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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100장면 [20~30/100]

구름위 2013. 6. 3.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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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 세계사 100장면
지은이 : 박은봉
출판사 : 가람기획

 

21. 알라 앞에선 만인이 평등 -마호메트, 이슬람 교 창시(610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624년/고구려 당에서 도교 전래
 
  세계 4대 종교로 불교, 기독교, 유교, 이스람 교를 꼽는다. 그중 가장 늦게 창시된 것이 이슬람 교이다. 현재 전세계에 5억 5천만 정도의 신자가 있으며 서남  아시아, 동남 아시아, 북아프리카 일대에 널리 퍼져 있다.
  이슬람 교의 창시자는 마호메트이다. 그는 570년경 아라비아의 메카에서 태어났다. 생후 2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6살 때 어머니마저 잃은 후 작은아버지 아부탈리브의 집에서 자랐다.
  아랍인들은 유목생활을 하며 일찍이 대상무역을 발달시키고 있었다. 마호메트도 12살 때부터 대상에 합류, 시리아 국경 지방을 비롯, 지중해 연안 일대를 돌아다녔다.
  그가 25살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메카에는 하디자라는 부유한 미망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죽은 남편이 하던 장사를 맡아 해줄 사람을 찾는 중이었다. 그러자 그녀의 조카가 친구인 마호메트를 추천, 마호메트는 하디자의 재산관리인이 되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생활의 안정과 막대한 부를 갖게 되었지만 마호메트는 그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메카 교외의 헤라 산속에 들어가 동굴생활을 하며 단식과 명상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자 했다.
  그가 구한 것은 일신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인생의 참뜻이었다. 부족끼리 끊임없이 싸우며 온갖 미신이 판을 치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 하는 의문이 어려서부터 줄곧 마음 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밤, 명상에 잠겨 있는 마호메트의 귀에 문득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그대 신의 예언자여!'
  그러더니
  '마호메트여, 마호메트여, 마호메트여! ' 하고 세 번 부르는 것이었다.
그는  뭐라 형용키 어려운 기쁨을 온몸으로 느꼈다.
  '나는 알라의 예언자다!'
  그의 나이 40살, 610년의 일이다.
  그는 곧 포교를 시작했다.
  '알라 신은 유일하며, 전지전능하다.'
  알라를 믿으면 낙원이, 믿지 않으면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고 설교했다.
  그의 가르침에 환호를 보낸 것은 노예들과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계급타파와 우상숭배 반대, 만민평등을 외쳤기 때문이다. 반면 귀족들은 기존질서를 위협하는 그를 위험인물로 여기기 시작했다.
  622년 마호메트는 자신을 잡으러 오는 귀족들을 피해 도망을 쳤다. 그가 간 곳은 메카에서 북쪽으로 400km쯤 떨어진 야스리브라는 도시였다.
  이슬람 교에서는 이 도피를 '헤지라'라고 부르며, 이 해를 이슬람 력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한편 야스리브는 후에 마디나트운나비, 즉 예언자의 도시,  줄여서 메디나라 불리게 되었다. 메디나는 메카와 함께 이슬람교의 성지이다.
  마호메트는 메디나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가르침은 사람들 마음에 속속 파고들었다.
  '알라 앞에선 왕이건 노예건 모두 평등하다. 알라를 믿고 올바로 행동하면 누구나 천국에 갈 수 있다. 알라는 인간 전체의 구세주시다.'
  마호메트는 자신을 신격화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자신은 신의 예언자일 뿐이라고 했다.

그의 가르침은 제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는데, 후일 이를 모은 책이 '코란'이다. '코란'이란 아랍어로 '읽어야 한다'는 뜻이라 한다. 현재도 '코란'은  이슬람 교도의 경전인 동시에 역사서이자 법전이요, 생활지침서이다.
  630년 마호메트는 군대를 이끌고 메카로 진격, 마침내 무혈입성했다. 알라를 유일신으로 인정하고 마호메트를 메카의 지배자로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화평을 맺은 것이다.
  두 도시를 얻은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전아라비아 반도를 알라 신의 이름 아래 하나로 통일했다. 그가 예수나 석가와 다른 점은 직접 칼을 들고 정치적 통일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그만큼 정치적 지배권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흔히 이슬람 교의 선교방식을 '코란이냐, 칼이냐'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개종을 하지 않으면 무자비하게 죽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정복지 주민이나 포로들에게 일단 개종을 권하지만, 일정한 공물을 바치면 신앙의 자유를 얼마든지 허락했다.
  마호메트는 아라비아를 통일하고 시리아 원정 길에 올랐다가 632년 도중에서 죽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 칼리프들은 시리아, 사산조 페르시아, 이집트를 차례로 정복, 마침내 지중해 남쪽 연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유럽의 게르만 사회를 위협하게끔 되었다.
  그의 사상은 기독교, 유대교, 조로아스터 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일찍이 근동지방을 두루 다니며 각지의 종교, 풍습, 문화를 익혔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사막지대에 흩어져 살던 아랍 인들을 하나로 결속시켜 위대한 민족으로 만든 것은 바로 마호메트의 가르침, 즉 알라 앞에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동포애와 민주주의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22. 현무문의 변 -당의 건국(618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632년/신라 첨성대 건립, 645년/고구려 안시성 싸움서 당군에 승리
 
  수 양제가 친위대의 손에 죽음을 당한  뒤, 이연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당을 건국했다. 이때가 618년이다.
  고조 이연은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왕세충, 두건덕을 제거하고 명실공히  천하를 평정, 진나라, 수나라에 이어 세 번째로 통일국가를 이루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건성, 세민, 원길 세 아들들 사이에 후계자 싸움이 벌어졌다. 세 아들 모두 뛰어난 인재들이었지만 그중에도 둘째 세민이 가장 출중했다. 당의 건국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도 다름아닌 세민이었다.

  건성과 원길이 손을 잡고 자신을 제거하려는 것을 알아차린 세민은 선수를 칠 것을 결심하고 아버지 고조를 알현하였다.
  '형 건성과 동생 원길이 후궁들과 결탁해서 저를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신이 죽어 지하로 돌아가 왕세충과 두건덕을 만나면 그들은 꼴 좋다고 비웃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라고.

