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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100장면 [40~50/100]

구름위 2013. 6. 3.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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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 세계사 100장면
지은이 : 박은봉
출판사 : 가람기획

 

41. 근대과학의 아버지 코페르니쿠스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을 주장(1543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543년/최초의 서원 백운동 서원 준공
  1543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란 책이 출판되었다. 저자는 폴란드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
   그가 이 책에서 주장한 것은 우주의 중심은 태양이고 자구와 다른 별들이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학설이었다. 이를 (지동설)이라 한다.
   당시 사람들은 우주의 중심은 지구이도 지구는 움직이지 않으며 태양과 별들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생각은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한 (천동설)로 대표되는데, 교회와 카톨릭 신앙이 이 천동설을 확고히 떠받치고 있었다. 이와 다른 생각을 품는 자는 성서를 위배한 이단자로 낙인찍혔다.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태어났다. 그는 수학자로 출발, 천문학에 관심을 갖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깊이 연구한 끝에 그 학설이 엉터리라고 깨달았다. 천동설은 별들의 움직임을 전혀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지동설을 확신했지만 세상에 발설하지 않고 평생을 보냈다. 그의 저서도 그가 죽은 뒤에 출간되었다.
   사실 지동설을 주장한 사람은 코페르니쿠스가 처음이 아니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 피타고라스는 '지구가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중세에 이르러서도 소수의 학자들이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을 했다. 즉,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기는 하지만 일정한 축을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했다. 이들은 그럼으로써 프톨레마이오스 학설이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을 보완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명성과 교회의 권위에가려 전혀 빛을 보지 못했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을 중심으로 안쪽에서부터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이 각각 원을 그러면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지구가 움직인다고 하는 건 거룩하고 완벽한 하나님의 체계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란 바로 그 같은 혁명적인 사고방식의 전환을 일컫는 말이다. 그는 자기의 사상이 얼마나 위험스런 것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평생 동안 입을 열지 않았던 것도 그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면 코페르니쿠스의 영향을 받은 두 사람의 생애를 보자.
   조르다노 브루노는 1548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15세에 도미니크 회에 가입, 수도사가 되었으나, 왕성한 지적 욕구로 당대의 온갖 지식과  과학적 성과를 섭렵한 끝에 수도원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후 제네바, 파리, 옥스포드, 마르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등 유럽 각지를 떠돌며 강의와 연설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단적인 이론은 선뜻 환영받지 못했고, 덕분에 그는 항상 불안한 생활을 해야 했다.
   때마침 어떤 베니스 인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오랜 만에 고국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를 초청한 사람이 바로 그를 밀고한 장본인이었다. 브루노는 체포되어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1600년 2월 17일 로마의 광장에 장작더미가 쌓이고 한 남자가 결박당한 채 세워졌다. 마침내 장작더미에 불이 붙었다. 남자는 한마디의 신음도 내지 않았다. 누군가 십자가를 건네주자, 그는 말없이 뿌리쳐버렸다. 이것이 부르노의 최후이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포기하라는  종교재판소의 요구에 불응하고 7년간 옥살이를 하다가 화형에 처해지고 만 것이다.
   그의 사상이란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한층 발전시킨 것이었다. 즉, 우주는 무수히 많은 태양과 별들의 체계로 충만된 무한의 경지이며, 우주는 한계도 중심도 없이 오직 운동을 계속할 뿐이라고 했다.
   이는 우주를 유한한 것이라고 본 코페르니쿠스를 한 걸음 앞지르는 내용이었다. 그에게 신은 곧 자연이었다. 교황청은 그의 사상이 대단히 위험하다고 여겨 그를 화형에 처하고 만 것이다.
   또 한 사람, 요하네스 케플러는 1571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을 철저히 연구한 사람이다. 1600년 그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천문학자인 덴마크의 티코 브라에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티코 브라에가 죽은 뒤 브라에의 계승자가 되었다.
   코페르니쿠스를 존경한 그는 연구와 관찰을 거듭한 끝에 천체의 운동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것을 발견해냈다. 이것이 유명한 케플러의 세 가지 법칙이다.
   첫째, 행성들은 태양의 주위를 타원궤도를 그리며 돈다.  둘째, 행성이 태양의 주위를 도는 속도는 태양으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각각 다르다. 케플러는 이 두 가지 원칙을 1609년에 발표했고 10년 만인 1619년 세번째 법칙을 발표했다. 즉, 임의의 두 행성간의 거리의 제곱은 태양으로부터의 평균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지동설이 사람들에게 사실로 받아지는 데는 무척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다. 코페르니쿠스와 조르다노 브루노, 케플러는 근대과학의 새 지평을 활짝 연 사람들이었다.
  
42.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이, 진자 등시성을 발견(1583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538년/당쟁 격화됨

