄는 두 그룹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두 그룹은 1875년 독일 사회민주당을 결성하고 (고타 강령)을 발표했으며, 1877년 12명의 의원을 하원에 내보냈다
그러자 비스마르크는 1878년 사회주의 탄압법을 제정하여 사회주의자들의 집회, 결사, 출판을 금지하는 한편, 질병보호법, 실업보장법, 노후보장법 등 일련의 사회복지법을 제정하여 노동자들을 사회주의 운동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세력은 지하로 들어가 도리어 확대일로를 걸었다.
  1890년 비스마르크는 새 황제 빌헬름 2세와의 불화 끝에 재상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불만 속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1898년 83살로 세상을 떠났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후진국이던 독일은 비스마르크 시대에 유럽 제일의 강대국이 되었다. 그리고 뒤늦게 국가 주도의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며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65. 어둠을 몰아낸 제2의 빛 -에디슨, 백열전구 발명(187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875년/운양호 사건, 1876년/일본과 강화도조약 체결
  1879년/지석영, 종두법 보급 시작
 
  1929년 10월 21일 미국 미시간 주 디어본 그린필드 마을의 포드박물관에서 백열전구 발명 5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라듐을 발견한 퀴리 부인, 최초로 비행에 성공한 라이트 형제, 에디슨의 친구이자 자동차 왕으로 유명한 헨리 포드, 후버 대통령, 그리고 에디슨의 조수였던 프랜시스 줄 등이 참석했다.
  이윽고 저녁때가 되어 회장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에디슨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옛날의 조수에게 말했다.
  '줄, 천천히 발전기를 돌리게'
  그런 다음 에디슨은 전등 스위치를 넣었다.
  순간, 수백 개의 백열전구에 불이  켜지고 회장은 대낮처럼 환해졌다.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후버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디슨 씨는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미국인입니다. 에디슨 씨는 세계에서 어둠을 몰아냈습니다. 우리는 모두 큰 혜택을 입고 있습니다. 나는 미국 대통령으로서 이 위대한 미국인에게 경의를 표할 수 있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바입니다'
  이번엔 에디슨이 인사를 했다.
  '만약 우리들이 한 일이 이 세상에 아주 조금이라도 행복을 가져올 수 있었다면 나는 만족합니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가까스로 자리에 앉았다. 그로부터 2년 후 에디슨은 사망했다. 그의 나이 84살이었다.
  토머스 엘버 에디슨은 1847년 2월 11일 미국 오하이오 주 밀란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5대호의 하나인 이리 호에서 약 13킬로미터 거슬러 올라간 휴런 강 유역이었다. 에디슨은 7남매의 막내였으나 위로 셋은 어렸을 때 죽었다.
  에디슨은 어려서부터 매우 호기심 많고 엉뚱한 짓을 곧잘 해서 어른들로부터 꾸중을 듣는 일이 흔했다. 국민학교 성적은 맨 꼴찌를 면치 못했다.
  '네 머리는 썩어빠졌어!'
  어느 날 선생님으로부터 야단을 맞은 에디슨은 3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어머니로부터 공부를 배웠다. 어느 날 어머니가 준 (자연과학 학교)라는 물리학 책을 읽은 그는 과학실험에 몰두, 지하실에 실험실을 만들고 (에디슨 연구소)라 불렀다.
1859년 12살이 된 에디슨은 열차 신문판매원이 되었다. 매일 아침 7시 포트휴런을 출발, 3시간 걸려 디트로이트에 도착한 다음 저녁때까지 거기서 지내고 다시 열차를 타고 밤 9시 30분에 포트휴런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는 열차의 화물칸을 빌어 이동 실험실을 만드는 한 편, 여가 시간엔 디트로이트 시내 도서관에 가서 책이란 책은 모조리 읽어치웠다. 이 무렵 기차 실험실 안에서 화재를 일으켜 차장에게 얻어맞은 바람에 그는 귀가 조
금씩 나빠지기 시작했다.
  1862년 에디슨은 열차에 깔릴 뻔한 역장의 어린 아들을 구해준 보답으로 그에게서 전신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그후 에디슨은 전신기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실험과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이곳저곳 직장을 떠돌면서 그는 발명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1870년 에디슨은 뉴저지 주 뉴어크에 공장을 세웠다. 그가 발명한 '주식표시기'를 4만 달러에 팔아 그 돈으로 마음껏 실험에 몰두할 수 있는 장소를 얻은 것이다. 여기서 그는 하루 4시간밖에 자지 않으면서 일과 실험에 몰두했다. 젊고 유능한 젊은이들이 그의 공장에 모여들었다. 2중 전신기, 4중 전신기, 등사판, 에디슨식 전시펜 등 갖가지 발명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1876년 에디슨은 멘로파크라는 조용한 시골로 이사를 했다. 이곳에서 축음기와 송화기를 발명했고, 벨이 만든 전화기를 한층 개량했다. 사람들은 에디슨을 '멘로파크의 마술가'라고 불렀다.
