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세계사

세계사 100장면 [1~10/100]

구름위 2013. 6. 3. 16:02
728x90

도서명 : 세계사 100장면
지은이 : 박은봉
출판사 : 가람기획

  
글머리에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 서기 2000년을 앞두고 그야말로 변신의 몸살을 앓고 있는 듯하다. 미국과 함께 세계 최강국을 자랑하던 소련이 갈가리 흩어졌는가 하면, 동독은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만물은 끊임없이  변한다더니, 정말 그 말이 맞는가 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세기말은 언제나 격변의 시대였다. 그래서 세기말에 사는 사람들은 급변하는 세상에 혼란과 당혹감을 느끼곤 했다. 오늘 우리가 맞고 있는 세기말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그리고 전혀 다른 질의 사회로 바뀌고 있다. 어제의 신념과 가치관으로 재기엔 황당함을 느낄 정도이다.
이런 때일수록 사람들은 '역사'라는  말을 자주 쓴다. 그래서 '역사'는 사용하는 사람과 경우에 따라서 안전한 피난처가 되기도 하고, 유일한 희망이 되기도 한다.
필자 역시 이 책을 쓰면서 '역사'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이 이 지구상에 나타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어난 무수한 사건들을 되새김질 하면서, 부침 명멸하는 인간들의 생애를 보면서, 과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케 되었던 것이다.
분명 역사는 진보한다. 그 동력은 '진실'이다. 거짓이 우세한 듯 보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항상 승리하는 쪽은 진실이다.
왜냐하면, 보다 나은 삶, 보다 행복한 삶을 바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행복의 내용은 바로 '자유'와 '평등'이다. 인간의 역사는 좀더 많은 자유와 좀더 공정한 평등을 향해 달려왔다.
이 책은 인류의 등장부터 1992년 까지의 역사사건 중, 전기를 이루었다고 생각되는 100가지 사건을 골라 간단히 서술하고 있다. 각 장면은 따로따로 떨어진 항목이지만, 처음부터 읽어나가면 세계사의 흐름을 절로 파악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학술적 용어나 설명은 일절 피하고 이야기식으로 재미있게 쓰고자 노력했다.
제한된 지면으로 다루다보니 설명이 불충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전문적인 지식을 전달함이 아니라 그 시대에 그 사건이 지녔던 의미를 되새기는 데 초점을 맞추었으니 양해하기 바란다. 좀더 깊은 내용을 원하는 독자들을 위해 참고문헌을 자세히 소개한다. 각 장면마다 동시대의 한국역사를 간략히 표로 정리, 참고가 되게 했다. 어느 정도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사 편중을 극복하지 못한 점을 퍽 아쉽게 생각한다.
이 책은 전문가를 위한 역사책이 아니다. 그저 오늘을 열심히 살아보려는, 그러다 보니 세상과 그 역사에 대해 알지 않으면 안되는 평범한 생활인들을 위한 책이다. 암기위주의 재미없는 역사 공부에 정 떨어진 중고등학생들을 위해서도 일조하리라고 믿는다.
필자의 지식이 일천하기 때문에 여러 책을 참조, 필요한 부분을 요약 발췌한 기사가 많다. 일일이 출전을 밝히지 않았음을 미리 고백한다. 
  