1583년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 예배당에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천장에 매단  램프가 흔들리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문득 어떤 생각이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즉시 실험에 매달렸다.
   얼마 후 그는 다음과 같은 위대한 발견을 했다. '추 무게의 무겁고 가벼움에 관계없이 추가 한 번 왕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같다'는 사실이다. 이를 물리학에선 '진자의 등시성'이라고 한다. 갈릴레이의 나이 18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발표된 지 꼭 40년 만의 일이었다.
   갈릴레이는 1564년 사탑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태어났다. 11살  되던 해 수도원에 딸린 학교에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깊은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했던 천동설을 부인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몰두하게 된 것도 이 당시의 깊은 회의와 연관이 있다.
   3년 후 학교를 중퇴한 갈릴레이는 아버지를 따라 피렌체로 갔다가, 몇 년 뒤 다시 피사로 돌아와 피사 대학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그를 의사로 만들고 싶어했지만, 그는 자연과학에 더 흥미를 느꼈다. '진자 등시성'을 발견한 후 그는 본격적으로 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609년 그는 플랑드르 지방에 멀리 있는 물체를 가까이 보이게 하는 쌍안경이란 기구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야기를 들은 갈릴레이는 실물을 보지도 않고 즉시 망원경 제작에 착수했다. 그리고 완성된 망원경으로 천체 관측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목성의 주위를 네 개의 위성이 돌고 잇다는 것, 은하수는 무수한 별들의 모임이라는 것, 달에 잇는 산맥, 그리고 태양의 흑점 등을 발견해냈다. 그의 나이 45살 때의 일이다.
   그는 단박에 유명해졌다. 여러 학자들이 그의 관찰 결과를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아직도 천동설을 고수하고 있던 교황청은 그의 주장이 불합리하고 이교도적이라 하여 경고를 했다.
   1623년 그의 옛 친구인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새 교황 우르반 8세로 선출되었다. 갈릴레이는 안심하고 연구를 계속했다.
   1632년 오랜 연구 끝에 그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담아  (두 개의 주요한 우주체계의 대화)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교황 우르반 8세도 불쾌감을 드러냈다.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그럴 듯한 가설 이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자신의 경고를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인 1633년 6월, 가릴레이는 마침내 종교재판에 부쳐졌다. 재판관들은 그에게 자신의 이론을 철회하고 죄와 오류를 고백하면 용서해주겠다고 했다. 그는 브루노처럼 담대한 인물은 못 되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가릴레이가 법정을 나서면서 혼자 중얼거린 말이다.
   그후 갈릴레이는 얼마간의 감옥생활을 거쳐 가택연금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다가 1642년 연금 상태에서 사망했다.
   그는 과학적 연구방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진정한 과학은 관찰, 실험, 그리고 수학의 결합으로만 가능하다고 하면서 망원경으로 직접 보지 않고 책상 앞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교조주의자들을 비판했다.
   그는 또 카톨릭 교회가 정통으로 인정한 아리스토텔레스에 도전, 관성의 법칙을 발견해냈다. 그가 발견한 여러 법칙들은 뉴턴에게 전해져 근대 물리학을 발전시키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43. 영국과 에스파냐의 해상결전 -영국, 에스파냐의 무적함대 격파(1588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587년/왜구 전라도 침범, 1589년/정여립 사건
 
  16세기 말 해상무역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에스파냐 사이에 일대 결전이 벌어졌다. 에스파냐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필리핀에 이르는 대식민지를 수중에 넣고 세계 최대의 강대국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국왕 펠리페 2세는 1571년 지중해 무역을 방해하고 있던 오스만투르크를 레판토 해전에서 물리쳐 유럽으로부터 영원히 몰아냈다. 에스파냐의 강력한 해군에게는 '무적함대'란 별명이 붙여졌다.
  에스파냐는 나아가 1580년엔 포르투갈을 통합, 그 광대한 식민지까지 손에 넣음으로써 명실공히 유러 최고의 부자나라요 최강의 해군을 보유한 나라가 되었다.
  한편 영국의 헨리 8세와 비운의 왕비 앤 볼린 사이에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엘리자베스 1세는 왕위에 오른 뒤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를 안정시켜 국력을 키웠다.
  에스파냐와 영국의 대립은 해묵은 것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결혼이었다. 엘리자베스의 이복언니 메리 여왕은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결혼, 카톨릭을 옹호하고 에스파냐에 우호적인 정책을 취했다. 그녀가 얼마 후 병으로 죽자, 왕이 된 엘리자베스는 메리 여왕과 달리 카톨릭을 억압하고 왕을 우두머리로 하는 영국 국교회를 장려하는 한편 에스파냐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두 번째 문제는 해적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바다를 누비며 에스파냐 상선을 공격, 상품과 금은 보화를 빼앗아 왕실에 바치는 영국 해적을 은근히 지원하고 있었다. 해적선장 드레이크는 유능한 인물로서 여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드레이크의 활약으로 영국 왕실에는 금이 쌓였고 에스파냐는 큰 타격을 입었다. 화가 난 펠리페 2세가 드레이크를 처벌해달라고 요구해오자 엘리자베스는 오히려 드레이크를  기사로 임명해버렸다. 뿐만 아니라 특정한 조건하에서는 특정 국가의 배를 공격할 수 있다는 이른바 특허장을 주어, 드레이크의 활약을 지지했다.
마지막 문제는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독립운동을 벌이는 중이었다. 네덜란드를 모직물 공업의 주요 수출지로 삼고 있던 영국은 네덜란드의 독립운동을 도와주어 펠리페 2세의 분노를 사고 있었다.
  펠리페 2세는 엘리자베스에게 결혼을 신청함으로써 영국을 손안에 넣어보려 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이를 단호히 거절,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고  대답했다. 사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지냈다.
  펠리페 2세는 이번엔 영국 내에 있는 카톨릭 교도들을 이용했다. 불만세력으로 남아 있는 이들을 부추겨 엘리자베스를 내쫓고 사촌인 메리 스튜어트를 왕으로 세우도록 한 것이다. 그러자 엘리자베스는 메리 스튜어트를 처형시켜버렸다. 1587년의 일이다.
  화가 치민 펠리페 2세는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130척에 달하는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함대를 편성, 영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싸움은 의외로 영국의  승리였다. 에스파냐의 커다란 배가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좁다란 해협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영국은 작은 배로 민첩하게 움직이며 무적함대를 공략했다. 배에 불을 질러 그대로 에스파냐 함대에 돌진하는 기습작전도 매우 효과적이었다.
  결국 펠리페 2세는 함대의 3분의 2를 잃고 패주하고 말았다. 유럽 최강의 무적함대가 영국에게 대패한 것이다. 이후 에스파냐의 해상권은 영원히 사라졌고 영국은 유럽의 새 별로 떠올랐다.
  그후 영국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1600년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인도 경영에 나섰고, 북아메리카에 식민도시를 개척, 대규모 식민지 무역을 시작했다. 그 도시의 이름은  여왕을 기리는 뜻에서 버지니아, 즉 '처녀의 도시'라고 명명되었다. 국내적으로는 국민문화가 발달하여 세익스피어, 스펜서, 베이컨 등이 활약했다.
  엘리자베스는 사람들로부터 '굿 퀸 베스'라는 애칭을 얻었다. 그러나 1603년 그녀가 후사 없이 죽자 튜더 왕조는 끝나고 제임스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되었다. 
  
