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세계사

세계사 100장면 [30~40/100]

구름위 2013. 6. 3.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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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 세계사 100장면
지은이 : 박은봉
출판사 : 가람기획

 

31. 유럽을 휩쓴 공포의 흑사병 -흑사병 창궐(14세기)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302년/충렬왕, 원을 방문하고 통혼관계 성립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문학작품으로 '데카메론'이란 소설이  있다. 이탈리아인 보카치오가 쓴 이 책은 무서운 흑사병을 피해 외딴 시골로 도망친 열 명의 남녀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한 사람씩 돌아가며 이야기를 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 이야기 내용은 하나같이 성직자와 봉건귀족들의 도덕적 타락에 관한 것들이다.
  14세기 중엽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중세사회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커다란 사건이다. 흑사병이 언제 어디서 발생했는지 정확히 알수 없다. 당시 사람들은 아시아나 이집트에서 생겨 유럽으로 전엽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 밝혀진 바에 의하면, 1346년경 크림 반도  남부 연안에서 생겨나서 무역항로를 따라 흑해를 거쳐 지중해를 건너 이탈리아에 상륙했다고 한다.
  흑사병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퍼져갔다. 1347년 이탈리아를 강타하고 같은 해 말 마르세유, 아비뇽에 이르러 1348년에는 프랑스 전역을 휩쓸었다. 1349년에는 영국을, 이어 1350년에는 북부 유럽을 거쳐 아이슬란드와 러시아에까지 이르렀다. 그뿐 아니라 이집트, 북아프리카, 중앙 아시아를 거쳐 중국까지 퍼져나갔다.
  흑사병이 이렇게 빨리 전염된 것은 활발한 무역활동으로 인한 잦은 왕래와 도시의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환경, 병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 때문이었다.
  흑사병은 페스트의 일종으로 폐에 병균이 침입하는 폐 페스트를 일컫는다. 일단 감염되면 별안간 고열이 치솟고 피를 토하며 호흡 곤란을 일으켜 정신을 잃는다. 대개 발병한 지 24시간 내에 사망하고 마는데, 사망 직전에 환자의 피부가 흑색 또는 자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흑사병이라고 불리었다.
  페스트의 발병원인은 물론 치료법도 몰랐던 당시 사람들은 갑자기 쓰러져 헛소리를 하다가
순식간에 죽어버리는 환자들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시체와 환자가 쓰던 물건을 불태우는 것만이 유일한 예방책이었다.
  환자가 발생한 집은 병균이 못 나오게 한다고 문을 닫아걸고 못질을 하거나 불을 질렀다. 때문에 산 채로 불타죽는 환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방법도 소용없었다. 흑사병은 사람이건 짐승이건 가리지 않고 생명체는 닥치는 대로 쓰러뜨렸다.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에 쌓여 하나 둘 도시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병균이 떠다니는 공기를 직접 대하지 않으려고 흰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환자를 위로하고 죽은 영혼을 달래줄 의무를 지닌 사제, 수도원장 등 성직자들도 죽음의 흑사병을 피해 그 대열에 끼었다.
  흑사병에 대한 공포는 사람들을 광기와  미신에 사로잡히게 했다. 어떤 사람은 악마가 공기를 더럽혔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약초를 태우거나 나무의 액을 구해서 마셨다. 또 어떤 사람은 하늘이 내리는 천벌이라고 믿으며 기도를 하면서 죽음을 기다렸다. 파리 대학 의학부는 토성과 목성이 겹치는 천체이변의 결과라고 공식 발표를 했다.
  유언비어가 횡행하고 사람들은 난폭해졌다. 누군가 물에 독을 탔기 때문에 흑사병이 생긴 거라는 소문이 나돌자 사람들은 그 범인으로 유대인을 주목했다. 유대인은 이교도인데다가 상술이 뛰어나 돈을 너무 잘 벌었기 때문에 평소부터 사람들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어왔던 것이다. 소문이 퍼지자 수많은 유대인들이 생매장 당하거나 산 채로 불 속에 던져졌다.
  유대인 학살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이를 염려한 교황 클레멘스 6세가 학살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지만, 뭔가 불만해소의 출구를 찾고 있던 사람들에게 아무런 호소력을 갖지 못했다.
  미신과 사이비 종교집단이 활개를 쳤다. 신이 노한 탓이라면서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고행을 해야 한다는 무리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알몸으로 찬송가를 부르며 십자가와 못이 박힌 가죽 채찍을 들고 마을과 도시를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살점이 찍히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자신의 알 몸뚱이를 채찍질해 댔다. 이 사이비 종교집단은 흑사병과 함께 프랑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등지로 퍼져나갔다.
  흑사병은 도시와 농촌, 신분 계급의 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고 아비뇽에서는 추기경의 절반이 쓰러졌다.
  온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흑사병은 1348년을 고비로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럽 인구는 3분의 1로 줄어들어 있었다. 파리 시는 인구 15만 중 5만을 잃었다. 유럽 인구가 흑사병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된 것은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17세기에 이르러서이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때 죽어갔는지 알 수가 있다.
  흑사병의 창궐은 유럽 인의 사기를 땅에 떨어뜨린 사건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백년전쟁, 장미전쟁 등 장기간에 걸친 전쟁이 겹쳐 서양의 중세는 서서히 그 막을 내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32. 잔 다르크, 오를레앙을 구하다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1339-1453)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348년/'서경별곡' '청산별곡' '가시리' '동동' 등장,