 
차례
글머리에
1 원숭이로부터 인간으로 - 최초의 인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2 불의 발견 - 자바 인, 네안데르탈 인 등장
3 현생인류 나타나다. -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
4 농업혁명 일어나다.- 농경, 목축의 시작
5 큰 강 유역에서 문명이 일어나다. - 세계 4대문명 성립
6 아테네와 스파르타 - 그리스, 폴리스의 성립
7 만인에게 자비와 구원을 - 인도에서 불교 탄생
8 공자의 '인', 노자의 '도' - 중국, 제자백가의 출현
9 오리엔트와 그리스 세계의 투쟁 - 페르시아 전쟁 발발
10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더 - 알렉산더의 동방원정
11 한니발, 알프스를 넘다. - 포에니 전쟁 발발
12 만리장성과 분서갱유 - 진시황제의 중국통일
13 유라시아를 이은 비단길 - 한나라의 장건, 비단길 개척
14 로마제국을 뒤흔든 노예들 - 스파르타쿠스의 봉기
15 브루투스, 너마저도! - 케사르, 공화파에게 암살
16 예수, 십자가에 못박히다. - 기독교의 성립
17 모든 길은 로마로 - 로마제국의 영토, 최대가 되다.
18 조조, 적벽에서 무너지다. - 중국 , 삼국시대의 시작
19 게르만 인의 대이동 - 서로마제국의 멸망
20 수 양제, 대운하를 건설 - 양제의 중원 통치
21 알라 앞에선 만인이 평등 - 마호메트, 이슬람교 창시
22 현무문의 변 - 당의 건국
23 궁녀에서 여황제로 - 중국 최초의 여황제 측천무후
24 게르만족, 유럽을 석권하다. - 서로마 제국의 부활
25 반은 노예요 반은 농민 - 봉건제도의 완성
26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낳는다. - 유럽 각지에 도시 발달
27 눈밭에서 맨발로 애원한 황제 - 카노사의 굴욕
28 하나님이 원하신다! - 십자군 전쟁
29 중세문화의 꽃, 대학 - 대학의 성립과 발달
30 칭기즈칸, 세계제국을 세우다. - 몽고통일, 중앙아시아 원정
31 유럽을 휩쓴 공포의 흑사병 - 흑사병 창궐
32 잔 다르크, 오를레앙을 구하다. -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
33 로빈 훗과 농민반란 - 영국, 와트 타일러의 난
34 대부호의 후원받은 르네상스 -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작
35 백성을 위한 글, 한글 - 조선, 한글해설서 '훈민정음' 반포
36 활판인쇄술과 비행기 - 구텐베르크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37 바다 건너에 인도가 있다! -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38 마르틴 루터와 토마스 뮌처 - 독일, 종교개혁과 농민전쟁
39 생존자는 단 18명 - 마젤란 일행, 세계일주 성공
40 잉카 제국의 멸망 - 에스파냐의 피사로, 잉카 정복
41 근대과학의 아버지 코페르니쿠스 -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을 주장
42 '그래도 지구는 돈다.' - 갈릴레이, 진자 등시성을 발견
43 영국과 에스파냐의 해상결전 - 영국, 에스파냐의 무적함대 격파
44 '양이 인간을 잡아먹는다.' - 영국, 인클로저 운동
45 자유의 땅을 찾아서 - 메이플라워호, 북아메리카에 도착
46 처형당한 왕 - 영국, 청교도 혁명 발발
47 '짐이 곧 국가이다. ' - 프랑스, 루이 14세 즉위
48 조선소 노동자로 일한 황제 - 러시아, 표트르 1세 즉위
49 사과는 떨어지는데 달은 왜 떨어지지 않을까? - 뉴턴, 만유인력을 발견
50 유혈 없이 성공한 혁명 - 영국, 명예혁명 발발
51 노예무역은 국력의 보고 - 흑인노예무역의 절정기
52 보스턴 차 사건 - 아메리카, 독립을 선언
53 파리 시민, 바스티유 감옥 습격 - 프랑스 혁명 발발
54 도구에서 기계로 - 영국, 산업혁명 시작
55 나폴레옹, 프랑스 황제가 되다. - 프랑스, 제1제정 시작
56 불태워진 아편 2만상자 - 중국, 아편전쟁 발발
57 지상천국을 건설하려 한 홍수전 - 중국, 태평천국의 난 발발
58 소기름과 돼지기름 - 인도, 세포이 항쟁 발발
59 세계관을 뒤바꾼 이론, 진화론 - 다윈, '종의 기원' 간행
60 미국 자본주의의 승리, 남북전쟁 - 미국, 남북전쟁 발발
61 다이너마이트와 노벨 상 - 노벨, 다이너마이트 발명
62 계급 없는 평등사회를 위하여 -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 출간
63 바다를 이은 최초의 운하 - 수에즈 운하 개통
64 철과 피만이 통일을 가져다준다. - 비스마르크, 독일통일 완성
65 어둠을 몰아낸 제2의 빛 - 에디슨, 백열전구 발명
66 녹두장군 전봉준 - 조선, 동학농민혁명 발발
67 인류평화를 위한 축제 - 제1회 국제올림픽 개최
68 노벨상을 탄 최초의 여성, 퀴리부인 - 퀴리부부, 라듐 발견
69 제국주의 대열에 뛰어든 일본 - 러.일 전쟁 발발
70 피로 물든 페테르스부르크 - 러시아, 피의 일요일 사건
71 중국혁명의 아버지 손문 - 신해혁명 발발
72 지구 최후의 자연보고, 남극 - 아문센, 남극점 도착
73 세계를 불사른 두 발의 총탄 - 사라예보 사건, 제1차 세계대전 발발
74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 러시아 혁명 발발
75 민족자결주의와 세계평화 - 윌슨, 14개조 평화원칙 제창
76 '파쇼', 로마로 진군 - 무솔리니, 이탈리아 수상 취임
77 '보이지 않는 손'의 파산 - 세계 대공황 발생
78 자유방임주의에서 수정자본주의로 - 루스벨트의 뉴딜정책
79 게르만 족의 세계지배를 위하여 - 히틀러, 독일총통 취임
80 대도하의 영웅들 - 중국 홍군, 대장정 시작
81 노구교 사건 - 중.일전쟁 발발
82 5천만 명이 희생된 사상최대의 비극 - 제2차 세계대전 발발
83 '엄마 따라 갈 거야' - 미국,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
84 국제평화와 안전유지를 위해 - 국제연합 성립
85 불씨 하나가 중원을 불사르다 -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86 한민족을 둘로 가른 비극의 전쟁 - 6.25전쟁 발발
87 떠오르는 제3세계 - 제1차 아시아.아프리카 회의 개최
88 아랍의 바다에 둘러싸인 유태인 섬 - 제3차 중동전쟁 발발
89 우주시대의 개막 - 아폴로 11호, 달 착륙
90 상처입은 거인 - 베트남 전쟁 종결
91 새로운 국제질서, 데탕트 - 중화인민공화국, 유엔가입
92 세계를 뒤흔든 아랍의 자원민족주의 - 제1차 석유파동 발생
93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 고르바초프,, 페레스트로이카 추친
94 새롭게 펼쳐지는 '팍스 아메리카나' -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개시
95 '루마니아 영웅'에서 '독재자'로 - 루마니아, 차우세스쿠 대통령 처형
96 고르바초프로 시작해서 콜로 - 독일 통일
97 아랍 민족주의의 화신 후세인 - 걸프 전쟁 발발
98 핵과 인류의 미래 - 미국, 단거리 핵 폐기 선언
99 현대의 흑사병, 에이즈 - 제4차 세계 에이즈 날
100 사그라드는 현존 사회주의 - 소연방해체, 독립국가공동체 출범
 
 
1. 원숭이로부터 인간으로-최초의 인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약 200만년 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250만년 전/한반도의 윤곽 형성
 