44. 양이 인간을 잡아먹는다. -영국, 인클로저 운동(16세기)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592년/임진왜란 발발 한산도 대첩, 1593년/행주대첩,
  1598년/이순신, 노량해전에서 전사, 임진왜란 끝남
 
  '양이 인간을 잡아 먹는다. '
  토마스 모어는 그의 책 '유토피아'에서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던 곳에 이제는 한 사람의 양치기와 그의 개가 있을 뿐이다.'
  당대의 학자 휴 라티머가 한 말이다.
  이는 모두 농경지를 목장으로 바꾸고 농민들을 토지로부터 내몬 인클로저 운동에 대한 비난이다.
  인클로저 운동은 영국에서 16세기부터 시작되었다. '농경지를 목장으로 만들기'라고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데, 목장이 된 토지에 '울타리'를 쳐서 타인의 출입을 억제했기 때문에 인클로저란 이름이 붙었다.
  인클로저 운동이 갖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 이는 중세 장원경제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 상징하는 동시에 새로운 사회경제체제의 주역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16세기 이후 영국 사회는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주된 원인은 해외 식민지 무역의 확대와 그로 인한 상공업의 발달이었다. 도시는 더욱 번창하고 인구가 증가했다. 1540년 6만 명에 불과했던 런던 인구는 1640년 30만 명, 1750년에는 70만 명으로 불어났다.
  한편 식민지로부터 들어오는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이 화폐가치를 떨어뜨려 물가가 폭등하고 있었다.
  인클로저 운동은 모직물 공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모직물 공업은 영국의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다. 본래는 양모를 그대로 수출했으나 14세기 중엽부터는 양모를 가공, 모직물을 짜서 이것을 유럽 각지에 수출하여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모직물 공업이 특히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튜더 왕조 시기이다. 왕은 '가장 중요한 국가적 산업'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치있는 제조업'인 모직물 공업을 위해 각별한 보호정책을 썼다.
  그러자 봉건영주, 귀족 등 토지소유자들은 좀더 많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 지금까지 해오던 온 농사를 그만두고 목장을 만들어 양을 기르기 시작했다. 확실히 목장은 농사보다 노동력이 덜 들고 이익도 많아 훨씬 유리한 산업이었다. 토지 소유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목양업에 뛰어들었다. 농경지는 물론 황무지, 공동 경작지까지 판자로 울타리가 둘러쳐졌다.
  그런데 인클로저는 그 땅을 경작하던 농민과의 합의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강제로 또는 폭력과 함께 진행된 것이었다. 비록 자기 땅은 아니지만 오랜 관습에 의해 대대로 농사짓고 살던 농민들은 하루아침에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농민의 생활터전이던 농토는 양들이 사는

푸른 목초지로 변해갔다.
  인클로저 운동으로 농민들이 갈 곳 없이 떠돌고 촌락이 파괴되는 등 사태가 심각해지자 국왕은 인클로저 금지법을 제정했다. 그렇지만 법을 집행하는 당국자가 바로 인클로저에 열심인 토지 소유자인 경우가 다반사였으므로 1622년 인클로저 금지법은 폐지되고 말았다.
  농민들은 반발했다. 1636년부터 이듬해까지 계속된 '은총의 순례'라든가 '케트의 반란' 같은 농민운동은 기실 인클로저를 막으려는 농민들의 몸부림이었다.
  인클로저로 이득을 본 사람들은 젠트리라 불리는 소지주들과 요먼이라 불리는 자영농, 그중에서도 비교적 부유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봉건 귀족처럼 봉건적 신분관계나 농경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토지를 과감히 개조, 목장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새로운 유력자로 성장하여 나중에는 의회에 진출했다.
  한편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은 대거 도시로 몰려들었다.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던 이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임금 노동자가 되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바로 이 광범한 임금 노동자층의 값싼 노동력 덕택에 가능했다. 
  
45. 자유의 땅을 찾아서 -메이플라워 호, 북아메리카에 도착(1620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607년/허균 '홍길동전' 지음,  1613년/허준 '동의보감' 간행,
  1614년/이수광 '지봉유설' 간행,  1627년/정묘호란 발발
 