1359년/홍건적 침입, 1363년/ 문익점, 원에서 목화씨 가져옴
 
  1412년,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시작한 지 73년째 되는 해 프랑스 동부 동레미라는 마을에서 잔 다르크라는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그녀는 몹시 쾌활하고 명랑한 소녀로 자랐다.
  13살 되던 해 여름, 그녀는 천사들의 합창소리를 들었다. 이어 천사장 미카엘이 나타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프랑스를 지켜라, 잔. 오를레앙을 구하거라.'
  그러나 태어나서 한 번도 자기 마을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시골소녀인 잔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천사의 소리는 그후로도 몇차례 들려왔다.
  '찬, 왜 망설이느냐? 그것이 너의 사명이다.'
  그녀는 드디어 결심을 하고 근처에 사는 기사 보르리를 찾아갔다. 그는 왕세자 샤를의 충실한 부하로 알려져 있었다.
  잔을 만난 보르리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엾게도 머리가 돈 모양이군. 어서 끌고 나가거라.'
  그러나 잔 다르크는 단념하지 않고 매달렸다.
  '저는 프랑스를 구하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어요. 제발 왕세자님을 만나게 해주세요.'
  잔의 간청에 마침내 보르리는 그녀를 왕세자에게로 보냈다. 1429년 봄, 잔의 나이는 17살이었다.
  '네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데 무슨 증표라도 갖고 있느냐?'
  '제게 군대를 주세요. 그러면 오를레앙에서 승리하여 그 증표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영국군에게 포위왼 오를레앙은 시시각각 죄어오는 포위망 속에서 어렵게 버티며 원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식량은 다 떨어져 사람들은 하루에 검은 빵 한 조각도 입에 넣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굶주림과 피로로 사람들은 쓰러져갔다.
  그때 신기한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소녀가 군대를 거느리고 오를레앙을 구원하러 온다.'
  사람들은 의심하면서도 기대에 부풀어 기다렸다. 드디어 잔 다르크가 백마 위에 높이 앉아 한 손에 신의 깃발을 들고 오를레앙 시민 앞에 모습을 드런자 사람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잔 다라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영국군을 공격해들어갔다. 마침내  승리는 프랑스 군에 돌아가고 오를레앙은 포위된 지 무려 209일 만에 자유롭게 되었다.
  잔 다르크는 왕세자가 있는 시농성으로 돌아와 빨리 대관식을 올려야 한다고 재촉했다. 1429년 북프랑스의 랭스 대사원에서 대관식이 열리고 왕세자는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로 즉위하였다.
  잔 다르크는 이번엔 수도 파리를 향해 진격, 영국군 손에 넘어간 파리를 되찾고자 했지만 웬일인지 샤를 7세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 동안 전열을 가다듬은 영국군이 콩피에뉴를 공격해 오자 잔 다르크는 곧장 그리로 달려갔다. 그런데 달아나는 적을 쫓다가 그만 적진 깊숙히 들어간 잔 다르크는 사로잡혀 포로가 되고 말았다.
  영국은 그녀를 종교재판에 회부했다. 7번의 재판 끝에 잔은 마녀로 지목되어 화형을 선고받았다. 1431년 5월 30일 루앙시 광장에는 군중이 가득 찼다. 마녀, 이교도, 우상숭배자라고 쓰인 모자를 쓰고 화형대에 오른 잔 다르크, 그녀는 끝까지 굽히지 않고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음을 주장하면서 불길에 휩싸여 죽어갔다. 열 아홉의 꽃다운 나이였다.
  백년전쟁은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간의 주도권 싸움이었다. 1339년 시작되어 1453년에 끝나 무려 백여 년간 지속되었기 때문에 백년전쟁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전투가 있었던 기간은 그리 많지 않다.
  전쟁은 시종 영국이 우세했다. 영국군은  커다란 활을 지닌 보병부대와 대포를 동원, 중무장한 프랑스 기사들을 쓰러뜨렸다.
  전쟁기간 중 영국과 프랑스는 양쪽 다 왕권이 불안정하여 몇번이나 왕이 바뀌었다.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죽자 영국은 대군을 이끌고 오를레앙을 포위했다. 이곳만 점령하면 프랑스 전역을 수중에 넣게 되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바로 이때 기적처럼 등장한 인물이 잔 다르크였다.
  잔 다르크의 활약과 죽음은 프랑스 인들의 애국심을 드높여주었다. 용기백배한 프랑스 군은 영국군을 차례로 몰아내고 1452년 보르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백년에 걸친 기나긴 싸움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이 났다.
  백년전쟁은 봉건시대의 막을 내리는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중세 기사층은 대거 몰락했다. 한편 사람들은 오랜 전쟁을 겪으면서 어렴풋하나마 국민감정과 민족의식, 즉 애국심을 갖게 되었다. 잔 다르크는 바로 그 애국심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33. 로빈 훗과 농민반란 -영국, 와트 타일러의 난(138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377년/최무선의 건의로 화약무기 제조 (직지심경)인쇄
 