1859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한권의 책이 발표되었다. 영국 사람 찰스다윈이 쓴 '종의 기원'이 그것이다. 이 책은 인간에 대한 종전의 생각을 뿌리째 뒤흔드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인간은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 원숭이로부터 진화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진화론은 곧 학자들간에 논란의 대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종교계에도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신에 대한 모독이요, 기독교의 권위에 도전하는 범죄행위라는 비난이 물끓듯했다. 따라서 진화론은 금기시 되었으며, 학생들에게 진화론을 가르친 교사는 재판정에 서야 했다.
최근의 분자생물학 연구에 따르면, 인간과  침팬지가 갈라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5,6백만 년 전이라고 한다. 그 이전의 존재, 즉 인간과 침팬지의 공동의 조상은 누구일까? 바로 원숭이다. 그럼 원숭이에서 어떻게 인간으로 진화가 이루어졌는지 보기로 하자.
제1보는 직립보행이었다. 본디 원숭이는 나무 위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기후조건이 급변하였다. 빙하기가 닥쳤던 것이다. 빙하기를 맞은 지구는 열대지방에서는 약 5도, 온대지방에서는 약 10도 정도 기온이 내려갔다. 이 5도에서 10도 정도의 기온변화가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우선 자연환경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원시림이 사라지고 초원이 생겨났다.
삶의 터전이던 삼림이 없어지자, 원숭이들 중 일부는 원시림을 찾아 더 남쪽으로 이동하고, 일부는 땅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땅은 나무 위와는 아주 다른 곳이었다.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했고, 사나운 맹수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던 중, 나뭇가지나 돌멩이 같은 도구를 이용하면 과실을 따고 물고기를 잡거나 혹은 맹수로부터 자신을 지키기가 훨씬 쉽다는 것을 터득했다. 도구를 사용하는 데는 앞발이 주로 쓰였다.
이를 되풀이하는 가운데 점차 앞발은 도구를 사용하는 역할을, 뒷발은 몸을 지탱하는 역할을 맡는 것으로 분화발달하게 되었다. 나아가 뒷발만으로 서서 직립하게끔 되었다. 이때부터 상체는 자유로워지고 시야가 넓어졌다. 이로써 원숭이로부터 인간으로 진화하는 결정적인 일보가 내디뎌진 것이다.
혼자서 대자연에 대응하기엔 너무 약했던 이들은 집단생활을 했다. 그러다보니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가 필요했다. 처음엔 간단한 손짓 몸짓으로 시작하여, 점차 복잡하고 풍부한 음성언어가 발달했다.
손과 언어의 사용은 두뇌발달을 촉진시켰다. 척추가 무거운 두 개골을 지탱해줄 수 있었던 것도 두뇌발달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이런 변화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진행되었다. 인간은 단번에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특징을 갖게 된 것이 아니고, 꾸준한 변화발전을 거듭하는 가운데  원숭이로부터 인간으로 진화한 것이다.
1925년, 아프리카 남부에서 한 화석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약 200만 년 전 도구를 사용했던 최초의 인간이 남긴 자취였다. 학자들은 그 화석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두뇌용적이 현생인류의 3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고 겉모습도 원숭이와 거의 같지만, 직립보행을 하고 조약돌을 깨뜨려 간단한 연모를 만들어 썼다.
그러나 이들이 오늘날 지구상에 살고 있는 현생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은 아니다. 이들은 홍적세 초에 나타나 오랫동안 살다가 환경 조건이 급변함에 따라 그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멸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2. 불의 발견 - 자바 인, 네안데르탈 인 등장(50만년전 - 10만년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70만년 전/구석기 문화 시작(웅기 굴포리, 공주 석장리, 연천 전곡리, 제원 점말동굴, 청원 두루봉 동굴 유적)
 
인간이 또 한 차례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은 '불'을 쓸 줄 알게 되면서 부터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불이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 신화를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올림포스의 주신 제우스는 인간들의 타락과 비행을 못마땅히 여긴 나머지 인간에게서 불을 빼앗았다. 인간은 먹을 것이 없게 되었으며 그나마 구한 것은 날로 먹어야 했다.
인간을 동정한 거인 신 프로메테우스는 이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 천상의 불을 훔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회향나뭇가지를 들고 하늘로 올라가 몰래 불을 붙여 가지고 인간에게 주었다. 인간은 비로소 음식을 익혀 먹고 밤에는 따뜻이 잘 수 있게 되었다. 프로메테우스 덕분에 야만상태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를 안 제우스는 몹시 화가 나서 프로메테우스를 인적 없는 광야의 끝 코카서스 산으로 끌고 가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억센 쇠사슬로 큰 바위에 붙들어매게 했다. 그리고 독수리로 하여금 그의 간을 쪼아먹게 했다. 쪼아 먹힌 간은 다시 생겨났기 때문에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은 매일같이 되풀이되었다.
인간에게 불을 선물하고 대신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그리스 인들은 아테네 시 교외의 벌판에서 제사를 드렸다. 제사 때에는 불을 기념하여 제단에서 성문까지 횃불경주를 했다.
불의 사용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확연히 구분 지은  획기적 사건이다.
처음엔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불을 몹시 무서워했다. 화산이 폭발하거나  번개로 인해 삼림에 불이 붙는 자연현상을 보고 인간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렇지만 타죽은 짐승 고기가 훌륭한 식량이 된다는 것을 깨닫자, 불붙은 나뭇가지를 동굴로 가져와 불씨로 사용하는 지혜를 보였던 것이다.
불은 음식을 익혀먹는 데 유용할 뿐 아니라 추위로부터 몸을 지켜주어서 좋았다. 사나운 맹수들이 근접하지 못하게 막아주는 역할도 했다.
인간은 천연의 불을 이용하는 데서 한발 나아가 인공적으로 불을 피우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아마 석기가 마주칠 때 불꽃이 이는 것을 보고, 마찰에 의해 불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불을 마음대로 사용하기 시작한 인간은 훨씬 나은 생활을 하게끔 되었다.
익힌 음식은 소화가 잘되었으므로 전보다 풍부한 영양섭취를 가능하게 했다. 때문에 근력뿐 아니라 두뇌발달이 촉진되어 두뇌용적이 비약적으로 커졌다.
지금으로부터 약 50-60만 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보다 월등히 진화된 인간이 나타났다.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과 중국 북경 부근에서 발견된 화석에 의하면, 이들의 두뇌용적은 약 1천cc 정도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2배이다.
자바에서 발견된 것은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 북경에서 발견된 것은 시난트로푸스 페키넨시스라고 불리며, 직립해서 살았다 하여 호모에렉투스라고 통칭한다.
그후, 자바인이나 북경인보다 더 진화된 인간이 유럽 일대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독일의 네안데르탈 지방에서 화석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네안데르탈인이라고 통칭되는 이 인간은 약 20만 년 전 유럽 일대에 널리 퍼져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두뇌용적은 약 1,200cc 정도이다.
이들은 불을 쓸 줄 알았던 인간들이었다. 불의 사용, 그것은 산업혁명을 일으킨 증기기관처럼 인류사를 한 걸음 앞으로 성큼 내딛게 한 중대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3. 현생인류 나타나다-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약 4만년 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1만년 전/오늘날의 한반도 지형 형성

 

1879년 에스파냐 북부해안의 알타미라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다.
도망친 여우를 쫓아 어떤 동굴로 들어간 사냥꾼이 거기서 선사시대 것으로 보이는 유물을 발견했다.