  1620년 9월 6일 영국의 플리머스 항에서 한 척의 배가 닻을 올렸다.
배의  이름은 메이플라워, 102명의 승객을 태우고 신대륙 아메리카로 가는 배였다.
  장장 9주일에 걸친 항해 끝에 마침내 배는 북아메리카 동해안에 다다랐다. 새 땅에 발을 디딘 사람들은 그곳을 자신들이 떠나온 항구의 이름을 따서 플리머스라 부르기로 했다. 바다 건너에 있는 고국을 생각하면서 붙인 이름이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퓨리턴, 즉 청교도였다. 청교도란 신교중에서도 칼뱅의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서, 엄격한 교리와 금욕, 절제를 강조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뒤를 이은 제임스 1세가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의회와 사사건건 대립하는 중이었다. 제임스 1세는 영국 국교인 성공회를 지지하면서 신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썼다. 의회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던 신교도, 특히 퓨리턴들은 이에 강력한 반발을 보였다. 메이플라워의 아메리카 행은 제임스 1세 하의 정치상황이 낳은 사건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청교도들의 사상이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청교도의 시조는 칼뱅이다. 그는 1509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법률공부를 하다가 1533년경 카톨릭을 버리고 신교로 개종했다. 카톨릭의 아성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로 간 칼뱅은 '기독교 요강'이란 책을 발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책은 후에 프로테스탄트의 고전이 되었다.
  그의 고민은 하나님의 '선택'과 '방관'에 대해서였다. 오랜 고민 끝에 그가 얻은 결론이 바로 '예정설'이다. 즉 무수한 인간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어떤 자를 구원하고 어떤 자를 그대로 둘지는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구원의 대상인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다만 구원받으리라는 자기확신을 갖고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자기확신을 갖는 방법은 절제와 금욕이다.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고 근검절약하며 방종타락하지 않는 생활이야말로 유일한 자기확신의 길이다.
  '하나님이 왜 어떤 사람에게는 풍요한 삶을 주고 어떤 사람은 그대로 방관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신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목사가 설교를 통해 경건해지는 것처럼 사람은 자신의 직업에 충실함으로써 경건해진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칼뱅의 사상, 특히 자신의 직업을 신이 내린 '소명'이요 '천직'으로 알라는 직업관, 그리고 이윤추구를 정당한 것으로 보는 윤리 의식은 한창 부상중이던 신흥 상공업자들에게 복음처럼 생각되었다.
  자연히 신흥 상공업자, 신흥 지주들이 칼뱅 사상의 지지자가 되어갔다. 그들 중 상당수는 의회에 진출해 있었으며 또 법률가나 의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었다. 엄격한 교리, 절제된 생활, 부지런하게 생업에 종사하는 태도 때문에 이들은 퓨리턴, 즉 청교도라고 불리어졌다.
  최초로 아메리카에 도착한 청교도들의 생활은 그리 평탄치 못했다. 그해 겨울 이주자들의 절반 정도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봄이 되자 길을 닦고 집을 짓는 등 건설에 힘을 기울였다. 함께 예배를 드릴 장소도 만들었다.
  이들은 이미 항해 도중 정부형태에 관한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을 '메이플라워 맹약'이라 한다. 맹약에 따라 개척지는 성인 남자가 참여하는 '민회'에 의해 통치되었다. '메이플라워 맹약'은 훗날 헌법제도의 맹아가 되었다.
  신앙과 생활의 자유를 위해 아메리카로 건너오는 사람들의 수가 급속히 늘어났다. 최초의 이주자들에 의해 매사추세츠 주가 개척되고, 1732년이 되자 뉴 잉글랜드를 비롯,  13개 주의 식민지가 아메리카 동부 해안에 건설되었다.
  개척민들은 영국 본토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적인 생활을 하려는 경향이 강했으며 투철한 직업관을 갖고 경제활동에 종사했다. 물론 그를 뒷받침해준 것은 청교도 신앙이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란  그의 대표작에서 근대 자본주의를 발달시킨 정신적 동력은 바로 프로테스탄트  윤리, 특히 칼뱅의 사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말에 동의를 하든 하지 않든 청교도 교리가 새로운 부유층인 상공업자, 신흥 지주의 이해관계와 잘 맞아떨어져서 그들의 정신적, 종교적 지주가 되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자유를 찾아 미지의 세계로 온 102명의 메이플라워 호 사람들- 이들을 후세 사람들은 '필그림 파더스'라고 부른다. 이 '필그림 파더스'가 바로 오늘의 미국을 있게 한 선조들이다. 
  