  1878년 에디슨은 백열전구 연구에 착수했다. 그때까지 만들어진 백열전구는 고작해야 5, 6초 이상 빛을 발하지 못했다. 에디슨은 에디슨 전구회사를 만들어 수학자 앱튼, 유리기술자 보엠 등 유능한 조수들과 함께 연구를 거듭했다.
  1879년 10월 21일 밤, 무명실을 태워 만든 필라멘트 실험이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전구는 40시간 이상 계속 빛을 발했다. 그해 섣달 그믐날 밤, 에디슨은 멘로파크에 전등을 켰다. 사람들은 이 새로운 발명품을 눈으로 보기 위해 각지에서 밀어닥쳤다. 멘로파크 언덕길 양쪽을 밝힌 전등불이 금방 내린 하얀 눈을  환히 비추었다.사람들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리하여 전등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밖에도 에디슨은 영사기, 전기철도, 축전지 등 무려 1,300여가지 발명을 해냈다. 그의 발명은 인간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인류문명을 발전시켰다. 무엇이 그의 발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느냐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상상력과 큰 희망, 그리고 일하고 싶다는 의지이다'
  
66. 녹두 장군 전봉준 -조선, 동학농민혁명 발발(1894년)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1876년 조선은 뒤늦게 제국주의 대열에 뛰어든 일본에 의해 강제로 문호를 개방당했다. 이씨 왕조는 왕비 민씨 일족의 세도정치하에 부정부패가 만연한데다 친청파, 친일파로 갈리어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유지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때 부패한 봉건왕조를 무너뜨리고 외세를 몰아내려는 민족혁명운동이 일어났으니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은 전라북도 고부군 궁동면에서 1855년 태어났다. 천안 전씨, 몰락한 양반의 후예인 그는 오척 단신의 작은 체구 때문에 '녹두'라는 별명을 지녔다. 그의 쏘는 듯한 눈빛은 사람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그의 아버지 전창혁은 향교의 장의였으며 전봉준도 아이들에게 '천자문'과 '동몽선습' 등을 가르치는 훈장이었다. 그의 생활은 몹시 가난해서 논 세 마지기 농사에 여섯 식구가 의존, 아침엔 밥을 먹고 저녁엔 죽을 먹는 형편이었다.
  그는 1890년 동학에 입도, 고부 접주가 되었다. 동학은 1860년 경주 사람 최제우가 창시한 것으로 당시 유행하던 천주고, 즉 서학에 맞서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학의 근본 사상은 '인내천' 즉 '사람이 곧 하늘이요 평등하고 차별 없나니, 귀천을 가림은 하늘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고 했다. 동학은 차별받는 이, 억눌린 사람들의 가슴 속에 파고들었다. 동학에는 '삼불입'이라는 것이 있다. 곧 '양반, 부자, 서니는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다.  동학은 상놈, 노비, 백정 그리고 여성들을 위한 종교로 급성장했다.
  당시 일반 백성들의 삶은 대단히 곤궁하고 비참했다. 왕 이하 귀족들은 권세다툼에 눈이 어두워 있고 이른바 '삼정의 문란'이라 하여 탐관오리들이 가렴주구가 극에 달해 농토를 버리고 떠돌며 빌어먹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게다가 청나라, 일본, 러시아 등 외세가 물밀 듯 밀려들어와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일로를 걷고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의 발단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지나친 폭정 때문이었다. 1894년 갑오년 음력 정월 10일 새벽, 첫닭이 울자 머리에 흰 수건을 동여맨 1천여 명의 농민들이 괭이 혹은 죽창을 들고 모여들었다. 매서운 새벽 바람도 잊은 듯 농민군의 사기는 드높았다.
  전봉준의 지휘 아래 농민군은 단숨에 고부관아를 들이쳤다. 그러나 조병갑은 미리 알아채고 부호 은씨 집에 숨었다가 전주로 달아나버렸다.
  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은 갇혀 있던 억울한 사람들을 풀어주고, 조병갑이 세금으로 거뒀던 쌀을 빼앗아 도로 나누어주었다. 소식이 알려지자 각지에서 농민들이 속속 가담해왔다.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오하영, 손여옥 등이 각각 농민군을 이끌고 집결했다.

백산에 진을 치고 정세를 살피던 농민군은 3월 27일 '보국안민'의 깃발을 올리고 격문을 발표 행동을 개시했다. 이들의 목표는 전주성이었다.
  '첫째,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라. 둘째, 충효를  다하고 제세안민하라. 셋째,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성도를 깨끗이 하라. 넷째, 군대를 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귀를 멸하라. '
  이는 전봉준이 제창한 농민군의 4대 강령이다. 1만 3천 명의 농민군은 황토현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정읍, 고창, 무장, 영광, 함평을 파죽지세로 함락, 마침내 4월 27일 전주에 입성했다.