  로빈 훗은 영국의 전설적인 영웅이다. 그는 국왕의 사슴을 죽인 죄를 짓고 도망쳐 도적이 된 인물이다. 부패한 귀족과 성직자들의 재물을 털어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준 그를 사람들은 '의적'이라고 불렀다.
  로빈 훗의 이야기는 당시 농민들의 생활이 어떠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교회 특히 수도원장은 대표적인 대토지 소유자였다.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토지는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했다. 그들은 땅을 빌어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매우 가혹한 세금을 매기고 부역을 강제했다.
  세금을 걷어가는 것은 영주와 교회뿐이 아니었다. 백년전쟁으로 적자경제를 면치 못하고 있는 왕실 역시 농민에게 인두세를 걷어 그 적자를 메꾸어보려고 했다. 게다가 흑사병 때문에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여 일손이 크게 부족하게 되자, 영주들은 노동력을 확보해두려고 농민들의 이동을 강제로 막기에 이르렀다.
  로빈 훗은 바로 이런 영주들과 부패한 성직자, 말단 관리들을 처벌하고 가난한 농민들의 벗이 되어주었기 때문에 일약 가난한 자의 영웅으로 떠오른 것이다.
  1381년 영국에서 대규모의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반란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와트  타일러의 난'이라 불리는 이 농민반란은 바로 로빈훗이 활약한 상황 속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과중한 인두세와 강제부역으로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농민들은 와트 타일러 밑으로 모여들었다.
  '영주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바치는 세금으로 잘 먹고 잘살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이젠 강제부역을 시키려 한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
  '그렇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힘을 합해 싸우자!'
  농민들은 농노해방, 인두세와 강제부역의 폐지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에 가담한 것은 농민들만이 아니었다. 부패한 사회를 비판하던 진보적 성직자들도 그 대열에 뛰어들었다.
  존 볼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아담이 밭을 갈고 하와가 베를 짤 때 누가 귀족이고 누가 농민이었는가?' '그 누구도 타인의 노동으로 생활해선 안된다.'
  존 볼의 설교는 농민들에게 용기와 확신을 심어주었다.
반란의 불길은 급속히 번져나가 농민군의 숫자는 10만을 넘어섰고 잉글랜드의 3분의 2가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런던으로 가서 국왕에게 우리의 고통을 알리자!'
  농민군은 런던을 점령했다. 그들은 매우 질서정연하게 움직였으며 약탈행위란 찾아볼 수 없었다.
  국왕 리처드 2세는 급히 회의를 소집했다.
  '그들의 요구가 무엇인가?'
  '영주로부터 자신들과 자신들의 토지를 해방시켜달라는 것입니다.'
  농민군의 요구는 받아들여졌다. 왕은 농민해방 헌장을 발표했다. 목적을  달성한 농민군은 승리의 개가를 울리며 고향으로 향했다. 그러나 귀족들이 이들을 가만 두지 않았다. 귀족들은 왕을 부추켜 와트 타일러를 죽여버리고 나머지 지도자들도 붙잡아 처형시키고 말았다.
  존 볼 역시 처형되었다. 반항하는 농민군을 귀족들은 무자비하게 진압, 와트 타일러의 농민반란은 끝이 났다.
  와트 타일러의 난 이외에도 유럽 각지에서는 수차례에 걸쳐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1323년 플랑드르 지방에서 발생한 농민반란은 5년간이나 지속되었다. 처음엔 자신들에게 가해진 봉건적 부담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점차 사회제도 전체에 대한 반항의 양상을 띠었으므로 이에 위협을 느낀 영주들은 집단학살로 맞섰다.
  1358년에는 북프랑스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자크리의  난'이라 알려진 이 반란은 순식간에 프랑스 전체로 번져 귀족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으나 역시 귀족들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가라앉았다.
  14세기 말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은 중세 봉건사회의 경제적 기반인 장원경제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어쩔 수 없는 갈등이었다.
  그러나 농민들의 희생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이 아픔의 시기를 겪으며 영주 세력은 점차 쇠퇴해갔고 농민들 중에는 자영농으로 성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들 독립 자영농은 다음에 올 새로운 사회의 주인공이었다. 
  
34. 대부호의 후원 받은 르네상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작(14세기)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388년/이성계 위화되 회군,  1389년/박위 쓰시마 정벌,
  1392년/고려 멸망하고 이성계, 조선 건국. 정몽주 피살
 
  르네상스란 '재생' 또는 '부흥'을 의미하는 프랑스 어이다. 흔히 문예부흥이라고 번역하는데, 사실은 단순한 문예상의 부흥이 아니라 폭넓은 인간의식상의 개혁운동이었다.
  르네상스가 꽃피게 된 이면에는 상업의 발달과 그로 인한 막대한 부의 축적이 있었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의 도시에서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십자군 전쟁으로 가장 이득을 본 사람들은 도시의 상인이었다. 그중에서도 이탈리아 도시들은 동방무역을 통해 큰돈을 벌었다. 동서무역의 중개지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에는 동방의 풍부한 물자와 문물이 쉴새없이 쏟아져들어왔다. 그러자 상인 가운데서 막대한 부와 권력을 거머쥔 자가 등장하게 되었다. 피렌체 메디치 가도 그런 경우이다.
  피렌체는 본래 모직물 공업이 발달한 도시였다. 13세기경 피렌체는 봉건귀족 세력을 몰아내고 자치를 달성했다. 그런데 막대한 재력을 기반으로 하여 권력을 쥔 대상인이 시정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모직물 공업조합의 중심인물이자 금융업자인 메디치 집안이다. 메디치 가는 피렌체의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였으며, 로렌초 메디치는 전제군주와도 같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름난 예술가들과 동로마에서 온 학자들이 그의 보호를 받고자 모여들었다. 피렌체는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으며,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비견되었다. 피렌체의 르네상스는 메디치 가의 번영 위에 피어난 꽃이었다.
  르네상스가 추구한 것은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인간을 봉건제도와 교회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각자 개성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고, 신이 아니라 인간을 중심으로 사고하려는 것이 르네상스의 기본정신이다.
  이러한 르네상스의 인본주의는 봉건귀족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마음껏 이윤을 추구하고자 하는 상인세력의 이해관계와 훌륭히 맞아떨어졌다. 그래서 대부호들은 르네상스를 아낌없이 후원하고 지지했던 것이다.
  이탈리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유럽 전체로 퍼져나가 16세기 이후부터는 그 중심지가 북유럽으로 옮겨졌다.
  르네상스는 뛰어난 예술가와 학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문학, 미술, 건축, 조각, 철학, 정치사상 등 각 분야에서 걸출한 인물들이 한껏 기량을 발휘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 시대가 낳은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고, 미켈란젤로는 화가이자 조각가로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그는 자신이 세운 성베드로 성당에서 99살까지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그리는 것'이라고 한 그는 사물의 본질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그것을 표현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문학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남긴 사람은 단테페트라르카를 비롯하며, '켄터베리 이야기'를 쓴 영국의 초서, '돈키호테'를 써서 중세 기사의 몰락을 풍자한 에스파냐의 세르반테스, '햄릿'으로 유명한 영국의 세익스피어가 있다. 이들은 라틴어 일색이던 당시에 과감히 모국어로 작품을 써서 국어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철학과 정치사상면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비판적 내용의 글들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이 그 대표적 작품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명제를 말한 프랑스의 데카르트, '수상록'을 쓴 몽테뉴 등이 활약했다.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지녀야 할 냉혹하고 비열한 처세술을 피력, 주목을 끌었다.
  '군주는 인간인 동시에 야수로, 사자인 동시에 여우로 행동하는 법을 체득해야 한다. 자신의 이익에 상반될 때는 약속을 지키지 말아야 하며 지킬 수도 없다. 정직은 언제나 불리하다. 반면 자비롭고 청렴하며 인도적이고 신앙이 돈독한 것처럼 보이면 유익하다. 덕망으로 위장하는 것만큼 유익한 일은 없는 것이다. '
  '군주론'의 한 대목이다. 그는 또 '종교란 통치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국민에게 도의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지한 국민을 통치하기 위해서다. 사악하다고 생각되는 종교를 지지하는 것이야말로 군주의 의무이다. '라고 말했다.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적 정치사상은 내분이 그치지 않았던 이탈리아의 정치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르네상스 인들이 이상으로 삼았던 것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화였다. 그들은 중세의 억압된 분위기로부터 해방된, 보다 자유롭고 인간적인 고대사회를 동경했지만, 사실은  중세사회에 남아있는 고대문화를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즉, 르네상스는 고대로의 회귀가 아니라 근대를 향해 내디딘 첫발자국이었던 것이다. 
  