다음날, 고고학에 관심을 갖고 있던  영주 돈 마르셀리노가 동굴탐사를 시작했다. 호기심 많은 다섯 살 난 딸 마리아도 따라나섰다. 발굴에 열중한 아버지 곁에서 구경을 하고 있던 마리아는 무심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른거리는 촛불 너머로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소였다.
"아빠, 소예요, 소가 있어요!"
유명한 알타미라 동굴벽화는 이렇게 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그린 주인공은 오늘날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간의 직접적인 조상인 현생인류, 곧 호모 사피엔스이다.
이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4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날 무렵 나타났는데, 네안데르탈 인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진보된 인간이었다. 유럽의 크로마뇽인, 아프리카의 그리말디인, 중국의 주구점 상동인이 대표적인 현생인류이다.
크로마뇽 인은 프랑스 도르도뉴 부근 크로마뇽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이들은 몸집이 가늘고 길며, 두뇌용적이나 모습이 오늘날의 유럽 인과 거의 비슷하다.
이들은 석기뿐 아니라 활과 화살을 만들어 수렵,채집생활을 영위했다. 또 동굴벽에 동물의 모습을 그리거나 여인상을 조각하여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기도 했다.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의 라스코 동굴벽화,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는 크로마뇽인이 남긴 훌륭한 예술작품이다. 특히 라스코 동굴벽화는 소, 사슴, 말, 돼지, 맘모스 등을 붉은색, 검은색, 노란색을 써서 묘사해놓았다.
그리말디인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경 근처 그리말디에서 발견된 것으로 아프리카 흑인의 조상이다. 이들은 아프리카 북부 해안지방에 널리 퍼져 살았다.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이동해 가다가 크로마뇽인에게 격퇴 당했을 거라고 추측되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시작된 이후 기원전 3천년경까지를 이른바 석기시대라 부른다. 인간이 사용한 도구가 무엇이었는가, 무엇으로 생활에 필요한 식량과 물자를 얻었는가에 따라 시대구분을 한 것이다.
석기시대는 도구 제작방법과 모양에 따라 다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로 나뉜다. 구석기시대는 대체로 1만년 전까지로, 자연 그대로의 돌멩이나 그것을 깨뜨려 만든 타제석기를 사용한 시대를 일컫는다. 신석기시대에는 돌을 갈아 보다 정교하게 만든 마제석기를 사용했다.
크로마뇽인, 그리말디인, 중국의 상동인은 모두 구석기시대 문화의 주인공들이다. 
   
4. 농업혁명 일어나다-농경, 목축의 시작(기원전 7천년경)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8천년 전/신석기 문화 시작(웅기, 만포진, 무산 동삼동 유적, 원시 무늬없는 토기 사용)
 
18세기에 일어난 산업혁명은  인간생활을 근본적으로 뒤바꾸어놓았다.
산업혁명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발달된 물질문명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기원전 7천년, 산업혁명과 맞먹는 중요한 변화가 인류사에 일어났다. 이를 농업혁명이라고 한다.
당시는 신석기 시대, 즉 돌을 갈아 만든 연모로 사냥을 하고 나무열매를 따먹으며 살았던 때이다. 이 무렵, 빙히가기 끝나고 기후가 다시 따뜻해지자, 지금까지 사냥감이었던 동물들이 대거 이동하게 되었다. 먹을 것이 없어진 인간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이 농경과 목축이다.
먹고 버린 식물의 씨에서 싹이 터서 자라 열매맺는 것을 본 인간은 먹을 수 있는 식물의 씨를 심으면 많은 식량을 확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냈다. 이들은 돌도끼, 돌삽으로  땅을 파고 야생밀, 보리 들을 심었다.
최초의 농경활동이었던 것이다.
그와 함께 목축도 시작했다. 울타리를 치고 잡아온 들소며 야생말, 멧돼지, 사슴들을 기르다가 식량이 모자랄 때 잡아먹었다. 어떤 동물은 농사를 짓거나 짐을 운반할 때 쓰기도 했다.
농업혁명이 가져다준 첫 번째 변화는 먹을 것을 찾아 떠돌지 않고 한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인간사회에 불평등이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원시사회는 평등사회였다. 그러나 평등은 빈곤의 평등, 즉 먹을 것이 적기 때문에 이루어진 평등이었다.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당시에는 각자가 구해온 먹을 것을 모아 똑같이 나누어 먹지 않으면 누군가 굶어죽게 되고, 그것은 곧 집단의 힘이 약화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농업혁명 덕택에 식량이 훨씬 풍부해지고 이젠 충분히 먹고도 남아 저축할 수 있게끔 되었다. 문제는 이 먹고 남은 것, 즉 잉여생산물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였다.
불행히도 잉여생산물은 더 이상 집단 공동의 것이 되지 못했다. 한 개인 혹은 한 가족이 그것을 '사유'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사유재산제의 시초이다. 이로써 평등은 깨어졌다. 빈부격차가 생기고 신분 지위의 고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류사에 처음으로 계급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겼다. 원시사회는 남녀 사이도 평등한 사회였다. 당시는 자식의 혈통이 어머니를 통해서만 확인되는 모계사회였고, 인간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노동력이었으므로, 임신, 출산, 육아라는 여성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고 거룩한 일로 여겨졌다.
여성의 임신, 출산은 공동체 전체의 경사였고, 여성의 일은 지금처럼 한 집안에 국한된 가사노동이 아니라 공동체의 살림을 유지하는 사회적 노동이었다. 또한 남성이 해오는 사냥보다는 여성이 맡아 하는 채집활동이 보다 더 안정된 식량확보 방법이기도 했다.
그런데 농경과 목축이 남성의 일이 되고, 거기서 생겨난 잉여생산물을 주로 남성이 '사유'하게 되면서부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사유재산의 주인인 된 남성은 그것을 남 아닌 자기 자식에게 물려주고자 했다.
그러려면 자신의 아들이란 확인이 필요했으므로, 여성에게 다른 남성과의 관계를 금지시키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여성은 정조를 생명처럼 여겨야 한다는 새로운 도덕관념이 등장하게 되었다. 여성은 집안에서 한 남성만을 위해 일하고 그의 아들을 낳아 대를 잇는 것을 최고의 임무로 여기며 사는 열등한 존재로 떨어지고 말았다.
인류의 역사를 200만 년이라고 하면, 그중 199만 3천 년 동안 인간은 평등한 원시사회에 살고 있었다. 비록 배고픈 평등이었을지언정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사회의 불평등은 그리 역사가 오래지 않은 셈이다. 
   