  고종과 민씨 일파는 몹시 당황했다. 민영준은 비밀리에 청나라 군벌 원세개를 만나 청나라 군사를 원병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조선을 완전히 수중에 넣을 기회를 엿보고 있던 청은 이때 이미 출병준비를 시작한 뒤였다.
  5월 2일 군함 2척을 이끌고  청군이 인천항에 상륙했다. 한편 호시탐탐 조선을 장악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도 병력을 급파, 7일 주한 일본공사 오도리가 420명의 병사와 대포 4문을 이끌고 서울로 들어왔다. 같은 날 섭지초가 이끄는 청군 1천 5백 명이 아산만에 도착하고 일본군 6천여 명이 인천, 서울 일대를 장악했다. 일본은 이 기회에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을 일소하고 자국의 세력을 부식시키고자 했다.
  그러자 전봉준은 외세를 몰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라고 판단, 더 이상 진격을 하지 않고 강화를 제안했다. 마침내 5월 9일 전주화약이 맺어지고 농민군은 전주에서 철수했다.
  이후 농민군은 호남 일대에 집강소를 세우고 농민자치를 실천했다. 그러나 약속과는 달리 청,일 양군은 저희끼리 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일본이 승리를 거둬 조선은 일본의 지배하에 들게 되고 말았다.
  9월, 농민군은 다시 일어섰다. 10만의 대군을 이루고 항일구국의 기치를 높이올린 혁명군은 공주를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10월 21일 목천 세성산 전투에서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죽창으로 싸우는 농민군에게 일본군은 무수한 총알세례를 퍼부었다. 쓰러진 농민군은 500여 명에 달했고 그들이 흘린 피는 냇물이 되어 골짜기에 흘러넘쳤다.
  11월, 7일간에 걸쳐 벌어진 공주 공방전은 몹시도 치열했다. 마지막 날, 우금치 전투에서 대포와 총을 앞세운 일본군을 맞아 농민군은 분투했으나 역시 패하고 말았다. 농민군은 논산 방면으로 후퇴했다.
  전봉준은 재기를 계획했다. 서울로 잠입하여 내외정세를 살필 생각을 한 그는 순창 피로리의 옛 부하 김경천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전봉준을 주막으로 안내한 뒤 관가에 밀고하고 말았다. 포위당한 전봉준은 쌓아놓은 나뭇단을 밟고 한 발이나 되는 담장을 뛰어넘었다. 순간 잠복하고 있던 관군이 총개머리판으로 그의 발목을 후려갈겼다. 전봉준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12월 2일의 밤이었다.
  전봉준은 일본군의 감시하에 서울로 호송되어 일본 공사관 감방에 갇혔다. 전봉준은 두려워한 관군이 일본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다. 그의 불굴의 투지와 기개에 감복한 일본인들은 그를 회유하고자 갖은 수단을 다 썼지만 전봉준은 '구구한 생명을 위해 살 길을 구함은 내 본의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그는 다섯 차례 법정 심문을 받고 1895년 3월 2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나이 41살이었다.
  그는 죽었지만 반봉건 반외세운동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생각하며 노래를지어 대대손손 불렀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67. 인류평화를 위한 축제 -제1회 국제 올림픽 개최(1896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895년/을미사변으로 민비 피살, 단발령, 유길준 '서유견문' 간행,
  1896년/전국에서 의병 일어남. 고종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 독립협회 창립, 독립신문 발간
 
  올림픽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는 수많은 폴리스로 나뉘어 있었다. 각각의 폴리스는 독립국가였고 폴리스끼리 전쟁을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지만, 폴리스 인들은 언어와 종교, 문화에서 공통점을 지닌 동족이었다.
  그리스 인의 종교는 다신교이다. 신성한 산 올림포스에 사는 제우스를 비롯한 12신이 세상만물을 주관하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결정한다고 믿었다. 폴리스들은 제각기 신전을 짓고 자기 폴리스를 수호하는 신은 모셨다. 신에게 드리는 제사는 폴리스 최대의 행사요 화려한 축제마당이었다.
  그중 주신 제우스에게 드리는 제사가 4년에 한 번씩 올림피아에서 열렸는데, 이때는 전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모두 모였다. 올림피아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서쪽 엘리스 지방에 있는 제우스의 성역이다.
  기원전 776년, 제전 기념행사의 하나로 체육경기대회가 처음 시작되었다. 이 올림피아 제전경기가 바로 올림픽의 기원이다. 경기에는 각 폴리스 대표들이 모여 자기 폴리스의 명예를 걸고 승부를 겨루었다. 최후의 승리자에게는 젊음과 생명의 신 아폴로의 나무 월계수로 만든 관이 주어졌으며, 그는 전 그리스의 영웅이 되었다.