  이연은 아연실색했다.
  '물러가라, 내일 아침 두 사람을 불러 이 문제를 밝히겠다.'
  그러나 이는 건성과 원길을 궁궐로 불러들이려는 세민의 계략이었다.
  무덕 9년(626) 6월 4일 새벽, 세민은 현무문에 복병을 배치했다. 현무문은 궁궐의 북문으로 황제를 배알하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문이었다. 일반인은 물론 관리들도 출입증을 제시해야 들어갈 수 있는 문이므로 무장한 군사는 절대 출입할 수 없지만, 세민은 현무문 수비대장을 매수, 자기 편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성과 원길은 거느리고 온 군사를 밖에 남겨둔 채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숨어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공격, 태자 건성은 일격에 쓰러지고 원길 역시 세차게 저항했지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사건을 후세 사가들은 '현무문의 변'이라고 부른다.
  세민은 냉혹한 인물이었다. 건성의 아들 5명과 원길의  아들 5명이 하나도 남김없이 그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3일 후 고조 이연은 세민을 태자로 봉했으며, 2개월 뒤에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다. 세민이 2대 황제 태종이 된 것이다. 그의 나이 28살 때였다.
  권력을 잡기 위해 형제를 죽인 태종이었지만, 정치가로서는 매우 탁월했다. 그는 신하의 직간을 귀담아들었으며, 인재등용과 백성들의 부역을 경감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조용조 제도를 시행, 성년 남자에게 균등하게 세금과 부역을 부과했으며, 토지제도로는 균전제, 병제로는 특정지역에서 병사를 선발하는 부병제를 실시했다. 이런 법들은 수 양제 시절의 가혹한 착취에 비하면 백성들의 부담을 훨씬 더는 내용이었으므로 널리 환영을 받았다. 또 정부기관으로 3성과 6부를 두어 통치의 효율을 기하고 법률을 정비, 율, 영, 격, 식을 마련했다.
  대외적으로도 세력을 뻗쳐 돌궐, 위구르, 거란을 복속, 당의 영토는 서로 아랄 해, 북으로 바이칼 호 부근 남으로는 베트남까지 확장되었다.
  정치가 안정되고 백성의 생활이 윤택해짐에 따라 찬란한 문화가 꽃을 피웠다. 상공업과 무역이 크게 발달, 와국의 문물이 쏟아져 들어왔으며, 당나라 수도 장안은 문화의 중심지요 교역의 중심지로 급성장했다. 신라, 일본, 인도, 아라비아, 서역 등지에서 수많은 상인들과 사절단, 유학생들이 몰려들어 장안은 인구 백만을 넘는 국제도시가 되었다.
  태종의 탁월한 정치는 '정관의 치'라 하여 후세 황제들의 귀감이 되었다.
  이처럼 뛰어난 업적을 남긴 태종이었지만, 그 역시 고구려 원정에는 실패했다. 수 왕조 이래 중국은 한반도를 손에 넣고자 수차례 정복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으로 원정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 고구려와 대립하고 있던 신라로부터 원병요청이 왔다.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저희 신라에서 당에 공물 바치는 길을 차단하고 입조마저 방해하고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의 실력자는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운 연개소문이었다. 태종은 연개소문의 대역죄를 응징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출병을 결심했다.
  '수나라의 멸망을 교훈삼는다면, 멀리 바다 건너 고구려를 치는 일은 중지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관 19년(645) 태종은 진군명령을 내렸다.

  요하를 단숨에 건너 요동성을 함락하고 안시성을 공략했다. 그러나 안시성의 수비는 매우 견고했다. 성주 양만춘의 지휘하에 군민이 하나가 되어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안시성의 농성전은 근 1년 여 지속되었다.
  계절이 바뀌어 혹한이 몰아닥쳤다. 추위와 피로에 지쳐 군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자, 태종은 어쩔 수 없이 철군명령을 내렸다. 설상가상으로 철수 도중 악천후를 만나 엄청난 사상자를 내야 했다. 고구려 원정은 대실패로 끝난 셈이었다.
  3년 후인 649년 태종은 사망했다. 불로장생 약을 잘못 먹은 탓이었다. 그의 나이 51살 때였다.
  
23. 궁녀에서 여황제로 -중국 최초의 여황제 측천무후(690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660년/백제 멸망, 668년/고구려 멸망, 676년/통일신라 시작
  699년/발해 건국
 