35. 백성을 위한 글, 한글 -조선, 한글 해설서 '훈민정음' 반포 (1446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419년/세종 즉위, 1441년/측우기 제작, 1447년/'용비어천가' 완성
 
  한 민족의 말과 글은 민족의식의 표현이요 상징이다. 예로부터 정복자는 자신의 말과 글을 강요함으로써 피지배민의 의식과생활 감정을 통제하곤 했다. 어떤 말과 글을 쓰느냐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자신의 글을 갖게 된 것은 1446년 조선 제4대 왕 세종에 의해 한글이 제정, 반포되면서부터이다. 그 이전까지는 중국의 한자를 빌어서 우리말을 표기해왔다. 그러나 우리말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외국의 문자로 우리말을 표기하는 데는 상당한 무리가 따랐다.
  우리말은 우랄 알타이 어에 속한다. 북아시아  우랄  산맥과 알타이 산맥 주변에서 살던 사람들이 쓰던 말을 언어학에서는 우랄 알타이 어라고 부른다. 그중 알타이 족의 일단이 동쪽으로 이주, 한반도에 정착했는데, 이들이 바로 우리 민족의 조상이다.
  고대의 우리말은 크게 북방 한어, 남방 한어로 나뉜다. 만주와 압록강 일대에 살던 집단이 쓰던 부여어, 함경도 일대의 옥저어, 강원도 일대의 예맥어는 북방 한어에 속하고  경상도 동해안 일대의 진한어, 충청, 전라 일대의 마한어, 낙동강 하류 일대의 변한어는 남방한어에 속한다.
  북방한어는 고구려의 판도하에서 고구려어로 통일되고, 남방한어는 백제, 신라어로 각각 통일되었다. 하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말이 커다란 차이를 가진 건 아니었다.
  그러다가 7세기 신라에 의해 부분적이나마 한반도가 통일됨으로써 신라어가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고려와 조선의 건국은 말의 중심을 중부지방으로 옮기는 역할을 했다.
  고유의 말은 있지만 그 말을 표기할 문자를 갖고 있지 못했던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부터 중국의 한자를 빌어다 우리말을 표기해왔다. 신라의 학자 설총이 만든 이두나 고려 때 향가를 표기한 향찰은 모두 한자로 우리말을 보다 더 온전히 나타내려는 몸부림이었다.
  1443년 12월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은 '한글'을 완성했다. 그후 3년 동안 실제 사용여부를 실험한 뒤, 1446년 한글 해설서 '훈민정음'과 함께 정식으로 반포했다.
  한글 만들기는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집현전 학사 중에서도 젊고 유능한 인물만을 골라 세종이 직접 참여한 가운데 연구가 진행되었다. 성삼문, 정인지, 신숙주, 강희안, 박팽년, 이개, 최항, 이현로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몽고의 파스파 문자를 비롯하여 여러 외국 문자들을 연구한 끝에 한글을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한글은 양반유생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쳤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올린 상소를 보자, 그는 반대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첫째, 중국과 동문동궤를 이룬 마당에 새로이 언문을 만드는 것은 사대모화에 부끄럽고, 둘째, 우리말이 중국의 방언으로 인정되는데, 방언으로 하여 따로이 글자를 만든 예가 없습니다.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장 등이 제 스스로의 글자를 갖고 있으나 이들은 오랑캐니 어찌 오랑캐와 같아지겠습니까? 셋째, 이두는 한자에 어조사만을 더하는 것으로 한문보급의 방편이 되기도 하나, 새 글자를 만들면 한문을 배우는 이가 없어져 힘들여 성리학을 배울 사람이 없어질 것입니다. 넷째, 언문으로 글을 쓰면 옥사가 공평하게 될 것이라 하나 형옥의 공평은 옥리에 달린 것입니다.'
  지금으로선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지만 당시 유생들의 사고방식은 이처럼 철저히 사대적이었다.
  어쨌든 세종은 반대세력을 누르고 1446년 9월 한글 스물 여덟자를 세상에 발표했다. 해설서 '훈민정음'의 서문을 보자.
  '국어가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일반백성이 말하고자 하나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자가 많은지라,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드나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일용에 편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 '
  한글은 유생관리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글을 모르고 살던 일반민중을 위한 것이었다. 이는 좀더 효율적으로 민중을 다스리려는 통치술의 일환으로서 시대적 요청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글이 완전히 일반민중에게 보급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글은 언문, 여자들이나 쓰는 글이라 하여 몹시 천대를 받았다. 한글의 소중함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일본과 서구열강의 침입을 받으며 민족의식이 높아지면서부터이다. 
  