  올림피아 외에도 이스트미아, 네메아,  파티아 등지에서 제전경기가 열렸지만, 가장 오래 되고 규모가 큰 것이 올림피아 제전경기였다. 하지만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건 아니어서, 노예, 여자, 외국인은 철저히 배제되고 오직 '순수한 그리스 인'만이 참가할 수 있었다. 경기종목은 단거리경주를 비롯하여 5종경기, 레슬링, 권투, 전차경주, 경마, 판크라티온(레슬링과 권투를 합친 듯한  격렬한 격투기) 등이었다.

올림피아 제전경기는 서기 393년까지 무려 1100여 년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열렸다. 그러나 그리스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후부터 점차 퇴락하기 시작했고,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함에 따라 이교도의 제전이라 하여 393년 293회를 끝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1500여 년 후인 1896년, 제1회 국제 올림픽이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개회되었다. 고대 올림피아 제전경기의 이름을 따서 올림픽이라 명명한 이 국제대회를 탄생시킨 사람은 프랑스의 쿠베르탱이다.
  그는 1863년 프랑스의 귀족집안에서 태어났다. 군인이 되려고 생시르 육군유년학교에 들어갔다가 16살에 중퇴, 교육학을 공부했다. 영국유학 중 '워털루의 승리는 이튼 학교 교정에서 꽃피운 스포츠때문'이라고 공감하고, 청소년 교육의 중심은 스포츠여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특히 고대 그리스 인들의 체육활동에 매료되었으며, 1892년 마침내 올림픽 부흥운동을 시작했다. 1894년 국제올림픽위원회 IOC를 조직하는 데 성공한 그는 참가국들을 설득하여 정기적인 올림픽을 열기로 합의를 보았다.
  2년 뒤인 1896년 4월 6일, 13개국 311명의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제1회 올림픽이 역사적인 막을 올렸다. 육상, 체조, 펜싱, 사격, 테니스 등 10개 종목의 경기가 진행되었고, 메달 수에 따라 순위를 결정, 1위는 그리스, 2위는 미국, 3위는 독일이 차지했다.
  그후 올림픽은 1,2차 세계대전으로 세 번 중단된  것 외에는 4년에 한번씩 열리고  있다. 다섯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진 올림픽 마크쿠베르탱이 직접 고안하여 1914년 IOC창립 20주년 기념식에서 첫선을 보였으며 1920년 제7회 앤트워프 대회에서 최초로 나부꼈다. 성화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28년 제9회 암스테르담 대회였다. 경기장의 탑 위에 커다란 돌로 만든 접시를 얹고 불을 피워 대회기간 중 계속 타오르게 했던 것이다. 그후 1936년 제11회 베를린 대회때부터는 그리스의 올림피아에서 성화를 점화하여 개회식장까지 가져오는 성화 릴레이가 시작되었다.
  한편 1964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18회 올림픽은 백인종 국가가 아닌 곳에서 개회된 최초의 대회였고, 1980년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2회 올림픽은 공산주의 국가가 개최한 최초의 대회였다. 동계 올림픽이 시작된 것은 1924년 피겨 스케이팅, 아이스하키 등 겨울철 경기를 독립시켜 프랑스 남부 샤모니에서 열렸다.
  우리 나라가 올림픽에 처음 나간 것은 1932년 제10회 로스앤젤레스 대회였다. 당시 일제의 식민지였던 우리 나라는 김은배, 권태하, 황을수 세 사람이 가슴에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달고 일본선수단의 일원으로 참가, 김은배와 권태하가 마라톤에서 각각  6위, 9위를 차지했다. 이어 36년 베를린 대회에서 손기정이 마라톤 우승자가 되자 유명한 '일장기 말살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동계 올림픽에 첫 출전한 것은 1948년 스위스 생 모리츠에서 열린 제5회 대회였다. 1988년, 제24회 대회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쿠베르탱의 염원은 건전한 스포츠 정신을 통한 세계평화와 인간 존엄성의 회복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상처럼 올림픽이 진정으로 '이념과 인종, 정치적 차이를 뛰어넘어'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1904년 제3회 세인트루이스 대회까지만 하더라도 흑인이나 기타 유색인종은 참가가 금지되어 있었다.
  그후 1921년 제정된 올림픽 헌장은 '...모든 나라의 아마추어를 공정평등하게 참가시킨다. 어느 국가나 개인도 인종, 종교, 정치상의 이유로 차별대우해선 안된다.'고 천명했다.
  쿠베르탱은 올림픽 정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성공 여부는 그가 승리자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느 정도 노력했느냐에 의해서 결정된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정정당당히 최선을 다하는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 올림픽은 자국의 이념을 선전하고 경제적 우월성을 자랑하는 또하나의 국제정치무대가 된 감이 없지 않으며, 선진국의 독점화 현상이 두드러져 '스포츠는 곧 국력'이란 말을 실감케하고 있다. 