  역사를 더듬어보면 여성으로서 최고 통치자가 된 예가 적지 않다.
신라의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러시아의 에카테리나 여제 등은 남성보다 훌륭히 한 나라를 다스린 여걸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왕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치자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이에 비해, 중국의 측천무후는 상인의 딸로서 일개 궁녀가 되었다가 중국 최초의 여황제가 된 인물이다.
  그녀의 본명은 조, 성은 무, 산서성 문수현에서 목재상의 딸로 태어났다. 빼어난 미모를 지닌 그녀는 태종의 부름을 받아 궁궐로 들어갔다. 태종은 그녀에게 무미라는 이름을 내리고 궁녀로 삼았다. 그녀의 나이 14살 때의 일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미랑이라고 부르곤 했다.
  정관 말년(649), 태자 치는 병석에 누운 태종을 병문안 갔다가 곁에서 시중들고 있는 아리따운 미랑의 자태에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태종이 병사하자 태자 치가 제3대 고종황제가 되었다. 미랑도 고종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소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소의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의 야심은 황후가 되는 것이었다. 우선 라이벌인 소 숙비를 제거하고, 다음엔 황후 왕씨를 모함하여 황후 자리에서 내쫓았다. 두 사람은 곤장 백대에 수족이 잘리고 술항아리 속에 넣어져 죽음을 당했다.고종은 무소의를 황후에 책봉하는 문제를 중신회의에 부쳤다. 본래 황후는 명문귀족 가문에서 뽑는 것이 상례인데다 무소의는 선왕의 궁녀였던지라 신하들의 반대는 매우 드셌다.
  그러나 고종은 그녀를 황후로 책봉하였다. 655년, 그녀의 나이 32살 때의 일이다. 이후 그녀는 측천무후로 불리게 되었으며, 황후 책봉을 반대했던 원로대신 저수량과 장손무기는 좌천 또는 유배되었다가 죽고 말았다.
  꿈을 이룬 그녀는 직접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타고난 정치가였다. 고종은 지병인 간질병 때문에 정무를 제대로 볼 수 없어 그녀가 대신 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그때마다 훌륭하게 일처리를 했기 때문에 고종은 현경 5년(660) 정무를 아예 그녀에게 위임해버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고종과 무후를 가리켜 '2인 천자'라고 했다.
  측천무후는 현경 5년 소정방을 파견,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에는 고구려까지 무너뜨려 수
양제나 당 태종도 이루지 못한 숙원사업인 한반도 정복을 달성했다. 이로써 당의 영토는 건국 이후 최대로 확장되었다. 674년 그녀는 지금까지 사용해온 황제, 황후라는 칭호를 천황, 천후로 바꾸고 연호도 상원이라 고쳤다.
  그런데 측천무후의 야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신당서' 본기를 보면, '기해에 천후, 황태자를 죽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황태자 홍은 그녀가 낳은 첫 번째 아들이었지만 그녀의 마음엔 별반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675년 황태자 홍은 유폐되어 있는 의양공주, 신성공주 두 사람을 결혼시킬 것을 고종에게 상주, 윤허를 얻었다. 두 공주는 무후에게 살해당한 소 숙비의 딸들이었다. 그런데 이 일이  있은 직후 별안간 황태자 홍이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노한 무후가 홍을 독살했다고 믿었다.
  뒤를 이어 무후의 둘째 아들 현이 황태자가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무후의 언니 한국부인의 소생이라고 한다. 어쨌든 그 역시 얼마 가지 않아 모반 혐의를 쓰고 자리에서 쫓겨나 자결하고 말았다.
  683년 고종이 죽자 셋째 아들 현이 황제가 되니 이가 제4대 중종이다. 한데 중종은 즉위한 지 1년 만에 쫓겨나고 말았다. 황후 위씨의 전횡에 분노한 측천무후가 중종을 황제자리에서 내쫓은 것이다.
  그리하여 690년 측천무후는 마침내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녀의 나이 67살, 중국에 최초의 여황제가 등장한 순간이었다.
  그녀는 나라 이름을 주라 고치고, 낙양을 신도라 하여 사실상의 수도로 삼았다. 스스로를 신성화제라 칭하고 넷째 아들 단을 황태자로 정하여 성을 무씨로 고쳤다. 또 측천문자라는 새문자 20자를 제정했다.
  그러나 15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705년 측천무후가 병들어 눕자, 재상 장간지가 쿠데타를 일으켜 쫓겨난 중종을 다시 황제로 추대하고 당 왕조를 재건한 것이다. 그해 겨울 측천무후는 82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무후가 죽은 뒤에도 한동안 정치는 안정되지 못했다. 이번엔 중종 비 위씨가 제2의 측천무후를 꿈꾸며 고기만두에 독을 넣어 남편 중종을 살해한 것이다. 그러나 위씨의 야심은 불과 며칠 가지 못하고 단의 셋째 아들 이융기에 의해 무산되었다.
  712년 이융기가 예종의 뒤를 이어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가 바로 현종이다.  현종은 정치를 안정시키고 국력을 키워 '개원의 치'란 칭송을 들었으나, 양귀비를 총애한 나머지 정사를 게을리하다가 안녹산의 반란으로 황제 자리를 양위하고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24. 게르만 족, 유럽을 석권하다.-서로마 제국의 부활(800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751년/불국사 석굴암 건립, 828년/장보고 청해진 설치

  중세 기사들의 용맹을 노래한 서사시로 '롤랑의 노래'가 있다. 롤랑은 실제 인물로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 휘하의 기사이다.
  카롤루스 대제가 에스파냐를 정벌할 때의 일이다. 당시 에스파냐는 이슬람 교도인 사라센 인이 지배하고 있었다. 모든 도시를 다 잃고 사라고사라는 도시 하나를 지키고 있던 사라센은 강화를 맺자는 제의를 해왔다. 카롤루스 부하들의 의견은 둘로 갈라졌다. 카롤루스의 조카로 용맹이 뛰어난 롤랑은 극력 반대했고, 롤랑을 미워하는 가느롱은 강화를 주장했다.
  오랜 원정에 지친 카롤루스는 사라센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가느롱을 휴전회담 대표로 내보냈다. 가느롱은 이번 기회에 롤랑을 제거하려는 생각에 사라센 왕에게 귀띔을 했다.
  '롤랑이 자꾸 싸움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그를 없애야 안심할 수 있을 겁니다. 본국으로 돌아갈 때 롤랑의 부대를 맨뒤로 돌려놓을테니 그때 롤랑을 공격하십시오'
  사라센 왕은 가느롱에게 후한 상을 주었다.
  이윽고 카롤루스 군은 철군을 시작, 피레네 산맥의 롱스포 고개에 도착했다. 그곳은 아주 가파른 비탈 사이로 좁은 길이 하나 있을 뿐이어서 일렬종대로 한 사람씩 지나가야 했다.
  '만일 여기서 적이 기습해온다면 우린 대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후위대를 두어 뒤를 지켜야겠다.'
  카롤루스의 말에 가느롱이 얼른 대답을 했다.
  '그 임무에는 롤랑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카롤루스가 망설이자 이번엔 롤랑이 나섰다.
  '폐하, 그 임무는 제가 맡겠습니다.'
  카롤루스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허락했다.
  '절대 성급히 행동하지 말라,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뿔나팔을 불어라,. 그러면 즉시 달려오겠다.'하며 자신의 활을 건네주었다.
  '잠깐, 우리도 가겠네'
  롤랑과 함께 용맹을 날리던 11명의 기사들이 따라 나섰다.
  한편 사라센 왕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롱스포 고개에 이르렀다. 롤랑의 후위대만 남은 것을 확인한 사라센 군은 함성을 지르며 공격해왔다. 롤랑의 2만 군사는 용감히 싸웠지만 중과부적, 하나 둘 쓰러져갔다. 롤랑도 혼신의 힘을 다해 뿔나팔을 불고는 적진을 향해 뛰어들어가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카롤루스가 달려왔을 때는 롤랑을 비롯하여 전군이 전사한 후였다. 노한 카롤루스는 배반자 가느롱을 처형하고 다시 에스파냐로 쳐들어가 대승을 거두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유럽의 새 실력자로 떠오른 것은 프랑크 왕국이다. 라인 강 하류에 정착한 프랑크 족은 갈리아 지방 일대로 세력을 넓혀 5세기 말 프랑크 왕국을 건설했다.
  초대 왕 클로비스는 매우 영민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리우스 파인 여타의 게르만 국가들과는 달리 아타나시우스 파로 개종, 로마 교회의 지지를 얻어 영토확장에 무난히 성공했다.
  그가 죽은 뒤 내분을 수습하고 실권을 장악한 사람이 카롤루스 마르텔이고, 그 아들 피핀은 751년 국왕을 수도원 승려고 만들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카롤루스 대제는 바로 이 피핀의 아들이다.
  카롤루스 대제에 이르러 프랑크 왕국은 유럽 최강의 국가로 성장했다. 여기서 카롤루스 대제와 교황 레오 3세 사이에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졌다.
  당시 로마 교황은 동로마 제국의 간섭과 보호하에 있었다. 교회의 우두머리인 교황은 로마 제국의 정신적 지도자로 자처했지만 실제로는 동로마 제국과 사사건건 부딪치고 있는 형편이었다. 교황은 새로운 후원자가 필요했다. 이대 가장 적절한 인물로 생각된 것이 프랑크 왕 카롤루스였던 것이다. 카롤루스 역시 유럽을 지배하기 위해선 교황을 무시할 수 없으며 그 지지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800년 크리스마스 날, 교황 레오 3세는 카롤루스에게 서로마 제국 황제의 제관을 씌워주었다.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일개 국왕이 아닌 황제와의 제휴라야 했기 때문이다.
  프랑크 왕 카롤루스의 서로마 제국 황제 즉위는 유럽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중대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이로써 침입자였던 게르만은 명실상부하게 유럽의 새 주인공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게르만 문화와 로마 문화, 기독교가 융합된 중세 서율버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프랑크 왕국은 교황의 수호자요, 서로마 제국의 계승자로 자처하며 유럽 일대를 석권하게 되었다. 서로마 제국은 부활되었으나, 그 주인은 바로 로마를 무너뜨린 당사자, 게르만 족이었던 것이다.
  