36. 활판 인쇄술과 비행기 -구텐베르크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15세기)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456년/세조, 성삼문 등 사육신 처형
 
  15세기는 발명의 시대였다. 독일의 요한 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술을 발명, 인류문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는가 하면,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자동차부터 헬리콥터, 비행기에 이르는 다종 다양한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일일이 손으로 써서  책을 만들었다. 이런 방법은 시간과 노력이 엄청나게 많이들고 잘못 옮겨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발명된 것이 인쇄술이다. 초기의 인쇄술은 석판인쇄와 목판인쇄였다.
  독일 사람 구텐베르크는 어떻게 하면 좀더 편리하고 빨리 많은 책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오랫동안 연구를 거듭했다. 1450년경 마침내 그는 활판 인쇄술을 개발해냈다. 이는 여러 면에서 매우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우선 프레스라는 기계를 사용하여 선명하면서도 대량인쇄를 개발해냈다. 이는 여러 면에서
매우 획시적인 방법이었다.
  우선 프레스라는 기계를 사용하여 선명하면서도 대량인쇄를 가능케 했다. 본디 프레스는 술을 만드는 데 쓰이는 기계였는데, 구텐베르크가 이를 응용하여 인쇄기계로 고안해낸 것이다. 오늘날 영어로 인쇄술을 프레스라 하는 것은 여기서 유래한 말이다.
  다음으로는 합금으로 모형을 떠서 활자를 주조했다는 점이다. 이로써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활자라는 말 그대로 한 자씩 떼어내어 몇번이고 판을 짤 수 있게 되었다. 세 번째로는 인쇄용 유성 잉크를 개발했다는 점이다.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활판인쇄술나침반, 화약과 함께 르네상스 3대 발명품으로 손꼽힌다.구텐베르크가 새로운 기술로 맨처음 찍어낸 책은 (성서)였다. 라틴어로 씌어 있는 이 책은 42행 2단으로 조판되었기 때문에 (42행성서)라고도 불렸다. 그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모두 47권이다.
  15세기경 독일에는 200명 가량의 인쇄업자가 있었으며, 이탈리아에는 인쇄공장을 둔 도시가 무려 77개에 달했다. 이처럼 그의 활판인쇄술은 곧 유렵 각지로 전해졌으며, 최근까지 그대로 전해내려왔다. 그가 발명한 기계는 이후 180년간 그대로 사용되었으며, 금속활자를 주조하는 데 쓰이는 합금은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사용되고 있다.
  1452년은 '인류 최고의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태어난 해이다. 그는 그림, 조각, 토목, 건축, 수학, 음악, 과학 모든 분야를 섭렵, 예술가인 동시에 과학자, 사상가였던 '만능인'이었다.
  과학 분야에서 그가 고안해낸 것들을 보면 자동차, 하늘을 나느 배를 비롯하여, 비행기, 헬리콥터, 대포, 전차 등 실로 그 풍부하고 기발한 아이디어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는 쉴새없이 실험을 하고 사물의 원리를 탐구했다. 그는 인체에 혈액이 순환한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다. 그가 남긴 인체 해부도는 사실적이고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인체의 구조의 신비에 감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지저분한 습관과 편협한 판단을 지닌 저속한 사람들은 인간의 신체처럼 지극히 완벽하고 치밀한 해부학적 구조를 가질 가치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먹고 배설하는 자루일 뿐이다. 영양물의 통로에 불과한 것이다'
  (최후의 만찬)(모나 리자)등 그가 남긴 걸작품은 바로 이 같은 과학적 연구 결과가 예술로 승화된 것들이었다.
  한편 그는 비행기를 만들어 공중비행을 시도했다. 완전히 성공하진 못했으나 그 수준은 상당한
정도에 이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혼자서 연구하고 실험했을 뿐 제자가 없었기 때문데 그의 연구는 계승 발전되지 못했다. 만약 누군가가 그의 연구업적을 이어받았더라면 비행기의 발명은 몇백 년 앞당겨졌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연구 기록을 남겼는데, 그 기록은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되어 있다가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주목받기 시작했다. 근대 과학기술이 발명해낸 문명의 이기들이 이미 그의 기록에 나와 있음이 뒤늦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 기록은 오늘날 23권의 책으로 남아 있다.
  '자연은 그대가 세계 도처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도록 가만히 지켜 보고 있다'
  이 위대한 인간은 1519년 67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37. 바다 건너에 인도가 있다!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1492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493년/(악학궤범)완성
 