  
68. 노벨 상을 탄 최초의 여성, 퀴리 부인 -퀴리 부부, 라듐 발견(1898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897년/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침
  1898년/서울, 전차 개통,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개최.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 처형
  1899년/경인선 개통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 퀴리 부인의 처녀 시절 이름이다. 그녀는 1867년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고등학교 과학 교사였기 때문에 마리아는 학교 사택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마리아가 10살 때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공직은 모두 러시아 인이 차지하고, 학교에서는 러시아 말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마리아는 1남 4녀 중 막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가정교사 생활을 하며 수입의 대부분을 언니 브로냐의 학비로 부쳐주었다. 브로냐는 파리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런 틈틈이 젊은이들이 당국의 눈읖 피해 몰래 갖는 모임에 참석, 철학, 사회학, 자연과학 등을 공부했다.
  1891년 마리아는 오랫동안 고대하던 프랑스 유학의 길에 올랐다. 파리 소르본 대학 이학부에 들어간 마리아의 생활은 몹시 고달팠다. 프랑스 어에 자신있었던 그녀였지만, 빠른 말씨로
진행되는 강의를 제대로 알아듣기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독학으로 공부한 수학과 물리학 지식으로는 도저히 다른 학생들을 쫓아갈 수가 없었다.
  경제적으로도 쪼들렸다. 다락방에 세든 그녀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웬만한 추위에는 불을 때지 않고 견뎌냈다. 몹시 추운 날이면 세면기의 물이 꽁공 얼어붙었다. 몇주일 동안 빵과 물만 먹기도 했으며, 차만 마시면서 몇 끼를 굶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좌절하지 않고 공부에 전념했다. 그 결과 1893년 물리학 학사시험에 1등, 이듬해 수학 학사시험에 2등으로 합격했다.
  그 무렵 마리아는 피에르 퀴리를 만났다. 피에르는 그녀보다 8살 위로, 이미 명성을 얻은 물리학자였다. 두 사람은 1895년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마리아는 더욱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이때 독일의 빌헬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했다. 그리고 1896년에는 프랑스 물리학자 앙리 베크렐이 방사능을 발견했다. 그러나 방사능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마리아는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 테마로 삼았다.
  마리아는 우라늄보다 훨신 활성적인 다른 물질이 있어 거기서 에너지가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노력이 필요했다. 피에르와 마리아는 실험과 연구에 몰두했다.
  1898년 6월 말, 두 사람은 우라늄보다 방사능 강도가 330배나 높은 새 원소를 발견했다. 마리아는 여기에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폴로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폴로늄을 제거했는데도 여전히 강한 방사능이 남아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또다른 미지의 원소가 있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실험을 거듭, 마침내 우라늄의 900배에 달하는 방사능을 함유한 원소의결정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 우리는 방사능을 지닌 물질에는 새 원소가 함유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 새 원소에 라듐이란 이름을 붙일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퀴리 부부가 제출한 보고서를 받은 학회는 발칵 뒤집혔다.
  두 사람은 라듐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피에르가 근무하는 공업물리화학 학교의 바라크 건물을 빌려 실험실로 꾸몄다. 그후 4년간 마리아는 그곳에서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보냈다.
  우라늄 광석을 20kg씩 꺼내어 체로 걸러서 불순물을 제거한 다음 분쇄하여 진한 황산으로 조려서 침전시켜 결정을 만든느 일을 수십 수백 번 반복했다. 너무나도 고된 중노동이었다.
  마침내 1902년 두 사람은 순수한 라듐 결정을 추출해냈다. 4년의 세월을 바쳐 8톤의 광석에서 추출한 양은 겨우 0.1g이었다. 그녀의 나이 34살 때였다.
  1903년 퀴리 부인은 지금까지의 연구를 총괄, '방사성 물질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을 파리 대학에 제출했다. 파리 대학은 그녀에게 이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그해 11월 스웨덴에서 한 통의 전보가 왔다. 퀴리 부부와 베크렐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수여한다는 내용이었다. 노벨 상이 생긴 지 3년째 되는 해였다. 퀴리 부인은 여성으로서 노벨 상을 받은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렇지만 퀴리 부부는 수상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던 중 1906년 남편 피에르 퀴리가 마차에 치여 그만 사망하고 말았다. 슬픔에 잠길 틈도 없이 마리아는 남편 대신 파리 대학 이학부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여성으로서 이 학교 강단에 선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녀의 나이는 39살이었다.
  방사성 원소 라듐의 발견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20세기 원자력 시대는 라듐 발견으로부터 시작된다.
  퀴리 부인은 1911년 또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여, 노벨 상 2회 수상이라는 빛나는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방사선 치료반을 조직, 치료에 나섰다. 그후 파리 대학 라듐 연구소를 창설하고, 원자력 연구기금 모금운동을 벌였다.
  1934년 7월, 67살의 나이로 퀴리 부인은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악성빈혈, 오랜 세월 방사능에 노출된 채 연구에 몰두한 때문이었다.