46. 처형당한 왕 -영국 청교도 혁명 발발(1642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631년/정두원 명에서 천리경, 자명종, 화포 가져옴,
  1636년/병자호란 발발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그녀가 독신을 고집한 것은 마땅한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과 영국을 안전하게 지키는 방편이기도 했다. 죽기 이틀 전, 그녀는 다음과 같이 후계자 문제를 매듭지었다.
  '짐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수 있는 자로 짐의 사촌 외에 누가 있단 말인가?'
  유언대로 스코틀랜드 왕인 사촌 제임스가 영국 왕위에 올라 제임스 1세가 되었다. 이로써 스코틀랜드와 영국은 한 나라가 되었다.
  제임스 1세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함께 '왕권신수설'의 신봉자로 유명하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인 1598년 '자유군주제의 진정한 법'이란 글을 익명으로 발표했었는데, 여기서도 신성한 왕권을 주장하고 있다.
  '국왕은 신에게만 책임이 있고 신하에게는 책임지지 않으며, 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국왕은 곧 법이다.'
  의회는 제임스 1세의 왕권신수설에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본래부터 영국 의회는 국왕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왔다. 영국 의회의 발달사는 곧 의회와 왕권간의 대립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제임스 1세는 국내 사정에 어두웠으므로 의회와 사사건건 대립, 사태를 악화시키기만 했다.
  '의회의 자유와 권한은 이론의 여지없이 영국 신민이 옛날부터 상속받은 재산이다. 국왕, 국가, 국토방위, 교회에 관한 곤란하고 긴급한 사항들은 마땅히 의회가 토론해야 할 의제들이다. '
  이와 같은 의회의 주장에 격분한 제임스1세는 그 내용을 실은 의사록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의원 7명을 체포했다.
  한편 제임스 1세는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는 이를 해결코자 새로운 세금을 부과했는데 이런 정책은 신흥 자본가들의 불만을 높였으며, 신흥 자본가들을 대표하고 있던 하원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들 신흥 자본가들은 종교적으로는 대부분 청교도들이었다.
  1625년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어 아들 찰스 1세가 왕이 되었다. 그 역시 아버지 못지않게 의회를 무시하는 정치를 폈다. 그는 황태자 시절 에스파냐 공주에게 청혼했다가 모욕을 당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래서 왕이 되자 에스파냐와의 일전을 계획, 전쟁에 필요한 비용문제 때문에 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의회는 그의 제안을 번번이 부결시켰고 화가 난 찰스 1세는 두번이나 의회를 해산해 버렸다. 1628년 3월 찰스 1세는 제3차 의회를 소집했다.
  의회가 열리자, 법률가 출신의 하원의원 에드워드 코크는 의회의 권리를 명시한 청원서를 제출했고, 의회는 이를 기꺼이 승인했다. 이것이 유명한 '권리청원'이다. 찰스 1세는 6월 청원서를 재가하고 그 대신 필요한 돈을 받아냈다. 그러고는 이듬해 의회를 해산해버렸다. 이후 11년간 그는 의회의 간섭 없이 마음대로 영국을 다스렸다.
  그런데 1639년 의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 터졌다. 스코틀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찰스 1세는 진압비용을 얻기 위해 다음해 의회를 소집했다. 11년 만에  열린 의회는 왕을 신랄히 비난했다. 찰스는 또 의회해산을 단행했다.
  반란군은 이미 영국 북부까지 진출, 신앙의 자유와 배상금 지불을 요구하고 있었다. 찰스 1세는 할 수 없이 그해 11월 다시 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의회는 경비조달을 승인하기는커녕 왕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우선 왕의 측근자들을 체포, 사형에 처했으며, 왕의 소집이 없더라도 3년에 한 번씩 의회가 열리도록 하는 3년 회기법, 의회의 승인 없이는 마음대로 의회를 해산할 수 없도록 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분노한 찰스 1세는 무력으로 의회를 누르려고 했다. 그러자 의회측도 군대를 모아 대항했다. 이리하여 왕당파의회파간의 8년에 걸친 내전이 시작되었다.
  싸움은 처음엔 왕당파가 우세했다. 왕당파는 구귀족, 성직자, 독점 상인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의회파는 자영농, 신흥 상공업자, 신흥 지주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올리버 크롬웰이다.  그는 1599년 헌팅던에서 태어났다. 중류 지주 출신인 그는 매우 독실한 청교도였으며 큰 키에 당당한 체구, 빛나는 눈빛을 가진 논리정연한 인물이었다.
  그는 철기군을 이끌고 1645년 6월 네이즈 전투에서 왕당파를 격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기도를 올리고 찬송가를 부르며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철기군의 활약은 눈부셨다.
  1646년 6월 왕당파의 근거지인 옥스포드가 점령되자,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로 도망쳤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40만 파운드를 받고 찰스 1세를 영국 의회에 넘겨주고 말았다.
  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는 마침내 처형되고  말았다. 영국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수립했다. 왕 대신 의회가 최고통치자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 일련의 사건을 청교도 혁명이라 하는데, 그  이유는 새로 권력을 장악한 의회의 구성원들이 바로 신흥 상공업자들, 즉 청교도였기 때문이다. 
  
47. 짐이 곧 국가이다. -프랑스, 루이 14세 즉위(1643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645년/소현세자, 청에서 과학, 카톨릭 교 관련 서양서적 수입,
  1653년/ 하멜, 제주도 표착
 