   오늘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15세기 사람들에게 그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당시 사람들은 지구는 편편한 대지이고 먼 바다에는 무서운 악마가 살고 있으며, 더 나아가면 끝을 알 수 없는 낭떠러지가 있어 그 아래 지옥의 불이 타오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같은 통념을 부인하며 '지구는  둥글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탈리아의 토스카넬리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그는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가면 인도에 닿을 수 있다고 했다.
   인도는 당시 사람들에게 황금으로 가득 찬 꿈의 나라였다. 웬만한 모험가라면 누구나 인도에 가서 일확천금을 하고 싶어했다. 이슬람 교도인 오스만 투르크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탓에 동방으로 가는 길을 차단당한 무역상들 역시 새로운 무역로를  찾아야 할 필요에 직면해 있었다.
   제노바 출신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확신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인도에 가려는 결심을 하고 에스파냐의 이사벨라 여왕을 찾아갔다. 항해에는 많은 돈이 들므로 후원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에스파냐는 신황로 개척을 두고 포르투갈과 경쟁하고 있었다. 동방무역이 가져다줄 엄청난 부를 먼저 얻기 위해 양국은 총력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포르투갈은 동쪽 항로를 택했고 에스파냐는 서쪽 항로를 택했다.
   1486년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최초로 아프리카의 남쪽 끝까지 항해, 이곳에 희망봉이란 이름을 붙였다.
   한편 1492년 8월 3일, 이사벨라 여왕의 환송을 받으며 콜럼버스는 산타마리아 호를 비롯한 3척의 배를 이끌고 에스파냐 남부의 팔로스 항을 떠났다. 항해는 매우 순조로웠다.
   '바다 건너에 인도가 있다!'
   콜럼버스는 선원들을 격려했다.
   에스파냐를 출발한 지 69일, 드디어 콜럼버스 일행은 육지에 닿았다. 그는 기쁨에 못 이겨 그곳을 산살바도르(성스런 구세주라는 뜻)라고 이름붙였다. 그는 그곳이 인도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메리카 대륙 연해의 한 섬이었다. 오늘날 이 일대를 서인도제도라 부르고,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디언이라 하는 것은 콜럼버스의 이 착각에서 기인한다.
   자신이 인도에 왔다고 굳게 믿은 콜럼버스는 7명의 원주민을 데리고 에스파냐로 귀환했다. 그는 자신이 본 인도를 여왕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수많은 종류의 과실이 열린 평원과 넓은 벌판, 주민들은 애정이 풍부하고 욕심이 없습니다'
   다음해 콜럼버스는 다시 인도로 떠났다. 이번엔 17척의 배와 1,500명의 선원과 함께였다. 섬에 도착한 그는 요새를 쌓고 정복사업을 시작했다. 원주민들은 그에게 면화를 바치고 금광채굴에 강제로 동원되어 죽도록 일해야 했다. 3년에 걸친 정복지 사업의 결과, 원주민의 3분의 1이 죽거나 에스파냐에 노예로 팔려갔다.
   콜럼버스가 신항로를 개척하자, 포르투갈도 서둘러 인도로 항했다. 포르투갈 인  바스코 다 가마는 1498년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건너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했다.
   신항로를 두고 양국의 대립은 점차 치열해졌다. 그러자 교황 알렉산더 6세가 나서서 중재를
했다. 대서양의 아조레스 군도 서쪽 480킬로미터의 위치에 남북으로 선을 긋고 포르투갈은 동쪽을, 에스파냐는 서쪽을 각각 지배하라고 나누어준 것이다.
   이로써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의 일부를, 에스파냐는 아메리카 전부를 손에 넣고 맘껏 식민지 무역에 열중하게 되었다.
  콜럼버스는 1498년과 1502년 두 번 더 서인도제도로 건너가 오늘날의 온두라스와 베네수엘라 지방까지 탐험했다. 그러나 그는 죽을때까지 이곳을 인도라고 생각했다.
   그후 이탈리아의 피렌체 사람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이곳이 인도가 아니고 전혀 미지의 새 땅임을 밝혀냈다. 그의 이름을 따서 신대륙의 이름은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되었다.
  
38. 마르틴 루터와 토마스 뮌처 -독일, 종교개혁과 농민전쟁(157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510년/삼포왜란
 
  16세기 초는 독일 역사에서 매우 혁명적인 시기였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토마스 뮌처의 재세례파 운동과 농민전쟁이 모두 이 시기에 일어났다. 이 사건들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상호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은 그가 95개조의 반박문으로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면죄부란, 이것을 사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고 천당에 갈 수 있다는 증표인데, 사실은 성베드로 사원을 지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교황이 짜낸 묘안이었다.
  당시 비텐베르크 대학 신학교수로 있던 마르틴 루터는 교회 벽에 라틴어로 쓴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어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맹령히 비판했다.
  '....제6조, 교황은 신이 용서한 바를 선언하고 확증하는 외에 어떤 죄도 용서할 수 없다. 제27조, 그들은 돈궤 속에 던진 돈의 소리로 영혼이 천당에 간다고 설교한다. 제37조, 참다운 기독교인은 교회의 축복을 나누어 갖는다. 이것은 사면장 없이 신이 그에게 내려준 것이다...'
  그의 반박문은 선풍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주일 만에 독일 전역에 퍼졌고 4주일 만에 국경을 넘어 유럽 전체에 알려졌다.
  1520년 그는 3편의 논문을 발표, 교황과 성직자의 부패, 타락을 고발했다. 격분한 교황이 파문을 경고했지만 루터는 교황이 보낸 칙서를 불살라버리고 말았다. 1521년 마침내 그는 파문을 당했다. 독일 황제 카를 5세 역시 그를 국법의 보호 밖에 둔다는 선고를 내렸다.