 
  
69. 제국주의 대열에 뛰어든 일본 -러, 일 전쟁 발발(1904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02년/서울-인천 간 장거리 전화 개통, 최초의 하와이
  1904년/한일의정서 체결
 
  1904년 2월 8일, 일본은 만주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 함대를 기습공격했다. 선전포고도 없이 갑자기 감행된 이 공격으로 약 1년 반에 걸친 러, 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러, 일 전쟁은 만주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싼 싸움이었다. 제국주의 러시아와 이제 막 제국주의 대열에 끼어든 신흥 일본간의 힘겨룸이기도 했다.
  일본은 1853년 미국에 의해 개국되었다. 함대를 앞세운 전형적인 강제 개국이었지만, 그후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란 정부 주도의 근대화 정책이 성공을 거두어 유럽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제국주의 국가로 변신했다.
  일본이 눈독을 들인 것은 중국과 조선이었다. 1876년 일본은 자기들이 미국한테 당한 방식 그대로 조선을 개국시켰다. 군함과 대포를 거느리고 강제로 조약을 맺게 한 것이다. 이것이 강화도 조약이다.
  그러나 조선을 자신의 조공국으로 여기고 있던 청나라가 이를 가만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조선은 중국과 일본의 팽팽한 대결장이 되었다.
  1894년 일본은 마침내 청나라와 일대 결전을 벌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 정권유지에 불안을 느낀 민씨 정권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한 것을 절호의 기회로 생각한 일본은 서둘러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명분은 조선에 있는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은 청의 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기 위한 군사행동이었다.
  동학혁명군은 외국군대를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 자진해산했다. 그러나 청, 일 양군은 철수하지 않고 내정개혁을 빌미삼아 날카롭게 대립, 드디어 1894년 8월 전쟁을 시작햇다. 청, 일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승리는 일본에게 돌아갔다. 공업화와 군비증강에 힘써온 일본을 청나라는 당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양국은 시모노세키에서 강화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요동반도, 대만, 팽호열도를 넘겨받고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그런데 일본의 세력팽창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함께 요동반도를 중국에 돌려 주도록 압력을 가해왔다. 일본은 하는 수 없이 이에 응했다. 이 사건을 '삼국간섭'이라 한다.
  청나라를 몰아낸 일본에게 새로운 장애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발칸 반도로의 진출이 막히자 극동지방으로 눈을 돌려 만주와 조선으로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삼국간섭의 대가로 만주 동청철도 부설권을 따낸 러시아는 1898년 여순, 대련의 조차권을 얻었으며, 1900년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18만 명의 군대를 파견, 만주를 장악했다.
  한편 조선에서는 친러 정권이 들어서 일본세력이 위축당하고 있었다.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고종의 황후 민씨를 살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약 1년간 정무를 보았다.  이를 '아관파천'이라 하는데, 이후 조선에는  박정양을 수상으로 하는 친러 정부가 들어서고 러시아의 보호국처럼 되어버렸다.
  그 동안 러시아는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 경원, 종성의 채광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등 온갖 이권을 차지했다. 그리고 1903년에는 압록강 유역의 삼림채벌권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한만 국경의 요지인 용암포에 군대를 파견, 이곳을 조차지로 만들고자 했다. 이를 '용암포 사건'이라 한다.
  러시아의 남하에 불안을 느낀 일본은 1902년 영국과 손을 잡고 영,일 동맹을 맺었다. 그 내용은 '일본은 청나라에 대한 영국의 이권을 인정하며, 영국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특수권익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1904년 2월, 러시아가 만주 철병을 하지 않자 일본은 협상을 제의했다. 한반도와 만주를 나누어 갖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어느 쪽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의 여순항 기습공격이 감행되고 양국은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5월, 일본군은 요동반도에 상륙하여 남산, 대련을 점령하고 이듬해 1월 여순을 함락시켰다. 3월에는 봉천에서 러시아 군을 대패시키고, 5월 쓰시마 해협에서 일본 연합함대는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파했다.
  승리를 확신한 일본은 재빨리 미국에 중재를 요청했다. 러시아도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국내의 고조된 혁명운동 때문에 장기전을 벌일 수 없는 형편이었다.
  한편 일본은 종전을 앞두고 미국과 비밀협약을 맺었다. 즉, '일본은 필리핀에서의 미국의 독점권익을 인정하고 대신 조선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지배권을 인정받는다'는 내용이다.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 태프트 육군장관 사이에 맺어진 조약이므로 이를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라 한다. 또 영국과 영, 일동맹을 개정하여 같은 내용을 승인받았다.
  이처럼 사전준비를 완료한 뒤 1905년 9월,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일본은 강화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한반도 지배권과 요동반도, 사할린 남부가 일본에게 넘겨졌고 오호츠크 해와 베링 해의 어업권이 일본에게 양도되었다. 