25. 반은 노예요 반은 농민 -봉건제도의 완성(10세기)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900년/견휜 후백제 건국, 901년/궁예 후고구려 건국,
  918년/왕건 고려 건국
 
  카롤루스 대제가 죽자 프랑크 왕국은 프랑크 족의 관습에 따라 네 명의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장남 루트비히 1세가 영토와 함께 서로마 황제의 제관을 물려받았지만, 그는 아버지와 달리 정치적으로 무능한 인물이었다. 그가 형제들과  영토분할 문제를 놓고 골육상쟁을 하다 죽고 말자, 왕국은 다시 그의 세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장남 로타르는 중부 프랑크와 이탈리아 일대, 그리고 서로마 제국 황제 칭호를 물려받았으며 3남 루트비히 2세는 동프랑크를, 막내 은 서프랑크를 각각 물려받았다.
이같은 영토분할은 843년 베르 조약으로 확정되었다. 그런데 로타르가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그가 통치하던 지역은 870년 메르센 조약에 의해 남은 두 형제에게 또 분할되기에 이르렀다. 북동부는 동프랑크로, 서북부는 서프랑크로, 남부는 그대로 남게 된 것이다. 이 메르센 조약으로 그어진 경계선이 오늘날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기원이 되었다.
  영토분할을 둘러싼 혈육간의 싸움으로 약화된 프랑크 왕국에 이번엔 이민족의 침입이 뒤따랐다. 북쪽으로는 노르만 족, 즉 바이킹이 침입해 들어왔고, 동쪽으로는 마자르 족이, 남쪽으로는 이슬람 세력이 물밀 듯 밀어닥쳤다. 이들이 지나간 곳은 무차별한 약탈과 살상행위로 농작물, 가축은 물론 사람들도 살아남지 못했다.
  혼란의 시대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런데 중세사회의 독특한 질서인 봉건제도는 바로 이 혼란의 시대에 완성되었다.
  봉건제도란 주종제도와 장원제도가 결합된 중세 특유의 정치, 경제, 군사, 사회적 지배질서를 말한다.
  주종제도란 주군이 신하에게 토지를 하사하고, 그 대신 신하는 충성과 복종을 맹세하여, 주군은
신하를 보호, 부양할 책임을, 신하는 주군을 위해 군사력을 제공할 의무를 짐으로써 상호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는 당시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상호 계약관계로부터 출발했다.
  토지를 매개로 한 이 주종관계는 연쇄적으로 이어져 거대한 피라미드 꼴을 이루었다. 국왕 혹은 황제가 꼭대기에 있고, 그 밑에 봉신으로 공작이, 또 그 밑에 후작과 백작이...하는 식이었다.
평기사는 지배계급의 최말단이었으며, 피라미드의 맨 밑바닥을 차지하는 절대다수는 농민들이었다.
  토지는 중세사회를 유지하는 경제적 기반이었다. 봉신들은 자신의 토지를 효율적으로 경영하기 위해 하나의 경작단위로 만들었는데 이를 장원이라 한다. 농민은 장원의 주인인 영주로부터 경작권을 위임받는 대신 영주에게 공납과 부역의 의무를 졌다.
  영주의 권한은 절대적이었다. 평기사 중엔 장원을 하나밖에 가지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았으나, 어쨌든 영주는 자기 영지 내에선 왕과도 같은 절대적 존재였다.
  반면 농민에게 부과된 세금과 노역은 매우 과중한 것이었다. 노르망디 지방의 한 기록을 보자.
  '5월에는 영주의 풀밭을 깎고 건초를 나른다. 그 다음에는 도랑을 치운다. 8월에는 곡물을 거둬 들이는 부역을 해야 하고, 9월에는 돼지세를 바쳐야 한다. 돼지 중 가장 좋은 두 마리는 영주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한 마리당 각각 세금을 내야 한다. 10월에는 고정적인 지대를 지불해야 한다. 겨울이 다가오면 겨울 농사에 대비한 대대적인 부역이 행해진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케이크와 암탉을 바쳐야 한다....' 게다가 방앗간을 비롯해 농기계 사용료를 어김없이 내야 하고, 통행세, 사망세, 영주의 여행비 부담, 교회에 바치는 10분의 1세, 결혼하면 결혼세를 바쳐야 했다. 심지어는 초야권이란 것까지도 있었다. 즉 신부가 결혼 첫날 밤의 잠자리를 신랑이 아니라 영주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세 농민의 삶은 매우 비참하고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중세는 철저한 위계질서의 사회였으므로 농민들은 평등이란 개념은 아예 떠올리지도 못했다. 자신의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는 영주에 매여서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었다.
  사회구조가 낳은 무거운 짐은 모두 위계질서 맨 밑바닥에 있는 농민들의 몫이었고, 교회 역시 또 하나의 영주로서 농민들 위에 군림했다. 때문에 중세 농민들을 일컫기를 반은 노예요 반은 농민이라는 뜻으로 '농노'라고 한다.
  