  1661년 루이 14세는 베르사이유 궁전을 확대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유명한 건축가, 조각가, 화가, 정원사가 총동원된 대공사가 20여 년이나 계속되었다. 이윽고 완성된 궁전의 웅장한 규모와 화려함은 유럽 어느 나라의 궁전도 따를 수 없는 것이었다.
  1682년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으로 거처를 옮기고, 귀족 제후들도 이곳에 와 살면서 자신을 보좌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천명이 넘는 고위성직자들, 그 시종까지 합하여 도합 5천 명 이상이 베르사유 궁전에 모여들었다.
  회의, 미사, 오찬, 산보와 사냥, 다시 회의, 야회, 만찬 취침-이것이 왕 이하 귀족들의 하루 일과였다. 취침은 보통 새벽 한 시였다. 귀족들은 왕에게 잘 보이려고 온갖 아첨을 다 하였다. 왕에게 셔츠를 건네준다든지 촛불을 건네주는 일은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되었다.
  사실 이는 루이 14세의 교묘한 왕권 강화책이기도 했다. 그는 칼로 귀족세력을 억누른 것이 아니라, 귀족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사치와 낭비에 젖도록 하는 방법을 쓴 것이다. 그는 일부러 복잡한 의식을 만들어서 가능한 한 많은 숫자의 귀족이 자신을 위해 봉사하도록 했고, 쉴새없이 연회, 무도회, 축제, 연극공연 따위를 벌이게 했다. 귀족들은 점점 가난해져 갔고 그럴수록 더욱 비굴해 졌다.
  베르사유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 귀족에 대해 왕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런 사람 모르네'
  '난 그런 사람 본 적 없네.'
  귀족뿐 아니라 후원자가 필요한 예술가들도 베르사유로 몰려들었다. 루이 14세는 이들을 보호하는 한편, 학술기관을 설립하여 문학, 과학, 조각, 건축, 음악, 회화를 연구케 했다.
  라신, 코르네이유, 몰리에르 등 르네상스 3대 희곡작가가 여기서 배출되고, 바로크 양식, 로코코 양식이라는 새로운 예술사조가 생겨났다. 베르사유는 일약 유럽 최고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으며, 프랑스 어는 유럽 공통의 사교어였다.
  베르사유는 루이 14세의 소우주였다. 그는 이곳에서 절대적인 왕권을 행사하며 '태양왕'이라 자처했다.
  루이 14세는 1643년 5살도 채 못된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재상 마자랭의 섭정을 받던 그는 1661년 마자랭이 죽자 친정을 선언했다.
  루이 14세는 콜베르를 재상으로 임명,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식민지 확장에 주력하는 이른바 중상주의 정책을 폈으며, 에스파냐의 왕위를 둘러싸고 전쟁을 일으켜 자신의 손자를 에스파냐 왕위에 앉혔다.
  한편 신교도를 억압하여 많은 신교도가 국외로 빠져나갔다. 때문에 상공업이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그의 통치기간 중 프랑스는 유럽 제일의 국가로 부상했다. 그는 절대군주의 대명사였고, 화려, 사치, 권력, 명예의 상징이었다. '짐이 곧 국가이다.'라는 그의 명제는 국왕의 절대적 권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찬란함은 일반민중의 삶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왕과 귀족들이 베르사유에서 만찬과 연회에 젖어 있는 동안 민중들은 굶주리다 죽어갔다. 당시의 한 기록을 보자.
  '보베 지방에 코퀴라는 이름을 가진 한 가족이 있었다. 직조공인장 코퀴는 방직공으로서 그의 일을 돕는 아내와 세 딸-막내는 9살-을 두었다. 다섯 식구가 주당 7파운드의 빵을 소비하는데, 빵값이 파운드당 반 솔Sol일 때는 특식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흉년이 들면서 빵값이 급등했다.
  1693년 흉년에다 일자리도 없었다. 이 두 가지 위기는 보통 겹치게 마련이다. 빵값은 처음엔 파운드당 1솔, 다음엔 2솔, 그 다음엔 3솔 이상으로 올랐다. 약간의 저축을 완전히 바닥낸 그들은 갖고 있던 물건을 저당잡혔다. 그 다음엔 건강에 해로운 음식과 곰팡이 슨 곡류, 동물의 창자, 쐐기풀을 요리해 먹었다. 영양실조와 조악한 식품으로 인한 질병으로 그들은 쓰러져갔다.
  1693년 12월 그들은 구빈원에 등록되었다. 1694년 3월 막내딸이 사망하고 이어서 맏딸과 장 코퀴가 사망했다. 이들의 죽음은 빵값 때문이었다.
  농민들은 수확의 상당분을 영주에게 바치고, 십일조를 교회에, 세금을 왕의 관리에게 각각 바쳐야 했다. 여성들은 아이가 생기는 대로 낳았지만 농가는 결코 대가족이 아니었다. 사산과 유아 사망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사산이나 유아 사망은 너무 다반사여서 '천후나 폭풍우, 말의 죽음보다도 덜 중요'하게 여겨졌다고 당시의 문헌은 기록하고 있다.
  평균수명은 25살 정도, 100명의 어린이 중 4분의 1이 1살 전에 죽고 또 4분의 1이 20살 전에 죽었다. 마을 주민 100명 가운데 10내지 15명이 흑사병, 외국군대의 약탈, 흉작 등으로 죽어갔다.
  이것이 루이 태양와 시대 프랑스 민중들의 삶이었던 것이다. 
  
48. 조선소 노동자로 일한 황제 -러시아, 표트르 1세 즉위 (1682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678년/상평통보 주조,  1682년/금위영 설치
 