 경쟁자를 몰아낸 일본은 그해 10월 을사 보호조약을 체결,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었으며, 1910년에는 식민지로 합병했다. 그런 다음 중국대륙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70. 피로 물든 페테르스부르크 -러시아, 피의 일요일 사건(1905년)
  

조선은 중국과 일본의 팽팽한 대결장이 되었다.
  1894년 일본은 마침내 청나라와 일대 결전을 벌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 정권유지에 불안을 느낀 민씨 정권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한 것을 절호의 기회로 생각한 일본은 서둘러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명분은 조선에 있는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은 청의 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기 위한 군사행동이었다.
  동학혁명군은 외국군대를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 자진해산했다. 그러나 청, 일 양군은 철수하지 않고 내정개혁을 빌미삼아 날카롭게 대립, 드디어 1894년 8월 전쟁을 시작햇다. 청, 일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승리는 일본에게 돌아갔다. 공업화와 군비증강에 힘써온 일본을 청나라는 당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양국은 시모노세키에서 강화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요동반도, 대만, 팽호열도를 넘겨받고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그런데 일본의 세력팽창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함께 요동반도를 중국에 돌려 주도록 압력을 가해왔다. 일본은 하는 수 없이 이에 응했다. 이 사건을 '삼국간섭'이라 한다.
  청나라를 몰아낸 일본에게 새로운 장애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발칸 반도로의 진출이 막히자 극동지방으로 눈을 돌려 만주와 조선으로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삼국간섭의 대가로 만주 동청철도 부설권을 따낸 러시아는 1898년 여순, 대련의 조차권을 얻었으며, 1900년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18만 명의 군대를 파견, 만주를 장악했다.
  한편 조선에서는 친러 정권이 들어서 일본세력이 위축당하고 있었다.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고종의 황후 민씨를 살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약 1년간 정무를 보았다.  이를 '아관파천'이라 하는데, 이후 조선에는  박정양을 수상으로 하는 친러 정부가 들어서고 러시아의 보호국처럼 되어버렸다.
  그 동안 러시아는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 경원, 종성의 채광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등 온갖 이권을 차지했다. 그리고 1903년에는 압록강 유역의 삼림채벌권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한만 국경의 요지인 용암포에 군대를 파견, 이곳을 조차지로 만들고자 했다. 이를 '용암포 사건'이라 한다.
  러시아의 남하에 불안을 느낀 일본은 1902년 영국과 손을 잡고 영,일 동맹을 맺었다. 그 내용은 '일본은 청나라에 대한 영국의 이권을 인정하며, 영국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특수권익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1904년 2월, 러시아가 만주 철병을 하지 않자 일본은 협상을 제의했다. 한반도와 만주를 나누어 갖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어느 쪽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의 여순항 기습공격이 감행되고 양국은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5월, 일본군은 요동반도에 상륙하여 남산, 대련을 점령하고 이듬해 1월 여순을 함락시켰다. 3월에는 봉천에서 러시아 군을 대패시키고, 5월 쓰시마 해협에서 일본 연합함대는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파했다.
  승리를 확신한 일본은 재빨리 미국에 중재를 요청했다. 러시아도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국내의 고조된 혁명운동 때문에 장기전을 벌일 수 없는 형편이었다.
  한편 일본은 종전을 앞두고 미국과 비밀협약을 맺었다. 즉, '일본은 필리핀에서의 미국의 독점권익을 인정하고 대신 조선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지배권을 인정받는다'는 내용이다.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 태프트 육군장관 사이에 맺어진 조약이므로 이를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라 한다. 또 영국과 영, 일동맹을 개정하여 같은 내용을 승인받았다.
  이처럼 사전준비를 완료한 뒤 1905년 9월,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일본은 강화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한반도 지배권과 요동반도, 사할린 남부가 일본에게 넘겨졌고 오호츠크 해와 베링 해의 어업권이 일본에게 양도되었다.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05년/을사보호조약 체결,  1906년/일본, 통감부 설치
  1907년/헤이그 밀사 사건. 고종 퇴위
 
  1905년 1월 9일 일요일, 페테르스부르크  노동자와 그 가족 20만명은 평화적 행진을 시작했다. 이들의 목적지는 차르(제정 러시아 때 황제의 칭호)가 사는 동궁이었다. 성상과 차르의 초상화를 앞세우고 찬송가를 부르며 행진하는 이들을 보고 구경꾼들은 가슴에 성호를 그었으며, 경찰은 교통정리를 해주었다.
  이들은 자비로운 차르에게 자신들의 굶주림과 고통을 호소하러 가는 길이었다. 선두에서 이끄는 사람은 가폰 신부였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폐하, 저희 성 페테르스부르크의 노동자와 주민들... 처자식과 늙은 부모들은 진리와 보호를 구하기 위해 폐하께 갑니다. 저희들은 거지가 되었으며, 억눌려 살았으며, 숨이 넘어가고 있나이다....저희가 요구하는 것은 일하는 시간을 하루 여덟 시간으로 줄여달라는 것, 일당을 최소한 1루불만 달라는 것, 규정시간 이외의 노동을 없애달라는 것이 고작이나이다....저희들은 여기서 마지막 구원을 바라고 있사오니 신민들에 대한 도움을 거부하지 말아주십시오....'