26.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낳는다. -유럽 각지에 도시 발달(10세기)
  
*그때 우리나라에서는-926년/발해 거란에 멸망, 935년/경순왕 고려에 귀의, 통일신라 멸망,
  936년/후백제 멸망하고 고려, 후삼국 통일
 
  함부르크, 아우구스부르크, 룩셈부르크 등 유럽의 유서깊은 도시에는 '부르크'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곳이 많다. 이는 독일어로 '성곽'이라는 뜻이다.
  중세 도시는 이름 그대로 두터운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성문을 들어서면 교회와 광장이 있고 그를 중심으로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구불구불한 좁은 길가엔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의 가게와 살림집을 겸한 집들이 들어차 있다. 비나 눈이 오면 포장 안된 길들이 온통 진흙탕으로 변하고 소나 말, 돼지들이 아무 때나 길가로 튀어나온다. 쓰레기와 상하수도도 심각한 문제. 몇 개 안되는 공동우물로 상수도를 해결하고 하수도는 얕고 좁은 도랑뿐이다.'
  이것이 중세 도시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중세 도시는 10세기경 인구가 증가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유럽 각지에서 생겨났다. 도시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는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어느 것이든지 상업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처음엔 상인들이 모여 임시로 거주하며 장사를 하는 곳이었다. 이런 곳은 대개 로마 시대 이래 내려오는 고대 도시의 외곽지역이었다. 교통이 편리하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장사하기에 알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상인들은 임시 거주지 주변에 새로운 성곽을 쌓고 영구히 거주하며 장사를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들은 부르주아라고 불리어졌다. 오늘날 자본가를 뜻하는 말인 부르주아는 바로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도시가 제일 먼저, 그리고 활발히 발달한 지역은 발트 해 주변의 해상무역이 활발했던 북유럽이다.
  처음엔 도시 역시 영주의 지배하에 있었다. 영주는 시장세, 거래세, 통과세 등 각종 세금을 징수할 수 있고, 또 도시가 생기면 땅값도 올랐기 때문에 도시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상인들은 영주에게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었지만, 주변 농촌에서 이주해온 수공업자나 날품팔이 노동자는 여전히 농노 신분이었다. 이들은 상업활동에 필요한 온갖 일들, 예를 들면 수레나 상자의 제조, 상품 선적과 수송 등에 종사했으며, 도시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제빵업자, 양조업자, 대장간, 푸줏간 경영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상인과 함께 이들 수공업자들은 도시주민의 핵심을 이루었다.
  상공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날로 번창하자 도시민들은 영주의 불필요한 지배와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영업의 자유'를 얻고자 했다. 영주로부터의 독립, 즉 자치권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도시민들은 혹은 돈으로 혹은 무력으로 자치권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신분의 자유, 영주가 만든 법이 아니라 도시법과 상법에 의해 운용되는 자신들의 재판소, 각종 세금과 봉건적 강제의 면제, 자치권을 따낸 도시민들은 문자 그대로 '자유인'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정기관과 재판소를 만들고 법을 제정하여 질서를 유지했으며 군대를 길렀다. 수입에 따라 공평하게 비용을 부담, 도시를 운영해나갔다.
  13세기경에는 거의 모든 도시가 자치권을 획득, 영주로부터의 독립을 실현했다. 이젠 비록 농노 출신이라 하더라도 영주에게 붙잡히지 않고 '1년과 하루'를 도시에 거주하면 누구나 자유인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서부터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낳는다.'는 말이 생겨났다.
  시민들이 자신이 사는 도시에 갖는 애착심은 대단했다. 도시는 시민의 고향이자 국가이고 삶의 공동체였다. 민족이라든가 국민이라는 관념보다는 자기 도시의 시민이란 관념이 훨씬 강했다.
  이런 생각은 한편으론 퍽 배타적이어서 타도시 사람들은 '이방인'으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도시 당국은 무엇보다 자기 시민의 이익과 권리를 보호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다른 도시민이 자기 도시에 와서 상업활동을 하는 것을 엄격히 통제하고, 대내적으로는 시민 공동의 복지를 위해 경제통제를 가했다. 이 같은 경제통제의 한 형태가 바로 길드이다.
  철저한 주종관계에 의해 움직이는 중세 봉건사회에서 도시는 분명 이질적인 집단이었다. 경제 외적 강제를 모두 벗어버리고 경제 원리에 입각해 생활하는 시민들은 농노나 영주와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었다. 바로 여기서 근대사회로 가는 맹아가 싹트게 되는 것이다.
  
27. 눈밭에서 맨발로 애원한 황제 -카노사의 굴욕(1077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993년/거란 침입, 서희의 담판으로 거란 물리침,
  1019년/강감찬, 귀주에서 거란의 10만 군사 격파
 