5. 큰 강 유역에서 문명이 일어나다-세계 4대 문명의 성립(기원전 3천년경)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4천년 전/신석기 문화 발전(서울 암사동 유적, 빗살무늬 토기 사용)
 
세계 최초로 농경생활이 시작된 곳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다.
메소포타미아란 그리스 어로 '두 강의 사이'라는 뜻인데,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이른바 '비옥한  초승달 지역' 지금의 이라크 지방을 말한다.
이 지역에는 원시 작물이 풍부히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농경이 일찍 발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 농경생활은 점차 퍼져나가 인류의 4대 문명을 탄생시켰다.
고대문명은 기후가 따뜻하고 큰 강이 흐르는 지역에서 일어났다. 큰 강이 흐르고 있는 지역은 비가 오면 홍수를 일으키는 한편, 상류로부터 기름진 흙을 실어다 주변에 퍼뜨려줌으로써 토질이 비옥해져서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농사가 잘되면 식량이 풍부해지고 생활에 여유가 생겨 자연 다양한 문화가 꽃필 수 있었다.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나일 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 인도 인더스 강 유역의 인더스 문명, 중국 황하유역의 황하문명을 세계 4대 문명이라 한다.
이 지역에서는 홍수를 막기 위해 둑을 쌓고 저수지와 운하를 만드는 치수사업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대규모 공사는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의 힘으로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집단과 집단간의 협동과 통일을 촉진시켰고, 그 결과 통일된 정치조직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가 세워졌다.
왕은 막강한 권력을 지닌 절대군주인 동시에 신의 아들로서 백성위에 군림했다. 대표적인 예가 이집트이다.
국왕 파라오는 태양신의 아들, 살아  있는 신으로 간주되었으며, 그의 권한은 실로 절대적이었다. 파라오는 죽으면 나일강의 신 오시리스와 한몸이 되어 나일강의 범람을 다스리는 신이 된다고 믿어졌다.
피라미드는 이렇게 위대한 파라오를위한 무덤이요, 사후 거처였던 것이다.

미라 역시 육신이 죽은 뒤에도 살아 남을 영혼을 위한 것이었다. 이집트 인들의 미라 만드는 기술은 지금까지도 불가사의한 일로 여겨지고 있다.
내장을 제거하고 특수한 방부제와 향료를 채워넣어 붕대로 싸맨 미라, 그중에는 얼굴까지 그대로 보존된 것도 있다고 한다.
비슷한 일은 중국에서도 일어났다. 중국의 전설적 통치자로 입에 오르내리는 삼황오제 시대의 요, 순, 우 임금이야말로 치수관개 사업에 성공을 거둔 인물들이다. 우는 황하의 범람을 다스린 공로로 순 임금에게 발탁되어 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 시대의 인간은 청동기를 만들어 쓰고 문자도 갖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원주민인 수메르인은 그림문자를 만들어 썼는데, 이 문자는 쓰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뿐 아니라 표현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쐐기 모양의 표식으로 글자를 나타내는 설형문자를 고안해냈다.
이들은 갈대로 만든 펜으로 점토판에 수많은 전설과 영웅들의 모험담을 적어 불에 구워서 보존했다. 나중에 페니키아인들이 이 설형문자를 개량해서 좀더 간단하고 쉽게 만들어 썼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알파벳의 시조이다.
수메르인은 퍽 발달된 문명의 주인공이었다. 그들은 문자뿐 아니라 농업에 필요한 점성술, 태음력, 60진법 등 산수와 기하학도 발전시켰다.
이집트 인들이 만들어 쓴 상형문자는 설형문자보다 한결 유여하다. 그 까닭은 이집트에는 파피루스라는 갈대가 풍부하여 거기다 기록을 했는데, 이 파피루스는 질이 좋아 글씨 쓰기가 훨씬 부드러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자가 발명되어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이 시점을 기준으로 그 이전을 선사시대, 이후를 역사시대라고 부른다. 
 
6. 아테네와 스파르타-그리스, 폴리스 성립(기원전 8세기)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기원전 2333년/단군, 아사달에 도읍하고 고조선 건국
 