  러시아의 표트르 1세는 계몽군주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매우 급격한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만드는 데 전력을 다했다.
  표트르 1세는 1672년 태어났다. 바로 전해, 유명한 농민반란의 지도자 스텐카 라진이 체포, 처형되었다. 그가 이끈 반란은 수년간 온 러시아를 뒤흔들었다.
  표트르는 로마노프 왕조의 두 번째 왕 알렉시스의 아들이었지만 서자였기 때문에 알렉시스가 죽자 이복형제인 표도르 3세가 왕이 되었다.
  그런데 표도르가 후사 없이 일찍 사망해, 왕위를 둘러싸고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결국 표도르의 동생 이반 5세표트르가 이반의 누이 소피아의 섭정 아래 공동통치를 하게 되었다. 1682년의 일이다.
  1689년 표트르는 소피아를 수녀원에 유폐시키고 그녀의 측근들을 처형한 다음 정권을 쥐었다. 그렇지만 어머니에게 정사를 맡기고 공부에 몰두하다가 1694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비로소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1697년 러시아는 250명이 넘는 대규모 사절단을 유럽에 파견했다. 표트르 1세도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그의 목적은 서구의 발달된 군사기술, 특히 조선술을 배우는 것이었다.
  그는 암스테르담에 있는 동인도회사 조선소에 신분을 숨기고 들어가 일을 했다. 그런 다음 런던으로 가서 조선기술의 이론과 제도법을 공부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질문을 서슴지 않았다. 그의 지식욕, 특히 기계공학에 관한 호기심은 대단했다. 뿐만 아니라 병원, 목공소, 해군시설 등등 어디든지 관심있게 관찰했다.
  그러나 그는 서둘러 러시아로 돌아와야 했다. 근위대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반란을 진압한 표트르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토대삼아 일련의 개혁조치를 단행하기 시작했다.
  우선 궁정귀족들의 수염을 직접 잘라버린 다음, 수염을 기르는 자에게는 세금을 부과하는 법을 제정했다. 또 동양풍의 긴 옷을 서양식으로 바꾸게 하고, 귀부인들은 무도회에서 유럽의 사교계 여인들처럼 가슴이 패인 드레스를 입도록 했다.
  러시아 인들은 13세기 이후 200여 년간 몽고족의 지배하에 있었다. 표트르는 후진국 러시아를 부강케 하는 길은 몽고의 잔재를 완전히 떨어버리고 유럽화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 아래 탄탄한 육군과 해군의 양성, 서유럽과 러시아를 이어줄 항구 개척, 이 두 가지를 숙원 사업으로 삼았다.
  1700년 마침내 표트르 1세는 발트 해로 진출했다. '서방으로의 창'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발트 해는 강대국 스웨덴의 활동무대였다. 러시아는 덴마크,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스웨덴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북방전쟁'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전세는 불리했다. 1700년 11월 말 나르바 전투에서 4만 명의 러시아 군은 스웨덴의 찰스 12세가 이끄는 8천 명의 정예부대에게 참패를 당했다.
  표트르 1세는 일단 후퇴해서 전세를 가다듬기로 했다. 그후 해군을 창설하고 21만의 육군을 키웠으며 군수물자 생산공장과 도로, 운하를 건설했다. 당시 군사비는 국가재정의 무려  3분의 2를 차지했다.
  그러는 한편, 네바 강 하구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도시의 이름은 '표트르의 도시'라는 뜻인 페테르스부르크로서, 나중에 레닌그라드로 불리었다.
  신도시 건설에는 막대한 돈과 수천 명의 생명이 바쳐졌다. 동원된 사람들은 홍수와 열병으로 쓰러져갔고, 때로는 이리 떼에게 잡혀먹히기도 했다. 당시 상황을 비꼬아 혹자는 이렇게 묘사했다. 신도시의 위치는 '한쪽은 바다, 한쪽은 슬픔, 한쪽은 소택지, 한쪽은 한숨'이라고.
  새 도시가 완성되자 표트르 1세는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페테르스부르크로 옮겼다. 이는 서구화 정책의 강력한 표현이었다.
  1721년 북방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끝이 났다. 표트르 1세는 '차르' 칭호를 받고 '대제'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러시아는 그이 꿈대로 유럽의 강국으로 성장했다. 
  
49. 사과는 떨어지는데 왜 달은 떨어지지 않을까? -뉴턴, 만유인력을 발견(1687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683년/서인,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사망한 해인 1642년, 영국의 링컨셔 주 올즈소프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날은 마침 크리스마스였다. 아이의 이름은 아이잭 뉴턴, 몸무게가 2kg도 채 안되는 미숙아였다. 그는 몹시 발육불량이어서 첫돌이 지나도록 고개를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고 한다.
  국민학교에 들어가서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늘 혼자 노는 아이였다. 혼자 그림을 그리거나 기계를 만지작거리면서 노는 그를 보고 급우들은 '시골뜨기'라고 비웃었다.
  중학생이 되어서야 그는 수학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케임브리지 대학에 진학했다. 성적은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수학적 재능만은 이미 돋보이고 있었다.
  1665년 말, 케임브리지에 페스트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학교는 문을 닫았고, 뉴턴은 고향 울즈소프로 내려갔다.
  '이 당시가 나의 발명을 위한 인생의 봄이었기 때문에 과거 어느 때보다도 수학과 철학에 몰두했다.'
  그의 회상처럼 뉴턴은 학교가 다시 문을 열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고향 울즈소푸에서 연구에 전념했다. 유명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게 된 것도 이곳에서의 일이다.
  뉴턴은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위대한 발견의 실마리를 잡았다고 한다.
  '사과는 나무에서 떨어지는데 왜 달은 궤도에서 떨어지지 않는걸까?'
  이것이 그의 의문이었다.
  1669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수학교수가 된 그는 두문불출, 혼자 연구에만 몰두했다. 오랜 고립생활 끝에 드디어 1687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약칭 프린키피아)'를 발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 책은 뉴턴의 연구업적을 종합해 놓은 것이었다.
  그는 '중력'이란 원리로 전 우주를 하나의 통일된 체계로 일관되게 설명해냈다. 즉 우주의 모든 천체와 입자는 서로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고 질량에 비례하는 힘'으로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이 힘이 바로 중력이다. 중력은 크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지구가 사과를 끌어당기듯이 사과도 지구를 끌어당기는 것'이다. 중력은 우주의 모든 물체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래서 '만유인력'이라 한다.
  그뿐 아니라 뉴턴은 만유인력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미적분의 기초를 세웠고, 반사망원경을 만들어 냈다.
  1689년 뉴턴은 케임브리지 시의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따. 당시 영국은 명예혁명의 와중에 있었다. 1696년 그는 조폐국장에 임명되고, 1703년에는 왕립협회 회장이 되었다. 2년 후 그는 기사 작위를 받았다. 과학자로서 기사 작위를 받은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뉴턴의 또 하나의 위대한 업적은 빛에 대한 연구이다. 그는 무지개와 비누거품의 색깔 등 빛의 성질을 완벽하게 설명해냈다. 뿐만 아니라, 빛은 파동인 동시에 입자이며, 백색은 하나의 색깔이 아니라 스펙트럼 색채의 혼합물이라는 것을 증명했던 것이다. 만유인력, 미적분의 원리, 빛의 입자설뉴턴의 3대 발견이라 한다.
  그의 업적은 당대는 물론 이후의 학문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과학자들은 모두 뉴턴의 제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그의 연구방법은 철학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관찰과 실험을 중시하는 그의 방법론은 영국 경험론을 낳게 했다. 경험론의 시조 존 로크는 뉴턴보다 열 살이나 위였지만 뉴턴을 스승으로 숭배했다고 한다.
  18세기의 계몽 사상가들은 베이컨, 로크, 뉴턴을 위대한 정신의 삼위일체라 불렀다. 그 중에서도 뉴턴이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혔다. 뉴턴은 코페르니쿠스로부터 시작되어 케플러,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진행되어온 17세기 과학혁명을 완성시킨 장본인이다.  그가 주장한 '자연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라고 하는 역학적 자연관은 18세기 계몽사상의 발전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1727년 3월 10일 뉴턴은 성대한 장례를 마친 후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당대의 철학자 볼테르는 이 광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신민에게 선정을 베푼 왕과 같이'라고.
  