  중세 사회의 신분서열을 묘사한 책을 보면, 사회신분은 총 24개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 두 번째는 교황, 그 다음은 수도원장  이하 사제와 카톨릭 관계자들이 차지하고, 황제는 일곱 번째, 국왕은 여덟 번째 영주는 열번째에 자리하고 있다. 제일 끝에 있는 것은 유대인이다.
  중세 유럽에서 카톨릭의 권위와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카톨릭 교회는 국왕 및 황제와 연합 또는 상호견제하면서 사회 전체를 지배했다. 그런데 교회가 황제보다도 우월한 위치에서 막강한 권위를 행사하게 된 계기를 이룬 사건이 1077년에 일어났다.
  당시 카톨릭은 성직자들의 극심한 부정부패와 타락으로 교황 및 성직자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새로 교황에 즉위한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자의 결혼, 성직 매매를 일절 금지하고, 그때까지 국왕 및 제후가 갖고 있던 성직임명권을 교황이 갖겠다고 공포했다. 성직자를 세속의 왕이나 제후들이 임명하기 때문에 교회가 타락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독일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4세는 이에 격렬히 반발했다. 성직임명권을 넘겨준다는 것은 카톨릭 사회에 대한 지배권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카톨릭 사회의 주도권을 둘러싼 교황과 황제의 일대 결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1076년 1월 하인리히 4세는 보름스에서 제국국회를 소집,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이번엔 분노한 교황이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말았다.
  파문이란 카톨릭 세계로부터의 완전 추방을 뜻하는 것으로 매우 치명적인 조치였다. 카톨릭 교도는 더 이상 황제를 만나선 안되었으며,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제후 역시 황제와 똑같이 불경한 자로 간주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하인리히 4세를 지지하던 독일의 제후와 성직자들은 황제에게서 등을 돌렸다. 파문이 취소되지 않으면 1088년 2월 교황이 주최하는 아우구스부르크 회의에서 하인리히 4세는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기에 이르렀다.
  하인리히 4세는 당황했다. 더 이상 교황에 맞서 싸울 지지기반을 잃은 그는 무조건 복종을 맹세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안했기 때문에 교황을 직접 만나 용서를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몰래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로 향했다. 꽁꽁 얼어붙은 라인강을 건너고 눈 덮인 알프스를 넘었다. 유난히도 추운 겨울이었다. 교황은 이때 토스카나 백작 부인 마틸다의  카노사 성에서 휴양중이었다.
  고생 끝에 간신히 도착한 하인리히 4세였지만 교황은 만나주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황제는 그 추운 겨울날 얇은 옷에 맨발로 눈속에서 서서 꼬박 3일 밤낮을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다. 그제야 교황은 접견을 허락하고 교회에 복종할 것을 서약받은 다음 파문을 취소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성직 임명권을 둘러싼 교황과 황제의 싸움은 일단 교황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돌아온 하인리히 4세는 왕권을 재건하는 데 힘을 기울이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1080년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다시 파문에 처하고 새 황제를 승인했지만 이번엔 하인리히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독일 성직자들과 제후들을 소집, 도리어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하고 클레멘스 3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다.
  '두고 봐라. 지난번 당한 모욕을 몇십 배로 갚아주마.'
  1082년 하인리히 4세는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로마를 점령하고 클레멘스 3세의 교황 취임을 교황청에 승인시켰다. 살레르노 지방으로 피신한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85년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한 까닭으로 유배신세를 면치 못하고 죽는다.'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 7세의 싸움은 하인리히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러나 교황과 황제의 치열한 대립이 일단락된 것은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 7세가 모두 죽고 난 다음이었다. 성직 임명은 교황의 권리로 하되 성직자에게 내리는 토지는 국왕의 권한하에 둔다는 타협안이 보름스 회의에서 통과된 것이다.
  그러나 교회와 교황의 권위는 날로 막강해져 앞에서도 말했듯이 하나님 다음의 지위에 있게 되었다. 교황권이 절정에 달한 것은 인노켄티우스 3세(재위 1198-1216)때이다. 이때, '교황은 해, 황제는 달'이란 말 그대로 황제의 권위는 막강한 교황권 앞에서 빛을 잃게 되었다. 


28. 하나님이 원하신다! -십자군 전쟁(1096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097년/주전도감 설치,  1107년/윤관, 여진 정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십자군 전쟁처럼 성스러운 이름에 가장 세속적인 욕망이 결합된 전쟁은 없으며, 신의 이름을 빌어 약탈과 살인, 만행이 판을 친 전쟁이 없을 것이다.
  전쟁의 발단은 예루살렘이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 기독교인, 이슬람인 공통의 성지였다. 유대인에게는 다윗의 우물이 있는 어머니 도시요 기독교도에겐 예수가 죽어 부활한 곳, 이슬람 교도에겐 마호메트가 머무른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 인들은 기독교인의 성지 순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셀주크 투르크족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부터 기독교인의 성지순례는 금지되었다. 셀주크 투르크족은 중앙 아시아에서 일어난 민족으로서 열렬한 이슬람 교도가 되어 세력을 팽창시키고 있었다.
  위협을 느낀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교황 우르반 2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우르반 2세는 이것이 비잔틴 교회를 로마교회에 복속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1095년 11월 우르반 2세는 클레르몽에서 회의를 개최,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 파병을 제창했다. 웅변술이 뛰어났던 그는 성지 예루살렘을 잃은 기독교도들의 비참한 생활과 투르크 족의 위협을 설명하고, 이슬람의 승리는 기독교 세계의 불명예라고 열변을 토했다. 이 전쟁은 성전이며, 전사자는 모두 천국에 가서 그 보상을 받을 거라고 역설했다. 그뿐 아니라, 동방엔 금은보화가 깔려 있고 아리따운 이슬람 여인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며 제후들의 욕심을 부채질했다. 교황의 웅변에 감격한 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하나님이 이를 원하신다!'
  1096년 제1회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향해 떠났다. 십자군은 안티오크를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눈앞에 두었다. 이 무렵 '마라의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 출신의 기사 보에몽이 이끄는 십자군 부대는 마라 성에 도착하여 목숨이 아까운 자는 궁전 안으로 피난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런 다음 성안으로 진격, 닥치는 대로 약탈과 살륙을 자행했다.
사라센 인이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였으므로 성안은 시체로 뒤덮여 산을 이룰 지경이었다. 게다가 궁전에 피난하고 있던 사람들까지 공격해서 소유물을 빼앗고 살아남은 자는 노예로 팔아버리고 말았다.
  마라에 머문지 1개월, 식량이 떨어지자 사라센 인을 죽여 톱으로 배를 갈라보기도 했다. 사라센 인들이 금은보화를 삼켜 뱃속에 간직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들은 또한 죽은 사라센 인의 고기를 요리해 먹기도 했다.
  십자군의 약탈과 만행은 비단 마라에서만이 아니었다. 어쨌든 이들은 남하를 계속, 1099년 6월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예루살렘 전투는 6주일간 계속되었다.
여기서도 십자군은 적군은 물론 주민들까지 무차별로 죽이는 잔학성을 보였다. 십자군에 종군했던 남프랑스 출신 성직자의 기록을 보자.
  '거기엔 너무도 처참한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큰 거리와 광장엔 사람의 머리며 팔다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십자군은 시체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신전과 벽들은 물론 기사가 잡은 말고삐까지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성지순례를 방해했던 자들로 더럽혀졌던 이곳이 그들의 피로 씻겨져야 한다는 신의 심판은 정당할 뿐 아니라 찬양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십자군의 대량학살은 신의 심판이요 영광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성지탈환에 성공한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왕국을 세우고 개선했다. 그러나 곧 다시 이슬람에게 예루살렘을 빼앗겼고, 교황은 연달아 십자군을 파견했다.
  십자군 원정은 총 8차에 걸쳐 일어났는데 그중 성지탈환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한 것은 제1차 원정 때뿐이었다. 나머지는 어처구니없는 탈선행위로 일관했고 심지어는 엉뚱하게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 라틴 제국을 세운 일도 있었다.
  1212년 제5차 십자군, 이른바 소년 십자군은 상인들과 결탁한 선주의 농간으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끌려가 사라센 인에게 노예로 팔렸다. 사라센 인들은 700명에 달하는 이 소년들을 다치지 않고 모두 해방시켜 주었다.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끝이 났다. 그 결과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와 교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믿지 않게 되었다. 전쟁에 참가했던 영주와 기사들은 영지를 돌보지 않은 탓에 수입이 줄고, 참가비용을 조달하느라 가산을 탕진하여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반면 눈에 띄게 세력이 커진 것은 국왕과 상인들이었다. 상인들은 전쟁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으며, 국왕은 교황과 제후들을 누르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들 신흥 상인층과 손을 잡았다.
  십자군 전쟁은 중세사회가 지닌 힘을 분출시킨 사건인 동시에 봉건제도의 기초를 뒤흔들어 다음에 올 새로운 사회질서를 준비하는 서곡이기도 했다.
  