루터는 황제의 경쟁자인 작센 공 프리드리히의 보호 아래 숨어지내야 했다. 이때 루터는 라틴어로 쓰인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 이듬해 출간했다. 이제껏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성서)가 일반민중에게 널리 읽히게 된 것이다.
  루터는 인간의 구원은 교회나 성직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신앙과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신앙의 근거는 (성서)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가장 열렬히 지지한 것은 농민들이었다. 교회의 횡포에 오랫동안 시달려온 농민들에게 루터는 자신들의 대변자로 여겨졌던 것이다.
  루터와 동시대에 활약한 인물로 토마스 뮌처가 있다. 그는 라이프치히, 프랑크푸르트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루터의 종교개혁에 큰 감명을 받았다. 루터의 소개로 츠비카우에서 목사가 된 그는 거기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원시 기독교의 평등주의를 이상으로 삼고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실현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루터와 결별한 뮌처는 아르슈테트로 가 설교에 힘썼다. 군주, 지배자, 부자를 비판하는 그의 설교를 듣고 농민과 광부들은 깊은 공감을 느꼈다.
  1523년 뮌처는 튀빙겐에 정착, 다음해 그곳에서 일어난 농민전쟁의 선두에 섰다. 1525년 튀빙겐에서 시작된 농민전쟁은 순식간에 독일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농민군의 요구사항은 총 12개 조항이었다.
  '제1조 민주적인 교회 운영, 제2조 십일조 거부, 제3조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농노제 폐지, 제4조 사냥과 고기잡이의 자유, 제5조 자유로운 벌목, 제6조 세금 증대 거부,  제7조 부역 증대 거부, 제8조 토지세의 적절한 징수, 제9조 영주 마음대로 하는 처벌 금지, 제12조 이러한  조항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 허가'
  그러나 루터는 농민전쟁에 매우 냉소적이었다. 농노제 폐지를 주장하는 농민들을 보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만인을 평등하게 만들어 그리스도의 정신적 왕국을 현세의 왕국으로 개조하려는 것이다.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지상의 왕국은 불평등 없인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지주고 나머지는 농노여야 하며, 어떤 사람응 왕이고 나머지는 신하가 되어야 한다.
  농민전쟁은 1525년 가을 진압되었다. 루터는 특히 뮌처가 이끄는 농민군에 대해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으므로 이에 힘을 얻은 봉건귀족들은 무자비하게 농민군을 진압했다.
  '반도들은 유해유독하며 악마의 화신이란 점에서 그들보다 더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그대들은 농민 반도들을 죽이기를 마치 미친개를 때려잡듯 해야  한다. 만약 그대가 그들을 공격하지 않으면 그들이 그대를 공격할 것이면 그대의 토지를 모두 뺏어갈 것이다'
  루터는 이렇게 귀족들에게 호소했다.
  농민들은 이제 그에게 등을 돌렸다. 뮌처가 지도한 재세례파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무참하게 죽음을 당했다. 뮌처도 1525년 참수형에 처해졌다. 최후까지 저항한 일단의 사람들 역시 1535년 뮌스터에서 전멸당하고 원시 기독교의 평등주의를 실현해보려던 또 하나의 종교운동은 막을 내렸다.
  한편 농민의 지지를 잃은 루터의 종교개혁은 봉건제후와 도시민의 지원하에 계속되어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서 대타협을 이룸으로써 공인되었다. 이로써 카톨릭이 아닌 루터교가 성립, 독일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후 루터교를 신교 또는 프로테스탄트라 부르고 카톨릭은 구교라 부르게 되었다.
  
39. 생존자는 단 18명 -마젤란 일행, 세계일주 성공(1519-1522)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519년/을유사화로 조광조 처형됨
 
  1519년 9월 20일 마젤란은 5척의 배와 227명의 선원을 이끌고 에스파냐를 출발했다. 그는 포르투갈 인이었지만 에스파냐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항해목표는 동방으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대륙이 인도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 대서양을 건너 인도로 가려는 노력은 다시금 전개되고 있었다.
  3개월이 지난 12월 13일, 일행은 남아메리카 지금의 리오데지네이로에 도착했다. 원주민들은 이들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그래서 이들이 떠날 때는 눈물을 흘리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1520년 4월 2일에는 선원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5월에는 산디아고 호가 난파를 당했다. 게다가 11월에는 성 안토니오 호가 도망을 치고 말았다.
  어려움 속에서도 항해를 계속한 마젤란 일행은 11월 28일 남아메리카의 최남단에 도착했다. 대륙과 섬 사이의 좁은 해협을 무사히 건넌 이들은 이 해협(마젤란)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제 그들 앞에 놓여진 것은 처음 보는 커다란 바다였다. 대서양에 비해 너무도 잔잔한 이 바다를 보고 마젤란은 '태평양'이라 명명했다. 마젤란 일행은 태평양을 직접 눈으로 본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마젤란 일행은 태평양을 북서진하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항해였다. 보이는 것은 천지에 가득 찬 물뿐 어디에도 육지는 없었다. 식량은 다 떨어지고 괴혈병이 돌아 선원들이 하나 둘씩 쓰러졌다.
  이듬해 3월 일행은 드디어 육지를 발견했다. 망망 대해를 떠돌아 다닌 지 무려 4개월 만이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지금의 마리아나 군도였다. 4월, 필리핀에 도착한 이들은 원주민에게 식량제공과 기독교로의 개종을 요구했다. 만일 반항하면 가차없이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처음엔 친절히 이들을 맞이했던 원주민들은 이들이 너무 거칠게 나오자 저항하기 시작했다.
  '대포와 화승총의 위력을 보여주자.'
  원주민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지리를 십분 이용한 전술로 마젤란 일행을 공격해왔다. 전투는 원주민의 승리로 끝이 났다. 마젤란은 이 전투에서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 나머지 선원들은 두 척의 배에 나눠타고 급히 도망쳤다.
  두 척의 배는 항해를 계속하기로 했다. 이들이 찾고 있던 것은 향료가 나는 나라였다. 그러나 지휘자를 잃은 이들은 해적으로 돌변, 중국 무역선을 공격하여 향료를 비롯 값진 물건들을 몽땅 빼앗았다.
  1522년 9월 6일 에스파냐의 세빌랴에 낡은 배 한 척이 도착했다. 이름은 빅토리아호, 3년 전 마젤란이 인솔하여 떠났던 5척의 배 중 하나였다. 이 배는 아프리카를 도는 머나먼 항해 끝에 마침내 출발지로 돌아온 것이다. 277명의 승무원 중 살아 돌아온 자는 단 18명, 그러나 이들이 싣고 온 향료는 워낙 값이 비싸 항해 비용을 충당하고도 남았다. 마젤란 일행의 세계일주 성공으로 유럽 인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새 항로의 발견은 유럽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이 쏟아져 들어와 에스파냐는 유럽의 대국으로 급성장했다. 금과 은이 유럽 전역으로 유출되어 물가가 폭등, 이른바 가격혁명이 일어났다. 봉건 영주나, 농민, 임금 생활자들의 생활은 어려워진 반면, 상공업자들은 더욱 부유해졌다.
  상공업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국왕은 상공업을 보호 장려하고, 해외 식민지 개척에 적극 나섰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그 선두주자였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에 나타났고 이어서 더 동쪽으로 나아가 말라카즈 군도에
이르렀다. 말라카즈 군도는 향료의 집산지로서 말라카 제국이 통치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1511년 말라카즈를 점령하고 향료무역을 독점했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향료와 동방산물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한편 에스파냐는 뜻밖에 아메리카를 발견, 막대한 이득을 취한 다음 남아메리카를 돌아 태평양으로 나왔다. 그리고 1565년 필리핀 제도를 점령한 뒤 역시 말라카즈 군도에 도착했다.
  유럽의 해외무역은 약탈에 가까운 것이었다. 유럽은 막대한 이익을 취한 반면 아시아와 아메리카 원주민은 삶의 터전을 파괴당했다. 신항로는 세계를 하나로 잇는 데 기여한 바 컸으나, 그 주도권이 유럽 인에게 있었으므로 세계역사는 당분간 유럽 인에 의해 주도되기에 이르렀다. 
  