50. 유혈 없이 성공한 혁명 -영국, 명예혁명 발발(1688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689년/남인 득세, 김만중, '구운몽' 지음,
  1696년/안용복, 독도에서 일인을 쫓아냄,  1699년/괴질로 25만여명 사망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을 수립한 영국은 안팎으로 위기에 처했다. 안으로는 의회파가 장로파, 독립파, 수평파로 갈려 그 골이 깊어만 갔고, 밖으로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가 반란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왕을 처형한 나라라 해서 유럽의 군주들은 영국을 두려움과 적의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국왕의 처형은 분명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독립파의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은 탁월한 정치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반란을 진압하여 스코틀랜드 장로파와 손잡고 왕정복고를 꾀하던 찰스 1세의 아들을 프랑스로 쫓아버렸다. 한편 항해조례를 발표, 네덜란드와 해상권을 두고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1654년 크롬웰은 호국경 자리에 올랐다. 그의 지지기반은 군대였다.
  그러나 크롬웰은 1658년 사망하고 그로부터 꼭 2년 만인 1660년 5월 29일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런던에 입성했다. 런던 시민은 환호하며 그를 맞아들였다. 거리는 꽃으로 수놓아지고 종소리가 울려퍼졌으며 깃발이 휘날렸다. 창문과 발코니마다 사람들과 트럼펫 소리가 가득 차고, 수많은 군중이 길을 메웠다. 찰스 1세가 처형당한 지 11년 만에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것이다.
  사람들이 찰스 2세에게 바란 것은 입헌군주제였다. 그러나 그는 망명지 프랑스에서 루이 14세를 한껏 동경하며 지낸 인물이었다. 그의 꿈은 루이 14세 같은 절대군주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찰스 2세는 돌아오자마자 부왕의 처형에 서명한 판사들 중 살아 있던 13명을 처형시키고 크롬웰의 시체를 파내어 그 목을 잘라버렸다.
  그런가 하면 몰수되었던 왕당파의 토지를 무상으로 원소유주에게 돌려주고, 카톨릭을 보호하는 정책을 폈다. 왕당파가 왕의 비호 아래 다시 고개를 쳐들어 의회를 점령했다. 사람들은 이 의회를 '기사의회'라고 비꼬았다.
  1670년 찰스 2세는 루이 14세와 밀약을 맺었다. 자신이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대가로 20만 파운드를 받는 외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 군사원조를 받으며, 프랑스를 도와 전쟁에 참여한다는 조건이었다.
  그의 친불정책은 국내 자본가들의 이해와 상충되는 것이었으며, 국민감정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카톨릭 세력만이 그를 환영했다.
  불안을 느낀 의회는 심사율, 인신보호율을 제정했다. 심사율은 비국교도를 공직에서 추방하는 내용이고, 인신보호율은 아무 이유없이 인민을 체포, 구금하지 못하며, 구금된 자는 20일 이내에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법률이다.
  1679년 이번엔 왕위계승 문제를 놓고 의회와 왕의 대립이 벌어졌다. 찰스 2세는 아들이 없어 그 동생 제임스가 왕위를 잇도록 했는데, 제임스는 형보다 더한 전제주의자인데다 카톨릭 교도였기 때문에 일부 의원이 반발, 왕위계승권을 박탈하는 법안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찰스 2세는 세 번이나 의회를 해산한 끝에 제임스 배척안을 부결시켰다. 배척파들은 망명을 떠났다. 철학자 존 로크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제임스 배척파는 청교도가 주축이었고, 반대파는 지주, 귀족, 성직자들이 중심이었다. 양파는 각각 전자는 휘그 당, 후자는 토리 당이라 불렸다. 이것이 영국 정당의 기원이다.
  1688년 5월 제임스 2세의 두 번째 왕비 마리가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이 바로 명예혁명의 발단이다. 첫째 왕비의 소생인 메리은 신교도로 어려서부터 신교 교육을 받은 터였지만 새 왕비 마리는 카톨릭이었으므로 의회는 태어난 왕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았다.
  휘그 당과 토리 당은 손을 잡고 제임스 2세를 몰아내기로 했다. 의회가 후계자로 지명한 인물은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그의 남편 오린지 공 윌리엄이었다.
  두 사람은 군대를 이끌고 런던에 입성했다. 딸과 사위에게 쫓긴 제임스 2세는 12월 왕비와 아기를 데리고 프랑스로 망명하고 말았다.
  의회는 메리와 윌리엄을 공동 즉위시키고 유명한 '권리선언'을 승인케 했다. '권리선언'의 주요 내용은, 모든 법률의 제정 또는 폐지는 의회를 거쳐야 하며, 의회는 언론의 자유를 갖는다는 것으로 왕권을 제한하고 의회권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영국에선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입헌군주제가 시작되었다. 영국인들은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성공한 명예로운 혁명이란 뜻에서 이 사건을 명예혁명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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