기원전 2천년 경, 지중해 동쪽 에게해 일대에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 태어났다. 이는 오리엔트 선진문명, 특히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통칭 에게문명이라고  불린다. 크레타, 미케네, 티린스, 트로이 등이 이 문명을 꽃피운 곳이다.
이 문명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사람은 독일의 슐리만이다. 그는 어린 시절 트로이 멸망을 노래한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읽고 유적발굴을 결심, 어른이 되자 그동안 모은 전재산을 트로이 발굴에 쏟아넣어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트로이가 망한 지 수백 년이 흐른 뒤인 기원전 8세기 무렵, 흩어져 살던 여러 촌락이 모여 살게 되었다. 이것이 폴리스의 시작이다. 폴리스는 작은 규모의 도시국가로서, 인구는 수백 명 혹은 수천 명 정도이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완전한 독립국가였다.
폴리스의 중심부에는 아크로폴리스라고 부르는 높은 언덕이 있고, 그곳에 그 도시의 수호신을 모신 신전이 자리잡았다. 언덕 아래에는 아고라, 즉 광장이 있어서 시장이 열리곤 했다. 도시 외곽은 넓은 전원지대이고, 여기서 농사를 지어 폴리스의 생활을 유지했다.
고대 그리스에는 2백 개에 달하는 폴리스들이 있었으며, 식민지까지 합하면 약 1천 개 이상을 헤아렸다. 4년마다 올림피아에서 열리는 제우스 신의 제전 때면 각 폴리스 대표들이 모여 체육경기 대회를 열기도 했지만, 폴리스들은 끊임없이 서로 대립, 항쟁했다. 그중 가장 세력이 컸던 폴리스가 아테네와 스파르타이다.
아테네는 직접 민주정치를 시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에클레시아라고 부른 민회에서 입법, 사법, 행정, 군사에 관한 제반사항을 결정하며, 관직은 시민 중에서 선출되었다. 임기는 1년, 재임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민이면 모두 기회가 돌아갔다.
그러나 이는 현대적 의미의 민주주의와는 아주 다르다. 민회에 참가할 수 있는 사람이 '시민'으로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민이란, '양친이 모두 아테네 태생인 성년 남자'를 뜻했다. 이런 자격조건을 갖춘 아테네 시민의 수는 전 인구의 14%에 불과했다. 인구의 43%를 차지하는 노예를 비롯한 여자, 외국인은 시민에 속하지 않았고, 따라서 이 민주정치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엄격한 군대식 교육의 대명사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서쪽 라코니아 지방에 세워진 폴리스로서, 그리스의 패권을 놓고 아테네와 끊임없이 주도권 싸움을 벌였다.
스파르타 역시 소수의 시민과 다수의 노예로 구성되어 있었다. 시민은 무장할 수 있는 남자 약 1만 명 정도로, 이들은 생산활동을 전혀 하지않고 어려서부터 국가의 관리 아래 훌륭한 무사가 되는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스파르타식 훈련이란 여기서 나온 말이다.
어린이들은 7살이 부모 곁을 떠나 국가가 관리하는 교육기관에서 엄격한 교육과 훈련을 받는다. 추위와 더위를 잘 견딜 수 있고 오랫동안 먹지 않아도 참을 수 있는 체력단련, 조국을 위해서는 언제라도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애국심, 불굴의 투지,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훌륭한 투사를 기르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훈련은 30살까지 계속되었고, 그후엔 장교가 되어 조국에 봉사했다.
여성들도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강철 같은 정신과 건강한 육체로 튼튼한 아이를 낳아 조국에 바치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어떤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 8명들의 모두 전쟁터에서 전사하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외쳤다 한다.
'스파르타여, 나는 너를 위해 죽으라고 8명의 아들을 낳은 것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조국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스파르타 시민만의 특권이자 명예였다.
노예인 헬로트는 모두 18만 명이었는데, 이들은 국유농장에서 농사를 지어 생산물을 시민에게 바쳤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여러 면에서 좋은 대조를 이룬다. 아테네가 제한적이지만 민주정치를 한 데 대해 스파르타는 보다 귀족 중심의 정치체제였고, 아테네는 상공업 중심인 데 반해 스파르타는 농업중심이었다. 아테네는 개인소유의 노예제가  발달했지만 스파르타는
국유노예가 대부분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아테네 형과 스파르타 형으로 대별된다. 화려한 그리스 문화를 꽃피운 것은 그중 아테네 형의 폴리스들이었다. 
  
7. 만민에게 자비와 구원을-인도에서 불교 탄생(기원전 6세기)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기원전 1000년 경/청동기 문화 시작(무늬없는 토기 사용)
 
기원전 6세기,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중국, 인도, 페르시아, 그리스 등 세계 각지에서 여러 사상가와 종교의 창시자들이 나타났다. 인도에서는 석가와 마히비라가, 중국에서는 공자와 노자, 그리고 제자백가라 불리는 여러 사상가들이, 페르시아에선 자라투스트라가, 그리스에선 소크라테스가 각각 태어나 활동했다. 기원전 6세기는 종교와 사상의 세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이들은 모두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더 나은 삶을 원하면서 대중을 각성시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노력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현실의 죄악을 고발하는 데 주저하지 않은 혁신주의자들이었다.
석가야말로 이 시대에 활약한 가장 뛰어난 사상가요  종교가로 손꼽힐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네팔 남쪽 국경 근처의 히말라야 산록에서 태어난 그는 본명이 고타마 싯다르타이며, 작은 왕국의 황태자였다. 그의 어머니 마야는 '보름달처럼 뭇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대지와 같이 의지가 굳으며, 냉철하고 연꽃처럼 마음이 순결한 부인'이었다.
싯다르타는 부귀와 영화가 약속된 왕궁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어느 날 왕궁 바깥의 사람들이 가난과 병과 죽음의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자신이 몸담고 있는 궁전의 호화스러움이나 안락함에 안주하고 살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이미 결혼을 했고,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런 아이까지 두었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고뇌를 모른 체 떨구어버릴 수가 없었다.
마침내 싯다르타는 어느 날 밤 몰래 왕궁을 빠져나왔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겨두고, 삶의 의미와 구원의 해답을 찾기 위한 구도의 길을 떠난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는 비하르 지방에 있는 어느 보리수 나무 밑에서 진리를 깨우쳤다. 그동안 그는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고, 온갖 불의와 악이 판치는 것을 보았으며 그 때문에 죄 없고 선량한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는지 목격했다.
그는 단식과 고행도 서슴지 않았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언지, 인간의 희로애락에 시달리지 않고 생의 주인으로서 자유롭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 모든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 그는 오랫동안 방황하고 괴로워했다.
진리를 깨우친 그는 불타가 되었다. 불타란 '도를 깨친 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전도를 시작했다.
당시 인도는 엄격한 신분사회였다. 사람들은 네 가지 계급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제일 높은 계급은 브라만, 곧 승려이고, 두 번째는 크샤트리아, 왕족이나 귀족, 관리들이 이에 속한다. 세 번째는 평민인 바이샤, 맨 밑바닥은 원주민인 노예로서 수드라라고 했다. 이  신분제도를 카스트제라고 부른다. 카스트란 포르투갈 어로 혈통, 종을 의미한다. 사실 이 제도는 원주민인 드라비다 족을 몰아내고 인도에 정착한 아리아 족이 원주민을 지배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브라만교 역시 이들 아리아족이 만든 종교이다.
이 무렵, 브르만 승려들은 형식과 공물에만 사로잡혀 더없이 타락해 있었다. 극심한 빈부격차 때문에 사람들의 불만은 가득 차 올랐다.
석가는 타락한 승려들과 낡은 사상을 공격했다.
그가 가르친 '자비'란 곧 만민평등의 사상이었다. 신분 계급이나 재물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그의 가르침은 억눌려 살아온 수드라, 바이샤 계급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실제로 그의 수제자들 가운데는 수드라 출신이 많다.
그후 불교는 실론, 중국을 거쳐 한반도, 일본, 동남아 일대로 전파되어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갖고 있는 세계적 종교의 하나가 되었다. 
  