40. 잉카 제국의 멸망 -에스파냐의 피사로, 잉카 정복(1533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527년/'훈몽자회' 편찬
 
  1531년 에스파냐 인 피사로는 186명의 병사를 이끌고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의 고원지대에 자리잡은 잉카 제국에 도착했다.
  그는 제국에 일격을 가하고 황제를 체포, 감금해버렸다. 그리고 우상숭배, 근친결혼, 일부다처를 했다는 죄명으로 황제에게 화형을 선고했다. 잉카 인들은 화형당하면 영혼이 사멸한다고 믿고 있으므로, 황제는 피사로에게 간청하여 기독교로 개종하고 교수형을 당했다.

  피사로가 잉카 제국을 완전히 정복한 것은 1533년의 일이다. 이보다 앞서 에스파냐의 코르테즈가 멕시코의 아즈테크를 정복했다. 그의 정복활동은 1519년에 시작되어 1521년 끝이 났다. 코르테즈피사로가 이처럼 쉽게 정복에 성공한 것은 총과 기마술 덕분이었다. 특히 총의 위력은 대단해서 원주민들은 불을 뿜는 총구 아래 힘없이 쓰러져갔다.
  기원전 8천년경 아메리카에서는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유럽과 아시아가 각각 독자적인 고대문명을 발달시켰듯이 아메리카에서도 독특한 문명이 일어났다. 중앙 아메리카 멕시코 고원의 마야 문명,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의 잉카 문명이 그것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조상은 몽고족이다. 몽고족의 일파가 시베리아를 거쳐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로 들어갔으며, 차츰 남쪽으로 내려가 남아메리카 남단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살게 된 것이다.
  6세기경 중앙 아메리카의 유카탄 반도에 마야 제국이 세워졌다. 주인공은 마야 족, 이들은 화려한 궁전과 장대한 규모의 신전을 짓고, 토기와 금, 음, 동으로 된 세공품을 만들어 썼다. 복잡한 문양으로 건물을 장식하고 조각에도 능했다. 또 상형문자를 만들어 쓰고 달력을 만들어 농사에 활용했다. 마야 문명의 수준은 오리엔트 문명에 비견할 만한 것이었으며, 10세기경까지 번영을 구가했다. 

 마야 족의 뒤를 이어 문명의 꽃을 피운 것은 톨테크 족이었다. 이들은 멕시코 계곡에 살면서 마야 문명을 흡수하여 8세기부터 13세기까지 톨테크 문명을 발전시켰다.
  톨테크 문명이 쇠한 뒤 마야 문명과 톨테크 문명을 융합 발전시킨 것이 아즈테크 문명이다. 아즈테크 문명은 오리엔트 문명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신전을 짓고 태양신을 비롯, 농사와 관계깊은 비, 바람, 대지의 신과 조상신, 씨족신을 섬겼다. 농사는 옥수수가 주종이었으며, 각종 직물과 염색기술이 발달했다.
  아즈테크 문명은 13세기에 시작되어 1521년 코르테즈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코르테즈가 당시 아즈테크의 인구는 약 500만에 달했다고 한다.
  잉카 제국의 문명은 안데스 산맥의 고원지대, 지금의 페루에서 일어났다. 피사로가 이곳을 점령했을 때, 잉카 문명의 수준은 유럽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완벽한 관개시설을 갖추어 고원지대인데도 대규모 농사를 지었으며, 토목기술이 발달, 곳곳에 도로와 수로를 건설했다. 석조 건축술은 정교하고 건물은 견고하기 이를 데 없었다. 기하학적 무늬를 놓은 화려한 빛깔의 직물이 만들어졌으며 토기와 금, 은, 동기들이 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의술이 발달하여 뇌수술도 해냈다. 그러나 문자는 발명되지 않았고, 실의 색과 매듭에 의해 뜻을 나타내는 퀴푸를 사용했다. 그러나 잉카 제국의 찬란한 문명도 피사로의 총 앞에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아메리카를 손에 넣은 에스파냐는 식민지 개발에 열을 올렸다. 식민지 개발은 원주민에게는 하루아침에 살던 땅에서 쫓겨나 백인의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백인의 우수한 무장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식민지로 이주해온 백인들은 원주민의 땅을 나누어 갖고 원주민을 동원하여 강제노동을 시켰다. 또 광산개발에 나서 막대한 이익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 원주민들은 가혹한 강제노동과 영양실조로 죽어갔다. 그러자 에스파냐 국왕은 원주민을 카톨릭으로 개종시키도록 하는 한편, 원주민을 보호하고 대신 아프리카 흑인들을 데려와 일을 시키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이후 에스파냐의 식민지에서는 흑인 노예제가 성행했으며, 아울러 노예무역이 커다란 돈벌이로 등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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