29. 중세문화 꽃, 대학 -대학의 성립과 발달(12세기)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135년/묘청, 북벌 주장하고 대위국 세움,
  1145년/김부식 '삼국사기' 편찬,  1170년/정중부의 쿠데타, 무신정권 시작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볼 수 있는 대학들은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대학의 기원은 중세 유럽에서 시작된다.
  가장 오래 된 대학으로 알려져 있는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은 일반 교양과목과 의학, 철학, 신학 등을 가르쳤는데, 그중에서도 법학으로 이름을 날렸다.
  볼로냐 대학은 당대의 가장 뛰어난 법학자 이르네리우스의 로마법 강의와 그라티아누스의 교회법 강의로 유명했으며, 유럽 전역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어 법률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자 대학 주변의 시민들은 방세를 대폭 올렸으며, 학생들은 조합을 만들어 이에 대처했다.
  학생조합의 첫 번째 요구사항은 방세 인하였다. 이들은 볼로냐 시당국에 방세 인상 금지를 요청했다. 만일 들어주지 않으면 모두 볼로냐 시를 떠나 다른 도시로 가겠다고 위협했다. 당시 대학은 강의실이나 기숙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나 공공건물을 빌려 강의를 진행했기 때문에 학생조합이 갖는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방세 인하 싸움에서 승리한 볼로냐 대학생들은 교수를 다음의 목표로 삼았다. 학생들의 요구사항은 이러했다.
  '학생들의 허락 없이 교수 마음대로 휴강하지 말라.' '수업시간을 정확히 지켜달라.' '교수는 강의를 대충하지 말라.' '어려운 문제라고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고 넘어가지 말라.' '폭넓은 강의 내용을 원한다.' 등등.
  학생들이 이런 요구사항을 내걸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교재를 제대로 구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당시는 아직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아 모든 책을 손으로 직접 써서 만들어야 했는데, 이런 필사본의 값이 엄청나게 비쌌던 것이다. 교수의 연봉이 50후로린인데 교재값은 한 권에 25후로린이었으니, 학생 신분으로서 교재를 산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좋은 교수의 훌륭한 강의를 들으며 스스로 필기를 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한데 교수들이 강의를 소홀히 하는 데서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교수를 관철시키기 위해 수업거부 혹은 등교거부 등 단체행동을 불사했다. 대학 재단이란 것이 전혀 없고 오로지 학생들이 내는 수업료에 의해 대학이 운영되던 당시인지라 학생들의 단체행동은 곧바로 교수들의 생계를 위협했다.
  그러자 교수들도 조합을 만들어 스스로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교수들이 만든 조합콜레지아라고 했다. 오늘날 단과대학을 뜻하는 칼리지는 바로 여기서 나온 말이다. 종합대학을 일컫는 유니버시티는 학생조합 우니베르시타스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학생들도 장래 교수가 되려면 칼리지에 가입해야 했으므로 칼리지를 함부로 대하진 못했다. 칼리지에 가입하려면 엄격한 자격심사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볼로냐 대학의 중심은 역시 학생이었다.
  신학으로 명성을 떨친 파리 대학은 이와는 달리 교수가 중심이었다. 노트르담 성당 학교로부터 출발한 파리 대학은 정치 중심지인 파리에 있다는 유리한 입지조건에 아울러 당대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 아벨라르두스의 명성에 힘입어 신학의 본거지가 되었다.
  아벨라르두스는 여수도원장 엘로이즈와의 정신적 사랑으로 유명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신학 강의는 한 번에 5천 명의 학생들이 몰려드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한편 대학은 도시당국과 교회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오랜 투쟁을 했다. 1200년경 파리 대학의 한 독일 유학생이 시민에게 모욕을 당한 문제로 학생들과 파리 시민간에 집단 싸움이 벌어졌다. 시민들은 경찰을 불렀고, 결국 학생 5명이 목숨을 잃는 사태가 벌어졌다. 교수들과 학생들은 즉시 국왕에게 항의, 학생을 살해한 경찰을 처벌하지 않으면 즉시 파리를 떠나겠다고 경고했다.
  파리 대학의 권위는 막강했다. 교황을 비롯해 고위성직자 대부분이 파리대학 출신인지라 국왕 필립 2세는 할 수 없이 문제의 경찰을 체포, 처벌하고 파리 시의 경찰책임자도 문책해야 했다. 그리고 현행범이 아니면 파리 대학 학생에겐 절대로 손을 대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나아가 재판권을 비롯한 일체의 권한을 대학에 맡겨 자치를 허락했다.
  중세 대학생들은 문법, 수사학, 논리학 3과목을 수료하면 대학 졸업장을, 산수, 기하, 천문, 음악 4과목을 수료하면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법률, 의학, 신학 중 하나를 택해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그중 신학이 가장 어려운 학문으로 꼽혔다.
  대학을 졸업하면 전문직에 종사할 수 있었다. 문학 전공자는 행정가나 교수로, 법학 전공자는 법률가나 관리로, 신학전공자는 신학교수나 고위 성직자가 되었다.
  학생들은 성직자처럼 머리를 박박 깎고 공부에 열중했지만 점잖고 경건한 행동만 한 것은 아니었다. 술과 춤, 여자를 즐기기도 하였고 패싸움도 곧잘 했다.
  13세기 이후의 유럽 중세문화는 대학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했다. 15세기 무렵엔 유럽 각지에 80여 개의 대학이 있었다고 한다. 대학은 자유와 진리의 상징이었으며, 중세문화의 꽃이었다.
  