8. 공자의 '인', 노자의 '도'-중국, 제자백가의 출현(기원전 770-22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기원전 5세기경/고조선, 요서 지방까지 진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수많은 사상가들이 활약한 시대였다. 공자, 맹자, 노자, 장자를 비롯하여 묵자, 순자, 한비자, 손자 등 여러 탁월한 사상가들이 각기 학파를 이루어 활약했다. 이들을 통틀어 제자백가라 부른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구, 자는 중니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란 그는 관직에 투신, 50살까지 관리로 일했다.
그후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13년간 각국을 돌아다녔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성공하지 못하고 노나라로 돌아왔다. 돌아온지 3년만인 기원전 479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이상은 주의 문물제도, 특히 '예'를 복원시키는 것이었으며, 그를 위한 방도가 곧 '인'의 실현이었다. '인'이란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효', 동생의 형에 대한 '제'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 효제를 가족, 사회, 국가로 넓혀나가면 '예'를 회복하고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자의 '인'은 인간간의 차별을 인정하는 차별적인 '인', 이른바 '별애'였다.
노자는 주나라 사람 혹은 초나라 사람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혹은 공자 이전이라고 하고, 혹은 공자보다 훨씬 뒤의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의 사상은 '노자'라는 책으로 남아 있다. 이 책은 일명 '도덕경'이라고 한다.
노자의 사상은 '도'로 대표된다. 도란 우주만물의 본체로서, 이 도를 얻는 길은 인이나 예 같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무위작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무위'란 인위적 또는 인공적이 아닌 자연스런 행위를 뜻한다. 그리고 성군은 바로 이 '무위'로써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노자의 사상을 발전시킨 사람이 장자이다. 그는 기원전 396년 송나라에서 태어났다. 무척 박학다식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저서 '장자'는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는 애독서이다.
공자가 주의 문물제도를 이상으로 삼았던 복고주의자라면, 노자와 장자는 그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혁신주의자들이었다.
공자의 사상은 이후 종교화되어 유교가  되었으며, 노장 사상은 민간신앙과 결합, 도교를 낳았다. 유가와 도가는 중국 사상의 양대 흐름이다. 흥미 있는 사실은 전자는 지배자의 사상을, 후자는 피지배자의 사상을 각각 대변한다는 점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제자백가가 활약한 춘추전국시대는 평화시대가 아니라 약육강식과 군웅할거의 시대였다. 제자백가의 사상은 혼란한 중국 천하를 바로잡으려는 현실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춘추전국시대란, 기원전 770년 중국 천하를 지배하던 주나라가 계속된 왕실의 내분과 이민족의 침입으로 도읍을 낙양으로 옮기면서 지도력을 잃고 이름뿐인 존재가 되자, 각처에서 내노라 하는 제후들이 나타나 천하를 제패하고자 각축전을 벌이던 시대를 말한다.
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403년까지를 춘추시대, 이후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를 전국시대라 한다. 이는 각각 당시의 역사책인 '춘추' '전국책'에서 따온 이름이다. 춘추오패니 전국칠웅이니 하는 말은 이 혼란기를 주름잡던 영웅들을 일컫는 이름이다. 
   
9. 오리엔트와 그리스 세계의 투쟁-페르시아 전쟁 발발(기원전 492-47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기원전 400년경/철기문화 시작


기원전 550년, 지금의 이란 고원에서 페르시아가 일어났다. 페르시아의 최전성기는 세 번째 통치자 다리우스 1세 때이다.
다리우스 1세는 사분오열되었던 오리엔트 세계를 통일하고 인더스강에서 이집트, 마케도니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지중해를 눈앞에 둔 페르시아가 해상권을 둘러싸고 그리스와 일대 격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페르시아 전쟁이다.
이 전쟁은 사실상 오리엔트 세계와 그리스 세계 중 어느 쪽이 향후 지중해 일대의 주도권을 쥐느냐 하는 중대한 결전이었다.
싸움의 빌미는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 식민도시들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페르시아의 압제에 반발하고 나선 이들 도시를 아테네가 원조하자, 다리우스 1세가 이를 구실삼아 그리스 원정을 단행한 것이다.
기원전 492년, 다리우스 1세는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부터 해륙양면으로 그리스 본토를 공격했다. 그러나 때마침 불어온 폭풍으로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서 되돌아가고 말았다.
2년 뒤, 이번에는 에게 해를 건너 직접 아테네로 쳐들어갔다. 페르시아 군은 아테네 북동쪽 26마일 지점인 마라톤 평원에 상륙했다. 겁에 질린 아테네인들은 항복하자는 쪽과 싸우자는 쪽으로 의견이 갈라진 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때 유명한 정치가이자 웅변가 테미스토클레스가 나섰다.
'우리의 아테네를 자유의 도시로 지키든지, 항복해서 시민들 모두 노예가 되든지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다. 여러분은 노예가 되길 원하는가?'
그의 웅변에 용기백배한 시민들은 총동원하여 중장보병으로 전선에 나섰다. 그렇지만 중과부적 이윽고 사령관 밀티아데스는 적을 골짜기로 유인, 양쪽에서 협공하는 전술을 썼다. 결국, 페르시아 군은 6,4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후퇴하고 말았다. 아테네 군의 피해는 전사 192명뿐이었다.