  노동자 대열은 동궁 앞 넓은 광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장한 군대와 바리케이드였다. 노동자들은 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였다. 광장은 총성에 뒤덮였다. 일제사격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쓰러지고 대열은 흩어졌다. 도망치는 사람들의 뒤를 기마대가 쫓았다. 광장에 쌓인 하얀 눈 위에 사람들의 흘린 피가 붉게 물들었다.
  사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발포 소식을 듣고 흥분한 군중과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군대의 야만적 행동에 비난을 퍼부었다. 다시 발포, 그리고 붉은 피. 

  정부는 사망자 96명, 부상자 330명이라고 발표했지만 이날 죽어간 사람은 500명 이상, 부상자는 수천 명에 달했다.
  가폰 신부는 국외로 달아나 차르에게 저주 섞인 편지를 보냈다.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순결한 피는, 오! 영혼의 파괴자인 그대와 러시아 민중 사이에 영원히 가로놓여 있을 것이다. 그대와 그들 사이의 도덕적 결속은 다시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흘러야할 그 모든 피가, 살인자여, 그대와 그대의 가족에게 흘러 떨어지리라'
  한편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는 그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슬픈 날이다. 노동자들이 동궁에 들어오려 했을 때, 성 페테르스부르크에서는 중대한 무질서 사태가 발생했다. 여러 곳에서 군대는 발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님! 이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사람들은 이날을
'피의 일요일'이라 불렀다.
  당시 러시아 민중은 차르의 전제정치 아래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민은 짐승에 가까운 생활을 했으며, 노동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고, 더럽고 비좁은  방에서 남녀노소가 뒤엉켜 먹고 자야 했다. 콜레라, 티푸스 등 전염병과 직업병에 시달렸으며, 공장주는 제멋대로 임금을 지불했다.
  게다가 1904년 1월 시작된 러, 일 전쟁은 민중들의 생활을 한층 곤란에 빠뜨렸다. 물가가 폭등하여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25%가량 떨어졌고, 징집으로 일손이 달린 농촌의 불만도 높아졌다.
  1904년 12월,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가장 크고 오래 된 프티로프공장 노동자들은 회사에 요구안을 제출했다. 공장주는 요구를 들어 주기는커녕 주동자 4명을 해고해버렸다. 1905년 1월,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였다. 다른 공장들도 이에 동조, 파업은 페테르스부르크시 전체로 확산되었다. 이 4명은 가폰 신부가 이끄는 '페테르스부르크 공장노동자 동맹'의 회원이었다.
  노동자들은 가폰 신부에게 '자비로우신 아버지 차르'에게 자신들을 데려다달라고 부탁했다. 가폰은 차르에게 비밀편지를 보내 사실을 알리고 자비를 구했다. '피의 일요일'사건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가폰 신부는 원래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는 노동자들을 모아 도박 안하기, 술주정뱅이 없애기, 한가한 시간을 합리적으로 보내기, 종교적, 애국적 사상의 고취, 노동조건과 노동자 생활 개선 등등의 합법적 운동을 전개했다.
  그의 활동은 혁명가들로부터 노동자를 떼어놓아 노동운동을 온건한 것으로 만들려는 당국의 의도에 아주 적합했기 때문에 당국은 그의 조직활동을 묵인할 뿐만 아니라 지원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피의 일요일'사건으로 노동자들은 차르가 그들의 '자비로운 아버지'가 아니라 '잔인한 압제자'임을 깨달았다. 자비를 구하러 왔다가 총탄세례를 받은 이들은 차르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났다. 차르의 총탄이 죽인 것은 바로 러시아 민중들이 오랫동안 품어 온 차르 자신에 대한 존경과 신뢰였다.
  총 파업이 러시아 전역으로 불붙듯 번져나갔다. 모스크바, 리가, 바르샤바, 티플리스 등 등 1905년 1월에만 44만 명이 파업에 참가, 차르의 전제통치와 싸웠다. 이는 지금까지 수십 년간 파업에 참여한 숫자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이후 약 1년간 러시아는 혁명의 불길에 휩싸였다. 니콜라스 2세는 마침내 굴복하고 '10월 선언'을 발표하여, 입헌군주제와 의회 설립, 사상, 언론, 집회, 결사, 출판의 자유를 약속했다.
  그러나 '10월 선언'은 속임수였다. 차르는 노동자들의 열기가 식은 틈을 타서 무력진압에 나섰다. 이에 노동자들이 재차 봉기하자, 또다시 무차별 사격으로 천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1906년 악명 높은 반동 정치가 시톨리핀이 수상이 됨으로써 '피의 일요일'로 시작된 혁명은 실패로 마감되었다. 차리즘이 무너지려면 아직도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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