  
30. 칭기즈칸, 세계제국을 세우다 -몽고 통일, 중앙아시아 원정(1206-1227)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198년/노비 만적의 봉기,  1231년/몽고 1차 침입,
  1236년/팔만대장경 조판 시작, 1270년/삼별초의 대몽항전, 1285년/일연, '삼국유사' 저술
 
  서양에서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동양의  한모퉁이에서는 세계제패를 꿈꾸는 거대한 물결이 일고 있었다. 그 물결의 주인공이 바로 칭기즈칸이다. 칭기즈란 몽고어로 '절대적인

힘'이란 뜻이고 '군주'를 의미한다.
  몽고 고원의 오논 강변에 살고 있는 유목민 몽고족의 한 부락에서 테무진이란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눈에서 광채가 나고 얼굴에 광명이 있다는 뜻이다. 아버지 에스게이는 부족장이며, 어머니 호에룬은 에스게이가 다른 부족에게서 약탈해온 여자였다.
  테무진이 9살 나던 해, 아버지 에스게이가 타타르 인에게 독살당하자, 테무진은 네 동생들과 함께 어머니 손에서 자라났다. 몽고족은 보잘것없는 작은 부족이었고, 특히 테무진의 가족은 아버지의 명성 때문에 몇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자란 테무진은 17살이 되어 불테란 여성과 결혼을 했다. 어느 날 몽고족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메르키트 부족이 공격을 해왔다. 테무진은 재빨리 어머니를 피신시키고 자신도 아우들과 함께 도망을 쳤다. 적들이 사라진 후 돌아와보니 모두들 무사했으나 아내 불테만이 돌아오지 않은 채였다. 그녀는 포로로 잡혀가고 만 것이다 이는 20여 년 전 에스게이가 메르키트 부족장의 친척으로부터 신혼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은데 대한 복수였다. 그 여인이 바로 테무진의 어머니 호에룬이다.
  테무진은 아버지의 친구인 케레이트 부족장 완칸과 동맹을 맺고 메르키트를 기습했다. 이 싸움으로 테무진의 용맹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얼마 후 테무진은 알타이 산맥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나이만 부족과 일대 결전을 벌여 부족장 다얀칸을 사로잡고, 고비 사막 주변의 대초원을 수중에 넣었다. 보잘것없는 작은 부족에 불과했던 몽고족의 이름은 이제 이 일대를 통칭하는 명칭이 되었다.
  1206년 테무진은 몽고를 통일하고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 제3대 칭기즈칸이 된 것이다. 흩어져 서로 싸우던 부족들은 칭기즈칸 밑에 모여 하나가 되었다.
  몽고를 통일한 칭기즈칸은 날랜 기마병을 중심으로 군대를 재정비한 다음 원정의 길을 떠났다. 그의 목표는 금나라였다. 금은 번번이 몽고로 쳐들어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두 명의 칸을 무참히 죽였다. 제2대 안바가이칸은 금나라 황제 앞에 끌려나가 커다란 목마에 못박힌 다음 토막 토막 잘리는 능지처참을 당했다. 칭기즈칸은 금나라에 복수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1211년 봄 칭기즈칸이 거느린 군대는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출정했다. 초원과 사막을 건너고 만리장성을 넘어 황하 이북을 수중에 넣고 1213년에는 금의 수도 북경에 이르렀다. 북경이 함락된 것은 1215년 5월의 일이다.
  금을 정벌한 칭기즈칸은 멈추지 않고 중앙아시아로 뻗어나갔다. 총 60만의 대군을 동원한

중앙 아시아 원정은 1219년 시작되었는데, 그 첫 번째 목표는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하는 호라즘이란 나라였다.
  '큰일났다. 몽고군이 쳐들어온다!'
  호라즘의 군대는 여러 인종을 모은 용병이었으므로 칭기즈칸의 군대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몽고군은 호라즘의 요새 오토랄을 5개월만에 함락시킨데 이어 사마르칸트를 불과 닷새 만에 부너뜨렸다. 성벽은 무너지고 집들이 죄다 불탔으며 수십만의 무고한 주민들이 살해당했다.
  호라즘의 영토는 몽고 기마대의 말발굽 아래 남김없이 짓밟혔다. 이들이 휩쓸고 지나간 곳은 폐허로 변하였다. 남자들은 죽음을 당하고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포로로 끌려갔다.
  호라즘 왕 무하마드는 카스피 해의 어느 섬에 피신해 있다가 그만 홧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토록 넓은 영토를 다스리던 내가 무덤 정할 땅도 없이 죽는구나!'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의 시체는 수의도 없이 부하의 속옷 한 장으로 감싸졌다.
  그후 칭기즈칸은 페르시아, 카프카스 산맥 너머의 남러시아, 크림반도와 볼가 강 유역까지 진출, 몽고를 통일한지 20년 만에 유럽의 동부지역까지 손에 넣었다. 이로써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대제국이 건설된 것이다. 칭기즈칸이 건설한 제국은 알렉산더를 비롯, 세계 그  어느 영웅도 이룩하지 못한 최대판도의 세계제국이었다.
  몽고군이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날랜 기병의 활약 덕분이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능란하게 말을 모는 몽고 기병 앞에 무거운 갑옷을 입은 적들은 적수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금나라 포로로부터 화약 제조술을 배워 화약을 사용할 줄 알았으며, 투석기와 특수한 수레를 이용한 성벽 공격에도 능했다.
  두 번째 이유는 점령지 주민을 전쟁에 동원, 몽고군의 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였다는 데 있다. 동원된 주민들은 중노동에 시달리거나 군대의 방패막이 역할을 해야 했다.
  칭기즈칸은 7년에 걸친 대원정을 마치고 개선했다. 원정의 피로를 풀기위해 휴양하다가 1227년 사망하니 그의 나이 66살이었다.
  그가 점령한 대제국은 주치, 차가타이, 오고탕. 툴루이 네 명의 아들들에게 상속되었다. 주치가 일찍 죽자 그 땅은 아들 바투가 물려받았다.
  칸 자리를 두고 한동안 친족간의 암투가 벌어졌으나 막내 툴루이의 셋째 아들인 쿠빌라이가 칸이 되면서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1271년 쿠빌라이는 수도를 카라코럼에서 북경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원이라 고쳤다. 이로써 몽고는 이민족으로 중국대륙에 통일왕조를 세운 최초의 민족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