그날, 전투 결과를 걱정하며 광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 앞에 기진맥진한 모습의 전령 한 사람이 나타났다.
'이겼다!'
그는 이 한 마디를 남기고 그만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아테네 인들에게 승리의 소식을 알리고자 26마일을 쉬지 않고 달려온 탓이었다. 이 전령을 기리는 뜻에서 생긴 것이 바로 마라톤 경주이다. 42.195km라는 마라톤 경주 거리는 이 병사가 달려온 거리를 기념한 것이다.
10년 뒤인 기원전 480년, 다리우스는 이미 사망했고, 그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왔다. 그리스 군은 육지에서 테르모필레, 해상에서는 살라미스 섬을 결전지로 정하고 적을 맞이했다.
테르모필레 방어의 총지휘관은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였다. 그가 이끄는 7천 병사들은 페르시아 대군을 맞아 끝까지 싸우다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스파르타 군의 분투로 시간을 벌어 전열을 가다듬은 아테네 군은 살라미스의 좁은 수로로 페르시아 함대를 유인, 대패시켰다. 게다가 때마침 불어온 폭풍우로 페르시아 함대는 4분의 3이 가라앉고 말았다.
살라미스 해전은 전국을 결정지은 중요한 전투였다. 결국 전쟁은 이듬해 폴리스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전쟁 후 아테네는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재침에 대비, 델로스 동맹을 조직했다. 이 동맹에는 무려 200개에 달하는 폴리스들이 참가했는데, 아테네는 이들이 내는 연금으로 대함대를 만들고 맹주가 되어 절대적인 지도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동맹의 성격은 점차 변질되어갔다. 연금은 아테네에 바치는 공물처럼 되었고, 각 폴리스들이 아테네의 지배 아래 들면서 아테네 제국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무렵 아테네를 통치한 사람이 페리클레스이다. 페리클레스는 동맹시들이 내는 공물을 기반으로 해서 아테네를 번영시켰다. 그리스 고전문화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문화유산들은 대부분 이때의 것이다.
한편, 아테네의 독주에 반발한 스파르타는 따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조직했다. 사실 페르시아 대군을 맞아 왕 이하 전원이 목숨을 바친 스파르타로서는 아테네의 독주가 괘씸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싸우기 시작했다. 폴리스들은 제각기 아테네 혹은 스파르타 편이 되어 전쟁에 휘말렸다. 기원전 405년, 스파르타의 명장 리산드로스가 이끄는 해군이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아테네 해군을 격파하고, 이듬해 아테네를 함락시켰다. 27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 격동의 현장을 생생히 그리고 있는 두 개의 유명한 역사책이 있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가 쓴 '페르시아 전쟁사'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그것이다. 
   
10.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더-알렉산더의 동방원정(기원전 334-323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기원전 300년경/연이 요동에 장성 쌓음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서로 싸우는 동안 북쪽에서 마케도니아가 세력을 키워 남하하기 시작했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은 그리스를 통일하고 페르시아를 정벌할 뜻을 세웠지만, 얼마 후 암살당하고 말았다.

뒤를 이어 아들 알렉산더가 왕위에 올랐다. 스무 살의 젊은 나이였다.
알렉산더는 부왕의 뜻을 이어받아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다. 기원전 334년 보병 3만, 기병 5천을 이끌고 자신이 직접 선두에 서서 페르시아로 향한 것이다. 당시 페르시아는 다리우스 3세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져 있었다.

알렉산더는 소아시아 지방의 고르디온이란 곳에 이르렀다. 그 지방에는 신전 기두에 매어져 있는 복잡한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를 지배할 것이란 전설이 전해내려오고 있었다. 그 전설을 들은 알렉산더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칼을 빼어 단숨에 매듭을 내리쳤다. 결국 그는 그 칼로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소아시를 점령한 알렉산더는 이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을 격멸한 뒤, 페니키아 연안, 아프리카 북쪽 해안을 평정하여 후방을 다진 다음 페르시아 본토로 쳐들어갔다.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더에게 대패하고 도주하다가 신하인 베소스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수도 수사와 페르세폴리스를 불사른 뒤, 멈추지 않고 중앙 아시아로 진격, 인더스 강 부근까지 나아갔다. 그는 갠지스 강까지 계속 공격할 생각이었지만, 너무 오랜 전쟁에 병사들은 지쳐 있었다. 마침내 알렉산더는 원정을 중단, 기원정 324년 바빌론으로
돌아왔다. 알렉산더가 10년 동안 정복한 곳은 서쪽으로는 마케도니아, 동쪽은 인더스 강, 남은 이집트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더의 죽음은 몹시도 급작스러웠다.
바빌론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열병을 앓다가 사망한 것이다. 그의 나이 33살이었다.
알렉산더의 꿈은 지중해와 오리엔트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는 2만km에 달하는 원정길에 여러 학자들을 동행시켰다. 그리고 정복지마다 새 도시를 건설하고 알렉사드리아라 이름붙인 다음 그리스의 학자, 예술가, 상인 들을 이주케 했다.
또 그리스 인과 페르시아 인 사이의 결혼을 적극 장려, 대규모의 합동 결혼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그 자신 다리우스 3세의 딸을 제2의 부인으로 삼았다. 그리고  페르시아 청년들을 그리스식으로 교육하는 한편, 페르시아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알렉산더는 12살 때부터 3년 동안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외국인은 노예가 되기 위해 생긴 것이다.
'그리스 인은 부모형제처럼 대하고, 외국인은 짐승처럼 취급하라.'고 가르쳤다 한다. 비단 아리스토텔레스뿐 아니라 우리가 아주 위대하다고 알고 있는 당시의 철학자들이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노예와  외국인, 여자는 인간, 즉 시민의 대열에 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철학이란 것이 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자유로운' 시민들의 전유물이었던 탓이기도 하다.
그런데 알렉산더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그는 '모든 사람은 세게를 자기 모국처럼 생각하라. 선한 사람은 부모와 같이 대하고 악한 사람은 짐승처럼 취급하라'고 말했다 한다.
알렉산더의 동서융합 정책은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켰다. 이를 헬레니즘 문화라고 부른다. 헬레니즘 문화의 특색은 세계동포주의와 개인주의이다.
얼핏 상반된 두 성격처럼 여겨지지만, 이는 실인즉 폴리스 문화의 극복이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즉 고립된 폴리스를 뛰어넘어 좀더 큰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고, 폴리스라는 공동체 중심의 사고로부터 개인 중심의 사고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헬레니즘이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한편으론 로마를 통해 서유럽으로 전해져서 유럽 문화의 근간이 되었다. 오늘날 유럽 문화의 기저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두 흐름이다.
한편으로는 인도에 영향을 미쳐 간다라 양식이란 예술 조류를 형성했다.
이 간다라 예술은 서역지방을 거쳐 중국, 한국,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이룬 대제국은 뒤를 이을 후계자가 없어 혼란에 빠져버렸다. 그의 아내와 자식은 모두 죽음을 당했으며, 수십 년간 후계자 전쟁이 계속되다가 결국 대제국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 세 나라로 갈라지고 말았다.